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3 - 구원과 욕망의 교차로, 실크로드를 가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동양미술 이야기 시리즈 3
강희정 지음 / 사회평론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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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3권이 나왔다. 1권과 2권이 중국과 인도를 다뤘다면 이번엔 그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의 미술이다. 중앙아시아는 지금은 이슬람을 신봉하지만 고대에는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서 이들의 고대 미술품은 거의 불교 미술이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동과 서를 연결하는 실크로드에 있다 보니 인도와 그리스 양쪽의 영향을 받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간다라 미술이 그것이다. 미술에는 고금을 통틀어 많은 돈이 든다. 지금은 가난한 지역이지만 실크로드가 성행하던 고대에 중앙아시아 지역은 막강한 부를 가지고 있었다. 돈이 많이 드는 불교 미술품은 그래서 가능했다. 

 중앙아시아가 흥한 것은 실크로드 때문이다. 비단 이전 로마인이 입던 토가는 리넨이나 모로 만들었는데 질감이 거칠고 무거웠고 염색기술도 없었다. 그런 옷에 가볍고 질감이 부드럽고 총천연색에 아름다운 문양까지 있는 비단을 보니 로마인이 반할 수 밖에 없다. 로마는 비단에 열광했기에 한때 로마제국 예산의 10%가 비단구매에 사용될 지경이었다. 실크로드는 길 이름은 예쁘지만 그야말로 죽음의 길이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야 했다. 그리고 이 사막은 가장 어려운 모래 사막이다. 타클라마칸 사막 주위로는 곤륜산맥과 알타이산맥, 천산산맥이 버티고 있어 사막이 유일한 통과로다. 그리고 길이 이렇게 험하기에 비단은 일단 로마로 가져가기만 하면 거의 100배의 가격을 받아낼 수 있었다. 

 워낙 길이 험하고, 도적떼도 많았기에 실크로드 상인들은 적게는 백마리 많게는 천마리 가량의 낙타가 이동하는 대상을 조직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오아시스 도시들은 이들을 상대로 통행세와 숙박, 낙타의 먹이를 제공하며 큰 부를 축적했다. 

 중앙아시아에는 바미안 대불이 있는데 이 불상은 6세기 당시 이지역을 지배한 에프탈이 만든 것이다. 바이안 대불은 높이만 무려 55m다. 암벽을 파서 대불이 들어갈 감실을 조성 후, 불상 모양으로 암석을 조각한 후, 그 위에 지푸라기를 섞은 진흙을 두툼하게 붙여서 세부를 조성했다. 그 후 표면을 석회나 스투코를 발라 완성한 것이다. 이 바미안 대불은 탈레반의 파괴해서 지금은 사진으로만 그 위상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인도 불교 문화 유산에는 석굴이 많다. 석굴은 불교에서 예배 공간이다. 고대 인도는 석굴을 성스럽고 신비로운 장소로 여겼다. 지금은 관광객을 위해 석굴을 밝게 해놓는 경우도 있지만 본디 석굴은 자연 빛만 잠시 들어오는 어두운 곳이었다. 이 어둠은 우주의 근원과 같았다. 석굴의 어두움은 너와 나의 구분이 사라지고 고요와 평온을 주었다 .그래서 석굴은 불교 신앙과 수행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초기 석굴은 그냥 비어있는 공간에 가까웠다. 그러다가 석굴안에 부처의 부덤인 스투파가 들어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석굴에서 스투파가 있는 곳을 차이티야라고 한다. 차이티야는 말발굽 모양으로 조성되는데 스투파를 중심으로 탑돌이를 해야했기에 이런 모양이었다. 그리고 차이티야 주변에는 승려가 기거하는 사원인 비하라가 조성되었다.

 인도에는 초기에 뭄바이 지역에 석굴이 많이 조성되었다. 뭄바이는 상인이 배를 타고 서부를 오갈 때 거치게 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부가 모이게 되어 석굴 사원이 많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뭄바이 일대는 용암으로 조성된 고원인 데칸 고원이 있어 용암이 역삼각형이로 굳어져 석굴을 파기 용이한 지역이 많았다. 승려들은 뭄바이를 오가는 상인에게 숙박과 먹기리를 제공하고 대가를 받았고 상인들은 자신들의 기원의 의미로 돈을 기부했다. 그래서 뭄바이 일대의 석굴 사원은 초기 승려가 나중엔 상인, 왕족, 귀족이 건립의 주체가 되므로 후기로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화려해진다. 

 뭄바이 인근의 칼리 제8굴은 차이티야의 규모가 매우 크다. 입구에서 스투파까지 무려 38m이며 내부의 기둥 높이도 4m로 매우 웅장하다. 사실 석굴은 기둥이 필요 없으나 석굴은 마치 목조건물을 짓는 것처럼 지었기에 기둥아니 아치및 각종 건물 장식이 있다. 원래 스투파는 부처의 사리가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석굴의 스투파는 따로 제작해서 넣는 것이 아니라 석굴 그 자체를 파면서 같이 만들었기에 복발 안에 사리를 넣을 수 없었다. 

 인도의 아잔타 석굴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까지 무려 1000년간 만들어진 석굴이다. 때문에 초기 석굴과 후기 석굴의 변천을 자세히 비교할 수 있어 가치가 높다. 아잔타 석굴은 인도의 사타바하나, 바카타카, 굽타 왕조를 거치며 조성되었다. 아잔타에는 총 5개의 차이티야가 있는데 9-10굴이 초기 양식이고, 19.26,29가 후기 양식이다. 초기와 후기는 불상의 존재유무다. 초기 불상은 금지되어 없었고 후기에는 불상이 사원에 등장한다. 불상은 처음엔 스투파에 넣는 형태로 가다가 점차 크기가 커지더니 마침내는 스투파를 밀어내고 단독으로 존재하게 된다. 결국 가장 후기 아잔타 석굴에는 불상만 있는 불당이 등장하고 차이티야와 스투파는 사라지게 된다. 

 불상이 등장하기 시작하며 부처의 외형에 대한 합의와 규칙이 생겨난다. 부처의 모습을 본딴 불상의 제작은 초기엔 금기였는데 그 기간이 오래되다보니 아무도 부처의 실제 모습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 규칙은 32상 80종호로 32가지 외형과 80가지 세부특징이다. 불상은 1세기경 간다라와 마투라에서 시작된다. 32상 80종호는 사실 모두 구현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크게 3가지가 나타났다. 정수리가 우뚝 솟은 육계, 진리의 빛은 광배, 눈썹 사이의 흰털인 백호다. 여기에 동북아 불상에는 머리카락이 말린 나발, 세 줄의 목주름인 삼배가 추가된다. 삼배는 번뇌와 업, 고통을 의미한다. 

 간다라의 불상은 그리스의 곱슬머리, 복장의 영향을 받았다. 아무래도 불상을 만드는데 표본이 없다보니 그리스의 석상이 많은 참고가 된듯 하다. 간다라에서는 스투파를 봉헌용으로 작게 만드는 일이 흔했다. 봉헌스투파나 간다라의 탁트이바리 스투파는 모두 복발이 작아지고 기단이 넓고 높아진다. 그리고 이 기단에 불상을 비롯한 여려 조각을 넣었다. 

 마투라는 인도의 교통의 요지다. 갠지스강 지류인 야무나강에 접해 바다에서 내륙 진입이 용이하고 콜카타와 뉴델리를 잇는 도로와 철도가 지난다. 간다라는 동서의 영향을 받았지만 마투라는 인도내의 영향이 모인 곳이다. 그래서 간다라 불상과 다르게 마투라 불상은 동양인의 모습에 가깝다. 코가 낮고 동글 넓적하다. 또한 몸도 더 통통하며 표정도 심각한 간다라에 비해 웃는 모습이다. 

