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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스피드
김봉곤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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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남자의 사랑. 철모르던 시절부터 팬픽이니 BL이니 하는 것들을 적잖이 섭렵하고, 커서는 본격적인 퀴어 소설, 퀴어 만화, 퀴어 영화, 퀴어 드라마 등을 꾸준히 봐왔던 나로서는 전혀 새로운 소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읽은 두 권의 퀴어 소설집,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와 박상영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그것은 이 두 권의 소설집이 한국 문학계에서는 보기 힘든 퀴어 소설인 데다가, 두 작품 모두 퀴어 소설로는 드물게 많은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게 한남 문학과 결별하고 싶고 이성애 서사에 따분함을 느끼는 독자들의 취향이 반영되어 생긴 경향이라고 보는데 어떨까. 경향이라는 단어로 함축하기에는 두 작품이 그 자체로 좋기도 하지만. ​ 


<여름, 스피드>는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보다 세 달 먼저 퀴어 문학임을 표방하고 나온, 김봉곤의 첫 소설집이다. 이 책에는 '컬리지 포크', '여름, 스피드', '디스코 멜랑콜리아', '라스트 러브 송', '밝은 방', 'Auto' 등 여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고, 여섯 편 모두 성소수자 남성의 사랑과 이별을 절절하게 그린다. 여섯 편 중에 나는 '컬리지 포크'가 압도적으로 좋았다. 전 남자친구와 헤어지고도 이 년 넘게 같이 살다가 그에게 새 애인이 생기자 쫓겨나듯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온 '나'는 일본 생활에 잘 적응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하루하루가 외롭고 지겹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소설 창작 수업을 맡고 있는 '에하라 교수'의 성적 취향을 알게 되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적극적으로 에하라 교수에게 다가간다. 두 사람은 그동안 입에 올렸던 작가들과 작품들이 서로를 향한 구애의 메시지였음을 인정하는 듯이 급속히 가까워진다. 


'컬리지 포크' 다음으로는 '여름, 스피드'와 'Auto'가 비슷하게 좋았다. '여름, 스피드'는 '나'가 오래전 대시했던 후배 '영우'로부터 페이스북 친구 신청 메시지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나'는 당황한 마음을 숨기고 짐짓 괜찮은 체하며 만나자는 요청을 받아들이는데, 이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우'는 친구로 남자고 했다가, 조금만 더 같이 있자고 했다가 하면서 '나'의 마음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Auto'는 강렬했던 사랑이 일방적으로 끝난 후 남겨진 사람의 심정을 일종의 오토 픽션의 형식으로 쓴 소설이다. 단번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지만, 앞의 다섯 작품을 다 읽고 나서 읽으니 다섯 작품의 화자가 한 사람으로 수렴되고, 소설집 전체가 한 사람의 이야기로 다시 읽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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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의 밤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박솔뫼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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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주민등록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어떻게 모르는 사람으로 사라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은 매일 밤 잠자리에서, 물론 매일 밤은 아니지만 자주 반복되는 생각이었다. 

사라질 생각은 없지만, 큰 잘못을 아직 저지르지 않았지만 어떻게 한국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어떻게 숨을 수 있을까 혹은 한국을 빠져나가 외국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출판사 아르테(Arte)에서 야심 차게 내놓은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의 첫 책. 올해로 등단 10년을 맞은 박솔뫼 작가의 여덟 번째 작품집이다. ​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 안. 한솔은 일본에 살고 있는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에 가는 중이고, 나미는 이모가 알려준 이모 친구 집에 잠깐 살러 가는 길이다. 두 사람은 남으로 남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과거로 과거로 침잠한다. 몇 해 전 남성이 된 한솔은 수술 한 번이면 성별을 바꿀 수 있는 세상인데 왜 여전히 자신의 주민등록번호 뒷번호는 2로 시작하는지, 외국에 나갈 때마다 군 복무를 마치지 않은 사유를 설명해야 하는지 답답하다. 사이비 교단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나미는 학력도 없고, 직업 교육도 받지 않은 자신이 어떻게 이 나라에서 살아갈지 막막하기만 하다. ​ 


부산에 도착한 한솔과 나미는 일본으로 향하는 배를 바라보며 이곳에서 사라져 저곳에서 머무르는 삶을 상상한다. 어차피 여기서는 혼자 힘으로 살기 어렵고, 의지할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원해서 택한 것이 아닌 과거가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들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일반 시민, 보편 시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일등 시민이 되지 못하고 이등 시민조차 되기 힘들 것이다. 


