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가 마르지 않는다. 제습기 검색은 5년전쯤 부터 여름마다 하는데, 검색으로 최종 후보를 고를 즈음 장마는 끝났다. 새 기계를 들이는 일은 꽤 귀찮고 부담스럽다. 제습기를 들이기 전에 진공청소기를 바꿔야 하고, 다리미도 스팀형으로, 가능하다면 무선으로 마련하고 싶은....마음만 몇년째니.

 

비 내리는 월요일, 남편과 아이를 내보내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꿈'을 읽었다. 찜찜한 소설. 월요일 오전에는 특히나 피했어야 하는 소설. 하루키의 액기스를 추출한 것 같은 소설. 수면제를 먹어야만 잠이 드는 화가 '나'는 무력감과 우울증에 빠져있다. 어느날, 돈이 들어온 날, 갑자기 창작의욕이 솟아올라 (그거슨 돈의 힘) 모델 에이전시에서 모델을 섭외하고 그녀의 나신을 그리기 시작한다. 못난 얼굴에 비해 풍성한 몸매, 특히 가슴. 어쩐지 그녀 안의 생동감, 혹은 폭력성에 무엇보다 풍성한 가슴에 짓눌리는 기분이 들고 그림은 진척이 잘 되지 않는다. 주도권을 놓친 그는 전전긍긍. 그중 계속 되는 선잠 깨기와 경계가 불분명한, 하지만 선명하고 기괴한 꿈. 고갱의 화집을 뒤적이고, 어린시절 불꽃놀이를 꿈꾸고, 태반무덤을 언급한 그녀의 목을 조르는 꿈을 꾼다. 방에 깔린 자줏빛 카펫트를 들어올려 뒤집어 보기가 왠지 두려운 기분이 든다. 꿈 속에서 그녀를 죽인 다음, 작업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그녀를 찾아 에이전시로, 숙소로 가는 화가. 어쩐지 이 모든 골목과 상황이 낯설지 않다. 그녀는 아니, '나'는 어디에 있는가. 소설 속에도 굵은 비가 내리는 것만 같다. 라쇼몬 단편집은 장마철에 제격. 눅눅하고 찜찜하다.

 

화가의 집/작업실 근처의 돌 무더기가 태반무덤, 이라고 모델이 말했다. 어떻게 아냐고 묻자 '그렇게 써있다'고 당연한듯 무심히 대답하는 그녀. 태반. 태아의 뱃속 지지대. 그녀는 아이를 낳은 적이 있었을까. 여자의 몸 자체가 태반인 건가. 아이를 뽑아내고 남은 육신은 돌 아래 눕는가.

 

왕가의 아기씨들이 태어난 후 만든 태반 항아리 특별전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왕실의 특별한 태반은 따로 항아리에 곱게 모시고 태실이라 칭한 귀한 땅에 모셔두었다지. 사방으로 뻗는 오늘의 연상작용. 빨래가 쌓인다.

 

http://www.gogung.go.kr/mai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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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8-07-02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반항아리라는 것이 있었군요. 왠지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할거같은 궁금해디는 전시입니다

유부만두 2018-07-02 22:39   좋아요 0 | URL
저도요. 챙겨 가보려고요.
 

 

어린이 책이라 아이와 읽는 카테고리에 쓰지만 우리집 아이 취향은 아닌 책. 활을 들고 목표를 향해 집중하는 아이의 그림과 강렬한 표지에 이끌려 샀다. 비닐로 꽁꽁 포장되어 있기에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펼치고 보니 .... 만화 같은 느낌이 많이 드는 어린이 액션물.

 

네 살 때 엄마를 잃고 아빠와 단 둘이 사는 강지. (자꾸 강아지, 라고 읽게 된다) 강한 심지를 지닌 아이, 쯤 되려나? 열두살 강지는 이미 이름을 날리는 양궁선수인데 열두 살 생일 날, 존재도 몰랐던 외할머니가 찾아온다. 그러고 하시는 말씀이 '이제 헌터걸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훈련을 시작해라'. 170쯤 되는 큰 키에 또렷한 이목구비,  짧은 은발을 하신 외할머니가 아빠 가게 건물주?! 엄마도 헌터걸이었다고?!

 

열두살 여자 아이가 활을 들고 악과 맞서 싸운다..... 아, 전에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일곱 개의 화살'에선 활과 화살에 더 의미가 부여되었고 악과 싸우면서 여러 인물들 (동물들, 신령들....)의 협력이 중요했는데.

