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아이 1 - 애장판
시미즈 레이코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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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방학에 유리가면을 인상깊게 읽은 기억이 있었다. 추석에 잠시 티비를 돌리다가 유리가면의 마야와 츠키카게 선생님을 보게 되어 재미있는 만화를 보고 싶었다. 비디오 가게에 들렀다가 이 만화의 해설을 읽고 빌렸는데... 결과는 별로였다.

사파이어빛 푸른 눈이란 말에 끌려서 빌리긴 했지만, 이 이야기는 사파이어빛 청순한 사랑 이야기도 아니었고, 유리가면처럼 진하게 인간냄새 나는 만화도 아니었다.

푸르른 물빛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검은 색 파멸과 종말의 이미지가 온 화면을 뒤덮는 이야기로 반전되면서 비극적이라기보다 비상식적인 결말로 이끌리는 스토리에 독자는 따분해진다.

운명에 맞서 극복하는 희극이거나, 무거운 운명에 짓눌리는 비극을 기대하던 나는 시시한 결말에 실망했지만, 요한게시록을 인용해가며 체르노빌 사고까지를 엮어내는 솜씨는 작가의 역량을 무시할 수 없게 한다.

비극의 본성은 기하학적인 정신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비극적인 운명은 기하학의 공리처럼 한번 정해지면 절대불변이기에 비극을 낳는다는 것이다.

명쾌하고 즐거운 만화를 기대했던 추석은... 달도 못 보고 흐린 추석으로 지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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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면 길이 보인다
이준애 지음 / 삶과꿈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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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내가 몇 년 전에 사둔 책이다.

이 책이 좋은 이유는 우선, 사진이 시원스럽게 좋고, 그 사진 따라 여행하고 싶을 때, 안내 지도가 깔끔하게 잘 그려져 있다. 그리고 계절에 따라 지역에 따라 잘 갈라 놓아서 여행에 앞서 늘 뒤적거려 보는 책이다. 오랜만에 이 책을 펼쳐들고 내가 들렀던 길과 지나쳤던 길들... 그리고 아직 가보지 못한 길들을 생각해 본다.

정말 이 글의 제목대로 떠나면 길이 보인다. 오늘같은 휴일은 돌아오는 길이 너무 힘들 것 같아 선뜻 떠나지 못하지만, 지금은 참으로 멀게 느껴지는 곳이라도 막상 떠나보면 길이 보인다.

내가 지도를 꼼꼼하게 공부하지 않고 운전대를 잡은 것은 오 년이 지나면서였다. 이제는 목적지를 모르는 곳으로 가더라도 지도를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 길을 잘 알고 가면 그 길밖에 못 가지만, 길을 잘 모르고 가면 여러 길을 다 다녀볼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너무나 슬퍼 빛나는 사랑의 공간.

여기,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가을이 있다.

한반도 가슴에 핀 이슬의 빛깔.

산빛, 물빛만 봐도 눈물이 떨어진다.

퉁, 가슴 울리는 겨울 산사의 적막한 운치.

서럽다, 서럽다! 저 아름다운 낙조가.

이런 제목들만 보아도 이미 마음은 그 곳으로 달려간다. 아름다운 이 땅 방방곡곡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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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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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선생님의 글을 꼼꼼이 읽는 편이다. 한시이야기도 서너번 읽었고, 박지원 이야기 '비슷한 것은 가짜다.'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서 이 책도 꼼꼼이 읽으려다 실패했다.

미친 사람들이, 매니아들이 다다를 수 있었던 그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원했던 나로서는, 앞부분의 삽화들에서 광인들을 만나고 실망했다. 매니아와 광인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간 정도부터 휘리릭 넘겨버린 책이다. 돈내고 사지 않은 걸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사실, 요즘 돈 주고 책 사기가 무섭다. 워낙 겉포장이 그럴듯한 시대라 외관에 속기 쉽고,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날이 하루하루 늘수록 가진다는 것이 두렵다. 자꾸 버려야지, 가지는 건 불편하고 무겁다.

