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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철학의 최전선 - 가장 뜨거운 다섯 가지 주제와 그 사유의 지도
나카마사 마사키 지음, 박성관 옮김 / 이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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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20세기에서 21세기에 철학자들이 크게 논의한 다섯 가지 주제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정리한 책이다. 다섯 가지 주제는 정의론, 승인론, 자유 의지, 마음의 존재, 실재론이다. 책은 이 다섯 가지 주제에 대한 여러 철학자들의 논의를 넘나들며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는데 충실히 설명하면서도 간략히 다룰 수 밖에 없다 보니 이해가 쉽지 않았다. 

 사실 개인적으로 철학에 대한 관심은 많지 않은 편이다. 워낙 어렵기도 하며, 이것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설명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설명으로 내가 가장 신뢰하는 것은 진화론과, 우주론, 지리학이다. 이들의 설명이 가장 그럴 듯 하고 인간이 만들어 낸 설명 방법 중 비교적 인과가 가장 정확하기 때문이다. 철학은 과학적 방법보다는 인간의 부실한 합리성에 의존하며 사실 그 합리성도 개인적인 특출한 자질과 그 사람이 자라난 지역의 역사와 문화권에 의해 생성된다. 때문에 상당히 매력적이고 뛰어난 설명이 많지만 역시 많은 한계를 지니며 부실하다. 이 책도 재밌었지만 그러한 한계 내에 있다고 생각된다. 하여튼 책의 내용을 정리해 본다.


1. 정의론

 윤리학은 종래 메타윤리학 중심이던 것이 롤스에 의해 인간의 행동 기준으로 삼아야 할 정의의 원리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그것이 사회적으로 널리 실행되기 위해서는 어떤 제도가 필요한가 등 실제적인 가치 판단의 문제로 논의의 축이 이동한다. 롤스의 정의론은 사회계약의 틀을 사용한다. 그는 사회계약의 틀로 자원 배분 문제를 포함한 정의의 원리를 선택하는 데 응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계약은 곧 다수결의 원리로 이어지게에 기존의 공리주의와 차별성이 없어진다. 차별성을 두기 위해 롤스는 원초상태와 무지의 베일을 설정한다.

 원초상태를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의 행복 추구를 위해 함께 협력할 때 어떤 권리를 각자에게 할당할지 또 공동으로 관리하는 각종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지 논의하기 위해 모인 상황이다. 무지의 베일은 사람들이 어떤 원리를 채택할 때 그게 자기에게 유리할지 불리할지 알 수 없도록 그 사람의 지위를 망각시키는 원리다. 롤스는 이로 인해 사람들이 두 가지 원리로 정의를 구상할 것이라 생각했다. 제1원리는 기본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개인에게 평등하게 보장하는 것이고 제2원리는 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허용하는 두 가지 조건이다. 하나는 그 불평등이 있어야 가장 불우한 이의 기대편익이 최대가 되는 것이며 둘은 그 불평등이 직무나 지위가 전원에게 공평하게 개방된 경우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센델은 이런 롤스의 무지의 베일을 비판한다. 센델은 무지의 베일처럼 당사자들이 연고 없는 상태에서 행하는 계약은 무의미 한다고 주장한다. 계약이란 상이한 이해관계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의견교환을 통해 서로의 입장을 인식하고 대립을 파악하여 납득가능한 합의에 도달하는 것인데 무지의 베일상태에선 이런 합의가 있기 어렵다.   

 센델은 롤스나 모든 근현대의 자유주의 국가의 법에는 현실의 인간이 보편적 이성능력으로 보편적 정의와 권리를 인지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고 지적했다. 만일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각자의 정체성에 따라 달라지는 '선' 이전의 것이 있는 것이라 하였는데 그것이 '정'이다. 센델은 선보다 정이 선행한다는 의미에서 이런 현상은 선에 대한 정의 우위라고 부른다. 하지만 센델이 보기에 국가는 중립적이지 않으며 선에 대한 정의 우위가 아닌 특정 선에 우세하게 조직되어 있다. 때문에 자유주의는 자신이 비중립적인 문화 위에 성립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하나 그렇지 않다. 그래서 각 개인은 자신의 목적에 따라 어떤 정의가 요구되는지를 숙고하기 위해서 우리 공동체 속에 배양되어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는 공동선에 대해 생각해야만 한다.

 아마르티아 센은 잠재능력을 윤리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잠재능력은 개인이 기본재를 충분히 활용하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가능성인데 이는 가난한 제 3세계일 수록 중요하다. 그리고 센의 공동 연구자 누스바움은 문화적 관습이나 생활습관으로 선진국 여성보다 개발 도상국 여성들이 잠재능력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다. 다만 누스바움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자연으로 받아들이는 여성이 잠재능력을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과 그것의 무리한 강요는 옳지 않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2. 승인론

 언급한 정의론에서 방식이야 어떻든 개인 간의 합의가 중요한 절차로 작용한다. 때문에 승인론이 등장한다. 이론 합의에 의한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이 보편적 합리성을 갖춘 자율적인 주체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인론은 인간이 주체성을 갖고 있느냐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흐름이 있는데 가치중립성을 표방하는 자유주의 계열의 정의론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을 전제한다. 반면 보편적 이성에 대해 부정적으로 여기고 무의식과 역사성, 지역성에 의한 생성을 강조하는 쪽이 있다. 

