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가르치는 은자들
피터 프랜스 지음, 정진욱 옮김 / 생각의나무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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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의 은자들 이야기다.

나를 만나기 위하여, 동굴에서 사막에서 아니면 조용한 움막에서 칩거하며, 금욕과 빈곤을 낙으로 삼아 절제와 소박한 청빈을 도구로 하여 절대 고독과 소명에 대한 명상을 행하며, 고행을 서슴지 않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

번역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생생하게 은자들의 의도들을 전달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는 책이다. 생생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침묵을 통한 은둔 생활은 절대로 <허위>를 참아주지 않는다는 대목에서는 은둔이 나를 찾는 작업임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토머스 머튼은 은둔 생활 중의 독서 행위는 다른 그 어느 곳에서 겪은 경험과도 완전히 다르다고 설명한다. 침묵과 사방의 벽, 이 속에서 인간일나 존재는 철저히 혼자가 되어 경계하는 상태가 아니라 완벽하게 마음을 풀어 놓고, 감수성을 열어 놓은 상태가 된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더없이 고요하다는 것은 온 몸의 살갗으로 진리를 듣고 존재의 모든 부분으로 진리를 흡수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은둔의 소명을 받은 사람은 자신을 비우라는 부름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나의 독서도 일종의 은둔 과정으로서의 수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혼자 놀기, 자신을 비우기, 그리고 자신과 대면하기... 나와의 최초의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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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 - CJK - 죽은자를 위한 미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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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두렵다. 논리적으로 인연의 한 부분에 죽음이 있다고 하지만, 특히 갑작스런 죽음은 우리를 공포스럽게 한다. 우리에게 사흘이 주어진다면, 하루가 주어진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나는 사흘 동안 죽음에 대한 공포에 빠져 쇼크 상태로 지낼 것>이란 답을 얻기 쉬울 거라 생각한다.

전쟁은 무섭다. 전쟁에는 필연적으로 죽음이 뒤따르기 때문이고, 그 죽음에는 선과 악, 미와 추의 구분이 없이 무차별적 광기에 젖은 피비린내만이 처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터를 뒤덮는 포화와 초연 아래 고개를 들 수 없는 사람들의 대뇌 피질에는 <충격과 공포>에 대한 신경 회로만이 바쁘게 활동할 거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탈을 쓴 미국에 의한 평화는 부시에 의해 <악의 축>으로 증명되었다. 20세기 말에서 21세기에 걸친 신 십자군 전쟁은 父子 부시에 의해 <악의 변두리 국가> 이라크를 <악의 주축국> 미국이 쳤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슬람이라는 용서할 수 없는 종교를 미국이 치고, 다시 이슬람이 9.11 역습을 감행하고, 십자군 전쟁은 완성된다.

이 와중에 진중권은 <충격과 공포>, <이라크에 자유를> 주는 작전 속에서 죽음을 읽고, 그 죽음의 악취에 취해 준동하는 자유주의 내지는 애국주의자들의 미친 놀음을 논리적으로, 내지는 감상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의 글이 솔직하고 담백하여 잘 읽힘에도 불구하고, 가장 낮은 곳으로 가지는 못하는 부담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 안식을 주라는 죽은 이들을 위한 장엄 미사곡인 레퀴엠이란 용어도 그렇고, 중간중간 쓰이는 라틴어들이 주는 무게는 한자 문화권인 우리에게는 우리말에 대한 한자어의 압도를 느끼게 한다.

아그네스 데이(신의 어린 양), 리베라 메(나를 구원하소서)... 이런 라틴어들은 뭔지 있어 보이지 않는가.
부산에 리베라 백화점이란 백화점이 있었다. 아무래도 중소 백화점은 롯데, 현대 백화점처럼 구색을 갖추기 어렵다 보니 어렵게 어렵게 운영하다가, 세이브 존이란 중저가 판매점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말만 두고 본다면 리베라가 <구하다>고 세이브도 <구하다>니깐 말은 그 말이 그 말이지만, 백화점에서 할인매장 정도로 바뀐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무게의 차이에서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는 정도를 느낄 수 있다. 영어 포니(말)는 소형차같지만 라틴어 에쿠스(말)는 대형차 느낌이 드는 그런 것.

