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는 독특한 점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왕조의 수명이 유독 길다는 것이다. 신빙성이 부족하지만 고조선은 거의 2천년, 고구려, 백제 700년 정도, 신라는 900년, 발해 200년, 고려 500년, 조선 500년이다. 중국은 거의 대부분의 왕조가 200-300년 정도의 수명을 보인다. 한국은 이에 비하면 무척이나 긴 편이다. 고작 200년이었던 발해의 수명이 상당히 의례적으로 느껴진다.

 가장 최근의 왕조는 역시 조선과 고려다. 둘 다 강역이 한반도 정도로 만주 지역을 상실한 왕조였고 역사도 500년 정도로 비슷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거의 조선에만 머물러 있다. 대부분의 사극이나 영화, 책 등의 저작물은 고려가 아니라 조선이 주제다. 이유는 아무래도 두 가지 일 듯 하다. 아무래도 시기적으로 훨씬 가까워 관심과 공감이 가고(조선은 가깝게는 100년에서 멀면 500년 전이지만 고려는 여기에 500년을 더 멀리 해야한다.), 조선왕조실록이나는 막강한 기록물 덕분에 창작물로 다루기 무척 편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관한 책을 조금 보았지만 고려 관련 저작물이 적어서 인지 나도 고려에 관해 본 책은 위 6권 정도가 전부다. 물론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공영방송에서 고려-거란 전쟁이 인기 속에 방영 중이기에 박시백의 고려사를 오늘 들춰보았다. 박시백은 조선왕조실록도 거의 10년 동안 그렸는데 기록이 풍부해서 1권 당 거의 왕 1명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하지만 이번 고려사는 역시 기록이 부족해서 딱 5권으로 끝나는 듯 하다. 4권까지의 내용이 원갑섭기이니 아마도 5권이 마지막일 것이다.

 고려는 조선과 제법 다르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고, 유지기간 내내 중원이 안정되었기에 철저히 사대할 수 밖에 없었다. 신분제는 고려보다 발전했고 능력주의 국가였지만 지나친 유학에 대한 신봉이 자주성과 스스로의 발전, 국제관계에서의 뒤쳐짐을 낳았다. 특히, 근대 들어 해양세력의 대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중국에만 의지한 나머지 임진왜란을 겪고 급기야는 일본에 의해 망국하고 말았다. 

 고려는 불교국가다. 물론 이는 신앙과 기복의 측면이고 통치이념은 조선 만큼은 아니지만 유학에 의지했다. 유지 기간 내내 중국이 안정되지 못했기에 자주성은 조선보다 강했지만 강한 북방왕조에 의해 끊임없이 침략당했다. 그래서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국시에 걸맞지 못하게 만주로의 진출을 커녕 내내 방어에 급급할 수 밖에 없었다. 골품제와 매달렸던 신라에 달리 과거제를 도입하여 신분제가 진일보 하였다.

 박시백의 고려왕조 실록은 역시 태조부터 시작한다. 태조 왕건은 뛰어난 능력으로 통일을 이뤄낸다. 견훤은 강대한 적이었는데 태조는 구 신라 세력과 호족 세력에 유화책을 견훤은 강경책을 펼쳤다. 이것이 차이가 되어 태조에겐 여러 세력이 귀순해왔고, 견훤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견훤은 후계구도에 실패하고 큰 아들 신검의 쿠데타로 실각하며 통일이 이뤄진다 견훤이 후계를 제대로 세우거나 집안 단속 잘하기, 혹은 신라 세력에 유화책을 썼다면 통일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태조의 이런 유화책은 통일엔 성공적이었지만 고려 초기에 적잖은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온다. 태조는 호족의 기득권을 모두 보장하고, 왕씨성을 남발했으며, 많은 호족 딸을 부인으로 삼는다. 그렇다보니 2대 임금 혜종, 3대 정종이 정치적 격랑에 휘말려 빠르게 승하한다. 아마도 암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4대 광종이 강한 힘으로 노비안검법등을 시행하고 호족 세력을 숙청하기 시작하자 안정을 찾는다. 고려 초기엔 중국의 정세가 흔들려 많은 중국, 발해, 여진, 거란 귀화인이 고려로 들어온다. 고려는 이들은 잘 받아들여 국력을 강화한다. 

 고려는 성종대에 이르러 상당히 안정된다. 하지만 거란이 침공한다. 이들은 북방을 평정하고, 송을 치려했는데 그려려면 후방의 고려를 평정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고려 조정은 거란에 적대적이었고 쉽게 호응하지 않았다. 이에 3차례에 걸친 침입이 이뤄지나 고려의 군사력은 막강했다. 거란은 진군할 때 마다 고려의 여러 성을 점령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진군해도 후방이 불안했고, 늘 늘 이로 인해 급습을 받거나 격퇴되었다. 3차침입에선 강감찬에 의해 귀주에서 10여만이 섬멸된다. 이 사건 이후 거란과 고려의 관계는 안정된다.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써주며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었고 거란 역시 고려의 매운 맛을 본 후 더이상 침공하지 않는다

 이후 준동한 것은 여진이었다. 윤관과 척준경을 필두로 이들을 어렵사리 제압하고 동북 9성을 쌓지만 워낙 성간 거리가 멀고 변방이라 관리가 어려웠다. 여기에 거란 전쟁으로 국력이 크게 소모된 상태였다. 결국 여진의 요청에 고려조정은 9성을 내준다. 20만 대군이 수년에 걸쳐 어렵게 얻어낸 땅이었다. 여진은 이후 거란을 멸하고 금을 세운다. 하지만 금은 요처럼 고려에 고압적이었으나 침공하지 않았다. 고려의 강성함, 그리고 여진황제의 조상이 고려인이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따른다. 하여튼 고려는 거의 100여년간 모처럼의 평화를 누린다

 하지만 평화는 내부에서 깨어진다. 어리석은 임금 의종이 즉위하는데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고 방탕했다. 고려판 연산군이랄까. 그는 재위 20년이 넘어 무신 정변에 의해 실각한다. 이후 고려는 난장판이 되는데 정중부, 경대승, 이의방, 이의민 등 집권자가 계속해서 교체되었기 때문이다. 이 난장판은 최충헌이 최씨무신정권 시대를 열며 안정된다. 최충헌은 정치적 감각이 있어 정국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입맛대로 정부제체를 조직하고 세대를 넘어서는 장기집권 시대를 열게 된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 그리고 최항, 최의까지의 시대다. 그리고 이 최씨 집권 시기에 원이 일어선다. 초기 고려는 원, 거란과 협력하여 금의 잔당을 토벌하는 등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원은 고려에 슬슬 무리한 요구를 시작한다. 이에 원 사신 저고여가 살해당하고 이를 빌미로 고려를 침공한다. 고려는 최씨무신정권으로 인해 상당히 국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여기에 원은 사상 최강의 군대로 고려는 전역이 초토화된다. 고려 조정은 사신을 달래어 몇 차례 원의 군대를 물리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최우에 의해 강화도로 천도한다. 최우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선 원에 반드시 저항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최우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고 육지를 버리면서 백성들은 생지옥에 빠지게 된다.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식량이 부족했고 고려의 전술은 청야전술로 삶의 터전도 버려야 했다. 각지에서 살육 약탈이 일어났고, 원으로 끌려간 고려 백성만 수십만이었다. 이 기간은 거의 40년에 달하는데 어쩌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피해는 이 때에 비하면 오히려 약했을 거란 생각마저 든다. 

