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교화 과정 - 신유학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나 너머의 역사담론 4
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 이훈상 옮김 / 너머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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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세기 동안 고려 사회는 성격이 점차 바뀌었다. 확산되는 중국의 영향으로 부계 중심 철학이 공계적인 한국의 원래 친족 체제에 미묘하게 덧붙은 것이다. 그 결과는 전통으로부터의 거대한 전환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 한국 체제가 개인과 집단에 부여하는 선택의 폭을 점차 좁히는 것이다. 고려 사회조직 고유의 융통성과 전략은 부계를 기초로 한 규칙에 점차 제한되면서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게 되었다... 때맞춰 한국 사회가 부계적 변환을 완결한 것은 바로 이 신유학 이데올로기의 추진력 덕분이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한국의 유교화 과정> , p126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1935 ~ ) 의 <한국의 유교화 과정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A Study Of Society And Ideology>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시대 상황에서 부계(父系)/모계(母系) 중심의 양계(兩系) 중심에서 부계 중심, 특히 장자(長子) 중심의 사회로 변화되는 과정을 면밀하게 따라가는 책이다. 저자는 본문을 통해 신유학(新儒學)이라는 성리학(性理學)의 도입이 몽골, 전통사회 이데올로기를 몰아내고 소중화(小中華)로 자리매김하려는 사대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존 사상과의 융합을 통해 한국만의 독자적인 제도가 정착되었음을 밝힌다. 이에 대한 상세 내용은 리뷰에서 살펴보는 것으로 넘기자...

특기할 만한 것은 조선시대에도 계속하여 모계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고려 말부터 조선 중엽에 걸친 과도기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이다.... 출계 개념이 양계에서 부계로 바뀌게 됨에 따라 고려시대에는 자년 균분 상속으로 경제적 독립을 누리던 여성이 조선시대에 와서는 상속권을 잃음으로써 경제적으로 남편에게 종속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처 primary wife로 간주되는 여성만 자기 자식에게 완전한 양계 제도를 부계를 약화하지 않고 오히려 더 엄격한 제도로 만들었다. 이 사실은 중국 사회와 크게 구별되는 중요한 점이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한국의 유교화 과정> , p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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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동학농민혁명은 3·1혁명, 4·19혁명, 반독재·반군부 민주항쟁, 촛불혁명의 근원으로서 오늘날의 시대정신에 맞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분단 구조 등 민족 모순을 청산하는 동력이 되고, 진정한 평등과 자주를 실현하는 과제를 안고 인권을 보장하는 학습장 또는 토론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미래 조국의 통일을 위해 그 정신을 올곧게 계승해야 할 것이다.

현재에도 농민군의 지향과 정신은 미래의 역사적 자산이 될 것이며, 통합과 화해는 민주주의 구현에 잣대가 될 것이고, 반외세·자주의 지향은 통일의 화두가 될 것이다.(85/136) - P85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 본의가 결단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 밑에서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 낮은 벼슬아치)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리라.(91/136)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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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독립국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단지 오늘날 한 가닥 명맥만이 겨우 이어지거나 없어지는 사이를 맴돌고 있다. 무슨 연유든 실로 조선은 동양의 발칸반도와 같다.(10/214) - P10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강점해 고종을 유폐하고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추대해 개화 정권을 출범시켰다. 남의 나라에서 이른바 불법적인 쿠데타를 단행한 것이다.(16/214) - P16

마지막으로 일본이 역사에서 이를 은폐하려고 시도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애초에 일본측 기록에는 왜곡된 기술이 많았고, 공식 보고에도 사실과 어긋나게 기록했으며, 신문 보도도 통제했다.(25/214)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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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받드는 유교적 충성심이 깔려 있는 포고문은 바로 민씨 정권을 향한 전면적 선전포고였고 벼슬을 독점하고 특권을 누리는 양반 유림을 향한 질타였다.

황현의 기록은 고부 봉기와 의사 봉기를 묶어 이야기하고 있다. "동학과 난민이 결합했다"는 표현은 동학이라는 종교 주도의 봉기가 아니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농민군의 성격을 잘 규명한 분석으로 눈길을 끈다

이렇게 집강소를 통한 자생적인 신분타파운동, 상하존비 곧 계급의식을 타파하고자 한 예절개선운동은 인권사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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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근대사는 어찌 보면 다양한 색깔이 섞여 알록달록한 색동저고리처럼 보이고, 또 어찌 보면 구멍이 숭숭 뚫린 누더기같이 보인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온갖 모순과 갈등이 얽히고설켜 있고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꿈틀거림이 내재되어 있다.

봉건 모순에는 불평등한 신분제도와 불균형한 토지제도가 바탕에 깔려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신분 차별과 일부 특권층의 토지 소유 및 농업생산의 독점은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였다. 이런 불평등하고 불균형한 제도를 타파하려는 민중 봉기는 역사의 추진 동력이 되었다. 여기에는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이를 개혁하지 않고는 평등과 인권을 추구하는 근대를 지향할 수 없었다.

비록 수많은 농민군이 우수한 근대 무기 앞에 죽어갔지만 동학농민혁명이 던지는 의미는 저항적 민족주의 또는 생존적 민족주의로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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