 불교엔 부처 이외에도 보살이 있다. 보살은 부처는 아니지만 속세에 머무르며 깨달음을 구하는 존재다. 처음에 보살은 부처가 된 석가모니와 아직 아니었던 싯다르타를 구분하기 위한 용어였다. 하지만 지금은 깨달음을 얻기 이전의 부처를 총칭하는 말이 되었다. 보살이 주목받은 것은 부처가 되는 것의 어려움 때문이다. 부처는 이미 속세를 떠났기에 잡을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보살은 현존하는 사람들로 신자들의 마음과 장신구, 금전등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을 만들 수 없던 불상을 대신해 보살을 먼저 상으로 만들고 보시했다. 

 그리고 미륵보살이 등장한다. 석가가 열반을 들어 현실에서 사라지자 사람들은 다시 부처가 나타나기를 희망했고 그 희망을 담은 것이 미륵 보살이다. 불교에는 석가를 포함에 부처가 된 과거 7불이 있는데 미륵보살은 부처가 될 거란 수기를 받은 자로 사실상 이들과 동급인 8불급으로 미래불이다. 미륵보살 조각은 그래서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아직 속세에 머무르는 자기에 값비싼 장신구와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경우가 많고, 수행을 계속하며 여기저기를 다녀야 하기에 손엔 물병을 들고 있는 것이다.

 2세기 경 간다라와 마투라에는 새로운 신앙이 등장하는데 구원이 핵심신앙으로 등장한다. 개인의 수행을 통한 해탈을 강조하는 불교에 누군가에 의한 구원은 원래 없는 개념이다. 아미타 신앙과 미륵 신앙이 그것이다. 아미타는 부처중 하나로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해줄 아미타불이 있는 세계로 내려가는게 아미타 신앙이다. 아미타불은 서방 정토에 머무른다. 나무아미타물은 바로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뜻이다. 아미타 신앙으로 불교의 중심은 개인의 수행에서 대중의 구원으로 바뀐다. 이는 당시 인도의 상황과 관련하는데 불교는 초기 인기가 있었지만 개인의 수행은 현실에서 너무 고되고 어려웠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힌두교가 부상한다. 사람들은 쉬운 힌두교에 이끌렸기에 아미타 신앙이 대응하는 성격으로 생겨난 것이다. 

 5세기경 간다라는 지역을 사수할 마땅한 왕조가 없었다. 전란이 잦아지자 조각을 빚는 장인들이 피란해 아잔타나 사르나트로 이주한다. 이 두 지역은 거리가 상당함에도 불상도상이 비슷해진다. 그래서 5세기 인도 전역의 불상이 유사해진다. 인도풍이던 마투라 불상도 간다라 영향을 받아 통견이란 옷이 생기고 얼굴표정이 근엄해진다. 

 인도는 그림 재료가 부족해 유구한 역사에도 회화가 다른 나라보다 늦다. 인도의 그림은 원래 입체적이었으나 이슬람의 영향 이후 평평해진다. 그림은 벽면에 그리는 경우 진흙과 소똥, 짚을 반죽해 반죽이 완성되면 돌벽에 반죽을 바르고 표면을 정리했다. 여기에 밑그림을 그리고 회반죽을 그 위에 바른 후, 그것이 마르기전 물감으로 채색하여 완성했다. 

 서역에 있는 도시 호탄은 실크로드의 서역 남로에 위치한 곳이다. 호탄은 부유한 곳이었으나 4세기 경부터 타클라마칸 서남부가 더 건조해지며 쇠퇴한다. 하지만 인도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상대적으로 다른 도시보다 오래 세력을 유지한다. 간다라 불상은 부처의 양어깨에 빛이 불꽃처럼 나오게 묘사했고, 육계의 한 가운데 사리를 넣을 구멍이 있는게 특징이다. 이걸 호탄의 불상도 계승한다. 호탄은 도시 양편으로 백옥강과 흑옥강이 흐르는데 이 강은 곤륜산맥에서 발원하여 옥이 발견된다. 호탄은 강한 부를 바탕으로 라왁사원을 건립한다. 라확사원은 현재 사막에 의해 파괴되어 형체만 남았으나 원래 스투파의 높이만 34미터에 가로 42미터 세로 48미터의 내벽과 더 큰 외벽에 둘러싸인 큰 곳이었다. 라왁사원의 불상은 옷 주름이 와이자인게 특징이다. 간다라는 처진 유자고, 마투라는 그냥 유자이나 라왁의 불상은 몸통부분의 옷은 유자 다리 부분은 일자로 합쳐서 와이자형태였다. 이는 동북아에 수백년간 영향을 미친다. 

 호탄은 사천왕의 근원이기도 하다. 원래 사천왕은 인도의 토속신이나 불교에 수용돼어 동서남북 사방의 수호신이 된다. 초기 인도의 사천왕은 그래서 터번을 쓰거나 일반인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호탄은 사천원의 우두머리 다문천에 주목한다. 호탄은 주변에 침략세력이 많았기에 그를 강한 수호신으로 그려낸다. 마치 강한 무장 같은 이미지로 탈바꿈하는데 이것이 동북아에 이어진다. 

 쿠챠는 호탄과 다르게 서역 북로에 위치한다. 서역북로는 호탄과 다르게 굴을 파기가 용이해 석굴이 발달한다. 서역 석굴의 60% 여기에 위치한다. 3-9세기 쿠챠에는 키질 석굴사원이 조성된다. 쿠챠는 인물도 유명한에 왕자였던 쿠마라지바는 간다라에 유학했다가 중국으로 끌려간다. 여기서도 오래 체류하고 승려였음에도 자식을 낳게 된다. 중국은 그에게 경전을 번역했는데 쿠마라지바는 산스크리트어와 한문에 모두 능통했기에 경전을 번역해 중국의 불교 발전에 크기 기여한다. 

 키질 석굴사원에는 스투파가 없다. 대신 중앙주, 즉 기둥이 하나 있다. 이 기둥을 중심으로 탑돌이를 했다. 멀리 떨어진 중국의 운강 석굴도 이것의 영향으로 스투파 대신 중심주가 있다. 키질석굴사원의 절반은 아치형 천장인데 절반은 모줄임 천장이다. 모줄임은 모서리를 위로 갈수록 좁게 하여 천장을 막는 건축 공법이다. 유목민의 공법으로 추정되는데 놀랍게도 삼국에서 고구려도 모줄임 천장이 있다. 바로 쌍영총이다. 삼국중 고구려만 썼는데 쿠챠의 영향을 고구려가 받았다기 보다는 양자 모두 자주 접하는 유목민의 영향을 받은 듯 하다. 

 키질 석굴사원엔 많은 그림이 있는데 대부분 인물의 눈 부분이 파괴되어 있다. 이는 이슬람의 영향이다. 이슬람은 사악한 눈을 바라보면 불행해진다 믿는 경향이 있는데 불교사원의 그림의 눈을 이런 이유로 파괴한 것이다.

 놀랍게도 무려 1500점의 서역 작품이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제국주의를 운영한 한국에 이렇게 많은 서역 그림조각이 있는 이유는 일제강점기로 인해서다.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는 일본 정토진 종의 후계자로 부유한 절의 계승자로 아버지가 백작이었다. 그는 27세에 실크로드를 방문해 마구잡이로 벽 그림을 훼손하여 조선으로 들여왔는데 부유한 그도 재정난에 빠져 수집품중 상당수를 판매하였고, 이를 매수한 자가 이를 조선총독부에 기부한다. 오타니 고즈이 콜렉션은 전후 급박한 상황에서 일부는 일본으로 일부는 조선에 남게 된다. 한국이 본의 아니게 약탈 미술품을 대거 소장하게 된 경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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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수업 - 품격 있는 삶을 위한 예술 강의
문광훈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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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사놓고 몇 년을 책장에 쟁여두다 보게 되었다. 이유는 그냥 지난 주 정도에 비가 와서다. 사람은 당연히 주변 날씨에 영향을 받고 그것은 가끔 책을 고르는데도 작용하곤 한다. 가볍고 그림을 보려고 책을 들췄는데 이런, 생각보다 많이 어려웠다. 책에는 작가가 평생을 살아가며 사회와 역사, 시, 그림, 음악에 대한 자신의 사유가 잔뜩 담겨있었다. 내가 약한 류의 책이었다. 책은 읽을 수록 묘한 느낌인데 활자가 술술 읽혔지만 확 내 것으로 들어오지는 않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알 것 같은데 모르는 느낌, 모르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해는 안 되는 그런 묘함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당연히 저자 만큼 사회와 예술을 관련 짓는 경험이 크게 적기 때문이겠다.

