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반백수 생활을 위하여
신예희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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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차 프리랜서 신예희의 독립생활 노하우가 담긴 책이다. 저자가 오랜 세월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경험한 고충들과 터득한 노하우들이 진솔하게 담겨 있어 프리랜서를 꿈꾸는 사람은 물론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만하다. ​ 


프리랜서는 결코 '프리'하지 않다. 프리랜서는 조직의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것이 아니다. 프리랜서가 되는 순간 나이가 몇이든 경력이 얼마나 되든 간에 사장이고 CEO다. 사람들은 프리랜서라고 하면 '좋아하는 일 하면서 돈도 벌어서 좋겠다'라고 하지만, 실상 좋아하는 일 하면서 돈까지 버는 프리랜서는 몇 안 된다. 프리랜서도 샐러리맨과 마찬가지로 좋아하지 않는 일을 돈 때문에 할 때도 있고, 그마저도 돈을 제대로 못 받는 경우도 많다. 샐러리맨과 달리 프리랜서는 일을 잘 못 하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커버해줄 상사나 동료도 없다. 보험료도 비싸고 대출도 잘 못 받는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랜서로 일하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일을 잘해야 한다. 능력이 출중하기도 해야 하지만, 사회인으로서 기본적인 매너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성격이 내향적이고 단체생활을 잘 할 자신이 없어서 프리랜서가 되고 싶은 거라면 재고해보는 것이 좋다. 프리랜서로 일하면 스스로 영업도 하고 실무도 하고 돈 달라는 소리도 해야 한다. 성격이 내향적이고 단체생활을 잘 할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조직에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는 게 낫다. ​


그렇다고 싫은 일을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첫 책을 출간할 때 편집자와 출판사의 의견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가 좀처럼 내 것 같지 않은 책을 받아든 씁쓸한 기억이 있다. 내 이름을 달고 나오는 내 책이므로 내 의견을 좀 더 반영했어도 되는데, 언제나 '을'의 위치인 프리랜서의 입장에 익숙하다 보니 편집자와 출판사가 '갑'이라고 생각했고 그 결과 좋지 않은 결과물을 받아들었다. 


프리랜서는 출근과 퇴근의 경계가 불명확해 번아웃에 빠질 위험이 높다. 그래서 저자는 프리랜서 20년 차가 되는 해에 '셀프 안식년'을 가졌다. 방콕, 포르투갈, 스페인, 터키를 여행하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새로운 경력을 계획하는 기회로 삼았다. ​ 

나는 왜 이럴까, 해놓은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는 남에게 보여줄 일 없는, 내가 나에게 제출하는 '자기소개서'를 써보기를 권한다. 어떤 교육을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이 받았는지, 일과 관계있든 없든 나 스스로 좋아서 공부한 것이 있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지금 하는 일은 언제부터 어떻게 해왔는지, 경력은 얼마나 되었고 그동안 어떤 크고 작은 성과를 올렸는지 써본다. 그중 특히 뿌듯한 건 뭔지, 약한 건 뭔지도 써본다. 그러다 보면 속이 시원해지고, 꼬여 있던 실마리가 풀리기도 한다. ​ 


아이디어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을 때면 양파를 잔뜩 싸서 껍질을 벗기고 눈물이 나오도록 실컷 썬다. 양파가 없으면 대파라도 썬다. 한때는 구슬 꿰기에 몰두하기도 했고, 단순한 게임에 몰두하기도 했다. 이렇게 별것 아닌 일을 계속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이 비워지고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시험 전에 책상 정리부터 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랄까? 이 밖에도 가계부 정리, 체력 관리 등 실용적인 조언과 저자의 실제 체험이 반영된 진솔한 이야기가 잘 어우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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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인 내가 좋다 - 불친절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혼자살이 가이드
게일 바즈-옥스레이드 외 지음, 박미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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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결혼을 했지만 이혼 또는 사별로 홀로서기를 준비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인생 설계 조언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빅토리아 라이스는 50이 되던 해에 남편과 사별했고, 또 다른 저자인 게일 바즈옥슬레이드는 세 번 이혼했다. 이들은 이혼과 사별의 경험을 통해 얻은 유용한 팁들을 이 책에 담았다. 홀로서기의 단계별 감정 관리법을 비롯해 무례한 말에 웃으며 대처하는 법,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법, 1인용 삶에 맞게 물건을 정리하고 소비 습관을 바로잡는 법, 인간관계를 재정비하는 법 등 실용적인 팁들이 대부분이다. ​ 


