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클리의 위와 같은 진술은 ADHD의 과학적 측면과 철학적 측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클리는 ADHD가 질병으로 취급되지만 과학적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과감히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리탈린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과학이 언젠가 약의 효용을 밝힐 수 있으리라 주장한다.

그동안 ADHD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그다지 진전을 이루지 못했지만 제약회사의 마케팅 부서는 매우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아동의 약물 복용 결정을 다음 세 가지 잘못된 믿음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1) 진단이 곧 질병이다. (2) ADHD는 환경이 아닌 생물학적 요인에 기인한다. (3) 질병은 약으로 치료할 수 있다.

성실한 의사라면 이러한 울분을 듣고 진정으로 가족을 돕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분별력을 갖춘 의사는 다음의 사실을 잘 안다. (1) 부모는 수년 동안 이러한 딜레마를 겪어왔고 (2) 리탈린은 반창고처럼 단기적인 조치에 불과하며 (3) 장기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족상담사를 추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만 (4) 관리의료제도 하에서는 약 처방이 쉽고 저렴하며 (5) 이 병원에서 처방받지 못하면 부모는 결국 다른 곳에서 처방받을 것이다.

슈퍼푸드라는 개념에는 오류가 있다. 이 과일들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는 음식의 원료에는 없는 특별한 영양소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과일들에 특정 영양소가 고농도로 들어 있다는 사실에 큰 의미가 없다. 같은 성분을 낮은 농도로 가지고 있는 다른 식품을 조금 더 먹으면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종교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반면, "과학은 항상 잠정적이다."라고 썼다. 하지만 같은 책 뒷부분에서 러셀은 "과학을 제외하면 진리에 이르는 방법은 있을 수 없다."라고 쓰기도 했다. 이런 언명들은 과학자들이 가장 기초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인상을 주며 일반 대중을 큰 혼란에 빠지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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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는 북경의 물자 대동맥인 대운하에 대한 통제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고, 대운하에 결정적인 위험 요인으로 작용했던 황하에 대한 치수와 대운하에 대한 시찰을 겸한 남순을 반복적으로 거행한 것이다.

강희제가 삼번을 폐지하려고 하자 오삼계 등은 반란을 일으켰고, 여기에 대만의 정씨(鄭氏) 세력도 합세하면서 청조는 입관 이래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다. 삼번의 난과 함께 극성에 달했던 정씨 해상 세력의 반청 운동은 청에 대한 복수설치(復?雪恥)와 명조 회복(‘복명(復明)’)을 바라는 조선인의 기대감을 한껏 고무시켰다.

그 와중에 천계령의 여파로 일본과 중국 사이에 조선의 중개무역이 활성화되었는데, 일본이 비단 등의 중국 제품을 수입할 때 바닷길을 이용하지 못하자 조선을 통한 중개무역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건륭제가 염려했던 것은 서양인들이 내지인들과 결탁하는 문제였다. 마카오는 이전부터 예수회 선교사들의 내지 진입로이자 유럽 선박의 정착지였기에 중국인과 유럽인들 사이의 관계 형성이 용이했다.

18세기로 접어든 강희제의 치세 후반기부터 동남 연해 지역에는 지역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외래인들과 접촉하는 일이 증가했고, 이것이 지속적으로 북경의 조정을 민감하게 자극하여 결국 일구통상이라는 폐쇄적인 국면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이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보유한 측량술을 비롯한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 가능해진 측면도 있으나, 뒤에 가려진 정치적인 동기도 간과할 수 없다. 여기서 ‘정치’란 바로 새로 확장된 변강(邊疆)에 대한 통치자의 통치 의지였고, ‘과학’이란 이를 뒷받침해 주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술적 지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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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자면 정신의학 분야에서는 대부분의 정신질환이 정상적인 인간의 경험과 연속성을 가지며, 질환들 사이에 중첩되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합의가 점차 이뤄지고 있다. 정신질환은 유전자와 환경, 인간과 사회가 복잡하게 상호작용한 산물이다.

질병의 개념은 모호할 수 있지만 형태학적으로 관찰 가능한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과정으로 이해할 때 역사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가장 큰 타당성을 가진다. 암, 흑사병, 그리고 다양한 경화증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슬픔, 불안, 과도한 음주 또는 일부러 이틀 동안 음식을 입에도 대지 않는 행위를 꼭 병으로 볼 필요는 없다. 감정은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감정은 세상에 대한 판단이며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세상과 교류하는 방식이다. 이는 그런 감정들이 불편하지 않다거나 특정 행동이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므로 바뀌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좋든 싫든 의학과 정신의학 연구의 대부분은 제약회사로부터 지원을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정신의학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 치료 대상을 선택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준다. 1960년대에는 대부분의 대규모 임상실험은 미국 국립정신보건원NIMH: 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연구의 70퍼센트가 기업이 주도하는 약물 치료 연구다.

과학자는 특정 치료법의 효능을 평가할 때 기대효과를 제거하도록 훈련받는다. 과학자는 대조군 연구에서 특정 치료의 결과가 위약 집단보다 유의미하게 높을 경우에만 해당 치료가 우울증에 효과가 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우울증 치료의 진실은 어떤 치료법이든 간에 기대감과 믿음이 치료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이다.

