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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화원 - 출간 10주년 기념 개정합본판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8월
평점 :
'역사 책에는 왜 여자가 없을까?' 얼마 전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책 한 권을 읽었다. 옛날 옛적에는 여자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여자는 남자보다 지능이 열등할까? 여자는 남자보다 신체 능력이 떨어질까? 여자는 남자보다 게으르고 무기력할까? 그렇지 않고서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 책에 등장하는 여자의 수가 남자의 수에 비해 월등히 적을 리가 없다는 저자의 말은, 여자라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역사로부터 배제되고 감춰지고 삭제된 여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이정명의 소설 <바람의 화원>을 출간된 지 10년 만에 개정합본판으로 뒤늦게 읽으며 우리 역사에도 여자라는 이유로 감춰지고 삭제된 위인이 부지기수이겠다는 깨달음을 뒤늦게 얻었다. 소설의 중심인물은 불타는 예술혼을 지녔으나 당대의 관습과 화풍에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답답증을 느끼며 살아야 했던 도화서 화원 김홍도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재능을 가졌지만 도발적인 성격 탓에 매번 세파에 부딪히는 신참 화원 신윤복. 작가는 조선을 대표하는 두 화가의 작품과 그들에 대한 기록으로부터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으나 끝내 역사에서 가려진 한 인간을 상상했다.
김홍도와 신윤복은 같은 화원 출신이고 비슷한 화풍을 익히고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닮은 점보다 다른 점이 눈에 띈다. 김홍도는 조선의 르네상스기인 영조와 정조 시대에 활약했고, 20대에 이미 영조의 어진과 정조(당시에는 왕세자)의 초상을 그린 만큼 생애에 관한 기록이 소상한 편이다. 반면 신윤복은 조부와 부친의 뒤를 이어 도화서 화원이 되었지만 속된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로 쫓겨났다는 기록만 있을 뿐,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드물다. 김홍도는 서민의 일상을 담은 그림을 많이 그린 반면, 신윤복은 양반의 위선과 모순을 고발하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작가는 김홍도와 신윤복이 당대의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가까웠을 법 하지만 끝내 멀어진 까닭을 신윤복의 대표작 중 하나인 <미인도>를 통해 상상했다. 작가의 상상 속에서 신윤복은 평생 그림자로 살았던 사람이다. 출신을 부정해야 했던 사람이다. 진짜 이름을 감춰야 했던 사람이다. 길러준 아버지와 집안의 영달을 위해 그림 그리는 기계가 되어야 했던 사람이다. 왕위를 둘러싼 다툼과 생부가 얽힌 살인 사건을 해결하고도 그 공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다. 살기 위해 죽어야 했던 사람이다. 죽어야 하는데 죽을 수 없어서 사라진 사람이다.
소설의 대단원에서 윤복의 진실을 알게 된 홍도는 윤복의 그림이 당대의 그 어떤 화가의 그림보다 아름답고 솔직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그림자로 살아야 하는 윤복은 타고난 아름다움을 뽐내지도 못하고 가슴에 맺힌 말을 솔직하게 꺼낼 수도 없었다. 오로지 그림 안에서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고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되새겼다. 홍도는 오래전 "그린다는 것은 무엇이냐?"라고 윤복에게 물었을 때, 윤복이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그림이 되고, 그림은 그리움을 부르지요."라고 답한 까닭을 그제야 이해한다. 윤복의 눈길이 머무른 곳은 정향이 아니라 정향일 수 없는 자기 자신임을 알고 가슴을 친다.
"그림이 뛰어난 것은 그리는 자의 사랑이 깃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군가를 진정 사랑한다면 그 눈에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이 보일 것입니다." (이정명, <바람의 화원>, 479쪽)
홍도의 눈에 비친 윤복은 비운을 타고난 천재 화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복은 비극적인 운명을 뛰어넘어 누구보다 강하고 자유롭게 살다 간 예술가였다. 여자는 아버지의 딸, 지아비의 아내, 아들의 어머니로만 존재할 뿐 여자 자신으로는 존재할 수 없었던 시대에 그 어떤 것도 되지 않기를 선택했다. '한 나라의 국모조차 변변한 초상을 지니지 못하는' 세상에서 윤복은 직접 그린 초상 한 폭을 남겼다. 홍도는 자신이 윤복을 놓아주었다고 여겼을지 모르지만, 윤복은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 그 어떤 곳에도 머무르지 않았다. 스스로 있기로 한 곳이 아닌 한.
자신의 초상을 그리고도 그것이 자신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사람. 그림 속에서만 비로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었던 사람. 역사 책에는 그 사람의 실체를 추측할 만한 단서가 남아 있지 않지만, 역사 책에 남지 않은 진실이 그가 남긴 작품 속에 남아 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그것을 영영 보지 못하거나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있지는 않을까. 허구인지 사실인지 분간하기 힘든 이 소설 너머에서 윤복은 울고 있을까 웃고 있을까.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거든 내가 그린 그림을 보라는 말이 들리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