중요한 권세를 누리란 뜻의 이름으로 보이는 그의 이름을 굳이 CJK라는 그가 그렇게 싫어하는 제국주의자들의 문자로 적는 걸 보면, 그도 문화 권력의 라틴어 층에서 누리고 싶은 뭐가 있는 거나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는 나도 어지간히 삐딱한 생각을 가진 인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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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5-03-16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CJK라고 왜썻는지 모르겠군요.디자인으로도 별로 멋있진 않은데..
하지만 ...알파벳을 제국주의의 문자로.... 레퀴엠의 가사를 지식인의 라틴어 향유 문화권력으로 보는건 ... 진중권아저씨가 가끔 필요하지 않는데도 그런 용어를 쓰는 경향은 있지만 말이죠. 독도를 독도라 하는 것 처럼. 키리에를 키리에라 하고 야뉴스데이를 야뉴스데이라 하고...

글샘 2005-03-16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전 저 CJK가 정말 맘에 안 듭니다. 진중권의 대표작인 미학 오디세이부터 그랬거든요. 그래서 딴지를 걸어본 것일 겁니다. 사실 레퀴엠이란 글, 참 잘 썼더군요.
 
아인슈타인과 부처 - 현대 물리학과 동양 사상의 만남
토마스 J. 맥팔레인 엮음, 강주헌 옮김 / 황소걸음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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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세계를 물질적으로 파악하고, 종교는 정신적으로 파악하는 양분적 시각에 잡혀있던 나에게, 현대물리학은 그 선입견을 깨버렸다. 과학과 종교가 상반된 이원론적 위상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 관계로 파악하게 하는 책이다.

이책에는 물리학의 개념들이 많아서 문과형인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지만, <공>의 개념으로 대략 이해했다. 아니, 이해했다고 착각했다.

장자의 "그대의 삶은 유한하지만 깨달음은 무한하다.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것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대는 결국 위험에 빠질 것이다."는 말은, 우리의 지식으로 세계를 단정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일깨워준다.

"여래(진리에 도달한 사람)가 항상 개념과 개념에 담긴 뜻을 사용하더라도 제자들은 그 개념과 뜻의 비실재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래가 법을 설할 때 일상개념을 사용하지만, 그 개념은 강을 건널 때만 사용하는 뗏목과 같은 것이다. 강을 건넌 후에 떳못은 더이상 필요가 없으므로 버려진다. 따라서 사물과 사물에 대한 자의적 개념도 해탈을 얻은 후에는 철저히 버려야 한다."는 부처님의 비유는 기고만장하기만 한 현대과학이 얼마나 이기적인 모습을 보였던가를 반성하게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란히 달리는 철길이 지평선 가까이에선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듯이, 전혀 상반된 세계일 듯한 이야기들도 시점에 따라, 시각에 따라 그 만남을 기대할 수도 있는 것을 가르쳐 준 책이다. 그렇지만, 역시 내겐 어렵다. 아인슈타인과 물리학의 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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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모습 그대로
제임스 앨런 지음, 공경희 옮김, 김미식 그림 / 물푸레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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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불운이 닥치면 환경 탓을 한다. 예전에 조상 탓을 하던 것도 그 계급 사회의 시절엔 핏줄이란 환경이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이 글의 작가 제임스 앨런은 <정신은 환경으로부터 독립된 것이다.>란 생각을 갖고 있다. 환경이 그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환경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십 세기를 풍미했던 마르크스가 지금 깨어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부구조는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던 저 유명한 테제 앞에서 마르크스는 무어라고 이야기할지...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고 품어온 생각 그대로 자신을 만든다. 스스로 선택한 결과가 지금의 환경이란 것이다.

축복은 물질의 소유에 있는 게 아니라, 바른 생각을 했다는 징표다.
불행은 물질의 궁핍이 아니라, 나쁜 생각으로 얻게 된 대가다.

일리 있는 이야기기도 하고, 부조리로 똘똘 뭉친 세상에서 과연 <생각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의 한계가 어디까지일지... 명쾌하지 못하기도 하다.

그러나, "생각하는 모습 그대로 삶을 살게 된다"는 강한 의지 표명은 <삶에는 축복이나 행운도, 비운이나 불행도 없다>는 것이다.

