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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음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영훈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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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음/아감벤/인간사랑]벌거벗은 인간은 왜 부끄러워해야 하나?

 

세상이 벌거벗은 시절은 땅이 생겨나던 창조의 시절이었다. 인간이 벌거벗은 시절도 조물주가 빚어낸 첫 인류의 탄생 순간이었다. 이후 세상과 인간은 부지런히 옷을 입고 또 입었다. 그리고 어찌어찌 하다가 한 겹 두 겹을 벗겨낸 민낯, 벗은 몸은 수치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언제부터 벌거벗음은 부끄러움이라는 공식이 적용된 걸까?

 

 

200548일 베를린 신국립미술관에서 바네사 비크로프트의 퍼포먼스가 열렸다. 이 박물관 1층에서 백 여 명의 벌거벗은 여성들이 가만히 서 있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투명한 팬티스타킹을 입었다지만 나신들을 마주한 관객들의 첫 인상은 분명 낯선 것이고 금기를 깬 모습이었다.

 

 

일어날 수 있었던 어떤 일이, 그리고 아마도 일어났어야만 하는 어떤 일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

옷 입은 남자들이 벌거벗은 육체를 바라보는 장면은 사드-마조히즘적 권력 의식을 떠오르게 한다. 파솔리니의 살로 도입부에는 별장에 칩거하는 네 명의 권력자가 등장한다. 이들은 완전히 착의한 상태에서 장단점을 평가한다는 이유로 희생자들을 벌거벗기고 면밀히 조사한다. (94)

 

호기심을 가진 관객들의 시선과 나신들의 도발적이고 무례한 시선은 대조적이었고 역전이었다고 한다. 도발적인 포즈의 나신과 옷을 입고 머뭇거리는 관객들의 모습이 익숙하지는 않다.

 

우리는 나신을 보는 순간 호기심도 일지만 부끄러움도 느낀다. 그런 부끄러움은 본능일까? 샤르트르는 벌거벗음을 외설과 사디즘으로 연결시켰다고 한다.

 

과거 옷을 입은 자 앞에서의 벌거벗음은 수치이자 고문이었다. 성경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가 신의 뜻을 어기면서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인간은 눈이 밝아져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깨달았다. 그런 육체적 벌거벗음을 수치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후 옷은 인간의 수치를 가려주는 옷이 된 것이다.

 

타락 이전에 아담과 이브가 인간의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벌거벗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은 신의 은총이라는 영광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이에 대한 유대교 해석으로, 우리는 빛으로 만든 옷이라는 예를 조하르에서 찾을 수 있다.) 아담과 이브가 죄 때문에 박탈당한 것은 바로 이 초자연적인 옷이다. (96~97)

 

빛으로 만든 옷, 초자연적인 옷, 은총의 옷을 태초부터 입고 있었다니. 순정에서 부정으로 변하는 순간, 인간은 벌거벗음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니.

 

 

벌거벗음은 의복의 부재를 전제하나 그것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벌거벗음을 인식하는 것은 성경에서 개인이라 정의하는 종교적 행위와 연관된다. 우리는 벌거벗음을 알아채지만 옷의 부재는 간과한다. 벌거벗음은 그렇기에 죄 이후에 오로지 인간의 존재가 변화한 이후에나 발견된다. 타락에 의해 발생한 이 변화는 아담과 이브의 본성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요컨대 단순한 도덕적 변화가 아니라 인간 존재 양식에 영향을 주는 형이상학적 전환이 있었던 것이다.(99)

 

 

아감벤의 사유를 정리해 보자.

성스런 벌거벗음이 죄스런 벌거벗음으로 변하는 순간은 은총의 옷인 벌거벗음이 상실한 순간이었다. 타락 이전의 벌거벗음을 벌거벗음 인식 이전의 것이고 타락으로 인해 벌거벗음을 인지함으로써 진정한 벌거벗음이 시작되었다. 느끼지 못하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식이 없으면 벌거벗음이 아니다.

