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우리를 위해 괴로워하거나 기뻐할 가능성이 있다고 느끼면, 그 사람은 마치 다른 우주에 속한다는 듯 시(詩)로 둘러싸이고 우리 삶은 감동적인 영역으로 변해, 우리는 그 영역에서 조금쯤 그 사람과 가까워진다.

음악이 그에게 준 기쁨, 그리고 머지않아 그의 마음속에서 진정한 욕구를 만들어 낼 기쁨은, 사실 그 순간에는 여러 향수를 실험할 때 느끼는 기쁨이거나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어떤 세계,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형태가 없으며 우리 지성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오로지 우리 감각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와 접촉할 때 얻는 기쁨과도 흡사했다. 미술 애호가의 섬세한 눈으로도, 또 풍속 관찰자의 예리한 정신으로도 메마른 삶의 지울 수 없을 흔적을 영원히 간직한 스완으로서는, 인류에게 낯선 피조물, 논리적인 사고력을 빼앗긴 눈먼 거의 환상적인 유니콘처럼 오로지 청각으로만 세상을 지각하는 전설 속 피조물로 변신했다고 느끼는 것은, 일종의 ‘커다란’ 휴식이자 신비로운 쇄신이었다.

그는 밤에만 오데트의 집에 갔으므로, 그녀의 과거를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낮에 어떻게 보내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을 상상하게 해 주고, 알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기초 지식마저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었는지, 그녀의 과거 생활이 어떠했는지도 물어보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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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 교환의 세계 -하
페르낭 브로델 지음, 주경철 옮김 / 까치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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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구분이 여기에서 핵심적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시장 그자체의 미덕과 "합리성"을 갖다붙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실 마르크스와 레닌도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가끔 그런 식의 언급을 했다. 그래서 독점의 발달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발전이며 후기 자본주의의 결과물로 본 것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체제가 봉건제를 대체했을 때 그것은 진보를 낳는 "생산력과 사회관계의 발달에 더 유리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희생시키면서 사회적인 진보를 독점하는 제약이 마침내 존재하지 않게 될 발전단계를 배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명화"를 가져오는 체제"였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828


 레닌은 여기에 첨가하여 이렇게 말한다. "사실 독점은 자신이 거기에서 유래한 자유경쟁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다. 독점은 자유경쟁의 위에서 그리고 옆에서 공존한다." 이 점에서 나는 완전히 그의 말에 동의한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829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1985)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Civilisation Materielle, Economie et Capitalisme 2-2>에서 시장경제에서 자본주의가 태어나게 되는 여러 조건에 대해 언급한다. 경쟁이 이루어지는 교환시장경제에서 독점적인 자본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불평등'이다.


 유럽에서는 11세기에 경제가 깨어나면서부터 불평등이 더욱 현저해졌다. 레반트 무역에 다시 참여하기 시작한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는 대상인 계급이 확고히 자리를 잡아갔고, 이들은 곧 도시 지배귀족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계서화는 다음 세기들 동안 경제가 번영할수록 더욱 굳어졌다. 금융업은 이러한 발전 중에서도 최상층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529


  상품의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교환만을 전문으로 하는 상인(商人)계층이 등장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거래를 담당하는 대상인이 출현했다. 문제는 일반 상인들과 대상인들 사이에 적용되는 '게임의 규칙'이 다르다는 점에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재력을 바탕으로 더 좋은 조건으로 자금을 빌릴 수 있었고, 여러 혜택을 무상으로 제공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혜택은 그들에게 더 많은 부(富)를 가져다 주었으며, 더 많은 부를 통해 자신들의 사업영역을 넓혀나갈 수 있었다.


