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향전.숙영낭자전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5
이상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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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향전-3D 입체 로맨스 판타지 소설

 

화설이라.

조선 후기 가장 널리 읽힌 애정소설이라는 문구에 끌린 <숙향전>.

로맨스는 시대를 초월하고 세대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인기주제가 아니던가. 평소 애정소설을 사랑하는 만큼 타임머신을 탄 기분으로 사백여 년 전 이 땅을 살던 여인들의 모습을 상상체험 해보자는 심정으로 펼쳐 들었다.

 

<숙향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만 3D영화 <아바타>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이 소설에서는 야광충 등 신기한 동식물들, 시공을 넘나드는 거리이동, 각종 생물들의 신기에 가까운 재주들, 신선이 인간으로 변신했다가 다시 신선으로 탈바꿈하는 일이 다반사다. 청학 한 쌍이 어린 숙향을 날개로 덮어주고 대추를 물어주며 추위와 허기를 달래준다거나, 파랑새 한 마리가 준 꽃을 먹었더니 천상에서의 경험이 되살아나 일순간 숙향은 선녀의 감정으로 되돌아가고, 사슴을 타고 먼 거리를 달리고 연엽주를 타고 수만리 길을 눈 깜짝할 사이에 순간이동 한다.

하늘의 선경은 또 어떤가. 오색구름이 떠다니고 용과 봉황을 탄 신선들, 옥수레가 다니고 온갖 기이한 향내가 진동한다. 숙향이 이선과 결혼할 때의 장면이나 천태산 마고선녀가 파랑새로 변신했다가 할미로 돌아오는 장면, 숙향이 정렬부인이 되어 행차할 때 거느리는 엄청난 수의 시녀들은 거대 블록버스터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상상을 초월한다.

 

구름 같은 차일이 하늘 높이 솟아있고 안개 같은 병풍이 겹겹이 둘려 있었다. 사방에는 장막과 깔개 등이 화려하게 빛났으며, 색색의 그림으로 수놓은 휘장과 기구 등 온갖 것이 인간 세상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들이었다. 좌우에 서 있는 손님들 역시 모두 요지연에서 본 선관과 선녀 같았다. …….(97-98쪽)

할미가 입고 있던 적삼을 벗어주고 두어 걸음 걷더니, 문득 간 곳 없더라.(113쪽)

상서가 각종 약을 가지고 황태후에게 다가가 먼저 옥가락지를 시신 위에 얹어두니, 얼마 뒤 살빛이 완연히 되살아났다. 또 귀에 벽이용을 넣고 눈을 계안주로 씻으니, 눈빛이 빛나면서 몸의 상태가 예전같이 되돌아왔다. 잠시 후 황태후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시니, 자던 사람이 태연하게 일어나 앉는 것 같았다. 이어 개언초를 드시게 하니, 마침내 말씀도 물 흐르듯이 하셨다.(204쪽)

 

로맨스에 판타지의 융합으로 시공을 초월한 이 소설을 조선시대 여인네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지금이야 공상과학이 현실이 되고 있는 시대니까 아마도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지. 라며 상상가능한 부분도 있지만 그 시절엔 터무니없는 환상이었을 테니까.

제도와 신분에 속박된 답답한 현실을 잠시라도 벗어나 그 갈증을 해소하고 회포를 풀 수 있는 방법이 판타지가 아니었을까? 현실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과 꿈, 욕망 등을 상상의 나래 속에서 마음껏 펼칠 수 있었으리라.

 

각설이라.

이 소설은 규모에서 보듯이 인간의 사랑이야기는 아니다. 조선은 드러내 놓고 남녀상열지사를 얘기하기가 쑥스럽고 발칙한 거라 여기던 시절이 아니던가. 이 소설은 인간으로 환생한 희노애락의 감정을 지닌 신선들의 사랑이야기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보다는 좀 더 기품 있고 의젓하지만 말이다.

