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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추가 포식 쪽으로 기울게 된 것은 점진적인 현상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육식동물이 대대적으로 등장한 것은 실제로 59 4,300만 년 전이었다. 갑자기 포식이 그저 먹이그물 내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를 갖춘 생활양식이 된 것이다. 선캄브리아 시대 포식자들이 수동적이었다면, 캄브리아기 초에 바다를 휩쓸었던 두 번째 파도의 포식자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능동적이었다. 눈을 가진 최초의 동물은 삼엽충 - 최초의 삼엽충이었다.  최초의 진정한 삼엽충은 포식자이기도 했다. 팔로타스피스, 네오코볼디아, 시주디스스 같은 눈을 가진 모든 삼엽충들은 캄브리아기 초, 캄브리아기 폭발이 시작될 무렵의 대표주자이기도 했다.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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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7 1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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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7 12: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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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7 13: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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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7 13: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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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9 12: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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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9 12: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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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3 - 권력과 정치 3.1운동 100주년 총서 3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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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게 군대는 해외 침략의 선봉대이자 식민지 지배의 최후 보루였다. 의병투쟁에 대한 탄압이 전자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면, 3.1운동은 후자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 역사적 사건이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3. 권력과 정치>, p186

<3.1운동 100년 : 3. 권력과 정치>에서는 3.1운동 전후 시기 식민통치의 주체와 이들에 대항하는 세력의 주체에 대해 말한다. 일본 육군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1868)을 성공시킨 두 세력인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 출신들이 장악하는데, 그중에서도 조슈번 출신들이 조선, 대만, 사할린 등 여러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이들 식민지를 발판 삼아 대륙으로 뻗어나갈 속내를 갖고 있었기에, 식민지와 본토 일본을 구분하는 정책을 취했고, 불평등한 처우는 식민지 내 상황을 악화시켰다.

법령들은 일본에서 시행되는 법령과 내용상 유사하거나 일본의 제반 제도에 상응하게끔 조정된 것이 대부분이고, 일부는 조선에만 ˝특수하게 존재한다˝고 인정된 상황에 맞추어 제정되었다는 점에서 동화주의 측면이 우선적이고 차별주의 측면이 부차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법체계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 조선에는 일본 헌법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국민에게 부여된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나 참정권 등 기본권이 조선인에게는 보장되지 않았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3. 권력과 정치>, p62

이에 반해, 하라 다카시(原 敬, 1856 ~ 1921)로 대표되는 문인(文人) 출신 정치가들은 궁극적인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추구하면서 조선인을 황국신민화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3.1운동의 결과는 조선에 대한 압도적이었던 조슈파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하라 다카시는 구미의 식민지와는 달리 조선을 식민지로 생각하지 않고 일본에 동화시킬 대상으로 간주했으며, 궁극적으로는 조선을 오키나와나 훗카이도처럼 일본의 일부로 삼고자 했다. 이러한 동화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에 일본과 같은 교육과 지방제도를 실시하는 등 일본의 법률과 제도를 식민지에서 시행할 것을 주장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3. 권력과 정치>, p46

1919년의 식민지 관제 개정은 제1차 야마모토 내각 시기 식민지 개혁의 연장선에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하라 내각은 추진 중이던 ‘식민지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3.1운동을 계기로 총독부 관제 개정에 착수한 것이 아니었지만 3.1운동이라는 민족적 저항이 없었다면 육군 조슈파의 반발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슈파는 타이완총독을 양보하는 대신 예비역이었던 사이토를 현역으로 복귀시켜 조선총독에 취임시킴으로써 문관총독의 임명을 막아 조선총독부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3. 권력과 정치>, p45

이에 대항하는 조선 민중들은 네트워크를 통해 지배세력에 대항해 나갔다. 해외에서는 유학생을 중심으로, 국내에서는 종교계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저항을 이어나갔고, 이러한 움직임은 지역 공동체로 이어지면서 들불처럼 번져갔다.

