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없는 세상 - 제6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정 없는 세상 _ 19세, 그 혼란의 성문화를 이야기하다.

 

 

-한 번 하자.

-싫어.

.......

-한 번 하자.

-싫어, 인마.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왠지 19금 분위기가 소설을 장악할 것 같은 예감이다. 얼굴 붉힐 일이 많을까?

제목에서도 19금의 분위기를 내고 있는데.... 童貞? 同情? 動靜? 同精? 동정?

 

작가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배반치 않고 시종일관 십대의 성을 다루고 있다. 19금이냐고? 살짝 19금. 아무튼 이 소설에는 포르노, 마스터베이션, 야동, 섹스 등이 거침없이 다뤄진다.

 

 

19세, 수능을 치고 난 직후. 고등학생도 아니고 대학생도 아닌 어정쩡한 경계에 선 남자 아이들의 성문화를 정면으로 다루는 소설이다.

 

 

 

주인공 준호는 자나 깨나 여친 서영이와 한 번 해 보는 게 소원인 아이다. 공부 잘하는 서영이는 매번 싫다며 다른 것에 관심을 돌려 보라고 한다. 그러나 준호의 구애는 끈질긴 고무줄이요, 착착 달라붙는 찹쌀떡이다.

 

 

 

남자는 여자를 알아야 어른이 되는 거야.

 

 

이 말은 친구 경석이의 주 레퍼토리다.

친구들은 벌써 미아리에 가서 동정을 떼고 어른이 되었다고 자랑 질인데……. 준호는 자신만 아이인 것에 은근 약발 돋는다.

 

죽을 때는 따로 죽더라도 살 때는 같이 살아야 한다친구들의 맹세가 부질없다는 생각에 배신감만 든다. 그렇다고 미아리로 가자니 서영이가 걸리고 …….

 

 

수능은 봤지만 대학에 가고 싶은 생각도, 미래에 무엇이 되고 싶다는 희망도 없지만 열렬한 단 하나의 소망이라면 서영이와 한 번 해 보는 것이다. 섹스를 하고 싶은 욕망과의 투쟁.....

 

 

-십대가 성욕이 제일 왕성한 때인데 못하게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생물학적인 나이와 사회적 나이의 괴리 탓이야. 조선시대만 보더라도 십대에 이미 시집가고 장가가고 했잖아....

 

 

성적 욕망이 가장 빠른 시기가 지금이라며 자신의 생각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준호. 친구이자 아버지 같은 삼촌, 명호 씨는 조카의 궁금증에 농경시대와 자본주의 시대를 비교하며 궁금증을 풀어 준다.

 

 

 

야설과 소설이 한끝 차이라는 준호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서 그 한끝의 차이가 실은 굉장한 차이임을 느끼게 된다.

 

 

준호 엄마 숙경 씨.

주변에 흔한 인물은 아니다. 그런데 바람직한 모성 상을 보여줘서 가장 깊은 인물이다.

 

 

-엄마, 우리 집에는 왜 아빠가 없어?

-아빠? 왜 없냐면 말이지. 없으니까 없는 거야.

-그래도 다른 집에는 다 있는데?

-그럼 말이지. 우리 집에는 할아버지가 있어?

-없어.

―그러면 할머니는 있어?

-돌아가셨잖아.

-그래서 지금은 없지?

-응.

-우리 집에는 아빠만 없는 게 아니라 할머니도 없고 할아버지도 없고 네 형이나 동생도 없어. 근데 어떤 아이들은 할머니도 있고 할아버지도 있을 테고 또 어떤 아이들은 형이나 동생이 있지? 식구라는 건 다 그렇게 집마다 다르게 있는 거야.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

-응.

 

 

아빠가 왜 없냐는 아이의 질문에 조곤조곤 예를 들어가며 집집마다 다른 게 현실이고 그게 자연스럽다고 설명한다. 요즘엔 한 부모 아이가 많다고 하는데 좋은 답변 같아서 가슴에 새겨 둬야겠다.

 

 

-이제 슬슬 원서 쓸 때지? 어떻게 할지 생각은 해봤어?

