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깊은 철학 50 - 세계의 지성 50인의 대표작을 한 권으로 만나다
톰 버틀러 보던 지음, 이시은 옮김, 김형철 감수 / 흐름출판 / 201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한때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 책을 열심히 읽었던 적이 있었다. 재미는 있지만 적성에 맞다고 느낄 만큼 매료되지는 못해서 지금은 잘 안 읽는데, 그래도 그 때 읽었던 책들이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때가 종종 있다. 전공인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데에도 남들과 다른 관점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되고, 문학 작품 비평을 읽을 때에도 그 때 어렵게 이해한 개념들이 기초 지식으로 활용되곤 한다. 최근에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무색하게 강신주를 비롯한 일련의 철학자, 인문학자들이 출판계를 비롯해 강연, 방송계에도 진출하며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기피되는 경향이 아직도 남아있기는 하지만, 잘만 하면, 정말 잘만 하면 이 돈 안 되는 학문으로도 남부럽지 않게 버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 있음을 목격하고 있달까.



영국과 호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철학자 톰 버틀러 보던이 쓴 <짧고 깊은 철학 50>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철학자 50인과 그들의 주요 저서가 소개되어 있다. 사실 책 한 권으로 학자 50인의 학문 세계를 통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철학 박사가 될 생각이 아닌 이상 이들이 쓴 책을 모두 읽을 이유도 없고 읽지도 못한다. 어차피 못 읽을 책이라면 어떤 책인지 알기라도 하는 게 나을 것이다. 게다가 이 책에는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니체, 하이데거 등 정통 철학자뿐만 아니라 한나 아렌트, 보드리야르, 시몬 드 보부아르, 노암 촘스키, 마키아벨리, 마샬 맥루한 등 대부분의 철학서에서는 철학자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는 인문학자, 사회과학자들도 다수 소개되어 있다. 심지어는 <생각을 위한 생각>의 저자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슬로베니아 출신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블랙스완>의 저자인 경제학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하버드대 교수 마이클 샌델 등 현대의 학자들도 다수 나온다. 이 책 한 권으로 드넓은 철학의 세계를 모두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제목대로 '짧고 깊'게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때 철학에 관심을 두었으나 깊이 빠지지 못한 건, 어쩌면 철학을 재미있게, 그러나 제대로 해설해 줄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저자는 꽤 괜찮은 길잡이다. 알파벳 순서에 의거해 맨 첫 장에 실린 한나 아렌트 편을 읽으면서 나는 숱한 심리학 책에서도 얻지 못한 깨달음을 얻었다. "인간은 과거의 행위로부터 부단히 서로를 해방시켜야만 비로소 자유로운 주체로 남을 수 있고,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시작하겠다는 부단한 의지를 통해서만 새로운 것을 시작할 만큼 위대한 힘을 부여받을 수 있다." (p.40) 한나 아렌트 역시 '과거의 행위로부터 부단이 서로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는 점에서 심리학과 마찬가지로 과거를 중시한다고 볼 수 있지만, 그 방법이 과거에 침잠하거나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시작하겠다는 부단한 의지'를 가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삶에 자세에 대한 설명에서도 그녀의 강인함을 엿볼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인간 종 자체에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스스로 항상 최고임을 입증해 보이며 '언젠가 사라질 것보다 불멸의 명예를 선호하는' 가장 뛰어난 자만이 참된 인간이다. 그 외에 자연이 제공해 주는 각종 쾌락에 안주하는 자는 동물처럼 살다가 죽는다." (pp.42-3) 그녀는 사회와 환경에 의해 주어지는 조건에 만족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며, 안정이 아닌 불멸의 명예를 선호하라고 조언한다. "<인간의 조건>의 끝부분에서 아렌트는 오늘날은 '직업인 사회'로 바뀌어가면서 사람들이 진정 자신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며 삶의 고통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각자의 개별성을 기하고 단순한 '기능'의 일부로 살아간다고 지적한다. 이런 자들은 의식과 결단력이 있는 진짜 인간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환경을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고등 동물에 불과하다. (pp.44-5)" 비록 지금은 그녀가 살았던 시대와 다르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말한대로 '단순한 '기능'의 일부'로서 무기력하게 살고 있다.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한 그녀의 메시지. 실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경고했던 것은 아닐까?


