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중부 이탈리아에서 나폴레옹 정권에 대해 팽배한 증오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맞선 새로운 전쟁을 벌이기 위해 징병제를 도입하자 전면적 반란이 되었다. 베스트팔렌, 티롤, 이탈리아의 봉기 소식은 나폴레옹을 불안감에 빠뜨렸다. 그럼에도 그는 오스트리아군을 파괴하는 훨씬 더 중요한 과제에 집중했다

1809년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은 당대 유럽 정치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이탈리아 전역의 전성기 이래로 나폴레옹을 감싸고 있던 무적의 기운을 약화시켰다. 비록 나폴레옹은 바그람에서 좋은 성과를 보였지만, 주의 깊은 관찰자는 대육군이 더는 1805~1806년 전역들의 훌륭하고 무시무시한 병기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럽 상당 지역에 배치된 주둔군과 더불어 다양한 전역들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로 인해 대육군에는 상대적으로 노련한 병사가 별로 없었다. 아스페른-에슬링에서의 패배와, 앞서 주목한 대로 아우스터리츠와 예나에서의 승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바그람에서의 제한적인 승리는 앞으로 무력 분쟁에서 나폴레옹이 더는 이기기 힘들 것임을 암시했다. 사실 이것은 그가 전쟁에서 실제로 승리한 마지막 전투였다.

그의 이전 승전들은 구체제의 군대들을 상대로 거둔 것으로, 이들 군대는 프랑스 혁명이 풀어헤치고 나폴레옹이 갈고닦은 역동적인 전투 방식을 따라잡지 못해 쩔쩔맸다. 하지만 5차 대불동맹전쟁은 프랑스의 상대국들이 과거의 패전들에서 귀중한 경험을 얻었으며, 나폴레옹의 역량에 필적하기 위한 그들의 시도가 자국 군대들의 점진적인 근대화와 프랑스 병사들이 누리던 질적 이점의 감소를 낳았음을 입증했다. 더 극적인 것은 전쟁의 외교적·정치적 결과였다.

프랑스와의 전쟁 전야에 영국의 지원을 얻어내려고 애쓴 오스트리아는 재정적 도움에 관한 주제를 조심스레 꺼내, 250만 파운드 선불 지급을 비롯해 750만 파운드의 보조금에 대한 대가로 병력 40만을 동원하겠다고 제의했다. 런던은 전에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도전하도록 부추겼지만 이번에는 그 제안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외무장관 조지 캐닝은 오스트리아는 단독으로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며, 영국이 도움을 준다고 해도 극히 미미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일단 전쟁이 진행되면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는 런던이 결정할 것이다.

사실 영국 지도자들은 오스트리아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었고, 영국의 공격을 가능케 하도록 나폴레옹의 주의를 분산한다는 맥락에서만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에 주의를 기울였다.

나폴레옹 황제는 한 담화에서 ‘오로지 오스트리아가 여전히 군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협상을 진행했다. 만약 오스트리아가 군대를 다 잃었다면 나는 전혀 대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스트리아 군대의 전멸에 우리가 기여하지 않았음에 기뻐해야 할 것이다."

대북방전쟁(1700~1721)에서 스웨덴의 패배는 덴마크가 한동안 경제 성장을 누렸음을 뜻하는데, 덴마크 농업의 성장은 해상 활동의 증대를 자극했고, 이는 나폴레옹 전쟁에 덴마크가 결국 휘말리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와 대조적으로 대북방전쟁 이후 스웨덴은 군사적, 경제적으로 허약했지만 과거의 영화를 되찾고 싶은 욕망은 그다지 줄어들지 않았다. 스웨덴 군주들은 1536년 이래로 덴마크와 공동의 왕위로 연결된 노르웨이를 획득할 희망을 여전히 품고 있었다.