열두 살이면 우리 식으로는 초등 5학년이고 학교에선 6학년이 있지만 이미 마음은 초등 졸업생 만큼 두려울 게 없는 나이. 어른의 환갑처럼 십이간지 띠 한 번 돌아온 나이, 알 건 다 알아요, 인터넷에선 어른도 잡아드시는 나이. 이 나이의 어린이가 집중을 요하는 '화살'을, 정의로운 무기를 들게 된다는 설정이다. 악인은 어린이 대상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 그 악당들 최고봉엔 전설의 어린이 납치범 십삼 세기의 피리부는 사나이가 있다. 시리즈로 기획한 책 같은데 그에 맞게 1차 악당 '거울여신'이 등장하고 헌터걸이 되는 강지의 훈련 과정이 나온다.....지만 흔한 어린이 판타지물 그 이상은 아니다. 귀여운 그림과 만화 컷이 매력적이지만 등장인물들이 전형적이고 (속이기도 싸우기도 화해하기도 쉬운 열두살...이 말이 됩니까) 갈등 묘사가 엉성하게 처리되어 아쉽다. 무엇보다 악을 대항해 싸우는 과정이 게임 미션 같이 보여 절박하지 않다. 성공하면 뱃지 하나, 차곡 차곡 점수 쌓아가는 과정은 정의로운 싸움과는 다르다. 그리고....헌팅...이라는 낱말에서 악과의 대결 대신 .... 다른 걸 떠올린 나는 옛날 아줌마.... 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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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30 0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부만두 2018-07-01 10:34   좋아요 0 | URL
ㅋㅋㅋ 아줌마끼리 반갑습니다! ^^

psyche 2018-06-30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헌팅이라함은 내가 생각한 남녀간의 그 헌팅? ㅋ

유부만두 2018-07-01 10:34   좋아요 0 | URL
그....그....그렇습니다;;;;
 

여름호에는 새 동화가 세 편 실려있다. 그중 '지각하고 싶은 날'을 먼저 읽었다. 학교 가기 싫은 날, 이 생각나는 이 이야기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초등학생 '나'가 화자이다. 나는 화가 났다. 게임을 너무 한다고 어젯밤 엄마가 핸드폰을 뺏어버렸다. 1교시 전에 내야할 숙제도 두 가지 모두 하지 않았고, 학교는 원래 재미없다. 작년에 전학온 학교에는 뭔 행사가 많은지 맨날 뭘 '특별히' 하라고 시킨다. 나는 관심도 없는데. 우리집 맞벌이 부모를 뺀 다른 부모님들과 조부모들은 학교에 자주 와서 선생님들이랑 인사도 하고 학교선 그들에게 보여주기 수업도 준비한다. 재미없다. 선생님들은 강요의 달인들이고 나나 학생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작전을 잘 짜서 내가 사라진 걸 알고 모두들 긴장하게 만들고, 특히 핸드폰을 압수한 것을 엄마가 반성도 하실거고, 그런다음 아슬아슬하게 학교에 갈 계획이었다. 공원 화장실에서 계획을 머릿속으로 다듬는데 엇, 화장실 밖에 어떤 아저씨, 아니 형아가 있다. 이 시간에 공원 화장실 근처에 어슬렁 거린다면 분명 ....  나는 바짝 쫄아서 그 형아가 하는 전화 통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눈사람'에는 친절한 화자(어른)가 어느 눈 온 다음날 이야기를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는 식이다. 주인공 여자아이가 일어나서 엄마 몰래 살짝 집을 나선다. 놀이터에서 즐겁게 눈사람을 만들고 엄마에게 들켜 꾸지람 같은 무서운 표정을 보며 집으로 돌아간다. 낮 동안 그 눈사람에겐 어떤 일이 생기는지 차근차근 들려주는데. 역시 '지각 하고 싶은 날'의 '나'처럼 이 '여자아이'도 엄마의 법칙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 꿈틀대고 있다. 왜 굳이 '여자'아이 라고 했을까. 낮동안 '남자'아이들이 눈사람을 상대로 과격한 놀이를 하기 때문일까, '여'고생들이 꺄르륵 거리며 지나가는 것을 묘사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이른 아침 아이가 일어난 기척도 모르고 식사 준비에 바쁜 엄마와 짝을 이루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도드라지는 성별 구분에 더해서 마무리에 '내가 너희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노라' 라는 '남자' 작가의 목소리가 눈사람보다, 이야기 전체보다 더 '창조'주 같이 웅장하다.

 

눈사람 말고 진짜 사람을 '창조'한 신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사람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바로 라후라 신과 아후라 신 부부인데 지구와 해와 달, 별들, 그리고 식물과 동물들, 마지막에 '만들기 솜씨가 좋아진 다음' 사람을 만들었다. 그들은 이 창조의 이야기를 어린이 '또마'에게 들려주고 또마는 나중에 이야기를 잘 하게 된 다음에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지금은 동굴벽에 그림을 그려둔다. 아, 이건 요즘 배경이 아니라 먼 옛날, 공룡은 이미 사라진 다음이지만 아직 사람은 짐승 가죽옷을 입고 동굴에 살던 시대의 이야기다. 보랏빛을 발하다가 눈물로 식고, 호수와 바다를 갖게된 지구, 자유롭게 만들어 놨더니 한곳에서 가만히 있고싶어하는 식물, 신의 방귀를 먹고 태어난 공룡 등, 과학 얘기를 슬쩍 끼워 넣은 신화 같은,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만화'의 동화 버전같다. 사람은 왜 이런 여리여리한 모습일까, 실은 인간의 이빨에도 독이 있었다! 발톱도 있고! 초기 사람의 무쇠팔 무쇠다리 늠름한 주먹을 꿈에 보는 또마. 이 꼬마 아이가 잘 자라나서 동굴촌 사람 모두가 기대하는 멋진 이야기꾼이 되길 바란다.