 

아이들의 벌거벗음은 부끄럽지 않은 상태다. 아이들의 부끄럽지 않은 벌거벗음은 천국의 순수와 통하기에 종교 의식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소년에게 주어진 관례가 생겼다니. 종교 음악사에서 사춘기 전의 소년 성가대원의 거세 시술도 변성기 이전의 목소는 에덴동산에 대한 향수라니. 원죄, 벌거벗음 , 부끄러움이라는 공식에 대한 철학과 종교의 이야기가 몹시 흥미롭다.

 

민낯을 드러내는 일은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지만 세상 본연의 모습과 인간 본연의 모습을 마주하는 일이다. 쑥스러움을 견디며 마주하는 벌거벗음에는 창조와 구원,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 K, 유령에 둘러싸인 삶의 의의와 불편함에 대해,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페르소나 없는 정체성, 벌거벗은, 영광스러운 몸, 황소의 굶주림, 세계 역사의 마지막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벌거벗음이라는 하나의 제목 아래에 다양한 소재를 지닌 10개의 에세이의 모음집이다.

 

저자는 현대 유럽을 대표하는 이탈리아 철학자인 조르조 아감벤이다. 그는 호모 사케르 연작으로 전 세계 지성계에 반향을 일으키며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의 반열에 올랐다. 시몬느 베이유의 정치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마르틴 하이데거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1979년부터 하이데거와 비판적 거리를 두었다. 그 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안토니오 네그리 등과 교류하며 활발한 사유의 실험을 선보이고 있다고 한다.

 

 

벌거벗은 인간은 왜 부끄러워해야 하나? 단순한 벌거벗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죄와 타락, 의복과 벌거벗음, 신의 은총과 심판, 누드와 사디즘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벌거벗음에 대한 역사적 인식, 종교적 관점, 철학자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들이다.

 

벌거벗음과 옷 입음, 인간 본성과 신의 은총의 관계 등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벌거벗음도 인식하지 않으면 대수롭지 않은 일상일 뿐일까. 누드마을? 누드해변에서의 삶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인간과 다르게 동물의 벌거벗음도 신의 은총의 결과일까?

완전한 벌거벗음, 민낯, 솔직함은 두렵기는 한데……. 그래도 내 몸의 옷, 얼굴의 화장, 의식의 가면을 모두 벗겨 버린다면 인간은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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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 게임으로 철학하기 - 순수 저항 비판
조지 A. 던 외 지음, 윌리엄 어윈 엮음, 이석연 옮김 / 한문화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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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헝거 게임으로 철학하기/한문화]‘헝거 게임에 대한 순수 이성 비판...

 

헝거게임은 캣니스 에버딘이라는 한 용감한 소녀가 자신의 세계를 겹겹이 둘러싼 거짓을 벗겨내고, 그 기만적인 얼굴 뒤 진실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캐피톨 시민은 짙은 화장으로 자신을 포장하지만 내면에 자리한 추함을 온전히 감추지는 못한다. 캐피톨뿐만 아니라 판엠 전체에 그러한 허위가 넘쳐난다. 가짜 겉모습이 판치는 세상에서 캣니스는 철학자처럼 진실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모든 사람, 모든 사물에 의문을 제기한다. (5)

   

 

수잔 콜린스의 소설 헝거 게임3부작을 읽은 후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당시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돌려 읽던 인기 책이었고 그 덕분에 어느 학생이 나에게 빌려준 책이었다. 무심코 펼쳤다가 그 잔인함에, 그 날카로운 비유에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십대들을 생존 게임의 장으로 내모는 잔인한 이야기였지만 우리 사회를 비유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뜨끔하기도 했다.

 

이후 영화로도 만나 본 헝거게임이다. 영화에서도 소설의 내용을 잘 살렸지만 그래도 영화보다는 소설이 더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이젠 헝거 게임에 대한 철학책이다.

헝거 게임으로 철학하기!

 

헝거 게임의 대략적인 내용을 보자.