영국의 시각에서 볼 때 1807년의 전반적 상황은 1800년의 상황보다 훨씬 좋지 않았는데, 나폴레옹이 프로이센과 러시아에 승리를 거둬 발트해 연안까지 프랑스의 지배력을 확대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영국-러시아 전쟁은 양측이 대규모 교전을 피하고자 한 측면에서 독특했다. 러시아 함대는 공공연한 대결을 지속적으로 회피한 한편,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영국 정부는 러시아와 합의점을 찾고 싶다는 바람을 거듭 내비쳤다. 1810년 후반에 이르자 러시아가 대륙 봉쇄 체제로부터 점차 발을 빼고 있는 가운데, 양국 간 전쟁은 대체로 잦아들었고 영국과 러시아 간 교역은 늘어났다.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궁정의 신입자였지만 곧 왕위 배후의 권력자로 부상했다. 그는 자신의 미래가 새로운 제2의 조국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나폴레옹이나 프랑스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조국의 이해관계를 수호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데 전적으로 달려 있음을 이해했다. 스웨덴의 동부 국경선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그는 러시아인들에게 핀란드를 수복하려는 시도는 일체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키고 그 대신 스웨덴에 알맞은 보상이라고 여기는 서쪽의 노르웨이로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왕위가 노르웨이를 획득하는 데 달려 있음을 분명하게 이해했고, 이 목표를 달성하려는 베르나도트의 확고한 결심이 1813~1814년의 6차 대불동맹전쟁 동안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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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돌고래는 지구에서 가장 똑똑한 동물이다. 돌고래의 뇌는 인간보다 큰 데다, (인간은 뇌 용적이 평균 1200~1400㎤인데 비해 돌고래는 평균 1500~1700㎤이다.) 동물계에서 몸무게 대비 뇌의 크기가 가장 큰 동물 중 하나이다. 또한, 뇌 영역 중에서 의식적 사고와 추론 등 (사람의 경우 언어까지 포함하는) 고등사고 능력을 담당하는 부분인 신피질이 발달했다. 돌고래는 십여 마리로 구성된 소규모 집단을 형성해 사회적 유대 관계를 강하게 형성하고 상호작용을 한다.

한 가지 체액의 단편적인 측면이 어떻게 한 사람과 그의 행동에 그토록 다양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일까? 이런 생각은 성격이 여러 환경적(문화) 요인과 신체적(유전) 요인에 의해 다면적으로 형성된다고 가르치는 심리학적 연구와는 크게 상반된다.

혈액형이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확신에 차서 밀어붙이는 사람들은 뭔가 잘못된 정보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좋게 말하면 자신감이 넘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 정보를 퍼뜨리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우리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증거라는 미명하에 이처럼 근거 없는 믿음을 끊임없이 조장함으로써 이득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회의주의자로서 우리는 이 같은 정보들을 검증하여 잘못된 점을 밝혀내고, 다른 사람들이 그 증거를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북돋우며, 그들이 근거 없는 주장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피가 사람의 성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물론이다. 그러나 이는 유전 때문이지 혈액형 때문은 아니다!

가톨릭 교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토리노의 수의를 떠받들면서 진품 여부를 판정하지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도 않는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그 뒤로 가톨릭 교회는 토리노의 수의를 다른 성물과 똑같이 대접했다. 수의가 진품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영리하게도 토리노의 수의의 가치와 중요성을 신자 개개인의 신앙심과 헌신에 떠넘겨 버렸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가톨릭 교회 지도부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토리노의 수의가 역사적 가공물이라고 인정하는 발전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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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내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에서살아남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거리를 두어야 해. 무언가를 잃거나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야 해.
오랜 시간 내게 문제가 되는 것들은 다음과 같았어. ‘누군가 나를 좋아해주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곳에서 살지  못한다‘ 등등. 지금은 나에게 있는 것들로 인해 기뻐 없을 수도 있는 것들이니까. 부모님도, 남편도, 아이들도, 집도 말이야.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 나는 되도록이면  뉴스를 읽지 않으려 하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삶을 즐기려고 노력해. 부디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돌봐주시기를. 그리고 나 자신이 짐승 같아지지 않기를 노력해. - P12

가끔 떠난 사람들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느껴. 마치 쥐새끼들처럼 도망간 놈들. 나는 마치 미친 여자처럼  울먹이며 이곳에 남은 지인들에게 징징거려. 나에게는 두 아이가 있고, 나는 내 아이들을 지킬 수가 없다고. 그리고 패닉 상태에서 이곳을 떠난 사람들을  비웃어. 그런데 실은 나는 그들이 부러워. 그들은 더 이상 폭격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지 않아. 폭격 소리를 들으며 잠들지도 않아. 집이나 대피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산책할 수 있어. 그리고 난 여기에 남아 있어. 내 아이들, 구호품,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당근 커틀릿을  만드는 엄마의 이모와함께.  - P17