 최씨 정권이 최의 때에 끝나면서 강화가 이뤄진다. 고려 원종은 이후 황제가 되는 쿠빌라이이 잘 항복하면서 그의 관심을 산다. 그래서 고려는 작은 나라임에도 오래 버텼고 무엇보다도 항복을 잘 했기에 국력에 비해 상당한 대접을 받는다. 쿠빌라이는 원종의 요구를 많이 들어주었지만 남송과 일본의 점령에 집착한다. 남송은 정복하지만 일본 원정은 태풍에 의해 계속 실패한다. 고려는 배를 만들고 병사를 보내는등 시달리자만 쿠빌라이가 죽고나서는 이 문제가 끝난다.

 고려는 제법 대접을 받았지만 원의 제후국으로 상당한 간섭을 받았다. 이전에 양계 지역이었던 곳들이 쌍성총관부와 동녕부로 원의 영토로 전락하고 삼별초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탐라도 빼앗긴다. 고려의 왕들은 원의 공주와 혼인하였고 어려서 원에서 자라나게 된다. 고려는 이전까지 중국의 왕조들에게 제후국을 칭하면서도 사실상 황제에 해당하는 정부조직과 칭호를 사용해왔는데 이게 모두 불가능해진다. 또한 왕은 원에 친히 입조하였고 원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왕이 교체되는 일도 많았다. 이러다보니 고려가 아닌 원에 충성하고 배신하는 자들이 많았다.

 원은 고려에 처녀를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환관을 요구하기도 했다. 고려는 이 때만 해도 조정에서 거세된 환관이 없었는데 원의 요구에 의해 환관과 처녀는 보내게 된다. 하지만 이들 처녀와 환관이 원에서 처신이 좋았고 인기가 좋았다. 그래서 고려 여인들과 환관들이 원제국 내에서 상당한 권력을 차지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이에 고려에서는 딸과 자식을 환관으로 만들어 원으로 자발적으로 보내는 일도 성행하게 된다. 

 책의 4권까지의 내용은 원간섭기 까지다. 이후 원이 무너지며 공민왕이 들어서고 고려의 마지막 개혁이 실패하며 조선으로 넘어가는 내용이 5권의 내용이 될 듯하다. 아무래도 조선왕조실록의 1권과 상당히 겹치게 될 듯한데 고려의 입장에서 망국을 자세히 서술하면서 차별성을 두지 않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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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보호자의 돌봄 아래서 시작한다. 이 때 보호자인 부모는 내가 무한한 돌봄과 보호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자식에게 무척이나 절대적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그런 부모의 그늘은 정신적으로도 깊게 남아서 거의 평생을 간다. 그래서 사람은 다 늙은이가 되어서도 죽는 순간 부모를 찾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의 부모가 언젠가는 돌아가시리라는 걸 염두에 둔다. 하지만 이는 다소 막연한 생각에 불과해서, 막상 상황이 닥치면 모든 것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 실제로 오래도록 부모의 절대적 돌봄을 받다가 갑작스레 거꾸로 돌봄을 주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자식들은 거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부모에 대한 돌봄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식에 대한 돌봄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는 자식이 정상적으로 태어난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며 자식이 장애인으로 태어나거나 장애인이 되어 더욱 많은 돌봄을 요구하는 상태가 되었을 경우는 더욱 그렇다. 책' 다시 만날 때까지'와 '내 인생의 무지갯 빛 스승', '자폐 아빠와 아들의 작은 승리'는 장애인 자식을 만나 자식의 인생을 산산히 갉아넣어가며 버티고 또 버티는 부모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자신의 생애를 거의 포기하면서도 자식을 놓치 못하고, 그리고 그러면서 자식과 더불어 자신의 매우 어려운 새 인생을 그려나간다. 

 돌봄 문제는 고령화가 전 세계에서 가장 심한 한국사회에서 가까운 시일내에 가장 커다란 사회 문제로 대두할 것이 분명하다.(여기에 한국은 그 적은 출산률 속에서도 상당한 비중으로 선천적 장애아들이 태어나고 있다.) 책 '일하는 딸들'에서는 이런 부모 돌봄 문제에 관한 책이다. 책에는 세계 최고 선진국이지만 복지에서만큼은 소홀한 미국답게 저자 자신이 돌봄을 직접 해결하고 고민해야할 여러 문제에 대한 매우 현실적인 소회가 담겨 있다. 

 미국도 고령화가 심각하긴 매한가지다. 인구 3억 4천만 미국 인구중 매일 1만의 미국이 65세가 된다. 2050년이면 이 고령층이 지금의 2배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현재 170만명인 돌봄 제공자는 2030년엔는 무려 570만에서 66만에 될 것으로 예상된다. 가정에서 수행하는 재가 돌봄 서비스는 대부분 건강보험이나 저소득층 의료 보호예산으로 제공되는데 두 곳 모두 벌써 재정압박상태라 향후의 역할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한다. 고령하가 덜한 미국이 이럴진데 노인인구만 급격히 늘어날 한국은 어떨지 상상이 어렵다. 

 결국 이런 국가재정과 사회안전망의 빈큼은 가족의 무보수 노동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미국에서 무보수로 노인이나 18세 이상 장애인을 돌보는 미국인은 무려 4400만 이상이다. 이들은 대개 여성이고 40대 후반이다. 최근 남성 가족 돌봄 제공자도 늘고 있지만 아직 여성에 비하면 적다. 돌봄 제공자의 역할은 평균 4.6년이다. 그리고 이들이 돌봄에 투여하는 시간 주당 평균 24.4시간이다. 이 무보수 돌봄 노동자는 갑작스레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며 큰 어려움을 겪는다. 돌봄에는 의료, 법률, 금융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돌봐야 하니 당연히 의료상식이 요구되고, 부모가 온정신이 아니거나 거동이 되지 않으면 당연히 법률적 대리와 금융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도움을 주는 곳은 공식적으로 거의 없다. 그렇다보니 돌봄 제공자들은 22%가 이로 인해 건강의 악화를 느끼게 된다. 

 이런 과도한 돌봄 업무로 돌봄 제공자의 70%는 자신의 직장 업무를 조정하게 된다. 그들은 부담이 적은 업무를 택하고 무급휴직을 하며, 조기 퇴직하기도 한다. 그런데 돌봄 노동자의 상당수가 40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상당한 무리가 따르는 일이다. 40대는 인생 그 어느 순간보다도 가장 돈을 많이 필요로 하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런 일의 감축으로 인해 이들은 많은 손해를 감내해야 한다. 소득이 줄고 각종 직장 보험혜택도 줄기 때문이다. 

