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팜파스
윌리엄 헨리 허드슨 지음, 이한음 옮김 / 그린비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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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헨리 허드슨(1841-1922).

아르헨티나 팜파스에서 소로우와 비슷한 시기에 초원의 기억을 가진 어린이가 있었다. 소로우처럼 의도적으로 자연으로 스며든 삶은 아니었고, 스페인어가 범람하던 그 넓은 팜파스에서 그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 남았다.

그의 글에서는 자연스럽게 새들, 말, 양, 독수리, 타조 들이 숱하게 스치고 지나가고, 깊은 각인을 남긴다. 어린 시절 시멘트 블록 안에 갇혀 자랐지만, 그나마 골목길은 우리 차지였던 초라한 우리의 어린 시절을 회고해 보면, 팜파스에서 유년기를 보낸 저자에게 이 책은 필연이라 할 수 있다. 소설가이며 박물학자가 된 그의 삶에 유년기처럼 풍부한 글의 원천은 없었으리라.


"사람들이 이 세상과 인생이란 행복하게 살 수 있을만큼 그렇게 즐겁거나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고, 마지막까지 평정을 유지하면서 지켜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그들이 제대로 살아본 적도 없고, 그들이 그렇게 부족하다고 보는 세상이나 그 속의 어떤 것도 명확하게 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풀잎조차도 말이다. 내가 아는 것은 내 자신이 예외적인 경우에 속하며, 내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보이는 세계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흥미롭다는 것뿐이다. 자연을 벗삼으면서 경험했던 기쁨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오히려 현재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행복한 추억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 행복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내 정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왔고 다시 내 것이 된 그 재능 덕분에, 나는 런던에서 오랫동안 자연과 단절된 채 병들고 비참하게 친구도 없이 지내야 했던 그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도 항상 느낄 수 있었다.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이다."


이처럼 그가 회상하는 어린 시절의 그의 삶의 원천이 되어 주고 있다. Far away and long ago가 이 책의 제목인데, 머나먼 곳, 그 오래전... 뭐, 이 정도의 제목이랄 수 있지만, 파이프 담배를 흐붓이 흔들리우며 어스름진 창가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손녀랄까, 옆자리 앉은 소녀에게 초점없는 눈으로 들려주는 이야기. 노인이 되면 가까운 기억은 사라지고, 먼 기억만 또렷이 남는다는데, 그 그림 속의 아르마딜로와, 뿔이 얽혀 죽어간 사슴들, 가우쵸들의 이야기들이 눈이 시리게 푸르른 팜파스를 배경으로 다시 살아오른다. 소녀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열 번도 더 들었건만, 왠지 할아버지가 서운해 할 것 같아 듣고 있는 팜파스 이야기... 할아버지의 초점없는 눈이 떨리고... 과거는 현재가 된다.


삶의 원천을 잃어버린 아스팔트 위의 아이들을 기르는 우리는, 아이들을 팜파스의 초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연은 영원한 우리의 고향임을 가르치고 잊지 않게 전달할 사명을 띠고 있지 않은가. 지율 스님의 몸짓이 가르치는 바로 그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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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토끼
앤디 라일리 지음 / 거름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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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이 필요할까? 하면서 펴든 책이, 혼자 서점에 서서, 그것도 몇 년만에 부산에 눈이 내려 쌓여서 약속을 만든 젊은이들로 가득한 일요일 서점에서 빙긋이 웃다 모자라, 키득거리게 만든 책.

서점에 가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창의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이 책은, 자살이라는 주제에 걸맞지 않는 귀여운 토끼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스스로 죽고싶다는 편집증적 사고>를, <그대 정말 죽고싶은가?> 하는 의문으로 바꿔 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칼 가게 앞에 새로 생긴 전자석 가게가 오픈하기만을 기다리는 토끼를 볼 때 정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지만, 그 집요함과 어리석음은 인간의 나약한 마음을, 그리고 자살에 대한 관념이 우스운 것임을 잘 그리고 있다.

이 책 속에서 자살 토끼는 죽고, 또 죽고, 수십 번을 죽고, 수백 토막이 나지만, 그는 죽지 않는다.

그가 자살을 기도하는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사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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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교양 교양인 시리즈 4
박석무 지음 / 한길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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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상 존경할 만한 위인을 꼽으라 한다면 누구를 꼽을까. 그 나라의 위인은 그 나라의 화폐, 특히 지폐를 보면 그 나라가 무엇을 중시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 나라 최고 지폐인 일만원권에는 세종대왕이, 오천원권에는 율곡 이이, 천원권에는 퇴계 이황 선생이 도안되어 있다. 백원짜리에는 이순신 장군이 오백원짜리 학보다 초라한 얼굴로 새겨져 계신다. 학 말고 다들 '이씨 성'을 가진 분이란 특성이 있고, 화폐를 만들 당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이조에 두고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겠다.