 부정적인 쪽에는 프랑스의 구조주의가 있다. 구조주의는 주체가 자율적으로 존재하며 판단이나 행동하지 않는다고 본다. 각종 구조, 언어를 비롯한 각종 기호체계의 유닛에 의해 본인이 알지 못하는 곳, 즉, 무의식에 규정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그 구조를 밝히려 한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간 포스트 구조주의는 구조를 실체시하는 경향마저 문제삼으며 구조의 유동성을 강조한다. 데리다는 개인이 판단을 할 때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확신하고 이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데 이 내면의 기준은 에크리튀르(주체와 대상을 규정하는 다양한 기호)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한 에크리튀르는 다른 에크리튀르에 따르며 이것의 원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콰인의 전체론은 사람들이 대상에 대해 품은 신념이나 과학적 명제는 각각 독립적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정당성을 상호 증명하는 그런 상호의존적 체계라는 주장이다. 이 견해에 따라면 개개의 명제들은 진리성이 상대화되어 궁극적인 형태의 이론적 토대의 부여는 불가능하다. 결국 전체론은 포스트구조주의와 비슷한데 로티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는 인식론을 기반으로 한 근대철학과 분석철학은 양자 모두 토대주의에 기반한다고 파악한다. 그는 절대적 근거가 없는 토대주의 대신 프래그머티즘적 태도를 보인다. 이는 상이한 유형의 다양한 학문과 담론사이에서 회화를 성립시키는 매개, 즉, 논의를 진행시킬 수 있는지의 여부이며 그는 이를 중시한다. 절대적 토대보다는 서로 간의 논의를 받쳐주는 형식을 중시하는 것으로 이는 해석학이다. 


3. 자유 의지

 자유의지는 오랫동안 이성을 갖춘 합리적 주체처럼 철학에서 당연시 되어 온 하나의 전제였지만 과학의 성과로 현재에는 전체적으로 부정된다. 사회생물학자인 윌슨은 자유의지에 대해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는 자기는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신체의 다양한 회로 속에 진행되는 의식 외부의 프로세스에 의해 조종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완전한 지휘권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유의지란 결정에 이르기까지 의식 외 활동, 마음의 매커니즘이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기에 생기는 행복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대니얼 데닛은 인간이 왜와 어떻게를 혼동한다고 말한다. 이는 진화론적 근거가 있는데 원인은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어떻게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유는 왜에 대응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자연계에는 왜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순한 인과과정인 어떻게만 존재하지만 인간은 문화적 진화과정에서 이 왜가 분화되어 나온 것이다. 진화상 단순한 생명체는 자신의 목적인 유전자의 유지 복제를 위해 본능적으로 프로그램된 단순한 행동을 반복한다. 이는 거의 확실하고 규칙적이다. 하짐나 생명체는 복잡해지면 유전자의 복제, 유지를 위하여 환경에 더욱 능동적으로 대응하게 되고 본능을 넘어선 지능이 생겨나 현재 상황에 대한 자신의 대응을 꾸준히 시뮬레이션 하고 왜 이 행동을 해야하는지를 계획하고 반성하며 되묻는다. 이런 것이 확장하여 여러가지에 대해서 왜를 묻게 되는 것이다. 즉, 데닛이 말하는 자유의지는 굳이 필요가 없는 인과만으로 존재하는 우연적 자연계에 대한 효율적 대응과정에서 왜가 분화되어 생겨난 것이 된다.

 로젠버그는 윌슨 이상으로 자연주의와 과학주의 입장을 취한다. 자유, 자유의지, 도덕성, 의지의 목적은 모두 환상이며 인간의 현상들의 의미를 인문과학에 의해 해석하는 것은 무력하다고 말한다.


4. 마음은 존재하는가

 마음철학에서도 인지과학이나 심리학 생물학 등의 성과를 받아들여 마음을 물맂거으로 설명 가능한 현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물리적 경향이 강하다. 다만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로 생각되는 의식, 자기의식, 감각등을 어떻게 설명할지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의가 있는 편이다.

 정신의 모듈성은 컴퓨터가 정보를 처리하는 것처럼 인간도 각 모듈에서의 처리가 연속적으로 이뤄지는 일련의 과정을 마음이라고 본다. 데니얼 대닛은 기존의 마음 철학들을 비판하며 이것들은 모두 뇌의 어딘가에 의식에 중핵에 해당하는 장소가 있고 그곳에 위치한 진정한 자기가 의식 내 모든 사건을 조장하고 있는 듯한 표현을 사용하는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성의 의해 의식을 전체적으로 통합하는 포괄적인 주체는 없으며 내 의식에 있어서는 그때그때 다른 경로로 여러 단계에 걸쳐 결정이나 판단이 이뤄진다. 다만 나중에 그 과정을 돌아보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보고할때 마치 자기 주위의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의 의도에 따라 실행한 통일된 주체가 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행동하는 것 뿐이다. 그래야만 자신의 행동에 예측 가능해져 생존을 할 수있으며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통해 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음에서는 개개인이 외부 세계를 인식할 때 의식에 생기는 감각의 질적 변화인 퀄리아가 중요시 된다. 이는 마음의 근거로 주장할 때 많이 이용되는데 데닛은 이런 퀄리아 역시 물리적 자극에 반응하는 성향복합체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 


5. 실재론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으로 실재론은 그 근거가 철저히 박탈된다. 하지만 이에 대항하여 사변적 실재론과 신실재론이 등장한다. 이들은 주체의 인식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부정하기 힘든 실재가 있음을 철학적인 사변을 통해 밝히려고 시도한다. 

 현대의 실재론은 과거의 이데아 같은 형이상학적 전제에 의존하지 않으며 주체의 의식을 초월하는 실재에 관해 사유하면서 어떤 속성을 갖는 대상이 존재하는지 보여주려고 한다. 상관주의는 칸트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주제가 어떤 대상과의 관계속에 있으며 그 관계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는 견해다. 상관주의에 따르면 어떤 존재도 필연성이 있기 어렵다. 메이야수는 그래서 세계를 수학화하여 상관주의에서 벗어나려 시도한다. 하지만 자연과학적 사실이라고 주체의 의식과 무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 논의는 쉽게 부정된다. 

