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가 앞으로도 건강을 유지하면서 다른 사회에 영향력을 지속시키려면 이슬람과 아시아가 도덕적 우월감을 주장하는 추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서구 문화는 내부의 집단들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 그 도전의 하나는 바로 동화를 거부하고 자기가 떠나온 나라의 가치관, 풍습, 문화를 여전히 고수하고 전파하려고 애쓰는 이민자들로부터 받는다. 이런 현상은 유럽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소수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정도는 덜하지만 미국에 사는 히스패닉 집단도 비슷한 성격을 보인다. 그런데 미국의 히스패닉 인구 규모는 만만치가 않다.

서구의 보편주의가 세계에 위험을 초래하는 까닭은 핵심국들 사이의 문명 전쟁을 낳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서구에게 더더욱 위험한 까닭은 전쟁에서 서구가 패배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소련이 붕괴하자 서구인들은 자신들의 문명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지만 아시아, 이슬람, 기타 문명들도 서서히 힘을 쌓아 나가고 있는 현실에 맞닥뜨렸다. 이때 서구인들은 브루투스의 호소력 있는 낯익은 논리에 의존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서구 문명이 가치를 지니는 것은 그것이 보편적이어서가 아니라 남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구 지도자들의 책무는 다른 문명들을 서구의 이상에 맞춰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다. 쇠락하는 서구로서는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서구 지도자들은 서구 문명의 고유한 특성을 견지하고 수호하고 쇄신하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 미국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러한 책무를 앞장서서 떠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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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은 그 기원과 원인, 결정과 발발, 전개와 귀결의 모든 면에서 국제적 수준, 동아시아 수준, 국내적 수준의 세 층위로 나타났다. 전쟁의 기원은 이 세 수준으로 인해 놓였고, 전쟁의 결정 역시 철저하게 그러하였다. 따라서 전쟁의 전개와 귀결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 세 층위의 밀접한 유기적 관련 속에 한국전쟁은 위치하였다. 각각, 첫번째 층위는 미소대립과 냉전이었고, 두번째 층위는 중국혁명과 일본의 존재, 그리고 세번째 층위는 남북갈등과 각각의 내부정치와 사회의 수준이었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p64


 박명림(朴明林, 1963 ~ ) 교수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에서 한국전쟁을 여러 층위로 구분하여 분석한다. 기존의 남북한 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G2로 각각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을 대표하는 두 강대국 미국과 소련의 이익과, 국민당-공산당으로 내전을 겨우 봉합한 중공과 패전국으로 전락한 일본의 이해관계를 함께 고려했을 때 비로소 전쟁의 진면목이 보인다는 것이다. 


 분석의 영역과 관련하여 우리는 네 가지 요소의 분리와 종합을 시도하고자 한다. 즉, 남한과 북한의 사회를 분석하면서 우리는 정치, 경제, 이념과 멘탈리티, 군사영역의 분리와 종합을 시도한다(p77)... 이 네 영역 중 가장 중심적인 문제는 역시 정치이며 48년 질서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하였던 요소는 일부에서 말하는 이념도 경제도 아니었고 바로 정치였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p80


  저자는 이러한 한국전쟁의 지층에 대해 4가지 영역으로 구분하여 분석을 수행한다.   구체적으로, 정치, 경제, 이념, 군사 영역의 4부분에 대해 남북 체제가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기 위한 여러 노력들을 교육, 토지개혁 등의 이슈를 통해 살펴본다. 이러한 체제들의 노력은 균열과 압력으로 작용하면서 체제를 변화시키는데, 저자는 해방 전후 한국전쟁에 이르기는 5년의 기간 중 변곡점을 1948년으로 본다. 


