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근대의 민족 ‘국가‘ 개념이 아닌 ‘역사공동체‘로서 ‘중국‘, ‘한국‘을 바라보고 그 사이 독자적인 문명으로 ‘요동‘을 바라본다. 저자의「요동사」는 통해 중국과 한 문명을 중개하거나, 위협하면서 독자적인 문명으로 ‘요동‘ 을 독자에게 보여주며, 이를 통해 독자들은 황하문명과 다른 독자적인 홍산문명을 기초로 ‘고조선-고구려‘에서 기원하여, ‘발해- 요-금-원-청‘으로 이어지는 요동 지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이 (단일)민족주의 사관에 익숙한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당대를 살아갔던 이들의 시각에 가까운 역사독법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중국‘이 특정한 국가의 국호이기에 앞서, 특정한 문화와 역사적 체험을 공유한 일정한 범주를 가리켜왔듯이, ‘삼한‘ 등도 특정한 국가의 이름이 아니라, ‘중국‘의 그것과는 다른 고유한 문화 양식과 정치 체제 및 역사적 경험 등을 공유한 지리적, 역사적범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즉 ‘중국‘이 중국인들의 나라‘ 이름이라면, 삼한‘ 등은 한국인들의 나라‘ 이름이었다. - P49

요약하건대 역사상 ‘중국‘이 중원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한인(漢人)이라는  특정한  인적  집단을  중심으로 하여 화하(華夏)의 고유한 문화를 창조하고 향유하면서, 특수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 하나의 역사공동체였다면, 이와 대응하거나 대립한 역사상 ‘요동‘도 또 다른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이해될 수 있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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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3년에 조선의 세종대왕은 한국어를 표기하는 문자 체계인 한글을 창제했다고 선포하고,  새로운 문자로 책을 펴내는 정책에 착수했다. 이런 조치는 세종대왕이 조선을 안정화하고 번영을 부추기기 위해 추진한 수많은 전략 중 하나로, 실제 조선 또는 이씨 왕조가 그 후 450년간 존속하는 계기가 되었다.
- P130

오로지 자모 28자(훗날 24자로 줄어듦)로구성된 한글은 한문보다 훨씬 배우기 쉬웠으나, 한글의 도입은 전통주의자인 귀족들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들은 한글을 도입하면 다른 신분의 사람들에게도 과거시험에 응시할 기회를 제공하여 자신들의권력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다. 그 결과 한글은 널리 사용되 못하고 낮은 신분에서나 쓰는 ‘언문‘으로 비하당하다가 19세기에 재발견되어 그 후로 한국민족주의의 매개체로 발전했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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쟝 밥티스트 레지(Jean-Baptiste Regis, 1663~1738)의 고조선과 고구려에 대한 기록은 신화 속의 국가로 인식되는 고조선과 중국 역대 왕조 - 하, 상, 주 - 와의 관계를 대략적으로나마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를 통해 BCE 2333년 경에 세워준 것으로 추정되는 오랜 고조선 역사가 허구가 아님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객관적 자료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또한, 고구려의 숨겨진 역사 200년(이는 6대 태조대왕의 오랜 재위 기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더 연구가 필요하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고대사의 비밀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2021년 10월 3일. 하늘을 여는 날인 개천절을 맞아 고조선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의 의미를 어느 이방인 사제의 글 속에서 찾아본다...




(상나라 제왕) 반경 때의 세력 약화는 고조선이 강남과 산동 지방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고조선은 자신들을 정복하여 몰아낸 진시황 통치 전까지는 강남과 산동을 점유했었다. 그러나 주왕조(Tcheou, 周王朝) 이전 고조선의 역사적 사실들은 알려진 게 미미하기에 중국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기자(箕子) 시대 이들의 왕정(政)이 제대로 성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 기자로부터 조선은 중국의 한 주로 복속되었던 시기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2814년간 이어져 내려왔다.
- P178

"고구려는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비기에 의하면, 고구려가 조선땅을 점령해서 90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고 80이 다 된 장수에 의해 망한다고 했습니다. 현재 고구려가 조선을 통치한지 한(漢)나라 이래로 900년째 되는 해입니다. 우리 총사령관 이세적은 80세이고, 이미 그 나라에는 기아가 만연해 백성들은 모반하여 적에게 붙고, 늑대와 여우들이 마을에 출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현상으로 그들의 영혼은 이미 두려워하고 있기에 이번 원정으로 고구려는 반드시 끝장 날 것입니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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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21-10-03 21:3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개천절 의미를 살리는 페이퍼네요.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님도 주말과 연휴를 편안히 보내시길! ^^