 돌봄은 끝을 알 수 있는 것와 아닌 것이 있다. 끝을 알 수 있는 돌봄은 노령화한 부모가 암 등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수년 내에 죽음을 예상할 수 있는 경우이며, 끝을 알 수 없는 돌봄은 자신보다도 어린 장애자식 돌봄이나 부모인 경우, 노화, 뇌졸중, 치매 등으로 인한 경우로 스스로 아무것도 할수 없어 돌봄이 필요하지만 당장 돌아가실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다. 양자의 차이는 매우 크다. 전자는 그래도 힘들지만 끝이 보이기에 버텨내게 되지만 후자는 정말로 언제까지 내가 이일을 해야하는지 가늠하기 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년기 가족을 돌보는 평균기간은 4년이지만 무려 15%가 10년 이상 이일을 수행하게 된다. 

 이런 어려운 돌봄을 해결하려면 사회적 노력과 개인적 노력 양자가 병행되어야 한다. 미국은 무급휴직을 허용하지 않는 몇 안되는 나라다. 사회적으로 이 가치를 인정하려 노력해야 한다. 미국에서 가족 돌봄 노동자는 무급으로 연간 무려 370억 시간을 사용한다. 최저시급으로 계산해도 무려 4700억달러의 비용이다. 그리고 미국의 기업은 기업에서 일하는 개인의 연간 돌봄 제공으로 생산성 손실이 무려 171억에서 336억 달러에 이른다. 때문에 현명한 기업 관리자라면 돌봄 제공 직원을 지원하여 이들이 생산성 손실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이득일 것이다. 

 책에는 사회적 지원이 워낙 미비해서 그런지 개인적 방책을 강조한다. 개인이 돌봄에 실패하는 것은 대부분 사회가 돌봄을 강하게 요구하고 그것에 대해서 이타적 이미지 심지어 축복이라 칭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압박과 기대에 개인은 그런 기대에 부응하려 하나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요구다. 그 개인은 자신의 삶은 살아가는 사람이고 부모이자, 직장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아이를 돌보고, 여기에 돌봄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래서 저자는 돌봄 노동자는 자신의 삶과 돌봄 사이에 정확한 경계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다음의 4가지 질문을 강조한다.

 1.우선 부모님에 대해 내가 아는 어떤 정보가 의사 결정에 유용한가. 

 2.부모님이 살아온 방식을 바탕으로 볼 때 갖아 중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3.부모님께 최선이라 판단되는 것은 무엇인가?

 4.돌봄제공자로서 내게 최선이라 생각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부모가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신호를 보는 것도 중요하다. 이 신호를 늦게 볼 수록 사태는 악화하고 돌봄의 강도도 커지기 때문이다. 이는 미개봉상태로 쌓은 우편물들, 잦은 부모의 넘어짐, 식사 생활의 변화(갑작스레 요리를 하지 않고, 유통기한 지난 음식이 냉장고에 있거나 냉장고거 텅비어 있음), 기억력의 감퇴, 정돈이 안된 상태, 운전 능력의 저하다. 이는 부모가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신체적 능력, 인지적 능력이 감퇴되었음을 보이는 징후다. 

 저자는 더불어 돌봄 노동자이자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권리장전을 제시한다. 

 당신은 당신의 삶의 권리가 있다.

 당신은 경계를 설정한 권리가 있다.

 당신은 생활비를 벌 권리가 있다.

 당신은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

 당신은 건강을 유지할 권리가 있다.

 당신은 그럭저럭 괜찮은 상태로 지닐 권리가 있다.


 한국은 저출산에 급격히 고령화하고 있다. 수십년 내로 65세 이상 인구는 넘쳐나고 이를 돌볼 가족 돌봄 노동자마저도 현격히 줄어들 것이다. 여기에 한국은 노인 빈곤률이 세계 최고이고 국민 연금등의 사회 안전망도 형편없다. 이런 상황에 평균 수명은 세계 5위 안에 든다. 적은 가족 돌봄 노동자가 자신의 삶을 뒤로하고 부모의 부양에 뛰어들게 될 가능성이 그 어떤 나라보다도 높은 것이다. 아직 여유가 있을 때 이를 개인에게 맡기지만 말고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어 놔야 할 것이다. 부모 돌봄에 매달리게 될 젊은이가 출산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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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정말 수작이다. 처음 봤을 때도 좋았지만 가끔 TV로 재방을 봐도 눈을 떼기 힘들다. 영국의 한 탄광 마을 소년이 마초적 분위기 속에서도 하라는 권투는 안하고 춤에 눈을 떠 마침내 런던으로 진출해 프로 발레리노가 되는 자전적 이야기다. 명화들이 그렇듯 이 영화는 영국 현대사의 갈등 국면도 놓치지 않는데 바로 빌리가 사는 마을이 탄광촌 더럼이라는 사실이다. 아버지와 형은 광부고 빌리가 사는 마을 집들은 하나같이 비슷하게 생겼다. 막 집권한 대처 정권은 탄광을 정리하고 있었고 경찰력을 동원해 파업을 무력 진압했다. 강성하게 파업하던 빌리의 아버지는 빌리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정권에 굴복하여 일을 하러 나서고 그걸 본 큰 형은 오열한다. 

 이 모든 사단의 배후엔 신자유주의의 대두와 그것을 영국에서 실행한 마거릿 대처가 있었다. 그래서 2013년 대처가 죽었을 때 영국의 노동자나 평민들은 '마녀가 드디어 죽었다'라는 표현을 알 정도였다. 대처는 영국의 제조업과 노동조합을 파괴했으며 가장 강성했던 것이 광부였기에 이들 집단을 확실히 무너뜨렸다. 

 책 차브는 이런 무너진 영국의 노동 계층에 관한 책이다. 차브는 생소한 용어인데 아이를 의미하는 집시 언어인 차비(chavi)에서 유래한 용어다. 안 그래도 유럽에서 무시하는 집시의 언어 인데다 아이를 의미하는 용어이기에 차브는 오늘날 본래의 뜻을 넘어서 영국내의 급증하는 무식쟁이 하급쟁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확대되었고 급기야 2005년 처음 사전에 등재까지 되었다. 

 세계 2차대전이 끝나고 서구 사회와 산업화를 이룬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는 처음으로 상당히 균질한 집단인 소위 중산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는 여러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데 우선 정치적으로 마침내 성별 빈부 신부를 넘어선 대중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게 되어 사회 지도층이 하층민의 눈치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는 지금과 달리 서구 사회도 상당수 노동자들이 서비스 업이 아닌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제조업은 고용이 숙련공을 요구하기에 고용이 안정적이고 대우가 좋았다. 또한 균질한 노동조건을 갖추고 있어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상대적으로 연대하기도 좋았다. 세 번째는 당시 경제가 케인즈 주의였다는 것이다. 세계대전마저 일으킨 대공황 이후 각국 정부와 경영층들은 노동자의 고용과 적정한 소득의 중요성이 가져오는 수요 요인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고 때문에 상당히 오랜 기간 임금이 상승하고 정부정책은 사회복지에 힘을 실었다. 게다가 당시는 공산주의와 냉전기간이었기에 체제의 우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사회복지는 더욱 강화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이 모든 것이 무너진다. 1970년대 오일쇼크가 불러온 스태그 플레이션으로 케인즈식 정부주도의 경제정책을 힘을 잃게 된다. 그 자리를 차지한 신 자유주의는 기업을 위한 자유를 중시하는 정책이었다. 임금이 높았던 서구의 제조업은 동아시아와 개도국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그 덕분에 서구 사회의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여기에 냉전도 사실상 끝나게 되어 마땅한 정치적 브레이크도 없었다. 그래도 사회민주주의 정부를 갖고 있던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이런 충격이 조금 덜했지만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영국과 미국은 그 변화가 컸다. 빈부격차는 크게 확대되었고 생산성 향상에 따라 같이 상승하던 노동계층의 임금 상승은 멈춰버렸다. 