내 책꽂이에는 십 년 이상 한 번도 펼쳐지지 않은 숱한 짐들이 오롯이 꽂혀있다. 최근 읽은 고마운 책들은 오히려 베란다에 가로로 세로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난 무엇에 미친 일이 있었던가... 곰곰 생각해봐도 내 성격은 미친 놈이 되기 어렵다. 그게 미칠 일이지만, 결국 난 미치지 못한다. 그럼, 앞으로 뭐에 미치고 싶은지... 요즘은 그걸 생각한다.

나이가 마흔을 맞게 되면서, 불혹의 의미를 깨닫는다. 무엇에도 혹하지 않는... 돈이 많을 필요도 없고, 더군다는 여자는 더 필요없고, 누가 칭찬하고 유명해 진다 해도 그런 거 별로 바라지 않게 되고... 이제는 덤덤한 삶이 되어가고 있는 거 같은데...

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정말 미치고 싶은 게 있긴 하다. 내 마음에 바람을 보내고 파문을 일으키는 정말 미쳐버려서, 높은 경지에 미치고 싶은 것이 꼭 하나 있다. 그 청사진이 그려진다면... 그릴 수 있다면... 그리고 삽질해서 그 청사진을 이룰 수만 있다면... 모르지.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거니깐. 손수 자를 대로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서 청사진을 그려볼 일이다. 어느 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정말 미쳐 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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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3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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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K, 이 석자가 표지에서 시종 거슬린다.

"원래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은, 내용으로 첨부되는 게 아니라, 형식 속에 침전되는 것."

이런 중요한 걸 아는 저자가 왜 표지에 지 이름 석자를, 그것도 미제 글자로 떡하니 박아 두었단 말인가.

이 책의 뒷표지엔 알라딘의 어느 독자 리뷰에, 쉽게 쓰였고 이해하기 쉽다고 한 서평이 적혀 있지만, 미학과 그렇게 멀리 살아오지 않았다고 착각하는 나에게 이 책은 충분히 어려웠다.

'가상'과 '진리' 사이를 오간다는 예술의 진자를 작가는 잘도 따라가는 것 같지만, 나는 능력(Konnen) 부족을 의지(Wollen)로 읽었다는 쪽이 가깝다.

美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란 명제에는 동감이다.

'어렸을 적에 우연히 들어간 대나무 숲은 푸른색 숨결을 내뿜고 있었다. 이 신비야 말로 진짜 자연이다.'고 하며 '아우라'를 설명하는 부분은 탁견이다. 올 6월 교육과정 평가원 모의고사에도 실린 부분이다. (난 수능이 정말 대학 입학 고사의 수준으로 적합한지 상당히 회의적인 국어 선생이다.)

몇달 전, 트로이를 볼 때, 트로이 성 앞의 금빛 신상을 보았다. 그 신상이 있던 자리는 바다와 어울려 정말 신성한 아우라를 느낄 수 있던 자리였다. 그 많던 그리스, 로마, 이집트의 신전, 제단, 오벨리스크, 그리고 숱한 프레스코화들, 그것들이 '존재'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우러나는 아우라를,

합리주의적 정신이라는 이름의 제국주의자들은 신비가 존재하는 것을 못견뎌해 그 비밀을 밝혀내 굳이 자연의 아우라를 깨뜨리고 만다. 영국, 빠리의 박물관, 광장들의 미술품들은 그래서 아름답기 이전에 날 다리만 아프게 했던가.

그는 에셔, 마그리뜨, 피라네시의 알레고리를 통해, 눈에 보이는 형체는 아무 의미도 없으나, 뭔가 다른 무언가를 말하려고 우의적 기법을 다양하게 구사한다.

그리고 플라톤, 아리스, 디오게네스의 투박한 대화들과 구어적 문체도 글을 쉽게 읽도록 한 형식적 배려로 보인다.

그러나 이 관점은 역시 고전에 치중한 1권에서 유효했고, 우연의 카오스가 필연의 코스모스를 뒤엎어 우연과 필연의 카오스모스로 변해버린 현대 예술의 이해에는 그닥 효과적인 것 같지 않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 하듯이, 모든 위대한 화가는 자기만의 미술사를 갖고 있다. 진중권의 이 저작은 그의 폭넓은 비평 활동의 한 함축이라 하기엔 아직 좀 미흡해 보이지만...