천상에서 지은 죄로 인해 인간세상으로 귀양 온 달나라 선녀 숙향이 그 대가로 다섯 번의 액을 치른 후에야 사랑하는 이선을 만나고 행복하게 살다가 다시 천상으로 간다는 선녀와 신선들의 이야기.

잠시 인간의 몸을 빌리고 인간의 땅을 이용할 뿐이다. 그래서 이선이 태어날 때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와 재주가 남다른 귀인임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고 숙향이 태어날 때의 범상치 않는 기운과 그녀의 신기한 능력들을 그려주고 있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사랑은 쉽지 않은가 보다. 이선이 운명의 여인 숙향을 찾기까지 그녀가 살아온 이력을 거쳐 가게 된다. 말로 듣는 것보다 상대방이 겪은 고초를 체험하게 해서 숙향에 대한 사랑을 더욱 깊게 하기위한 장치 같아서 흥미롭다. 사랑이 결실을 맺기까지는 여럿 고비가 있고 그런 연후에 더욱 튼튼한 관계가 지어지는 것처럼, 비 온 뒤에 더욱 굳어지는 땅의 진리처럼. 또한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신선들의 희롱도 폭소를 자아내고 숙향과 이선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도와주는 하늘도 반전이다. 벌은 내리지만 미워하지 않는다는 건가?

 

각설이라.

숙향전에는 세상 만사가 미리 정해 준 운명에 따라 인연을 만나고 살아가던 시절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운명이 프로그램으로 입력된 거라서 우연도 인연이 되고 필연이 된다고 믿던 시절. 그래서 노력하며 사는 것도 숙명임을 말하고 있다.

숙향과 혼사를 정한 뒤 양왕의 딸 설중매의 청혼에 양다리를 걸치기 싫어 요리조리 피하는 이선의 모습은 든든하면서도 귀엽다.

 

숙향전에는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고전소설의 단골 주제들이 보인다. 아마도 유교사회였기에 정의에 대한 시대적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리라.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은혜를 갚는 것은 기본 예의임을 말하고 있다.

늙은 도적이 반야산에서 숙향을 구해 준 것을 나중에 정렬부인이 된 숙향이 보답한다거나 김전이 반하수를 지날 때 어부들의 손에서 구해준 거북이 김전과 그 가족을 수차례 위기에서 구해 준다는 내용, 숙향이 장승상 댁에 있을 때 종 사향의 음모로 쫓겨나게 되고 그에 대한 대가로 죽음에 이르는 사향 등 은혜 갚는 내용, 잘못에 대한 응징이 빠지지 않고 나오고 있어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그 과정은 절대 녹록치 않은 역경들이 가득해서 현실의 힘듦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이겨내라는 메시지 같다.

 

조선시대에 나온 이 소설이 현대판 3D영화에 못지않게 장대한 스케일과 인간세상과 천상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판타지, 달콤한 사랑을 갈구하는 여성들에게 주문을 거는 꿈결 같은 마술이 가득한 이야기라서 놀랍다.

 

*인상 깊은 구절

부부의 인연은 하늘이 정한 것이며, 애정에는 천하고 귀한 것이 없는지라.(107쪽)

할머니의 은혜는 이승에서는 다 갚지 못할 것이니, 저승에 가서라도 꼭 갚겠나이다.(112쪽)

이선이 어진 까닭에 사람마다 절개를 지키는 것이로다.(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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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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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개성존중 하는 행복한 학교, 영원히 불가능한 무리수일까요?

 

여고시절에 읽은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은 충격 그 자체였다.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유리알 유희, 크눌프…….

