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보수당의 이론가였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보수의 정체성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보수는 끊임없이 개혁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조중동’은 문재인정권 내내 기득권 수호, 곧 수구의 논리를 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진보 논객 리영희의 책 제목이 말해주듯, 보수와 진보가 서로 경쟁해야 사회발전의 동력이 확보될 수 있다. 이때 필수요건은 진정성이다. 진정한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이 양립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대변할 수 있는 진정한 보수언론과 진보언론 또한 양립해야 한다.

서구 정당과 언론의 또 한가지 특징은 일관성이다. 유럽에는 ‘백년 정당’이 숱한데, 한국의 정당들은 선거에서 지면 정당 이름부터 바꾼다. ‘정론지’를 자처하는 우리 수구보수언론의 논조는 더욱 변화무쌍하다. 촛불정부의 최대 개혁과제였던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이르기까지 일관성과 객관성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시종일관하는 것은 정파성이다.

대부분 종편은 ‘종합편성채널’이 아니라 편향적인 ‘정치전문채널’이 되어 선거 때면 거의 일방적으로 국민의힘 후보 편을 들고 민주당 후보를 적대시했다. 이번 대선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울어진 언론지형이 민주당의 대선 패배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국회 180석을 가진 정치세력이 언론개혁과 검찰개혁이라는 양대 개혁과제 중 특히 언론개혁에는 손도 못 댄 상황에서 또 표를 달라고 그 손을 유권자에게 내밀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의 보도 행태, 특히 이번 대선국면의 보도 태도를 보면 부정적 측면이 너무나 많이 드러난다. 선거판을 좌우한 것은 후보의 역량이나 정책 차이가 아니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선수로 뛰는 언론의 편파보도가 선거판을 흔들고 여론조사가 밴드왜건(bandwagon) 효과를 냈다. 일부 언론은 특정 정당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한 몸처럼 움직이고, 선거전략을 제시하며 정당의 머리 구실까지 했다

모든 자유는 자유권의 내재적 한계 때문에 제한될 수밖에 없고, 특히 언론에는 책임성이 강조돼야 한다. 언론의 자유는 언론사주의 자유나 기자의 특권이 아니라, 시민의 권리로 발전해온 것이다. 그럼에도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쪽으로 언론의 자유가 악용되고 있다. 우리는 독재정권 시절 언론의 자유를 너무도 갈망했기에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라는 신화에 빠져버렸다. ‘남의 인권을 침해할 자유’ ‘가짜뉴스로 명예를 훼손할 자유’는 없는데도, 기득권 언론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언론개혁에 한사코 반대했다.

언론현업단체들이 주장하는 ‘자율규제’는 어찌 보면 형용모순이다. 대형 언론사들은 편파·왜곡·선정보도를 일삼는 조직인데다, 조선NS와 같은 온라인 뉴스 자회사까지 만들어 포털을 통해 거액을 벌어들이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자율규제로 극성스러운 상업주의를 제재하겠다는 것은 언론 현실을 외면하고 ‘환상’을 좇는 것이다.

『르몽드』(Le Monde)의 전 발행인 콜롱바니(J. Colombani)는 "언론에 두 주적이 있는데 하나는 돈, 하나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재정이 중요한 건 당연하고, 시간과 관련해서는 인터넷과 포털을 중심으로 속보성이 중요해짐에 따라 진지한 언론이 밀리고 있다는 시각이다. 한국에서는 포털이 진지한 언론의 적이 되고 있다. 진지한 언론은 건전한 공론장을 조성하고 숙의민주주의를 꽃피우는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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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인지 능력을 갖춘 호모 사피엔스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면서부터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우월한 사냥 능력과 더 정교해진 새로운 무기도 있었지만, 사냥감과 인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은것은 무엇보다도 이성적인 사고였다.

적어도 1만 5,000년 전, 인간과 늑대의 관계는 친숙함과 존중에서 협력과 동료애로 발전했고, 그 후손은 인간 가족의 일원이 된 첫 번째 동물이었다.

