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내가 나와 아내를 위한 책을 사왔다며 궁금증을 주면서 책을 건네 주었습니다. 내심 기대를 하면서 받아든 책 제목은 「아빠, 그렇게 키워선 안됩니다」. 결혼 전에는 ‘오빠‘에서 결혼 후에는 주어가 흐려지다가 다시 찾은 이름이 ‘연의 아빠‘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해라‘, ‘~ 살아야 한다‘라는 명령형의 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터라, 한 번 쭉 훑어보았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중 몇 가지 와닿는 구절이 있어 옮겨 봅니다.

자녀를 SKY 대학에 보내려면 네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할아버지의 재력, 아버지의 무관심, 어머니의 정보력, 그리고 아이의 체력. 이 우스갯소리의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 교육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 왠지 씁쓸하다.(p19)... 기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주로 경제적인 부분에 치우쳐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하느라 바쁜 아버지보다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어머니 역할이 커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녀교육에서 아빠의 역할은 사라진다. 아버지 자신도 바쁘다는 이유로 자녀교육을 아내의 몫으로 넘긴다.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 아버지들이 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하루 평균 15~30분. 자녀와 얼굴을 마주하는 횟수는 하루 평균 2.7회에 불과했다.(p20)

지금 TV에서는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청문회가 한창입니다. 방송을 켜놓고 일을 하는지, 일을 벌려놓고 방송을 시청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고려대에 아이를 보내려면 아빠의 무관심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현실에서 딸의 학창시절에 대해 의혹 제기를 한다면, 저를 포함한 어느 아빠가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전 청문회를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조국 후보자의 좋은 아빠 청문회‘ 아니면 ‘법무부장관 후보자 조국 딸에 대한 청문회‘. 이웃분들 즐거운 오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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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9-06 20: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국이나 그의 와이프 등의 문제일 수 있지만, 이 기회에 구조적 문제가 바로 원인이고 그 구조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지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09-06 21:17   좋아요 2 | URL
그렇습니다. 법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제도가 문제일텐데 무조건 후보자 책임으로 몰아갔던 것이 야당과 언론의 본모습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박탈감을 주는 제도를 만든 이들을 질타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농촌 문제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사상선집
카를 카우츠키 지음, 이승무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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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진보에는 생산비의 저하 경향이 내재하지만, 이 경향은 자본주의적 농업에서는 그것을 점점 더 괴롭히는 반대 경향들, 지대, 차지료의 상승, 담보채무의 상승, 상속권에 의한 담보채무 혹은 토지분할의 촉진, 군사주의, 조세, 부재지주 등의 결과로 도시에 의한 농촌의 고혈 빨아먹기의 증대, 토양의 지력 거덜 내기, 재배 동식물의 민감성 증대, 끝으로 공업에 의한 농촌 노동자 집단의 흡수 증대 등에 의해 마비되고도 남는다. 이는 모두 합세해 기술진보에도 불구하고 농업에서 생산비를 점점 더 부풀리는 요인들이다. 이는 우선 식량 가격의 일반적인, 그리고 지속적인 상승을 가져오지만, 이와 함께 도시와 농촌간, 토지 소유자 계층과 소비자 대중 간의 대립 첨예화도 가져온다.(p538)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여성을 다시 밭으로 내모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임금이 아주 낮아서 가족을 부양하는데 충분치 않아 다수의 농촌 프롤레타리아트가 창출된 탓이다. 그래서 여성과 어린이가 임금을 높이도록 함께 불러들여지고 당연히 그 결과는 남성의 임금을 더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p665)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권의 확장이 아닌 제한에서 우리는 오늘날 사회에서 수렵 문제의 최선의 해결책을 본다. 수렵 구역을 만들 수 있는 대토지 소유 계층의 특권은 자신의 사유 영토를 만들 특권과 마찬가지로 사라져야 한다... 전체 삼림 소유지를 국유화함으로써 수렵 정책 문제는 최소한 민주 국가에서는 아주 단순해질 것이다.(p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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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9-09-06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끔 올리시는 리뷰 볼 때마다 겨호 님의 관심 범위가 굉장히 넓다는 생각에 가끔 깜놀합니다.