늘 틀에 박힌 일상, 정형화된 생각과 목표 속에서 막연히 탈출을 꿈 꿀 뿐 나는 늘 제자리걸음만 하는 용기 없는 학생이었고 도전과 일탈을 겁내던 학생이었으니까. 그래서 책 속 주인공들의 고뇌와 갈등에 동화되어 같이 우울해하기도 했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책 속에서 찾아 낸 명문장들은 나의 지적유희수단이 되었고 화가 이중섭인 양 껌 은박지에 깨알같이 적어서 친구들과 서로 나누기도 했고 한지나 수채화 용지에 거창하게 적어 편지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들어간 대학에서 나는 희망과 꿈을 보기 보단 왠지 모를 싱겁고 밋밋한 대학생활의 허탈함에 헛웃음을 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했다. 그 때는 정보도 없었고 먹고 사느라 모두가 바쁜 시절이라고 쳐도 한 동안 무엇을 해야 하나, 무엇을 꿈 꿔야 하나 갈팡질팡했던 기억이 있다.

 

 

아, 나는 무엇을 위해 그리도 애써 왔던가. 무슨 고민을 해 왔고 무슨 미래를 그려 봤던가 .그 고민들을 제대로 해보기나 했던가. 왜 스스로 질문하고 해답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는지, 스스로에 대해 실망했고 아이들을 이끌어 주는 선생님과 부모들의 태도와 방법에 불만을 토로했었다.

 

 

왜 좀 더 희망과 도전을 심어주지 못할까?

왜 여러 길이 있으니 갔다가 돌아와도 된다고 하지 않을까?

왜 가슴이 펄떡일 정도로 뛰는 일을 찾아보라고 하지 않았을까?

왜 우리 주변엔 그런 사람이 없을까? 왜?

 

 

그리고 20 여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읽어 본 수레바퀴 아래서.

예나 지금이나 가슴 깊이 아려오는 먹먹함은 여전하다.

권위주의적인 사회관습이나 획일적인 사회가치, 억압적인 종교, 물질만능의 풍조 앞에 각자의 개성은 상실되고 일탈하는 인격은 존중 받지 못한다는 현실이 헤세가 살던 그 시절 독일이나 지금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나 별반 차이가 없음에 놀랍고 통탄스럽다.

 

 

마을의 자랑이고 미래가 창창하던 기품 있고 영리하던 천재소년 한스 기벤라트. 신학교, 튀빙겐 대학입학, 대학졸업 후 교사나 목사의 안정되고 존경받는 생활이 보장된 규격화된 엘리트코스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그였다. 보통의 평범한 시골 범부에 지나지 않던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집안의 자랑이자 집안의 명예를 높일 수 있는 귀하고 소중한 아들 이었을 것이다.

그런 아들이 사회의 획일적 관습과 가치, 어른들의 욕망에 휩쓸려 자기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표가 무엇인지도 모르겠다며 꽃다운 나이에 어이없이 죽어 갔다. 그가 진짜로 죽은 이유를, 그의 속내를 아무도 모른 채. 신학교에서 사귄 유일한 친구, 시를 좋아하던 친구, 자기 주장이 있고 개성이 강하던 친구 헤르만 하일너가 떠나 버린 후 그 헛헛함에 그는 생활의 활력을 잃었다. 그로 인해 무기력과 신경쇠약으로 어렵게 공부해서 입학한 신학교마저 그만 두고 방향감각 잃은 돛단배가 되어 마음의 중심을 못 잡고 무의미한 생활 속에서 결국 죽음을 맞게 된다. 기벤라트의 죽음을 미화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는 어른들의 탓이 크지 않을까. 마을에서는 구둣방 주인 플라이크가, 학교에서는 복습교사가, 친구 중에서는 헤르만 하일너와 어릴 적 친구 아우구스트가 유일하게 그를 이해해 주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10세~15세가 일생 중 기억력이 가장 왕성하기에 배움의 시기인 것은 맞지만 마을 분위기가, 학교가, 가정이, 친구들이 그에게 공부만큼이나 소중한 것들이 많은 세상임을 가르쳐줬더라면 어땠을까. 가던 길이 아니면 돌아 올 수도 있음을, 최고가 아니어도 소중한 가치임을 일깨웠더라면 어땠을까.

주 시험에 2등으로 합격한 뒤 그에게 주어진 달콤한 휴식들에 그제야 은밀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슴이 쿵쿵 뛴다는 말이 왜 이리도 눈물겨운지.