이들은 이혼이나 사별을 맞닥뜨리고 혼자가 되었을 때 걱정이나 두려움을 피하려 하지 말고 충분히 '걱정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걱정은 나쁜 게 아니다. 걱정의 반대말은 회피다. 걱정을 회피하면 오히려 망상에 시달리게 된다. 충분히 걱정하고 고민하다 보면 문제의 실마리가 보이기도 한다. 가령 혼자가 되면 대부분의 경우 이런 고민에 시달린다. 돈은 충분한가? 이 집에서 계속 살 수 있을까?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 일자리를 다시 알아봐야 할까? 다만 이때 중요한 결정을 바로 내리지는 말고 종이에 적거나 주변 사람들과 충분히 상의한 후 결정해야 한다. 적극적이고 저돌적인 성격이라면 더욱 그렇다. ​ 


혼자 사는 사람에게 가장 큰 걱정은 자금난이다. 혼자 산다는 것은 내가 내 인생의 CEO가 된다는 것이다. 혼자 살려면 돈을 많이 벌어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자산 내역을 정리하고 소비 습관을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에는 혼자의 삶에 적응하기 위해 살펴봐야 할 자산 관리 체크리스트를 비롯해 유산, 보험금 관리, 이혼 시 재산 분할, 위자료 등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나온다.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기가 버겁다면 지인 또는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저자는 지인보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을 추천한다. 아무리 지인이 믿을 만해도 아마추어는 한계가 있다. 프로의 실력을 믿어보자. ​ 


병마와 씨름하던 배우자를 떠나보냈든, 오랜 갈등 끝에 이혼을 결정했든, 혼자가 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기 관리다. 혼자가 된 사람은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상태다. 누군가의 돌봄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다. 저자는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운동, 반신욕, 음악 감상, 독서, 춤추기 등 다양하다. 자기 관리에 들이는 시간과 비용, 노력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한 투자이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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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잠들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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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대표하는 추리소설 작가 미야베 미유키가 1991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 <용은 잠들다>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재출간 되었다. ​ 


잡지사 기자인 고사카 쇼코는 폭풍우 속에서 운전을 하다가 길 위에 서 있는 소년을 발견하고 차에 태운다. 소년의 이름은 이나무라 신지. 폭풍우 속을 달리던 두 사람은 도로 중간의 맨홀 뚜껑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차를 멈춘다. 밖으로 나간 고사카는 어린이용 노란 우산을 발견하고, 정황상 어린아이가 맨홀에 빠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린다. 고사카는 기자 정신을 발휘해 취재를 시작하고, 이나무라는 그런 고사카를 돕는다. 고사카는 이나무라에게 혹시 범인이 아니냐고 묻는데, 이나무라는 자신은 범인이 아니며 남의 마음이나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초능력자라고 밝힌다. ​ 


2014년에 읽은 소설을 4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으니 새로웠다. 그 시절에는 미야베 미유키가 <화차>나 <모방범> 같은 정통 미스터리 소설만 쓰는 줄 알았기 때문에 사이코 메트리라는 초능력을 소설에 도입한 게 무척이나 신기했다. 이후 <낙원>을 비롯해 초능력이 등장하는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여러 권 읽은 지금은 신기함보다도 반가움, 친숙함의 감정이 앞선다. 무엇보다도 초능력이 결부되어 있는 범죄 사건을 통해 인간의 이성과 비이성, 능력과 초능력, 의식과 무의식에 관한 논의를 자연스럽게 풀어놓는 작가의 스킬이 놀랍다. 미야베 미유키가 요즘은 이런 묵직한 소설을 잘 쓰지 않기에 더 반갑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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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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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의 일곱 자식 중 다섯째 자식이자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큰집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맏형이 양자로 떠났고, 맏형 노릇을 해야 했던 둘째형은 농사고 뭐고 다 싫다고 도시로 떠났다. 셋째형마저 도시로 떠나면 꼼짝 없이 농사를 지어야 할 상황이었지만, 셋째형은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하는 네가 도시로 가서 대학에 가는 게 낫겠다고 말했고, 덕분에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하고 쭉 도시에서 살았다. 그랬던 셋째형이 얼마 전 전립선암 선고를 받았다. 아흔네 해를 산 부친이 지난 여름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부친에 이어 가장 가까운 형마저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버지에게는 어떻게 여겨질까. 과묵한 아버지와 변변한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눠본 적 없는, 정 없는 딸인 나는 그저 멀찍이서 아버지의 심정을 혼자서 상상해보고 추측해볼 뿐이다.