 브라시에는 인간이 개념장치를 매개로 실재의 구조에 접근해 가는데 이 세계는 지적으로 이해하도록 되어 있지 않아 애당초 의미가 주입되어 있지도 않다. 때문에 인간의 개념장치에 의한 행위는 불가피하게 형이상학으로 치닫게 된다. 그는 우주가 무감각, 무목적인 것으로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이 그것을 그냥 드러내고 받아들이는게 지성의 성과라고 말한다. 

 샤비로는 과학 수학 역시 인간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기존 견해들이 인간의 입장에서 사물을 분석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에게 사물이 작용하고 있는지 관점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물들과 함께라는 느낌이 우리가 존재하는 우주에서 실재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들에게 주는 느낌이 현재화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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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와 철학하기 - 소유에서 존재로, 넘버원에서 온리원으로, 진리에서 일상으로
김광식 지음 / 김영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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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 그룹 BTS가 활동 중단에 들어갔다. 전 세계 아미들이 큰 충격을 받을 만도 한데, 아직 그룹 해체로 이어진 것도 아니고, 군대라는 예상해 왔던 현실적 문제가 있으며, 서로가 새로운 성장을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유 등 갑작스런 활동중단에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충분한 이유가 많았다. 그리고 몇몇 구성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혼자 활동을 바로 시작하기도 했기에 활동 중단에 따른 사회적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사실 이들이 이렇게 큰 그룹이 될거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초창기엔 무척 작은 기획사의 그러 그런 그룹이었다. 2014년에 아는 초등학생이 BTS를 좋아한다기에 대체 그것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방탄소년단이라길래 난 박장대소하며 대체 왜 그런 애들을 좋아하냐고, 당시 인기 많던 인피니티 같은 그룹도 있지 않냐고 했었다. 그리고 조롱하며 그 그룹은 무대에 방탄조끼라도 입고 나오냐고 비아냥댔었다. 2018 평창올림픽 때 개막식과 폐회식에 많이 사용된 건 한국 가요였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한국을 대표하는 그룹으로 무대에 섰던 것은 EXO였다. BTS는 그때를 거의 기점으로 세계적 그룹으로 치고 올라갔으니 하나의 분기점이었던 셈이다.

 하여튼 이 책은 독특하다. 세계적 인기 그룹의 노래 가사를 철학과 연결시켰다. 물론 그렇다고 책이 인상 깊었던 것은 아니다. 일단 내가 BTS의 노래들을 잘 모르고, 뭣보다 철학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BTS가 워낙 유명하기에 그들의 노래를 여기저기서 제법 많이 듣기는 했는데 워낙 90년대 느린 노래들의 가사도 잘 듣지 못하는 편이라 그들의 빠른 노래 가사는 사실 전혀 듣지를 못한다. 그래도 이해한 바로 책의 철학 주제를 정리해본다면 문화와 자본주의, 다른 모든 사회구조에 얽매이지 않는 주체로서 자신의 자유, 그리고 완성을 위한 아픈 성장이라 할수 있을 것 같다. 

 주제가 이래서인지 책은 방탄소년단의 노래 가사에서 철학적 핵심어들을 찾아내어 연결해나간다. 저자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을 창조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은 선과 악, 자신의 문화적 틀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당연히 모든 것을 의심하고 생각의 틀을 넘어야 한다. 이 시도가 방황인 것이다. 그래서 이 답을 강하게 찾고자 하는 욕망이 드는 청소년기와 20대에 사람들은 많이 방황한다. 자유롭기 위해 방황하고 그 방황이 자유를 위한 성장을 낳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한다. 존재는 있음이고 존재자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철학에서 존재론은 있는 것을 연구했기에 답을 찾을 수 없었다고 본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찾기 위해서는 있음에서 없는 것은 모두 제거하면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두 제거하니 결국 남는 것은 없기에 유와 무가 사실 같아짐을 깨닫게 된다. 때문에 있음인 삶은 없음인 죽음과 같은 것이 된다. 그래서 인간은 유한한 시간을 의식해야 하며 그를 통해 살아있음과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고 제대로 존재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본래적 존재 방식을 실존이라고 한다.

 실존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피하지 않고 미리 마주보는 실존적 결단이 필요하다. 이렇게 죽음을 미리 체험하는 것은 삶과 존재의 방식을 바꾼다. 주어진 세계에서 사물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관심이나 목적에 따라 세계를 만들어가며 본래적인 자유로운 삶은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삶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산다는 것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소유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성취와 소유만 추구하면 정작 나의 삶은 사라지고 나의 존재도 사라진다. 소유할 것이 워낙 많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심화한다. 

 에리히 프롬은 삶을 두 가지 방식으로 구분하였는데 소유지향의 삶과 존재지향의 삶이다. 소유지향의 삶은 삶은 성취, 소유하는 것으로 바라본다. 존재 지향의 삶은 삶은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으로 바라본다. 프롬은 맑스가 사회구조가 변화하면 세상이 변화할 것으로 파악한데 반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프롬은 사회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인간의 성격과 성향도 함께 변화하해야 사회가 비로소 바뀐다고 보았다. 실제 사회주의 국가는 사람이 바뀌지 않았기에 성공하지 못했다. 사회가 바뀌는데 있어 구조를 바꾸느냐 사람은 바꾸냐는 중요한 문제다. 조선왕조의 개창자 정도전은 왕이라는 변수가 심한 사람을 믿을 수가 없어 왕을 철저히 견제하고 보좌하는 관료 중심의 구조를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 관료인 양반이 세월이 지날수록 부패하는 모습을 보였고, 세종이나 정조처럼 신하에 의지 않고 개혁을 스스로 이루는 왕들이 나오기도 했다. 결국 양자는 같이 가야하는게 아닌가 싶다. 