신학교에 들어가서는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점차 공부에 집중하게 되고 그로 인해 두통과 걱정이 생겼다는 부분에서는 슬픈 전조같아 울적하게 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기계견습공의 일을 시작하면서 그래도 적응해 보고자 애쓰는 그의 모습은 백척간두에 서 있는 느낌이었고 꿈과 목표를 상실한 채 마을을 헤매는 모습은 곧 폭발할 것만 같은 시한폭탄을 품에 안은 듯 불안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문득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는 청소년들의 고민과 방황. 나는 그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나 라는 생각에 뜨끔했다. 평소 청소년들과 자주 접하는 생활이기에 더 더욱 나를 돌아보며 반성하게 됐다. 저러지 말아야지, 그러지 말아야 해 라고 수 없이 다짐했다.

청소년과 기성세대와의 갈등,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스승과 제자의 충돌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 갈등의 차이를 줄일 수는 없는 걸까?

인간은 태어나면서 각자가 다른 환경, 다른 소질들을 지니고 있음을 모두가 이해하고 배려했더라면, 천재적이고 기품 있던 기벤라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수레의 무게로 ,그 속도로 인해 깔릴 수밖에 없는 현실. 전도유망한 한 젊은이가 자신의 꿈이 뭔지도 모른 채, 그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꺾이고 스러져 갔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우리의 아이들이 힘들다고 아우성치며 헉헉대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고 잠시 쉬었다 가자고 손잡아 줄 여유가 아쉽다. 자신이 끌고 가는 수레가 평지든 언덕이든 독촉하지 말고 어차피 자신의 몫이기에 응당 부모라면 어른이라면 뒤에서 밀어주고 때론 휴식도 주고 방향과 속도를 의논하게 해야 한다.

앞으로 인생 100세, 150세 까지 살지도 모른다. 긴 인생에서 청소년기는 지극히 짧고 소중하다. 스스로 결심하고 가슴 펄떡이며 하는 일, 뜨겁게 즐겁게 희열을 누리며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언제나 주체는 자신이 되어야 하고 주변은 배려와 사랑으로 지원해 준다면 행복하게 자신의 몫을 해 낼 수가 있으니까.

 

 

우리는 말한다. 오늘의 교육이 내일의 희망이라고. 청소년이 미래의 대한민국의 꿈이요 자화상이라고. 그러나 현실은 과연 그러한가?

스스로 찾은 꿈도, 스스로 갈구하는 목적도 없이 주입되고 강요된 미래 앞에서 우리의 청소년들은 행복을 그리고 있을까?

 

 

헤르만 헤세 자신의 성장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에서 한스 기벤라트와 헤르만 하일너는 작가의 분신이라고 한다. 그가 소설 속에서 외쳐 되던 개성존중이 지금 이 시대에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오랜 만에 다시 읽어도 감동과 생각이 흘러넘친다. 생각의 깊이를 더하고 감동의 여운이 만리향 같은 소설. 시대를 넘나드는 고전의 가치에 절로 고개 숙인다.

 

 

마지막으로 헤르만 헤세가 남긴 말을 나누고 싶다.

'서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을 보고 그를 존중하고 각각의 다른 사람들을 보고 배우는 일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각자의 서로 다른 성격과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서로가 서로 다른 부분을 인정해주고 서로 다른 성격과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통해 내가 가지지 못한 부분을 배울 수 있다. 하나의 그림에는 수많은 색채가 담겨져 있다. 하나의 색깔로만 칠해진 그림은 어디에도 없다. 수많은 색채들이 어울려서 하나의 명작을 만들어 낸다.'