 신자유주의는 사실 이전에도 있었지만 아직은 모든 걸 집어삼키지 않았던 능력주의도 크게 강화시킨다. 능력주의는 신자유주의와 딱 걸맞는데 상류층의 타고난 지위와 사회문화적 자산과 생산수단으로 자신의 지위를 대물림하고 더욱 강화하는 것을 능력으로 정당화해주고, 이들의 이익을 위해 일자리를 잃게된 다수 노동자의 딱한 처지 역시 능력 부족으로 정당화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을 비롯해, 미국, 다른 서구사회, 한국의 노동자들은 안정적이던 제조업 자리를 잃고 불안정한 자영업이나 서비스업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서비스업은 제조업과 달리 작업장이 균질적이지 않고 모두 파편화되어 있어 연대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구나 최근에 등장한 플랫폼 노동은 이를 더욱 힘들게 한다. 이들의 힘든 상황 역시 능력주의로 정당화 된다. 세계화로 인해 서구선진사회는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으로 인해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기 된다. 이들은 해당국가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상대적으로 저임금으로 자국인은 기피하는 어렵고 힘든 노동을 한다. 하지만 일자리가 흔들리는 저소득 노동계층에게 이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위험요소로 받아들여지며 또한 그런 측면도 실제 있다. 때문에 개도국 출신 외국인 노동자와 서구선진사회의 하층노동계급은 서로 갈등관계가 된다. 

 그리고 노동은 이분화한다. 소수의 상대적으로 능력이 뛰어난, 그리고 운이 좋았던 이들은 정규직으로 자리하며 여전히 상대적 고소득과 안정성을 유지하지만 다른 이들은 매우 불안정하고 급여도 적은 비정규직이 된다. 그리고 이런 정규직들은 비정규직과 연대하기 보다는 능력주의의 관점에서 이들을 오히려 폄훼한다. 또한 이런 관리직 위주의 정규직들은 자신들을 비정규직과 같은 노동자로 보기보다는 한층 더 위의 계층은 중간계층으로 인식한다. 

 때문에 책 차브에 등장하는 것처럼 이런 중간계층들은 노동계층을 차브라 부르며 멸시하고 이들과 같이 어울리지 않으려한다. 또한 이들의 실패를 거시 정책의 따른 흐름으로 보기보다는 능력의 부족함 혹은 성실함의 부족 혹은 자기 관리의 부족으로 치부하게 된다. 때문에 혐오가 생겨나며 이들에게 자리하는 복지정책에 대한 강한 의구심도 갖게 된다. 하지만 책 차브에 등장하는 것처럼 이들의 어려움의 상당수는 영국의 정책에서 기인한 것이다. 잘못된 복지로 인한 세수 손실도 크지만 부유층의 탈세로 인한 재정적 피해는 무려 5배나 더 크나 언론은 이를 주목하지 않는다.

 또한 정치인과 언론인도 달라졌다. 과거엔 주요 선진국에서 노동자 출신의 정치인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학력과 신분은 무척 상향되어 최근엔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 교수 정도 출신들이 정치인의 상당수를 차지하게 된다. 과거 노동조합이 강할 땐 지역과 그 지역의 노동자를 대변하는 지역지가 활성화되어 있었지만 지역의 경제기반이 무너지고 언론 역시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지금은 거의 중앙지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중앙지의 기자와 언론인들은 대부분 상류층 출신이다. 이런 사람들이 소위 차브로 불리는 노동계층에 대한 이해가 있을지는 상당히 의문이다. 

 해결책은 무척 요원하다. 4차 산업 혁명의 흐름은 제조업 노동자에게 유리하지 않다. 많은 것들이 자동화되고 인공지능과 기계에 의해 대체될 것이며 그나마 남아 있는 정규직 관리직들도 그런 시대엔 자리를 보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기업과 자본가 사회 상류층의 힘은 쏠림 현상으로 인해 더욱 강해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와 같은 연대나 중산층의 형성은 더욱 어려울 것이다. 혹여 수요를 보존하기 위해 정치권과 기업계가 다시 기본 소득같은 것을 실행하여 많은 여가를 누리고 정치에 관심이 많으며 서로 연대를 하는 새로운 중산층 시민계층이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매우 긍정적인 시나리오다. 과연 기본 소득을 할지 의문이며, 기본 소득을 한다해도 그들이 건강한 시민계층으로 자리 잡을지도 의문이고 모든 것이 개인화하며 매우 파편화한 지금의 시대에 동질적 문화란게 생겨날지도 의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세계는 미중 패권 갈등에 러시아-우크라니아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티인 전쟁, 그리고 이로 촉발된 고물가로 인해 경제가 무척 어려워진 상황이다. 십수년간 이뤄진 양적완화로 인한 돈파티로 부풀려진 자산가격과 많은 빚을 지고 있어 이것을 이자부담과 상환부담에 시달리는 얼마 남지 않은 중산층들이 이 파국을 어찌 헤쳐나갈지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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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미래에 2023년 7월 18일과 9월 4일은 훗날 한국 교육 대변환의 기점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7월 18일은 서이초 교사가 사망한 날이며, 9월 4일은 그 교사의 49재로 전국 교사들이 추모를 위해 공교육 멈춤의 날로 지정한 날이며 다음 주 월요일이다. 전국의 교사들은 서이초 교사가 사망한 날로부터 매주 토요일 전국교사집회를 서울에서 열고 있다. 교사들은 노동자의 기본권인 파업권 및 집회권 등이 없기에 수뇌부가 존재하는 조직적인 집회를 열지 못한다. 때문에 이 집회는 자발적인 성격으로 모이고 있는 한국 최초의 기이한 형태의 집회라 할 수 있다. 9월 2일에도 어김없이 집회가 열렸는데 7회차로 10만명 정도가 운집할 것으로 예상했던 것을 훨씬 상회하여 무려 25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였다.

 다른 여타 투쟁들은 집회가 계속 될수록 구성원들이 지쳐 동력이 조금씩 떨어지고 참여가 줄어들기 마련인데 이와 달리 전국교사집회는 그 회차가 거듭될수록 참여 인원과 강도가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이는 교육 당국과 정치권의 행동이 교사들의 기대치에 크게 못 미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며 그만큼 교육현장이 교사의 생존권과 인권을 다른 학생들의 학습권을 심각하게 유린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9월 4일 추모집회에 대한 교육당국의 강압적 태도가 크게 작용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직 이유는 좀 더 확인해봐야겠지만 두 명의 초등 교사가 또 다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국의 유초중등교원수는 거의 50만명으로 3일 집회 참여자가 25만명이라는 이야기는 무려 50% 이상의 교원이 집회에 참여했다는 뜻이 된다. 이는 49재가 바로 이틀 후이고, 9월 4일 공교육 멈춤의 날을 교육부가 협박성 공문과 자의적 법해석으로 억압했기 때문이다.

