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권정생님의 영면

`몽실 언니` 작가 권정생씨 별세 [중앙일보]
동화 '강아지똥' '몽실언니'의 작가 권정생(사진)씨가 17일 오후 대구 가톨릭병원에서 별세했다. 70세.

1937년 일본 도쿄 빈민가에서 태어난 고인은 광복 직후인 46년에 귀국, 나무장수.고구마장수.담배장수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갔다. 19세에 전신결핵에 걸려 행려병자처럼 전국을 떠돌다 67년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에 정착했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결핵은 그를 50여 년 동안 괴롭힌 지병이었다.

69년 월간 '기독교교육'에 동화 '강아지똥'을 발표하며 동화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한 고인은 '사과나무밭 달님'(78), '하느님의 눈물'(84), '몽실언니'(84), '훨훨 날아간다'(97), '슬픈 나막신'(2002) 등의 작품집을 남겼다. 제1회 기독교 아동문학상(69),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75), 제22회 새싹문학상(95)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첫 작품 '강아지똥'은 하찮고 쓸모없어 보이는 강아지똥이 어떻게 자기 희생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지 보여주는 자전적인 동화. 96년 길벗어린이에서 그림책으로 만들어 낸 뒤 60만 부가 팔렸으며, 초등학교 1학년 읽기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60만 부가 팔린 그의 대표장편 '몽실언니'는 90년 MBC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고인은 베스트셀러 작가로 적지 않은 인세를 받았지만, 죽는 날까지 다섯 평 남짓한 오두막집에서 혼자 글을 쓰며 살았다.

빈소는 안동병원. 발인은 20일 오전 9시. 장지는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 그의 집 근처 뒷산이다. 장례는 6.15민족문학인협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가 공동 주관하는 민족문학인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054-821-0857.

출처 : 중앙일보 이지영 기자



 

 

 

 

 

 

 

 

 

 

 

 

'권정생'으로 도서 검색을 하니(알라딘에서만)모두 73건이 나온다.
내가 읽은 건 [몽실 언니], [강아지똥], [우리들의 하느님]이다.
평생 가난과 지병과 외로움을 극복하고자 아이들 글에 혼신의 힘을 쏟다가 가신 님.
이오덕, 전우익, 권정생. 드디어 이 세분의 벗이 마침내 한 자리에 모이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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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여자고등학교 3학년 정민경(18), '그 날'

▲ '80년 5월 광주'는 여전히 우리에게 영광이자 상처로 남아있다.
▲ 초등학생들이 그린 5·18 관련 그림들.
ⓒ2007 5·18민중항쟁서울기념사업회


그 날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쟤.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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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맹이 2007-05-11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늘 너무 감사합니다~

글샘 2007-05-15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딩이 썼다는 글 치곤 참 잘 썼죠. ^^
앤디뽕님, 선생님이시죠? '너무'는 부정적일 때 쓰는 거랍니다. 정말~로 써 주세요^^ 선생님이니깐...
 

겨드랑이 the armpit;the axilla

인중 the philtrum (인중을 모르는 사람은..음..코와 입술 사이에 움푹 패인 그 곳)

송곳니

a dogtooth;a canine tooth;a cuspid

어금니

a molar (tooth);a back tooth;a cheek tooth;a grinder

콧구멍

the nostrils;the naris

목젖

『해부』 the uvula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Adam's apple이라는 말은 결후(結喉), 후골(喉骨)이라고 나와있다.

쇄골(鎖骨)

『해부』 the collarbone;the clavicle

복사뼈

『해부』 the anklebone;the talus[astragalus](거골);the malleolus

장딴지

『해부』 the calf (of the leg)

발톱
a toenail(사람의);a claw(짐승의);a talon(맹금의);a hoof(마소의)
귓불
an earlobe;an earlap;a lobe
뒤꿈치
the heel
손금
the lines in the palm of one´s hand
귓구멍
an earhole;auditory meatus[canal];the opening of an ear
눈동자(―瞳子)
the pupil (of the eye);the apple of the eye
뒤통수
the occiput;the occipital region;the back of the head
이마
the forehead;the brow
손금
the lines in the palm of one´s hand
쌍꺼풀(雙―)
a double eyelid
 
영어공부하기 좋은 사전 발견...
다음...의 꼬마 사전을 설치하니 단어에 커서만 올려 놔도 뜻이 보인다. 세상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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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구석구석을 다니다보면 만나게 되는 역사의 흔적이 있다. 4.3학살사건이다. 1948년 4월3일에 시작된 군인과 경찰이라는 공권력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이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관광지, 제주도 곳곳이 비극의 공간이었던 4.3학살의 현장이다. 녹색순례 길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9일간이지만 직접 발품을 팔아 제주도 중산간을 비롯한 여러 곳을 살펴보는 일정이라 4.3학살현장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순례단 중에서 20-30대의 젊은층은 4.3이라는 역사에 대해 막연하거나 모르는 경우도 있어서 새롭게 역사의 진실에 접근하는 계기도 되었다. 녹색순례 7일째, 본격적으로 4.3학살의 현장을 살펴보았다. 유사이래 제주도 최대의 비극이자 아픔의 현장을 살펴보는 시간이었다. 전4.3연구소 연구원이었던 제주사람 강태권씨가 생생한 안내를 해주었다.  