유홍준(그도 미학과 출신이다.)의 답사기 1권이 '아무리 가까운 말투와 쉬운 예들을 들어 말해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을 지닌 원작의 아우라를 가진 데 반해, 2권이 멀리 있어도 가까운 것이 반복된 듯한 복제의 아우라를 보여주었던 것은, 문화재에 대한 그의 독보적인 아우라가 1권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느낀 적이 있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복제술은 "피카소를 보는 보수적 태도를 채플린을 보는 진보적 태도로 바꿔" 주듯이, 매체는 대중을 주체로 만든다고 한 그의 말처럼, 이 책의 제 1권은 충분히 미학 오디세이의 제목을 붙일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본다.

다시 돌아와, 갓낫아이 이름을 원주로 붙일까, 지현이로 붙일까를 고민하던 전씨 부부가 내지른 말, "그래, 전원주가 전지현보다 이쁘다!"는 우리의 눈을 고정시키지 말라는 경고로 듣고 있다.

P.s. 이 책의 저자가 이 비평적인 리뷰를 읽는다면 상당히 기분나쁠 것이다. 이 참에 더 기분나쁘게 하자.

1권 166쪽의 정 12면체는 정20면체의 오류다. 개정 전 저지른 오류를 그대로 싣는 것은 나쁜 일이다.

3권 316쪽의 스탈린의 순서를 다시 보시길...

CJK, 너무 기분 나쁘신가. 그럼 칭찬 한마디. 개정 전의 칼레이도치클루스는 따라 만들기 어려웠는데, 이번 책에선 좀더 상세한 그림을 덧붙인 점, 훌륭하다. (근데 순서가 좀 이상하긴 마찬가지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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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김혜자 지음 / 오래된미래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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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대학다닐 때, 독설을 잘 내뱉었던가보다. 내 주변에 이드(id, 본능)가 강해 '슈퍼이드'란 이도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나 자신이 얼마나 슈퍼에고에 둘러싸여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쥬스를 마시면서 길을 걷다가 빈 깡통이 되어도 그 빈 깡통을 아무데나 버리지 못하는 나, 식당에서 들고 나온 이쑤시개를 계속 들고 다니는 나. 새벽 건널목에 아무도 건너지 않아도 신호를 지키는 나.

이런 나는 착해서가 아니다. 어떻게 착하지 않다는 걸 아느냐면, 그런 내가 나도 짜증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정상적 자아를 지나치게 억누르는 슈퍼에고맨이라고 할 수 있다. 루쉰의 이야기대로 치자면, 아큐의 말대로 나는 '슈퍼맨'이다. 아큐는 자기에게 부정적인 것은 빼먹고 말하는 '정신적 승리법'의 대가니깐.

우리는 너무 착하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사소한 잘못에도 마음 아파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정작 내가 마음 아파하고 미안하게 생각했던 것은 사실은, ... 사실은 엉뚱한 것들이 아니었나.

정말 내가 미안해야 할 것들은, 이 안에 다 들어 있다. 내가 배부른 것, 내가 방금 마신 독일 맥주.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나를 둘러싼 평화로운 공기, 먼지 묻지 않은 잠자리와 가족. 이 모든 것이 얼마나 호화스런 것이고, 사치스런 것들이었는지...

난 이 책을 할인매장 갈 때마다 읽고 또 읽는다. 어떤 날은, 읽은 기분이 아닌 날, 그림만 보고... (*그림 아래는 세상이 100명의 나라라면의 글귀들이 적혀 있다.) 오늘같이 피곤한 날은 느릿느릿 여기 저기 랜덤으로 읽는다.

슈퍼맨인 나는, 너무도 도덕적인 나는 정말 쓰잘데기 없는 것들로만 고민해왔다는 걸, 이 책은 금세 깨닫게 해 준다. 김혜자의 웃음도, 가엾은 아이들과, 여인들과, 사내들의 씁쓸한 웃음도... 나를 깨끗하게 한다. 그 더러움이 나를 깨끗하게 하고, 그 고단한 삶이 나를 싱싱하게 한다.

싱싱하게 살 일이다. 고단한 척 하지 말고. 그 이들이 본다면,

너, 그렇게 호화스럽게 살면서도 선생 노릇 올바로 못 하겠니? 하고 꾸짖을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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