 책은 사람의 자유를 저해하는 또 다른 요소로 욕망을 꼽는다. 사실 이는 계속 언급하는 소유하는 삶, 실존하지 않는 삶과 관련한다. 욕망은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대상에 대한 일반적 욕망과 욕망 자체에 대한 욕망이다. 전자는 직접적 욕망으로 생물로써 생존과 번식을 위해 필요한 본래적이고 생득적인 것이지만 후자는 간접적이고 보다 사회문화적인 것이자 경쟁으로 인해 생겨나는 역시 생득적인 것이기도 한다. 이런 욕망은 매우 다양하지만 후자의 욕망일수록 늘 그것을 채워도 채워도 공허해진다. 결국 나만의 욕망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경쟁을 통해 얻는 것이기에 이기고 나면 부질없어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만의 고유한 실제세계로 돌아가 온갖 상징의 가면을 벗고 다른 사람의 욕망이 아니라 나의 본능에 충실한 삶은 살아야 한다고 한다. 

 욕망과 관련해 라깡과 들뢰즈의 욕망도 언급된다. 라깡의 욕망은 결핍을 채우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것이다. 반면 들뢰즈가 언급하는 욕망은 생산적이고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것이다. 라깡의 욕망은 인간이라는 주체가 있는 욕망이나 들뢰즈의 욕망은 인간이라는 주체를 넘어선 무생물도 갖는 비인격적 욕망이다. 그래서 들뢰즈의 욕망은 기본적으로 생산하는 힘을 갖고 에너지기에 혁명적이다. 이것은 끝없이 떠돌고 유랑하기에 유목적이다. 라깡의 욕망은 욕망하는 대상이 분명하나 들뢰지의 욕망은 그 대상이 비어있다. 끊임없이 새롭게 무한한 것이 들어오는 것이다. 

 들뢰즈는 자본주의가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자본주의는 욕망의 운동장에서 분열증을 일으키는데 이것은 다른 욕망을 금지하는 영토화돤 보통의 욕망들의 선을 무너뜨린다. 무엇이든 욕망하게끔 부추기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러면서도 다른 욕망의 선을 마구잡이로 넘어서 돈이라는 거대한 욕망의 영토를 만들어 놓고서는 다른 욕망은 그곳으로 오지 못하게 막는다. 사랑이나 감정, 해방등의 모든 욕망도 돈으로 종속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 본연의 혁명성에 희망을 품는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나라는 주체, 가족, 자본주의라는 세 가지 억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상품이 아니라 기호를 소비한다고 말한다. 기호가 만들어지고 생산 유통 소비되는 과정을 시뮬라시옹이라 하고 이 기호는 차이를 본질로 삼는다고 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호라는 가치가 중요한데 인기 있는 이미지나 브랜드들은 그만의 기호로써 가지는 가치가 있다. 때문에 그런것들을 소비함으로써 소비자는 차이라는 기호를 사게 된다. 그리고 그 차이는 대개 남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성취나 소유로써 으스대는 이미지다. 

 보드리야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나만의 개성이나 고유함이라는 욕망이 억압되고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욕망이 이동함으로써 욕망의 미끄러짐 현상에 빠져있다고 보았다. 나라는 고유함을 차이라는 기호에서 찾으려하니 채워도 채워도 밑빠진 독처럼 공허함만 남게되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처럼 나만의 고유함보다 차이라는 기호나 이미지를 욕망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시뮬라르크의 사회라 칭했다. 보드리야르는 이런 구별짓기나 시뮬라시옹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교환이나 대체불가능한 본래의 억압된 개성찾기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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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25만 부 기념 봄 에디션, 양장)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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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인을 보면 그 사람의 실제 철학이나, 가치, 능력은 대개 선택의 뒷전이란 생각이 많이 든다. 사람들은 특정 사건이나 만들어진 이미지, 그리고 보여지는 진정성으로 주로 판단을 한다. 책도 그렇단 생각을 많이 한다.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도 표지나 제목이 딱딱하고 재미 없어 보인다면 잘 팔리지 않으며 별것이 없더라도 그것을 잘 해낸다면 잘 팔린다. 얼마전에 엔트로피란 책을 봤는데 그 훌륭한 책이 그런 제목과 표지로 과연 얼마나 팔리겠는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라는 제목의 이 책도 그렇다. 안좋게도 후자다. 책을 읽으며 뭔가 나오겠지라는 마음으로 끝까지 별게 나오지 않는 것을 경험하며 완독했다. 500페이지나 되어서 힘들었는데 마지막 200쪽 정도는 사실 기대를 많이 접고 거의 훑는 형태로 보았다.

 책에 기대했던 것은 기차라는 것이 주는 경험과 철학자들에 대한 저자 나름의 일관성 있는 정리였다. 기차를 매우 좋아하는데 실제로 그렇게는 잘 하지 않으면서도 오랫동안 느린 기차를 천천히 타고 바깥에는 비가 내리며 차창에서 홀로 따뜻한 커피를 즐기며 책을 읽어나가는 상상을 자주 한다. 그런 기차와 인문학의 정수 철학이라니 매우 좋아보이는 결합 같았다.

 책은 예상과는 매우 달랐는데 책을 읽기 힘들었던 이유는 철학에 대한 소개도 자신만의 시각을 갖고 체계를 갖고 언급하기 보다는 개인사와 관련하여 언급하는데 그쳤고, 상당수의 내용이 개인사와 관련하여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철학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아도 공감이 안가 읽기 힘든 부분이 있었고, 철학에 대해 개괄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설명없이 진행되는 내용에 힘들었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하여튼 책은 저자가 좋아하는 몇몇 철학자나 인물들과 관련한 지역을 직접 기차를 타고 이동하며 그들의 살아생존 장소나 지역 등을 방문하며 저자가 관련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형식이다. 스크라테스, 루소, 쇼펜하우어, 에피쿠로스, 간디, 공자등이 나오며 벌써 잊었지만 처음 드는 몇몇 이들도 등장한다. 