드 보부아르에 대한 해설도 인상적이었다. "드 보부아르는 하이데거,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퐁티에 의거하여 '육체는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상황'이라고 언명한다. 이런 식으로 보면, 여성의 가능성은 남성의 가능성과 다를 뿐이지 제약이 더 심한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여성의 '약점' 대부분은 오로지 남성들의 목적에 비추어볼 때에만 약점이다. 예를 들어 신체적 열등성은 전쟁과 폭력이 부재하는 세상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 만약 사회가 달라진다면, 신체적 특성에 대한 평가도 바뀔 것이다. (p.92)" 드 보부아르의 <제 2의 성>으로 인해 촉발된 여성성에 관한 논쟁은 여성을 남성에 이은 '제 2의 성'으로서 간주하는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한 계속되어야 한다. 심지어는 '제 2의 성'을 언명한 드 보부아르마저 평가절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제 2의 성>은 입증되지 않은 내용이 많고 순환 논리에 빠지며 '제대로 된' 철학서가 아니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지만, 이런 사실조차 좌뇌적인 철학 체계를 구축한 남성 철학자들이 저자의 성에 가하는 은밀한 공격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드 보부아르가 종종 철학자로서 간과되어왔다는 사실은 결국 철학사를 쓰는 사람도 대부분 남자이므로 남성 학자들의 공헌에 중점을 둔다고 한들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드 보부아르의 주장을 증명하는 꼴밖에는 안 된다." (p.95) 어디 철학뿐이랴. 대부분의 학문에서 여성 학자들을 주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현대에 들어서는 여성 학자들의 지위가 많이 향상되었다고 하지만, 적어도 이 책에 실린 여성학자들의 수만 보더라도 50명 중에 단 둘뿐이다. 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철학에서 연구할 것이 많은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행하는 인문학자 - 타클라마칸에서 티베트까지 걸어서 1만 2000리 한국 최초의 중국 서부 도보 여행기
공원국 지음 / 민음사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행하는 인문학자>를 읽으면서 저자가 서문에 왜 <논어>에 실린 유명한 글귀 "그를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보다 못하다."를 인용했는지를 깨닫는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일단은 내가 지금 중국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너무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단순한 여행기인 줄 알았는데 읽어보니 중국의 역사서와 고전 등이 다수 인용되어 있어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부분이 여럿 있었다. 저자가 중국지역학을 전공한 중국전문가라기보다는 내가 모르는 게 많아서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중국 하면 중국 가수, 중국 드라마, 중국 영화 등등 대중문화 중심의 피상적인 것들만 보았지, 중국의 역사나 정치 문제 같은 건 세심하게 들여다보지 않았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듯이 뭐라도 보려면 어느 정도 아는 게 있어야겠다 싶었다.



내용이 다소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건, 비록 아는 건 별로 없어도 중국을 좋아하고 즐길 준비가 되어서이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 역사는커녕 가까운 청나라 시대에 대해서도 잘 몰랐는데, 최근 중국 사극 <보보경심>을 보면서 청나라에 급 관심이 생겼다. 드라마이기는 하나 영화 속 무대가 되는 중국의 전통 건축물이라든가 복식, 문화, 관습, 심지어는 말씨조차도 하나하나 새롭게 발견하고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드라마에 나오는 강희제, 옹정제 등 청나라 황제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마침 이 책에 두 황제의 민족 정책에 대해서도 나와있어 반가웠다. 드라마에서 내가 받은 인상과 달리 두 황제 모두 실제로는 이민족들에게 썩 좋은 이미지가 아니었으며, 드라마에는 낭만적으로 그려진 이민족 간의 교류가 실은 수많은 이들의 피로 물든 슬픈 역사라는 것을 알고 가슴 아팠다. 이렇게 몰랐다면 그냥 넘어갔을 내용들이 내게 하나하나 유의미하게 다가온 다 지금 내가 중국에 관심이 많아서일 것이다역시 아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을 못 이긴다.



