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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기대선 여자 빙허각
곽미경 지음 / 자연경실 / 2019년 1월
평점 :
학창 시절에 '빙허각 이씨'라는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나서 집어 든 책이다. <규합총서>, <청규박물지> 같은 책을 남겼고, 한중일 3국을 대표하는 실학자 99인 중 유일한 여성 실학자로 이름을 올리고도 '이선정'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아니라 '빙허각 이씨'로 기록된 그는 과연 어떤 삶을 살다 갔을까. 교과서는 알려주지 않는 구체적인 생애가 궁금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빙허각 이씨(이선정)는 1759년(영조 35년) 평양감사를 지낸 이창수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했던 선정은 바느질 같은 가사 일을 배우는 것보다 글공부하는 걸 훨씬 더 좋아했다. 어느 날 선정은 아버지에게 세 가지 선물을 받고 싶다고 청했다. 첫째,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싶다. 둘째, 청나라 연경에 가보고 싶다. 셋째, 자신이 평생을 같이 할 배필을 아버지가 직접 구해주길 바란다. 당시 여자는 부모가 정해준 배우자와 결혼해 순종하며 사는 게 도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선정은 자신이 바라는 걸 당당하게 요구했고, 막내딸을 유난히 아꼈던 선정의 아버지는 어려운 청마저도 모두 들어주었다.
이창수의 막내딸이 영특하다는 소문은 궁궐 안까지 들어갔고, 소문을 들은 세손(훗날 정조)은 이창수와 선정을 궁궐로 불러들였다. 세손은 선정을 보는 순간 그 미모와 지성에 반했고, 선정 또한 세손의 학식과 성품을 확인하고 연정을 품었다. 하지만 선정은 왕의 여자로 살고 싶은 마음보다 평생 자유롭게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고, 이창수는 선정의 마음을 헤아려 서유본에게 시집보냈다. 서유본의 집안은 대대로 학식이 높고 남녀 가리지 않고 공부를 장려하는 가풍을 지녔으니, 웬만한 남자보다 똑똑하고 공부 욕심이 많은 선정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작가는 서문에 "여성의 시각에서 남성과 대립하고 갈등하는 삶이 아닌, 남성과 평등하면서도 서로 존중하고 의리를 지켜내는 진짜 사랑을 담고 싶었다."라고 썼다. 과연 선정의 삶은 여느 조선 여인들의 삶에 비하면 파격적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진보적이고 진취적이다. 이창수의 여식, 이병정의 여동생으로 불리는 게 싫어서 스스로 기댈 빙(憑), 빌 허(虛), 집 각(閣) 자를 써서 빙허각이라는 호를 짓고, '허공에 기대어 산다'는 뜻대로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겠다는 각오를 세웠다는 것도 늠름하고 멋지다.
하지만 그런 선정의 삶 또한 내 눈에는 답답하게 보였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과거 급제는 떼 놓은 당상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명석했던 선정이건만, 혼인을 치르자마자 남편 뒷바라지에 아이들 육아에 시집 살림을 전부 떠맡아 하느라 글공부조차 제대로 할 수 없어 힘들어하는 모습. 남편이 벼슬에서 물러나고 집안에 곤궁해지자 결국 선정이 몸소 차 농사를 지어 장사에 나서야 했던 모습. 이런 모습은 결국 여성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남성 중심 사회 구조의 재확인 같은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선정의 삶이 워낙 알려지지 않은 탓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구이거나 사실인지 구분하기 힘들다는 점도 아쉬웠다. 선정은 정말 정조의 후궁이 될 뻔했을까. 선정이 연경에 갔을 때 건륭제의 마음에 들었다는 건 과장이 아닐까. 선정처럼 머리 좋고 공부하기 좋아하는 며느리를 선정의 시부모와 시댁 식구들은 마뜩잖게 여기지 않았을까(시어머니는 마뜩잖게 여겼다고 나온다). 생애에 관해 알려진 것이 많지 않아 대부분을 상상으로 메울 수밖에 없다는 게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