 필자가 이해하기에 한국전쟁의 연구를 위해서는 다음의 세 준거들이 필요하다. 즉, 농민,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주의가 그것들이다(p52)... 우리의 초점은 국가(state)와 정치사회(political society), 시민사회(civil society)의 관계에서 밑으로부터의 참여와 의사의 대표성 여부에 놓여 있다. 당연히 소련점령국과 미국점령군, 남북한 국가의 성격, 정당체제와 선거의 과정과 방법, 체제반대 세력에 대한 수용과 배제의 방법과 범위, 갈등의 정도와 수용 여부, 자율적 결사의 허용과 탄압의 문제 등에 초점이 놓일 것이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p56


 우리가 세번째로 설정한 방법론은 균열(cleavage) 또는 갈등의 구조와 위계라는 문제틀이다. 여기서 말하는 균열은 특정의제를 둘러싸고 관계된 행위 주체, 이를테면 국가와 국가, 집단과 집단, 계층과 계층 사이에 수직적 수평적으로 벌어지는 힘과 정책의 길항관계를 지칭한다. 그리고 그것이 구조라는 지형위에 어떻게 놓여 있는가 하는 측면을 포함한다(p76)... 정당성을 두고 대립하는 두 국가를 둘러싼 균열의 수준과 위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국가(state)와 체제(regime), 정부(government)의 구별이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p76


 1948년 이전에 서울을 수도로, 태극기를 국기로 인식하는 공감대를 남북한이 공유했다면, 이후에는 각각의 체제를 국가로 인식하는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38선을 임시구분선에서 분할선으로 받아들이는 변화이기도 했다. 저자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에서 한국전쟁을 내전, 지역전, 세계대전의 층위로 구분하고, 정치, 경제, 이념, 군사 영역에서 사회 체제 - 국가, 사회공동체 - 사이의 균열과 영향을 분석한다. 다만, 이러한 균열로 인한 변화는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았다. 한 체제의 내생변수(endogenous variable)는 다른 체제의 외생변수(exogenous variable)로 영향을 미쳤다. 구체적으로, 북한의 토지개혁은 남한의 토지개혁에 영향을 미쳤고, 남한의 토지개혁 결과 또한 북한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토지개혁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분야에 있어 경쟁과 영향관계는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고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전쟁 직전의 배경을 형성하는 것이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이라면, 전쟁을 결정짓는 것은 결국 정치의 영역이다. 이와 관련된 정치적 리더십의 관계가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에서 그려진다면,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에서는 농민을 중심으로 한 대중의 입장에서 바라본 한국전쟁의 배경이 서술된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전체적인 책의 얼개를 살펴보는 것으로 하고, 다음에는 보다 상세하게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1948년이전의 대립과 48년 이후의 대립의 근본적인 차이는 여기에 있었다. 이제는 정통성의 배타적 독점을 주장하는 '두 국가의 공존상태'가 도래한 것이다. 이 둘은 전부 사회적 갈등이라는 내적 계기가 냉정이라는 외적 계기를 매개로 하여 등장한 것이었다. 이 중첩으로 인하여 민족의 분할선으로서의 38선은 이미 세계의 분할선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38선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 의한 한국의 분할과, 같은 기준에 의한 동아시아와 세계의 분할의 중첩이었던 것이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p63


 전쟁은 모든 정치적 선택 중에서 두 행위주체에 의해 가장 밀접히 맞물린 채 발생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어느 일방의 인식과 정책, 사회구조만을 분석하는 것은 부분적인 설명일 수밖에 없다. 두 쪽 모두를 동시에 분석하는 것은 부분적인 설명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졸버그(Aristide Zolberg)가 말한 바 있는 '대쌍관계동학'(對雙關係動學, interface dynamics)이라는 개념을 빌어 1945년에서 50년, 특히 필자가 '전간기'(戰間期) '48년 질서'라고 부르는 1948년에서 50년 사이의 남한과 북한의 관계를 분석할 수 있다고 본다. 대쌍관계동학을 이용한 접근은 남한과 북한 각각에 대한 독립적 이해와 그것들 사이의 관계의 다이내미즘을 분석하는 것을 말한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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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6-24 11: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읽으시는군요. 읽은지 한 3-4년쯤 된 것 같은데 저도 재독하려고 찜한 책입니다. 겨울호랑이님이 이 책에 대해서 어떤 소감을 풀어내실지 궁금해집니다^^