저자의 여행기도 재미있었다. 저자는 2003년부터 2011년까지 8년 동안 총 네 번의 장기 여행을 했다. 여행지는 위구르, 준가르, 티베트 등 중국의 서부 지역. 대체로 중국의 주류를 이루는 한족이 아닌 소수민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라서인지 여행 여건이 무척 안 좋았다. 비록 결코 좋게 넘어갈 수 없는 사고(!)가 몇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곳에 사는 민족들이 중국 정부의 차별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터전을 일구며 살고 있는 모습을 좋게 평가했다. 학자가 쓴 글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좋은 문장들도 많았다. 저자는 이 척박한 지역을 자동차나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고 도보로 이동했는데 직접 두 발로 걷고 살로 느꼈기 때문인지 문장 한줄 한줄이 날 것처럼 생생했다. 인문학을 포함해 학문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현실에 맞닿아있고 체험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인데, 요즘의 학문과 학문하는 사람들은 책상 앞에 앉아 데이터화된 자료만 보고 있으니 한계가 있지 않나 싶다. 아는 사람보다는 좋아하는 사람, 즐기는 사람이 학자의 진정한 의미가 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밑줄 그은 문장들



별을 보기 위해서는 약간의 서늘함과 적막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부터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밖으로 나가 하늘에 있는 별을 보여 주는 대신, 방 안에서 별에 관한 그림책을 보여 주는 것이 오늘날의 교육이다. 사고는 피상적이며, 말은 많고, 그리고 끈기 없는 어린이들을 방 안에서 대량으로 만들어 낸다. 그러면서 어린이를 사랑한다고 한다. 책에 쓰여 있는 '별'과 내가 바라보고 있는 저 별은 같은 것일까? 그리고 밤하늘을 바라보는 어린이가 보는 별은 같은 것일까? 분명히 840년 그날 밤에도 에너지 넘치는 위구르 소년들은 낙타 가죽 아래서 함께 별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알 수 없는 날것의 감성을 교류하며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p.100)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초나라 왕이 활을 잃어버리고도 태연히 "초나라 사람이 줍겠지."라고 대답한 것을 높게 사면서도,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사람이 줍겠지.'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걸."이라고. (p.2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 대한민국 30대를 위한 심리치유 카페 서른 살 심리학
김혜남 지음 / 갤리온 / 200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정말 하기 싫으면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은, 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것은 모두 내가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 일단 선택하면 그에 최선을 다하고,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된다면 그것을 과감히 엎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앤드리아처럼 말이다. 괜히 시대를 탓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을 탓하고, 애매한 사람에게 그 선택의 책임을 전가할 일이 아닌 것이다. (p.46)

  

완벽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만족의 기쁨을 누릴 줄 알게 되면, 당신은 분명 그 전보다 훨씬 행복해질 것이다. 그러면 성공도 따라올 수밖에 없다. 성공한 사람이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성공하는 법이니까. (p.167)

  

권태의 시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당신이 권태로워하고 있는 동안 마음속에서는 오히려 많은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이제까지 쌓아 온 경험을 무의식적으로 분석하고 통합하며 소화해 내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불안해하지 말고, 권태로운 시간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시간을 즐겨라. 너무 오래가지만 않는다면 나중에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당신이 있음을 말이다. (p.181)

 

  

내 나이 스물아홉. 솔직히 암담하다. 밥벌이는 마음에 안 드는데 그렇다고 달리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다. 결혼은커녕 연애도 잘 되지 않고, 심리적으로도 요동을 친다. 이십대 동안 수십 권의 심리학 책을 독파하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인간은 결국 과거에 의해 움직여지는 존재라는 사실. 과거에 받지 못한 사랑, 하지 못한 일, 이루어지지 못한 사람이 내 발목을 붙잡지, 과거의 성공이나 불확실한 미래가 나를 움직이지는 못한다. 어쩌면 심리학에서 말하는 콤플렉스, 트라우마, 결핍 같은 용어들이 내가 얻은 결론과 일맥상통하지 않나 싶다. 그렇다는 것은, 암담한 내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계획보다도 과거에 대한 정리가 우선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를 더듬어보고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음... 이게 또 쉽지가 않다.

 

 

그래서 읽게 된 (수십권에 이어 또 한 권 더 읽게 된) 심리학 책이 바로 정신건강전문의 김혜남 박사가 쓴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이다. 책 소개를 보니 무려 159쇄나 찍었다고 한다. 출판계의 오랜 불황 속에서 이렇게 많은 부수를 찍었다는 건 우선 이 책이 그만큼 내용이 좋고 잘 만들어졌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서른 즈음에' 있는 사람들 중에 심리학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낄 만큼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운 - 혹은 미칠 것 같은 - 사람이 많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싶다(물론 나도 그 중 하나...).