내 마음 갖기, 마음 챙기기에 따라서 똑같은 환경이라도 정반대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을 곱씹으며... 밝고 늘 희망을 가지고, 새 학교의 교장선생님 말씀대로 "학생들에게 기를 불어 넣을 수 있는 교사"가 되기를 꿈꾼다.

뿌리, 혹은 근원을 떠올리게 하는 김미식의 그림은 그림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글의 내용과 크게 어울린다고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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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5-03-04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아무래도 글쎄요.그러니까..내가 지금 지지리도 가난한 극빈층이라면 그런 생각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건가요.아님 내 부모가 그런 생각을 해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했지만 상부구조의 독자성과 자기충족적 시스템에 대한 부정은 아니었구요.흔히들 하부가 상부를 결정하니까 그런 경제결정론은 다원화된 사회에 적용하기 어려운 난센스다...라는 것은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선생님께 배운 내용이었지요.대학가서 빨갱이 공부하다 보니 꼭 그렇게 단순화하고 편의주의적 발상으로 체제 옹호에 임하지 않았어도 되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왜곡하고 싶었겠지요.그 선생님이 아니라 그 선생님을 억압하는 이 체제가.
개인의 모티베이션을 위한 의식의 주체성과 긍정적 사고에 대해서는 100% 동감합니다만 이러한 개인적 동기 유발 요소를 사회 전체에 적용하는 것은 계급간 질적차이를 은폐하는 효과가 있겠지요.그걸 의식의 요소로만 귀결시키는...
아침 부터 좀 길게쓰고 쓴소리여서 좀 죄송합니다.제가 '좋은 생각' 류의 책에 좀 삐딱해서 그런거라 이해해주시길.

글샘 2005-03-04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대학생활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것에 대한 고민, 그 자체였다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의 소중함 보다는 <혁명>의 한 나사못이 되어야하는, 그래서 하부구조를 바꾸는데 몸바쳐야하는 현실에 대한 부정이랄까... 저도 좋은 생각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좋은 생각만이라도 없었다면 세상은 얼마나 살기 팍팍한 곳일지도 생각해 봅니다...

painter 2011-09-09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름 체를 아시나요?
양면성의 기능을 갖고 있지요.
알곡을 걷어내는 역할과 버리는 ...
그릇의 사용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서 이 책을 읽었습니다.
생각을 많이 하게 하였지요.
인생을 살아 가면서 가끔씩 찾아오는 슬럼프란 늪에서 빠져 나오게 용기를
새롭게하는 책이기도 하지요.
저는 제임스 앨런이 주는 명상을 반면교사로, 또는 도약의 발판으로 삼고 있습니다.

삽화라는 작업은 어렵습니다.
특히 생각을 이미지화 시키는 것은 더 어렵지요.
한 번, 또 한 번 책을 읽어 보시면 눈에 들어 오게 됩니다.


글샘 2011-09-09 15:58   좋아요 0 | URL
그릇 만드시나요? ㅎㅎ
체를 그렇게 생각할 정도라면, 그릇에 몰입해 있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우리 시대의 인물읽기 1
장정일 외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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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나는 너무나 작아서, 나는 자꾸 나를 떠나가려 하네>

서른이 넘은 남자가 한밤에 혼자 춤을 추는 책상 머리에 붙어있었다는 시라는데...

그는 비굴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깡패에게 욕을 하며 너 깡패지?하고 정체성을 심어 주기도 하고, 택시 기사와 싸워서 옆자리 아가씨에게 미움을 받기도 하며, 엄청 긴 드라이버 가진 도둑을 보내기도 하고, 감옥에도 간다. 아무튼 지식인인 척 않는 그는 비굴하지 않아 좋다.

그러나 그는 또 마음 약한 사내다. 음식에서 이물질이 나왔다고 따지려다가 그집 아들의 눈을 만나면 아무 말도 못하는 그. 버스를 타고, "막차를 탄 사람은 자리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행복은 언제나 상대적임을 깨닫는 사람이다.