 사실 49재 모임 공교육 멈춤의 날은 서이초 교사가 사망하고 나서 바로 일각에서 제기된 의견이다. 하지만 그 때만 해도 그 실행 여부는 상당히 불분명 했다. 전국의 교사들은 태생적으로 선생이라 학생을 버리고 학교 현장을 떠나는 것을 쉽사리 실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국교사모임이 거듭 될 수록 공교육 멈춤의 필요성과 열기가 대두되었고 개학과 더불어 전국 거의 모든 학교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었다. 원래는 멈춤이었으나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사명인 직업이기에 대부분의 학교들이 학사를 조정하여 9월 4일을 재량 휴업일로 지정하고, 공교육을 멈추는 것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초중고교는 수업 일수가 연간 190일 이상으로 9월 4일을 재량휴업일로 지정하는 경우 일선 학교들은 기존의 겨울방학을 하루 줄여 못한 그날 못한 수업을 하루 더 하게 된다. 때문에 이는 사실상 공교육 멈춤이나 학습권 침해라고는 볼 수 없는 결정이었다. 현장의 열기에 미적지근했던 교장들도 대개 재량 휴업일 지정에 동참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교육부가 이런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재량 휴업일과 당일 교사의 연가, 병가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심지어 9월 4일 재량휴업일 지정이나 개별 교사의 연가, 병가에 대해 파면,해임까지 언급되었다. 이에 겁을 먹은 대다수의 교장들은 재량 휴업일을 철회했고 현재 학교 현장은 이 문제로 교사와 관리자들 간의 갈등이 불거지게 되었다. 사실 재량 휴업일은 학교장 고유의 권한으로 대개 학사가 시작되기 전 거의 모든 학교에서 지정한다. 지정일은 대개 개교 기념일이나 징검다리 휴일을 연휴로 만들기 위해 많이 지정하는데 역대 정권들이 갑작스레 휴업일을 만드는 경우에도 학기중 학교운영 위원회를 열어 재량 휴업일로 지정하곤 했다. 

 이번 정권도 10월 2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했는데 일선 학교가 만약 이 날을 재량휴업일로 지정하고 교육부가 일관성있는 태도를 보인다면 이것도 긴급사태가 아니니 불법이 되고 말 것이다. 교육부는 과연 그 때도 그런 협박성 공문을 보낼지 두고 볼일이다. 이런 사례를 잘 알고 있을 교육부가 공교육 멈춤의 날에 학교가 재량 휴업일을 지정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한 것은 그래서 자의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처음엔 개인의 고유 권한인 병가까지 불법으로 규정했는데 본인들도 이게 무리란걸 알았는지 이후 공문엔 병가만 슬며시 빼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음 주 월요일인 9월 4일은 심각한 교육 파행이 우려된다. 전국의 유초중고 교원의 상당수가 공교육 멈춤을 위해 병가를 쓸 예정이지만 재량 휴업일이 아니기에 학생들은 모두 등교하게 된다. 때문에 정상적인 교육 과정 운영은 기대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출근하는 교사가 많은 학교는 교장이나 교감 및 보건, 영양, 사서교사 등 학급을 맡지 않는 잉여인력으로 공백을 메꿔보겠지만 그것이 안되는 상당수 학교들은 합반을 시키거나 그것도 도무지 감당이 안되어 당일 아침에서야 긴급 휴교령 같은 것이나 귀가 조치 안내가 이뤄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급식 역시 전교생의 출석을 전제로 준비하였는데 학생들이 귀가하게 된다면 이 식재료 역시 못쓰게 된다. 이 모든 사태가 아침 1교시 이전에 대처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당일의 사태는 더욱 급박하고 어려울 것이며 여러가지 안전사고 문제가 날 가능성도 높다. 

 전국의 교사들이 9월 4일 역사상 최초로 공교육 멈춤을 하는 이유는 그간 교육 현장에서 바로 자신의 시민으로서의 인권과 생명체로서의 생명권, 그리고 교사로서의 가르칠 권리인 교권과 다른 대다수 건전한 학생들의 학습권이 작금의 교실 현장에서 거의 완전히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 과거 존경 받는 직업으로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권위있던 교사의 위치가 이렇게 까지 전락한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상당히 복잡히 작용했다.

 우선 90년대 김영삼 정부가 내세운 교육 소비자 개념이다. 독재 정권 시절 항상 국민의 단결을 요구 당할 때마다 군관민이 합심 하여란 표현이 자주 쓰였다. 이처럼 군과 관은 항상 시민 위에 있었던 존재였다. 그러던 것이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부터 민관군이란 용어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높은 군과 관의 위상을 낮추고 시민의 권리를 신장시키기 쓰인 표현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시민에의해 관에 제기되는 민원은 무조건 수용해야 한다는 문화와 제도가 각급 관청과 기관에 확산하게 되었다. 교육계도 이러한 요구를 받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학생과 학부모는 자신들을 교육 소비자로 그리고 학교와 교사를 자신들의 요구에 응하는 교육 공급자 정도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교사라면 누구나 학부모 심지어 학생에게서도 몇 번 쯤 들어봤을 "당신 월급 내 세금에서 나오는 것이다"라는 천박한 인식은 이런 흐름과 수준을 같이 한다. 이런 인식은 자신을 사장이나 손님으로 교사는 피고용이나 서비스 직원 정도로 인식하게 만든다.

 두 번째는 교육 현장에 대한 오랜 불신이다. 현재의 대부분의 학부모는 빠르게는 80년대 늦게는 2000년대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다. 당시만 해도 교권은 강했고, 교육 현장은 모든 면에서 열악했으며 교사에 의한 체벌과 학생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은 폭력적 언행, 촌지, 불공정한 대우 등이 많았던 시기다. 더군다나 능력주의에 의해 학교가 돌아갔기에 극히 일부만 성공하게 되는 당시 학교현장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학교에 대해 개인과 공동체의 성장과 행복이라는 좋은 인식이 남아있지 않다. 지금의 학교 현장은 이와 상당히 거리가 있게 바뀌었으며 근무하고 있던 교사들 대다수도 같은 과거 교육 폐해의 피해자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자기가 받은 인식으로 해당 영역을 기억하기 마련이다. 