 책은 미학을 공부하는 이유부터 시작한다. 역시 이유부터 잘 다가오진 않았고 그럴듯 하단 느낌이었다. '미학은 하나의 문이자 교차로 역할을 하며 다른 것과의 만남을 주선한다. 미적인 것을 통해 감각이 쇄신되고 이것이 사고의 언어의 쇄신으로 이어진다. 현재와 일상을 넘어서는 경험을 갖게 한다. 더 넑고 깊은 지평으로 사람은 안내한다. 미적인 것의 향유를 통해 자기 삶을 살게 한다.'였다. 저자는 미학 수업은 내가 내 삶은 제대로 살아가는데 기여해야 하는 것이고 미학 수업의 목표는 삶의 자발적 구성이라며 책의 문을 연다. 

 저자는 예술에서 사회와 연관시켜 자유와 책임을 중시한다. 예술작품에는 과거로부터 전해지는 미래의 에너지가 경험의 잔해로 기억 속에 녹아 있다. 이 에너지를 얼마나 넓고 깊게 받아들이냐는 개인에게 달려있다. 이 때 느끼고 생각한 것은 미학의 표현 수단인 언어, 음악, 색채로 표현할 수 있다. 이 때 표현은 자유의 영역인데 여기선 자신의 책임이 따라야 한다. 그리고 이 자유와 책인 중 하나라도 누락된다면 그 예술은 곧 한 낯 미망에 불과하단게 저자의 말이다. 뭔가를 느끼고 자유롭게 표현하지만 그것을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 사람에 대한 책임과 관련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사람에게 삶의 충일성을 떠올리게 해준다. 사람은 실존적 삶을 살아간다. 뭔가를 선택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기 포기하기도 해야한다. 우리의 시간과 자원, 능력은 한정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와 다른 사람은 내 마음 처럼 절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삶은 어떤 가능성의 구체화이면서도 동시에 다른 가능성의 포기다. 예술은 불가능한 것들을 상상속에 가능하게 해주면서 이런 충일성을 가능하게 한다. 

 저자는 낭만주의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낭만주의는 예술 장르에 딸, 그리고 나라, 시기, 작가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낭만주의는 무한한 것에 대한 열망이라는 공통 분모를 갖는다. 근원적인 것들은 단조롭고 무한하며 순환하는데 그렇기에 낭만주의의 풍경화는 무한성의 경험을 표현한다.  

 그림을 감상하는 법은 어렵다.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림은 우선 천천히 음미해야 한다. 우린 관광을 가거나 미술관에 가면 너무 많은 작품과 시간에 쫓겨 급하게 음식을 먹듯 그림을 관람한다. 제대로 소화가 될리 없다. 그림을 보는 방법에 왕도는 없지만 저자는 그림에 나타는 사물의 배치, 빛이 어디에서 나와 어디를 비추고, 인물의 표정이나 팔다리, 그리고 몸의 자세에 대해 살펴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화가의 기술적 숙련성과 관심, 성격, 문제의식에 대해서도 알고 그림을 본다면 더욱 좋다고 한다. 

 초상화는 역사적으로 정치권력을 가진 자이거나 막대한 부를 가진 사람들이 대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화가의 가족과 친구, 일반 서민도 대상이 된다. 그리고 초상화도 과도한 표정이나 제스처등 이상화된 형태에서 탈피한다. 과시, 자랑에서 벗어나 삶 자체, 인물의 성격과 고민, 세계관이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렘브란트의 자화상이다. 워낙 유명한데 그는 초상화로 유화만 50개, 에칭 판화는 30개, 소묘로는 10개를 남겼다. 20세부터 죽을 때 까지 매년 한 두개를 그린 셈이다. 그의 모습의 변화는 세월에 따른 노화,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위치의 변화, 세계관의 변화는 매우 잘 담아낸다. 

 발레는 300년 전 궁정 예술의 한 형식으로 주로 군주를 찬미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남자가 의례적으로 춤을 추다 차츰 여성에게도 허용이 되었다. 낭만주의 시대가 되면 요정이나 유령같은 비현실적이고 몽상적인 표현이 필요해졌고 그로 인해 남자보단 여자가 오히려 더 어울리게 되었다. 발레의상이 소매없는 코르셋이나 종 모양의 넓은 스커트로 줄어든 것도 이 때다. 치마폭이 넓어야 아래 위로 뛸 때 불룩해져서 허공에 뜨는 듯 해 중력으로부터 해방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늘 날의 미가 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아름다움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나의 느낌에서 시작되기 때문인데 나와 대상은 미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미는 내가 느끼는 주관적, 감각적인것이면서도 다른 사람도 같이 그것을 느낄 수 있기에 객관적이고 이성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는 감각과 사고, 개인과 사회를 이을 수 있으며 그래서 바른 미는 현실을 성찰할 수 있다. 하지만 감각만이 있는 미는 반쪽짜리다. 이것이 사유와 연결되어야만 한다. 감각과 사유가 같이 있는 참된 미는 나와 타자와 현실과 이념을 잇는다. 이 이어짐 속에서 두 세계는 대립을 벗어날 수 있다는게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는 시도 언급한다. 사실 나는 시가 매우 어렵다. 시집은 정말 짧은데 나는 내가 경험한 생각과 느낌을 주변 사물이나 다른 것에 잘 비유하기 어렵다. 그러다보니 시인이 비유한 것도 잘 와닿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이걸 시간과 공을 들여 붙잡고 싶은 욕구도 딱히 없는 편이다. 그 시간에 다른 지식책과 이야기책을 보는걸 더 선호한다. 저자도 시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시는 사물 삼투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삼투적인것은 대상 속에 작가가 감정을 투사시켜 마치 내가 그 대상인 것처럼 느끼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즉, 시인은 자기만의 중얼거림이 아니라 무엇을 기대어 그것을 상상으로 관통하면서 자신을 표현한다. 시의 언어를 빗대어 말하기 또는 이미지의 비유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독일어로 교양은 bilden이고 영어로는 build가 된다. 즉, 교양은 미리 만들어졌거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다른 무엇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성과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교양있는 사람은 스스로 만들어서 된 사람이다. 문화는 인간 삶의 의미 있는 활동 전체를 말하는 것인데 그래서 교양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삶의 문제가 된다. 지금 내가 내 삶과 현실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다면 스스로 만들기 위해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살아간다면 나는 이미 교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양은 이렇기에 당연히 사회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고양의 형성 이념은 타인에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상호의존성이기도 하다. 교양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반드시 타인과 사회는 연관된다. 혼자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고 우리는 관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주체는 대상과의 이런 만남을 통해서 자기의 감정과 사고 판단련과 행동력을 검토 성찰하게 되는데 그래서 교양 개념은 윤리적, 정치적 차원을 갖게 되기도 한다. 즉, 교양은 자유로운 자기 창출이면서도 더 온전한 인간으로 변모하는 해방의 과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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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 그 집이 내게 들려준 희로애락 건축 이야기
구본준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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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기자였던 구본준의 또 다른 건축 책이다. 그는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에 그가 쓴 다른 책인 두 남자의 집짓기를 내가 봤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상기했다. 그는 2014년 이탈리아 출장 중 돌연사했다. 아직 40대의 젊은 나이였다. 최근 건축책은 유현준의 책을 주로 보고 있지만 과거엔 구본준이 있었던 셈이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더 좋은 책을 많이 냈을 것이 확실해 아쉽다. 한국의 미 특강을 쓴 오주석, 역사를 쓴 남경태 작가도 구본준 만큼은 아니지만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같은 이유로 무척 아쉬운 분들이다.

