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시기 동안에 남한 북한 각각에서 발생한 내부변혁은 이들 국가들을 구성요소로 하는 48년 질서 자체를 변화시켰다. 이 질서는, 그것의 다이내미즘 자체가 전체의 구성단위인 남북한에게 영향을 주고 또 받는 상호적 효과를 갖는 독특한 변수로서 취급될 수 있는 그 자신의특별한 다이내미즘을 발전시켰다. 곧 하나의 체제가 구성되면 그 체제의 다이내미즘에 대해 개별단위들이 반응하고, 그것은 또 그 체제의 다이내미즘을 형성하는 독특한 양식을 갖는다. 이러한 교환의 체계는 그반대로도 발생한다. 즉, 내적 변화가 48년 질서를 변화시켜 전체 체제에 의해 형성된 변수를 수정하는 것이 발생한다. 이러한 방법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48년 질서의 구조와 과정의 전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의 기준을 두 사회에 각각 다르게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 P70

‘48년 질서‘ 시기 남한과 북한 체제를 이끌어간 근본적 기치는 민족통일이었다. 특히 북한은 군사주의와 급진주의가 결합되어 통일을 위해 사회의 모든 정신과  자원을 집중시킨 하나의 혁명적  동원체제였다.  혁명적 동원체제는 간단하게 말해 혁명을 수행하는 또는 하기 위한 동원체제를 말한다. 동원체제는 리더십이 특정의 주어진 이데올로기와 주의, 목표를 위해 사회의 자원을 위로부터 추출, 동원하고 집중시키는체제를 말한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의 북한체제를 특징짓는 두 요소는 바로 혁명과 동원이었다.  - P73

이를테면 북한의 공식 통일정책인 국토완정론과 남한의 공식통일정책인 북진통일론, 그리고 그것들이 놓인 48년 질서가 대표적이다. 이것을 단순히 맞물린 구조로만 보아서는 안되며, 그 위계적 구조까지 보아야 한다. 국토완정론은 스탈린의 외교정책과의 연관속에서, 북진통일론은 미국의 대한정책과의 연관속에서  해명되어야  한다.  이러한 교직 자체가 대쌍관계동학 접근이 보여주는 상호접근이나 비교접근과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중국혁명과 한국전쟁, 38선의 복합성과 다양한 균열구조를 동태성과 함께 추적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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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을 가만히 보면, 이승만 정권이나 미국이 제대로 대응했다면 전쟁이 중부 전선에 머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으면 그렇게까지 큰 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엄청난 규모의 주민 집단 학살이나 동족상잔도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전혀 다른 의미의 한국전쟁으로 기억됐을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나게 문제가 심각했다. 초기의 패배에 대통령 책임이 너무나 컸다. 또 대통령의 도피 같은 것이 장병 사기에 어떤 영향을 줬느냐 하는 걸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이 점과 관련해 중대한 지적이 나왔다. 뭐냐 하면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왜?3일간이나 머물다가 7월 들어 남하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가 1990년대 들어 제기됐다. 국군 고급 지휘관이 쓴 저서에도, 미군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이고 국군이 전열을 가다듬을 수 없었던 이 3일간이 지극히 중요한 순간으로 쓰여 있다.

그래도 대통령이란 건 굉장히 소중한 자리다. 전쟁이 발발했으면 즉각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해서 대책을 세웠어야 하는 거다. 전쟁 수행을 위해 풀어야 할 문제가 아주 많고 국민들에게 해야 할 조치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6월 25일 일요일 당일엔 국무회의 같지도 않은 국무회의, ‘간담회’라고 불리는데 그걸 열었을 뿐이다. 거기서 서로 잡담 비슷한 걸 한 걸로 돼 있지, 대책다운 대책을 논의하거나 세운 게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6월27일 새벽2~3시경 서울역에 비상 열차를 세워놓고 거기 타버렸다. 서울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장관들에게도, 군 수뇌부한테도, 국회에도 일체 안 하고 혼자 가버렸다. 주한 미국 대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군 수뇌부와 주무 장관한테는 마땅히 얘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 대책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비밀이 새 나갈까 걱정돼서 그랬는지 몰라도, 다른 누구한테도 얘기 안 하고 비서진한테만 얘기해서 그 열차를 끌고 대구까지 내려갔다. 그런데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엔 다시 대전으로 올라갔다.

그에 더해 6월 말 이후, 대개 7월 초부터 국민보도연맹원과 요시찰인에 대한 전국적인 학살이 자행돼 8월 중순까지 계속됐다. 또 형무소에서도 대량 학살이 자행됐다