2018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손홍규의 산문집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을 읽는 내내 나는 나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저자와 나의 아버지는 이십 년 가까이 나이차가 나는데도 두 사람의 삶은 상당히 비슷하다. 일단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라는 것이 그렇고, 식구처럼 데리고 살았던 소를 팔아 대학에 들어갔다는 것이 그렇고, 대학에 들어간 후로는 한국 사회를 바꿔보려 노력했으나 성공보다는 실패의 경험을 더 많이했다는 것이 비슷하게 보였다. 덕분에 나는 요즘 부쩍 궁금해진 아버지의 마음속을 이 책을 통해 대신 살펴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부모를 어떻게 생각할까. 고향에서 함께 자란 형제자매(외동인 저자에게는 친형제자매만큼 가깝게 지낸 사촌 형제자매가 있다)에 대해서는, 친척 어른들에 대해서는 어떤 추억을 가지고 있을까. 농촌에서 도시로 와서 살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대학에선, 대학 밖으로 나와선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을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평범하게 취업을 한 아버지와 달리, 저자는 어려서부터 간직했던 소설가의 꿈을 놓지 않았고 결국 그 꿈을 이뤘다. 그 과정이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가난은 늘 그를 따라다녔고,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시선 또한 그를 자유롭게 하지 않았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절망이 사무쳐 절망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시간이 길어졌다. 하나뿐인 자식을 대학에 보내려고 기꺼이 소를 팔았던 아버지는 자식이 등단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다짜고짜 월급이 얼마냐고 물었다. 힘들게 일하고 가진 것 다 팔아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낸 아들이, 자신이 높은 곳에서 쓰러지고 손가락 한 마디가 잘리고 의식을 잃고 혼수 상태에 놓이는 심각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무력하게 떨기만 하는 존재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30년 넘게 한 직장에서 일하며 나와 동생을 대학에 보내고 살뜰히 뒷바라지를 한 나의 아버지 역시, 이 나이 먹도로 제 앞길 못하고 꿈을 쫓아 다니는 나를 보며 비슷한 심정을 느낄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저자가 대학 시절 친구 자취방에 얹혀 살았을 때 겪은 일화다. 자취방 벽 너머에는 주인 노부부가 살았는데, 노부부는 세입자의 집에 얹혀 살러 온 청년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테고, 저자 역시 자격지심 때문에 노부부의 눈초리가 쌀쌀맞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자가 편도선염을 심하게 앓다가 자기도 모르게 절로 끙 소리를 냈는데 벽 너머에서 똑, 똑, 똑 하고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아파도 조용히 하라는 뜻인 줄 알고 투덜댔으나, 그 소리가 계속 이어지자 그제야 노부부가 자신의 안부를 걱정해 괜찮냐고 묻는 뜻인 줄 알았다. 얼마 후 쾌차한 저자는 벽 너머에서 신음이 들리는 듯해 잠시 망설이다 벽을 똑, 똑, 똑 두드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응답이 없어서 가봤더니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저자 덕분에 노인은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나 목숨을 구했고, 저자 또한 노부부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어 기뻤다.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것 같아 보여도 벽 너머에는 사람이 있다. 용기를 내 벽을 두드리면 누군가가 응답의 뜻으로 벽을 두드려 줄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면 내가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내가 누구를 돕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아버지도 그렇게 벽을 두드리며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거나 받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중에 가장 큰 수혜자는 단연 나일 것이고, 나는 언제든 아버지가 벽을 두드리면 똑, 똑, 똑 하고 응답하거나, 벽을 두드리지 않더라도 먼저 똑, 똑, 똑 하고 두드리는 존재여야 할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당신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리는 사람이 되길 바랄 텐데, 정작 나는 가장 가까운 아버지의 마음조차 두드리지 못하는 겁쟁이에 게으름뱅이다. 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가의 글을 읽는 것으로 아버지의 삶을 대신 알았다고 자위하는 것은 과연 옳을까. 아버지가 있는 기억 속으로 집요하게 침잠해 들어간 저자의 글을 읽으며, 나는 나 자신도 과연 이렇게 솔직하고 의미 있는 글쓰기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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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12-31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치님 덕분에 항상 좋은 책 많이 배워 갑니다. 특히, 무민을 알게 된 것은 정말 좋은 추억이었습니다. 2019년에도 좋은 책 알려 주시고 새해 복 맣이 받으세요!^^:)

키치 2019-01-01 14:24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 감사합니다. 저도 무민을 무척 좋아해서, 저로 인해 무민을 알게 되셨다니 넘 기쁘네요 ^^ 2019년에도 좋은 책 많이 만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서니데이 2018-12-31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치님, 새해인사 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책 이야기 감사했습니다.
내일부터 2019년 새해가 시작됩니다.
가정과 하시는 일에 건강과 행복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따뜻한 연말, 그리고 행복한 새해 맞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키치 2019-01-01 14:24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늘 건강하시고 편안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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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의 '작' 자는 '지을 작(作)' 자를 쓴다. 작별이란 헤어짐을 짓는 일, 떠남을 만드는 일인 것이다. 올해 나는 가슴 아픈 작별을 당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십 년 넘게 사귄 친구가 지난 여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병이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기에 나는 내심 내가 친구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별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작별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준비 못 한 이별이 슬프고 당황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원치 않는 작별을 당한 일이 서운하고 분했다. 나는 친구에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였나 싶었다.