독립선언의 계획과 준비는 상대적으로 정형화된 조직을 가진 종교계나 체계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학생층이 주도했다. 당시 국내에서 집단행동을 계획할 수 있는 조직을 보유한 곳은 종교계뿐이었다. 지금까지 발표된 수많은 논문은 천도교계와 개신교계에 의해 독립선언이 준비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밝혔다.(p192)... 3월 중순 이후 3.1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났다. 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의 주된 참여자는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마을이라는 전통적 공동체에 강하게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참여에 대해서는 ‘공동체적 동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이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3. 권력과 정치>, p193

또한, 친일세력들 역시 3.1운동 직후 그들의 활동을 본격화하며 제국 내에서 자신들의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데, 대표적인 단체가 국민협회(國民協會)다. 이들의 생각이 참정권 획득을 통해 제국 내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고, 단결된 힘을 통해 새로운 혁명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을 조국으로 생각한 이들의 생각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좌절되면서 시들해지고 만다.

1919년 3.1운동은 일제하 민족운동의 중요한 출발점이었던 한편, 친일세력들에게도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통치 방식이 교체되며, 무단통치 시기에 금지되었던 단체 결성과 정치활동의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3.1운동이 친일세력들에게 본격적 활동의 기회를 열어주었던 것이다.(p262)... 국민협회는 내지연장주의라는 새로운 지배 전략과 친일세력의 정치적 욕구를 참정권 청원운동에 흡수하여 1920년대 최대의 친일단체로 성장한 정치세력이었다... 그러나 국민협회의 성장을 가능케 했던 요소들은 곧 국민협회가 통치당국과 충돌하는 원인이 되었다. 참정권 확보를 통해 완전한 제국 국민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원론적으로는 내지연장주의에 부합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식민지배세력이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기 때문이었다. 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3. 권력과 정치>, p295

<3.1운동 100년 : 3. 권력과 정치>에서는 3.1 독립항쟁이 가져온 일본과 조선의 권력 구조 변화가 상세하게 묘사된다. 약속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했다가 민중이 두려워 태화관에 숨어 있던 민족대표라는 이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3.1 독립항쟁이 가져온 변화는 분명 큰 것이었고 명암(明暗)은 분명했다. 이후 해외 지역에서 무장독립투쟁이 본격화된 것과 함께 친일파의 양산도 함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3.1 독립항쟁의 역사적 의의는 크다 여겨진다.

본래 리뷰는 여기까지이나 요즘 우리 현실과 떼어놓을 수 없는 문제가 나오는 대목이 있어 옮겨본다. 우리 사회의 나쁜 문제점의 기원을 찾는다면 일단 일제때부터라고 말하고 근거를 찾으면 대충 맞을 듯하다...

일본 형사소송법에서 예심제도를 도입한 목적은 피고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검사가 함부로 기소하는 것을 방지해 피고인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검찰이나 사법경찰관은 현행범 등 극히 제한된 경우가 아니면 독자적인 강제수사를 할 수 없었다. 이같이 인권 보호를 위해 시행된 예심제도가 조선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위해 변용되었다. 조선에서는 예심판사가 아니라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 등 수사기관이 예심판사에 준하는 강제처분권을 갖고 있었고, 이로 인해 예심제도는 원래의 목적인 인권 보호가 아니라 인권 탄압을 위한 제도로 변용되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3. 권력과 정치>,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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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21-03-06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다보니 복거일, 「비명(碑銘)을 찾아서」가 떠오르네요. 복거일이라는 작자가 영어공용화를 주장하는등 보수꼴통 발언하기로 유명하지만 이 책 만큼은 훌륭합니다. 재미도 있습니다. 이 작품을 구상한 상상력도 뛰어나구요. 영화로도 나왔어요.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영화는 별로구요. 각색도 많이 됐습니다. 게다가 주연이 발연기 장동건이니 기대하기 어렵죠.