 이 책은 2013년에 발간한 책으로 사실상 그의 유작이다. 다른 건축책들과는 좀 다르게 한국의 건축에 집중하고 있어서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시기는 근대와 과거, 현대를 모두 아우른다. 

 책의 서두를 장식한 것은 이진아 기념 도서관이다. 이진아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자수성가한 아버지가 무척 사랑한 딸이었다. 그 딸은 2003년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딸을 무척 사랑했던 아버지는 세상에 그녀를 남기고 싶었고 그런 그가 건축비를 대고 지자체가 토지를 대어 완성한 것이 이진아기념도서관이다. 이 건물은 건축 자체가 뜻 깊은 시도이기도 했고 서대문 형무소의 벽돌을 활용하여 의자를 만든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서울엔 많은 종교 건축물이 있다. 명동 성당, 불교 조계사, 천도교 중앙대성당, 개신교의 정동교회와 경동교회,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이 그렇다. 이중 서울 대성당은 고딕 양식이 아닌 로마네스크 형식인데도 한국적 양식을 많이 적용해 더욱 의미가 있는 건물이다. 대개 교회 건물은 고딕 양식으로 지으며 이는 신에 가까워지고 싶은 인간의 마음이다. 하지만 서울 대성당은 그렇지 않다. 여기엔 건축가의 뜻이 담겼다. 건축가는 1914년 성공회의 트롤로프 주교였다. 그는 건축가 아서딕슨에 서한을 보내 종교 건축물은 그 나라의 전통과 문화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설득한다. 수개월의 뱃길로 조선에 도착한 아서딕슨은 한국의 건축물과 가옥을 살핀다. 그리고 고딕을 포기한다. 그래서 서울 대성당은 기와 같은 지붕에 한옥의 창호 같은 창문, 오방색의 스테인글라스를 갖게 된다. 이런 현지 전략으로 서울 대성당은 다른 근대 건물들과는 다르게 한옥들과 같이 있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1990년대초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성노예 사건이 폭로되었다. 이어서 1992년부터 일본대사관에서 일본군 성노예 사건에 항의하는 수요시위가 시작된다. 2000년대 들어 어느 새 고령화한 피해자들이 사망하기 시작하면서 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처음엔 독립공원 내에 부지를 마련하려 했으나 늘 그렇듯 몇몇 보수단체의 반대로 위치가 마포구 성미산으로 옮겨진다. 국회와 정부가 마련한 돈은 겨우 5억이었기에 민간시민과 일본의 시민들이 돈을 모아 자산 20억이 만들어진다. 마포의 100평짜리 단독주택 구매에만 17억이 쓰이고 건축가는 고작 3억으로 건축을 해낸다. 바깥은 높은 벽을 세워 작은 건물을 크게 보이게 하였고, 할머니들의 얼굴과 손바닥 부조도 눈에 띈다. 집의 습하고 어두운 지하실은 할머니들이 끌려가 생활하던 공간처럼 꾸며졌다. 박물관은 전쟁에 끌려간 할머니들의 삶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형태로 완공되었다.

 조선은 유교 건물을 많이 지었다. 향교는 공립유학 교육기관이고 서원은 사립교육기관이다. 향교는 대개 고을의 중앙에 위치했는데 지금도 오랜 도시 지역의 중앙엔 교동이 있다. 바로 향교가 있던 마을이란 뜻이다. 서원은 풍수가 좋은 곳에 그리고 지역의 특성과 모시는 사람, 건축주의 특성이 반영되어 개성이 넘친다. 

 서원은 공통적으로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학생을 가르쳤기에 은행나무가 반드시 존재하고 교수 및 기숙사와 배향장소가 있다. 도동서원은 김굉필을 모시는 서원이다. 김굉필은 나도 처음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하지 않으나 조선 사림들에겐 정신적으로 큰 울림을 준 사람이다. 젊은 시절을 탕아로 보내다 늦은 나이에 김종직을 만나 수학하여 40이 되어서야 입직한다. 당시 양반들은 부모가 죽으면 3년상을 치뤘는데 대부분 돈을 주고 사람을 썼고 자신은 제사만 지내는 정도였다. 하지만 김굉필은 부, 모, 계모까지 총 9년 상을 스스로 해낸 사람이다. 워낙 강직해 연산 때 파직되고 사사되었다. 중종때 복귀되었는데 그의 강직함이 워낙 대단해 동방 5현에 이름을 올렸다. 그가 1번인데 동방오현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다. 도동서원은 이런 김굉필을 기리는 서원이기에 많은 건축비를 확보할 수 있었고 그래서 돌을 활용한 재미난 장식들이 많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호주의 대표적 건물이다. 국가의 이미지를 이 정도로 잘 드러낸 건물도 많지 않은데 호주 정부는 이를 계획하고 설계를 공모한다. 당선자는 당시 39세로 덴마크의 신예 이외른 우촌이었다. 조개 껍데기를 연상시키는 여러 구조체를 설계한 그의 건물은 매우 혁신적이었다. 건물은 정면이 따로 없었고 구조에도 구분이 없었다. 포개지는 거대한 고깔은 그 자체로 벽이자 지붕이자 관문이었다. 

 모든 게 좋았지만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호주 정부는 2년 정도의 건축 기간에 350만 달러의 예산을 예상했다. 하지만 해안가이다 보니 지반 문제가 발생했고 당시 낮은 건축 수준으로 인해 실현 가능한 재료와 구조의 변경 및 설계 등으로 실제 건축 기간은 10년 이상에 예산은 총 5700만 달러가 들었다. 호주 정부와 건축가의 갈등은 심해졌고 자신의 이상이 현실에 밀리는 느낌을 받은 우촌은 그대로 귀향해버린다. 호주정부는 자국의 건축가들을 이용해 현실적인 작업을 벌려 오페라 하우스를 마무리한다. 우촌은 개관식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먼 훗날에야 오페라 하우스를 다시 방문한다.

 조선의 5개 궁궐 중 창덕궁은 후원이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창덕궁의 후원은 우리 전통처럼 자연스러움이 그 특징이다. 창덕궁의 또 다른 특징은 정자가 많다는 것이다. 가장 화려한 정자는 부용정으로 열십자 지붕에 한 차례 각을 더 따낸 정자로 정조가 애용했다. 관람정은 전국에서 유일한 부채꼴 모양의 지붕을 가진 정자고 승재정은 작은 공예품 같이 아름다운 정자로 보통 사방이 트인 다른 정자와 달리 창호가 있고, 툇마루도 있다. 아마 겨울에도 애용한 것이 아닐지. 존덕정은 디자인이 독특한데 지붕이 2겹이고 한 모서리에 가는 기둥이 3개씩 붙어 있다. 청의정은 농업국가인 조선을 상징하는 것으로 정자의 지붕이 초가다. 왕은 농사의 신인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사를 선농단에서 올렸고 친경했다. 그리고 매년 청의정의 초가 지붕을 교체했다. 선농단 제사 후 제물로 사용한 소를 잡아 탕을 끓여 주변 60세 이상 백성에게 대접했는데 이것이 설렁탕의 시초란 이야기가 있다. 