  자본주의적인 성공이 돈에 달려 있다는 말은 이때의 돈을 모든 사업에 필수적인 자본의 뜻으로만 보면 그야말로 하나마나한 소리이다. 그러나 이때의 돈이란 투자 자본 이외에도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보증과 특권, 공모와 보호 등의 여러 가지 것들을 가져다주는 사회적 고려를 의미한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541


 그런데 이상한 일은 대상인들은 이 법칙을 따르지 않아서, 한 업종에 전문화하는 일이 대단히 드물다는 점이다. 심지어 상점주도 큰 돈을 벌어 대상인이 되면 곧 전문화를 포기하고 비전문화의 길을 간다(p534)... 대상인이 된다는 것, 혹은 대상인이라는 것은 모든 상품이라고는 못 해도 적어도 많은 상품을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럴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의무를 진다는 것을 말한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535


  자본에 적용되는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와 비전문화를 통한 위험 회피는 사업 포트폴리오(portfolio)구성을 가능케 했으며, 이러한 사업의 다각화는 시대에 따라 빠르게 변화하는 유행품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게 하며 점차 시장에서의 독점(獨占)적 지위를 차지하는 자본들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결국 교환시장에서의  활용할 수 있는 신용거래의 차이가 극복할 수 없는 틈을 만들어내는데, 이를 위해서는 시장경제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모든 상인들의 장부에는 상품 계정 외에 채권계정과 채무계정이 함께 있다. 채권과 채무 양자 사이에 균형을 지키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만, 이 형태의 크레딧을 포기하지 않는 것도 현명한 일이다. 그 결과 이 크레딧은 교환 총량의 4~5배가 된다. 모든 상업체제가 여기에 의존한다. 이 크레딧이 멈추면 상업에 힘을 주는 모터가 마모되다가 결국에는 서버리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상업체제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그 속에 내재해 있는 크레딧이라는 점이다 - 이것은 내부 크레딧이며 이자가 붙지 않는다. 이런 현상이 유별나게 활발한 곳이 영국이었으며 그것이 영국이 번영을 누리는 비밀이었다. 대상인은 이 내적인 편익을 통해서 이익을 보고 또 고객들에게도 이익을 준다. 그렇지만 대상인은 그 외에도 대부업자나 자금주라는 외부의 크레딧도 정규적으로 이용한다. 이것은 다름 아닌 현찰을 빌리는 것이며 여기에는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 이것이 핵심적인 차이다. 이 돈을 사용하는 상업거래는 결국 이자율보다 훨씬 높은 이윤율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542


 이러한 시장경제의 불평등은 금융거래를 통해 대자본형성을 가능케하며, 퇴장(退藏)된 자본은 보다 높은 이윤율을 보장하는 곳을 물색하게 된다. 이러한 자본의 욕구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것이 바로 근대국가(國家)다. 근대국가는 중세의 봉건제와 교회조직과 같은 계서제(階序制)의 연장선상에 있는 조직으로 중앙집권화된 군주제의 형태로 등장하게 된다. 중세 귀족정에 대항하는 군주와 새롭게 등장한 부르주아(bourgeois)의 결합은 바로 자본을 통해 이루어졌고 실현되었다.


 국가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국가의 권위가 커지고 다양해지면서 그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이제는 지난날처럼 국왕 직할 재산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다. 따라서 유동적인 부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일정한 종류의 자본주의와 일정한 정도의 국가의 근대성이 동시에 시장경제의 틀 안에서 구성되었다. 이 두 가지 운동 사이에는 단순한 일치 이상의 것이 있다. 핵심적인 유사성은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계서제의 형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유사성으로는 국가도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부유해지기 위해서 독점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741


 회사(會社)의 형태로 응집된 자본은 초기 원거리 무역을 주도하였으며, 원거리 무역을 통해 자신의 규모를 키워가면서 파트너인 군주에게는 영주들을 제압할 수 있는 무력과 재력을, 자본가들에게는 막대한 이윤을 독점적으로 제공하게 된다. 이는 특히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에서 효과적으로 기능했다.