근미래 사회의 독재국가는 판엠이다. 판엠의 수도 캐피톨은 온 나라의 부와 권력과 인재가 집중된 곳이다. 캐피톨 주변에는 12개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고 서로 교류할 수 없고 폐쇄적이다. 각 구역은 스크린을 통해서 판엠의 권력자들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다.

 

 

판엠의 정권이 유지되는 비결은 헝거 게임이라는 축제를 만들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헝거 게임12개 구역을 대신해 나온 어린 소년소녀들이 조공인이 되어 판엠에 바쳐진다. 십대의 조공인들은 캐피톨에서 정해준 생존 게임의 장에서 단 한 사람이 살아남을 때까지 피터지는 싸움을 벌이게 된다옛 로마시대의 콜로세움처럼 말이다.

때로는 서로 동맹을 맺어 협력을 통해 상대를 죽여야 생존의 확률이 높아지는 게임이다. 마지막에는 그 동맹마저 깨지고 살벌한 마지막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이 살아남으면 헝거 게임은 끝나게 된다. 물론 마지막 승자에게는 평생을 먹고 남을 부와 명예가 주어진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캣니스 에버딘은 활쏘기의 명수다.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캐피톨에서 금지하는 숲으로 가서 금지하는 사냥을 하며 비밀스럽게 가족을 부양하고 있다. 하지만 74회 헝거 게임에서 동생을 대신해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녀는 헝거 게임을 치르는 동안 여러 번의 위험과 유혹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생각을 펼치며 불의에 맞서고 지혜롭게 대처한다. 게임에서 승자가 된 그녀는 불타오르는 혁명의 전사가 되어 판엠 전복을 위해 사람들을 모으게 된다.

 

 

이 책에서 브라이언 맥도널드, 앤 토켈슨, 질 울트하우스, 조지 A. , 앤드류 시퍼, 제니퍼 컬버, 아비게일 맨, 제이슨 T. 에벌, 아비게일 E. 마이어스, 제시카 밀러, 린지 이소우 애버릴, 데릭 코트니, 니콜라스 미슈 등 19명의 학자들은 헝거 게임에 대한 순수 저항 비판을 담아 철학적 통찰을 한다.

 

이 중에서 애덤 바크맨의 비판 이 모두가 잘못 되었다.’ 가장 인상적이다.

 

판엠의 시민 이름에는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 로물루스, 브루투스, 아우렐리우스, 캐시도르 등의 라틴 이름이 있다. ‘판엠이란 말도 라틴어에서 가져왔는데 빵과 서커스라는 의미다. ‘빵과 서커스는 오마가 순종적인 시민을 만들기 위해 내건 방식이었다. 로마의 검투사 같은 헝거 게임이나 영화 <글라디에이터>에서의 전차 장면 등이 연상되는 장면들도 있다. 결국 헝거 게임은 로마 같은 강대국을 비유하는 것이다.

 

바크맨은 판엠의 타락과 로마의 타락을 비교하며 스토아학파였던 세네카의 말을 끄집어낸다.

 

세네카에 따르면, 이해 없는 참된 덕은 있을 수 없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행동 뒤 동기가 올곧지 않으면 올곧은 행동이 아니다. 행동은 동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또 정신 상태기 올곧지 않으면 올곧은 동기가 아니다. 정신 상태가 동기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이 생명 법칙 전체를 이해하지 않으면……. 정신이 모든 것을 진실에 따라 이해하지 않으면 최선의 상태가 되지 못할 것이다.”(337~338)

 

바크맨은 말한다. 세네카가 생각하는 좋은 삶의 전부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캣니스는 그 일부를 보여주기에 희망적이라고. 캣니스가 그녀의 여동생을 대신해 조공인으로 자청하는 희생정신을 보여준 점, 캐피톨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는 용기는 가치 있는 삶이라고. 캐피톨의 타락과 캣니스의 정의감과 복수,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선명한 대비는 그녀의 올곧은 정신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용기와 용서를 두루 갖춘 캣니스의 생각과 행동은 로마 제국의 검투사와 다르고 판엠의 캐피톨 지배자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죽음의 경기장에서 보여주는 정의감은 소설 전체에 위로를 주기도 한다.

