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의 루시 - 루시 바턴 시리즈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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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이 한창일 때는 팬데믹이 언제 끝날까, 끝나기는 할까 걱정되고 초조했는데, 팬데믹이 끝난 지금은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거리두기를 실천했던 그 때가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진다. 그런 줄 알았는데,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바닷가의 루시>의 도입부를 읽는 동안 그 때의 공포와 불안이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갑자기 전 지구에 전염병이 퍼지고, 감염자 수와 사망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고, 격리나 거리두기 같은 말이 일상적으로 쓰이고, 타자에 대한 배척과 혐오가 정당성을 얻기 시작했던 그 때. 그 때 우리는 무엇을 겪고 어떻게 변했을까. 정말로 '변화' 하기는 했을까.


소설은 기생충을 연구하는 학자인 루시의 전 남편 윌리엄이 남들보다 먼저 팬데믹을 예견하고 루시에게 뉴욕을 떠나 메인 주에 있는 저택에서 함께 살자고 제안하면서 시작된다.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두 번째 남편 데이비드의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던 루시는 윌리엄이 하도 강력하게 권해서 져주는 느낌으로 윌리엄을 따라간다. 처음에 루시는 몇 주 아니면 몇 달 후면 뉴욕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팬데믹이 훨씬 길어지자 당혹감을 느낀다. 사랑하는 두 딸조차 자유롭게 만날 수 없는 와중에 동네에선 뉴욕에서 온 두 사람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느껴져 곤혹스럽다.


가벼운 산책 외에는 외출도 하기 힘들고 집필도 어려워지자 루시는 온갖 상념에 빠져든다. 어느 날엔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어느 날엔 윌리엄과의 관계를 되짚어 보는 식이다. 루시는 매우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서 부유한 생활을 하게 된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며 종종 괴로워 한다. 루시의 불우한 과거는 루시가 윌리엄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와도 연결된다. 스테이크에 소금과 후추를 뿌려 먹는 것도 모를 정도로 가난한 집에서 자란 루시에게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처음 알려준 사람이 첫 번째 남편 윌리엄이다. 


아마도 루시에게 윌리엄은 단순한 성애 대상이 아니라 원가족이 해주지 못한 진정한 의미의 사회화를 하게 해준, 어떻게 보면 가족보다 더 가족 같고 그래서 성애적 감정이 사라진 후에도 헤어지기 힘든 사람인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루시에게 있어서는 두 번째 남편인 데이비드야말로 다른 이득에 대한 고려 없이 그저 그 사람이 좋아서 만나고 사랑한 첫 번째 남자가 아닌가 싶고, 그래서 데이비드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좀처럼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데이비드와 결이 비슷한 밥 버지스와 루시가 잘 되는 전개를 상상해 보기도 했지만, 일단 이 책에선 아니었다(다음 책에선 어떨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은 하나의 세계관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소설도 예외가 아니다. 이 세계관에서 루시 바턴과 함께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인 올리브 키터리지가 팬데믹 기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몇 번 나온다. 밥 버지스가 어린 시절에 잠깐 보고 스쳐간 여자와 우연히 재회하는 장면도 있다. <오! 윌리엄>에서는 아직 존재감이 미약했던 윌리엄의 이부 누나 이야기도 좀 더 전개된다. 루시의 두 딸, 베카와 트리시에게도 변화가 생긴다. 모녀 관계, 자매 관계에 상처가 있는 루시가 자신의 두 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장면들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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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
조우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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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리 작가의 첫 소설집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을 읽었다. 조우리 작가의 소설을 읽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닌데, 이전에 읽은 <라스트 러브>, <팀플레이>, <이어달리기> 모두 좋았지만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이 특히 좋았다. 퀴어, 노동, 여성에 대한 소설을 쓴다는 조우리 작가의 포부가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라스트 러브>, <팀플레이>, <이어달리기> 등으로 세계관을 확장하기 이전에 작가가 어떤 문제에 관심이 있었고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서 좋았다.


책에는 총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초반에 실린 단편들은 여성의 노동, 노동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우리가 핸들을 잡을 때>에서 입주청소 일을 하는 엄마는 나이 든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 직원에게 하대를 당하고, 동료인 금자씨는 중국계 이민자라는 이유로 이중의 차별을 당한다. <11번 출구>의 다미는 지하철 역사 인근의 빵집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데, 아르바이트이다 보니 돈도 경력도 되지 않고 이마저도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공포에 떤다. <미션>의 미경은 (대기업으로 보이는) 물류회사의 정직원이라는 점에서 앞의 두 소설에 나오는 여성들보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지만, 남성 중심적인 조직의 권위에 굴복해 자신의 존엄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을 늘 맞닥뜨린다는 점에서 정신적으로 평온한 삶을 산다고 보기 어렵다.