과연 이 둘은 무사히 사라질 수 있을까. 사라져 다시 나타난 곳에서는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 소속되어 있으나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머물러 있으나 곧 떠나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으로서 한솔과 나미의 상황이 남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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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은모든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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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까지 아홉 시간이 남았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셈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편안하게 보내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할수록 긴장이 됐고, 그러자 시간이 몇 배는 빠르게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출판사 아르테(Arte)에서 야심 차게 내놓은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의 첫 책. 알츠하이머를 앓다가 작년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다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는 작가 은모든은, 이 책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닥칠 죽음의 형태와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만드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 


10년 후의 대한민국. 국회에 안락사를 합법화하는 법안이 발의되고 국민투표를 통해 법안이 통과되자 '지혜'의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수명 계획'을 가족들에게 밝히고 신변 정리를 시작한다. 남편이 갑작스럽게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아흔일곱의 언니가 병상에서 생을 연명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할머니는,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건 너무 비참하다며 비자발적으로 죽음을 맞기 전에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기로 결정한다. ​ 


지혜의 가족들은 할머니의 결정에 대해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인다. 어떤 이는 처음부터 개인의 선택이라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어떤 이는 머리로는 받아들여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떤 이는 울며불며 결사반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지혜는 할머니의 결정에 대해 가타부타 의견을 밝히지 않은 채 언니의 요청에 따라 할머니에게 자두 술 담그는 법을 배운다. 한편으로는 할머니가 자신의 죽음을 결정하고 준비하는 것처럼 자신 또한 부모님의 집을 떠나 독립할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 


편안할 안(安) 자와 즐거울 락(樂) 자를 써서 안락사라고 해도, 그 과정과 결과가 결코 안락할 리 없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지혜의 할머니와 할머니를 지켜보는 가족들 역시 때때로 참담한 심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락사가 필요한 것은, 준비된 이별이 준비 없는 이별보다 떠나는 사람과 남겨질 사람 모두에게 그나마 상처를 덜 남기기 때문이다.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영영 떠나보내야 했던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준비 없는 이별이 남기는 상흔이 얼마나 깊고 오래가는 지 알 것이다. ​ 


소설에서처럼 10년 안에 한국에서 안락사가 합법화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안락사 법안 통과 여부와 상관없이 육체와 정신이 모두 건강할 때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해보고 대비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재산이나 채무, 소유하고 있는 물건 등을 정리하고, 사는 동안 고마웠던 사람, 미안했던 사람, 좋아했던 사람, 사랑했던 사람에게 그 마음을 전한다면 죽는 일은 물론 사는 일 또한 훨씬 높은 가치와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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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지는 법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서 - 3,500km 미국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걷다
이하늘 지음 / 푸른향기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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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그만두고 3,500km에 달하는 미국 애팔래치아 트레일(AT)에 도전한 삽십 대 여성 이하늘의 자전 에세이다. ​


2017년 4월 27일. 저자가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시작한 날짜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도전하기 전까지 저자는 지극히 평범한 대한민국의 직장인이었다. 큰 소란 없이 청소년기를 보냈고,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교 첫 영어 수업시간에 "Describe yourself."라는 작문 과제를 받고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봤지만 그뿐이었다. 남들 따라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정신없이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같은 고민은 사치스럽게 여겨졌다. ​ 