 책에 대한 비판만으로 서평을 남겨보는 것은 처음인데 그만큼 실망이 컸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책을 재밌게 읽는 분들도 있을 거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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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0
존 스튜어트 밀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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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등교육과정에서 한국인은 공리주의를 배운다. 창시자인 벤담과 그 제자인 밀에 대해서 배우는데 벤담은 양적 공리주의, 밀은 질적 공리주의로 유명하다.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표현이 그의 사상을 대표한다. 그런데 밀은 유명한 자유론도 썼다. 사실 난 좀 무지해서 둘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밀이란 이름 많지 않은가. 더군다나 영어권은 한자문화권처럼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니라 돌고도는 것중 고르니 말이다. 하여튼 밀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구나라는 느낌으로 책을 읽었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는 평등과 더불어 두 개의 기둥이다. 자유에 대해선 나라를 막론하고 크게 두 전제가 적용된다. 하나는 개인은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경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 다른 하나는 개인이 다른 사람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동을 했을 때는 사회에 책임을 져야하고 사회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경우 법적 처벌 부과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 혹은 상당한 간접적 피해가 발생하지 않으면 개인은 자신의 행동에 스스에 대한 책임은 질지언정 다른 사람에 대해 책임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범위안에서만 자유는 무한하다. 그리고 역시 자신의 자유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발생시키면 책임을 다해야하며 사회가 개인을 보호해야하는 경우 자유는 제한된다. 자살하거나 자해하려는 사람, 혹은 약물, 술 등에 대해 통제불능이 된 사람의 자유를 사회가 막아도 된다는 뜻이다.

 이런 개념을 집대성한 것이 밀의 자유론이다. 책에도 나오지만 밀은 자신의 생각을 새롭게 만들었다기 보다는 당대의 자유에 대한 개념을 집대성하고 이를 논증한 것으로 보인다. 밀의 사상의 근저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자리한다.

 우선 공리주의로 질적 공리주의자인 만큼 육체적 형태의 쾌락보다는 지적이도 도덕적 쾌락을 우선시한다. 그 결과 행복의 질을 구부하여 도덕적 규범과 의무를 질적으로 더 높은 것과 연결시켰다. 경제적 민주주의는 공리주의적 근거위에 국가의 경제개입을 지지하는 것이다. 밀은 매우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기업을 협동조합으로 대체해야한다고 보았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시민의 광범위한 참여와 통치를 찬성한다. 과거의 사람인만틈 대중을 무능하게 보고 엘리트에 의한 통치를 선호했지만 대중역시 지방자치를 통한 정치참여기회로 질적으로 발전할수 있다고 보았다. 밀은 노동자의 기술진보와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무책임하게 아이를 많이 낳는 것에 반대했으며 이를 위해 인구조절정책을 중시했다. 마지막은 여성해방인데 밀은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집에만 갇혀사는 살림하고 애만 낳는 것에 반대했다. 여성이 해방되어야 사회가 근본적으로 쇄신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상의 기반하에 밀은 인간에게 자유가 있어야 하는 이유를 거론했다. 공리주의자인 만큼 자유가 주는 효용에 주목했는데 인간이 자유가 있어야만 최대의 효용이 사회와 개인에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는 자유가 주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로 인해 인류가 효용을 극대화하는 진리로 다가갈수 있다는 점, 그리고 개인의 개성의 발현으로 사회외 개인의 창의성과 생산성이 최대화로 다가갈수 있다는 점에 근거한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각 개인이 진리에 도달하기는 매우 어려운데 여러 개인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가지고 이에 대해 서로 토론해가면서 진리로 다가갈수 있게 된다. 이런면에서 진리는 매우 중요하며 당대에 매우 맞게 여겨지거나 매우 말이 안되는 의견도 결코 진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이에 대한 반박이나 억압은 금지된다. 개인의 개성도 마찬가지다. 개인에게 사상과 표현 그리고 행동의 자유가 없다면 개인이 타고난 적성을 발휘해 역량을 키워나갈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정치적으로 매우 유능한 여성이 굴레에 갇혀 사회에 나갈 기회가 박탈되거나 매우 뛰어난 문학가가 될 자질을 가진 사람이 하인계층으로 태어나 교육받지 못한다면 역시 그러한 기회는 상실된다. 

 밀의 이러한 생각은 현대민주국가의 자유개념에 많은 영향을 미쳐 지금 들어도 매우 상식적인 논리로 통용된다. 특히, 자유의 근거를 철학이나 도덕적 근거에서 찾기보다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인간은 자유를 인간의 특별한 권리로 느끼고 오랫동안 마땅히 주어져야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인간은 농경지배사회로 전환된 이후 자유가 거의 박탈된 사회에서 살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 근세의 농민은 직업의 자유, 이전의 자유, 표현의 자유, 신체의 자유등이 거의 박탈된채 살았다. 평생 자그마한 농지에 갇혀 수탈당했고, 툭하면 군역이나 요역에 동원되었으며 다른 지역으로 웬만하면 이주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무래도 산업화와 근대화의 역할이 크다.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사상적 발전도 있었지만 시민 개개인을 교육하여 그 역량을 최대화하고 무엇보다 산업화로 수많은 사람들을 농지에 붙들어 놓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 사회적 상황이 자유의 허용과 매우 관련 깊다.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가 지금 수준으로 허용된 것은 산업화, 과학기술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상당수의 서구 민주국가는 이런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생존력과 효용을 높이기 때문이라 할수 있다. 즉, 개개인에게 상당한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사회국가를 더 강하게 만들었고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즉 사회 전체의 생존력과 효용을 떨어뜨리면 개인의 자유는 쉽게 억압된다. 지금의 코로나 상황이 그렇다. 국가사회의 생존 위기외 사회적 효용이 크게 떨어지자 시민 개인의 장사할 자유, 소비할 자유, 누군가를 만날 자유, 이동의 자유, 교육받을 자유, 혹은 백신을 안맞을 자유는 크게 억압되었다. 

