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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즐거움 (양장)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방승양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평점 :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이 책을 읽은 게 7, 8년 전쯤 된다. 그 때 수학선생님들이랑 맨날 술마시러 다니다가, 어떤 수학선생님이 이 책을 재미있다고 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좋았던 문구들을 어디에 적어두었었는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그럴 때가 있다. 십 년 전쯤의 일이 아련히 기억날 때가. 그래서 그 책을 뒤적거려 보기도 하고, 그 비디오를 빌려 보기도 하고... 어떤 날은 온 집을 뒤져서 그 물건이 없음을 확인하기도 하고... 그 편지를 읽기도 하고...
이 책을 언젠가 다시 읽어야지....했던 기억이 나서 도서관에서 만난 김에 다시 내쳐 읽었다.
그 때 내가 어떤 구절에 반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히로나카의 성실성, 솔직함, 담백함 이런 데 매료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의 글은 수학자의 글 그대로다. 잉여된 감정도 없고, 논리가 결핍된 부분도 없다. 정확히 자기가 생각한 그만큼을 적어낼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상당히 딱딱하고 맛이 없는데도 수학자의 글이라고 이해하고 보면 맛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우리 나라에선 딱딱해서 맛을 느끼지 못했던 바게뜨가, 프랑스에선 그 나름대로의 맛을 느낄 수 있었듯이...
우선, 그는 상당히 교육자로서의 생각을 많이 적고 있다.
좋든 나쁘든 간에 부모는 자식에게 있어서 어떤 교과서에도 씌어져 있지 않은 살아 있는 본보기이며, 자식들은 무의식 중에 부모의 인생관에서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이 구절은 학부모들 만나면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아이들을 야단치려고 학부모를 소환하면, 늘 후회한다. 아, 아이가 부모보다 낫구나. 하고... 최근 몇 년간은 진학 상담을 위한 경우 외에는 절대로 학부모를 소환하지 않는다. 내 이런 생각을 모르고, 아이들은 엄마한테 전화한다면 설설 긴다. 흐흐, 어리석은 것들...) 아이들의 성장에는 절대적으로 자기 편에 서 주는 사람이 가까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던 스폭 박사의 육아서를 인용하는 그의 시선은 교육자의 철학을 뛰어넘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기도 하다.
그는 미국에서 실용적인 수학을 가르치는 걸 보고 깨달은 바가 많다. "소비자를 위한 수학" 같은 교과과정은 일본은 물론 우리 나라에선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자율성의 뜻을 전혀 모르고 있다. 모든 걸 꽉 죄어 놓고선 자율적으로 운영하라고 하는 게 우리 교육 현실이다.)
그리고 젊은 독자들에게 주는 교훈, 장래를 결정하려고 할 때에 쓸 수 있는 여러가지 정보가 있다. 예컨대 '성적이 이 정도니까 저 대학의 이러한 학과에 진학하자.'든지, '이러한 직종이 유망하니까, 이 기업에 취직하자.'하는 식으로 여러 가지 정보로부터 필요를 도출해서 진로를 결정한 사람은, 그 결정이 욕망으로 바뀌지 않는 한 어디에서인가 좌절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학문을 하고 싶다. ", "나는 이 일에 종사하고 싶다. "라는 욕망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학문할 사람들에게 진로를 결정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치고 있다.
사람이 계속 배워나가기 위해서는 작은 것이라도 '성공 경험'을 많이 쌓아 올릴 필요가 있다. 이것은 창조의 단계에 들어가서도 적용된다. 작은 것을 만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기분이 좋아지고, 그 쾌감이 다음의 보다 큰 창조를 불러오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이다.(아이들이 학교에서 얼마나 많이 '실패 경험'을 쌓아 올리고 있는가. 나는 그 실패 경험을 벌주는 심판관은 아니었던가를 깊이 반성하게 해 준 말이었다. 아이들이 어떤 성공 경험을 통해 긍정적 비전을 형성할 지는 교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아이들에게 실패 경험 보다는 성공 경험을 쌓도록 도와주는 조력자로서의 교사. 아, 얼마나 어려운가...)