 세 번째는 능력주의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성장이 크게 둔화하고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능력주의는 사실상 긍정적 기능을 거의 모두 상실했지만 오히려 사람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과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때문에 진학과 졸업 후 인력 시장에서 승리하기 위해 학교에서 내 아이가 받는 정서적, 학업적 손해에 대해 극도로 민감하게 되었다. 이명박 정부 시기에 전국 각급 학교에는 영어말하기 대회가 많이 시행되었는데 학부모의 능력주의 열망에 가장 심하게 투영된 영역을 대회로 진행하다보니 결과와 과정에 대한 민원이 학교 현장을 상당히 황폐하시켜 몇년간의 실행후 폐지되게 되었다. 이른 능력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학부모는 자신의 교육현장의 공동체성보다는 자신의 아이의 이익만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는 교원에 대한 과도한 민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네 번째는 미완의 시민성이다. 유시민이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지적한 것처럼 한국의 시민은 아직 시민성이 결여되어 있다. 시민성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과 준수 외에도 시민으로서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잘 인식, 준수하고, 타인에 대해서도 공감과 그 권리를 잘 인식하고 지켜주는 태도다. 하지만 학부모는 교사를 자신과 같은 권한을 갖는 시민으로 인식하는데 실패했다. 오히려 자신의 요구와 감정을 모두 받아줘야 하는 감정 배설구나 민원창구 혹은 가게 점원 정도로 인식하는 것에 가까웠다. 여기서 서로 간의 예의 및 경계는 완전히 사라졌으며 이는 상당수 학부모의 시민성의 결여를 의미한다. 작금의 문제를 일부 학부모의 문제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설문조사에 의하면 50만 교원의 99.2% 사실상 전원이 학부모의 갑질을 경험했다고 한다. 정말 단순하게 생각해서 50만의 학부모가 갑질을 했단 이야기인데 그 수를 절대 소수라 볼 수 없다. 전국 초중고 학생 수는 대충 570만 정도로 비율로만 50만은 10%에 가깝다. 한 반에 20-30명의 학생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담임 교사 한 명 당 갑질을 하는 학부모를 매년 2-3명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섯 번째는 공동체성의 붕괴다. 과거 한국 사회가 비교적 살만했던 것은 경제가 꾸준히 성장하여 이렇다할 학벌이나 자격 조건 없이도 누구나 적당한 기술을 배워 쉽게 취업하여 경제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고,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부터 이어진 공동체성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공동체 정신은 서울 및 수도권 신도시에 거주하게 된 농경 2세대, 그리고 아파트에서 자라는 그들의 3세대가 부모가 되고, 그들의 자식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희석되어 그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과거처럼 모르는 이웃의 아이를 맡아주거나 같이 교류하거나 평상 같은 것을 공유하지 않는다. 

 따라서 해결책은 이런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시민성이나 공동체성의 담보는 상당히 오래 걸리는 일이며 사태가 급박한 만큼 당장의 법적인 해결책 및 제도적 해결책이 중요하다. 

 우선 법의 개정이 필요하다. 지금의 아동학대법은 정서적 신체적 학대를 이렇다할 물적 증거 없이 의심만으로도 신고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으며 신고를 당한 교사는 거의 직위 해제가 되고 짧게는 1-2년 길게는 2-3년을 경찰과 검찰 조사를 받게 되며 스스로 무고함을 입증해야 한다. 악성 학부모와 학생은 이를 상당히 악용하고 있는데 명백한 거짓 신고를 해도 그런 의혹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기에 터무니 없는 거짓 신고를 하여도 아무런 법적 문제가 없다. 상당히 기울어져 있는 셈인데 이런 형국으로 인해 교사는 문제 학생이 어떤 짓을 하여도 교육적 제재를 하기 어려우며 자신이 그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물리적으로 공격 받아도 방어 수단이 전혀 없다. 때문에 다수 학생의 학습권, 교사의 생명권 및 인권, 교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법 개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둘째는 교사의 명확한 역할 수행을 위한 지원이다. 초중등교육법에 의하면 교사는 법령에 의해 학생을 교육하는 것이 학교에서의 역할이다. 이는 교육을 위한 교육과정 수립 및 운영, 수업의 실행, 평가 등의 본연적 업무와 이를 위한 직접적인 교육계획 수립 정도가 교사의 법적 역할이란 이야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선 학교에서 교사는 CCTV관리, 위생점검, 안전훈련, 돌봄교실, 방과후, 학교운영위원회등 간접적이라고도 이야기 하기 어려운 수많은 비법적인 업무를 떠맡고 있다. 초중등교육법에 의하면 이러한 업무는 행정직원 및 교육공무직의 일이지만 이들은 인적충원이 되었음에도 이러한 역할수행을 거부하고 있다. 교육부는 이런 부분에 선을 확실히 그어야 한다. 그래야 한국 공교육이 발전할 수 있다. 역사상 교육부는 많은 정책을 수행해왔고 교사 및 공교육을 개선하려 했으나 사실상 모두 실패했다. 이는 하향식이란 권위적 접근외에도 실제 교사가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게 해 스스로를 개선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 요인이다.

 세 번째는 책무성의 감경이다. 현재 일선 학교의 교사는 가진 권한은 거의 없는 반면 교실에서 아니 담당학생이 학교 밖에서 벌이는 거의 모든 일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고 있다. 현행 학교 폭력은 학교 안팎에서 학생에게 벌어지는 모든 폭력을 대상으로 한다. 즉, 학교현장에서의 폭력 행위 외에도 학생이 방학 중 해외여행가서 만난 다른 한국 학생에게 당한 폭력, 교회에서 일어난 폭력, 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난 폭력, 학원에서 일어난 폭력, 이웃 아이끼리 싸운 폭력 까지 모두 학교폭력의 범주안에 들어간다. 일이 이렇다 보니 교사가 밤낮, 휴일 경계없이 학부모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학생이 교외에서 당한 사건, 수업 중 자신의 부주의 및 장난으로 일어난 사건, 다른 학생의 악의 및 장난이나 실수에 일어난 사건 등이 모두 교사의 책임이 된다. 경북 영주에서 수학 여행중 한 학생이 숙소에서 취침시간에 화살을 만들어 날려 다른 학생을 실명시키는 일이 일어났는데 교사와 학교장에 거액의 배상금이 확정되었다. 교사가 어딜 가든 모든 학생의 손발을 묶기라도 해야할까? 임장지도와 사전 안전 교육 및 주의가 사전에 이뤄졌다면 면책해야하는 것이 마땅하다. 과도한 책무는 교육활동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악성 민원인의 처벌과 거부권이다. 학부모가 마음만 먹으면 사실상 학교의 거의 모든 교사를 언제든지 아동학대로 신고할 수 있고 뉴스에 나온 것처럼 온갖 절차에 시비를 걸고 정보공개를 청구하여 학교 전체를 마비 시킬수 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해당 교사와 행정직원이 소모되어 다른 모든 학생의 학습권이 침해되고 교직원들은 자괴감에 인권이 말살된다. 이런 것들을 법적으로 막고 처벌해야 한다. 

 다섯 번째는 교육현장 정책 수립과 교육과정 개정의 현직 교원 중심으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이다. 한국의 교육정책과 교육과정이 늘 겉돌고 실패하는 것은 실질적 데이터와 경험을 가진 현장 교사를 참고용으로만 썼기 때문이다. 때문에 교육정책 수립과 교육과정 수립에 법적으로 현장 교사가 중심이 되게 해야 한다. 이는 법적으로 상설 팀을 구성하여 교육부내에 배치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또한 더 나아가 현장 교사가 교육부 정책을 수립하는 최고 직위에 올라가는 길을 열어야 한다. 경찰이나 검찰, 군인, 소방관등 모든 별정직 공무원들은 현장 출신들이 당연히 최고 직위에 올라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현장이 공감할 정책 수행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독 교육부만큼은 정책을 수립하는 고위직을 그냥 교육현장 경험이 전혀 없는 교육행정직이 독점하고 있다. 때문에 교육부의 정책은 늘 현장의 공감을 받지 못하며 실효성이 없다. 현장에는 뛰어난 교육능력과 더불어 행적능력에 자질과 의욕을 보이는 교사가 많이 있다. 