 어느 한 회사의 독점은 세 가지의 것이 맞아 떨어져야 가능했다. 국가가 그 첫번째이다. 국가는 비교적 효율적이고 결코 뒤에서 그냥 물러서 있지 않는 존재이다. 다음으로 상업세계 - 즉 자본, 은행, 크레딧, 고객 등 - 가 있는데 이것은 독점에 적대적이거나 거기에 공모하거나 둘 중 하나이지만 혹은 동시에 그 두 가지를 겸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원거리 무역의 대상이 되는 지리적인 권역인데 이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이 결정된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631


 원거리 무역이 의심할 바 없는 우위를 가지게 되는 까닭은 이것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거리 무역은 집중을 가져오고, 반대로 집중은 원거리 무역으로 하여금 자본을 재생산하고 나아가서 빠르게 증대하도록 하는 더할 나위 없는 도구가 된다. 그러므로 독일 역사가들과 모리스 도브가 이야기했듯이, 원거리 무역이야말로 상업자본주의를 창출하고 나아가서 상업 부르주아지를 창출한 핵심적인 도구였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574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에서는 성숙한 시장경제에서 출현한 독점자본이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위험이 높은 뭔거리 사업을 독점하고, 시장지배력을 가지고 점차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러한 시장경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의 내용과 비추어보면, 재벌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모습은 결코 후진적인 자본주의 기업의 모습은 아니다. 다각화된 사업구조와 정치권과의 결탁 등의 모습은 오히려 궁극적인 대자본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자본주의는 결코 후진적이지 않다. 오히려, 앞선 궁극의 자본주의 대기업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문제는 시장경제 부분에서 발견된다. 과연 충분히 시장경제가 활성화된 이후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했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된다.


 교환이 중심이 된 시장경제에서 자본주의가 태어났다면, 우리 주변에서 다양한 형태의 시장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러 형태의 유통경로가 저마다의 장단점을 가지고 교환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때, 성숙한 시장경제를 말할 수 있겠지만 국가전매 시스템과 대기업에 의해 지배된 유통 구조 등은 우리나라 자본주의가 시장경제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닌 국가주도로 1층 물질문명의 소비요구에 직점 대응하는 형태임을 발견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근대기업의 성장이 일제 시대를 통해 이루어지면서 충분한 시장경제의 성숙이 이루어지기 전 국가에 의해 주도되면서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경제 대신 국가 독점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먼저 확립되었다는 점이 오늘날 한국 경제의 문제점이 아닐까. 이러한 문제점을 가지고 이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 마지막 단계인 자본주의 층으로 올라가보도록 하자...


 자본주의의 과정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오직 일정한 경제적, 사회적 조건들이 갖추어져야만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조건들은 자본주의의 과정을 준비해준 것이거나 적어도 용이하게 만들어준 것들로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1) 첫번째로 들 수 있는 명백한 조건은 활력이 넘치고 진보하는 시장경제이다. 여기에 지리적, 인구적, 농업적, 산업적, 상업적인 여러 요소들이 더해진다. 이러한 기반에 깔려 있는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 대해서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2) 또한 사회가 여기에 공모해야 한다. 사회는 자신이 어떤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지, 또 어떤 과정에 대해서 자유로운 길을 열어주고 있는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수세기 전부터 그런 것을 옹호해주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요인이 되는 가문의 영속성과 연속적인 축적이 확보될 수 있을 만큼 계서화된 사회는 자본주의의 전(前)단계를 밟아가는 것이다. 3)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점은 세계시장이라는 특별한 해방 세력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원거리 무역이 모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도의 이익을 누리는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가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862



상업사회는 그것을 둘러싼 사회 속의 사회이다. 그런 만큼 상업사회를 그 전체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을 시야에서 놓치면 안 된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직후 스페인은 절호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지만 세계시민적인 자본주의가 스페인에 달려들어 그 기회를 빼앗아갔다. 이때의 경제활동들은 피라미드 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하층에는 농민, 목동, 양잠업자, 장인 겸 행상인, 소액 고리대금업자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위에는 카스티야의 자본가들이 이들을 장악하고 있고, 다시 그 위에는 푸거 가의 대리인들 그리고 다음에는 새로 권력을 휘두르게 될 제노바 상인들이 이 모든 것을 지휘하고 있었다. - P534

자본주의는 자기가 선호하는 방향을 따라서 개입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콩종크튀르를 주시한다 - 이것은 자본주의가 활동 영역을 선택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규정해주는 것은 어떤 선택을 했는가 하는 것보다는 - 그 선택은 콩종크튀르에 따라, 세기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 전략을 창출할 수 있는 수단과 그 전략을 변화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 P565