약 1만 2,000년 전부터 사람들이 가축을 길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염소, 양, 돼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까지, 현재는 일반적인 가축이 된 동물들은 서로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길들여졌다. 역사를 뒤바꾼 동반자 관계는 양쪽 모두에게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동물의 권리에 대한 관심이 가축 사육장과 실험실까지 확장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오늘날에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동물의 권리를 더 넓은 시각에서 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인간이 역사를 형성하는 과정에 도움을 준 동물을 억압하고 학대한다. 현재 인간은 대부분의 동물을 종처럼 부리거나 먹거나 착취하고 있다. 도덕적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이 과정을 계속해야 할까? 아니면 변화를 모색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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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편린 - 수학의 눈으로 예술 바라보기 경문수학산책 30
이바스 피터슨 지음, 김승욱 옮김 / 경문사(경문북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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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편린》의 저자 이바스 피터슨은 위성수학의 기초를 통해 수학에 내재된 예술적 감성과 예술에 구현된 이성적 질서를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책을 읽으며 독자들은 대수학과 기하학을 통해 순수사유와 법칙을 찾아내는 수학과 순수사유를 형상화하는 예술(특히 미술)은 뫼비우스 띠, 클라인 병과 같이 구분할 수 없는 두 세계의 연관성을 즐길 수 있다.

또한, ‘발산‘이 아닌 한없이 ‘수렴‘하는 무한소의 특성은 현실에 수학의 개념을 형상화하는 반면, 시공간의 제약 아래에서 구간 내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대칭(프랙탈 구조, 망델브로 집합), 전체 구간에 적용되는 질서는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조화를 보여준다.

이와 함께 수학의 다차원 이론을 3차원 이하에서 보여야하는 예술의 현실적인 문제는 이데아의 학문인 수학과 감각의 학문인 예술간 엄연한 간극이 있음도 함께 보여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예술로서의 수학(또는 수학으로서의 예술)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그것은 거대한 기하학적 철골 구조물의 형태가될 수도 있고, 무지개 색으로 빛나는 프리즘 구조의 조각품이 될 수도 있으며, 4차원으로 들어가는 창과 같은 역할을 하는 밝은색의 직사각형과정사각형 그리고 선들로만 만들어진 그림, 또는 컴퓨터 화면 위에 거친 산봉우리와 계곡이 나타나는  생생한 풍경화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위에 열거한 것 외에도 다른 많은 예를 보면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수학의 창조성이 예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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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6-06 21: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런 것 같습니다. 수학의 창조성과 예술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둘 다 임의적이란 측면에서요. ^^

겨울호랑이 2022-06-06 21:33   좋아요 1 | URL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수학 역시 공리와 공준이라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약속에 기반한 학문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수학 역시 완전히 객관적인 학문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예술은 너우도 당연하겠지요...^^:)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다음과 같이 수학적 예술성에 대해 설명하였다. "제대로 검증된 수학은 냉엄한 아름다움과 엄격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불분명한 자연에 의지하지도 않고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술적 도구도 없이 오로지 최고의 예술가만이 나타낼 수 있는 장엄한  순수함과  빈틈 없는 완벽함으로 만들어진 작품과도  같은 것이다." - P20

많은 사람들은 예술과 수학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고 여긴다. 수학에서 나타나는 차갑고 딱딱한 법칙과 논리적 엄격성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나 열정과 같은 감정, 그리고 예술에서 볼 수 있는 상징적인 표현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과 감성 사이의 벽은 보기보다 그렇게 완고하거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멀지는 않다. 사람들이 수학과 예술 모두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강제성과 자유가 적당히 조화된 훈련과 안목이 둘 다 필요하다. - P29

"바흐를 듣기 위해서 마음을 여는 순간 아름답고도 자연스러운 규칙이내 마음속에 화음을 이루는 것처럼 내 작품들은 마치 음악의 대위법처럼커다란 규칙에  맞추어 공간  안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체 논리의 상호작용, 환경과 절차를 만들어가는 혼합물이었다."고 페리는 말한다. - P183