겨울호랑이 2022-06-24 13:31   좋아요 4 | URL
여러 면에서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과 비교되면서도, 차이가 있다 생각됩니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외부적으로는 얄타체제와 같은 세계체제적인 측면에서, 내부적으로는 일제시대 식민지 상황으로부터 시작해 서서히 관점을 한국전쟁으로 모아간다면,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해방 전후로부터 1950년 6월 25일 38선에서 시작된 한국전쟁까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쓰나미를 표현할 때 전자가 대륙이동과 해류 등 기후적인 면에서부터 그 원인을 찾는다면, 후자는 쓰나미 전후 변화 상황을 보다 세밀하게 그렸다고 해야할까요... 한국전쟁의 거시사와 미시사. 이렇게 두 책들을 비교하게 되네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
 


 핼버스탬은 전후 한국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1945~48년의 미군정을 단 한 문장으로 언급한다. 그 전쟁의 잔혹한 학살과 미국의 소이탄 공습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다. 대신 한국은 "고래싸움에 등 터진 새우"였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이는  한 무리의 지도자를 가진 하찮은 나라였다. <콜디스트 윈터>는 미국 특유의 통속적인 장르에서 최고의 책으로 꼽을 만하다. 이 책이 설명하는 전쟁은 한국이나 그 역사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고작 두세 명의 한국인을 언급하며, 한국인과 중국인이 훨씬 더 많이 참여했던 전쟁에서 미국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 선한 편과 악한 편에 관한 1950년대의 고정관념들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다. _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118


 데이비드 핼버스탬 (David Halberstam, 1934 ~ 2007)의 <콜디스트 윈터 The Coldest Winter>에 대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 ~ )의 평가는 비판적이다. 미국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한국전쟁'이며, 한국전쟁에 정작 한국은 없다는 커밍스의 비판은 충분히 납득된다. 그렇지만, <콜디스트 윈터>에는 다른 한국전쟁 관련 책들이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이 담겨있다는 점에서는 비판이 지나친 부분이 있어 보인다. 


 한국전쟁에는 단층선(斷層線)이 있었다. 단층선의 한 면은 야전부대가 직면하는 전장의 위험과 현실의 세계고, 다른 면은 안일한 명령만 쏟아내는 도쿄 사령부에 있는 환영의 세계였다. 단층선은 군단과 사단 사이에도 있었다. 군단은 도쿄 사령부에서 스며 나오는 맥아더 장군의 열의를 느끼고, 사단은 적의 공격에 노출된 연대와 예하 부대의 취약성을 느꼈다. _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p76/1912


 <콜드스트 윈터>에서 저자는 한국전쟁의 단층을 말한다. 이 단층은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틈이 아니라, 미군(美軍)을 구분하는 선이다. 이 선의 한 편에는 장진호(長津湖)에서 혹독한 추위와 중공군과 싸워야 했던 야전군인이 있다면, 다른 편에는 워싱턴 행정부와 싸우는 정치군인,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 ~ 1964)가 위치한다. 도쿄 책상 위에서 전황을 내려다보며 아시아의 맹주로 처신하는 맥아더와 대통령 트루먼(Harry S. Truman, 1884 ~ 1972)의 대립을 생생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영웅으로 알려진 맥아더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콜디스트 윈터>는 분명 나름의 가치가 있는 책이다. 


 트루먼과 맥아더는 동일한 선상에서 같은 목표를 바라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들이 치러야 하는 전쟁에 대해서도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얼마나 많은 국가 자산을 투입해야 하는지 생각이 전혀 달랐다. 1950년 6월 25일부로 대통령과 장군으로서 이들의 삶이 함께 엮였다. 미국 역사에서는 보기 드물었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통제하지 못해 대통령의 위엄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맥아더는 대통령직을 제대로 존중하지 않음으로써 역사적으로 자신의 위상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_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p342/1912


 사실 여러 해 동안 맥아더가 자신의 추종자들을 현혹했던 한 가지 비법은 진실을 숨기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입장이나 대의명분에 도움이 될 때에만 진실을 인정했고 자기가 추구하는 목표에 방해가 될 때에는 가차 없이 저버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로 그 점이 맥아더의 발목을 잡는 덫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하는 말과 행동이 옳다는 식이었지만 막상 진실과 견주기 시작하자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_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p1666/1912


 다만, 커밍스의 관점에서처럼 한국전쟁을 내전의 측면에서만 바라본다면, <콜디스트 윈터>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 빠진 책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전쟁의 성격을 내전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콭디스트 윈터>의 관점은  그와 다르다.