 여섯 번째는 학생 정신 건강 관리 책임의 체계적 구축이다. 현재 일선 학교의 학급에는 소위 금쪽이로 불리는 통제 불능의 학생이 다수 있다. 이들은 교사의 정당한 생활지도를 거부하거나 욕설 및 폭행을 하는 경우도 있고, 다른 학생에게도 그런 행동을 하며 교실 현장을 마음대로 이탈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현장은 대응책이 딱히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부모는 이런 학생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공교육이나 무조건 받으라는 무책임한 대응을 하기 일수다. 때문에 입학과 동시에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정서행동검사를 체계적으로 강화하고 여기에 교사도 참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면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판별을 하거 확실해지면 학부모의 의사와 상관없이 교육치료를 강제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학생이 다시 공교육을 받을 만한 수준까지 진행되어야 하며 이 모든 기록은 졸업이후엔 지자체로 이어져 어른이 되어서도 정서행동 관리를 받을 수 있게 해야한다. 그래야 제2의 최원종, 조선이 나타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내일인 다음 주 월요일 이후가 어찌 될지는 현재로선 아무도 모른다. 상당히 많은 수의 교원이 학교 현장을 비우게 되어 학교 현장이 파행되면 여론이 교사를 탓할지 재량휴업일 및 연가 병가에 대한 위협으로 교원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은 교육부를 비난할지는 알 수가 없다. 실제 교육부의 위협처럼 징계가 이뤄지면 교육 현장에 상당한 분노를 일으키게 될 것이며 더 큰 공교육 멈춤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상당하다. 사태가 어떻게 흐르든 최근의 일련의 흐름이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교육현장의 오랜 병폐를 해결해 한국공교육이 죽음에서 다시 태어나는 원년의 해로 자리잡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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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9-03 1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해봅니다.

닷슈 2023-09-04 10:13   좋아요 0 | URL
저도 꼭 잘되길 바랍니다
 






 


 지구 상의 여러 생물들이 적응도를 높이기 위해 협력을 하는 것처럼 인간도 협력을 한다. 인간이 협력을 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생물학적 장치와 사회문화적 밈에 해당하는 증거는 많다. 의사소통을 위해 생겨난 언어, 기본적으로 처음 보는 타인에게도 협력을 우선적으로 제공하려는 착한 마음, 눈동자의 방향을 상대방에게 공개하는 투명한 공막, 협력을 위해 생겨난 규칙으로서의 윤리 규칙, 종교 및 사회 제도 등이 그렇다. 

 그리고 사람은 협력을 하기 위해 서로를 마주 본다. 서로 마주할 때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은 아무래도 서로의 얼굴이다. 협력을 하려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 그의 생각과 감정을 알아내야 하는데 인간은 언어 외에도 몸짓 그리고 주로 얼굴의 표정과 눈빛을 통해 그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를 하건, 회의를 하건, 사랑을 하건, 싸움을 하건, 협력을 하건, 대결을 하건 늘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그렇기에 특정인과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는 것을 우린 얼굴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외면이라 표현한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해하거나 죽일 때 심지어 동물을 죽일 때 조차도 그들의 눈을 가리거나 얼굴을 가리고 보지 않으려 하는 것도 외면이란 단어와 깊은 관련을 지닌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감정이 가득 담긴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도 사람은 무엇을 하든 서로를 만나고 얼굴을 바라보게 된다. 그렇기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대면은 사실 매우 당연한 것이기에 그다지 주목 받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2020년 전 세계를 코로나19 팬데믹이 강타하면서 서로 직접 마주하며 얼굴을 마주보는 상황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보니 대면이란 용어는 새롭게 부각되었고 그에 반대되는 말로 비대면이란 말도 거의 새롭게 주목받았다. 코로나 이전에 과연 비대면이란 용어를 우린 얼마나 사용했었을까. 하지만 대면의 정확한 반대말은 비대면이 아니라 언급한 것처럼 외면이다. 책 대면, 비대면, 외면은 이걸 잘 지적한다. 

 그도 그럴것이 비대면은 원격수업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매체로 어찌되었든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부족할지언정 관계를 연결해주는 작용을 해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물리적으로 대면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연결하게 해주기에 사람의 연결이라는 본질적인 기능을 대면보다 잘 시행하는 측면조차 있다. 하지만 외면은 어떤 수단이 있든 특정인과의 관계를 완전히 끝어내는 것이기에 대면의 완전한 반대말이 되게 된다.

 농경사회 이후 산업사회로 접어든 현대사회는 외면의 사회로의 전환이라 볼 수 있다. 과거 사람들은 서구이든 동양이든 자기가 태어난 지역에 거의 묶여 살았다. 직업도 신분도 거의 평민에 농민이었기에 모두 가난했고, 먹고 살기 위해 좁은 공동체에서 서로에게 강하게 의지하며 살았다. 특히 공동 노동이 더욱 요구되는 동양의 벼농사 중심 농경 사회에서 이런 경향성이 훨씬 강했다. 때문에 외면이란게 있을 수 없었다. 생존을 위해 서로의 협력이 강하게 요구되었고 이로 인해 관계는 강화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 사회가 모든 것을 바꿔 놓는다. 도시에 제조업 및 많은 서비스 업이 생겨났고,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신분에서도 해방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농촌의 좁은 공동체에 갇혀지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사회의 모든 상품과 서비스는 예전보다 더욱 서로에게 의지하는 구조를 만들어 냈지만 그 의존하는 구조는 오히려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과거 내가 신을 신발은 내가 만들거나 인근의 사람이 만들어주어 의존을 바로 알 수 있었지만 지금 가게에서 내가 산 신발은 판매자가 만든 것도 아니고 그조차 모르는 머나먼 곳의 여러 사람이 불특정하게 조금씩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직업에 종사하건 전통 농경사회에 만큼의 절대적 협력이 요구되는 직업은 매우 줄어들었으며 공간적으로도 이사가 잦아 공동체 형성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사람은 도시에 오히려 과거보다 높은 밀도로 뭉쳐 살면서도 서로를 외면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협력하는 존재로 진화했기에 자신이 소외되어 외면 받는 것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견디지 못한다. 즉, 외면 받는 사람은 정신적 물질적으로 불행해진다. 그리고 외면 받는 사람이 많아져 그들이 불행해지면 그들을 외면한 사람도 결국 불행해지게 된다. 한국은 어떻게 보면 전 세계에서 가장 외면 사회로의 전환이 가장 빠른 나라라고 볼 수 있다. 그걸 증명하는 지표가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압도적인 저출산율과 빈부격차, 사회 전체에 만연한 갑질, 그리고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범죄의 증가다. 