간혹 리써치한 결과를 보면 김구 선생이 가장 존경스런 인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사실 그분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앞으로 십만원 권이 등장하면 김구 선생이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될 것인데, 아마 고인이 아시면 손사래를 치실 일이다. 자유독립된 국가의 문지기를 자청하셨지, 사과상자나 차떼기로 비리에 연루되기는 마다하실 분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수록 이유는 그분의 편지글이 글쓴이의 성정이 자세하고도 섬세하고, 완곡하고도 풍부하게 잘 드러나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한 전기문이나 서간집을 권해주기도 해야 하는데, 이 책은 일단 부피가 부담스럽다. 물론 박석무란 저자가 다산에 천착하는 이인 것은 사실이나, 이 오백여 페이지의 두께에 비해 내용이 턱도 없이 부족하다. 다산에 대한 애정 과잉의 주관이 글의 곳곳에서 흘러넘쳐 따스한 글이 되지도 못했으며, 다산의 생애 위주의 글이고, 그의 시편들에서 그의 성정을 읽을 수 있는, 그저 다산을 만날 수 있는 편안한 책인줄 착각하고 이 책을 집어들었다가는 낭패보기 십상이다. 한마디로, 다산에 대한 안내서로는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다.

다산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배생활, 특히 유배생활에서 도출된 책들과 서간들을 찬찬히 읽게 되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우리가 다산을 이 시대에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가장 부유했던 호남평야의 백성들이 가장 수탈당했던 우리 역사를 굳이 되돌아보지 않아도 지금의 부정부패는 조선 후기, 정조 사후의 3정의 문란에 버금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이었으면서도 농민의 비애를 가까이서 읽을 줄 알았던 시인, 가정을 돌볼 수 없고, 국사에 참여할 수 없는 처지에서 가정과 국가에 보탬이 되는 생을 마감하고자 집필에 몰두했던 철학자이자 사상가, 문필가였던 다산의 글을 다방면에서 접근하는 것은 포스트 모던의 시대에 적합한 접근 방식이라 이해한다. 그러나, 다산의 정수는 그의 사상과 철학에 있을 것인데, 이 책처럼 풍부한 도록과 지면을 할애하면서, 그의 사상에 대해 수박 겉핥기로 지나간 점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작가처럼 다산에 대한 애정이 강한 사람이라면 사상과 철학을 먼저 엮어 내고, 여력이 된다면 이런 여담들을 묶어주었어도 되지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랄까... 그나마 이 책의 곳곳에 실린 다산의 시편들과 6장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들은 이 책의 가치를 떨어트리지 않는 그나마의 위안을 준다.

내가 읽었던 많은 전기, 시집, 소설집의 첫 페이지에는 그 대상이 된 이의 초상이 실려 있었다. 적게는 1점에서 많은 경우 서너점까지 자화상이나 초상이 있는 것을 당연이라 생각해 왔다. 나의 이런 편견을 이 책은 깨 버렸다. 다산초당, 장기의 쓸쓸한 들판, 수원의 화성 등 다산을 떠올리는 기념물들이 이 책의 숱한 페이지들을 채우고 있다. 그러나 그 흔한 초상을 싣지 않은 데 대해 아무 말도 없는 것은 뭔가 석연찮았다. 감각을 통해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당연한 이해의 과정이 아닐까.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인상을 떠올리면서, 그 사람의 삶에서 우러나는 그 사람의 생각을 읽어나가는 것이 읽는 순서라고 생각한다. 다산의 초상 내지 영정을 싣지 않은 것은 저자의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네이버에서 검색해서 다산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우표에도 수록되었던 다산의 초상을 보고 있으면 외조부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이 떠오를 정도로 외탁을 한 듯하다.

실용적 학문, 철학과 공학을 두루 섭렵하였던 천재가 혼탁한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지만, 역시 천재의 천재성은 진흙에 묻힌 연꽃과 같이 세상을 향해 향기를 풍긴다.