구는 어떤 각도에서 보든지 똑같이 보이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무한히 많은 대칭축이 있지만 사면체는 그 반대로 순수 조형물중에선 가장 적은 대칭축을 가지고 있다. 사면체에는 양면성도 있는데 스스로 양면성을 가진다는 것은 사면체에 있는 네 개의 삼각형 면의 중심이  또 다른 사면체의 꼭지점이 된다는 의미다. 대조적으로, 육면체에 있는 각 면의 중심은 팔면체의 꼭지점이  되고 그 역도 성립한다. 따라서 육면체는 팔면체와, 그리고 팔면체는 육면체의 양면을 이룬다. 비슷한 관계가 20면체와 12면체에도 해당된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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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도시들 2 - 권력과 제국주의 케임브리지 세계사 6
노먼 요피 외 지음, 류충기 옮김 / 소와당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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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는 낯선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였고, 군사적 보호의 핵심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원이 있는 곳이었다. 국가는 도시를 관리하는 행정 체계였고, 그에 따른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었다. 더불어 의례, 행사, 물질문화가 도시의 진화와 함께 만들어졌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속에서 도시, 통치자, 노예, 불평등은 당연하며 영원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425


 케임브리지 세계사 6 <고대의 도시들 2 : 권력과 제국주의 Cambridge World History Vol. III>는 세계 여러 곳에서 생겨난 도시라는 공간에 표현된 권력(power)과 권력 집중화의 정점 제국(帝國 Empire)을 다룬다. '도시'라는 특정되고 한정된 공간에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한정된 공간적, 물질조건으로 인해 이들은 정치적으로 불평등한 권력 관계로 연결되었다. 고대의 도시는 이렇게 태어났다.


 그렇지만, 이들 도시들 모두가 같은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다. 어느 지역에는 왕의 세력이 강했던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그보다 하부의 엘리트 층의 권한이 더 강했다. 어느 도시는 보다 더 크게 더 오래 번성했지만, 다른 도시는 얼마 되지 않아 역사 속으로 소멸되어갔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냈을까. <고대의 도시들 2>에서는 일차적으로 도시의 모습을 결정하는 요소로 '자연(nature)'과 자연이 만들어낸 기후를 말한다. 농경 중심의 도시국가에서 자연조건은 결정적이었으며, 여기에 따라 권력 관계가 설정되었고, 권력관계는 도시의 형태를 규정했다. 


 지도자, 권력,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은 우루크의 아이콘이나 텍스트에서 상당히 두드러진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인더스 지역에서는 그런 면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p52)... 아마도 이들 지역에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었겠지만, 인더스 지역의 다양한 공동체에서 엘리트 계층의 권력 및 권위가 훨씬 폭넓게 분배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 같은) 단일한 "왕권" 중심의 행정 체계가 인더스 지역에서는 끝내 형성되지 않았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53 


 인더스와 갠지스의 물리적 및 문화적 풍경은 전혀 달랐다. 하나는 인더스 지역에서 넓게 펼쳐진 시공 경관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갠지스-야무나 평원의 도시가 밀집된 경관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소수의 몇몇 도시와 훨씬 더 많은 수의 소규모 정착지로 구성된 인더스의 시대는 700년에 불과했고,  그 뒤 인더스 전통은 쇠락하여 사라져버렸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66


 자연환경은 도시의 입지와 권력관계에 영향을 미쳤지만, 도시의 형태와 성격을 결정할 때에는 '전통'과 '건축'이 새로운 요소로 등장한다. 도시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라고 하는 이들 요소들은 의례(儀禮)를 만들어 내고, 의례는 정기적으로, 비정기적으로 공간속에서 재현되며 세대 내에서는 집단의 기억을 유지강화시키고 세대 간에는 전승되며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역할을 하며 도시의 생명력을 이어갔다.


 카호키아의 몰락은 아마도 상당 부분 기억 작용(memory work)의 물질성(matceriality)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기억 작용의 물질성이란 물리적으로 표현된 문화의 근간을 말한다. 즉 모든 인류 문화는 (정치 제도, 정체성, 도시 구조 등등)는 기억 작용(사회적 기억을 드러내기 위한 물건의 생산, 공연, 의례, 혹은 기억의 제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뿌리를 기억 작용의 물질성이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물질성은 언제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 혹은 마을에서 전해지는 전통이라고 하는 것의 핵심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256 


 공간의 목적은 도시의 모든 사람이 아니라 일부에 의해 실현되었다. 그것은 도시 공간과 기념비적 건축물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었다. 분명 도시 공간의 감각적 차원도 존재했다. 도시의 물건, 도시의 물질적 특성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경험은 사람들마다 달랐다. 그들이 누구인지, 도시에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따라 이해와 경험의 성격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도시 공간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도시에 알맞게 훈련되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세속적 감각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기념비적 기억으로 받아들여졌다. 말하자면 도시는 수많은 지식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도시에서 익숙하게 길들여진 육체는 그것을 제2의 본성으로 받아들였다. 체화된 관념과 통치가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정치적 권위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267