 강릉에 가본 사람은 선교장을 한 번 정도를 들어봤을 것이다. 선교장은 집의 이름으로 현존하는 조선건물 중 가장 크다. 보통 양반의 집엔 당이나 각이 붙는데 선교장은 워낙 커서 장이 붙은 것이다. 선교장은 강릉에 위치하는데 그것이 더 대단하다. 강원 지역은 농경지가 척박하고 좁기 때문이다. 선교장 가문의 땅은 주문진에서 삼척에 이를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선교장 가문의 시작은 권씨부인이다. 본래 충주로 시집갔었는데 남편이 죽고 전처의 장자가 모든 가산을 상속하자 자신의 아이와 강릉으로 돌아와 염전 사업을 해서 자수성가한다. 그들은 개척된 땅은 비과세하는 법을 이용해 강원도의 척박한 땅을 농지로 바꾸며 땅을 늘려갔다. 

 선교장은 한양의 유력가와 통혼하여 세력을 유지했고, 문화적 후원과 교류도 자주해서 정치감각과 문화감각을 유지했다. 김정희나 여운형도 방문했다. 조선시대 양반에게 관동팔경과 금강산은 주요 관광지였는데 선교장은 그 초입으로 같이 방문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었다. 선교장은 손님대접에 상당한 신경을 썼는데 소반만 300개를 대접하고 손님이 떠날때는 옷도 지어 선물했다. 사랑채는 큰 사랑채, 중간 사랑채, 아랫사랑채로 나눠 손님의 학문적 수준과 지위에 따라 위에서 아래 순으로 배치했다.

 선교장은 처음부터 큰 건물이 아니라 대를 이어가며 꾸준히 증축하여 매번 당주의 취향과 철학이 반영되어 건축물이 다양하다. 선교장의 6대 이근우는 1908년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 잡고자 인재 양성을 위해 동진학교를 설립했다. 교사로 여운형과 이시형을 초빙할 정도였고 학생에게 숙식과 학비를 제공했으나 일제에 의해 3년만에 폐교 된다.

 이근우는 일제 때 중추원 참의를 지내기도 했으나 뒤로는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댔다. 선교장은 해 방 후 토지개혁으로 땅을 강제 매각당하고 지가 증권을 얻었으나 산업자본으로 전환에 실패하여 과거의 위상을 잃는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이후에도 가문에서는 강릉시장과 은행장, 대학 부총장이 연이어 배출되었고 선교장의 유명한 열화당의 이름을 딴 출판사 열화당도 설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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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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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아는 만큼 보고 관심 있는 만큼 무언가를 바라본다. 그 외에 나머진 무의미한 배경으로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건축가라면 당연히 어딜 가든 땅과 건축물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건축가 유현준은 그런 눈으로 공부를 하면서 일을 하면서 여행을 하면서 전 세계를 누비며 다양한 건축물을 보고 인상에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 30개를 선정해 수록하고 소개한 것이 이번 책 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이다. 

 사실 전 세계는 아니고 아무래도 건축이 발달한 선진 사회 위주인데 유럽과 북미(사실상 미국이다.) 아시아(거의 일본과 중동) 3부분으로 나눠 자신이 선정한 최고의 건물 30개를 소개한다. 물론 고대 건물은 제외되며 20세기 이후 만든 현대 건물만이 그 대상이다. 

 인간의 건축은 철근콘크리트 공법이 발견되며 크게 변화한다. 비로소 중력과 주변 환경에 따른 기후의 제약에서 크게 벗어날 수 있었으며 건물은 매우 높게 지어졌고 집적도가 매우 높은 메가시티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는 철근과 콘크리트가 열팽창 계수가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서든 철근과 콘크리트의 혼합은 그로 인해 균열 같은게 생겨나질 않는다. 르코르뷔지에는 건축의 선구자로 철근콘크리트 공법을 매우 사랑했고, 이것이 건축의 미래라 생각했다. 그가 생각한 콘크리트를 활용한 근대 건축의 5원칙은 다음과 같다.

1. 1층 필로티가 가능해졌다. 기존 서양건축은 벽이 힘을 받는 구조였지만 철근콘크리트 기둥으로 인해 벽이 힘을 받지 않아 1층을 비울 수 있게 되었다. 이 1층은 작은 건물은 주차장이나 다른 공간, 대형 건물에선 광장으로 이용될 수 있다.

2. 역시 벽이 힘을 받지 않다 보니 자유로운 형태의 평면 설계가 가능해졌다.

3. 역시 벽이 힘을 받지 않다 보니 자유로운 입면 설계가 가능해졌다.

4. 역시 벽이 힘을 받지 않다 보니 기존의 세로 긴 창에서 가로 긴 창으로 파노라마 뷰 등이 가능해졌다.

5. 옥상에 방수 처리를 하여 과거처럼 기울어진 지붕이 아닌 평면 옥상이 가능해졌다. 이로써 옥상에 다양한 시설이나 옥상 정원 등이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1. 퐁피두 센터

 건축물의 구조체와 기계 설비를 그대로 드러낸 스타일을 하이테크 건축물이라고 한다. 과거의 건축물은 중력을 이겨내는 거대한 기둥들이 그대로 보여 사람들에게 감탄사를 일으켰지만 현대의 건축물은 대개 이들을 감추는데 하이테크 건축은 이를 다시 드러낸다. 프랑스의 퐁피두 센터를 철골 트러스 구조가 건물의 입면에 그대로 드러난다. 파이프는 3가지 색을 띤 부분이 있는데 녹색 파이프는 상수도 관, 파란 파이프는 공기순환 공조 덕트, 노랑 파이프는 전기선을 안에 품고 있다. 이 센터의 구조가 노출된 이유는 사실 내부의 기둥을 없애 넓고 다양한 전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건축에서는 건물이 클수록 중력과 땅의 흔들림, 그리고 바람에 의한 횡압력을 견디는 것이 중요하다. 철근 콘크리트 건물의 경우 철근을 가득 품은 기둥을 땅에 깊숙히 많이 박아 무게를 지탱한다. 하지만 횡압력이 문제가 되는데 당기는 힘에 강한 철근을 입면에 정사각형으로 배치하고 엑스자 형태로 이 철골구조의 휨을 방지하여 이를 해결한게 퐁피두 센터다. 

 퐁피두 센터가 더 대단한 것은 광장 때문이다. 퐁피두 센터는 건물 앞에 드넓은 광장을 확보하였는데 이 땅을 기울어져 있다. 물론 땅은 센터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따라서 걸어다니는 사람은 중력에 이끌리듯 자연히 건물로 향하게 되며 앉은 사람도 당연히 건물 쪽을 바라볼 수 밖에 없게 된다. 


2. 루브루 박물관

 루브루는 원래 성곽이었던 것이 그 자리에 궁이 건설 된 것이다. 루이 14세가 귀족 세력 약화를 위해 베르사유에 궁을 지어 옮긴 이후 루브르는 왕실의 보물 수장고가 된다. 프랑스 혁명 4년 후에 개방되어 지금같은 박물관이 된다. 1980년대 프랑스는 넘쳐나는 작품과 보물로 인해 루브루의 증축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건축가 페이는 루브르의 중정 앞에 35m*35m*22m의 유명한 뜬금없는 유리 피라미드를 건축했다. 이는 지하로 증축된 루브르의 입구 역할을 한다. 이는 전통의 현대적 계승이라 볼 수 있는데 더 놀라운 것은 루브루 안에 입구와는 달리 지하로 향하는 유리 피라미드도 설계했다는 것이다. 이는지하공간에 많은 빛을 들어오게 하는 역할을 하며 지하의 역방향 유리 피라미드는 전통처럼 돌로 만든 작은 피라미드와 맞닿아 있다. 중국계인 페이가 아무래도 중국의 음양설의 영향을 받아 이처럼 설계한 것이 아닐까라고 저자는 추정한다.


