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 - 진짜 여행에 대한 인문학의 생각
정지우 지음 / 우연의바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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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뒤늦은 여름휴가 겸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6년 만에 가는 해외여행인지라 출발하기 한 달 전부터 가이드북이며 일본 관련 서적을 열심히 찾아 읽었다. 인터넷에서 여행 후기도 하루에 열 편, 스무 편씩 찾아봤다. 노트에 필기도 하고, 프린트도 하고 정신없이 공부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상한 걸 발견했다. 다들 똑같은 곳에 가서 비슷한 사진을 찍고, 똑같은 곳에 가서 비슷한 음식을 먹고, 비슷한 후기를 쓰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런 걸 보고 여행을 한다면 나 또한 이들과 똑같은 곳에 가서 똑같은 후기를 남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오싹했다. 나는 여행을 하려고 했지, 답사를 하려고 한 게 아닌데.


  한국인 여행객들은 순서와 머무는 시간만 조금 다를 뿐, 거의 동일한 여행 루트와 볼거리, 그리고 같은 목적 속에서 움직였다. 마치 똑같은 여행 컨설팅 회사에 의뢰하기라도 한 듯, 사람들이 가는 도시, 그 도시에서 보는 것, 하는 것이 거의 똑같았다. 피렌체에서는 가죽 쇼핑을 하고, 스위스에 가면 골든패스를 타고, 독일에 가면 학센을 먹는 식이었다. ... (중략)... 나는 보다 다양한 자기만의 여행, 그 속에서 느낀 것, 체험한 것, 나아가 자기 자신과 이 여행에 대해 했던 생각들을 폭넓게 듣고 싶었지만, 조심스레 그런 주제를 던져 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별로 없었다. (p.18)

 

  <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의 저자도 여행을 하면서 비슷한 걸 느꼈다. 외국인 여행객들은 남들과 다른 걸 보고 느끼는 자기만의 여행을 추구하는 반면, 한국인 여행객들은 남들이 가본 곳에 가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볼거리를 보고 맛있다는 음식을 먹길 원한다. '어디 가서 뭘 봤다고 해야 잘 했다고 소문이 날까' 하는 식이다. 이는 여행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여행이란 일상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는 활동이다. 익숙한 공간, 익숙한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생활해보는 경험이다. 그 속에서 뭔가 새로운 걸 느끼고 배우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다.


  저자는 여행의 의미와 목적이 변질된 것은 자본주의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세상은 바야흐로 여행의 시대가 되었다. 소비가 인생 최고의 쾌락으로 인정받는 가운데, 여행은 그중에서 가장 값비싸면서도 가치 있는 소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p.4) 학생들은 방학 때 여행 가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직장인들은 휴가를 가기 위해 회사에 나간다. 지금 뼈빠지게 일을 하는 건 은퇴 후 한가롭게 여행을 다니기 위해서다. 일하면서 여행을 할 수 있는 직업은 최고의 직업이다. 파일럿과 스튜어디스, 여행 작가 같은 직업들이 그렇다. 교사도 좋다. 방학 때마다 몇 달씩 여행을 갈 수 있으니까.


 

  "이제 이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여행이 되어가고 있다. 여행이 없다면 과연 자본주의는 얼마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저 수많은 도시들, 약속의 땅들, 아름다움과 행복이 가득한 천국들로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없다면, 우리는 그렇게 충실히 돈을 버는 일에 몰두할 수 있을까? 언젠가 사랑을 얻으리라는 보장을 믿고 일하던 청년들은 이제 여행을 믿게 되었다. 세상 끝까지의 여행, 고급 호텔에서의 와인 한 잔, 크루즈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밤은 우리 욕망의 '최종 목적지'에서 손짓하고 있다. (p.7)