 

로마 콜로세움에서의 헝거 게임과 유사한 잔인한 생존 게임의 의미, 타인의 고통을 보고 즐기는 인간 심리, 지배세력의 여가를 위해 십대의 아이들이 동원되고 싸움을 붙인다는 살벌한 내용들, 악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상상 가능한 묘사들이 잔인하지만 실제 같은 느낌도 든다. 우린 모두 보이지 않는 헝거 게임을 하고 있는 중일 지도 모른다.

 

생존은 분명 확률게임이다. 생존의 확률이 높은 쪽을 골라야 하는 선택 게임이다. 헝거 게임이 미래의 디스토피아 내지는 오늘날의 우리 세계의 유사한 점이 많다는 점에서 시사 하는바가 많을 것이다.

헝거 게임에 대한 순수 이성 비판, 토론 주제로 좋은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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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혀 죽겠거든, 철학하라 - 인생의 힘든 고비에서 나를 잡아준 책들 인문낙서 1
홍정 지음 / 인간사랑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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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혀 죽겠거든 철학하라/홍정/인간사랑]삶과 죽음 사이의 인생길에서 철학하는 즐거움을 주네.

 

삶과 죽음의 문제는 불가항력의 문제다. 태어나는 일이든 죽는 일이든 모두 내 맘대로 어쩌지 못하는 초인적인 일이다. 그렇기에 많은 철학자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들을 많이 했을 것이다. 실존 자체도 자유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지 않나.

 

탄생의 순간은 환희지만 죽음의 순간은 슬픔이다.

살면서 가까운 가족의 죽음을 마주한 적이 없지만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깊은 슬픔에 빠질 것이다.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이왕이면 늦추고 싶은 것도 깊은 슬픔을 이겨 낼 자신이 없어서 일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질병 없이 천명을 다하고 세상을 하직하는 게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그래서 웰다잉에 대한 관심도 높은 것이리라.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을 마주했던 저자의 삶을 보면서 삶은 기대한대로 흐르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예고가 없는 죽음 속에서, 심장을 후벼파는 슬픔 속에서 저자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인문학과 조우한 것도 놀랍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누구보다 깊이 고민했던 철학자들을 만났을 때의 공감과 위로를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대학 졸업 후 굴지의 광고회사에 다녔다. 40대 초반, 아버지를 사고로 잃고 동생마저 자살로 잃었다. 그 이후 삶의 의욕을 잃고 절망하며 세상을 등지고 축사로 도망쳤고, 2년 반의 시간동안 아내가 보내주는 인문학 책을 파고들었고, 이후 다시 직장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인문학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고 한다. 고통의 순간에서 인문학 공부에 몰입했고, 인문학 공부를 하게 되면서 즐거운 글쓰기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저자의 인문학 공부의 밑바탕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 서재에서 함께 책을 읽었고, 군대에 있을 때도 아버지가 보내주신 책들로 힘든 시기를 이겨냈다고 한다. 그러니 멘토 같은 아버지의 죽음은 그를 더욱 인문학의 세계로 인도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구원의 손길을 잡는 심정으로 인문학에서 위로를 받고 싶었으리라.

 

아버지와 동생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밀려들수록 인문학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해졌다. 인문학은 나에게 플라시보(위약) 효과로 작용했다. 테세우스를 아리아드네의 실패 역할을 한 것은 인문학이었다. 내 삶의 전부는 인문학에 걸려 있었다. (73)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자기를 둘러 싼 외부적인 것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돌보는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스피노자에게 자기 자신을 돌보는 삶은 자기 삶의 원인을 스스로 파악하여 사는 삶이다. 자기 삶의 원인이 되는 것, 즉 내 삶이 다른 요소들에 의해 영향 받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삶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 자기 자신을 돌보며 사는 삶이다. (51)

          

    

형이상학은 우리를 알게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게해주는 것이다. (55)

 

스스로도 병약했기에 공기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휴식과 사색으로 자기 돌봄에 철저했던 니체의 삶에서 위로 받고 긍정 에너지를 받게 되고…….