장정일을 읽으면서 왜 신창원을 떠올렸을까? 아버지에 대한, 가부장제의 사회 질서에 대한 거부를 <가장 솔직한 기록>으로 남겼다는 면에서 두 남자는 공통점을 가졌다고 내 머릿속에 비슷한 실루엣을 비쳤는지도 모른다. 심리학에서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지 못하면 <범죄>가 되지만, 사회적으로 공인된 방식으로 예술적 방법을 쓰면 <승화>된다는 애매한 용어가 있다. 장정일의 경우 <승화>와 <외설> 사이에서 강금실 변호사까지 동원된 전투가 벌어진 것을 보면, 심리학의 정의는 형사소송법의 정의와 유권해석보다 한끗발 아래인 듯도 하다.

신창원이 남겼다던 그 유명한 일기. 그 때, 살인범 신창원의 범죄는 나쁜 일이지만, 그의 자기 합리화까지 밉지는 않았다. 신창원이 정말 악당이었다면, 그의 티셔츠가 갑자기 불티나게 팔렸을 리는 없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그에게서 가엾은 짐승을 보았던 건지도 모른다. 가부장제의 사회질서가 만들어낸 사회적 범죄. 장정일의 아래 말을 읽으면서 신창원이 떠오른 것은 그런 연유에서라 생각한다.

"짐승은 배울 수 있지만 아무래도 깨달을 수 없고, 인간은 어쩌다 깨달을 수 있지만 결코 배우지는 못한다. 하므로 교육에 관해서는 단 한가지 원칙만 유효하다. 선생은 절대 학생에게 '주입'하지 말고 '암기' 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 배움은 다 쓸데없다. 어떻게 하면 '깨닫게 해 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교육이다." 신과 장의 공통점이 이런 거였다는 게 희한한 줄긋기의 변명이라면 변명이 될 것이다.

장정일은 나보다 4년쯤 먼저 태어난 사람이므로 살아온 연대가 비슷하다면 비슷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삼중당 문고>의 추억과 존재의 근거는 상당히 공감할 수 있다.

그의 글들이 문제시 되어왔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나는 사회적으로 문제시 되었던 그의 글들을 별로 읽은 적도 없고, 영화도 한 편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가 낯설지 않다.

그의 <거짓말>은 장선우 감독의 영화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제목이 <거짓말>인데 왜 그렇게 법원에서 흥분했을까? 본인이 거짓말이라는데... 거짓말을 소설의 언어로 치환하면 <픽션, 또는 허구>가 된다. 소설이란 게 일상 생활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를 통해 대리 만족을 얻는 거라면, 그 픽션은 죄가 없지 않을까? 하긴 조선 시대에 김시습의 금오新화처럼 열여덟 총각과 열여섯 처녀의 사랑이야기가 '새로운 이야기(신화)'로 여겨졌고, 불온시 되었던 것처럼, 또 기생 춘향과 어사의 사랑처럼 이룰 수 없는 이야기가 민간전승 되었던 것처럼, 질서를 중시하는 법 체제는 픽션에 대해서 늘 제대로 처벌의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크게 문제될 것 없는 이야기가 될 수 있듯이, 법은 <유죄>를 판결하지만, 몇몇의 법조인 외의 인생들은 무심히 지나간다. 소설을 쓰면서 제목을 <내게 거짓말을 해봐>라고 까지 했는데도 그걸 외설스럽다며 실형선고 운운하는 이 나라의 수준이 가히 알만하다. 차라리 성춘향에게 정조대를 채울 일이 아닌가. 어차피 소설을 일상 생활에서 일어날 수 없는 대리 만족의 효과로 치부한다면, 굳이 법률적 집행까지 필요했던가... 하는 생각이다.

지오디라는 그룹이 있다. 그들의 <거짓말>이란 노래가 있는데, 그들의 거짓말은 <반어>의 다른 말이다. 잘가(가지마) 행복해(떠나지마) 나를 잊어줘 잊고 살아가줘(나를 잊지마) 나는 그래 나는 괜찮아(아프잖아) 제발 내걱정은 말고 떠나가(제발, 제발 가지마~~~) 지오디의 음악 향유 계층이 초중딩이기 때문에 <반어 내지는 아이러니>란 제목을 붙일 순 없었으리라. 그냥 <거짓말>로 족하다. 그렇지만 초딩들도 그 거짓말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거짓말, 짐짓 거짓으로 꾸며 속마음과는 반대로 말하는 표현이라는 걸 초딩들도 감으로 안다. 좀 더 나이 든 세대를 위한 신승훈은 <애이불비(哀而不悲) : 슬프지만 슬픈 척하지 않겠다는>란 제목을 직접적으로 쓸 수 있지 않은가.