우리는 산업 이윤, 농업 이윤 그리고 상업 이윤 사이에 어느 것이 우세하다는 결정적인 분류를 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보았다. 크게 보면 상업, 산업, 농업의 순으로 이윤이 높다는 통상적인 견해가 대체로 사실과 일치하는 것 같지만 여기에는 많은 예외들이 있기 때문에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사업활동이 옮겨가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이 자본주의의 전체사에서 핵심적인 성질이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 시련이 있을 때마다 드러내는 유연성, 변환과 적응의 능력이 그것이다...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은 심대한 위기가 닥쳤을 때나 혹은 이윤율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때에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거의 순간적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능력인 것이다. - P612

국가는 많은 요소들이 합류된 중요한 실체이다. 유럽 이외의 지역은 수세기 동안 국가가 견딜 수 없는 무게로 짓누르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15세기부터 국가가 확고하게 다시 성장해나갔다. 근대성의 창시자들이 만든 근대 국가는 근대적 군대, 르네상스, 자본주의, 과학적인 합리성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것이었다(p734)... 근대 국가는 지방의 주, 자유도시, 장원, 초소형(超小形) 국가와 같은 예전의 구성체들과 조직들을 변형시키고 깨뜨려 나갔다. 새로운 군가는 그들의 사람들의 골수를 빼먹으면서 그리고 또 한편으로 경제발전에 힘입어서 발전해갔다. - P735

장기공채는 저절로 영구채로 전환되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국가가 공채를 상환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국가는 유동공채를 확정공채로 전환함으로써 크레딧이나 현찰로 된 재원을 소진시키지 않아도 되었다. 대출인들로서는 자신의 채권을 제삼자에게 매각할 수 있으며 따라서 매번 그가 원할 때면 언제든지 국가에 빌려준 돈을 상환받을 수 있게 되었다. 국가는 지불하지 않는데 채권자들은 원하는 대로 빌려준 돈을 되찾을 수 있는 것, 이것은 정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p753)... 공채 정책을 성공시킨 것은 대상인, 금 세공업자, 은행업 가문들과 같이 채권 발행 업무에 전문화한 사람들, 한마디로 말해서 이 나라의 결정적이고 독점적인 핵심인 런던의 "비즈니스 계"였다. - P754

시장의 합리성이란 통제하는 교환이 아니라 자발적인 교환의 합리성이다. 그것은 "자연의 본성", 개인의 계산을 초월하는 집단적인 수요와 공급의 만남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선험적으로 그것은 기업가 개인의 합리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 자신은 단지 상황에 따라서 그의 활동의 최상의 길, 즉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할 뿐이다. 끊임없이 수단을 목적에 맞추고 가능성을 지적(知的)으로 계산하는 의미의 합리성 없이 자본주의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은 인정할 수 있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문화마다 다양할 뿐 아니라 콩종크튀르마다, 사회집단마다, 또 그들의 수단과 목적마다 다양한 것이다. 하나의 경제내에서도 여러 개의 합리성이 존재한다. 자유경쟁의 합리성이라는 것은 단지 그중의 하나일 뿐이다. 독점, 투기, 힘의 합리성 역시 또 다른 합리성인 것이다. - P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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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구분이 여기에서 핵심적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시장 그자체의 미덕과 "합리성"을 갖다붙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실 마르크스와 레닌도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가끔 그런 식의 언급을 했다. 그래서 독점의 발달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발전이며 후기 자본주의의 결과물로 본 것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체제가 봉건제를 대체했을 때 그것은 진보를 낳는 "생산력과사회관계의 발달에 더 유리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희생시키면서 사회적인 진보를 독점하는 제약이 마침내 존재하지 않게 될 발전단계를 배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명화"를 가져오는  체제였다.  - P828

레닌은 그의 유명한 글(1916)에서 "자본주의의 일부 핵심적인 성격들이 정반대로 전환하는, 아주 발전된 특정 단계에 가서의 일이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과정에 핵심적인 것인 자본주의적인 독점이 자유경쟁을 대체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내가 레닌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레닌은 여기에 첨가하여 이렇게 말한다. "사실 독점은 자신이 거기에서 유래한 자유경쟁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다. 독점은 자유경쟁의 위에서 그리고 옆에서 공존한다." 이 점에서 나는 완전히 그의 말에 동의한다.  - P829