3주 만에 처음으로 방에 혼자 남았어. 난민의 삶에서 북적거림은 필수 조건이야. 남의 집과 유치원에서 보내는 밤들, 공동주방, 어른들의 대화와 아이들의 시끄러운 놀이. 우리가 임시로거주하는 유치원 복도에는 구호품 박스가 배치되어 있어. 맨 위에 올려져 있던 하늘색 스웨터는 베라에게 아주 잘 맞았어. 오래도록 그렇게 기억에 남을 거야. - P20

그렇기에 지금의 김건희 여사와 관련한 논란은 본질적으로 ‘김건희 리스크‘로부터 기인한 점이 크다. 당시 불거진 주가조작·허위 이력 논란 등을 사과하며 내놓은 해법에서 지금의 논란이 상당부분 파생됐기 때문이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여세연‘ 대표는 "김건희 여사와 관련된 논란 등이 명확하게 해소되지 않다 보니, 김건희 여사 행보를 두고 한국 사회대통령 배우자의 역할과 활동 범위에 대해 논할 때 많은 것이 뒤섞여버리는 지점이 있다"라고 말했다. 주가조작·허위이력논란이 가시지 않는 이상, 김 여사에 대한논란은 어떤 방식으로든 되풀이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 P25

이전만큼 보수정치에 영향을 끼치지못하는 유튜브가, 여전히 ‘장사‘가 되는이유는 뭘까? ‘예능화‘를 꾀한 덕이다. 가세연 영상을 즐겨 보는 한 40대 시청자는, 보수 유튜브의 영상 내용을 맹신하는노인들과 자신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웃겨서 본다‘는 것이다. "뭔가를 규탄하면서 보는 사람을 화나게만 하려는 영상은 지루하다.  - P33

인플레이션은 약자에게더 잔인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임금이 올라도 문제입니다. 기업 처지에서 임금은 매우 경직적인 비용입니다. 한번 올려주면 줄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제품 가격을 올려서 마진을 보전하려고 할 겁니다. ‘물가상승→ 임금인상→물가상승‘의 순환구조가 만들어지는데, 임금의 경직성을 감안하면  물가상승분을 임금인상으로 만회하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일 겁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은국 민생고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은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합니다. - P35

언론 문제를 지적하다 보면 가끔 ‘지겹다‘는 생각이 든다. 비슷한 문제가 늘 반복되기 때문이다. 몇 주 전 끝난 지방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단체는 1992년부터 선거보도 감시 연대체를 꾸려 전국선거 때마다 언론보도를 모니터했는데, 시기마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문제가 되는 보도 양상도 언론에 요구하는 것도 참 비슷했다. 그래도 조금씩 나아진다는 믿음으로 또 한번 몇 가지  요구를 남겨보려 한다. 키워드는 ‘협업‘이다. - P41

재택근무로의 전환은 기업이 ‘돈 쓰는 방법‘을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사무실유지비용(임차료)을 더 안전하고 빠른네트워크 구축비로 쓴다거나, 직원의 전기요금, 인터넷 요금 등을 지원해줘야 한다는 의미다. 고용노동부가 발간한 ‘재택근무 종합 매뉴얼‘에 따르면 "재택근무와관련된 통신비, 정보통신기기 비용, 소모성 비품 등은 사용자가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다. 자산 규모가 작은 사업체에서는 추가적인 간접비용으로 느껴져 부담을 갖게  되기도 한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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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는 공기나 물 같은 매체를 통해 귀에 전달되는 진동으로 정의된다. 우주는 진공 상태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진동할 분자가 없으며 당연히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항공우주국에서 녹음한 행성과 위성의 소리는 실제 ‘소리’가 아니다. 태양풍과 행성 자기권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낸 진동이 전기 신호로 변형된 후 증폭되어 스피커에서 소리가 되어 나온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천체의 음악’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이 비논리적인 유사성을 어떻게든 사실일 것으로 밀어붙이는 행위는 좌종 치료법이 그저 요행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뒷받침할 뿐이다.

게이너는 심신의 통합이 과학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과학은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마음이 뇌의 기능이라고 여길 뿐이다. 게이너는 의식이 비국소적이며 시공간적으로 무한한 궁극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이 보여주는 증거는 다르다. 과학에서 의식은 뇌세포가 죽으면 중단되는, 뇌세포 각각의 부수 현상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행동하는지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충분히 긍정적이지 않다는 점이 아니다. 그보다는 긍정심리학의 어리석은 약속을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더 문제다.