▲ 제주는 마을 중심에 정자목(팽나무)을 심고, 집 앞에 난을, 집 뒤편에는 대나무를 심어 키움. 영남동 등 사라진 마을 집터와 마을 중심은 이를 통해 알 수 있음. 영남동 마을을 외롭게 지키는 정자목과, 마을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표지석


순례단이 아침에 만난 4.3학살의 현장은 서귀포시 인덕면 광평리였다.  제주에서 행정구역상 가장 높은 해발 고도에 위치한 마을이다. 4.3 사건 때 한림읍, 안덕면, 대정읍 등의 지역주민들이 이곳을 거쳐 한라산으로 피신하였다. 토벌대들도 이곳을 거쳐 진압에 나섰다. 광평리가 왜 주요 길목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이곳의 지형을 알아야 한다. 서귀포 동쪽 지역의 지형은 초원과 같은 형태이지만 서귀포 서부지역은 완전한 밀림지역이기 때문에 이곳이 주요 길목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곳 광평리도 4.3의 아픈 기억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 광평리, 이곳을 통해 한림, 대정, 안덕 주민들이 토벌대를 피해 한라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녹색순례 구간마다 4.3 사건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순례 3일째 지나간 성산일출봉 옆 너른바위를 관치기라 부른다. 4.3 사건 때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학살을 당했고, 그래서 무수한 관을 그곳에서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성산 일출봉 옆 너른바위(일명 관치기). 이곳은 4.3 사건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이곳 성산읍에서 무수한 관을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순례 4일째 지난 성읍민속마을 바로 아래인 표선면 가시리의 지미왓 인근의 새가름마을도 그러한 곳이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새가름마을은 가시천 동쪽에 형성되어 신설동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320년 전 오씨가 중심이 되어 만든 마을이다. 20여 가구에 100여명이 조, 메일, 콩 등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면서 평화롭게 살던 마을이었다. 1948년 11월 15일 마을 전체를 군인들이 불질러 없애고 주민들을 표선국민학교에 수용시켰다. 그중 마을 주민 17명이 속칭 버들못 근처에서 처형당하는 등 마을 주민 25명 4.3사건으로 희생당했다. 49년 2월 가시리 현재 마을사무소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돌아와서 새로이 마을을 일으켰다. 새가름에도 2가구가 들어와 옛마을에 생기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으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마을을 떠나면서, 새가름 마을은 영원히 사라졌다. 가시리에 인접한 동백마을 신흥리는 더 큰 피해가 있었다. 4.3학살 때 마을 주민 140여명이 사망하였다.

▲ 4.3 사건 당시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학살당해 마을의 흔적만 남고 사람이 살지 않은 남제주군 표선면 새가름


순례 6일째, 한라산 남쪽을 관통하는 산록도로 근처에도 곳곳이 4.3의 피해현장이다. 탐라대학교와도 그리 멀지 않은 서귀포시 영남마을이 대표적이다. 화전마을이었던 영남마을은 메밀, 조, 콩, 밭벼 등을 심어서 먹고사는, 법 없이도 살아가던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일제 때부터 애국심도 뛰어나 1918년 마을 주민들이 법정사항일운동에 참여하여 6명이 구속되었고 이중 김두삼(당시 25세)은 옥사하였으며, 후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마을도 4.3학살을 피해가지 못했다. 48년 11월 20일 마을주민 60명 가량이 군인에게 학살당했다. 한집안 14명이 몰살을 당하기도 했고, 10세 미만의 어린아이도 18명이 죽었다. 4.3은 양민학살이었기 때문에 노인과 부녀자, 심지어 어린이도 많은 피해를 당했다. 인구비례로 가장 피해가 큰 마을이었던 영남동은 법정 지명만 남은 채, 행정으로는 이미 그 의미가 사라졌다. 이곳도 사라져버린 마을이 된 것이다. 이외에도 4.3의 현장은 제주도 전역에 널려 있다. 관광객들이 무심코 지나가는 현장도 예외는 아니다. 제주공항도 정방폭포도 학살의 현장이었다.