유럽은 적어도 이중의 상층사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은 역사의 변절에도 불구하고 발전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극복할 수 없는 정도의 어려움에 봉착하지 않았던 것은 이들 앞에 전체주의적인 독재나 자의적인 지배자의 독재와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유럽은 끈기 있는 부의 축적에 유리해졌으며, 또 다양화된사회 속에서 다중적인 세력과 위계들이 발전하고 이것들 사이에 다양한 방향으로 경쟁이 이루어지는 것이 용이해졌다. 출생의 특권에만 근거한 사회신분에 비해서 이것은 다당함, 분별, 노력의 결실, 정당함 등으로 인식되었다.  - P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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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폰을 쥔 여자의 목소리가 차츰 가까워졌다. 선주 언니는 아니었다.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거대한 풍선 같은 침묵이 병실의 모서리들을 향해 부풀어오르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트럭이 병원 앞길을 지나가며 목소리가 크고 선명해졌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함께 나와서 싸워주십시오.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다음 문단은 검열 때문에 온전히 책에 실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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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에 공직 사회에서 반지성주의는 주로 기업인들이 줄곧 품어온, 과학 연구소나 대학, 외교 집단 등 자신들의 세력 범위 바깥에서 활약하는 전문가들에 대한 의구심으로서 표출되었다. 극우파가 지식인들에게 드러낸 적대감은 훨씬 더 극렬하고 무차별적이었다. 이런 태도는 교육 수준이 높은 식자층이나 가문, 지위, 교양 등 모든 것에 대한 일반인들의 전형적인 혐오였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26/504


 제20대 대통령 취임사 중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단어는 단연 '반(反)지성주의'였다. 취임사는 현재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져온 것은 '반지성주의'이며 이로 인해 집단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뒤이어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로 '자유(自由)'가 35차례 강조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결국, 취임사를 거칠게 요약하면 비과학적인 반지성주의로부터 자유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여러면에서 '반지성주의'는 취임사에서 빌런(villain)의 역할을 맡고 있는 듯하다. 자유를 위해 사라져야 할 반지성주의. 이 구도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된다. 다음은 취임사 중 일부다.


 "또한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국내적으로 초저성장과 대규모 실업, 양극화의 심화와 다양한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공동체의 결속력이 흔들리고 와해되고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정치는 이른바 민주주의의 위기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입니다.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입장을 조정하고 타협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진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합리주의와 지성주의입니다. 국가 간, 국가 내부의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우리가 처해있는 문제의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 제20대 대통령 취임사 中


 반지성주의와 관련하여 리처드 호프스태터 (Richard Hofstadter, 1916~1970)의 <미국의 반지성주의 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를 떠올리게 된다. 반지성주의에 대해 저자는 무엇이라 정의했는가.


 반지성주의 anti-intellectualism는 하나의 관념으로서는 단일한 명제 내용이 아니라 관련된 여러 명제가 중첩된 상태를 가리키며, 하나의 태도로 볼 때는 흔히 양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_ 지성이나 지식인에 대한 순수한 혐오는 보기 드물다. 그리고 역사적인 문제로 볼 수 있다면, 반지성주의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한 가닥의 실이 아니라 때에 따라 강도가 변하는 다양한 원인에서 힘을 끌어내는 하나의 세력이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21/504


 저자는 반지성주의를 단일한 흐름으로 규정하기보다 '지성에 대한 다양한 양태'로 해석한다. 취임사에서 언급하듯 특정한 상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흐름으로 바라보기에 정의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때문에, 저자는 반지성주의에 대한 용어의 남용을 경계하고 있다. 다음 구절을 쉽게 정리하면 자신을 중심에 놓고 자신과 반대되는 입장에 대해 '반지성적'으로 매도하는 행태에 대한 비판이라 생각된다.