지난 몇 년간 나는 긍정적인 사고라는 말을 지긋지긋하게 들었다. 물론 인생을 대하는 전반적인 태도로는 나쁘지 않지만, 그런 사고방식이 우리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면 한심하게도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다. 캐럴 웨이드Carole Wade와 함께 심리학 입문 교재를 수년간 꾸준히 개정하다 보니, 긍정심리학의 이점을 주장하던 기존 연구가 새로운 연구 결과에 밀려 차츰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우리 교재 최신판에는 긍정심리학의 거대한 실체는 온데간데없고 희미한 그림자만 남았다고 해야 할 지경이다.

낙관주의의 장점을 살리려면 ‘회의적 낙관주의’가 필요하다. ‘난 정말 잘났어! 모든 게 잘될 거야!’를 굳이 날마다 스무 번씩 복창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그걸로 얻을 수 있는 건 당신을 딱하다는 듯 바라보는 주위 사람의 시선이 전부다. 아무리 낙관주의자라도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서는 안 되며, 자기 앞가림은 제대로 해야 한다. 문제가 생기거나 나쁜 일이 벌어지면 팔짱만 끼고 있지 말고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요컨대 낙관주의는 행동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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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 - 세계의 시간 -하
페르낭 브로델 지음 / 까치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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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가격 움직임을 상승시키거나 중단시키고 또 하락시키는 콩종크튀르는 영국에만 유일한 시간이 아니라 "세계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부분적으로 영국에서 형성되고 런던이 그 가운데 핵심적인 진앙지라는 것은 가능한 정도를 넘어서 확실한 일이지만, 동시에 전세계가 이 콩종크튀르를 만들고 변형시켰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콩종크튀르는 영국만의 것이 아니다. 그 결과는 아주 분명하다. 가격의 반향이 느껴지는 구역은 전세계이며 다만 영국이 그 중심지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영국의 콩종크튀르는 부분적으로 외생적이며 영국 밖에서, 특히 가까운 유럽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이 영국의 역사에 관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유럽과 영국은 같은 콩종크튀르를 따르고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영국과 유럽이 같은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은 아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 p840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1985)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 Civilisation Materielle, Economie et Capitalisme 3-2>에서 비로소 3권 전체 제목인 '세계의 시간'의 의미가 밝혀진다.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Royal Observatory Greenwich)기준으로 하는 표준시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부 - 주변부'로 구성된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영국은 핵심부 중에서도 중심부(core of the core)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영국은 어떻게 자본주의 시간의 중심점에 서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이야기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에서 다루어지며, 동시에 전체 3권의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전체 결론에 대해서는 별도의 페이퍼로 다루는 것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18세기 자본주의의 중심지 영국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브로델은 본문 앞 부분에서 18세기 영국의 패권이 확정되기 전후 시점에서 세계 경제의 모습들을 살펴보고 있다. 유럽에 많은 귀금속과 사탕수수 등 농작물을 제공하는 식민지 라틴 아메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자원을 이용하기 위해 강제로 인력이 유출당해야 했던 아프리카는 중심부와 직접적 연관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동유럽의 강국 러시아는 광활한 영토를 충분히 통제할 수 없었기에 주변부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과연 세계 모든 지역에서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문명은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던가?


 아메리카의 사회와 경제는 구대륙 모델의 재생이며 동시에 변형이었다(p591)... 아메리카 전체는 다양한 사회와 경제의 병존 또는 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층에는 어떻게 부르든 간에 상관은 없지만 반쯤 폐쇄적인 경제가 있고 그 위에 반쯤 열려 있는 경제가 존재하며 마지막으로 상층에는 광산, 플랜테이션 그리고 아마도 목축업을 하는 일부 조직과 상업조직이 존재한다. 자본주의는 기껏해야 제일 마지막의 상업층에만 해당된다(p595)... 사실 모든 사업가들은 아메리카 전체에 마치 위로부터 그물을 덮어씌운 것처럼 지배하고 있는 유럽 세계-경제의 연결층에 속해 있다. 이들은 민족자본주의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중심부로부터 조종되는 세계적 체제의 틀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 p596