표제작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은 여성, 노동보다 퀴어 요소가 더 두드러지는 소설이다. 레즈비언인 '나'에게는 십 년 동안 연애하고 오 년 동안 동거 중인 여자친구 정윤이 있다. 정윤에게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여자(사람)친구 네 명이 있는데, 이성애자인 이들은 자신들의 연애와 결혼, 임신, 출산, 육아 등을 자유롭게 공유하는 반면 레즈비언인 정윤은 그러지 못해서 소외감을 느낀다. 레즈비언은 아니지만 무성애자 성향의 비혼인으로서 이성애자 친구들이 연애, 결혼, 임신, 출산 이야기를 할 때 거리감을 느낀 적이 많은데(그들도 나에게 거리감을 느끼겠지...), 그런 거리감에 대한 소설이라서 반가웠다. 


<나사>는 낡은 의자의 다리를 고정하는 나사가 사라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다소 추상적인 내용의 소설이다. 공사 현장에서 통행 차량을 막는 일을 하는 여자가 나오는 <물물교환>과 백화점 속옷 매장에서 일하는 여자가 나오는 <블랙 제로>는 여성의 노동, 노동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초반부의 소설들과 이어진다. 맨 마지막에 실린 <개 다섯 마리의 밤>은 노동하는 퀴어 여성들의 연대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내용으로 느껴졌다. 먹고 살기가 아무리 힘들고 소수자로 차별 받는 게 아무리 괴롭더라도 혼자인 것보다는 함께인 편이 낫고, 그러니 계속 같이 걷자는 말을 건네주는 듯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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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우어
천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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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소설. 읽기가 쉽지 않은데 계속 읽게 된다. 예전에는 진정한 독서가(?)라면 취향이 아닌 책도 읽어야 한다는 (알량한) 의무감 때문에 읽었다면, 요즘은 개중에 마음에 드는 작품을 발견하는 재미로도 읽는다. 천선란 작가의 신작 소설집 <모우어>에서도 마음에 드는 단편을 여럿 찾았다. 


첫 번째는 <뼈의 기록>이다. 로비스는 장의사로 일하는 안드로이드 로봇이다. 하루에 몇 구의 시신을 처리하는 로비스이지만, 안드로이드 로봇인 만큼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알지 못한다. 로비스는 같은 장례식장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노인 모미와 매일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 앉아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일과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안드로이드 로봇이라고는 하지만, 로비스가 모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유난히 즐겁고 편안하게 '느끼는' 것 같은 건 인간인 나의 착각일까. 인간보다 더 인간을 위하는 안드로이드 로봇을 과연 인간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을까.


두 번째는 <서프비트>이다. 엄마가 일하는 가게에서 매일 지루한 나날을 보내던 주영은 어느 날 우연히 자신에게 초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얼마 후 초능력이 있는 아이들을 따로 모아 놓고 훈련하는 기관에 들어가게 된 주영은 그곳에서 자신과 비슷한 초능력자 남자아이 도영을 만나게 된다. 나이도 같고 이름도 비슷한 주영과 도영은 한 집에 살고 같은 학교에 다니며 쌍둥이 남매처럼 지낸다. 언제부터인가 주영은 도영을 남매나 친구와 다른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하고, 그 감정이 채 여물기도 전에 도영에게 어떤 일이 생긴다. 본격 SF 소설이라기보다는 판타지가 가미된 청소년 로맨스 소설로 분류될 만한 내용이라서, 천선란 작가의 소설을 아직 읽어본 적 없는 독자라면 입문작으로 이 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표제작 <모우어>는 언어가 사라지고 언어 대신 '의음(意音, 정신이나 마음의 작용에서 나오는 소리)'로 소통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이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초우는 어느 날 우연히 인간 아기를 발견하고 '모우'라는 이름(부름어)을 붙여준다. 초우는 모우가 이 사회에 적응해 살아갈 수 있도록 의음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치지만, 인간 아기인 모우는 초우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자꾸만 인간의 언어를 사용한다. 언어가 인간의 본능임을 이야기하는 소설 같기도 하고, 사랑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고 생존 의지를 능가하는 힘이라는 걸 보여주는 소설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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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생 3 - 언제나 그 자리에 오늘의 인생 3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새의노래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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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팬데믹 시기가 배경인 소설이나 에세이를 여러 권 읽었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팬데믹이 언제 끝날까, 평생 마스크를 착용하고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한국 정부가 엔데믹을 선언한 지 벌써 2년이나 지났다니 놀랍다. 팬데믹 시기에는 매일매일이 비슷비슷하게 느껴졌다. 대면 접촉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외출을 삼가고 모임을 포기하며 날마다 집에서 비슷한 일상을 보냈으니 당연하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버린 그 시기를 섬세하고 촘촘하게 기억하고 싶어서 읽은 책이 마스다 미리의 <오늘의 인생> 3권이다.