겨울호랑이 2019-09-06 12:58   좋아요 0 | URL
곰곰발님 감사합니다. 사회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한 분야에서 생긴 궁금증이 이곳저곳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덕분에 아주 얇게 곳곳에 발을 담그게 되었습니다^^:)
 
여론
월터 리프먼 지음, 이충훈 옮김 / 까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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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장 의미 있는 가설은 뉴스와 진리가 동일한 것이 아니며, 이 둘은 분명하게 구분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뉴스의 기능은 어떤 사건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고, 진리의 기능은 숨겨진 사실을 규명하고 그 사실을 다른 사실들과 관련시키며 인간이 활동할 수 있는 현실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오직 이 점에서, 사회적 조건들이 인식 가능하고 측정 가능한 모습을 띠는 곳에서만이 진리와 뉴스는 일치한다.(p349)

오늘날 사회적 진리는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신문은 여론에 관한 민주적 이론이 요구하는 지식의 양을 제공하도록 구성되지 않는다... 신문이 다루는 것은 바로 사회에서 통치하는 힘들이다. 신문은 제도들이 신문을 위해서 기록해놓은 것만을 기록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 이외의 모든 것은 주장이자 의견이고, 우여곡절과 자의식 그리고 인간의 용기에 따라서 변동한다.(p351)

신문은 직접 민주주의의 기관으로 간주되었고. 날마다 엄청난 규모로 국민발안과 국민투표 그리고 국민소환에 들어 있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불철주야 여론이라는 법정은 모든 것에 규칙의 준수를 요구할 것이다. 이는 실행될 수 없다. 그리고 뉴스의 본성을 고려할 때, 이는 심지어 상상조차 할 수 없다.(p352)

사람들은 세계에 관한 신뢰할 만한 이미지가 없는 상태에서 행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부와 학교와 신문과 교회는 보다 분명한 민주주의의 결함과 폭력적인 편견, 무관심, 따분하지만 중요한 것보다는 특이하지만 하찮은 것에 대한 선호, 그리고 사이드쇼(sideshow)와 세발 달린 송아지에 대한 갈망에 맞서 조금씩 진보한다. 이는 민주주의의 주된 결함이자 그 전통에 내재된 결함이며, 나는 민주주의의 다른 모든 결함이 바로 이 결함에서 유래한다고 믿는다.(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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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선집 - 전7권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외 지음 / 책세상 / 2006년 10월
109,000원 → 9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5,4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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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 / 책세상 / 2006년 8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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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품집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 / 책세상 / 2006년 9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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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책.갈색책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 / 책세상 / 2006년 10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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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성에 관하여 비트겐슈타인 선집 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 / 책세상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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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 여기서 "나는 안다"는 하나의 논리적 통찰이다. 다만, 실재주의가 그것에 의해서 증명될 수는 없다... 60. 이것이 한 조각의 종이라는 '가설'이 나중에 경험을 통해 확증되거나 반증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나는 그것이 한 조각의 종이임을 안다"에서 "나는 안다"가 그러한 가설에, 또는 논리적 규정에 관계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낱말이 우리의 언어에 최초로 통합될 때 우리가 배워 익히는 것이기 때문이다.(p31) <확실성에 관하여> 中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 ~ 1951)의 <확실성에 관하여 On Certainty>를 통해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이라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의 유명한 명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더이상 회의(懷疑)할 수 없는 1명제인 '자신이 생각한다'는 사실로부터 자신의 실재를 주장한 데카르트. 그런 데카르트의 명제와 논리를 비트겐슈타인은 동의하지 않는다.


 115. 모든 것을 의심하려는 사람은 의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의심하는 놀이 자체는 이미 확실성을 전제한다.(p42) <확실성에 관하여> 中


 130.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도록, 즉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옳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경험이 아닌가?... 우리는 그것을 경험에서 끄집어내라고 우리에게 충고하지 않는다. 경험이 우리에게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라면, 우리는 이것을 근거라고 간주할 근거를 또다시 갖고 있지 않다.(p45) <확실성에 관하여> 中


 174. 나는 충분한 확실성을 가지고 행위한다. 그러나 이 확실성은 나 자신의 것이다... 177. 내가 아는 것을, 나는 믿는다.(p55) <확실성에 관하여> 中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의심하는 것 자체가 이미 확실성(certainty)를 전제로 한다. 그렇지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경험에 의해 지지되고, 주관적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는 ''[나는 생각한다]라고 알고 있다(확신한다).'로 바꿀 수 있다. 이것은 내가 확신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는 있으나, 그것이 생각한다는 것을 보장할 수는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신의 확신은 사실을 보증하지 못하고, 실재 또한 마찬가지다.