비판적 사상가인 제임스는 자신의 비관주의가 자신을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를 통해 제임스는 ‘믿음’에 대해 상당히 실용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믿을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없다고 주장했지만(예를 들어 2+2=5라고 믿을 수는 없다), 우리가 믿음을 선택할 수 있는 경험의 영역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제임스는 "사실에 기반을 둔 믿음은 사실을 창조할 수 있다."라는 점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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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 시대 1415~1784 -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주저’했는가?
조영헌 지음 / 민음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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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제시하는 논의의 출발점이자 결론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앞서 언급했던 이 시기의 중국과 그 주변은 정적이고 단절되고 폐쇄된 곳이 결코 아니라, 물자와 인력, 정보가 끊임없이 교류하고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류는 결국 대운하 및 이와 연결된 북경으로 수렴되고 이와 관련된 이해관계 속에서 통제되거나 풀렸다는 사실이다. _ 조용헌, <대운하 시대 1415 ~ 1784>, p16/278

명(明)나라는 서양보다 더 큰 규모의 함대를 구성할 힘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왜 '대항해 시대'에 동참하지 않았는가. <대운하 시대 1415 ~ 1784>는 중국이 '대항해 시대' 대신 '대운하 시대'를 선택한 이유를 잘 보여준다. 황하와 양자강을 연결하는 운하를 통해 사람과 물자 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전세계의 은(銀)이 모여들었던 시기에 중국의 선택을 탐험심 부족으로 볼 수 있을까?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신교도들의 청빈과 근검 절약이 자본의 축적을 가져왔다고 분석하지만, 필사적으로 저축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고 투자를 해야만 했던 대항해시대를 과연 당시 세계무역의 중심으로 볼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발전이 경쟁의 심화를 통해 결국 과점(寡占)과 독점(獨占)으로 나아가는 헤게모니(hegemony) 쟁탈전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미 세계체제에서 중심국으로서의 면모를 17세기 중국의 모습에서 발견하게 된다. 중국 상인들이 운하를 선택한 이유는 'Low Risk, High Return'였고, 서양인들이 바다로 진출한 이유는 'High Risk, High Return'을 찾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독점자본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중국이 서양에 비해 뒤쳐지지 않았음을 본문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다만, 이 지점에서 주목할 지점은 서양인들은 자신들의 주된 수출품을 직접 운용하여 무역 조건을 개선하고, 무력을 보여줌으로써 상품의 가치를 높여다는 점이라 생각한다. 또한, 면(面)으로 연결되는 육지 제국과는 달리 점(点)과 선(線)으로 연결되는 해양제국의 구축이 보다 경제적이었기에 효율적으로 제국주의를 운용할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서양이 동양에 앞서게 된 원인은 자본주의 이전에 과학(科學)과 정량화에서 찾아야하지 않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개략적인 생각은 이 정도로 정리하고 보다 자세한 부분은 리뷰에서 다루도록 하자...

사실상 포르투갈의 경쟁력은 신식 화기에 있었다. 중국 관헌에게 '불랑기(佛郞機)'라로 불렸던, 포르투갈인들이 가져온 화포가 동아시아에 불랑기포로 전래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다투는 세력에게 유럽인들이 가져온 신식 화기는 전투력 향상을 하는데 이용 가치가 높았으므로, 포르투갈은 신식 화기를 세력을 확장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_ 조용헌, <대운하 시대 1415 ~ 1784>, p114/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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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2-10-06 09: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무력을 보여줌으로써 상품의 가치를 높여다는 점˝이 과소평가 되어 온 게 아닌가 생각하곤 했습니다. 겨울호랑이님, 가을 날씨에 따땃하게 지내시길 바래요.

겨울호랑이 2022-10-06 14:02   좋아요 0 | URL
초원님 말씀처럼, 서양의 주요 수출품이 무기였다는 점은 여러 면에서 접점을 가진 듯 합니다. 효과적인 군사작전 수행을 위한 과학의 발전과 정부의 지원, 무력사용으로 인해 상대에게 공포감과 동경을 주는 것 등 오늘날까지 패권국가에게서 보여지는 여러 행태는 그 뿌리를 대항해시대에 두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초원님께서도 화창한 가을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
 

실제 이곳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왕직-이단(李旦: ?~1625년)-정지룡(鄭芝龍: 1604~1661년)-정성공(鄭成功: 1624~1662년)으로 연결되는 해상 세력 및 이들과 연계된 일본 상인에게는 이 직항로야말로 명의 경제와 연결되는 생명줄이었다. 당시에는 중국에서도 남중국해로 진출하는 인구가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사실상 포르투갈의 경쟁력은 신식 화기에 있었다. 중국 관헌에게 ‘불랑기(佛郞機)’라고 불렸던, 포르투갈인들이 가져온 화포가 동아시아에 불랑기포로 전래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다투는 세력에게 유럽인들이 가져온 신식 화기는 전투력 향상을 하는 데 이용 가치가 높았으므로, 포르투갈은 신식 화기를 세력을 확장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처럼 강력한 신식 무기를 앞세운 유럽의 무장 세력과의 충돌이 조금씩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중국에서는 리치가 체감한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을 ‘양귀자(洋鬼子)’, ‘번귀(番鬼)’로 부른 것은 그 단적인 사례이다. 그 배경에는 해양으로부터 다가온 피해, 즉 포르투갈 무장 세력과의 충돌, 왜구로 인한 트라우마, 임진왜란의 여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중국과 동아시아는 결코 바다로부터 고립된 사회가 아니며, 세계가 본격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하는 극적인 상황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음을 말이다.331) 다만 그들은 화교 학자인 왕궁우(王?武, Gungwu Wang)가 잘 묘사했듯, 이른바 제국의 통제나 배후 조정 없이 해양 세계를 활보하던 ‘제국 없는 상인들(merchants without empire)’이었다.

조운 루트가 대운하로 일원화된 이후 마조는 조량 운송의 안전을 기원하는 하신(河神)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도 조운에 종사하던 운수 노동자들이 부득불 대운하를 이용하게 되었으니, 신앙의 대상이 그들과 함께 내륙으로 전파된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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