제12회 김유정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한강의 <작별>을 읽으며, 나는 작별 당하는 사람의 마음이 아닌 작별하는 사람의 마음을 상상했다. 이 소설에는 어느 날 갑자기 눈사람이 되어버린 여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눈사람이 된 여성은 차갑게 얼어붙었다가 속절없이 녹아내리는 자신의 몸보다도, 자신이 녹아내린 후 세상에 남게 될 사람들을 걱정한다. 키는 엄마보다 한참 크지만 속은 아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인 채인 아들, 성실한 성격이 뭇사람에게는 미욱함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어린 애인의 남은 날들을 염려한다. 작가는 눈사람이 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지 않았으나 나는 이것이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택한 작별 혹은 죽음의 은유로 여겨졌다. 남는 사람은 떠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지만, 떠나는 사람은 남는 사람이 안타깝다. 남는 사람은 작별 당하는 상황 자체를 원망하지만, 떠나는 사람은 작별 후에 닥칠 일들을 걱정한다. 사별의 경우, 작별의 후유증은 오로지 남는 사람이 지게 될 몫이기에 떠나는 사람의 마음은 결코 편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별하는 마음이란 얼마나 처절하고 긴박한 상태인 건지, 나는 영영 알 수 없을 것 같다.


수상집에 함께 실린 다른 작품들은 이별보다도 우리가 작별을 온전히 경험하고 납득할 수 없게 만드는 한국 사회의 문화 또는 관습을 집요하게 묘사하는 내용이 많다. 강화길의 <손>에는 도시에서 살다가 남편이 외국에 단신 부임을 하러 가는 바람에 시골 시댁에서 살게 된 여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교사인 그는 시골 학교의 교사로 새로 부임하게 되는데, 순진하게만 보였던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점차 곱지 않아진다. 그는 어린 딸 하나만이라도 지켜보려고 애쓰지만 쉽지 않다. 권여선의 <희박한 마음>에는 층간 소음 때문에 고생하는 노년의 여성이 나온다. 그는 소음이 들릴 때마다 과거의 기억이 소환되고, 과거의 기억이 소환될 때마다 유쾌하지 않은 추억 때문에 쓴웃음을 짓는다. 어린 여자에게 가혹했던 세상은 늙은 여자에게도 가혹하다. 김혜진의 <동네 사람>에는 이사한 지 얼마 안 된 레즈비언 커플이 마을 공동체에서 점점 배제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파트너가 폐지 줍는 할머니와 엮이면서 벌어진 일이 마을 전체에 퍼지면서 커플은 이 마을에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물러갈 곳도 없기에 두 사람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정이현의 <언니>에는 스스로에게는 가차 없었으나 화자에게 더없이 착하고 친절했던 '구인회'라는 여성이 나온다. 남자 아이들이 어떻게 보든 앞머리를 까올리고 뒷머리는 질끈 묶은 채로 열심히 공부했던 언니, 중국에서 살다온 사람보다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만큼 전공 공부에 최선을 다했던 언니,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하고자 마음먹은 일은 모두 해냈던 언니를 세상은 알아주지 않았다. 알아주기는커녕 가차없이 이용하고 미련없이 버렸다. 지난 여름 세상을 떠난 나의 친구도 어쩌면 비슷한 일을 당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동창 중에 가장 먼저 취업에 성공하고 서른이 되기 전에 집 한 채를 마련할 만큼 악착 같이 살았던 친구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건, 스스로 가족과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작별을 하기로 마음먹게 된 건 어쩌면 친구 자신이 쓰디쓴 작별을 당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어떤 사람이나 조직이 아니라, 이 세상으로부터.


더는 작별 당하고 싶지 않고 스스로 작별하고 싶어질 일도 겪고 싶지 않다. 새해에는 누구에게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작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다. 뒤늦게나마 보듬어주고 싶고 끌어 안아주고 싶다. 그러면 내가 겪은 작별이 덜 서운해질까. 네가 고해야 했던 작별이 덜 고통스러워질까. 눈이 되어 내린다면 눈사람으로라도 다시 만나고 싶다. 아니, 눈사람이 되면 다시 녹을 테니, 더는 녹지 않게 공기가 되렴. 나도 네가 더는 외롭거나 힘들지 않도록, 공기처럼 어디에든 있도록 할게. 어디서든 다시 만날 수 있게. 더는 작별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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