일본에서 유학하고 직장생활도 했던 선배에게 이 책을 권했더니 등장인물들 일본식 이름도 어설프고 뭔가 허술하다더니 다 읽고 나서는 저하고 독서토론하자고 하더라구요. 그게 벌써 십년도 훨씬 전이지만요.

겨울호랑이 2021-03-07 08:09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저도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봤던 기억이 납니다. 도입부에 축구선수 이동국이 일장기를 달고 선수로 뛰고, 한국이 일본에 완전히 종속되며 벌어지는 일을 다뤘던 영화로 기억에 남네요. 그 모든 것이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시작되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

samadhi(眞我) 2021-03-07 12:42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그 아찔한 가정이 참신했죠. 그럴 법하다 생각했어요. 출간된지 30년 넘은 소설이라 지금은 그렇게 놀랍게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조지 오웰, 「1984」 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한국인에게 너무나 암울한 상황이.

겨울호랑이 2021-03-07 12:53   좋아요 1 | URL
^^:) 개인적으로는 그 영화를 보던 때에는 참 암울하게 느껴졌습니다만, 지금은 그 때만큼 암울하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물론, 어려움도 지금 분명 있고 넘어야할 산도 높습니다만 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을 보면 그동안 긴 시간이 지났음을 실감합니다.
 
3.1운동 100년 2 - 사건과 목격자들 3.1운동 100주년 총서 2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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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2021년 3.1절을 맞이해서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3.1운동 100주년 총서>를 통해 3.1 독립항쟁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살펴보려 했던 당초 계획은 예정에 없던 일들로 인해 다소 밀리게 되었다. 비록 100주년으로부터도 몇 년이 지났고, 2021년 3.1절도 지났지만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때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늦은 계획을 시작한다. 총서 중 1권은 메타 역사로서 사건에 대한 해석에 대한 서술을 담고 있기에, <3.1운동 100년 2 사건과 목격자들>부터 들여다 보자. 


 '고종의 독살설'은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일제에 대한 민족적 저항감을 고취할 수 있는 소문이었고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3.1운동의 정신은 고종에 대한 충군의식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p59)... 국권 피탈의 현실 속에서 민중의 눈에 비친 조선 왕실의 모습은 더 이상 민족의 구심점이 될 수 없었다. 당시 일제가 수집한 민심 동향 중에 '고종이 자살을 했다고 한다면 그건 한국병합 당시에 했어야 한다'는 지적을 그러한 조선 민중의 정서를 잘 보여주고 있다. 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2 사건과 목격자들>, p61


  <3.1운동 100년 2 사건과 목격자들>에서 제기하는 새로운 해석들은 평화운동으로만 인식되었던 3.1 독립항쟁을 다시 보게 만든다. 고종(高宗, 1852 ~ 1919)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독살설이 민중의 분노를 자아내고, 이를 촉매로 만세 시위로 이어졌다는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본문에서는 마지막 황제의 죽음이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의 단절로 일반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점이 언급된다. 개인적으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시대를 갈망했던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1894)을 연상케 된다. 또한, 1925년 일왕의 항복선언으로 무조건 전쟁을 중단하고 항복한 일본제국의 신민들에 비해, 1919년 당시 황제의 사망을 과거의 단절로 인식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한 우리 선조들의 의식을 비교해 볼 때, 과연 어느편이 더 진정한 근대인(近代人)의 모습에 가까운 것인가.


 보통 '네이션(nation)'은 '국민' 혹은 '민족'으로 번역되지만, 윌슨은 공통의 언어와 문화 등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에스닉(ethnic) 집단이라는 뜻에서 그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윌슨은 네이션을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윌슨은 '네이션'과 '피플(people)'이라는 말을 구별해 사용하고 있다. 네이션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장래 독립을 원하는 특정 민족집단을 언급하는 경우 피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요컨대 조선에 민족자결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윌슨에게 조선 민족이 피플이 아니라 네이션이라고 인정될 필요가 있었다. 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2 사건과 목격자들>, p73