 기억해야 할 점은 한국전쟁이 내전이었으며, 진정한 비극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었다. 순전히 한국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이었다면 식민주의와 민족 분단, 외세 개입으로 초래된 엄청난 긴장을 해결했을지도 모른다. 비극은 전쟁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전 상태로 돌아갔을 뿐이며, 그저 휴전을 통해 평화를 유지했을 뿐이다. _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72


 <콜디스트 윈터>에서 저자는 한국 전쟁을 다소 복합적으로 바라본다. 미국과 서구 세계에게 한국전쟁은 '축소된 세계대전'인 반면, 북한, 중국, 소련의 관점에서는 '내전'이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전쟁에 대한 입장 차이는 전선이 고착상태에 빠진 이후 마무리를 어렵게 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된다.


 미국과 서구 세계에서 한국전쟁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국경을 넘어 일방적으로 공격한 '침공'이었다. 때문에 예전에 히틀러의 침공을 막지 못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던 쓰라린 역사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관점은 중국과 소련 그리고 북한에게는 놀라운 것이었다. 전쟁을 시작한 시점에서는 1945년에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국경처럼 그은 38선은 안중에도 없었다. (몇 달 후 미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하면서 똑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들의 관점에서 6월 25일에 자행한 북한의 남침은 중국에서는 막 끝났지만 인도차이나에서는 진행 중인 것과 동일한 '끝나지 않은 내전'에 불과했다. _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p144/1912


 분단 상황이 사회와 문화마저 분열시켰으며 남과 북 어느 쪽이든 모두 비통한 시대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이는 엄청난 내부 분열을 불러와 한국전쟁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충돌했다. 한국전쟁은 단순히 국경을 넘어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 도발 이상의 의미였다. 식민 지배를 거치면서 십수 년 동안 쌓였던 내부 분열과 모순 그리고 오랜 정치 갈등이 터져 나온 위험한 상황이었다. _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p192/1912


 <콜디스트 윈터>는 한국전쟁에서 휘브리스(hybris)에 빠진 지도자들과 이들이 저지른 실수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마치 점수만 보면 8-7 케네디 스코어로 진행되는 야구경기에서 막상 내용을 놓고보면 끝없는 실수로 벌어진 타격전 하이라이트를 보는 듯하다. 어쩌면 이러한 부끄러운 실수들이 당사자들에게 한국전쟁을 잊도록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전쟁은 어떤 식이든 일종의 계산 착오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양측 군대가 내린 모든 결정이 하나같이 잘못된 계산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에서 독특했다. 우선 미국은 극동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시킴으로써 다양한 공산주의 세력이 행동을 개시하도록 자극했다. 결국 소련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김일성에게 남한을 침략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은 이번 전쟁에 발을 디디면서 인민군의 저력을 무척 과소평가했으며 각지에서 미군의 승전 나팔소리가 연이어 들릴 거라는 부푼 기대를 안고 있었다. 그 후에는 중공군의 경고 신호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38선 이북으로 밀고 올라가는 무모함을 보이기도 했다. _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p1713/1912