 

 

* 인상 깊은 구절

동정심 많은 복습지도교사 비트리히를 제외하면 그들 중 아무도 소년의 여윈 얼굴에 나타난 당혹스러운 미소 뒤에 물에 빠져 가라앉는 영혼이 아파하고 있으며, 그 영혼이 두려움과 절망에 차 죽어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본문 141쪽

 

그럼, 그래야지 친구. 아무튼 지치면 안 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고 말테니까.― 본문 11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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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물 소리
황석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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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세차게 흘러가는 여울처럼 이름 없는 민초들의 가슴에도 꿈은 흐르고 있다.

 

 

지난 해 말 개밥바라기별을 읽고는 황석영님의 유머 가득한 문장, 깊이 있는 글 솜씨에 반했고 청춘, 그 맘 때 쯤 이면 누구나 한번쯤 했을 고민들에 지극히 공감하며 감동하며 읽었다. 왜 이제야 읽은 거지 싶을 정도로 푹 빠져 읽었다. 그 후론 바리데기, 여울물 소리까지 읽게 되었다.

 

여울물 소리.

제목을 딱 읽었을 때는 꽤나 낭만적인 이야기인가? 표지도 귀여운 핑크색깔인 걸 보니……. 어? 여울은 강이나 바다에서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센 곳이라서 비록 물소리는 작지만 힘이 있는데 그렇다면 기구한 사연이 많은 판소리꾼이야기인가? 라고 생각했다.

 

등단 50 주년을 맞은 일흔이 된 대한민국 대표작가의 넋두리 같은 메시지를 다 읽고 난 지금은 자꾸만 뭔가를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어려운 옛날 용어들이 많아서 사전을 들춰가며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술술 재미있게, 때론 가슴 절이며 읽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미처 몰랐다. 이렇게 곱씹으며 긴 생각에 빠질 줄은.

 

2013년 오늘의 현실에서 마주한 19세기 우리 백성들의 아우성. 그 자생적 움직임들. 언제나 백성들은 한결같이 지켜보고 소원하고 있었구나. 올바른 세상. 모두에게 공평한 세상. 억울하고 굶주린 자 없는 세상. 그런 세상이 오기를 목숨 걸었고 비굴과 부조리, 부패에 맞서 용기를 냈구나. 라고 생각하니 울컥한 마음에 고개를 조아렸다.

 

소설의 이야기는 박연옥의 회상으로 시작해서 그의 남편 이신통과 엮이게 되고 이야기꾼과 동학 즉 천도교, 그 시절의 만인소, 임오군란, 동학혁명 등 역사적 이야기로 흘러간다. 그 과정에서 광대, 민요, 판소리, 전기수, 언패소설, 민담, 놀이패, 육자배기, 삼현육각, 거벽 등 새로운 사실들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어서 19세기로 타임머신을 타고 간 기분이다.

 

박 연옥. 그녀는 시골양반과 기생 첩 사이의 서녀로 태어나 나이 열여섯에 시골 부자의 후처로 들어가지만 투전판을 떠돌며 집 안을 돌보지 않던 남편과 삼 년 만에 이별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결혼 전, 이미 마음속에 이 신통을 정인으로 두었기에 민란에 참여했다가 부상당하고 돌아온 그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며 짧은 행복을 누린다. 하지만 행복의 단잠은 잠깐 뿐. 나라에서 금지한 천지도의 신자인 이 신통은 도인들의 고통과 각지의 민란을 외면할 수가 없어 연옥을 떠나게 되자 연옥은 그런 신통을 찾아다니게 되고 그 과정에서 그제야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 신통. 그는 서얼의 서자로 태어나 신분의 한계를 지닌 지식인이 되어 주변부를 떠돌게 되는 엄격한 신분제도의 희생양이다. 이름 난 전기수로, 강담사로, 재담꾼으로, 광대물주로, 연희대본가로, 천지도의 교리와 스승의 행적의 기록자로서의 떠도는 다양한 삶은 신통방통한 그의 글 읽는 솜씨만큼이나 재주가 많고 기지가 번득이기에 좋은 시대를 만났다면 더 많은 일을 하지 않았을까싶다.