-아직 모르겠어.……. 정말 나 대학 안 가고 미용학원 같은 데 가도 괜찮겠어? 아니 미용학원도 안 가고 다른데 취직도 안 하고 그냥 집에만 있어도 괜찮겠어?

―네가 한 제일 큰 효도가 뭔지 알아?

-뭔데?

-네가 태어나서 이십 년 동안 내 옆에 있었다는 거야.

 

 

자식에게 대학가지 않는다고 야단은커녕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절대 사랑의 경지. 말은 맞는데 우리의 현실에서는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자식사랑의 고수다운 말에 숙연하고 뭉클해지는 순간이다. 가까이 있어야 효도인 것인 것은 맞는 것 같다.

 

 

독일사는 친구, 영국사는 친구들이 있다. 자식 얼굴 한 번 보기 힘들다고 하는 친구 엄마들을 뵐 때, 가까이 사는 게 효도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수험생의 비애를 묘사한 부분은 가슴 아프다.

우등생 영석. 그는 서영이 사촌이기에 늘 성적 좋은 서영이와 비교되는 불운의 친구.

잘 나온 성적에도 불구하고 부모 모두 서울대생, 두 형들도 서울대생이다 보니 자신도 서울대를 가야 격을 맞출 수 있는 집안…….그래서 결국, 재수를 선택하게 된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가는 게 아니라 학벌을 찾아가는 모습에 안타깝다. 우리의 모습 같아서......

 

 

준호는 대학을 가느냐. 엄마처럼 헤어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미용학원을 가느냐로 저울질 중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각자의 길을 가는 친구들을 보며 심심해한다.

 

 

아무리 옆에 사람들이 많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에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이란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존재본연의 고독함을 폐부 깊숙이 느끼는 준호…….준호는 심심한 것보다는 근사해 보이는 고독을 택한다며 소설을 읽는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 돈 주앙, 오양의 이야기, 눈 이야기, 북회귀선, 작은 새, 홍루몽, 소녀경......

 

 

 

삼촌 명호 씨.

서울법대를 나왔으나 백수생활 끝에 어릴 적 꿈이었던 만화카페를 연다. 위풍당당한 그의 모습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용기가 멋지다.

그는 포르노를 수집하는 조카에게 포르노의 뜻과 어원을 찾아보게 한고 궁금해 하는 것을 상담해 준다. 하지 말란다고 안 할 준호가 아니기에 일단 들어주고 충고하는 센스 있는 삼촌.

 

 

 

뭐든지 하고 싶었던 그때에 해야 되는 거야.

시간이 지나고 나면 왜 하고 싶었는지 잊어버리게 되거든…….

자꾸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하고 싶은 것이 없어져 버려.......

욕구라는 것도 채워주면 채워줄수록 ,

새로운 욕구가 샘솟지만 포기하다 보면 나중에는 어떤 욕구도 생기지 않게 되어 버리는 거야.

그러니 너도 쉽지는 않겠지만 하고 싶은 것을 자꾸 만들어서 해 봐.

 

내가 일류로 근사한 사람이 되면 내가 나온 대학은 무조건 일류대가 될 것이다.

 

 

 

무엇을 하건 간에 어차피 어른이 되는 것이라면 근사한 어른이 되고 싶다는 준호는 미래에 대해서도 섹스에 대해서도 점점 어른스러워져 간다. 그래도 아직은 어른이 되는 과정이 낯설고 두렵기만 하다.

 

 

 

때론 되고 싶기도 하고, 때론 되고 싶지 않기도 한 어른.

하고 싶은 게 뭔지 막연하기만 한데, 선택은 해야 하고 그에 따른 책임감은 몰려들고......

불쑥 솟는 욕구도 다스려야하고 미래도 설계해야 하는 시점. 19세.

 

갑자기 커버린 당혹감에 한 번 쯤은 세월이 정지하기를 바란 적은 없었을까.

 

 

 

이 소설에는 동음이의어의 잔칫상 같다. 사색, 동정....