국회는 인권 유린을 막고자 굉장한 노력을 한다. 사형
私刑금지법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의 비상조치에 관한 개정 법률안, 뒤이어 폐지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그때마다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런 식으로 국회랑 사사건건 맞서다가 거창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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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한국전쟁 70주년 사진집
존 리치 지음 / 서울셀렉션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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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찍은 사진 중 어떤 사진은 흑백으로 어떤 사진은 컬러로 남아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머릿속에 흑백으로 남아있을 리는 없겠지만, 앨범의 사진을 통해 떠올린 기억들은 그 이상의 이미지로 선명하게 떠올리기 쉽지 않다. 다만, 같은 정도의 화질로 전후 관계를 밝히는 정도가 최선인 듯하다. 나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1950 한국전쟁 70주년 사진집>은 한국전쟁과 관련한 컬러 사진이 수록된 사진집이다. 좀처럼 보기 힘든 선명한 인물들의 표정과 옷차림,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TV문학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농촌 풍경 등은 한국전쟁 당시 상황을 우리에게 그대로 재현해 준다는 점에서 귀한 자료라 여겨진다. 힘든 상황에서도 낯선 이방인 기자가 들이댄 사진기에 웃음을 짓는 군인과 민간인들의 모습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재난 상황에서도 삶이 이어지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마치 과거 격전지에서 총알 자국 난 철모 사이에 피어난 한 송이 민들레를 발견하는 듯한 느낌을 독자들은 받을 수 있다.

사진집 전체에서 전쟁의 참혹함은 발견하기 힘들다. 참상이 빚어낸 처참함도 잠시 흘러간 시간에 의해 치유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되기에, 처참한 전장의 상흔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쉬움이 남을 수 있는 사진집이 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거대한 전쟁에서도 인간의 희노애락은 이어지고 있으며, 전쟁의 흔적을 곧 덮어버린 자연의 힘도 산업화의 파도에 쓸려가 버리고 있다는 현실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생생한 천연색의 사진집만이 갖는 매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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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지도부가 잘못 판단한 제일 큰 이유는 미국이 중국의 국공내전에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은 무기 등 엄청나게 많은 물자를 중국에 항공기 등으로 보냈지만, 지상군을 보내지는 않았다. 내전이었기 때문이고 장개석과 국민군에 대한 미국의 여론이 나빴던 것도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6·25전쟁이란 말 속에서는 남북이 중심이 되고 있고, 세계 여러 나라와 미국, 중국이 전쟁에서 한 역할이 부각되지 않는다. 우리 국사책에도 그렇게 서술돼 있다. 전쟁의 전개 과정이나 성격이 6·25전쟁이라는 단어에는 충분히 담겨 있지 않다.

한국전쟁이라는 규정에는 세계 여러 나라가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여했다는 점이 비교적 잘 드러나 있다. 또한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달리, 세계 여러 나라가 참전했는데도 전쟁은 한반도에서만 주로 진행돼 다른 나라에 있던 사람들은 전쟁의 피해를 보지 않고 한반도 주민 전체만 극심한 피해를 봤다는 특징도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용어가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38선 자체가 우리로서는 대단히 기분 나쁘지만, 38선이 그어질 때부터 거기에는 국제적인 관계가 응축돼 있었다는 점에서도 단순히 내전으로 끝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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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1962년 5월 14일 대법원장에게 ‘지시’각서 5호를 내려보냈다. 이 지시각서에서 그는 혁명 이래 일부 법관이 아직도 새로운 세계관 확립 없이 돈과 술에 팔리고 정실과 야합하는 등 구질서와 타협했을 뿐 아니라 여전히 낡은 사고방식으로 혁명정신과 동떨어진 재판을 했다고 지적했다. 일부 법관들이 중대한 국가적ㆍ사회적 법익을 침해한 불순분자는 방면하고, 힘이 없어 권리 위에 땅을 치고 우는 약자에 대하여는 무고한 벌을 가하고도 하등의 양심적 가책도 없이 마치 법이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식 교육을 받은 박정희는 당시 사법부를 군대의 법무감실 정도로 여겼다고 한다.

동백림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해외에 있던 피의자들을 우방국 주권을 침해하면서 무리하게 국내로 연행해 와 국제적으로 크게 물의를 빚은 사건이다. 1심과 2심에서는 사형을 포함하여 중형이 선고되었으나 대법원에서는 간첩죄를 비롯해 대부분 무죄가 선고되는 등 파기환송 판결이 많이 나왔다. 윤이상 씨 부인 이수자 씨 등은 재판 과정에 중앙정보부 등 외부의 압력이 작용했다면서 "중정은 재판관과 검사에게 압력을 가했으며 재판관은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3일간 호텔에서 감금되다시피 했다"라고 주장했다.

최영도 변호사에 따르면 대법원장이 "놀라시는 척하시는 것" 같았다고 한다. 검찰총장에 법무장관까지 지내, 검찰의 행태를 누구보다 잘 알 만한 대법원장이 이런 사정을 전혀 몰랐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판사들이 자부심을 갖고 여태까지 외압에 굴하지 않고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해왔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검찰과 정보기관에서 일일이 판사들의 동정을 감시하고 도청하고 미행하고 은행계좌를 조사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적어도 사법파동 이전까지는 상당히 자유롭고 배짱대로 재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누렸다. 그 당시 서울형사지법 단독판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서 서울시장보다도 힘이 세다는 말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위로는 대법원부터 아래로는 지방법원까지 박정희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는 판결이 연이어 나오자 정가와 법조계에는 정부가 어떤 형태로든 사법부를 손볼 것이라느니 정부가 바라는 대로 판결하지 않은 판사들은 다칠 것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그리고 이 소문은 곧 현직 법관 두 명에 대한 검찰의 영장청구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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