3. 롱샹 성당

 일반적으로 건축물은 좌우 대칭이다. 그리고 그 중심선은 권위자의 권력을 세워주는 선 역할을 한다. 그런데 롱샹성당은 신이라는 권위자가 있음에도 네 개입 입면과 평면도가 모두 좌우 비대칭이다. 종교 공간은 신의 공간이기에 대개 권위적이다. 공간상 제단과 사람을 떨어뜨리고 공간이 모자라다면 예배당 앞쪽은 좁게 뒤쪽은 점점 넓어지게 좌석을 구성하여 멀게 느껴지게 한다. 롱샹성당은 이를 도치한다. 제단쪽으로 갈수록 자리가 넓고 뒤로 갈수록 자리가 좁아져 제단이 가깝고 친근한 공간으로 변모한다. 신과 권위적 만남이 이뤄지는 공간이 아닌 것이다. 

 롱샹 성당은 서양건물 치곤 이상하게 동양의 나무 건축 처럼 육중한 지붕을 갖고 있다. 다만 지붕과 벽 사이에 틈을 두어 빛이 들어오고 육중함을 낮췄다. 큰 지붕은 큰 하중을 요구하는데 건축가는 보와 기둥을 지붕과 벽에 숨겨 이를 감췄다. 다만 그러다 보니 벽이 상당히 두꺼워지게 되었는데 기둥이 있어 벽의 윗 부분은 두께가 상대적으로 얇고 아래부분은 두껍다. 그리고 건축가는 여기에 다양한 크기의 창을 낸다. 벽이 두꺼우니 창은 당연히 깊게 들어가며 상부 및 하부에 위치함에 따라 깊이가 달라져 다양한 빛의 효과를 낸다.


4. 피르미니 성당

 르코르뷔지에는 말년에 경사로에 심취한다. 경사로는 방문객들이 자신의 보폭대로 걸으면서 주변 경관을 편안히 감상하며 건물로 진입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피르미니 성당은 신과 신도 간의 관계를 3가지로 설정하여 3가지 공간을 마련했다. 제단과 같은 층의 예배석은 제단을 우러러 보게 되는 공간이다. 제단의 다른쪽의 예배석은 경사지며 올라가게 지어져 제단을 내려보며 편안하게 예배를 보게 하는 공간이다. 다른 하나는 2층의 예배석으로 제단을 확연히 위에서 내려다보며 관조하는 자리다. 


5. 유니테 다비타시옹 

 역시 르 코르뷔지에가 지은 아파트다. 보통 아파트의 상가는 저층에 위치하는데 특이하게도 상가가 8-9층에 복층으로 지어졌다. 한쪽엔 창으로 빛이 들어오며 이는 상가의 주인이 입주민임을 의미한다. 

 그는 건물을 증기선처럼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서 건물 2층이 7미터나 들려있고 1층은 피로티구조인데 기둥이 위는 굵고 아래는 오히려 얇아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하다. 옥상엔 진짜 증기선 처럼 큰 굴뚝이 있다. 이 집합주택의 가장 큰 특징은 단위가구 설계다. 단위 세대는 작은 단층에서 복층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코르뷔지에는 입주자를 1-8인까지 6개, 연령은 영아에서 노인 7단계로 분류했다. 그래서 14개 타입의 집이 있다. 

 일반적으로 건축에서는 복도와 같은 공용면적을 최소화하고 전용면적을 극대화히기 위해 호텔처럼 복도가 가운데 있고 집이 복도의 양측면에 위치한다. 이 경우 복도가 매우 어둡고 해가 들지 않게 되며 집들도 한쪽이 서로 막혀있어 통풍이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복도를 한쪽으로 놓으면 위의 문제는 해결되나 방이 복도와 접하는 면적이 좁고 건물이 폭이 좁고 높아지는 문제가 생겨난다. 코르뷔지에는 중복도를 유지하면서 한 집은 기억자형 한 집은 니은자형으로 설계하여 이를 해결한다. 

 아파트의 바깥에는 빛의 삼원색과 색의 삼원색에서 착안하여 빨강, 파랑, 노랑, 초록의 4가지 색을 번갈아가며 칠했다. 그래서 집들이 외곽에서 바라봐도 개성있어 보인다.


6. 구겐하임 미술관

 낙수장으로 유명한 로버트 라이트의 작품이다. 그는 코르뷔지에와는 정반대로 자연과 어울리는 건축을 이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구겐하임 미술관은 도시 한복판에 있는 것으로 이렇다할 자연환경이 없다. 그래서 그는 이 경우 환경보단 건축물의 용도에 집중한다.

 미술관의 용도는 당연히 미술품의 전시다. 그리고 전시를 위해서는 미술품의 대부분이 회화인 만큼 벽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미술관은 그래서 여러 개의 방은 갖고 있는데 누구나 경험한 것처럼 방을 빙빙돌다보면 관람 경로가 헛갈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미술관엔 반드시 화살표가 있다. 

 로버트 라이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430미터나 되는 기다란 벽을 연속되게 만들었고 이를 경사로로 하였다. 그래서 관람객은 아래층부터 경사로의 벽을 따라 설치된 미술품을 관람하여 꼭대기까지 올라가게 된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이런 구조이기에 밖에서 보면 마치 아이스크림 처럼 보이게 된다.

 경사로 가운데는 여섯 층이 뻥뚫린 빈 공간을 만들었고 그 공간 위에는 천장을 두어 햇빛이 들어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경사로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데 이것의 방지를 위해 상부로 올라갈수록 경사로의 폭이 오히려 넓어지고 내려 갈수록 좁아지게 구성했다. 


7. 시티그룹 센터

 도심의 건물을 개발하여 높게 짓기 위해서는 넓은 땅이 필요하다. 하지만 생각만큼 주변 건축물이나 토지의 구매가 어려운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공중권을 사들려 해결할 수 있다. 공중권은 해당 건물의 윗부분, 공중을 개발할 권리다. 이걸 팔 수 있는데 대형 건물을 짓고자 하는 건축주가 주변 건물의 공중권을 사서 윗 부분을 크게 지을 수 있게 된다. 

 시티그룹 센터는 12층 아래로 건물을 비워 시민을 위한 공지를 제공했다. 그 덕에 용적률이 상향되었다. 시티그룹 센터는 근처에 교회가 있어 부지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 그래서 공중권을 매입하고 과감히 큰 건물의 아래 부분이 비웠다. 대개의 직사각형 건물은 꼭짓점에 기둥이 있는데 이 건물은 모서리 각 중앙에 기둥이 있다. 그리고 아래 빈 공간쪽으로 역삼각형 모양으로 기둥을 모아 건축했다. 그 덕에 특이한 모양이 되었고 아래 부분이 크게 비해 개방된 광장을 조성하게 되었다.

 이 경우 바람에 취약해지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고층부에 동조질량 감쇠기를 설치했다. 이는 네 개의 끈에 매달린 무거운 추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이동해 건물의 무게 중심을 이동시켜 구조를 안정화 시키는 공법이다. 


8. 허스트 타워

 허스트 그룹은 1928년 6층짜리 사옥을 지어 활용했다. 하지만 시대가 지니면서 46층짜리 고층 건물을 지으려 했는데 구사옥을 보존할 필요가 있었다. 건축가인 노먼 포스터의 결론은 구옥의 내부는 모두 철거하되 입면을 남기고 그 자리에 신형 46층 건물을 올리는 방안이었다. 