장정일이 덜떨어진 독자(법원이나 검사도 포함)를 위해서 <거짓말>이라고까지 제목을 붙여 주었건만, 덜떨어진 독자들은 그 음란함에 현혹되어 이 작품들을 포르노라고 말한다. '포르노 그라피'와 '문학 작품'의 사이에는 무엇이 있나? 그야말로, '와'라는 글자가 있을 뿐이지 않을까? 내가 스무 살이던 시절 친구들과 처음 비디오로 본 <엠마뉴엘>은 포르노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영화를 침을 삼켜가며 볼 시간에 술 한잔 더 마시고 잠을 잔다. 영화에 가위를 대고, 작가를 감옥에 보내고 하는 것은 뭔가 잘못된 프로그램이란 생각밖에 할 말이 없다. <거짓말>에 가위를 댈 것이 아니라, <거짓말>과 현실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들, 이 나이 정도면 그 정도 구별이 가능할 것이란 나이를 정해서 상영하고 판매하는 프로그램으로 바꿔줘야 할 것이다.

장정일은 스스로 글 써서 먹고 사는 사람임을 안다. 그는 문학가연 하지 않는다. 직업 작가임을 스스로 안다. 그리고 세상이 원하는 글을 쓴다. 영화가 21세기 한국의 화두가 될 것임을, 우리 코드에 맞는 산업임을 서편제가 나올 때, 아니 그 전부터 벌써 알고 있었던 코가 밝은 사람이다. 그의 글에는 솔직함이 배어있어서 <포스트 모더니즘> 운운하는 다른 작가들과는 뭔가 다른 냄새가 분명히 배어 있다. 다른 작가들이 엮어내는 산문집이 쓰레기 더미에 지나지 않을 때, 그의 수필들은 상당히 명쾌하다. 아마도 그 힘은, 그 글들이 <청탁>받아 쓰지 않고, <투고>를 위해 적은 글들이기 때문에 그 투명한 명징성을 간직하고 있는 거라고 나름대로 추측한다.

그의 글들을 상당히 호의적으로 적고 있는 이 책을 읽어서 그런지, 나의 리뷰도 그에 대해서 옹호하는 쪽으로 적힌 듯 하다. 그렇다고 앞으로 그의 글을 부지런히 읽을 거라든지, 그런 생각은 별로 없다. 솔직히 그의 글들에서 번득이는 예지력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많은 글들은 내 취향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지금으로선 강하기 때문이랄까?

행복한 책읽기에서 '우리 시대의 인물 읽기' 시리즈의 첫 인물로 그를 택한 이유가 이 책엔 잘 드러나 있다. 그만큼 장정일은 괴팍하면서도 우리 시대의 흐름을 잘 짚어낸 문제 작가라고 할 만하단 이유다. 장정일 문학이 거칠면 거친 그대로, 현실과 거리가 크면 큰대로 인정하는 사회로 우리 문화가 성숙하기를 바라기는 아직 시기상조란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내 바람은 계속 한결같은 바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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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5-02-26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 책 읽고 '우리 시대의 인물 읽기' 김기덕, 노무현 편도 샀답니다.
전 장정일 정말 좋아하거든요.초기 소설부터 다 읽었는데.... 글샘 선생님이 좋아하실지는 잘 모르겠네요.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6편까지 나와 있어요.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글샘 2005-02-27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제가 김영하를 까는 바람에 장정일 같은 사람 싫어할거라고 생각하신 건가요? 전 위에 쓴대로 장정일의 잰체하지 않는 솔직함이 맘에 들었습니다. 그의 독서 일기도 읽어보고는 싶지만, 내가 읽어보지 않은 책의 독후감을 미리 보기가 좀 그래서 미뤄두고 있습니다. 장정일이 맘에 쏙 드는 건 아니라서 그의 책을 골라 읽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 책에서는 장정일의 맛을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