 

 

이 책의 특징은 <상실의 시대>, <키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 유명한 영화나 소설을 예로 든다는 것이다. 심리학 책을 여러 권 읽다보면 내용이 뻔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 책은 그 '뻔함'을 문학과 영화 등 예술 작품과의 만남을 통해 해소했다. 예술이 무엇인가? 작가가 자신의 심리적인 상태를 작품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술 작품을 통해 공감과 위로 등 현실에서 애써 처리하지 못한 감정들을 처리하며 기쁨과 슬픔, 감동 등을 느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단순히 서른 살이 겪을 법한 심리적인 혼란과 그 원인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결책까지 제시해준다는 점이 좋다. 한 권의 책, 한 편의 영화야말로 직장동료와 애인, 친구, 가족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아닌가. 코 앞으로 다가온 삼십대에도 지난 이십대처럼 좋은 책들과의 만남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큐멘터리 차이나
고희영 지음 / 나남출판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해 나의 화두는 중국이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중국어를 배웠고, 대학교 때는 중국 현대정치에 대해 배웠지만, 학교에서 하라고 하니 의무로 했을 뿐 내가 좋아서 배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올해 들어 중국에 확실히 '꽂혔다'. 계기는 일 때문이지만, 요즘은 일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중화권 음악을 듣고 드라마를 보고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중국 관련 기사를 찾아보는 게 하루 중 가장 큰 즐거움일 정도다. 그런데 내가 아는 중국인들이 헉 소리가 날 만큼 고학력에 부유해서 중국인들 대부분이 이제는 먹고 살만한 줄 알았는데 아닌가보다. 중국 전문 다큐멘터리 방송작가 및 영화감독 고희영이 쓴 <다큐멘터리 차이나>에서 보니 내가 아는 부유한 중국인은 전체 인구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서북 지역이나 지방에는 아직도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빈부차를 확인하는 것은 단지 벌이뿐만이 아니라 의, 식, 주, 결혼, 진학, 직업 선택 등 다방면에서 가능한 일. 막연히 알고는 있었지만 생생한 사진과 실제 사례를 통해서 보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먼저 한 사람만 성공하면 돼! 형이 출세하면 우리 가족 모두가 좋아질 수 있어!" (p.17)

오직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어머니와 동생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을 아프게 채찍질하고,
웃자라는 욕망을 자르며 살아오면서, 그는 아내의 꿈까지 잘라냈다는 것을 아프게 깨달았다. (p.28)

 

"우리는 고기를 먹지 못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고기를 소화할 수 없는 내장을 가지고 태어났어요."
어디선가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작업반장의 신호였다.
농민공들은 미처 다 먹지 못한 만토우를 입이 찢어져라 쑤셔 넣으며 흩어졌다. (p.78)

 



 
"이제 곧 마흔인데 누가 나 같은 여자를 좋아하겠어. 특히 난 중국남자는 질색이야. 모두들 꿍꿍이속이 있다니까."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베이징 호구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바로 이거! 이것 때문에 나를 이용하려고 하는 남자들뿐이야."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부터 그녀가 자주 한국남자가 좋다고 얘기했던 이유를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p.109)

 

 


지방과 도시의 빈부 격차, 농민공 문제, 현대판 신분제도인 호구 문제, 문화대혁명, 천안문 사태 등에 대해 전부터 듣고 배워서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어떤지는 몰랐다. 특히 돈을 벌기 위해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농민공의 수가 2013년 2억 6천만 명을 돌파했다는 사실이나, 호구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꼽히는 베이징 호구 때문에 각종 차별과 암거래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베이징 출신 사람들이 다시 보였다). 딩즈후는 또 어떤가. 딩즈후는 국가이익, 공공이익을 앞세워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인정하지 않는 중국 정부에 항거해 철거를 거부하는 주택을 이르는 말인데, 먼 나라 일 같지만 사실 비슷한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용산 참사를 비롯해 빈번히 일어났고 현재도 진행중이다. 문화대혁명, 천안문사태도 마찬가지다. 두 사건 모두 중국인들에게 있어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과거이며 현재까지도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과오다. 그런데 이게 어디 중국만의 일인가.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에는 독재 정권이 있었으며,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이 이들의 반성과 사과를 원하고 있지만 이뤄질 날은 요원해 보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중국의 현재를 다큐멘터리로 담았지만, 내 눈에는 현재를 넘어 미래까지 보이는 듯 했다. 극심한 빈부 격차는 얼마 안 있어 사회적 갈등으로 이어질 것이고, 크고 작은 정치적 소요를 낳을 것이며 체제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질 것이다.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변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겪을 우리나라의 미래는 과연 어떨까? 이를 예측하기 위해서라도 중국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월경독서 - 감성좌파 목수정의 길들지 않은 질문, 철들지 않은 세상 읽기
목수정 지음 / 생각정원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블로그에 서평을 쓰기 시작한 지 어언 4년째. 처음엔 그저 블로그를 운영하기 위한 수단으로, 읽은 책의 감상을 남기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한 '불온한' 서평 블로그였지만, 이제는 이십대의 절반을 꼬박 바친 소중한 취미이자 내 방보다 편안한 '자기만의 방'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앞으로의 바람은 그저 나의 감상을 쏟아내지 않고 읽는 사람의 마음을 붙잡고 삶을 뒤흔들 수 있는 서평을 쓰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읽는 책의 양보다도 질을 따져야겠고 글에도 더 신경을 써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내가 삼십대에 할 일 중의 하나가 될 것 같다.