 

내가 몸과 정신의 고통으로 힘들던 시절 니체는 내 상처를 보듬고 위로해 주었다. 니체가 없었더라면 내 삶은 황폐해졌을 것이다. 니체는 죽음의 문제란 깊은 물에 빠져 허우적댔을 때 나를 건져 올려 구해주었으며, 이를 넘어 내가 앎의 문제로 공부의 깊이와 폭을 넓힐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고, 진정한 자기 돌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했다. (87)

 

이 하루로 인하여 나는 난생 처음으로 내가 살아온 전 생애에 만족하게 되었다는 니체의 말에서 전율이 느껴지지 않았을까. 난 아직 그런 기억이 없기에 나도 그런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빌게 된다.

 

자기 자신을 돌봄을 영혼으로 규정했던 소크라테스에 빠졌다가, 칸트를 시작으로 피히테와 셀링 그리고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철학부터 본격적인 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고, 죽음의 문제와 대면한 철학자인 플라톤, 스피노자, 니체, 프로이트, 레비나스로부터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그런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많은 철학자들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음주흡연을 모두 끊었고, 좋은 집과 좋은 차, 좋은 옷이 없어도 행복하고, 아내와 소통의 시간을 늘려서 행복하다고 한다.

 

 

이 책은 인문낙서(人文樂書) ‘시리즈 1편이다. 삶과 죽음 사이의 인생길에서 철학하는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곁에 두고 음미하고 싶은 人文樂書다.

    

자기운명의 수레바퀴 속도를 누구나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죽음에 대해 초연하기가 그리 쉬울까.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삶은 이야기 도중에 마감할 수 있다. 죽음은 삶의 중간에 끝나기에 ~’하다가 갈수도 있다. 그래서 운명론이 나온 지도 모르고…….

 

누구나 어떠한 죽음일지라도 죽음에 대해 무념무상일 수 없다. 그저 시간이 약일 텐데…….

별다른 삶이 있을까마는 후회 없는 삶, 내면에서 솟아나는 행복한 삶,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삶과 죽음 사이를 노닐다 갈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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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구름 위에 오르다 탐 철학 소설 13
서정욱 지음 / 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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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구름 위에 오르다/서정욱/탐]타임머신을 타고 소크라테스를 만나다~

 

 

조각가의 아들, 산파의 아들인 소크라테스는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살다 간 기원전 5세기의 인물이다. 2500여 년 전에 살던 그가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예전에 읽었던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오늘 다시 만나고 있다. 이번엔 소설버전이다. ‘탐 철학소설시리즈13번째 책이다. 철학자들을 소설 형식으로 만날 수 있기에 재미있고 쉬운 책이다. 탐 출판사의 철학소설 시리즈는 읽을 때마다 발칙한 형식, 센스 있는 형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번에도 그렇다.

    

 

이야기는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 도시국가에 내린 승현, 유민, 가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이들은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변론이 열리는 법정을 구경하게 된다. 기원전 399, 그 시절의 그리스의 아고라로 돌아간 것이다.

 

솔직히 아테네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논리만 부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진실을 말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논리가 부족하여 설명하지 못한 것을 오히려 나에게 속았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럼 왜 그들은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진실을 확실히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82~83)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는 신탁을 들었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정치가, 시인, 시민들을 찾아서 대화를 나눈다. 대화를 나눌수록 자신보다 지혜로운 이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정치가나 학자들도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 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들에게 무지함을 일깨우게 된다. 정치가나 학자들은 소크라테스 앞에서 무참히 무너지는 자신들의 모습에 자존심이 상했던 걸까. 그리스의 시민들은 그를 법정에 세우게 된다.