 결론은 분명하다 : 러시아라는 거인은 변경지역에서까지 확고하게 지배하지는 못했다. 북경, 이스탄불, 에스파한, 라이프치히, 리보프, 뤼베크, 암스테르담, 런던 등지에서 러시아의 교역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조정되었다. 러시아 상인들이 기를 펴고 활동한 것은 러시아 내부의 시장들, 러시아 영토 내의 여러 곳에 퍼져 있는 정기시들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은 상트 페쩨르부르크나 아르항겔스크에서 외국 상품을 수입한 다음 이것을 가지고 멀리 이르쿠츠크 너머에서까지 교환화폐처럼 사용함으로써 복수를 한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 p644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에서 우리는 교환의 세계, 시장경제의 층위에서는 서양의 절대우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중국, 인도 등의 상품에 의해 많은 양의 은(銀)이 유출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자본의 축적은 동양에서 더 많이 이루어졌으며, 15세기 레콩기스타(Reconquista)가 완료되기 전까지 기독교들을 지중해에서 대서양과 북해방면으로 몰아붙이던 이슬람 제국주의는 근대 서양 제국주의보다 무력면에서 결코 뒤지는 수준은 아니었다.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 이전까지는.


 우리는 이집트에서부터 일본에 이르기까지 자본가, 상업자금 융자인, 대상인 그리고 대리인, 중개인, 외환 거래업자, 은행가와 같은 실무 집행인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교환의 도구, 가능성, 혹은 안전성 등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 상인들 집단 중 누구도 서유럽의 상인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유럽의 지중해, 북해, 대서양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다양성과 큰 규모를 가지고 있는 해상교역의 망"이 등장했고 갈수록 더 명확해졌다. "인도 내 무역"은 유럽 인들이 도착하기 오래 전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왜냐하면 상호 보충적인 상품들이 서로 유인하고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극동의 바다에서도 유럽의 바다에서와 유사한 상품순환의 끝없는 움직임을 활성화시켰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 p677


 이슬람 제국주의와 서유럽 제국주의는 심층적으로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 두 개의 공격적이고 노예주의적인 문명에 대해서 감시를 게을리하고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는 블랙 아프리카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물론 블랙 아프리카의 변두리 지역에 모습을 드러낸 침략자들은 아주 매력적인 상품들을 가지고 왔다. 이것은 사람들의 욕심을 자극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팔았다. 그리고 여기에 전문화한 상인들이 많이 있어서 이들이 사람들을 속여 노예상인들에게 넘겨버렸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 p604


 세계의 시간 분기점은 산업혁명(産業革命)이다. 18세기 중반부터 일어난 이 혁명은 세계 각지에 점(點)으로 진출해있던 서양 세력들을 선(線)으로 연결시켜 면(面)의 지배를 가능케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생겨난 새로운 체제는 이전의 모든 질서를 대체해버리며 영국 중심의 세계체제를 확정짓게 된다. 이후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의 나머지 내용은 이를 설명하는 것으로 채워진다.


 폴 베로크의 계산결과가 말하고 있는 것은 유럽이 도처에서 놀라운 방식으로 승리를 거두고 있으나 쿡, 라 페루즈, 부갱빌 등이 거대한 태평양을 탐험하고 있던 1800년경에 유럽은 오늘날과는 달리, 세계의 다른 나라들의 기록들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는 입장은 결코 아니었다는 점이다(p741)... 유럽과 나머지 세계의 상대적인 위치에 대해서 1800년 이전과 산업혁명 이후로 나누어보는 것에 대해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평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아마도 기술진보보다는 사회적, 경제적 구조의 요인 때문에) 선두의 영국을 필두로 한 유럽만이 홀로 기계혁명을 주도할 수 있었다는 것에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혁명은 발전 그 자체만을 위한 도구 정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지배의 도구이며 국제적 경쟁을 파괴하는 도구였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 p742


 브로델은 산업혁명을 혁명(革命)과 같은 단기적 현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산업혁명은 콩종크튀르(conjoncture)라는 장기지속의 시간대에서 서서히 일어난 변화들이 맞물려 일어난 사건의 결과다. 콘트라티에프 파동(Kondratiev wave)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경제의 구조적 변화는 13세기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혁명의 전조는 이전부터 나타났었다. 그렇지만, '인구증가 -> 분업 발달 -> 생산성의 증대 -> 교역의 확대 -> 식량 수요 확대 -> 인구증가'로 이어지는 구도는 여러 이유로 끊어지며 지속성정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오직 '영국'에서 영국만의 배경을 통해 효과적으로 연결되었음을 브로델은 본문에서 보여준다. 