  오늘날, 특히 한국에서는 여행이 하나의 상품, 소비 대상으로 전락했지만, 잘만 하면 여행의 본질에 가까운 진정한 여행을 할 수도 있다. 저자는 자신의 체험을 예로 든다. 저자는 20대를 통틀어 다양한 여행 경험을 했다. 패키지여행도 해보고 배낭여행도 해보고, 단기 여행도 해보고 100일간의 장기 여행도 해보고, 관광객도 되어보고 인솔자가 되어보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저자는 자신에게 맞는 여행 스타일을 찾아갔다. 패키지여행보다는 배낭여행이, 단기보다는 장기 여행이 잘 맞고, 인솔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행을 하면서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에서 무엇을 얻었나', '여행이 왜 가치 있나', '여행이 왜 좋은가', '여행을 다니며 어떤 생각을 했나'를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가이드북이나 인터넷 후기에 나오는 여행을 따라 하는 '답사' 여행은 이러한 질문을 하기에 부적절하다. 항상 시간과 일정을 생각하고 비용과 효율을 따지는 여행을 할 때도 불가능하다. 지난날의 나를 잊고, 떠나온 일상에 대한 고민과 걱정은 내려두고, 오로지 시공간에 몸을 맡긴 채 천천히 걷고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받아들일 때만이 가능하다. 지난가을, 나는 이런 여행을 했을까. 한 번 깊게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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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책 - 12가지 테마로 읽는 5000년 문명 중국
쑤수양 지음, 심규호 옮김 / 민음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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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차지하는 중국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데도 중국을 수사하는 말은 한정적이다. 13억 대국, 국내총생산 순위 2위, 4대 문명 발상지 중 하나라는 정도?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역사적, 문화적으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도 중국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니 부끄럽다. 해서 읽게 된 책이 <중국책>이다.


  <중국책>은 2007년 '나라의 뛰어난 예술가' 칭호를 받은 바 있는 극작가이자 시인, 소설가인 쑤수양의 저서다. 중국 본토에서 출간된 후 지금까지 무려 1500만 부에 달하는 판매고를 올렸으며, 오늘날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고 싶어 하는 외국인들의 요청으로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일본어 등 15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중국책>이라는 과감한 제목에 걸맞게 이 책은 문명, 역사, 철학, 예술, 경제, 생활 등 12개의 다양한 테마를 통해 중국을 소개한다. 한국과도 관련이 있는 역사는 물론, 한국인에게는 낯선 중국 신화와 문명의 기원, 한자를 비롯한 발명품, 철학, 생활, 경제, 예술 등 다양한 테마를 포괄적으로 다루어 책 한 권으로 중국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중국학 개론 수업을 들은 듯하달까.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1920년 중국에서의 순회강연에서 중국인의 생활방식에 관해 이야기했다.

  "중국인은 특유의 생활 방식을 창안해서 오랜 세월 실천해 왔습니다. 만약 우리 유럽인이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이러한 생활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전 세계가 행복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방식은 투쟁과 개척 그리고 끊임없는 변혁을 요구하므로 만족을 모르고 결국 파괴에 이르게 됩니다. 파괴를 낳는 효율성은 절멸로 이어질 것입니다." (p.181)


  책에는 단순히 중국이란 나라를 소개하는 것을 넘어 중국의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중국의 문명이나 풍속 중에 무엇을 지키고 버릴지에 관한 내용도 자주 나온다. 이는 개혁개방 이후 뒤늦게 서구화와 자본주의를 경험한 중국이 미국과 견줄 정도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상황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태도로 보인다. 80년대에 일본이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을 무렵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재인식하는 과정을 거쳤던 것을 이제는 중국이 반복하는 것이다. 


  저자는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을 인용하며 중국의 문명과 역사 중에는 서양인도 부러워할 만한 자랑스러운 것이 많다, 그러니 지킬 것은 지켜가자는 논지의 주장을 여러 번 제시한다. 이를테면 투쟁과 개척, 변혁 위주의 서양의 생활 방식과 달리 조화와 질서를 중시하는 중국의 생활 방식이 낫다는 것이나, 서양의 가족 관계가 일종의 계약 관계와 비슷한 것과 달리 중국은 혈연뿐 아니라 유교 사상과 인간으로서의 정과 의리로 묶여 있어 좋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어떤 대목은 지나치게 자문화중심적인 면모가 보이기도 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의 근현대사에 대해서는 경제적 성과 위주로만 서술하고 문화대혁명이나 천안문 사태 같은 정치적 사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자국의 무역 정책에 대해서도 국제 경제상의 이유 -를 대지 않고 '중국의 전통문화에 내재한 대의(大義), 대인(大仁) 정신을 발양한 것'이라고 평한 것은 어리둥절했다.  