 

나는 지혜롭지는 못하지만 무지함을 인정하고 사는 것이 신탁의 뜻을 따르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거리로 나갔습니다. 나는 아고라와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지혜와 무지를 모두 가지지 말고, 지혜롭지는 못하더라도 무지를 인정하고 사는 것이 더 좋다고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91)

 

예술가 아니토스, 비극 시인 밀레토스, 웅변가 리콘의 고발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이들이 소크라테스를 고발의 이유에는 아테네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과 아테네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자기만의 신인 다이몬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당시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담은 희곡<구름>으로 발표해서 유명해진다. 문제는 이 작품 속 소크라테스는 친구 카이레폰과 함께 신선처럼 노닐며 이치에 맞지 않는 말과 논리로 돈을 버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결국 아테네 시민들은 이 허구의 희곡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나쁜 이론이나 가르치고 돈을 벌려는 인물로 본 것이다.

 

매일같이 지혜롭다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하며 그들의 무지를 일깨우다 고소를 당했던 소크라테스. 그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것도 아니고 더구나 그가 믿는 다이몬은 양심의 소리 통제의 소리로 그리스인들이 알고 있던 악령의 신이 아니라며 논리를 펼친다.

 

500인의 배심원과 아테네 시민들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논리를 펴는 모습에서 진리의 편에 선 자의 당당함이 느껴진다. 자신의 무죄를 너무나 확신했기에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게 자신을 변론했던 소크라테스. 고소한 이들의 엉성한 논리와 소크라테스의 반박의 여지가 없는 논리가 선명하게 대비되는 대화들 속에서 논리를 생각하게 된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당당히 상대방의 허점을 공략하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언제나 매력 있다. 차분하게 그들의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논리를 펼치는 모습에 아테네 시민들도 반하지 않았을까. 그들의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 사형을 선고할 수밖에 없었지만 마지막 변론의 승자는 분명 소크라테스였을 테니까.

 

책에서는 아크로폴리스, 아고라, 500인의 배심원 선발 과정, 일당을 받던 배심원들은 주로 노인들이었다는 사실, 도편추방법, 델포이신전에 얽힌 이야기 등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 상황에 대한 설명들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어린 시절, 그리스의 7현인,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스파르타의 현인 킬론의 좌우명이었다는 이야기,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연극 장면 등 당시의 소크라테스가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설명들도 있다.

 

부록으로 소크라테스 소개,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대하여,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 소크라테스의 생애, 읽고 풀기 등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가난한 스승이었다. 죽으면서도 아들들에게 명예를 위한 일만 하고 부를 취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신념을 버리지 않은 스승이었고, 앎과 행동의 일치를 주장한 스승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까지 생각하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70세를 끝으로 생을 마감할 때, 플라톤의 나이는 28세였다. 플라톤이 80년의 세월을 사는 동안 소크라테스와 함께한 세월은 7~8년 정도였다.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던 스승의 죽음에 대한 판결에 플라톤은 얼마나 원통하고 속상했을까. 스승의 어이없는 죽음을 보며 플라톤은 <국가론>을 써서 이상국가론을 펼칠 정도였는데.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의 기록이 없었다면 그의 행적은 바람의 흔적처럼 사라져 버렸겠지만 제자를 잘 둔 덕에 그는 지금도 생생하게 부활하고 있다. 소설처럼 타임머신이 개발되면 진짜 소크라테스를 만나러 가고 싶다. 슬픈 현장이지만 그의 변론도 듣고 싶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의 경계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되는 소설이다. 내가 안다는 것은 어디까지 일까. 무한대의 수직선에서 내가 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새 발의 피도 되지 않는데...... 역시 소크라테스는 예나지금이나 무지를 일깨우는 데는 도사야, 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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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 대한 새로운 철학
토마스 바셰크 지음, 이재영 옮김 / 열림원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노동에 대한 새로운 철학/토마스 바셰크/열림원]좋은 노동에 대한 철학적 고찰

 

노동의 뜻을 육체적 정신적인 작용까지 포함한다면 노동은 인생의 절반을 차지하지 않을까. 공부노동, 직업노동, 가사노동, 양육노동, 봉사노동 등 인간은 죽을 때까지 노동을 하는 셈이다.