 그렇지만, 잊혀진 전쟁이 남긴 유산은 지나치기에는 너무도 분명한 것이었다. 냉전 이후 경찰국가 미국의 역할을 결정지었다는 점에서도, 그리고 1953년 판문점 체제의 영향이 동아시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후 유럽 질서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세계전쟁으로서의 영향력을 한국전쟁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판문점 체제는,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추구한 자유주의적 평화 기획이 귀결된 궁극적인 제도적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판문점 체제는 중국의 개입 이후 부과된 정치적 압력하에서 한국 문제의 궁극적인 정치적 해결을 유예시킨 군사 정전 체제였다. 그리고 판문점 체제는 미국과 이승만의 협상의 산물로서, 한미 군사 동맹 체제 아래에서 경제 발전의 모델을 전시하려는 아이젠하워 근대화 정책의 대표 사례였다. 좀 더 일반화하자면, 판문점 체제는 칸트식 초국적 법치가 지향했던 보편적 영구 평화나 보편적 정의와는 거리가 먼, 특수한 상황에서의 안보, 특수한 동맹 체제하에서의 경제 발전이라는 매우 분명한 홉스적 기획의 산물임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_ 김학재, <판문점 체제의 기원> , p843/1282 


 독일의 재무장은 모두를 불편하게 하고 스탈린의 예기치 못한 반응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귀중한 자원을 재무장에 쓰기를 원하는 나라는 아무도 없었다. 무방비 상태의 대결 대신으로 중립이 지닌 매력은 독일과 프랑스에서 똑같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합리적인 반사실적 가정이다. 거의 일어나지 않을 뻔했기 때문이다) 실로 최근 유럽사의 윤곽은 매우 달라 보였을 것이다. _ 토니 주트, <전후 유럽 1945~2005 1>, p207/706


 그렇지만, 한국전쟁이 잊혀져서는 안될 이유는 이러한 세계적 영향력 때문만은 아니다. 또한, 우리가 현재까지 분단체제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도 아니다. 지도층들의  실수와 대립으로 결정된 전쟁과 국토의 양극단까지 전선이 움직이면서 발생한 수많은 민간인 희생이 '잊혀진 전쟁' 뒤에서 조용히 묻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기억해야 한다. 노근리 사건과도 같은 수많은 희생이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현실 속에서 적어도 우리는 한국전쟁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음 페이퍼에서는 이러한 수많은 단층을 가진 복합적인 성격의 전쟁인 한국전쟁이 왜 발생했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미국인이 가장 모르는 것은 그 전쟁이 섬뜩하리만큼 지저분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민간인 학살의 더러운 역사가 끼어 있는데, 북한을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로 보는 미국의 생각과 달리, 그 최악의 범죄자는 겉보기에 명백히 민주주의 체제였던 동맹국 남한이었다. 영국인 저자 맥스 헤이스팅스는 공산주의자들의 잔학 행위 때문에 국제연합이 한국에 "오늘날까지 지속된 도덕적 정통성"을 부여했다고 썼다. 그렇다면 남한의 잔학 행위는? 오늘날 역사가들은 남한의 잔학 행위가 훨씬 더 많았음을 알고 있다. _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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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법전은 프랑스 혁명의 주요 법적 승리들을 유지했지만─법 앞에서의 평등, 시민의 권리, 영주 특권의 폐지─가정생활의 영역에서 가부장제로의 후퇴도 의미했다. 재산 소유 중간계급에게 크게 유리하도록 옹호된 사적 소유권의 불가침성은 19세기 내내 프랑스 노동계를 괴롭히게 된다.

가장 중요한 조항은 로마 가톨릭교회에 1790년 이후로 몰수되거나 국유화된 교회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일체 포기하도록 요구한 조항이었다. 정교협약은 농촌 (그리고 보수적인) 지역에서 환영받았지만 군대에서는 인기가 없었는데, 여전히 혁명의 이상을 간직하고 있는 군대 내의 많은 이들은 제도 종교의 복귀에 대놓고 분노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실망감을 드러냈다

영국을 향한 대륙의 적의는 프로이센 외교관 프리드리히 폰 겐츠가 잘 요약했다. 그는 한 각서에서 "유럽 정치의 지배적 원리와 현재 모든 사상가와 정치 저술가들의 지배적인 원리는 영국의 힘에 대한 질시다"라고 썼고, 이 내용은 1800년 11월에 그렌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인용되었다. 영국을 향한 증오는 두 가지 확신에서 나온다고 겐츠는 주장했다. 하나는 영국의 부는 유럽 나머지 지역을 곤궁하게 만듦으로써 생겨난다는 확신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이 자국의 이해관계를 도모하기 위해 전쟁을 이용하고 있다는 확신이다.