그는 지식을 불교의 '인(因)'과 '연(緣)'으로 설명한다. '인'이란 것은 근원이란 뜻으로 내적인 것이다. 이 내적인 인에 대해서 외적인 것이 '연'이다. 내적 조건인 '인'과 외적 조건인 '연'이 결합해서 모든 것이 생겨나고, 이 결합이 해소됨으로써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이다. 우리는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얻은 체험적 지식 등이 눈에 보이지 않는 덩어리로 자기 자신 속에 축적되어 '인'을 만든다. 그 '인'이 '연'을 얻어서 그 사람의 희망이 되고 행동이 되고 결단이 되고 길이 만들어 진다.(나는 내 아이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주고 싶다. 그것은 '인'이 될 것이다. 같이 읽고, 같이 운동하고 하는 모든 것이... 그것이 나중에 친구라는, 선생님이라는, 사회라는 '연'을 만나 열매맺게 되겠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내가 좋은 연이 되길 바라기도 하고...)
그는 공부하는 목적을 <지혜를 얻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즉, 공부하는 과정에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지혜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이 지혜가 만들어지는 한 공부한 것을 잊어버린다고 해도 그 가치는 여전한 것이라는 말. 공교육에서 너무 어려운 것을 가르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일상 생활에 필요한 것만으로 공부의 내용을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소비자 중심의 교육, 이해찬 세대 교육이 얼마나 좋아하던 말인가. 소품종 대량생산의 시대에서 다품종 소량생산 시대로 바뀌고 있으니 교육도 변해야 한다던 신자유주의 경제논리로 점철하던 철학없던 이 나라의 <교육인적자원부>의 빈약한 상상력. 하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자원으로 취급하는 시각 자체가 얼마나 교육에 몽매한 존재들인지... 히로나카 선생은 불필요한 지식을 배우고, 잊어 버리는 과정을 인간만이 가진 <여유>라고 <여유있는 해석>을 가한다. 우리가 미분적분을 배운 것이 전혀 필요 없어도, 그 사고 방식은 미시적, 거시적 구성과 연관있는 것이고, 기계처럼 필요한 것만을 쪼로록 뽑아내는 것은 이제 컴퓨터가 할 일이지, 인간이 할 일은 아닌데 말이야...
그리고 그는 늘 겸손하게도, 스스로 뛰어난 수학자라고 여기지 않고, 대단한 노력가라고 평가한다. 수학의 노벨상이란 '필드상'을 수상했으면서도 말이다.
노력이란 말은 나에게는 남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인다는 것과 같은 말. 얼마나 겸손한가. 아니, 오히려 그는 스스로 수학의 천재가 아님을, 그러나 수학에 대한 관심, 애정, 노력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음을 웅변하는 것이리라.
창조에 있어 중요한 것은 욕망인데, 그가 연구하면서 얻은 결론은 세 가지다. 첫째, 유연성을 가지라는 것, 둘째, 욕망은 자기 내부에서 생긴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자기 자신의 욕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사회 풍조라든가, 유행이라든가, 혹은 매스컴이 제공하는 정보라든가 하는 것으로 형성된 경우가 결코 적지 않기 때문). 셋째, 창조는 실제 만들어 보아야 비로소 가치가 생긴다는 것.(프랭클린의 말을 빌리면, 어떤 것이든 창조되고 나서야 비로소 의미가 생기고 스스로 걷기 시작한다는데... 마치 어린아이처럼. 갓난 아기가 성장하면서 더없이 예쁠 때도 있는가 하면, 미운 일곱 살도 있다. 부모가 예쁠 때만 아이를 키우고 밉다고 하여 키우는 것을 포기할 수 는 없다. 창조 또한 마찬가지다. 출발 시점의 모습이 설령 갓난아기와 같이 유치하고 보잘것 없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인내를 가지고 키워야 한다. 무엇 때문인가. 아이를 다 키워 놓고서야 사회에 대한 그 아이의 가치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 줄 때 소심심고(素心深考)라고 적어준다. 소박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깊이 생각하라.
학자로서의 그의 질박하고도 고매한 인격에 존경의 염을 품었던 것 같고, 새삼 책을 읽으면서 그의 깊이에 감동하게 된다.
수 년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야지 하고 맘먹고 있던 책을 다시 읽으면서 알라딘과의 인연에 감사한다. 그 당시에 어떤 생각으로 다시 읽고 싶었는지 지금은 까마득하게 잊고 말았지만, 내 머릿속에 든 상념들을 지우개가 지워버리기 전에 기록하고 싶다는 내 주관적인 <인>이 알라딘 서재라는 <연>을 만나 이런 시원찮은 글발이나마 적게 된 것을 늘 고맙게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