 90. "나는 안다"는 "나는 본다"와 비슷하고 근친적인 원초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는 안다"는, 나와 어떤 한 명제의 뜻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어떤 한 사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사실이 나의 의식 속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 경우 앎의 이미지는 외적 과정을 있는 그대로 눈과 의식에 투영하는 시선을 통해 지각한다는 것일 것이다.(p36) <확실성에 관하여> 中


 284. 사람들은 항상 경험에서 배워 왔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에서 우리들은 그들이 어떤 것을 확고하게 믿는다는 것을 - 그들이 이 믿음을 언표하든 언표하지 않든 - 알아챌 수 있다. 이로써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인간이 그렇게 행위해야 마땅하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은 그렇게 행위한다는 것이다.(p75) <확실성에 관하여> 中


 65. 언어놀이들이 변하면 개념들이 변화하며, 또 개념들과 더불어 낱말들의 의미들도 변화한다.(p31) <확실성에 관하여> 中


  '자신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논증하는 축(軸) 명제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경험적으로 뒷받침된 삶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동되는 것이며, 언어의 기초가 되기는 하지만, 의심할 수 없는 불변의 제1명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비트켄슈타인의 주장이다. 이에 비해 수리적 명제들은 선험적(a priori)으로 주어진 명제들이다. 


  651. 12*12=144라는 것에 관해서 내가 오류를 범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제 우리들은 수학적 확실함을 경험 명제들의 상대적 불확실함과 대비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수학적 명제는 그 밖의 삶의 행위들과 어떤 방식으로도 구별되지 않는, 그리고 망각과 간과와 미혹에 같은 정도로 내맡겨져 있는 일련의 행위들을 획득되었기 때문이다.(p155) <확실성에 관하여> 中


 45. 계산한다는 것의 본질을 우리는 계산하는 법을 배울 적에 알게 되었다.(p27)... 46. 그러나 우리는 계산의 신뢰성을 어떻게 확인하는지는 결국 기술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거기서 규칙이 등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p27) <확실성에 관하여> 中


 결국, <확실성에 관하여>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는 선험적 수학 세계에서의 확실함과 경험적 언어 세계에서의 확실함이 같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 차이를 거의 인지하지 못하는데, 이것이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447.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 물리적 놀이는 산수 놀이와 마찬가지로 확실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될 수 있다. 내 소견은 논리적인 것이지, 심리적인 것이 아니다.(p110)... 455. 모든 언어놀이는 낱말들과 대상들이 재인식된다는 점에 의거하고 있다.우리는 이것이 의자라는 것을 2*2=4라는 것과 동일한 엄격성을 가지고 배운다.(p111) <확실성에 관하여> 中


 410. 우리의 앎은 하나의 커다란 체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오직 이 체계 내에서만, 개별적인 것은 우리가 그것에 부여하는 가치를 지닌다.(p100) <확실성에 관하여> 中


 무한(無限)에 매우 가깝지만, 엄밀하게는 유한(有限). 이것이 축의 명제가 가진 한계이자, 인간 언어 활동이 가진 한계가 아닐까. <확실성에 관하여>를 통해 미제스가 <경제과학의 궁극적 기초>를 통해 표현한 선험적인 '인간행동학'과 경험적인 '역사학'를 떠올리며 리뷰를 마무리한다...


PS. 수리논리학에서 자연수 체계를 설명하는 페아노 공리계(Peano's axioms)에서 1은 근본원리(Primitive notion)에 속한다. 별다른 정의없이 사용되는 1의 존재를 통해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신학(神學)요소를 확인함과 함께 선험적이라는 수리세계의 실체( substance) 역시 경험의 연장(extension)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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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5 09: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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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5 1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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