아미앵 강화는 혁명전쟁의 공식 종결을 가져왔다. 2차 대불동맹이 이제 누더기가 되었으니 영국은 부활한 프랑스를 쓰러뜨릴 전망이 별로 없음을 시인했고, 그러므로 분하지만 프랑스가 저지대 지방과 라인란트, 이탈리아에서 정복한 땅을 계속 보유하는 것을 용인한 채 대륙의 현 상태를 대체로 수용했다.

유럽 국제 체제에 보나파르트가 가져온 유례없는 충격은 정치적으로 휘발성이 강한 프랑스 영역 내부에서 권력을 다진 다음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능력 덕분이었다. 1802년에 이르자 프랑스의 외교정책은 다음과 같은 핵심 요소들에 의존하게 되었다. 영국과의 계속되는 대결, 저지대 지방과 독일 영방국가들,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력 유지, 해외 식민 세력의 부활

생도맹그 원정의 실패는 프랑스에 즉각적인 결과를 야기했는데, 프랑스는 이제 가장 수익성 좋은 식민지와 카리브 해역의 상업 중추를 상실한 셈이었다. 더욱이 생도맹그 대참사는 대서양에서 프랑스 식민 제국 건설이라는 보나파르트의 웅대한 비전을 산산조각 냈다. 영국과의 새로운 전쟁이 거의 불가피한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는 새로 수복한 루이지애나 영토를 보호할 수 있을지 걱정이 컸다.

반면 프랑스는 훨씬 더 만만찮은 적수였고, 캐나다에 영국 세력이 현존하는 가운데 프랑스가 미시시피 밸리를 통제한다면 미국은 두 강대국에 둘러싸이는 형국에 직면할 것이었다. 일찍이 1798년에 일부 미국 지도자들은 예방적인 루이지애나 탈취 정책을 주창했고, 심지어 미국이 미시시피강 하구를 지배하는 것을 영국은 환영할 것이라는 진술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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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갈릴레오 시대, 공중위생의 역사에 관한 연구
카를로 M. 치폴라 지음, 김정하 옮김 / 정한책방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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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흑사병에 대한 학술적 지식은 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인도와 만주에서 발생한 전염병들에서 기원하였다. 항생물질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전 세기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흑사병에 대한 적절한 치료는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p98)... 흑사병이 극성을 부릴 당시 빈민계층은 가장 심각한 피해에 노출되었다. "사악한 병마로 인해 극빈계층이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사실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흑사병은 처참한 위생상태에서 살아가는 극빈계층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 _ 카를로 M. 치폴라,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p99


 카를로 M. 치폴라(Carlo Maria Cipolla, 1922 ~ 2000)의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Crictofano e la peste>은 흑사병이 창궐하던 17세기 이탈리아 소도시 프라토를 배경으로 한다. 병에 대한 지식과 치료법이 거의 없다시피한 상황에서 가공할 전파력을 가진 치명적인 질병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치밀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보건위원으로 임명된 크리스토파노. 그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흑사병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지만, 전염병에 대한 분명한 원칙이 있었다. 

 크리스토파노의 대처방안인 감염환자의 격리와 전염이 의심되는 물품에 대한 사후 처리 - 살균과 소각 - 는 COVID-19를 겪고 있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매우 효과적인 대처법으로 보여진다.


 크리스토파노의 '규칙'은 다음과 같았다.

 1) 감영된 것으로 의심되는 자를 모두 22일간 격리시설로 보낸다.

 2) 감염자들을 격리시설로 보낸다.

 3) 격리시설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요양병원으로 보낸다.