 또한, 본문에서는 3.1 항쟁 이전 2.8 독립선언의 의의에 대해서도 살핀다. 동시에, 2.8 독립선언에 담긴 내용이 얼마나 전략적이었던가를 조명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독립선언서에 담긴 내용이 단순히 울분을 토하는 수준이 아니었고, 열강들을 움직이기 위한 논리체계가 담긴 치밀한 전략의 산물임을 새롭게 배우게 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네이션'이 아닌 '피플'로 대우받게 되었을 때, 독립투사들의 선택이 사회주의로 흐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 아니었을까. 제국주의 열강들의 모임인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는 (헤이그)특사로 받아들여지지도 못한 반면, 코민테른에는 대표를 파견할 수 있었던 당시 상황에서 바라본다면,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당사자 이자, 일본의 우방 미국 보다 혁명 러시아가 더 가깝게 느꼈던 것은 이념을 떠나 너무도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특히 여운형의 청원서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문명 민족으로서 오랜 역사를 가졌고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조선 민족이 네이션이라는 근거를 제시한 뒤 윌슨의 말을 인용하며 독립을 간청하는 구성이다. 일방적으로 민족자결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 민족자결의 대상인 네이션을 인정받기 위한 필요조건을 분석한 뒤 전략적으로 작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2 사건과 목격자들>, p77


 또한, 3.1 항쟁 이후 제암리에서 이루어진 학살과 제노사이드(genocide)의 관계를 살피는 본문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1920년대 일제의 소위 문화통치(文化統治) 역시 민족문화말살이라는 거대 전략의 일부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거대한 제노사이드 상황에서 평화시위로 시작된 3.1 항쟁이 1920년대 이후 간도 지역에서 무장 투쟁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변모라 할 것이다.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법학자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 1900 ~ 1959)이 정의한 제노사이드란 어떤 행위를 일컫는가? "국민 집단의 생명의 본질적 기초를, 그 집단 자체를 절멸시킬 의도로, 파괴하려고 하는 갖가지 행위가 연결된 기도(企圖)이다. 그 기도의 목적은 국민 집단의 문화와 언어, 국민감정, 종교, 경제의 존재를 해체하거나 그 집단에 속하는 개인의 인신의 안전, 자유, 건강, 존엄과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다. 제노사이드는 통일체로서의 국민 집단을 향해 벌어지며, 그 행위가 개인에게 향해지는 것은 그 개인의 특성으로 인함이 아니고 그 국민 집단의 일원인 것으로 인한다." 이것이 렘킨이 정의한 제노사이드의 첫 형태였다. 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2 사건과 목격자들>, p156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른바 '민족대표 33인'을 기준으로 3.1 항쟁이 천도교와 개신교 지도부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졌다는 단편의 기억을 갖지만, 책에서는 유림(儒林)의 역할에도 주목한다. 통신수단이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못한 시기, 서울과 이북 6개 도시에서 시작된 항쟁이 빠른 시기에 전국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에는 보수적인 유림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다. 우리는 3.1 항쟁 속의 유림의 역할을 통해 진정한 보수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유림(儒林)은 일반적으로 3.1운동에 관한 주요 담론에서 배제되어왔다. 그들의 동선은 3.1운동의 '혁명성'과 '근대성'에 몰두하는 연구자들에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유림은 3.1운동을 가까이에서 목격했고 지방 만세시위에 지도력을 발휘한 주요 토착세력이었다. 그들은 고종의 급서 소식을 접하자 깊은 충격에 빠졌고, 인산을 지켜보기 위해 무리를 지어 상경했으며, 2월 말과 3월 초 경성에 대규모 인파를 형성한 장본인이었다. 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2 사건과 목격자들>, p249