 1950년대의 정치적 혼란과 교육 논쟁을 거치면서 반지성적 anti-intellectual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자기평가에서 가장 중심적인 표현으로 부각되었다. 이 용어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채 우리의 일상어로 들어왔고, 지금은 못마땅한 여러 현상을 서술하는 데 흔히 사용된다. 갑자기 이 말을 의식하게 된 이들은 대개 반지성주의가 생활의 어떤 영역에서 설득력을 지닌 표현으로 여기거나, 최근의 상황에서 생겨난 말이기 때문에 조만간 압도적인 비중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여기기 쉽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20/504


  쉽게 규정하기 힘든 '반지성주의'지만,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전체 흐름에서 이는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반감'으로 정리될 수 있을 듯하다. 이로부터 저자는 미국 사회 지식인들의 소외 문제와 사회 참여 문제를 지적한다. 대중에 의해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지식인들은 권력과 결탁하거나 권력과 비판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며 이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때문에, 이들 사이에 격렬한 내분과 분화가 일어날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권력과의 결합을 완전히 포기한 지식인은 자신의 무력한 입장이 모종의 계몽에 유용했음을 충분히 - 지나치게 충분할 정도로 - 이해한다. 그런데 이런 지식인이 권력에 접근하고 권력과 관계되는 문제에 관여하다보면 다른 형태의 계몽이 가져다 줄 가능성을 놓칠 경우가 많다. 권력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여론을 움직여서 사회에 영향을 끼치려고 한다. 반면에 권력에 결합된 지식인은 직접적으로 지식인 공동체의 사고에 따르는 형태로 권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이런 두 가지 역할은 반드시 서로 배척하거나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다. 양측 모두 모종의 개인적/도덕적 위험이 걸려 있다. 또한 양측 모두 운을 하늘에 맡긴 개인적 선택을 보편적 규범으로 삼을 수는 없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434/504


 그렇지만, 호프스태터에 의하면 지식인들의 분화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다원성과 받아들이는 관용에 의해 파국적인 결과를 막을 수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열린 마음과 관대함이며, 이를 위해 개인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전체 결론이다. 결국, 호프스태터에 의하면 지식인 내부의 갈등과 외부(대중)과의 불화를 봉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솔직함과 열린 태도에 기초한 논쟁과 토론이며 이를 위해 자유가 기초되어야 한다. 이제 다시 취임사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취임사에서 이러한 구도의 앞뒤가 바뀌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비판자들 중에서도 정신적으로 자신들의 사회 바깥에서 그런 상황을 엄격하게 직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날 가능성은 있으며, 그들은 인원수나 자유로운 정도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뚜렷하게 각인시키는 세력이 될 것이다. 양측 간에 논쟁이 벌어질 가능성은 향후에도 있을 것이며, 또 지식인 공동체 내부에서는 권력과 비판의 양 세계를 아우를 만한 능력을 갖춘 지성이 탄생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식인 사회는 서로 반감과 위화감을 지닌 세력으로 분열되는 위기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여러 면에서 병을 앓고 있다. 하지만 이 나라의 건전함은 미국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다원성과 이 요소들이 서로 관여할 수 있는 자유에 있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435/504


 과거의 자유로운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장점 중 하나는 다양한 스타일의 지적인 삶을 인정한 점이다. 그 덕분에 다양한 유형의 지식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열정과 반항심에 의해 이름을 얻은 지식인도 있지만, 우아하고 화려한 지식인도, 검소하고 엄격한 지식인도 있다. 현명하고 복잡한 지식인도, 인내심 강하고 총명한 지식인도, 특별한 관찰력과 인내력을 지닌 지식인도 있다. 어쨌든 다양한 장점을 이해하려면 솔직함과 관대한 정신이 필요하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437/504


 취임사에서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자유가 보장되어 지식인 내부와 외부가 솔직하게 공론의 장에서 토론을 한다면 집단지성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도출되지 않을까. 오히려 자신과 반대되는 세력을 '반지성주의'로 규정하고 배격하는 태도야말로 반지성적인 행태는 아닐런지. 호프스태터가 지적한 미국사회의 반지성주의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던 시점이 바로 극우사상인 '매카시즘McCarthyism)'이 바로 활개를 치던 시점임을 생각해 본다면 누가 '반지성주의' 집단이며, 반지성주의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모두가 본래 의미와는 다르게 사용된 듯하다. 아마, 이 점 때문에 취임사 해독이 어려웠던 것 같다...