 도시가 내부적으로, 시간적으로 이같이 발달되었다면, 외부적으로 공간적으로의 확장은 제국(帝國)의 형태로 나타났다. 다만, 도시국가에서 도시가 왕국의 중심이었다면, 제국의 중심으로의 도약은 또다른 문제였다. 새로 병합된 지역의 중심으로도 자리하기 위해 제국의 수도로서 아슈르, 니네베, 로마 등 제국의 수도는 새로운 신전(神殿) 건설로 끊임없이 건축되어야 했다. 과거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공간적 확장을, 제국의 이념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재건설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살아남은 제국의 수도들은 끊임없이 바뀌었음을 <고대의 도시들 2>는 보여준다.


 도시국가(아슈르 Assur)에서 아시리아(Assyria)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주민의 생활에는 뚜렷한 변화가 생겨났고, 도시에는 왕국의 수도라는 성격이 부가되었다. 예전의 전통적인 수도 아슈르는 더 이상 왕국의 정부 소재지가 아니게 되었고, 몇몇 왕들이 아시리아 핵심 지대에서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이러한 변화를 거치면서 인구 압력이 높아졌고, 경제가 성장했으며, 안전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리고 왕국의 권위를 세우고자 하는 시각적 수요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에 못지않은 아시리아 왕들의 욕망도 있었다. 그들은 오랜 라이벌이었던 바빌론(BAbylon) 왕국을 규모나 화려함, 그리고 종교적 명성에서 능가하고자 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318


 제국의 도시들은 거대한 도시 계획으로 다른 도시들과 달리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었다. 광장, 시장, 도로, 정원, 놀이 공원, 성문, 아치 등은 기능적 역할뿐만 아니라 상징과 홍보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거대 규모의 인원이 종교 및 정치 행사에서, 상거래에서, 축제 혹은 여흥을 즐기는 과정에서 이러한 시설들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상업과 사회적 교류도 수도에 집중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러한 활동을 위한 공간이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도시의 우수성은 이미 기념비적 건축물과 세련된 예술 작품으로 충분히 과시되고 있었지만, 여기에 덧붙여 굉장히 넓고 인상적이며 잘 정비된 대중적 공간을 통해 도시의 위용은 더욱 빛났다. 기념비적 건축물과 잘 정돈된 도시 구획을 나누는 도로는 여느 도시보다 더 넓고 튼튼하게 건설되었다. 도로들은 궁전, 사원, 피라미드, 성문으로 연결되었다. 이는 대규모 행진을 염두에 둔 설계였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401


 제국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구성원을 함께 묶어내는 일이 아마도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였을 것이다. 정복 당시에는 강제와 위협이 결정적 수단이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는 그 무, 즉 전형적으로 이데올로기와 종교의 영역에 속하는 성과 없이 오래 살아남을 제국은 없었다. 권력 중심부에서는 제국의 모든 구성원에게 신앙을 합법화 및 정당화하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407


 <고대의 도시들 2>에서는 이처럼 도시의 탄생과 지속 유지, 발전과 쇠퇴에는 자연과 인간문화의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조합이 적절한 시대의 변화에 맞았을 때 도시는 번성했고, 그렇지 못했을 때는 쇠퇴하고 사라졌다.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CH, 1889~1975)는 '도전과 응전 challenge and response'으로 간략하게 요약하지만, 응답에 대한 정답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각기 다른 환경에 적절한 대응이 문명의 존망을 결정한 역사 속에서 플라톤(Platon, BCE 428 ? ~ 348 ?)