그리고 온갖 유명인들이 동정을 뗀 시기에 대한 열거도 흥미롭다. 평균 16세....

성에 관한 주제를 다룬 소설도 굉장히 많이 나온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 소녀경.......

 

 

 

 

성을 매개로 했지만, 수능이 끝난 어중간 시점의 청소년의 심경을 잘 대변해 준 소설.

19세의 심리묘사가 제대로 되어 있는 소설.

 

십대들의 성적 호기심을 풀어 주면서 그들의 성문화가 왜곡되지 않기를 바라는 소설이다. 성적 자극이 널려 있는 시대에 올바른 성에 대한 이해를 돕는 소설..... 청소년들이 있어야 할 책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봄덕 2013-05-28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십대의 성문화가 왜곡되지 않기를 바라는 맘이 가득한 소설. 우리시대의 바람직한 어른의 모습도 그리고 있어서 훈훈한 소설. 살짝 19금인 소설.
 
아름다운 폐허
제스 월터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름다운 폐허 - 이야기들은 사람들이야.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

 

 

 

이야기들은 사람들이야. 나도 이야기고 너도 이야기고... 네 아버지도 이야기지. 우리 이야기들은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 나가는데, 가끔, 운이 좋으면, 우리 이야기들이 하나로 합쳐지기도 해. 그러면 우리는 잠시나마 덜 외로워지는 거야. (92쪽)

 

 

 

 

이탈리아의 한 해안가, 절벽과 바다 사이의 틈새에 낀 작고 외진 마을인 포르토 베르고냐. 전화도 없고 도로도 없고 기차도 없는, 오직 배로만 오갈 수 있는 지도에도 없는 작은 마을이다.

 

 

 

가족 소유의 작고 텅 빈 호텔을 꾸려가고 있는 젊고 멋진 파스쿠알레 투르시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어머니와 호텔식당일을 도와주는 이모와 함께 살고 있다. 장차 미국인 관광객들로 붐비고 명성을 얻게 되리라는 것은 단지 그의 희망사항일 뿐, 실제로는 권태와 만족 사이, 행복과 불행 사이를 적당히 오가는 일상이다.

 

어느 날 죽어가는 미모의 미국 배우 디 모레이의 도착으로 어둡던 호텔에 활기와 긴장이 돋는다. 회색빛 삶 속에 짧게 무지개가 드리워지는 순간이랄까.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것은 꿈이라기보다 오히려 한 평생의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대하는 소나기의 청명함이라 할 수 있었다. (9쪽)

 

 

 

 

이탈리아에서 촬영 중이던 영화 <클레오파트라>에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이 캐스팅되면서 영화 홍보담당인 마이클 딘은 두 주인공의 실제 열애사실로 홍보효과를 노리려고 한다. 두 주인공 모두 기혼자였던 만큼 그들의 열애는 기자들의 관심과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다. 리즈의 시녀역인 금발의 디 모레이는 리처드 버튼의 사랑을 받고 그의 아이를 가지지만 영화를 위해 몰래 멀리 보내지게 된다. 뜨거운 열애설이 지저분한 스캔들로 알려지는 순간 영화홍보는 물 건너 간 것이 되므로....

 

 

엉뚱하게 도착하게 된 곳이 바로 파스쿠알레의 포르토 베르고냐의 호텔..... 어머니를 암으로 잃은 충격에 의사의 암 진단은 그녀를 절망에 빠뜨리게 된다. 죽음만 바라보는 그녀에게 호텔에서의 유일한 낙이라면 젊고 멋진 파스쿠알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근처 절벽을 오르거나 실패한 미국의 작가 앨비스 벤더의 쓰다만 소설을 읽는 것이었다. 며칠 뒤 자신이 위암이 아니라 리처드 버튼의 아이를 임신했고 이 모든 것이 뱃속의 아이를 없애려는 마이클의 계략임을 알고 더욱 충격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을 갈망하던 그녀는 파스쿠알레와 앨비스 벤더의 도움으로 미국에 꼭꼭 숨어버리게 된다.