 

'내 마음 정한 곳은 당신뿐이니, 세상 끝에 가더라도 돌아올 거요.'(p.87)

신통이 연옥을 떠나면서 남긴 이 말은 오히려 연옥의 혼잣말이 되고 우리 민족의 한 서린 외침 같이 들린다. 마치 정의와 진실은 돌고 돌더라도 반드시 돌아 올 거요 라는 울림처럼. 불의에 맞서기 위한 항거와 봉기의 움직임은 분명 더 좋은 세상을 꿈꾸는 민초들의 꿈의 물결이다.

 

몰락해 가는 왕조와 외세의 침략이 들끓던 19세기 그 격변의 시대에 봉건적 신분제도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유교사상을 뒤엎는다는 것은 상상불가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정부패와 제국 열강들의 침탈을 더 이상 목도 할 수 없었기에 농민들과 일부지식인들이 감히 용기를 내어 동학혁명을 일으켰다. 결국 권력의 개입과 일본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힘이 없을 것이라 여겼던 민초들의 도도한 저항의 힘이, 그 정신과 혼들이 흐르고 흘러서 3.1운동, 4.19의거, 5.18 광주 민주화 항쟁 등으로 세차게 스며든 것이 아닐까? 싶어 그 반란의 가치를 높이 사고 싶다.

 

'그게 모두 일본이 서양 것들에게 당했던 그대로를 우리에게 덤터기 씌운 게랍니다. 석 달 동안에 조정은 미국, 영국, 독일과 차례로 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답니다.'(p.248)

 

'바야흐로 난세인데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나 정말 죽일 놈들은 모두 벼슬아치들이지요. 청은 물론 양, 왜가 함부로 들어와 나라의 이권을 제각기 도적질해가는 판인데 힘없는 백성들 등이나 치려고 사고 파니 망해가고 있는 거지요.'(p.422)

 

'사람이 바로 하늘이니 사람밖에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좋은 마음이 하늘이니 그 마음을 존귀한 하늘처럼 소중하게 받들어서 좋은 마음에 따라 사는 것이 곧 자연의 이치에 따르는 길이로다'(p.372)

 

'평생의 근심은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한 각박한 세상이 되었음이라.'(p.375)

 

요즘 영화판을 휩쓰는 메뉴들, 26일, 레미제라블, 클라우드 아틀라스 등도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힘없는 자들의 목숨 건 반란과 혁명을 다루는 것 같아 반가우면서도 가슴 한 켠 씁쓸하다.

 

언제쯤이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될까? 정치가들 뿐 만 아니라 우리 각자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쉽진 않겠지만 꼭 오리라는 신념과 확신을 갖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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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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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이안 감독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먼저 봤다. 2D영화로. 보고 나서야  3D영화도 있다는 것을 알았고, 스테디셀러 '파이 이야기(얀 마텔 작)' 가 원작이라는 것도 알았다. 이 소설로 맨 부커상을 수상한 것도.

 

벵갈 호랑이, 구릿빛 인도 소년, 227일 간의 태평양 표류……. 그럴듯한 이야기에 환상적인 영상들이 합쳐져서 눈 앞 가득 온갖 블루빛깔(110 가지 정도라 한다.)들의 향연은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놀라움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기분으로 영화 속에 빠져 들었다.

16살 소년 파이, 동물원을 운영하는 아버지, 원예학 전문가인 다정한 어머니, 운동 밖에 모르는 형, 4식구는 부족함이 없는 행복한 인도 생활을 하던 중에 인도정치 상황이 불안해지자 캐나다 이민을 결정한다. 동물들은 미국 대형 동물원에 팔아 버리기로 하고 동물들을 배에 태워 인도를 떠나던 중 필리핀을 지나 세계에서 가장 깊은 바다, 마리아나해구를 지나면서 배는 난파된다. 겨우 구명보트에 타게 되고 정신을 차렸을 땐 벵갈 호랑이, 하이에나, 오랑우탄, 한 쪽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과 함께 있음을 알게 된다. 곧 이어 벌어진 생존게임에서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죽인 하이에나를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잡아먹자 파이는 호랑이를 길들여 살 것이냐, 호랑이를 처리하고 혼자 절대고독을 이겨 낼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결국 혼자 남았을 때의 외로움이 더 공포이고 절망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호랑이를 길들여 공생하기로 한다.