 이처럼 <3.1운동 100주년 총서 : 2 사건과 목격자들>은 우리에게 3.1 항쟁의 새로운 의미를 일깨운다. 나라를 잃은 임금의 죽음을 슬퍼하던 이들의 분노에 찬 감정 표현이 아닌, 1919년 베르사이유 평화조약을 전후한 국제정세 속에서 평화롭게 독립을 쟁취하고자 노력한 깨어있는 민중들의 모습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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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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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구조에 대한 해경 지휘라인에 대한 1심 판결 결과가 무죄로 나왔다. 재판부의 판단은 해경 지휘부의 결정이 당시 상황을 바꿀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지만, 당시 현장에 있었던 민간 선주들과 협력을 잘 했다면, 모든 사람은 아니어도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처벌이 과거 결과를 되돌려 놓을 수는 없겠지만, 책임 인정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 유감으로 남는다. 때문에, 2심 재판을 더 지켜보게 된다...

이 사건의 포인트는 민간 선주들도 애들을 살릴 수 있었다는 겁니다. 해경이 처신만 잘했다면 많은 아이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섬의 모든 선주들이 다 무전기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사고가 났다는 것을 다 들었어요. 그래서 섬에 있던 모든 배들이 세월호로 집결했거든요. 문제는 뭐냐면 애들을 구하려면 민간 선주들이 끌고 온 배에 두 사람은 타고 있어야 해요. 한 사람이 세월호에 올라가 애들을 구하는 동안 배가 떠나가지 않도록 잡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해요. 그걸 '닻거지'라고 하는데 닻을 내려서 배가 안 밀려나가게 당겨야 합니다. 혼자 아이들을 구하면 배가 가버리기 때문에 구할 수가 없어요. 전부 다 사고소식만 듣고 최고 속도로 달려가보니까 모두 혼자 타고 있는 상황이어서 세월호에 올라갈 수가 없었던 겁니다... 배에는 전부 '앙카'라는 게 있어요. 그걸로 유리창을 깨면 그 방 아이들은 다 살아서 나올 수 있었던 거예요. 민간 선주들 전부가 하나같이 다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섬에 내려갔을 때 선주들이 나를 보자마자 하는 첫마디가 "해경 개새끼, 죽일 놈의 새끼들, 저 새끼들이 안 구했어" 였어요. _4.16 세월호 참사 기록 위원회 작가단, <금요일엔 돌아오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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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02-16 12: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기사 보고 정말 할말이 없더라구요. 무죄라니.... 그 많은 생명들을 눈 앞에서 구하지 않고 그냥 두었는데 무죄라니요 ㅠㅠ

겨울호랑이 2021-02-16 12:42   좋아요 1 | URL
네... 물론 시간이 지난 뒤에 이들을 처벌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번 판결로 상명하복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풍조가 퍼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공직사회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판결이라는 점에서 참 안타깝습니다...

페넬로페 2021-02-16 15: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라 그런지 세월호는 저에게 남다르게 더 마음이 아파요~~
저 판결소식에 아이를 잃은 부모들은 너무 상심이 클 것 같아요^^
너무 화가 납니다**

겨울호랑이 2021-02-16 16:00   좋아요 2 | URL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월호 사건에 분노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은 우리 아이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월호가 제대로 마무리 되지 않는다는 것은 언제든 그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다른 의미일테니까요...
 
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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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중한 백지 한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얻어낸 것은 단지 백지 한장이었습니다.

조금만 함부로 대하면 구겨져 쓰레기가 될 수도 있고
잠시만 한눈을 팔면 누군가가 낙서를 해버릴 수도 있지만 그것 없이는 꿈꿀 수 없는 약하면서도 소중한 그런 백지 말입니다.(p171)

87년 6월 민주 항쟁을 그린「100°c」에서는 6월 민주 항쟁을 기점으로 99°c와 100°c를 구분하지만, 책의 에필로그에서도 말하듯 우리가 얻어내는 것은 언제나 작은 종이 한 장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종이를 채우는 과제를 하나 더 부여받고 다시 99°c의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은 아닐런지... 그 숙제를 한 뒤에야 다음 과제를 받기위한 100°c로의 도약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 책을 덮으며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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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5 13: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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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5 13: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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