<오늘의 인생>은 일본의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마스다 미리가 2017년부터 연재 중인 만화다. 제목 그대로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오늘, 평범한 인생을 보여주는 만화인데, 2020년 팬데믹이 창궐하면서 본의 아니게 팬데믹 시기의 일상을 기록한 만화가 되었다. 2024년에 출간된 <오늘의 인생> 3권은 엔데믹 전후의 일상이 그려져 있다. 한여름에 마스크를 쓰고 다닐 때 느낀 괴로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웃는 얼굴을 전하기 어려울 때 느낀 곤란함, 타 지역에 사는 가족이나 친구와 영상 통화할 때 느낀 반가움과 안타까움 등등 모두 불과 몇 년 전까지 '일상'이었는데 벌써 아스라하게 느껴지다니. 시간이란. 인간이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대목은 이거다. 강한 바람에 코트 자락이 펄럭인 순간, 어린 시절 연을 날렸던 기억을 떠올린 저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 즐거웠던 시간을 사람은 어른이 되어도 잊지 않아요. 어린 내가 최선을 다해 놀아줬으니까 지금의 내가 문득 행복을 느꼈어. 그 아이는 그 아이는 분명 지금의 나를 위해서도 놀아주었던 거예요." (114-5쪽) 좋았던 기억, 행복했던 기억은 시간이 흘렀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 안의 어딘가에 쌓여서 미래의 나를 즐겁게 한다는 걸 일깨워 주는 대목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책에 실린 짧은 소설에, 작년에 가본 시즈오카 아이노역의 풍경이 묘사되어 있어서 너무나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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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
백은선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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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볼 정도의 글을 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공개된 장소에 글을 쓰는 이상 나름대로 자기 검열이라는 걸 한다. 나에 대한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사서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남기는 것뿐이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누가 내 글을 읽고 불쾌감을 느낄지도 모른다고, 나중에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길게 쓴 글을 지우게 되고 쓰려던 글도 안 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자기 검열 같은 건 하지 않은 듯 보이는 과감하고 솔직한 글에 대한 동경이 있다. 이런 것까지 쓴다고? 이런 것까지 털어놓는다고? 싶은 글을 읽으면 묘한 희열마저 느낀다. 백은선 시인의 산문집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를 읽으면서 느낀 감정이 딱 그랬다. 


책에 따르면, 저자는 결코 순탄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가정 폭력에 시달렸고, 학창 시절 내내 왕따를 당했다.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할 뻔했으며, 여자라는 이유로 크고 작은 성희롱과 폭력을 당했고 이는 문단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비로소 안정된 삶을 사는 듯했으나 몇 년 전 이혼하고 혼자서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일도 하고 살림도 하고 육아도 하는 삼중고를 겪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남자가 좋고, 돈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시를 쓰고, 아이 키우기가 힘들다고 토로하면서 둘째를 가졌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는 나. 이런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한 마음. 모른다고만은 할 수 없다.


이 책은 내용만 솔직한 게 아니라 문장도 저자의 일기를 그대로 옮긴 듯 거칠고 자유롭다. 이 점을 당혹스러워하는 독자들도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이런 문장들이야말로 21세기를 사는(인터넷 많이 하는) 사람이 쓴 문장 같고,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기록하고 보전할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저자도 책에 한강 작가를 좋아하지만 그렇게 될 수는 없다고 썼는데, 내 생각에도 많은 사람들이 한강 작가를 흠모하지만 모두가 한강 작가처럼 쓸 필요는 없고 그럴 수도 없고, 그러니 백은선 시인은 백은선 시인답게 쓰고 나는 나답게 쓰는 게 좋은 것 아닌지. 그게 비록 싫고 이상하더라도 좋은 면도 아주 없지는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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