그랬던 저자가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도전한 건 남편의 도움이 크다. 당시 남자친구였던 저자의 남편은 2015년에 4,300km의 PCT(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완주하고, 곧이어 CDT(콘티넨털 디바이드 트레일)에 도전했다. 남자친구의 도전에 자극을 받은 저자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떠났다. 함께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도전한 두 사람은 트레일 도중 미국 본토에서 가장 높은 휘트니 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완주한 지금은 두 바퀴의 자전거와 두 다리로 세계를 여행하는 중이다. 제주도, 멕시코, 과테말라, 벨리즈,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등이 그들이 다녀온 곳들이다. ​


저자는 성인이 된 후, 여행에 대한 동경을 늘 품고 있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 관계로 가까운 곳으로 여행하는 일조차 마음먹기 힘들었고, 나이가 들면 그때 나 마음껏 여행을 해보리라 생각했다. 막상 여행자로 살아보니 돈이나 직장, 커리어나 안정된 노후에 대한 고민은 부질없이 느껴졌다. 물론 지금도 경제적 고민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지만, 살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여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딱히 더 바라는 건 없다. 여행 자체의 경험과 여행을 통해 얻은 지혜와 교훈을 바탕으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볼 생각에 마음이 벅차다. ​ 


저자는 "여자가 장거리 하이킹을 하는 게 힘들지 않아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으며, 만약 남편과 함께 여행하지 않았다면 "여자 혼자 여행하는데 위험하지 않아요?"라는 질문도 받았을 거라고 말한다. 이러한 질문에 저자는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여자라서 장거리 하이킹을 하는 게 힘든 게 아니라 장거리 하이킹 자체가 힘든 일이다. 여자 혼자 여행하는 게 위험한 게 아니라 혼자서 여행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다. 


이 핑계 저 핑계 대지 말고 일단 한 번 떠나보라는 저자의 말에 뜨끔한 게 오직 나뿐일까. 벌써 몇 주째 여행사 사이트만 들락날락하고 있는데 빨리 마음을 정해야겠다. 행복해지기 위해, 어디로든 떠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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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라 하든, 하고 싶은 대로 직진 - 세상의 기준, 남과의 비교, 완벽주의… 나를 제한하는 것들과 이별하는 법
이시하라 가즈코 지음, 노경아 옮김 / 호우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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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중심 심리학'을 만든 일본의 심리상담사 이시하라 가즈코의 책이다. 저자의 다른 책으로는 <도망치고 싶을 때 읽는 책>, <나에게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다>, <엄마, 내가 알아서 할게>, <사라져 가는 나> 등이 있다. ​ 


저자는 심리상담사로 일하면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주위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게 옳다고 하니까', '일반 상식이니까' 등의 이유로 무조건 '해야 한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 나와 타인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나는 타인보다 이게 낫다', '나는 타인보다 이게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사회를 의식하고 사회로부터 인정받길 원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끊임없이 남에게 맞추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어떤 경우든 일단은 자신의 마음을 존중해야 타인의 마음도 존중할 수 있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해야 타인의 욕망에도 응해줄 기운이 나는 거라고 설명한다. ​ 


​저자는 사회와 남, 일반 상식, 각종 규범을 내세우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아마도 어려서부터 가정이나 학교에서 자신의 욕망을 숨기고 타인의 기대에 맞추라는 가르침, 사회의 관습에 부합하는 인간이 되라는 교육을 받아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사람이라면 '하기 싫다'는 감정을 깨닫는 것이 급선무다. 청소를 예로 들면, 평소에 '청소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사람은 '청소하지 않는 게으른 나'를 책망하다가 결국 청소를 안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차라리 '청소하기 싫다'는 감정을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편이 낫다. 당장 급한 화장실 청소만 해치우거나 청소 전문 업체를 부르는 식으로 말이다. ​ 


무슨 수를 써도 내가 속한 사회나 환경이 바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눈 앞의 현실만 보지 말고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의 과거를 생각해보라고 충고한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 분명히 달라지고 더 나아진 것이 있다. 누군가 특별한 사람이 나타나 바꾼 것이 아니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세상을 꿈꾸며 노력한 결과다. 결국 내 뜻대로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나 자신의 삶은 뜻대로 바뀔 것이다. 누가 뭐라 하든, 하고 싶은 대로 직진하는 인생이 모두의 뜻에 따르다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인생보다 더 나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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