 그래서 드는 또 다른 무서운 생각은 시민 개개인이 지금처럼 자유를 누리지 않는 사회나 국가가 가장 강력해지는 체제로 입증이 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떠올려지는 것은 당연히 중국이다. 미국이나 한국인은 자신들이 그런 것처럼 적당한 산업화가 이뤄져 경제수준이 올라가면 민주화는 자연히 따라오는 것으로 전제한다. 하지만 미국이 침공 후 돈을 퍼준 아프간과 이라크가 그렇지 못했고 일인당 소득수준이 16000달러에 달하는 중국 역시 민주화가 요원해보인다. 게다가 그 중국은 그런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로 세계패권국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미래전문가들은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가 중요한 미래사회에서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데이터를 마구잡이로 이용할 수 있는 인구대국이면서 독재국가인 중국이 매우 유리하다고 말한다. 인공지능은 딥러닝으로 학습하는데 15억에 가까운 인구의 양질의 데이터를 일관적으로 수집하여 이용할수 있다면 여러 면에서 인공지능 개발에 상당히 유리할 것이다. 빅데이터도 그렇다. 특정 질병을 진단하기 위한 데이터 혹은 마케팅이나 여러가지 패턴을 찾기 위한 데이터를 무제한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면 상당히 앞서나갈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중국은 서구국가와 미국, 그리고 한국과는 다르게 개인의 자유를 상당히 허용하는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산업화를 이루지않고서도 국가사회가 상당한 경쟁력과 생존력을 보일수 있음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체제가 더 나은 것으로 판명되어 중국이 패권국이 되고 자신들의 체제를 미국이하는 것처럼 전 세계에 퍼뜨리려한다면 그 때서도 지금처럼 자유가 광범위하게 보장될지 의문이다. 한국과 서구 미국의 민주주의는 패배의 여파로 크게 흔들릴 것이고 따라가는 다른 나라들 역시 중국의 체제를 따르려할 공산이 커질 것이다.  

 자유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지만 솔직히 책 자체에서 건질만한 것은 많지 않다. 지금의 자유에 대한 통념적 사고 그 이상을 책은 보여주지 못한다. 200년전 책이나 당연할 것이다. 때문에 자유에 대한 자신의 사고를 더 확실히 하고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이 책을 볼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전이니 그 맛을 보고 싶다면 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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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만들어진 위험 -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당신에게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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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킨스의 책은 어렵거나 쉽다. 자신의 식견을 그대로 써서 독자들이 보기에 좀 어렵게 쓴 책도 있고, 대중화를 위해 마음먹고 정말 쉽게 쓰는 책도 있다. 이기적 유전자나, 만들어진 신, 확장된 표현형은 전자이고 도킨스의 진화론 강의나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은 후자다. 이번 책은 중간 정도인데 굳이 말하자면 후자쪽에 더 가깝다. 만들어진 신을 읽은 분이라면 굳이 볼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도킨스 팬이라면 이 책을 볼 수 밖에 없다.

 선제적 산업화를 통한 서구의 전 세계 지배 여파가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금 지배적 종교는 여전히 기독교다. 아이러니는 미국을 제외한다면 서구는 스스로 만들어낸 기독교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종주국들이 버리고 있는 종교를 후발주자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퍼지고 있다는 점은 좀 우습다. 하여튼 그래서 도킨스의 비판은 기독교를 향한다. 같은 신을 가진 일파인 유대교, 이슬람교도 마찬가지다.  

 기독교는 보통 일신교로 알려져있지만 도킨스가 보기엔 상당히 허구다. 우선 그 뿌리부터다. 고대 이스라엘인은 우선 자신들의 부족신은 야훼를 믿었는데 원래 그는 폭풍의 신이었다. 즉, 다른 여러것을 관장하는 신도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이스라엘인들은 야훼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들의 신들도 믿었고 인정했다. 다만 자신들의 신이 좀더 시기심이 강하고 힘이 세다고 생각했던 것 뿐이다. 자기들 신이니 말이다. 그리고 현대 기독교도 상당히 다신교적 면모가 많다. 우선 공의회에서 확립한 아버지 신. 아들 신, 성령의 개념이다. 이는 사실상 삼신교인 셈이다. 이들이 사실상 매우 다르고 실제 다르게 취급하며 다른 기도문과 성격을 가짐에도 억지로 이들을 일체라 칭한다. 거기에 동정녀 마리아도 있다. 마리아 역시 신적인 취급을 받아며 그를 위한 기도문과 상이 따로 있다. 여기에 천사들도 존재한다. 천사는 치품천사에서 대천사 개인적 수호천사로 위계하는데 신자들은 이들에게 모두 기도를 올린다. 또한 성인도 존재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483명을 시성했고 지금 교황인 프란치스코2세도 813명을 시성했다. 몇 년전 한국에 와서도 제법 시성을 많이 하고 갔던 걸로 기억한다. 이쯤되고보면 기독교는 그리스로마신화 뺨치는 다신교라 해도 무방하다. 이런 지적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신이 하나뿐이고 나머지들을 다른 신이나 신적인 존재를 유일신이 만든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수 있겠지만 정확히 그리스로마신화도 그러하다. 