겨울호랑이 2021-10-03 23:11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오거서님 평안한 연휴 보내세요!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고유의 친족 이데올로기는 신분의 위계와 신분의  배타성을 찬미하면서 운명의 붉은 실처럼 신라  초부터 19세기 말에 이르는 한국의 역사를 관통했다. 사회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보다 우선시함으로써, 이 이데올로기는 출생과 출계를 기반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엘리트를 창출했고, 엘리트에게 시공을 초월하는 엄청난  내구력을 부여했다.  - P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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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의 눈 아래에서 - 한국의 친족, 신분 그리고 지역성
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 김우영.문옥표 옮김 / 너머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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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과 권력이 조르주 발랑디에의 말처럼 ˝변증법적 관계˝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은 신라사회를 신분집단들로 계층화하여 최상위층만이 국가와 사회에서 가장 유력한 자리를 세습적으로 차지할 수 있게 만든 골품제에 의해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p51)... 골품제가 무너진 뒤에도, 그 바탕에 깔린 철학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귀족적 출계집단 모델에 기초한 사회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에 우선했다. 이 두 가지 힘, 즉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중대한 상호작용은 고려의 역사를 계속해서 귀족적 출계집단의 성쇠와 뒤얽히게 만든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p52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1935 ~ )가 전작 <한국의 유교화 과정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A Study Of Society And Ideology>에서 여말선초(麗末鮮初)를 배경으로 신유학(新儒學)의 도입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면, <조상의 눈 아래에서 Under the Ancestors‘ Eyes: Kinship, Status, and Locality in Premodern Korea>는 신라(新羅)와 조선(朝鮮) 후기까지 분석을 확장해 간다.

본문을 통해 그가 내린 결론은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인 것‘은 언제나 ‘정치적인 것‘에 앞선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성(聖)과 속(俗)의 대립이 있었다면,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는 혈연(血緣)에 근거한 엘리트 집단과 이를 무너뜨리기 위한 정치권력과의 다툼이 있었다고 본다. 다른 계층에게는 배타적이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지방에 근거하며 네트워크를 통해 세력을 굳건하게 유지하는 향(鄕)족과 수도에 위치하며 중앙권력과 관계를 공고히 하는 사(士)족. 이들간의 오랜 다툼의 기원을 저자는 신라에서부터 찾는다. 그 사이 왕조 교체와 같은 정치 격변기에 선종(禪宗), 성리학(性理學)과 같은 정치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시대 정신으로 제시되었지만, 사회적인 관계에 기반한 지배층의 교체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음을 저자는 역사를 통해 보여준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뷰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고려시대에 발생한 사건들이 말해주듯이, 출계집단들의 역사에는 언제나 운명의 변전이 있었고, 왕조 교체기에는 으레 그들의 부침이 더욱 심했다.(p105)... 놀랍게도 고려시대의 주요 출계집단들 가운데 소수만이 조선 초기에 쇠잔했다.... 규모가 작고 뿌리가 깊지 않은 출계집단들이 잠시 흥했다가 사라진 것에 비해, 규모가 크고 방계가 많은 출계집단들은 다른 분파를 통해 명맥을 유지하면서 ‘족망‘을 보전할 수 있었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p107

한국에도 상인과 무역업자, 여러 부류의 장인이 존재했지만, 엘리트층이 과거의 모든 과정을 통제하고 있었기에 비엘리트 출신의 경쟁자들은 아무리 부유하고 박식해도 과거제를 통해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에 올라갈 수 없었다. 더욱이 재산은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단 한번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회적 가치로 인정받지 못했다. 나아가 한국인의 친족 중심 성향으로 인해, 엘리트층과 관료사회가 완전히 일치한 적은 없었다. 사회적인 것은 언제나 정치적인 것에 우선했다. 바로 이런 사실이 조선 후기의 재지 엘리트층에 힘을 실어주었고, 덕분에 그들은 중앙의 정치과정에 더 이상 참여할 수 없게 된 뒤에도 높은 사회적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족의 경쟁자들은 비엘리트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에 엘리트의 사회적 배타성에 의해 생겨난 두 이례적인 사회집단인 향리와 서얼 중에서 나왔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p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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