 그는 기존 구옥에 수직으로 구멍을 여러 개 뚫고 철골 기둥을 넣었다. 이 철골 기둥에 철골 가지는 붙여서 기존 건물의 입면을 양쪽에서 붙잡게 만들었다. 그렇게 구옥의 입면을 유지하고 신사옥을 올렸는데 구옥의 높이만큼은 과감하게 로비홀로 구축했다. 그래서 이 구간에는 건물을 받히는 기둥과 로비, 엘리베이터만 존재한다. 그리고 구옥과 신사옥 사리에는 거리를 몇 미터 두고 여기에 창을 설계하여 매우 밝은 로비를 구축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고층 건물일수록 횡압력을 견디기 어려운데 허스트 타워는 대각선 부재를 사용하여 이를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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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고독의 순간들 더 갤러리 101 2
이진숙 지음 / 돌베개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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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갤러리101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은 '위대한 고독의 순간들'이다. 르네상스에서 낭만주의까지 다룬 1권에 이어 인상주의에서 추상주의까지의 예술 사조와 작가, 작품, 시대를 다루고 있으며 시기는 19세기 중반에서 1차대전까지이다. 1권이 신에서 왕과 귀족, 그리고 평민으로 예술의 주도권이 넘어가며 미술에 인간의 시대가 도래함을 다룬 것이라면 2권은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의 빠른 발전으로 모든 것이 흔들리고 인간이 소외되는 과정에서의 예술을 다룬 것이다. 때문에 제목이 위대한 고독의 순간들이 아닌가 싶다.

  이 시기는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시대가 매우 빠르게 변화한다. 때문에 모든 가치관과 정체성에 흔들리게 되었고 그에 따라 예술도 사조가 상당히 빠르게 변화한다. 19세기 중엽에서 1차대전까지는 근대의 형성기다. 벨에포크와 데카당스의 시기이자 새로운 희망의 20세기와 그와 반대인 절망적 전쟁이 일어난 극단의 시기다. 근대 사회 인간은 마침내 신분과 종교의 속박에서 자유로운 개인이 되었으나 반대급부로 이젠 개개인이 자신이 무엇이 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 정해야하는 혼란의 시기였다. 

 20세기 과학의 발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낙관론을 발전시키기도 했지만 반대 급부로 서구 이외 외 지역에 대한 식민지 착취와 폭력, 자연에 대한 착취가 이뤄졌다. 개개인은 더 이상 사회의 관행에 순응하지 않았으며 그에 따라 통상적 여성상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 그래서 팜파탈이 예술의 주 소재가 된다.

 

1. 라파엘전파, 바르비종파, 리얼리즘,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라파엘 전파는 산업화 이후 부르주아 문화의 속물성에 저항하며 라파엘 이전의 가식없는 미술로 회귀하자는 주의다. 디테일을 중시한 사실주의적 그림이 이들의 특징이다. 바르비종파는 파리 근교의 바르비종에서 활동한 풍경화가들을 가르킨다. 이들은 자연광에서 자연을 직접 관찰하여 그리는 것을 선호했고 자연을 그리는 새로운 감수성과 방식을 가졌다. 리얼리즘과 인상주의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했다. 리얼리즘은 혁명 이후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모습을 진실하게 기록하는 것을 중시하는 사조와 미술과 문학에서 동시 등장했다. 기존의 관점에서 보면 고사하지 못한 주제와 소재도 편견없이 예술로 가져와 다뤘기에 이후 예술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꾼다. 인상주의는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색채 속에서 자연 묘사를 중시하는 예술가 그룹으로 그와 더불어 파리 시민의 삶을 미술의 주제로 삼은 본격적 근대 미술운동이다. 하지만 편견없이 눈앞에 보이는 현상을 묘사하는 객관주의는 결국 개인의 순간적인 경험에 의존하는 주관주의로 전환되는 모순을 야기하기도 했다. 신인상주의는 인산주의의 경험적인 리얼리즘에 반발해 고적주의적 정신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사조다. 점을 찍어 표현하는 점묘파가 대표적이다. 

 19세기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의 시대로 그야말로 명암이 분명한 시기였다. 산업혁명과 제국주의로 나라로 과도한 부가 들어오고 있었으나 어린아이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에 동원되고 착취되어 성년이 되기도 전에 죽음을 맞았고 템스강은 죽음의 강이 되었다. 또한 도덕적으로는 금욕의 시대였지만 그 어느때보다 사창가가 번성했고 식민지에 대한 착취가 정당화된 모순의 시기였다. 

 이런 시기 밀레는 전통적 삶이 남은 시골에서 답을 찾으려 했다. 밀레는 당시 주류 아카데미와 반대의 길을 걸었는데 그들은 신화나 역사의 인물을 주로 다뤘다. 반면 밀레는 평범한 시골의 사람들을 그렸다. 이는 사람들의 요구와도 다소 부합되었는데 산업화와 도시화로 사람들은 자연에 대한 향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순되게도 시골의 사람들이 주인공이기보다는 배경이기를 원했는데 밀레가 다룬 시골의 농민들은 마치 영웅처럼 그림의 주인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당대 프랑스인들은 밀레의 작품에 불편함을 느꼈고 미국에서 인기가 좋아 현재 밀레의 작품 다수는 미국이 소장하고 있다. 반 고흐는 이런 밀레의 시골 배경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다. 

 구스타프 쿠르베는 미술사에서 탄생과 죽음에 대한 태도변화를 가져온 인물로 꼽힌다. 그는 오르낭의 장례식을 그리며 진행하는 사제는 권태스럽고 냉정하며, 이해관계를 다지는 듯한 사람들, 하늘을 잘라낸 듯 그림을 길게 그려 지상의 문제만을 강조하는 그림을 그려냈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램피아도 당시 큰 비난을 받았다. 일단 올랭피아란 이름 자체가 당시 매춘부의 흔한 이름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과감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으며 전통적인 여신처럼 8등신이 아닌 지극히 현실적 인간의 몸을 갖고 있었다. 이는 예술을 관람하는 남성 관객들에게 자신들의 더러운 현실을 마주하게 하는 불쾌감을 안기게 된다. 마네는 이처럼 더러운 현실을 비판하고 그대로 드러내어 직시하게 함을 물론이고 누드는 비너스로만 표현되던 회화의 관행까지 같이 전복시켰다. 

 드가는 발레리나와 여가수 등 여성을 매혹적으로 많이 그려낸 화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평생 독신이었고 인간혐오 염세가였다. 그가 이런 것은 인간의 마뜩지 않은 감정을 읽는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드가가 갈던 시기는 영웅이 아닌 범인의 시대였고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필요의 경제에서 욕망의 경제로 이행하는 시기였다. 1852년 몽마르셰 백화점이 등장하고 중산층 부인의 소비가 증가한다. 당시 여성에겐 거의 모든 것이 허용되지 않았는데 그나마 가능한 게 소비활동이었다. 평범한 일상사가 예술의 주제가 되면서 거대담론에 가려진 다양한 인간사가 의식되고 시민사회의 속물성과 부조리를 드러내는 갈등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그럭저럭 잘 굴러가면서 많은 시민들이 권태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드가는 이 만성적 권태를 회화로 잘 표현했다. 압생트 마시는 사람들이나 자두 브랜디 등의 작품에 권태로운 표정이 묻어난다. 

 과거 회화는 그 주제가 신화, 중교, 역사로 검증받은 내용이었다. 그리고 원근법과 비례등의 장치도 그림은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전제는 세상에는 신이 하나이고 진리도 하나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관행에 마네는 의문을 제기했고 미술의 낡은 상상의 질서를 해체했다. 그리고 그림에 담아야할 내용과 그리는 형식에 대해 선입견 없이 자연을 그대로 그리고자 한 것이 인상주의다.

 따라서 모네 같은 인상주의에서는 루앙대성당을 그릴 때 여러 장면을 그리게 된다. 매 순간의 변화가 진실이기 때문이다. 모네는 수련 연작을 그리면서 마지막에는 하늘과 물의 구분이 사라지고 물과 수련의 구분도 사라지는데 이는 서양의 전통적 이분법을 넘어선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런 인상주의의 방식은 매순간을 그려야 한다는 불가능한 인상의 함몰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그래서 인상주의는 훗날 상징주의와 추상화로 이어지게 된다. 