 4) 요양병원에서 22일간 격리한다. _ 카를로 M. 치폴라,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p67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모든 것은 경제적인 요인들에 대한 고려로 귀결되었다. 산업화 이전 시대의 사회는 근본적으로 빈곤했기 때문에 보건과 위생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들에 따라 물품들을 대대적으로 소각하는 것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오염이 의심되는 물품이 새것이거나 가치가 높은 것이면 살균하였다. 하지만 낡고 가치가 적은 물품들을 불태워졌다. _ 카를로 M. 치폴라,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p81


 감염환자들에 대한 치료단계 대처뿐 아니라 예방단계에서 행해진 조치들은 과거 2년간의 '사회적 거리두기'의 오랜 역사성을 보여준다. 사료에 남겨진  전염병 대처법들은 오늘날 보건위생학의 기준이 되었을 것이며, COVID-19초기 단계 우리 정부의 대응에 대해 외신들이 극찬한 근거가 되지 않았을까.  


 1630년 1월 초반 피렌체 보건 당국은 공국의 모든 영토를 대상으로 '통상적인 격리기간'을 공고하였다. 이것은 흑사병에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한 전형적인 조치였다. 즉, 사람들의 이동을 제한하고 주민들을 집에 머물게 하며 격리기간에 그 어떤 모임이나 집회도 금지하는 것이었다... '통상적인 격리기간'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었으며 실제로도 격렬한 토론이 있었다. 전염자와 보균자로 의심되는 자들을 신속하게 격리시키는 조치가 동반되었다면 모임을 금지하고 이동과 접촉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은 최선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_ 카를로 M. 치폴라,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p90


 잘 알지 못하는 전염병에 대해 최선의 대응책을 고안한 크리스토파노였지만, 그의 적은 감염병만은 아니었다. 크리스토파노를 괴롭힌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의 심리와 그를 둘러싼 사회제도에 있었다. 긴급한 상황에 지급되는 '생계보조금'을 더 받기 위해 사망신고를 하지 않는 이들과 이로 인해 더 퍼져가는 흑사병,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공익을 해지는 집단 간의 알력과 다툼, 부족한 자원 속에서 예방과 치료를 이어가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크리스토파노와 동료들의 노력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의학에 대한 무지와 대중의 협력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경제사학자의 관점에서는 보건소 관리들의 노력이 실패한 원인이며 적절한 경제적 자원의 결핍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크리스토파노 체피니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어리석은 투쟁에서 '희망의 빛'을 상실했다. 그와 동료들의 처절한 노력은 무지, 어리석음, 완고한 고집 그리고 사람들의 부주의함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이 뿐만이 아니었다. 크리스토파노는 많은 경우에 있어 (경제적) 자원의 부족으로 좌절해야만 했다. _ 카를로 M. 치폴라,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p122


 분쟁, 부정부패, 규정위반, 지루한 언쟁, 일련의 수많은 어려움과 문제들. 병원의 관계자들에게는 쉴 틈이 없었다. 그러나 환자들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는 계속되었다. 병원 관계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들의 보고서에는 정신적 피곤과 불안감이 지속적으로 목격되었다. 위기의 순간마다 사람들의 의식 속으로 파고드는 심각한 고독감과 의심으로 인한 좌절감은 보다 큰 결정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감으로 드러났다. 프라토 보건위원들이 역사에 남긴 심리상태에서 또 다른 동기는 고통스런 절망감이었다. 사람들은 무지함 때문에도 제약과 통제에 견디지 못하기 마련이다. _ 카를로 M. 치폴라,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p50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에서 놀라운 점은 17세기 흑사병을 겪은 사회의 모습과 21세기 코로나를 경험하는 사회의 모습이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변이를 통해 진화(進化 evolution)하는 바이러스와 몇 세기가 지나도록 의학기술 외에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인류 공동체와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과연 인류 사회의 진보(進步 progress)를 낙관할 수 있을까.