 다음 공격대상은 기독교의 경전 성서다. 현대의 복음서는 마르코, 마태오, 요한, 루가 복음서이다. 문제는 이 복음서의 신빙성인데 이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 사후 수백년이 지나서여 쓰여졌다. 가장 오래된 마르코 복음서 조차도 예수 사후 수십년이 지난 시점에 쓰여진 것인데 그 사이 사람들에 의해 여러가지 전승과 기적이 혼합되고 조작되고 과장되었을 것이니 써있는 것을 글자그대로 믿기는 매우 어렵다. 예수 사후 널리 퍼진 기독교는 중심지인 팔레스타인에서 지중해 동부 곳곳에 존재했는데 이들은 매우 소규모 집단으로 서로 교류가 없었고 언어도 달라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즉, 예수에 대한 신앙과 이야기는 이들 각각 다르게 다른 방식으로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사실상 기독교의 창시자인 바올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난무하는 기독교 신앙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매우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온갖 이야기가 난무하는 기독교의 공식 경전이 정해진 게 그 바올로의 죽음 이후 수백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때 신약 27권 구약 39권이 공인되었고, 수백년간 여러 집단에 의해 여러 전승을 거진 시점이라 복음서가 난무하는 상황이었다. 이 중 네개가 공인되었는데 그 기준도 이상하다. 영향을 미친 것은 복음서의 신빙성이 아니라 공의회 무려 2세기전에 살았던 이레나이우스에 의해서였는데 그는 개인적으로 땅 귀퉁이가 4개이듯, 바람도 네개 일 것이고 올바른 복음서도 네 개여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고 한다. 이게 큰 영향을 미쳤다니 어이없다. 땅이 네 귀퉁이라는 것도 지구가 평면이라는 생각에서 나온것일 테니 더욱 합리성은 떨어진다. 경전 확립 후, 나중에 요한 묵시록이 추가되는데 이는 재림과 휴거, 최후의 전쟁에 영감을 주었다. 이부분이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악영향을 주는 사건이 많았기에 도킨스는 무척 아쉬워한다.

 복음서들은 서로 모순되기도 한다. 아무래도 여러 이야기가 수백년을 휘돌다 쓰여졌기 때문일텐데 마태오, 루가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다윗의 직계라 주장한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은 그 위의 직계조상을 25명으로 설정하고 루가는 41명으로 설정한다. 엄청난 차이다. 동정녀의 존재도 이상하다. 구약인 이사야에는 히브리어 알마가 사용되었는데 이단어는 동정녀란 뜻과 젊은 여인이라는 뜻이 같이 갖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어로 번역되면서 동정녀인 파르테노스로 번역되었고, 마태오가 훗날 이를 읽고 마리아를 동정녀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미가가 유대인의 메시아가 다윗의 도시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으로 예언했다. 신약의 저자들은 이를 실현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문제는 예수가 나자렛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루가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요셉을 베들레헴인으로 만들어 예수가 사실상 베들레헴 사람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마태오는 헤롯을 이용한다. 헤롯왕이 베들레헴의 모든 아이들을 죽이려고 해서 요셉과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신후 신분위장해 나자렛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구약에도 문제가 많다. 구약엔 유대인의 출애굽기가 나온다. 이는 매우 큰 사건으로 성경이외에도 반드시 역사적 흔적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게 존재하지 않는다.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반면 바빌론 유수는 증거가 많다. 실제 성경은 바빌론 유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물의 신 에아가 우트나피시팀에게 거대한 배를 만들라고 미리 알려주는데 노아의 방주의 이야기가 흡사하다. 바빌론의 조로아스터교에는 선과 악의 개념, 최후의 전쟁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는 기독교에도 그대로 존재한다. 

 도킨스가 다름으로 지적하는 점인 신의 완전함과 선함에 대한 의심이다. 성경에는 질투에 가득한 신이 자신의 종들을 가혹하게 의심하는 장면이 가득하다. 우선 욥기에서 신은 사탄과 내기를 해서 욥의 신앙심을 실험한다. 그 과정에서 잘 살던 욥은 무려 10명의 아이를 잃고, 하인과 소유한 동물들도 모조리 잃는다. 그럼에도 욥이 신앙심을 버리지 않자 신은 그제서야 욥에게 다시 새로운 10명의 아이들과 하인, 동물들을 선사한다. 이런 시험때문에 무고한 그 전의 사람들은 죽어도 되는 것일까? 그리고 신이 완전하고 전지전능하다면 이미 욥의 신앙심에 대한 시험결과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여기서 신은 무지하고 심지어 간신히 이기긴 했지만 사탄과 동급으로 보인다. 둘다 욥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거기에 구약의 신은 툭하면 십계를 통해 자신들의 부족은 살해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다른 부족은 오히려 도륙하라고 말한다. 신이 정말 천지와 우주만물을 창조했다면 적어도 같은 인간들끼리 이러한 차별은 있어서는 안된다. 유대교가 초기 유대인이 만들어낸 그들만을 위한 종교라는 증거다. 구약 '판관기'에는 입다라는 이스라엘 장군이 나온다. 그는 승리의 대가로 자신이 개선해 처음보는 것을 신에게 번제로 바친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개선한 그가 가장 먼저 본것이 반기는 외동딸이었다. 장군은 결국 외동딸을 바친다. 번제는 제물을 태우는 것이다. 

 그리고 도킨스는 종교가 언제든 인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의 유타주를 지배하는 모르몬 교는 지극히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조지프 스미스는 1823년 모로니라는 천사가 나타나 고대문자로 쓰인 금판의 위치를 알려주었다고 주장한다. 스미스는 자신이 그 금판을 마법의 모자안에 든 마법의 돌의 도움을 받아 번역했다고 주장한다. 이를 1830년 영어번역으로 출판하는데 여기에 쓰인 영어가 200년전 킹 제임스 성경 영어다. 많은 전문가들은 스미스가 그럴듯한 이야기로 킹 제임스 성경을 배낀 것으로 추정한다. 심지어 모로몬경에는 아메리카라는 과거엔 존재조차 몰라 신과 무관해 보이는 이땅에서의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기원전 600년경 이곳으로 이주한 이스라엘의 자손이 아메리카 원주민이라 주장한다. 