  

  중국 문명에는 찬란한 역사와 더불어 어두운 과거가 존재한다. 이는 어떤 민족 문명이든 외부 세계와 교류하면서 다른 문명의 정수를 흡수하고 소화해 자기 문명의 유기적 성분으로 융합시켜야만 한다는 진리를 보여 준다. 그래야만 하나의 문명은 갱신을 거듭해 세계 문명의 일부로 우뚝 설 수 있는 것이다. (p.305)  


  저자는 중국이 외부의 문명을 어떻게 수용하고 융합해야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풀어놓았지만, 내가 보기에 중국은 인류 문명에 있어 이미 많은 공을 세웠으며, 저자가 "중국에서 거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라고 한 말이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될 만큼 한자, 제지술, 인쇄술, 화약 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18세기 이후 서양에 패권을 빼앗기긴 했어도 다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잠재력과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앞으로 중국의 발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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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독 그 사람이 힘들다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김세나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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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되니 이런저런 모임이 참 많다. 직장에선 송년회를 하고, 일 년 동안 못 본 학교 동창들도 만나야 하고, 가족 모임이며 각종 경조사까지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줄줄이 이어진다. 이런 모임에 나갈 때마다 반가운 얼굴들을 봐서 좋지만, 이따금 싫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애인 없는 거 뻔히 알면서 애인 있느냐, 왜 없느냐, 무슨 문제 있느냐, 며 꼬치꼬치 캐묻는 선배, 묻지도 않은 연봉 얘길 늘어놓으며 잘 나간다는 걸 과시하는 친구, 좋은 자리 나와서 굳이 남의 험담을 해서 분위기를 흐리는 후배 등등 듣는 사람 기분이며 분위기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에게 넌더리가 난다. 


  남이야 그 말을 듣고 어떤 기분을 느끼든 말든 아무 말이나 내뱉는 '그 사람'. 혹시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는 아닐까? 독일의 심리학자 배르벨 바르데츠키의 저서 <나는 유독 그 사람이 힘들다>에 따르면 인간관계의 고통은 대개 자기애, 즉 나르시시즘(narcissism)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나르시시즘은 우리 내면의 두려움과 불안감에 대한 방어기제로, 마음의 상처와 가치 상실감에 대한 보호가치로 기능"한다고 설명하면서, 오늘날엔 나르시시즘이 몇몇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특수한 병리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고 말한다.


  나르시시즘의 핵심 주제는 인격적인 가치 또는 무가치, 그리고 그 가치를 유지하거나 높이기 위한 온갖 노력에 있다. 나르시스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끼기 위해 언제나 최고가 되려고 한다. 이들은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진 것처럼 행동하지만, 이것은 자신에 대한 마음속 회의감을 감추려는 기만적인 행위일 뿐이다. 자기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고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자신을 추켜세운다거나, 자기가 얼마나 멋진지 다른 사람들에게 애써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나르시스적인 부족함이 있는 것으로, 그것을 최적화된 자기 과시를 통해 상쇄하려고 드는 것에 불과하다. (p.16)


  적절한 자기애는 자존감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과도한 자기애는 자기 내면의 진실한 모습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 뿐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으로 인해 타인을 착취할 가능성이 높다. 애인 없는 내 속을 후벼팠던 그 선배, 자기 잘난 척, 남의 험담을 하느라 분위기 흐리는 건 눈치도 못 챘던 그 친구, 그 후배는 어쩌면 지독한 나르시시스트였는지도 모른다. 헌데 그들뿐일까. 하루가 멀다 하고 SNS에 '뽀샵' 처리를 하도 심하게 해서 눈코입이 잘 보이지도 않는 셀카를 올리거나, 남들 다 일하는 시간에 굳이 명품 쇼핑하고 먹방 순례한 사진을 올리는 사람들의 심리는 나르시시즘과 결코 멀지 않다. 어쩌면 매달 책 몇 권 읽었다, 어디서 무슨 상을 받았다며 자랑하는 나도. 