이 <국가 Politeia>에서 제기한 '최선의 정체(政體)'에 관한 논의를 생각하게 된다. 과연 이상적인 정체가 있을까. 그런 이데아(Idea)가 아닌 오직 민의(民意)만이 있었던 것은 아닐런지. 이와 함께 우리가 공식적으로 알고 있는 '중앙집권화'가 과연 정체의 발전형태인지에 대한 물음을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정치요소들이 당시에는 일시적인 약속 또는 일부 지역에서만 제한적으로 인정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권(自然權, natural rights)으로 인정되며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이에 대한 답은 이후 역사를 통해 보다 상세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기존 고고학에서 말하는 도시의 기준은(그리스 도시들만 예외로 하고) 다음과 같았다. (1) 화려한 궁전에 거주하고 제한된 세습 엘리트에 속한 왕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 (2) 중앙 통치 기구 혹은 강력한 종교 기관(국가 종교)이 존재해야 한다. (3) 엄격한 위계질서에 입각한 행정 체제에 따라 통치되어야 한다... 고대 문명과 관련한 여러 가지 선입관이 형성된 첫 번째 이유는, 동양은 전제 군주의 횡포 아래 놓여 있었다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오랜 유산 때문이었다. 오리엔탈리스트에게 동양(East)은 강력하고 폭압적인 전제 군주나 성직자에 의해 통치된 "타자(other)"였던 것이다(p144)...  두 번째 이유는 식민지 경영의 일환으로 투입된 고고학의 역사 때문이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146

제니-제노에서는 국가와 유사한 체제를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도시가 형성되고 시간이 지난 뒤에도 상명하복과 엘리트 주도의 정치 행위가 도시를 지배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왕, 사원, 궁궐 등을 볼 수 없었으며, 엘리트 계층조차 분명히 확인되지 않았다. 니제르강 중류 지역에서 기원전 제1천년기 말엽 및 그 이후 시기 도시의 정치/경제 조직은 수평 연결(heterarchical) 구조였다. 즉 집단별 정체성은 구분되었지만, 때로 서로 중첩되기도 했지만, 권위의 영역은 전적으로 상호 작용의 과정에 놓여 있었고, 왕과 백성의 수직적 위계질서나 일방적 정보의 유통 과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 P123

권력의 중심이 동시에 다원적으로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도시의 대규모 협력과 조정이 필요한 활동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더스 지역에서 도시를 형성한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거대한 공공 시설을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막대한 노동력을 조율해야 했다. 그래서 방대한 규모의 도량형 표준 제체를 발달시켰다. 이를 통해 인더스 지역의 정착지들 사이에 경제적 교류가 가능해졌다.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거리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상품이 같은 범주에 포함될 수 있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이와 같은 도시 공간은 성공적이었고, 도시의 주민은 조직 구조와 화해 조정 시스템을 만들어서 수백 년 동안 도시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들의 성공과 회복력은 오히려 경직된 조직과 관계의 구조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수도 있다. - P154

도시라면 어디서나 상상력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전설과 전통과 제도를 어떤 식으로 경험하고 계획할지는 상상력에 달려 있다. 상상력은 유형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무형의 과정으로 드러난다. 사람들은 공간 속에서, 그리고 능력 범위 내에서 계획을 세우고, 경험을 하고, 상상을 한다. 이러한 과정은 명백한 역사적 의미를 내포한다.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도시의 지속성은 도시 설계에 영향을 받는다. - P281

주기적으로 조공 물품이 수도로 흘러들고, 그에 따라 의례와 정치적 과정을 통해 소비가 되면서 메소아메리카 전체가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조공품 물동량의 상당 부분이 테노치티틀란 반경 400킬로미터 이내에서 움직이며 멕시코 평원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 때문에 아스테카의 배후지는 주식 작물과 부가 고갈되어 자원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조공 체계를 따라 물품이 흘러드는 반대편 끝에서는 엄청난 수량의 다양한 물건이 멕시코 평원의 인구를 풍요롭게 했다. 이데올로기적 의례 과정을 통해 잉여 물품이 흡수되었고, 특히 사치스러운 의례와 축제의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물품이 소비되었다. - P340

초기 도시의 성장과 규모, 왕궁의 출현과 고도로 계층화된 작업 구역 및 묘지 구역, 거대 구역을 둘러싼 성벽 등을 근거로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왕과 (국가 수도로서의) 도시의 거대한 권력을 설명하게 된다. 그러한 설명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왕의 권력이 경쟁 상대 없이 절대적이었다거나 그 권력을 통해 정부와 도시가 안정화되었다고 곧장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게다가 수명이 길지 않았던 도시들, 그리고 상나라 말기의 왕들이 배후지를 통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복전에 나서야 했던 일을 고려할 때 기원전 제2천년기 중국 도시의 정치 구조는 매우 불안정했다. - P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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