 

 

50년의 세월이 흘러 마이클의 스튜디오를 찾은 은발의 파스쿠알레.....디 모레이를 찾아 왔다는데....

 

1962년에 일어난 한순간의 이야기가 50년의 세월을 흘러 어떠한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한 편의 영화를 보듯, 1962년과 현재 사이를 오가는 동안 일어난 사랑, 인생, 가족, 일에 대한 이야기들....

파스쿠알레, 디 모레이, 마이클 딘의 이야기들이 도도한 강물처럼 흐르고......그 외 주변 단역들의 이야기가 양념처럼 끼어든다.

 

 

디 모레이를 짝사랑했던 파스쿠알레는 상사병이 든 청년의 마음을 숨기고 자신의 첫사랑과 자신의 아들을 찾아 피렌체로 떠나고 거기에서 아이들의 아버지로, 남편으로 살아간다. 가슴 속에 남겨진 말 못한 그리움은 우울증으로 변하지만 현실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며 주어진 시간에 순응하며 살아갈 뿐이다.

 

 

실패한 작가, 성공한 술꾼인 미국인 작가 앨비스 벤더. 글을 쓰기 위해 해마다 들르는 파스쿠알레의 호텔에서도 그의 글은 진전이 없고 술 실력만 는다. 아버지의 자동차 대리점 성공으로 글쓰기를 포기하고 가업을 이어가고....아름다운 디 모레이를 찾아서 그녀와 결혼하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로 생을 달리한다.

 

 

자유로운 영혼 디 모레이. 연극배우를 꿈꾸다가 영화판에 뛰어 들었지만 리처드 버튼과의 짧은 사랑으로 아이를 갖게 되면서 꼭꼭 숨어 살게 된다. 말없이 갑자기 떠난 파스쿠알레에 대한 우정과 사랑에 감사하지만 이젠 가슴 한켠에 자리한 쓸쓸한 추억이 되고....

 

자신의 욕구와 야망을 억누르는 대신 학생들의 야망을 북돋워주는 일에 재미를 느끼며 교사로 ,극장운영자로 살아간다. 데보라 무어라는 이름으로 사는 동안 진정한 희생에는 고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삶을 견뎌온 여자.....

 

 

마이클 딘. 20세기 폭스사의 홍보담당으로 시작해서 영화 <클레오파트라>의 성공으로 탄탄대로를 달린다. 더 젊어 보이고 싶다는 욕망으로 온갖 시술을 해서 피부를 탱탱하게 유지하지만 영화판의 이야기를 만드는 데만 골몰하는 진실성이 결여된 남자....

 

 

마이클 딘의 도움으로 드디어 만나게 된 파스쿠알레와 디 모레이......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미안해요.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었어요.(426)

 

 

흰머리에 주름투성이, 지팡이나 휠체어의 신세를 지고 만나게 되는 늦은 황혼, 호숫가에서의 조우......

 

살짝 비껴가는 인연들이 들쭉날쭉하다가도 마지막에는 전체로 완성되는 것.. 이것이 인생인가보다.

 

젊은 날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눈부신 설렘과 야망이 세월이 흘러 서서히 허물어지고 폐허로 남을지라도 그래서 원하던 것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인생은 아름다운가 보다.

 

 

그리고 설령 그들이 찾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해도 햇빛 아래서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451쪽)

 

 

지나간 일들이 다 화려할 수는 없지만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추억 하나씩은 있는 법이다. 여러 빛깔의 이야기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음료처럼 마시기도 하고 나무처럼 기대기도 하다가 황혼의 노을 앞에서 이야기를 음미하기도 한다. 이야기가 예상 밖으로 꼬일 때도 있고 의외로 술술 풀릴 때도 있고......