  나르시시스트를 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타인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발전을 위한 도전 과제로 여기는 것이다. 상처가 되는 말을 던지는 나르시시스트가 가장 나쁘지만, 그가 한 말에 상처를 받는 나에게도 약간의 책임은 있다. 애인 없는 게 내가 평소 공언하는 대로 그렇게 별일이 아니라면 남이 하는 말에 상처를 입을 필요가 없다. 상처를 받았다는 건 사실 나도 속으로는 서른이 넘도록 애인이 없는 현실을 비관적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ㅠㅠ).   

  

  자기 안의 나르시시즘을 달래는 방법으로는 자기 성찰과 자기 제어가 있다. 분노를 느끼거나 모욕을 받았을 때는 일일이 반응하지 말고 자기만의 감정의 배출구를 찾는 것이 좋다. 나는 분노나 모욕감을 느낄 때 속으로 '이 일이 내 인생에 중요한 일인가?'를 자문해 본다. 남이 한 말에 속이 상하거나 잘못도 안 했는데 욕을 듣는 일은 그날 하루로 치면 큰일이지만 기나긴 인생 전체를 두고 보면 금방 잊힐 사소한 사건에 불과하다. 평소에 나 자신을 충분히 아껴주는 것도 좋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참지 않고 하고, 먹고 싶은 음식은 먹고, 입고 싶은 옷은 입어본다. 별일 아닌 것 때문에 나를 초라하게 느끼고 괴로워하는 것만큼 자존감에 해를 입히는 게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너무 많이 먹고 과소비하는 건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으니 주의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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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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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은 199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가 지난 50년 동안의 독서 체험을 주제로 한 강연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처음엔 재미있었고, 중간엔 슬펐으며, 마지막엔 마음이 무거웠다. 


  처음에 재미있었던 건 저자가 어린 시절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으며 소년다운 모험심과 용기를 길렀다는 대목이다. 1935년생인 저자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기 직전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난한 가정 형편과 어두운 사회 분위기에 짓눌려 있던 소년에게 어머니가 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소중한 보물이자 현실과는 다른 세상을 보는 유일한 창구였을 터. 오에 소년의 들뜬 마음이 전해져 나까지 마음이 즐거웠다.


  그랬던 소년이 <프랑스 르네상스 단장>을 읽고 불문학의 매력에 심취하고 <포 시집>이며 <엘리엇> 등을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워나가는 대목까지도 재미있었는데, 장애를 가진 장남을 키우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어려움을 겪고, 발전만을 부르짖으며 미친듯이 내달리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에 따라가지 못한 저자가 오로지 책과 글 속에서만 위안을 찾는 대목은 슬프기 그지 없었다. 


  특히 아내의 오빠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던 영화 감독 이타미 주조가 자살한 대목은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다.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 인터넷에 검색해봤더니, 구로사와 아키라의 뒤를 잇는 영화 감독으로 인정받던 이타미는 일본의 조직폭력단 관련 영화를 찍었다가 린치를 당한 적도 있고 끝내는 의문의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오늘 처음 이타미의 생애에 대해 알게 된 나도 이렇게 가슴이 허한데, 절친한 친구였던 저자는 얼마나 허망하고 마음이 아팠을까. 상상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로서 지식인으로서 꿋꿋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존경스럽고 감동적이다. 저자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불문학이며 철학 등을 혼자서 꾸준히 공부했으며, 그 결과를 자신의 작품에 반영하기도 했다. 작품 또한 평단으로부터 비판을 받거나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아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꾸준히 구축해나갔다. 