 태평양지역에는 극히 최근에 생긴 종교들이 있다. 2차대전중 미군의 보급품이 실수로 섬지역에 떨어지거나 미군과의 접촉이 문명세계를 모르는 원주민들과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이 화물인 카고신화를 생성하게 된다. 이들 중 하나는 존프룸이라는 신화를 갖고 있는데 아마로 존 프롬 아메리카라는 말을 듣고 기억하는듯 하다. 원주민과 만난 존은 분명 자신은 '존 프롬 아메리카' 즉, 미국에서 온 존이라는 말을 했을 것이고 원주민을 이를 존프룸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여러가지 물건을 가져다 준 그는 훗날 재림해 다시 기적을 일으킬 존재로 여겨진다. 일부 원주민들은 2차대전 중 만들어진 공항에서 여러가지 비행기가 오르내리고 진귀한 물건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사라진 후에 여러가지 물건을 주워 공항과 매우 비슷하게 생긴 신전 혹은 성역 같은 것을 만들어 내었다. 데이비드 대튼버러는 타나섬에서 샘이라는 존프룸 숭배자와 대화는 나누었는데 존프룸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네는 오기로 한 예수를 무려 2000년이나 기다리지 않았나 자기네는 겨우 19년을 기다렸단다. 

 그렇다면 이렇게 허구적이고 아마도 인간이 만든 것이 분명한 종교는 왜 발생했을까. 도킨스는 이를 패턴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경향에서 찾는다. 인간은 예측할수 없는 자연에서 규칙과 패턴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진화상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패턴 만들기는 항상 옳지는 못하다. 진정한 패턴을 찾는 경우도 있지만(과학이나 수학, 여러 사회법칙이 그렇다) 아닌 경우도 패턴을 찾았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경우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거짓 긍정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 부정이다. 거짓 긍정은 실제 패턴이 전혀 없는데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주로 여러 종류의 종교적 신앙이나 미신, 징크스가 이에 해당한다. 검은 고양이를 보았더니 재수 없는 일이 생각하거나 내가 경기를 보기만 하면 우리 팀이 진다고 생각하는게 그런 것이다. 이런 경우가 충분히 반복되면 거짓임에 쉽게 드러나나 우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거짓 부정은 패턴은 실제로 있는데 패턴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다. 인간은 최근까지 모기와 말리리아간의 패턴을 파악하지 못했다. 모기에 물리는 사람이 말라리아에 걸리는 경우가 압도적이었음에도 말이다. 도킨스는 이런 거짓 긍정 패턴 찾기가 종교의 시작이라고 본다. 

 그리고 다음 과정이 필요하다. 일단 생성된 거짓 패턴에 대한 믿음의 유지와 계승이다. 아이들은 진화상 어른이나 부모의 말을 잘 듣는 경향성이 있다. 어른들은 위험한 세계에 대한 믿을 만한 경험과 대책을 갖고 있는 사람이므로 무방비의 아이들은 이런 어른의 말을 우선 믿고 순종하는 경향성을 띄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다. 이것이 특정 종교를 믿는 어른의 믿음이 아이에게 유독 잘 먹히고 또 계승 전승되는 이유다. 실제 특정 종교 문화권에서 태어난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이 종교에서 벗어나기가 무척 힘들다. 왜 기독교는 믿는 지역에선 기독교인만 있고 불교나 이슬람교 신자는 극히 생겨나기 어렵고 반대로 이슬람 지역에서 왜 기독교인과 불교신자가 극히 어려운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 자녀는 부모의 같은 종교를 갖게 된다. 

 종교는 또한 한 사회나 국가의 생존을 높을 가능성이 있다. 전사들을 우대하고 그들이 싸우다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는 신앙을 가진 사회는 전투에 강할 가능성이높다. 또한 구성원이 같은 종교르 갖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사회결속에 매우 유리하다. 그리고 종교는 사회 감시 기능이 있다. 인간 사회가 커지면서 서로간에 믿지 못하고 충분히 감시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생겨났는데 보이지 않는 신이라는 절대자가 서로를 감시하고 대신 벌을 준다는 믿음이 있다면 상호간의 신뢰가 생겨날 수 있다. 이는 초기 사회에 효과적으로 작동했을 수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는데 전 세계적으로 종교적인 국가가 범죄률이 훨씬 높고, 미국같은 선진사회에서도 수감자들의 경우 종교를 가진 비율이 무신론자보다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하여튼 도킨스의 종교파훼법론은 이번에도 재밌었다. 도킨스의 나이가 상당히 많은 편인데 EBS 그레이트 마인드를 보니 아직 건강해 보여 다행이다. 앞으로도 좋은 책을 많이 써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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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21-11-07 19: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지만, 유신론자들과 무신론자들의 책을 지속적으로 번갈아가며 읽다보니 제가 왜 기독교를 믿지 않는지를 한 번 정리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건 아마 서양인들과의 경험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다룬 글이 될 것 같아요.

닷슈 2021-11-07 20:34   좋아요 2 | URL
그런 글을 써주신다면 무척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종교를 믿는데는 우선 그 나라의 성향(이슬람사회에서 태어난다면 안믿기 어렵겠죠, 유타주에서 태어나면 역시 모르몬에서 벗어나기 힘들겁니다.), 그리고 나의 부모의 종교 유무 여부, 타고난 나의 성향(진보적 혹은 보수적, 보수가 더 종교적이라 생각합니다.), 이후의 교육정도에 따라 형성되는 나의 성향(역시 진보적, 혹은 보수적, 합리성 정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건 제 개인적 생각이고 짜라님의 고견 기대해봅니다.

짜라투스트라 2021-11-07 20:58   좋아요 3 | URL
제 개인적인 경험이 정답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말을 해본다면, 정치성향과는 큰 연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 주변에는 정치성향이 달라도 기독교인은 없거든요. 그걸 보면 문화적인 영향이 가장 큰 것 같아요. 아니면 가족의 영향이거나. 뭐, 여기에는 충분히 반론이 가능하겠지만.^^;;

2022-10-25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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