아직도 다산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작가의 <다산 정약용, 그 사상과 철학의 저변> 뭐, 이런 책이 충실하게 엮어져 나오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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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즐거움 (양장)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방승양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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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나카 헤이스케의 이 책을 읽은 게 7, 8년 전쯤 된다. 그 때 수학선생님들이랑 맨날 술마시러 다니다가, 어떤 수학선생님이 이 책을 재미있다고 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좋았던 문구들을 어디에 적어두었었는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그럴 때가 있다. 십 년 전쯤의 일이 아련히 기억날 때가. 그래서 그 책을 뒤적거려 보기도 하고, 그 비디오를 빌려 보기도 하고... 어떤 날은 온 집을 뒤져서 그 물건이 없음을 확인하기도 하고... 그 편지를 읽기도 하고...

이 책을 언젠가 다시 읽어야지....했던 기억이 나서 도서관에서 만난 김에 다시 내쳐 읽었다.

그 때 내가 어떤 구절에 반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히로나카의 성실성, 솔직함, 담백함 이런 데 매료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의 글은 수학자의 글 그대로다. 잉여된 감정도 없고, 논리가 결핍된 부분도 없다. 정확히 자기가 생각한 그만큼을 적어낼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상당히 딱딱하고 맛이 없는데도 수학자의 글이라고 이해하고 보면 맛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우리 나라에선 딱딱해서 맛을 느끼지 못했던 바게뜨가, 프랑스에선 그 나름대로의 맛을 느낄 수 있었듯이...

우선, 그는 상당히 교육자로서의 생각을 많이 적고 있다.

좋든 나쁘든 간에 부모는 자식에게 있어서 어떤 교과서에도 씌어져 있지 않은 살아 있는 본보기이며, 자식들은 무의식 중에 부모의 인생관에서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이 구절은 학부모들 만나면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아이들을 야단치려고 학부모를 소환하면, 늘 후회한다. 아, 아이가 부모보다 낫구나. 하고... 최근 몇 년간은 진학 상담을 위한 경우 외에는 절대로 학부모를 소환하지 않는다. 내 이런 생각을 모르고, 아이들은 엄마한테 전화한다면 설설 긴다. 흐흐, 어리석은 것들...) 아이들의 성장에는 절대적으로 자기 편에 서 주는 사람이 가까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던 스폭 박사의 육아서를 인용하는 그의 시선은 교육자의 철학을 뛰어넘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기도 하다.

그는 미국에서 실용적인 수학을 가르치는 걸 보고 깨달은 바가 많다. "소비자를 위한 수학" 같은 교과과정은 일본은 물론 우리 나라에선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자율성의 뜻을 전혀 모르고 있다. 모든 걸 꽉 죄어 놓고선 자율적으로 운영하라고 하는 게 우리 교육 현실이다.)

그리고 젊은 독자들에게 주는 교훈, 장래를 결정하려고 할 때에 쓸 수 있는 여러가지 정보가 있다. 예컨대 '성적이 이 정도니까 저 대학의 이러한 학과에 진학하자.'든지, '이러한 직종이 유망하니까, 이 기업에 취직하자.'하는 식으로 여러 가지 정보로부터 필요를 도출해서 진로를 결정한 사람은, 그 결정이 욕망으로 바뀌지 않는 한 어디에서인가 좌절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학문을 하고 싶다. ", "나는 이 일에 종사하고 싶다. "라는 욕망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학문할 사람들에게 진로를 결정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치고 있다.

사람이 계속 배워나가기 위해서는 작은 것이라도 '성공 경험'을 많이 쌓아 올릴 필요가 있다. 이것은 창조의 단계에 들어가서도 적용된다. 작은 것을 만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기분이 좋아지고, 그 쾌감이 다음의 보다 큰 창조를 불러오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이다.(아이들이 학교에서 얼마나 많이 '실패 경험'을 쌓아 올리고 있는가. 나는 그 실패 경험을 벌주는 심판관은 아니었던가를 깊이 반성하게 해 준 말이었다. 아이들이 어떤 성공 경험을 통해 긍정적 비전을 형성할 지는 교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아이들에게 실패 경험 보다는 성공 경험을 쌓도록 도와주는 조력자로서의 교사. 아, 얼마나 어려운가...)

그는 지식을 불교의 '인(因)'과 '연(緣)'으로 설명한다. '인'이란 것은 근원이란 뜻으로 내적인 것이다. 이 내적인 인에 대해서 외적인 것이 '연'이다. 내적 조건인 '인'과 외적 조건인 '연'이 결합해서 모든 것이 생겨나고, 이 결합이 해소됨으로써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이다. 우리는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얻은 체험적 지식 등이 눈에 보이지 않는 덩어리로 자기 자신 속에 축적되어 '인'을 만든다. 그 '인'이 '연'을 얻어서 그 사람의 희망이 되고 행동이 되고 결단이 되고 길이 만들어 진다.(나는 내 아이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주고 싶다. 그것은 '인'이 될 것이다. 같이 읽고, 같이 운동하고 하는 모든 것이... 그것이 나중에 친구라는, 선생님이라는, 사회라는 '연'을 만나 열매맺게 되겠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내가 좋은 연이 되길 바라기도 하고...)