 인류 역사를 통해 개인의 욕심에서 벗어난 성인들이 없지 않았지만, 이들의 깨달음이 공동체 전체로 확산되지 못하고 개인의 죽음과 함께 소멸된 역사를 보며 앞으로 더 큰 재난이 닥쳤을 때 우리가 한결 성숙한 자세로 대처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아니면 크리스토파노는 경제적 어려움에서 좌절했다면, 우리의 노력은 경제적 어려움이 아닌 정치적 한계로 무너졌다는 점에서 위안을 삼아야 할 것인지... 치폴라의 얇은 책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은 코로나 19 상황이 종결되는 시점에 있는 우리에게 여러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크리스파노가 자신의 글에서 말한 ‘실수‘는 ‘부정부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격리기간이 지난 후에도 일상의 생계보조금을 기대하면서 집안에 머무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건위원에게 주어진 임무들 중 다섯 번째와 관련해 보건소 관리들에 따르면 집안에서 사망한 자들은 곧바로 보고되지 않았으며 도시정부는 계속해서 이들에게 일상의 보조를 하였고, 이렇게 해서 부당하게 지급된 생계보조금은 관련 직원이나 죽은 자가 또는 양측이 함께 착복하였다. - P62

1631년 2월 25일, 피렌체의 보건 당국은 이 병원의 총독이 격리병원에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p71)... 인간적인 충돌과 관료정치의 분쟁으로 인해 격리병원의 상황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결국 1631년 6월, 병자와 요양병원의 환자들에게 필요한 많은 물품들이 공급되지 않음에 따라 세속구호단체인 베네란다 콘프라테르니타델 펠레그리노(Veneranda Confraternita del Pelegrino)는 프라토 보건소의 관리들에게, 격리병원과 요양병원의 환자들이 머물고 있는 주택들에 대한 관리와 물품 공급의 행정업무를 자신이 수행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로써 오랫동안 크리스토파노를 괴롭히던 문제가 해결되었고 환자들에 대한 대우가 크게 개선되었다. 한편 몇 달이 지나자 전염병의 기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 P73

보건소 관리들이 주목한 최대의 기준은 격리기간을 줄이는 것보다 예방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통제되지 않은 일련의 요인들이 계속해서 발생하였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보건소의 규정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다른 이유들과 전혀 다른 사고들 때문에 대부분의 주민들은 모든 규칙들에 대해 불편을 느끼고 있었다. 프라토에서는 격리병원의 환자들까지도 격리규정을 지키려들지 않았다. 게다가 공중 보건의 필요성에 상충되는 이해관계들이 존재하였다. 상인들은 전염병에 오염된 지역과의 교역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지키려들지 않았으며 보건소 직원들이 설정한 예방조치들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예외의 특권을 획득하였다. 교회는 종교행사와 기도회를 금지시키는 행정조치들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저명인산들의 이기주의와 천박함은 보건소 관리들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 보건소 관리들 역시 당대의 전형적인 사고에 의한 미필적 희생자들이었다. - P119

흑사병은 삶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재앙도 초래하였다.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지역시장의 위축과 특히 공중보건 상 격리 지역의 설정으로 외부상인들과의 접촉이나 거래가 차단되면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피렌체 대공국의 경제정책은 공국 내의 소도시들에는 피해를 주었던 반면 피렌체의 수공업 분야에는 매우 유리하였다. - P103

보건소 관리들은 전염병에 대항하면서 막중한 책임을 수행했으며 몇 달 동안 걱정, 피로, 위험 속에서 살았지만 아무런 보수도 받지 못했다. 이들에 비해 별로 고생하지 않은 자들은 봉급과 ‘사례금‘을 받았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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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22 21: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중세에도 저런 식의 전염병관리를 생각한 사람이 있었군요. 흑사병하면 거의 어쩔줄 모르는 상황에 신을 부르는 모습만 연산이 되는데 말이죠. 저는 오히려 실패했을지라도 크리스토파노와 같은 노력이 공동체의 기억속에 새겨진다고 생각해요.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가 그래도 안 망하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요. ^^

겨울호랑이 2022-06-22 23:14   좋아요 1 | URL
움베르트 에코가 <중세> 시리즈 서문에서 현대인들이 중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고 한 말이 생각이 납니다. 무식하고 단순한 기사와 기도 밖에 알지 못하는 수도자. 중세를 대표하는 두 계급의 모습으로 우리가 중세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근대가 르네상스에서, 르네상스가 중세로부터 나왔다는 사실로 보면, 지금과는 배경이 많이 다르지만 배경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마음은 오늘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