 

그래서 저자인 토마스 바셰크는 말한다. 노동은 삶의 기반을 마련해주고, 우리를 사람들과 연결해주며, 삶에 의미를 부여해준다고. 노동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은 목적을 위한 수단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말이다

새로운 철학을 제안하는 독일의 철학 잡지 <호예 루프트>의 편집장인 토마스 바셰크는 자신의 다양한 일자리 경험과 노동현장의 목소리들을 담아 <노동에 대한 새로운 철학>을 펴냈다.

    

 

 

 

저자는 노동은 일부의 주장처럼 소외도 아니며, 노동에 미래가 없다는 주장도 잘못이라고 한다. 노동에 악담을 퍼붓는 사람은 사람들의 욕구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한다.

 

 

지금은 육체적인 노동은 적어지고 정신노동이 늘고 있다지만 인간과 노동은 불가분의 관계다. 노동의 형태가 변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인간의 노동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저자는 노동은 실존적 의미이므로 인간은 더 많은 자유 시간보다 더 좋은 노동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인간은 노동 없이 삶을 영위할 수 없고 삶을 영위하기 위해 노동은 필요하다고.

 

노동이 없으면 자아를 발현하기는커녕 오히려 빈약해진다. 그만큼 노동은 우리의 존재 이유가 되기도 한다. 좋은 노동은 더 좋은 삶을 누리게 한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도 노동이다.

 

저자가 말하는 좋은 노동이란 사랑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일이 재미있고 일에서 보람을 찾고, 일이 중요해지는 노동이다.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는 노동이다.

 

일과 삶의 균형이란 자유시간의 무한확장이 아니라 노동과 자유시간을 모두 욕구에 맞게 꾸민다는 의미다. 이것은 즐길 수 있는 노동, 더 좋은 삶을 위한 좋은 노동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좋은 노동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성취감을 주는 노동이어야 한다. 노동을 통해 인간관계를 연결해주고 결속감도 주는 노동이어야 한다. 그렇게 좋은 노동을 통해 더 넓은 세계와 만날 수 있다. 다양한 사회계층의 사람과 만날 수 있다.

 

노동의 역사가 흥미롭다.

노동은 창조의 순간부터 시작한다.

6일을 창조하고 하루를 쉰 창조주의 휴식은 노동과 휴식의 분배를 보여준 게 아닐까.

농경사회에서 정신적인 활동은 노동이 아니라 여가생활로 여겨졌다.

고대 그리스 사상가들은 노동을 속물적인 것, 노예들이 하는 것으로 멸시했고 귀족들이 하는 정치와 연극 등은 비경제활동으로 여기면서도 높이 평가했다. 귀족들에 의해 노동은 고상하지도 않은 것, 저급한 도덕작용으로 천대받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영향으로 노동은 원죄의 결과물로 간주되면서 신성한 의무로 여겨지게 된다.

노동의 의무가 생기고 노동청이 생겨나게 되고 육체노동을 경시하지 않게 된다.

중세시대에 노동은 빈곤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했고, 생계비 확보를 위한 직업노동이 되었다. 이후 마르크스 등에 의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나타내는 노동자계급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산업화 시대에는 노동이 기계의 부품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역사를 통해 계속적인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면서 인류의 번영과 진보에 이바지한 노동의 이야기가 새롭다.

우리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윤택한 생활을 위해,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노동을 한다.

계약직, 정규직,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등 노동의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다. 노동 없는 인간의 삶이 가능할까.

노동 없이 생산이 가능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지만 인간에게 노동이 없는 삶이란 상상불가다. 의미 없는 상상일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좋은 노동이 되려면 자발적인 노동, 창조적인 노동, 즐기면서 하는 노동, 의미가 있는 노동이어야 함을 생각한다.

죽을 때까지 노동이 있는 삶, 노동이 있는 세상이기에 좋은 노동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노동을 옹호하는 책이다.

육체를 혹사 시키는 노동, 소외된 산업노동, 지식노동까지 포함시키는 현대의 노동까지 노동의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좋은 노동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삶에 미치는 중요한 것들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을 다룬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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