 

 

삼십대가 될지 그 이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내 이름으로 서평집을 내보고 싶은 소망도 있다. 읽은 책을 마구잡이식으로 소개하는 서평집말고, 나란 사람의 삶이 오롯이 녹아있는, 책과 사람이 똑같이 빛나는 서평집 말이다. 그런 책을 쓸 기회가 온다면 나는 편집자에게 목수정의 <월경독서>를 건네리라. 어떻게 이런 책을 쓰고 만들었을까.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을 읽을 때도 문장이 한줄 한줄 마음에 쏙쏙 박히고 책의 만듦새까지 좋아 읽는 내내 황홀했는데, 이번에 읽은 <월경독서>도 그랬다. 책 한권 한권이 씨줄과 날줄처럼 저자의 삶과 촘촘히 연관되어 있는 것도 신기한데, 책을 소개하는 저자의 시선 또한 어떤 책에서는 따뜻하고 푸근한데 어떤 책에서는 칼날처럼 예리해, 서평이 꼭 마치 예술과 정치라는 양극단을 오가는 저자의 삶 같았다. 책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책을 만든다는 어느 서점의 광고 카피가 새삼 떠올랐다면 무리일까.

 

 

저자가 소개한 책은 모두 열일곱 권이다. 서평을 쓰기 위해 최근에 다시 읽기는 했지만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읽어온 책들 중에 인상 깊은 것만 고르고 또 고른 것들이라고 한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는 십대 시절 처음으로 한국사회의 모순에 눈을 뜨고 치열하게 고민했던 날들에 관한 추억이 담겨 있고, <이사도라 던컨>에는 무용수의 춤 동작 하나에도 영혼이 뒤흔들리는 듯한 경험을 했던 청춘의 기억들이 담겨 있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대학 신입생 때 한 번, 이십대 후반 파리에 와서 한 번, 마흔 넘어 한 번, 이렇게 총 세 번을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랐다. 처음엔 오로지 테레자와 토마스의 불같은 사랑만 눈에 들어왔는데, 이제는 그들의 인생과 다른 이들의 사랑까지 모두 시야에 들어온다고. 내가 얼마 전에 읽은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도 저자는 프랑스어판으로 진작에 읽었다고 한다. 여성의 삶에 회의를 느낄 때마다 찾게 되는 책인데, 언젠가는 딸에게도 읽혀줄 생각이라고 한다. 멋지다. 나도 언젠가 딸을 낳으면 꼭 이 책을 소개해줘야지. 

 

 

저자가 소개한 책들 중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읽어보고 싶은 책은 <페르세폴리스>와 르 클레지오의 <황금 물고기> 두 권이다. 이슬람 혁명기에 보수적인 이란 사회에서 분투한 소녀의 실화를 담은 만화책 <페르세폴리스>는 많은 나라에서 반향을 얻어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이 되었다고 한다. <황금 물고기>는 르 클레지오의 소설치고는 드물게 밝고 건강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두 권 다 여성이 씩씩하게 살아나가는 내용이다. 나도 모르게이제 곧 이십대에서 삼십대의 삶으로 '월경(越境)'하는 내가 지금보다 더 씩씩하고 꿋꿋해지기를 바랐던 것일까. 월경한 그곳에서 언젠가 꼭 이런 서평집을 쓰는 기적같은 일이 생기기를 기도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