  무엇보다 대단한 건 어려서부터 국가주의와 천황제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저자가 지금도 점점 우경화되는 일본 사회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지식인으로서 할 말은 한다는 것이다. 천황이 수여하는 문화 훈장은 받지 않고, 독도 문제에 대해서도 소신 있는 발언을 했다는 오에 겐자부로. 그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런 작가가 일본에 있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지고 마음이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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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적 글쓰기 - 열등감에서 자신감으로, 삶을 바꾼 쓰기의 힘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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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박사' 서민 교수가 소위 '글 좀 쓰는' 인기 작가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일본 만화 <슬램덩크>를 닮았다. 글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의대생이 사람들 - 주로 아리따운 여인들 - 과 소통하기 위해 글을 쓰다가 글쓰기의 매력에 사로잡혀 얼렁뚱땅 첫 책을 내고 거듭된 시행착오 끝에 출판계는 물론 신문과 방송, 강연계를 평정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다! 어쩐지 할 줄 아는 거라곤 주먹 쓰기뿐이던 강백호가 채소연의 마음을 얻기 위해 농구부에 들어갔다가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농구의 매력에 빠져 진정한 농구인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닮았다.


  

  강백호가 농구를 잘하게 된 건 (강백호 자신이 공언하는 대로) '천재'여서였을지 몰라도, 서민 교수가 인기 작가가 된 건 노력의 결실이다. 책을 읽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서른이 될 때까지 책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던 저자는 글쓰기에 대한 욕구만은 참지 못해 학창 시절에 친구에게 쪽지를 쓴다든가 대학 시절 교지 편집에 참여하는 식으로 글쓰기를 계속 했다. 젊은 시절 운좋게 몇 권의 책을 냈고 그 때마다 많은 인세와 높은 명성이 아닌 줄어드는 관심과 끝을 모르고 떨어지는 자존감을 얻었지만 읽고 쓰기를 완전히 그만두진 않았다. 



  저자는 자신의 글쓰기를 '지옥훈련'이라 일컫는다.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노트와 볼펜을 가지고 다니며 글감이 떠오를 때마다 적는 게 지옥훈련의 실체"(p.11) 이다. 이 무슨 '수능 만점자가 교과서로만 공부했다'는 식의 이야기인가 싶지만, 교과서로만 공부하기가 어렵듯이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글감이 떠오를 때마다 적는 일은 결코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더군다나 저자는 신문도 읽고 블로그 글도 읽고 포털 게시판도 읽고 인터넷 서점 리뷰도 읽는 등 평소 책 말고도 읽는 것이 많다. 게다가 책이며 신문 칼럼, 인터넷 서점 블로그 등 글을 쓰는 곳도 많다. 강백호도 지옥훈련 수준으로 연습을 열심히 하긴 했지만 농구부 주장 채치수의 지도도 있었고 그를 도와주고 받쳐주는 동료들도 있었다. 저자는 오로지 혼자서 지옥훈련을 견뎠다.



  "10년 전 생각이 난다.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다니던 그 춥던 시절. 그 시절에 비하면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사가 여럿 있는 지금은 내 인생의 전성기가 아닐는지. 물론 글에도 유효기간이 있을 테고, 사람들이 내 글에 식상해지는 날도 머지않아 오겠지만, 그때까지는 열심히 글을 써야겠다. 너무 말없이 지낸 기간이 길어서 그런지, 내겐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p.250)



  저자는 비록 지금은 인기 작가라는 소릴 들어도 언젠가는 자신의 글을 찾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되든 아니든 간에 나는 그가 계속 글을 쓸 것이라고 믿는다. 한때는 여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인기 작가라는 명성을 얻기 위해 글을 썼을지 몰라도,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글, 쓰면서 즐기고 다 쓰고 다시 읽으면서 즐거운 글을 쓰게 된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슬램덩크>의 강백호도 고교 제패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부상이 발목을 잡아도 재활 치료를 받으며 씩씩하게 앞날을 기약했던 기억이 난다. 저자도 그렇게 그동안의 역경을 이겨왔을 터. 저자의 다음 번 '슬램덩크'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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