 과거 한국은 전통 농경사회에서 현대자본주의 산업사회로 빠르게 전환했다. 그렇기에 외면 사회를 위한 물질적 조건이 갖춰졌음에도 사람들은 농경사회에서 공동체를 유지하던 버릇이 남아 바로 외면사회로 전환하지 않았다. 서울의 아파트에 살면서도 이사 왔다고 주변에 떡을 돌리고, 평상을 같이 만들어 공동 이용하고, 옆집에 아이를 맡길 수 있고, 셋방 살이 하는 집의 잔치 날이라도 되면 주인 집이 거실을 내어주고, 모르는 사람이 집을 방문해도 일단 주스 한 잔 정도는 내어주고, 부자의 조건이 오직 돈많은 아니라고 대답했던 80-90년대 정도까지의 생각은 그래서 가능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도 크게 소외되지 않았다. 고도 경제성장기라 학력이 매우 낮아도 간단한 기술을 배워 어렵지 않게 취직되었고, 월급도 꾸준히 올라 집 하나 장만하여 가정을 이뤄 가난을 탈출해 평범한 삶을 이루는 것이 지금처럼 매우 어렵진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상 중산층이 가장 두텁게 형성되었던 것이 이 시기다.

 그래서 복지의 '복'자도 흔적도 거의 없던 90년도 중반 정도까지의 한국 사회에서 외면과 그로 인한 소외는 과거보다는 확실히 심해졌으나 그리 심각한 사회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모든 것이 전환된다.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농경사회의 부모를 지닌 이들이 조부모나 그 이전 세대가 되고 이후 세대는 도시가 고향이 되어버리며 농경 사회의 공동체 문화는 확실히 깨져나갔다. 여기에 돈이 우선 시 되는 상황이 생겨났으며 세계화와 자동화로 지방의 제조업이 무너져나가며 대도시권 대기업과 지방 기업간 소득 격차가 상당해졌다. 그로 인해 수도권 집중현상이 더욱 심해져 지방과의 격차가 더욱 심해졌고, 수도권의 부동산 가격은 과도하게 올라버려 지방에서 올라오는 젊은이들은 지옥고에 갇혀 살게 되었다. 복지는 조금씩 생겨났지만 충분하지 않아 사회안전망이란게 부실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심해졌다. 사람들은 과거 초기 산업화때 교육기회를 통해 계층 이동에 성공했던 경험을 통해 능력주의를 종교처럼 신봉하며 많은 돈을 사교육에 쏟아붇고 있다. 그리고 능력주의는 사회의 부조리의 원인을 무능력한 자신에게로 돌리게 해 사회구조의 개선을 어렵게 하고 소외 받은 이들의 처지를 정당화해 그들을 더욱 외면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외면 받은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않게 되었고, 서로 간의 가진 것의 차이는 그 어느 때보다 심해졌으며, 자기와 가족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자기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갑질이 사회전체적으로 펴졌으며, 물질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외면 받은 이들이 무분별하고 잔혹한 범죄를 대낮에도 여기저기서 일으켜, 여성이 밤늦게 도시를 돌아다녀도 별일이 없을 정도로 전 세계에서 치안이 가장 좋다는 장점도 거의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결국 해결방안은 서로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 간의 관계의 회복이다. 즉, 다시 대면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서로 외면이 가능한 자본주의 사회로 들어선 만큼 공동체의 회복은 사회적 제도적 경제적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학교 교육의 회복이 필요하다. 최근 서이초 초등교사의 자살사건이 일어날 만큼 한국의 공교육은 사망 상태에 가깝다. 하지만 학교는 여러 어린 학생들을 모아 서로 협력하고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하는 사회의 일차 기관이다. 때문에 서로를 대면하게 하고 외면하지 않게 할 수 있는 시작이 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동학대법이 과다 적용되어 약간의 생활 지도만으로도 교사가 소송에 시달리고, 학부모가 무차별하게 민원을 제기하는 상황에선 이런 교육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한국은 관계의 붕괴와 능력주의의 부작용으로 인해 갑질이 만연한 사회인데, 초기 손님이 가게주인에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사회의 약자인 여러 서비스 응대자와, 하급 민원 대응 공무원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어느덧 과거 함부로 하기 어려웠던 교사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최근 이런 갑질을 일부 학부모의 일로 국한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 이후 전국의 교사들은 매주 서울에서 수만명이 운집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교사 집단은 매우 낮은 교직단체 가입률에서 볼 수 있듯 좀처럼 뭉치지 않는 집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집회가 한 달 이상 지속된다는 것은 이런 갑질이 대부분의 교사가 생존의 위기를 느낄 정도로 만연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전국의 유초중고 교사의 수는 40만 정도인데 이들이 한 번씩만 갑질을 당했다고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무려 40만에 가까운 학부모가 갑질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여튼 아동학대법의 개정과 적절한 생활지도권의 부여로 교권이 자리 잡고 교실 내의 질서가 자리잡혀야 학교교육의 회복도 가능해질 것이다. 그래서 교사가 의욕과 여유를 갖고 과거의 전통적인 지식 전달식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들이 다양한 문제를 서로 협력하여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관계 맺는 방법을 배우는 참교육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사회 복지 제도의 확충이다. 과거 농경사회는 가난한 이를 마을에서 도왔고 친족이 도왔다. 하지만 지금은 친족의 수도 줄었고 농경사회처럼 어려운 이를 돕는 전통도 사라졌다. 그렇다면 사회 복지를 통해 이들을 도와야 한다. 이는 물질적 지원 뿐만 아니라 정서적 지원도 포함한다. 최근 범죄를 저지른 이들은 물질적으로도 불우하지만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학창시절부터 촘촘한 정신건강상태의 관리와 지원이 이뤄져야 하며 성인이 된 후엔 이것이 지역 행정기관으로도 이어져 관리가 되어야 한다. 현 정부와 일부 사람들은 이런 강력 범죄가 일어나자 처벌의 수위를 높이거나 경찰력을 배치하는 방향으로 이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에 가까우며 많은 경우에서 볼 수 있듯 외면을 받아 정신적 물질적으로 붕괴하고 자기 중심적 사고에 빠져 남을 탓하며 범죄를 일으키는 이들은 대개 잡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때문에 애초에 그런 사람이 생겨나지 않도록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은 능력주의 사회로 대학입시까지 단 한 번의 기회를 주고 실패자를 영원히 낙인찍고 경쟁의 승리자에겐 과도한 보상을 평생 제공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인생의 여러 차례에서 다시 기회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를 위한 꾸준한 학습기회에 지원을 제공한다. 

 마지막은 결국 공동체의 재생이다. 한국은 박정희정권이 없애버린 지방지차제도를 부활시킨지 거의 30여년이 되어가지만 풀뿌리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례가 거의 없다. 노동시간의 단축, 그리고 다양한 복지제도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에 관심을 가질 여유를 주고, 제도적으로 예산 사용 및 제도 제안 권한을 많이 부여하여 스스로 살아가는 지역을 개선시키는 경험을 꾸준히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것이 잘 정착되면 지역에 애착을 갖고 살아가게 되어 지역에 정착하는 경우도 많이 생겨나 도시로의 집중 현상도 다소 완화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소규모 지역 단위로 관계가 회복되는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국 사회는 매우 심각한 저성장 국면에 확실히 접어들었으며 저출산고령화로 나라의 노동력 및 소비력이 줄어 경제가 위축될 가능성이 높다. 또 미중갈등이란 대외적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세계적으로는 지구 온난화를 넘어선 열대화가 사회 하층민부터 그 생존을 위협해 나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을 포함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관계의 회복보다는 외면을 더욱 크게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 때문에 지금부터 이런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래야 더 나은 사회, 살만한 사회라 사람들이 생각하게 될 것이고 다시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믿으며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회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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