거대 빌딩 같은 혹등고래, 떼 지어 날아다니는 날치, 낮에는 생명의 섬이지만 밤에는 식인 섬으로 탈바꿈하는 끔찍한 떠다니는 섬. 99% CG로 탄생한 벵갈 호랑이. 마치 한 편의 동화 같고 만화 같은 영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들로 인해 태평양 위를 표류하는 파이가 된 듯이 몰입하여 생존게임을 벌였다.

삶에 여러 가지 얼굴이 존재하듯 바다세계도 아름다우면서도 공포스런 면이 있고 신기하면서도 절망스런 면이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유일한 생존자의 입장에서 배의 보험처리 여부를 놓고 담당자와 인터뷰 할 때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 앞에 좀 더 현실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라는 독촉에 파이가 들려주는 또 다른 이야기.

"두 분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요. 놀라지 않을 이야기를 기대하겠죠. 이미 아는 바를 확인시켜 줄 이야기를 말이죠."

자신을 취재하러 온 작가 앞에서 한 이야기.

"어느 이야기가 사실이든 여러분으로선 상관없고 또 어느 이야기가 사실인지 증명 할 수도 없지요.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소년의 별명 파이. 원주율을 뜻하듯 순환되지 않는 무한소수 즉, 무리수의 대표주자처럼 파이의 이야기는 또 다른 모양으로, 다른 이야기로 어디에선가 계속되고 있을지도. 무한히 쭉-. 이야기의 상상력과 주인공 이름이 어쩜 이리도 어울릴까 .

 

한 번 쯤은 현실을 떠나 동화 속으로 빠져 보는 것도, 육지를 떠나 물 속세계로 잠영해 보는 것도, 지구를 떠나 우주 밖으로 유영해 보는 것도, 땅위를 떠나 땅 속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도, 그런 상상과 공상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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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개밥바라기별

젊음의 때는 도전과 열망이 어느 때보다 강렬한 시기이다. 그래서 기성세대의 관습을 거부하고 내면에서 원하는 소리를 듣고자 방황하는 시기이며 그 질문에 답을 얻고자 우리는 숱한 여행과 경험의 수련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청소년시절, 청년의 때에 가졌던 고민들이 누구보다 치열했음을 그래서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많은 방황을 했음을 그리하여 마침내 오늘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이 저도 모르게 가슴을 뛰게 한다면 그 여정이 길고 험난하더라도 신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결실을 맺으리라는 확신이 있고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그러면서 어느 날 훌쩍 커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라. 또한 그렇게 세월 가 듯 늙어 가리라.

p. 183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오자 이제 다시는 소년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황석영의 글이기에 유머와 기지, 재주가 엿보여서 재미있게 읽었다. 왜 이제야 읽게 된 거지? 싶을 정도로 힘이 되는 글이었다. 세상 고민을 다 지고 가는 듯 힘들어 하는 청춘들에게 권하고 싶다. 내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그 이전 세대들도 아름답고 뜨거웠던 젊은 시절이 있었음을, 그 터전 위에 후손들이 존재함을 일깨우기 위해서 강렬히 권한다.

개밥바라기별은 저녁밥을 다 먹고 나면 개가 밥을 줬으면 하고 바랄 즈음에 서쪽에 나타 난다고 해서 붙여진 금성의 또 다른 이름이다. 새벽에 동쪽에서 나타 날 때는 샛별이라 하여 희망의 의미가 담겨 있고 저녁 무렵 서쪽에서 보여 주는 별은 저녁밥을 다 먹고 난 이후이므로 여유와 평안의 의미가 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작가의 느긋한 평안이 담긴 회상곡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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