 18세기 말 영국에서 있었던 모든 혁신과 불연속도 과거, 현재 그리고 다음 시기라는 "역사적 연속(contunuum historique)" 안에 위치해 있었다. 이 연속 안에는 불연속과 단절이 그동안 이야기했던 것과 같은 유일무이하고 결정적이라는 성격을 상실한다. 산업혁명은 적어도 두 측면에 걸친 것이다. 짧은 시간의 연쇄 속에서 이루어지는 명백한 격변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산업혁명이 하나이고, 장기지속적이고 누진적이며 신중하고 조용한, 그리하여 흔히는 거의 알아볼 수도 없는 과정이 또다른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 p746


  "17세기의 위기"는 영국에서는 시골 지역의 성숙과 맞물렸다. 왜 느리고 불균등하게 일어난 이런 시골에서의 변화는 장래의 산업혁명에 이중으로 유익한 것이었다. 우선 이것은 고수확의 농업을 정착시킴으로써 곡물을 수출하지만 않는다면 1750년대 이후 나타난 급격한 인구 증가를 지탱해줄 수 있었다. 또, 이것은 빈한한 지역에 소기업가들과 함께, 수공업 작업에 어느 정도 익숙한 프롤레타리아들, 즉 "고분고분하고 잘 훈련된" 노동자들을 증가시켜서 18세기 말에 도시에서 대산업들이 발달해 나왔을 때 필요한 인력을 미리 준비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 p773


 생물학적으로 (영국의 인구가) 크게 팽창한 것은 시골의 사정이 나아지고 도시가 성장했으며 산업 중심지들이 기록적인 속도로 팽창했기 때문이다. 산업화는 영국의 인구 증가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모든 구체적인 연구들은 이 인상을 확인해준다. 17~30세의 인구집단을 살펴보면 1800년에 산업지역인 랭커셔에서는 40퍼센트의 인구가 결혼해 있는 데 비해 농촌지역에서는 19퍼센트만이 결혼해 있었다. 그러므로 산업 분야에서의 고용은 조혼을 촉진시킨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구증가의 가속요인이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 p779


 물론,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요인들이 모두 영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국에서 만들어진 요인들은 없었다고 브로델은 단정한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가 자본주의라 부르는 성격들이 종합되는 것은 오직 영국에서만 가능했고, 이러한 요인들을 활용해서 영국은 산업과 상업 그리고 금융이라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중심지로 설 수 밖에 없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산업혁명에서도 그렇지만, 다른 모든 심층적인 역사적 문제들에서도 단기적인 것, 사건과 같은 것이 우선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느리게 진행된다. 코크스를 이용한 제련, 직조의 기계화, 진정한 농업혁명, 진정한 증기기관, 진정한 철도..... 산업혁명은 끊임없이 탄생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해서 움직여가기 위해서는 여러 차례의 파괴, 정비 그리고 "재구조화(restructuration)"가 필요하다. 그 어떤 것도 빠르게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사실 표면적으로는 터무니없이 지체된 세기인 17세기 동안 앙시앵 레짐은 기반이 허물어지고 쓰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통적인 농업구조와 토지소유가 파괴되었다. 길드 제의 해체가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대화재가 일어난 1666년 이후 런던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었다. 항해조례도 갱신되었다. 보호와 방어라는 중상주의적인 정책들을 만드는 마지막 조치들이 연이어 나왔다. 이 모든 것들이 움직여 나가서 영국은 "매일같이 면모를 일신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 p809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오래된 모험이다. 산업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그 뒤에는 폭넓은 과거의 경험이 있었으며 그것은 반드시 상업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19세기 초반의 영국에서도 자본의 여러 다양한 고전적인 형태를 띠고서 여전히 활기에 휩싸여 있었다. 농업자본은 1830년에만 해도 영국의 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산업자본은 아주 천천히 성장하다가 곧 급속한 성장을 시작했다. 상업자본은 아주 오래된 성격의 것으로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지만 대신 전세계의 차원으로 확대되어서 식민주의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금융자본이 있는데 이것은 런던의 시티(City)가 세계적인 우월성을 가지기 이전에도 존재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 p830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3개 층위의 마지막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마무리된다. 이로써 물질문명, 교환의 세계(시장경제), 세계의 시간(자본주의)의 3개 층위에 대한 설명이 끝나는데, 브로델은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마무리 짓는 페이퍼에서 다루도록 하자...