그는 공부하는 목적을 <지혜를 얻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즉, 공부하는 과정에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지혜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이 지혜가 만들어지는 한 공부한 것을 잊어버린다고 해도 그 가치는 여전한 것이라는 말. 공교육에서 너무 어려운 것을 가르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일상 생활에 필요한 것만으로 공부의 내용을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소비자 중심의 교육, 이해찬 세대 교육이 얼마나 좋아하던 말인가. 소품종 대량생산의 시대에서 다품종 소량생산 시대로 바뀌고 있으니 교육도 변해야 한다던 신자유주의 경제논리로 점철하던 철학없던 이 나라의 <교육인적자원부>의 빈약한 상상력. 하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자원으로 취급하는 시각 자체가 얼마나 교육에 몽매한 존재들인지... 히로나카 선생은 불필요한 지식을 배우고, 잊어 버리는 과정을 인간만이 가진 <여유>라고 <여유있는 해석>을 가한다. 우리가 미분적분을 배운 것이 전혀 필요 없어도, 그 사고 방식은 미시적, 거시적 구성과 연관있는 것이고, 기계처럼 필요한 것만을 쪼로록 뽑아내는 것은 이제 컴퓨터가 할 일이지, 인간이 할 일은 아닌데 말이야...

그리고 그는 늘 겸손하게도, 스스로 뛰어난 수학자라고 여기지 않고, 대단한 노력가라고 평가한다. 수학의 노벨상이란 '필드상'을 수상했으면서도 말이다.

노력이란 말은 나에게는 남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인다는 것과 같은 말. 얼마나 겸손한가. 아니, 오히려 그는 스스로 수학의 천재가 아님을, 그러나 수학에 대한 관심, 애정, 노력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음을 웅변하는 것이리라.

창조에 있어 중요한 것은 욕망인데, 그가 연구하면서 얻은 결론은 세 가지다. 첫째, 유연성을 가지라는 것, 둘째, 욕망은 자기 내부에서 생긴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자기 자신의 욕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사회 풍조라든가, 유행이라든가, 혹은 매스컴이 제공하는 정보라든가 하는 것으로 형성된 경우가 결코 적지 않기 때문). 셋째, 창조는 실제 만들어 보아야 비로소 가치가 생긴다는 것.(프랭클린의 말을 빌리면, 어떤 것이든 창조되고 나서야 비로소 의미가 생기고 스스로 걷기 시작한다는데... 마치 어린아이처럼. 갓난 아기가 성장하면서 더없이 예쁠 때도 있는가 하면, 미운 일곱 살도 있다. 부모가 예쁠 때만 아이를 키우고 밉다고 하여 키우는 것을 포기할 수 는 없다. 창조 또한 마찬가지다. 출발 시점의 모습이 설령 갓난아기와 같이 유치하고 보잘것 없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인내를 가지고 키워야 한다. 무엇 때문인가. 아이를 다 키워 놓고서야 사회에 대한 그 아이의 가치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 줄 때 소심심고(素心深考)라고 적어준다. 소박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깊이 생각하라.

학자로서의 그의 질박하고도 고매한 인격에 존경의 염을 품었던 것 같고, 새삼 책을 읽으면서 그의 깊이에 감동하게 된다.

수 년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야지 하고 맘먹고 있던 책을 다시 읽으면서 알라딘과의 인연에 감사한다. 그 당시에 어떤 생각으로 다시 읽고 싶었는지 지금은 까마득하게 잊고 말았지만, 내 머릿속에 든 상념들을 지우개가 지워버리기 전에 기록하고 싶다는 내 주관적인 <인>이 알라딘 서재라는 <연>을 만나 이런 시원찮은 글발이나마 적게 된 것을 늘 고맙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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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학계의 노벨상 수상자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09-11 22:01 
    학문의 즐거움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방승양 옮김/김영사 전반적인 리뷰 知之者不如好之者요, 好之者不如樂之者니라.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2005년 9월 13일에 읽고 나서 떠오르는 구절이었다. 論語의 옹야편에 나오는 문구로 모르는 이가 없을 구절이다. 사실 배움의 끝은 없기 때문에 앎 자체에 집중을 하면 그것은 집착이 될 수 있는 것이고 물 흐르듯이 배움 그 자체를 즐기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1
정민 지음 / 효형출판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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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전통 찻집 같은 책이었다.