 

매순간 여러 방향으로 퍼졌다가 모였다가 부서지기도 하는 인생..... 그조차도 아름다운 것임을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이야기는 나라와 같다. 이탈리아는 대서사시, 영국은 두꺼운 장편소설, 미국은 화려한 테크니컬로 찍은 경박한 영화다. - 앨비스 벤더 (409쪽)

어떤 때는 말이야..... 우리가 하고 싶은 일과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 똑같지가 않단다.....네가 하고픈 일과 해야 하는 옳은 일 사이의 틈이 작을수록 너는 더 행복해 질 거야..... 우리의 의지와 욕망이 언제나 맞아 떨어진다면 인생이 얼마나 살기 쉬워질까.....(407쪽)

 

 

인생은 몇 장의 서류로 요약되기도 하고

한 권의 소설로 완성되기도 한다.

인생은 한 편의 다큐로 찍을 수도 있고

한편의 시로 노래할 수도 있다.

 

 

엘도라도.

그 환상의 이상향이 현실엔 없을지라도 우리는 맺어진 인연 앞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

각본에도 없는 스토리를.......

이야기들은 사람들이니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봄덕 2013-05-25 0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그렇게 노력하다가 결국엔 홀로 죽는다해도.그래서 폐허로 남는다해도 아름다운 것임을 일깨운 소설. 그리스로마의 건축유물처럼,닳아서 덧칠해진 프레스코벽화처럼
 
천국의 수인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주원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천국의 수인- 여운이 길~~게 남는 이야기.

 

 

항상 책을 읽고 나면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곤 한다.

어쩌면 그것을 즐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래도 이토록 긴 여운을 남기는 소설은 아마도 오래간만 인 듯하다.

 

20130506_174021_resized[1].jpg

 

 

저자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의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이다.

이 소설만의 특유한 기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선과 악의 구도가 명확하면서도 예측불허의 반전이 곳곳에 지뢰처럼 숨겨져 있다. 추리적 서사구조가 매우 정밀한 느낌이다.

배신, 복수, 우정, 그리움, 은혜, 약속 등의 이야기에 모험과 추리가 보태진 소설이다. 읽을수록 태풍 급의 흡입력이랄까.

기대 이상이다.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 속에서도 따뜻함과 포근함이 흐르고, 정의와 의리가 빛을 발한다.

 

 

이 소설의 배경은 스페인 내전을 전후한 바르셀로나이다.

그 어둠의 시대에 영혼과 이름과 사랑을 잃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가 구슬프게 전개된다.

바르셀로나에서 '셈페레와 아들' 이란 서점을 운영하는 셈페레와 그의 아들 다니엘.

서점 직원으로는 페르민 아저씨가 있다.

 

불황 탓인지, 외부의 알력 탓인지 서점의 재정난은 갈수록 위태로워진다.

다행히도 베아와 결혼한 다니엘에겐 훌리안이라는 귀여운 갓난아기가 있고 페르민은 곧 결혼할 예정이라서 어느 때보다 마음은 행복으로 분주하다.

 

크리스마스를 앞 둔 어느 날 험악한 표정의 사나이가 찾아오면서 긴장과 불안, 증오와 슬픔에 휩싸이는 다니엘과 페르민.

20년 전의 이야기가 추억이 아니라 충격과 상처의 역사이자 가족사임을 알게 된다.

 

"세상의 좋은 것들은 항상 열쇠로 채워져 있지"(22쪽)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거짓이요, 돈을 제외한 모든 것이."(22쪽)

 

 

열쇠와 돈을 강조하는 의족에 의수인 이 남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지만 범죄의 냄새가 나는 그의 오만한 태도는 나를 아마추어 탐정으로 만들어 놓았다. (28쪽)

 

페르민이 겪은 기분 더러운 시기는 언제일까. 무엇이 그의 미소를 앗아 간 걸까.

다니엘의 계속 되는 재촉에 드디어 이야기를 풀어 놓는 페르민.

 

20년 전 악명 높은 몬주익 교도소 13호 감방에 페르민 로메로 데 토레스가 들어가고, 다리가 없는 살가도도 들어온다.

그의 맞은편에는 작가인 다비드 마르틴, 12호에는 닥터 라몬 사나우하가 있다.

 

수상한 시절의 죄목이란 어찌 보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하찮은 이유들이거나 억지 죄목일 때가 많다.