 모네는 눈앞의 생생한 현장을 캔버스에 옮긴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조르주 쇠라는 이 과정을 하나로 체계화, 과학화, 방법화 하려 시도한다. 대부분 인상주의자는 순간의 인상이 중요해서 구상을 위한 스케치를 거의 하지 않았으나 쇠라는 대충 스케치를 하고 공간 배경을 확정하고 인물 없이 배경을 그리고 이후 인물을 그려냈다. 쇠라 이전엔 색을 혼합했지만 그는 점묘법으로 혼합하고자 하는 색들을 점으로 주변에 배치해 혼색의 효과를 드러냈다. 이런 분학주의는 인상주의를 과학 체계화하고자 하는 시도였으며 쇠라는 색조, 색상, 선의 대위로 그림을 체계화하였다. 


2. 후기 인상주의, 아르누보

 후기 인상주의는 세잔, 반고흐, 고갱을 지칭한다. 하지만 이들은 형식상의 공통점은 없었고 인상주의 이후 현대미술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르누보는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으로 회화, 조각, 건축의 분리는 기초로 하는 시스템이 반발해 공예를 포함한 종합예술을 지향했다. 기존의 역사적 양식을 모두 거부하고 동양적, 장식적 성격을 갖는다. 

 세잔은 매일 아뜰리에에서 그림을 반복적으로 그렸다. 그리는 소재도 제한되 사과와 정물, 생트빅투아르산과 고향 액상 프로방스의 풍경만을 그렸다. 사람도 주변 인물만을 제한적으로 그렸다. 세잔은 확정된 진리의 모방으로써의 미술을 거부한다. 세잔은 사과의 신화, 실용적 목적을 모두 걷어내고 사과 자체를 바라보는 시도를 한다. 즉, 감각을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세잔은 세세히 그리지 않고 사과를 바라 보았을 때의 감각을 상기 시키는 정도로만 된다는 생각으로 그린다. 세계는 풍교롭고 광대하며 아름다우나 이를 표현하는 화가의 재료는 유한하다. 하지만 그중 가장 무한한게 색채다. 그래서 세잔은 색채를 다양화하며 비슷하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은 비슷한 것을 꾸준히 그려나간다. 

 종합예술을 지향한 아르누보는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을 발전시킨다. 당시는 세기말과 벨에포크라는 두 얼굴의 시대였고 소비의 활성화로 광고라는 새로운 창이 열렸다. 알폰스 무하는 광고에서 스타로 유명세를 떨친다. 광고는 불특정 다수에 호소력을 가져야 했는데 이것이 대중성이다. 소비는 욕망의 대중화와 욕망의 민주화를 가져왔다. 이것은 진정한 세속화의 길로 중요한 것이었다. 소비는 이제 더 이상 과거처럼 특권적 행위가 아닌 유행에 따르는 대중적 행위가 되었다. 하지만 무하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이것을 느꼈지만 그의 조국 체코는 동유럽의 식민지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는 민족주의자이면서 코스모폴리탄이었으며 이를 위해 조국으로 돌아가 헌신한다. 


3. 나이브 아트, 야수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표현주의, 추상미술, 아방가르드

 야수주의는 입체주의의 주지주의와 대조적으로 주정주의적 성격이다. 표현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입체주의는 하나의 시점은 원근법을 파기하고 다시점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재구성하고자 했다. 미래주의는 기계 문명에 대한 찬양, 역동성과 속도감을 새로운 미의 기준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전쟁찬양과 여성멸시, 파시즘 스캔들을 야기했다. 표현주의는 르네상스 이후의 사조인 자연의 재현보다는 인간의 내적 상태를 구현하고자 했다. 감정의 직접 표현을 위해 형태의 왜곡과 과감한 색채를 사용했고 청기사파, 다리파, 신즉물주의 등의 독일 미술의 주요 특징을 이룬다. 추상미술은 눈에 보이는 자연과 사물을 묘사하지 않는다. 칸딘스키의 추상미술,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가 해당한다. 아방가르드는 군사용어로 첨병이라는 뜻이다. 전위 예술로 관습을 타파하는 혁신적 예술을 지칭한다.  

 정제된 쾌락주의는 앙리 마티스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베르그송은 인간의 지성은 진화의 최고 산물이지만 창조적 진화를 인식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인간의 본능이 생명과 근본적으로 공감할 수 있기에 지성에서 해방된 직관만이 이를 통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베르그송의 철학은 비지성적, 직관적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마티스의 특징은 단순함에서 오는 힘과 명징함에서 오는 원숙함이다. 당시 화가들은 음악의 조화로움 때문에 음악을 미술로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가 많았다. 그 조화 방법 중 하나가 색채인데 마티스는 초록, 주황, 청색, 갈색 등의 단순한 색채를 사용했다. 마티스는 색채와 관련한 모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였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은 여성의 참정권 요구와 매독등의 공포로 팜파탈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항으로 순종적인 여성인 팜마르질 모두 팜파탈과 더불어 남성을 기준으로 여성을 바라 본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전쟁으로 남성의 생산력에 의존하지 않는 직업을 가진 여성이 등장한다. 독일의 케터 콜비츠는 시대의 아픔과 정신적인 고통을 육체의 언어로 번역한 예술가다. 표현주의 화가들이 대개 소외감이나 근원에 대한 갈망 등 개인 내면에 천착했다면 콜비치는 사회적 이슈를 대상으로 삼았다. 

 말레비치는 검은 사각형을 그렸다. 그는 작품을 전시장의 동쪽에 전시했는데 이는 러시아 전통에서 동쪽 모서리에 이콘화를 설치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것은 이 그림이 일반적 그림이 아니라는 의미이며 검은 사각형은 절대주의의 신호탄이 된다. 그는 3차원 공간의 대상세계가 진실이 아닌 환영이고 세계의 참된 실재를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말레비치는 예술가는 순수한 느낌의 절대적 우위를 가진 존재로 모든 대상적 사상에서 해방된 우주적 운동을 경험하고 이를 대상 세계와 아무 연관 없이 순수한 기하학적 형태의 색면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칸딘스키는 자연 그래로의 감정을 표출하는 표현주의와 표면적인 일상만을 다루는 리얼리즘, 인간 내면의 힘을 일깨우지 못하는 탐미주의 모두 낡은 것이라 보았다. 그는 예술이 그동안 잊힌 정신적인 것인 인간의 내적인 필연성에 따라서 영혼의 상태를 드러낼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 시대라고 칸딘스키는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음악을 참조한다. 칸딘스키는 회화를 인상, 즉흥, 구성으로 구분한다. 인상은 외부 자연의 즉흥적 느낌으로 재현적 요소다. 즉흥은 즉흥적인 정서적 반응으로 무의식, 자연발상, 내재적, 비물질적인 것이다. 구성은 오랜 기간 준비와 예비를 통해 탄생하는 궁극적 예술이다. 그의 구성에서 대상은 사라지고 주체가 파악한 세상의 모든 요소를 조화롭게 재배치하여 완전한 추상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몬드리안은 말레비치, 칸딘스키와 다소 다른 길을 갔다. 말레비치는 현실과 단절하고 4차원의 세계로 나아갔다면 칸딘스키는 인상, 즉흥, 구성의 세 단계를 통해 세상과 가깝고 멀어지는 영혼의 상태를 구현하고자 했다. 이들은 방법은 다르나 주체가 세상을 어떻게 수용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몬드리안의 추상은 현실에서 본질을 추출하고자 했다. 몬드리안에게 색채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는데 빨강은 인간의 육체, 노랑은 이성, 파랑은 영혼을 의미한다. 그는 이들을 조화시키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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