 미국에서 비판적 지성이 처참할 정도로 경시되고 있다는 우려를 일깨운 것은 무엇보다도 매카시즘이었다. 물론 매카시가 끊임없이 비난을 퍼부은 대상은 지식인만이 아니었지만 지식인은 늘 표적이 되었고, 지식인을 사냥할 때 그의 추종자들은 특히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17/504


PS. 이제 겨우 취임 2일 째인데 그 사이 참 많은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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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5-11 22: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반지성주의 주장은 지성주의를 지상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라 오히려 더 불편합니다. ㅠㅠ
지성주의보다 감성주의 혹은 감각주의를 전 더 선호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2-05-11 22:41   좋아요 3 | URL
그렇습니다.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반지성주의‘는 ‘지성주의‘에 기반한 것으로, ‘지성‘을 중심에 둔 ‘지성주의‘는 지성과 과학에 근거한 ‘자유지선주의‘와도 연계점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또한 경계해야할 점이 있어 보입니다. 그 점에서 다양한 가치에 대한 존중은 단순히 지성주의를 위한 기초일 뿐 아니라, 다양성을 위한 전제라 여겨집니다. 아쉽게도 취임사에서는 다양성과 통합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지성, 과학, 자유 등만 언급되어 18세기 계몽군주 대관식 연설문을 읽는 줄 알았습니다...

2022-05-11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1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22-05-11 22: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히려 자신과 반대되는,,,, 이 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변희재 말대로 자기를 지지하는 세력 믿고 저러는 거라 생각해요.

겨울호랑이 2022-05-11 22:39   좋아요 2 | URL
반지성주의를 비판하면서 복숭아가지와 살풀이를 행사의 일부로 반영하는 행태를 보면...... 참 할 말이 없어집니다... 덕분에, 변희재, 정규재가 반대 진영으로부터 재조명되는 것을 보면 의도치 않은 통합을 이룬 측면도 있어 보이긴 합니다...

기억의집 2022-05-11 22:45   좋아요 3 | URL
전 오죽하면 변희재 책 사서 읽을까도 생각중입니다. 진보 유투버들도 시원스럽게 말 못하는데 변희재 너무 시원하게 말해서 좋아요. 진영이 다른 사람이라 생각은 많이 달라도 요즘 유튭 나와서 말하는 들어보면 제가 미디어에 갇혀 저 사람을 잘 못 판단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귀신 쫒겠다고 복숭아 가지 가져와 무당들이 든 거라면서요. 이게 대한민국의 수준이죠. 뭐.

겨울호랑이 2022-05-11 22:50   좋아요 2 | URL
모두의 생각이 다 같을 수도 없지만, 완전히 다를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각자의 생각이 다른 것이겠지요. 이러한 다름이 때론 답답함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새로운 길을 보여줄 수도 있기에 상대의 생각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요즘 들어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신임 대통령이 많은 깨우침을 주는 듯 합니다. 문제는 수업료가 매우 비쌀 것 같다는 점이긴 합니다만...

레삭매냐 2022-05-12 11: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반지성주의는 ˝무지나 무식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 아니˝며 ˝알기를 적극적
으로 거부하는˝ 자라고 탁월히 정의했다.

어느 기사에서 본 건데, 반지성주의에
대한 정말 탁월한 정의가 아닐까 싶습
니다.

겨울호랑이 2022-05-12 11:44   좋아요 3 | URL
그렇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서도 반지성주의에 대한 비판이 언급되는데, ‘진화론‘이라는 과학의 새로운 변화에 대한 종교계의 거부 역시 반지성주의의 일환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연장선상에서 20세기 중반 냉전체제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새로운 변화를 느끼지 못하면서 반지성주의를 언급하는 제20대 대통령 취임사는 참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꿈찾는여행자 2022-05-12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쏙 드는 서평입니다...100퍼 동감합니다..ㅜ ㅠ

겨울호랑이 2022-05-12 22:46   좋아요 0 | URL
꿈찾는여행조님 감사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지금의 현실이 참 서글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