죄목 같지 않은 죄목이 통하던 암흑의 시대.

아무런 죄 없이 감옥에 들어온 수인들.

 

수인들은 다비드 마르틴의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고 그에게 '천국의 수인' 이란 별명을 붙여 주게 된다.

어느 날 교도소를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찾아 낸 마르틴.

힌트는 <몽테크리스토 백작>

죽지 않고서는 살아 나갈 수 없는 몬주익 교도소에서 '죽음을 통한 도주 계획' 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페르민이 감방동료인 살가도를 죽이고 서로 옷을 바꿔 입은 채 시체 포대에 들어가 위장을 하면 탈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살가도의 보물 열쇠를 훔쳐서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공동묘지에 내던져 진 포대 속의 페르민. 그는 죽을힘을 다해 빈민촌으로 스며든다.

춥고 굶주리고 외로운 그에겐 오직 지켜야 할 약속만이 그의 하루를 지탱하게 한다.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탈출한 그가 지켜야 할 약속은 무엇이었을까.

세상에 아는 이 없고 거지처럼 살고 있는 그가 하루에도 수십 번 죽고 싶었지만 죽을 수 없게 한 약속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비드 마르틴이 사랑한 이사벨라와 그의 아들 셈페레 다니엘을 지켜 주는 것.

그러나 이사벨라는 교도소장 발스의 독살에 의해 콜레라로 사망하게 되고 진실은 침묵 속에 고이 잠들게 된다.

침묵을 지켜야만 살아 갈 수 있던 시절.

이사벨라의 사망 소식을 접한 후 페르민은 묵묵히 다니엘의 수호천사가 되어 그의 친구가 되어 준다.

 

 

다시 찾아 온 살가도에서 보물열쇠를 건네준다. 그를 추적한 결과 보물은 이미 누군가가 빼돌린 상태…….

도대체 누가 그의 보물을 훔쳐갔을까. 혹시 발스?

야망과 욕망이 큰 교도소 소장인 마우리우스 발스.

죄수 마르틴 의 글 쓰는 재능을 탐냈던 그는 마르틴의 필력으로 문인의 명성을 얻고자 애태운다.

어찌됐던 이후에 교도소장 발스는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고 권위 있고 지적인 권력가이자 재력가가 되어 간다.

 

20130506_174106_resized[1].jpg

 

 

'잊힌 책들의 묘지'를 찾아 마르틴의 흔적과 그의 편지를 전해 받은 다니엘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마르틴이 멀리서 지켜주고 있음을 느낀다.

또 하나의 수호천사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닥터 사나우하는 마르틴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사람들이 모여 앉아 마르틴에게 '천국의 수인' 이라는 별명을 붙이며 …….(126쪽)

 

그래서 세상에 아는 이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이름 없는 거지가 되어, 모두가 미치광이로 오해하는 사람이 되어 거리로 돌아왔지요. 죽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건 약속 때문에......(286쪽)

 

 

서점을 둘러싼 이야기, 책에 얽힌 이야기와 글쓰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촘촘히 얽혀 있는데도 전혀 난잡한 느낌이 아니라 묘하다는 느낌이다.

 

'잊힌 책들의 묘지' 사부작 연작 시리즈 중 세 번째 작품인 <천국의 수인> 은 그 이전에 나온 <바람의 그림자>, <천사의 게임> 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데 얼른 보고 싶다.

 

시폰의 글에는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한 것이 많아서 독자들은 그의 책을 읽은 후에 바르셀로나로의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문학의 위력이란…….

나도 그곳으로 가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가 수업 (양장) - 글 잘 쓰는 독창적인 작가가 되는 법
도러시아 브랜디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글쓰기 좋아하는 동생에게 추천한다. 단순한 문장의 나열이 아니라 감동적인 글이 될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매일 고민하며 글을 쓰는 나에게도, 동생에게도 좋은 스승이 될 듯하다.매력적인 반값은 덤이다.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햄릿 - 전2권 (한글판 + 영문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 영문판) 1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한우리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을 좋아하는 동생에게 강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