 

최근의 동화들인데 아주 기발하기보다는 (막 재미가 넘친다기 보다는) 안정적인 느낌이다. 살짝 흔드는 결말이 귀엽긴 한데, '눈사람'은 너무 슨상님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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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겨울부터 올 봄까지 발표된 최은영의 중단편 일곱 이야기가 소설집으로 나왔다. '그해 여름'은 이미 읽은 이야기라 목차의 그 다음 이야기 '601, 602'와 제일 긴 '모래로 지은 집'을 읽었다.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와 비슷하기도 또 다르기도 한 느낌이 든다. 쉬이 상처 받는 인물들 때문인지 책 제목 '내게 무해한 사람'은 '내게 무례한 사람'으로 읽혔다.

 

'601, 602'의 주영이는 옆집 친구 효진이와 친하게 지내지만 늘 어떤 벽을 사이에 두어 안전 거리를 지키고 있다. 그 벽이 허물어지면 주영이는 효진이가 되고, 그 아이가 겪던 모든 비극이 옮아올 것만 같다. 그 비극이 현실이 되고 자신을 에워싸는 것을 작가가 하나하나 다 늘어놓았다. 그대로 삶의 폭력과 억지들이 문장과 함께 내 속으로 밀고들어온다. 이리 저리 눈을 돌리거나 숨을 고르지도 않는다. 이런 무례한 인생 속에 우리는 매일 산다.

 

'모래로 지은 집'에서도 가족 내의 폭력을 겪는 또 다른 친구가 나온다. 그리고 다른 갸냘픈 친구까지 화자와 어울린다. 이 셋은 안정적으로 보이려 애쓰면서 '어설픈' 십대 후반 부터 이십대 초반 까지의 '다리'를 비틀거리며 건넌다. 세세한 감정의 흐름과 인물들 주위의 햇볕까지 상상 속에서 잡힐듯 가깝다. 표지의 따뜻하면서 거리를 두는 인물의 뒷모습 처럼, 화자는 이제 천천히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그 관계의 한쪽을 붙잡은 자신에 대해서 쓰고있다. 천천히 그들의 이야기가 내안에 스며드는 것만 같다. 흔한 문장과 설정, 무던하고도 예상 가능한 결말인데도 마음이 아프다. 사람들 사이의 소통과 관계, 그리고 오해와 성장에 대해서 해답도 없이 고민해본다.

 

입대 후 보초를 서는 공무의 덤덤한 편지가 아들 녀석의 이야기와 많이 겹쳐서 힘들었다. '어른'이 되어서 돌아보니 그깟 이십일 개월, 맘 잘 다잡고 눈 꼭 감고, 할 것만 하고 견뎌라, 라고 이야기 했었는데, 스물두 살 아이에겐 가닿지 않겠지. 그 시절엔 군대에 가지 않더라도 비틀거리지 않는 사람은 없지 않나. 최은영의 이야기에선 여리고 젊은 인생의 끈들이 만나서 슬쩍 겹치고 또 제각각 떨어져 나간다. 상처 주지 않고 '해'끼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 그냥 막 살아, 좀, 하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 책을 읽기에 나는 너무 무뎌졌거나 늙어버린 것만 같아서 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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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18-06-28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넘 읽고 싶어요~

유부만두 2018-06-29 07:23   좋아요 1 | URL
읽으세요~ 조용조용 들려주는 이야기에 위안받으실겁니다~

다락방 2018-06-28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예약판매 한다는 메세지를 받았었는데 유부만두님 벌써 읽으셨군요!! >.<

유부만두 2018-06-29 07:24   좋아요 0 | URL
판매 시작인 날 땡! 해서 바로 주문하면 그날 옵니다. 예판 때 주문한 책은 아직임 ;;;; 이러면 예판의 의미가 없는데 말이죠.
 
창비어린이 2018.여름 - 통권 61호
창비어린이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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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동물과 사람‘도 새 코너 ‘신간을 말한다‘도 선생님들 뿐 아니라 어린이 문학을 즐기는 모든 독자들을 위한 알차고 친절한 내용이다. 좋은 동화 찾기와 즐기기를 도와준다.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읽고 싶다. 강력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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