요즈음 출판 업계의 유행은 다양한 텍스트들에서 공통된 <코드>를 뽑아내어 짜깁기하는 것이다. 다양한 <자료>의 바다에서 유의미한 <정보>들을 엮어내는 것은 작가의 재구성을 통한 새로운 창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류의 많은 저작들이 지나치게 가볍거나, 편협하거나, 책값만큼 값어치를 갖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있었다. 다행히 이 책은 그런 것을 기우에 그치게 한다.

정민 선생은 고전에 등장하는 새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숱한 새들의 한살이와 사람의 삶을 비유적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고, 애정어린 눈으로 보기도 한다.

아무튼 우리가 쉬이 접하지 못하는 고전들을 쉽게 접하는 새라는 소재와 연관지어 재미있게 적는 기술을 가졌다.

새들의 생태에서 인생을 반성하기도 하고, 과학적인 시각으로 오류를 바로잡기도 하고, 소쩍새와 두견이처럼 잘못된 편견을 일깨우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 옛날에는 선비가 높은 사람을 찾아갈 때 폐백, 즉 예물로 흔히 꿩을 가지고 갔다. -----------경은 염소로 폐백을 삼는다. 염소란 양이다. 양은 무리지어 살지만 떼거리 짓지 않는다. 그래서 경이 이것을 폐백으로 하는 것이다. 대부는 기러기를 폐백으로 한다. 기러기란 것은 줄지어갈 때 장유의 차례가 있다. 그래서 대부가 이것을 폐백으로 삼는다. 선비는 꿩을 폐백으로 삼는다. 꿩은 맛이 좋지만 새장에 가두어 길들일 수 없다. 그래서 선비가 꿩을 폐백으로 한다. ---------------선비의 지조와 폐백의 사이에 천년의 시대를 뛰어넘는 결기가 보이지 않는가. 길들일 수 없는 사람이 되기!, 그리고 무리지어 살지만 떼거리 지어 살지 않는 지혜로움. 가끔은 혼자서 뚝 떨어져 사는 용기와 혜안... 아, 우리 정치의 패거리 의식, 얼마나 추한 것인가...

조선 후기 시인 이양연의 <미장조>에 '저 먼곳의 술래잡기새, 산 그늘 봄날에 술래잡기 하누나. 몸 감추고 스스로를 뽐내며 우니, 네 숨음이 참 아님 부끄러워라.'이란 구절이 있다. 아이들이 술래잡기 할 제, 술래를 놀리려 뻐꾸기 소리를 냄을 흉내낸 것으로, 안빈낙도하는 듯 하면서도 마음은 속세를 버리지 못한 선비의 삿된 마음을 조롱한 노래라 하겠다. 조선시대엔 안빈낙도, 빈이무원, 안분지족 하는 노래들이 많았으나, 입신양명의 출세가 선비의 일생의 목표였음을 본다면, 진정한 은자를 찾기 어려웠음을 비꼬아 비판하는 노래라 할 수 있다.

오늘 드라이브를 가다 수백의 까마귀떼를 만났다. 새들은 충분히 서로 다정하고 지혜로워 보였다. 인간들은 날짜가 새로 바뀌었다고 다들 길가에 뻗지르고 서서 꼼짝을 못하고 있는데, 그 검은 새들은 찬 공기 마시며 하늘을 자유로이 비상하고 전깃줄에 나란히 앉아 쉬고 했다. 이번 해일 참사에서도 동물들의 사체는 나오지 않는다는 뉴스를 들으면, 그닥 뉴- 하지도 않은, 동물보다 못한 인간의 육감과 인간의 지능과 인간의 업적을 새삼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고전, 특히 한시의 아늑한 향취를 새라는 그림들과 어울려 녹여낸 정민선생님의 수고에 깊이 감사드리고 싶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책이 그림 자료들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다보니 책이 너무 무겁고, 값이 비싸다는 점(한 권에 19000원, 총 2권)을 감출 수 없다. 내용의 무게에 비해, 책의 물리적 무게는 누워서 들기에 지나친 감이 있었고, 값도 구입해서 보기엔 무리하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정말 좋은 책이므로 주변 도서관에 구입 신청을 해서라도 꼭 읽어보도록 권하고 싶다. 학교 도서관에도 구입을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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