 18세기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광범위한 지상층(1층)의 영역이 존재하는데 최근의 경제학자들의 추산에 의하면 오늘날 가장 산업화된 국가에서도 이런 층이 전체 경제활동의 30-4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와 같은 영역은 시장과 국가통제의 바깥에 놓여 있는 밀수, 재화와 서비스의 물물교환, "암거래 노동", 가구의 활동 등을 합친 것이다. "삼분할(tripartition)" 체제, 여러 층을 가진 경제라는 개념은 과거에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고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한 모델이며 다양한 관찰의 틀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지상층을 고려하지 않은 통계는 불완전한 분석일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상층에서 하층까지 모두 아우르는 자본주의 "체제(systeme)"라고 하는 관점은 여러 면에서 수정되어야만 한다. 그와 반대로 자본주의와 그 아래층인 비(非)자본주의 사이에 생동하는 변증법이 작동한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 p867

영국은 국내 물가와 인건비가 너무 오른 나머지 프랑스 및 네덜란드와의 경쟁을 이기지 못했다. 영국은 더 이상 유럽 내에서 이익을 취하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했으나 대신 나머지 전세계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 승리에 대해서는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우리는 크게 보아서 영국이 자국의 상업을 어떻게 "한계화(marginaliser)"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대개 무력을 통한 승리였다. 1793-1795년에 있었던 유럽 내의 전쟁이 영국에게 도움을 주었다. 이 전쟁을 통해서 영국은 세계를 장악할 수밖에 없게 된 반면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오히려 세계쟁탈전에서 축출당했다. - P797

영국이 지배권을 행사하는 세계-경제 내에서 자신의 보호구역과도 같은 "주변부"국가들에 근거하여 교역을 수행함으로써 얻는 이점은 명백하다. 국내 물가가 너무 높아진 것은 생산수단의 변화를 초래했을 뿐 아니라 원재료 역시 가격이 낮은 지역에서 구매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영국의 교역이 세계 최일급의 선단에 힘입어 원거리라는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조선업, 의장업, 해상모험에 대한 투자 혹은 보험업 등 항해 분야에서 영국만큼 분업이 발달해 있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 P797

아메리카의 은이 아시아에 도달하는 경로는 세 가지였다 : 첫번째는 레반트와 페르시아 만을 통한 경로로서, 인도의 역사가들은 17~18세기에도 은이 자기 나라로 들어오는 데에 이 경로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 두번째 것은 희망봉 항로이고, 세번째 것은 마닐라 갤리온 선의 경로였다. 일본이라는 아주 독특한 경우를 예외로 하면 극동지방에서 유통되는 거의 모든 은은 유럽에서 들어온 것, 다시 말해서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것이었다. - P683

영국의 정복 이전에 유럽의 지배는 다른 몸체에 붙어 사는 기생충처럼 점과 같은 지배였다. 지배지역은 점들과 같았다. 달리 말하면 극소의 공간에 불과했다(p689)... 그렇지만 유럽은 아시아에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심어놓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은 서양의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소수는 비록 "내적으로 취약한 성층구조"를 이루고 있는 데 그치지만 그래도 이것은 아시아의 대중과 조우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극동의 교역과 교환을 지배하고 있는 상업 엘리트들과도 조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인도에서 유럽의 침투에 대하여 길을 터 준 것도 이런 지방 엘리트들이었다(p690)... 결국 18세기 말 이전부터 영국이 인도 무역의 85~90퍼센트의 독점을 누리게 된 과정이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 P691

오늘날 제3세계에서 겪고 있는 병목현상들은 경제발전의 효과를 상쇄해버리는 인구증가, 숙련노동력의 부족, 국내적으로는 일반 공산품에 대한 수요가 적기 때문에 사치품이나 혹은 수출용품의 생산 분야에서만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경향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장애요인으로서 "농업의 장벽"을 들 수 있다. 농업 분야는 구태의연하고 대개 자급자족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식량의 공급이 부족하고 비탄력적이다. 그리하여 임금노동자층이 증가하면 자연히 나타나게 마련인 식량소비의 증가분을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농촌 내의 잉여 인구에 대한 식량의 공급도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도시로 실업자 프롤레타리아를 방출하고, 마지막으로 워낙 가난하기 때문에 초보적인 공산품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키지도 못하는 것이다. - P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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