▲ 서귀포시 영남동 마을, 4.3 이전 마을 사람들이 우물로 사용하던 자리. 이제는 연못으로 변해버렸다.


5.10단선을 반대해서 일어난 4.3 학살의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시기는 4.3이 일어난 48년 4월에서 약 6개월이 더 지난 그해 초겨울부터다. 1948년 11월 15일부터 이듬해 1949년 3월까지 중산간지대 마을은 초토화 되었다. 전체 4.3사건의 사망자 중 약 80%가 이 시기에 죽었으며, 70여 개 중산간 마을 중 성읍, 애월읍 정도가 예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4.3학살은 제주도민들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제주의 정체성속에 한의 정서로 뚜렷하게 남아 있다.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속으로 흐르는 정서가 더 뚜렷한지도 모른다. 곳자왈 아래 숨골을 따라 흐르는 지하수처럼 제주의 가슴에 잊혀질 수 없는 정서가 되었다. 4.3의 가장 큰 상처는 저항할 능력이 없는 무고한 양민들이 집단으로 학살된 점이다. 대부분의 제주도 사람들에게 4.3은 비슷하게 인식된다. 국가에 의해서 그것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는 군인과 경찰에 의해서 참혹하게 학살당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육지에서는 이념의 잣대로 다르게 해석할지 몰라도, 적어도 제주도에선 4.3에 대한 1차적인 사건의 규정은 끝났다. 4.3은 이념의 대립이 빚은 결과가 아니다. 육지에서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지만, 적어도 제주에서 4.3은 군인과 경찰이라는 공권력에 의한 무자비하게 진행된 양민학살이었다. 죽어간 자들의 죄라고는 중산간지대의 마을에 살았다는 단 한가지 그 이유뿐이다.

▲ 서귀포시 영남동 마을 사람들이 학살당한 장소 전경


순례단이 오후에 방문한 곳은 동광육거리다. 여섯갈래의 길이 교차하는 제주 서부의 길목이자 교통의 요지로 수많은 관광객들이 지나가는 곳이다.  지방도를 비롯한 주요도로가 지나는 곳이라 파출소도 있고, 주요소와 식당, 식료품점 등이 있다. 이곳에 4.3학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작은 공동묘지가. 그때 학살당한 주민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가족들이 그 한이라도 풀기 위해 시체가 없는 묘소를 조성한 한 것이다. 4.3학살의 희생자들의 영혼을 쉬게 하는 헛묘이다.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807번지-4에 자리 잡고 있다. 동광리 헛묘는 7기는(2기는 합장묘) 동광리 출신 임문숙일가 9명의 영혼을 수습한 묘지다. 헛묘는 시신을 찾지 못하였을 때, 생전에 입던 옷이나 유품 등을 넣어 만든 분묘이다.



▲ 동광리 마을 초입에 만들어진 4.3 유적지 ‘헛묘’에는 당시 처형당한 동광리 주민 임문숙씨 일가 9명의 영혼을 수습한 7기(2기는 합장묘)의 묘가 있다.  


동광리는 초토화작전이 전개되던 48년 11월 21일 국방경비대 제 9연대에 의해 온 마을이 불태워졌다. 군인들은 마을에 들어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모두 폭도로 간주하여 학살을 자행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인근 큰널궤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곳도 발각되어 또 다시 도주하였으나, 눈에 남긴 발자국때문에 한라산 영실기암 인근에서 볼레오름에 체포되었으며, 서귀포의 수용소에 옮겨져 49년 1월 22일 정방폭포에서 학살되었다. 그 때 동광리 주민들도 40여명 학살되었다. 유족들은 군인들이 무서워 시신을 수습할 엄두를 못내다가 몇 년후에야 비로소 정방폭포에서 죽은 영혼을 달래고 이곳 동광리 초입에 헛묘를 조성한 것이다. 억울한 원혼을 위로하는 듯 헛묘의 비석과 봉분 주변에는 보라색 고깔제비꽃이 피어 있었다. 순례단은  동광리일대의 4.3유적지 곳곳을 샅샅이 살펴보면서 4.3이 제주의 마을공동체와 주민들을 삶을 얼마나 모질게 유린했는가를 생생히 확인했다. 동광리 비극의 정점인 큰널궤라는 굴속으로 직접 기어들어가, 주민들이 군인들의 학살을 피해서 어둠속에서 숨죽였던 현장을 체험하였다.  

▲ 4.3 당시 마을 사람들이 토벌대의 학살을 피해 피난 생활을 했다는 동광리에서 서북쪽으로 2.5km 정도 떨어진 도너리 오름 근처에 위치해있는 큰넓궤(궤:작은 천연동굴).



▲ 4.3 당시의 피난민들의 고난을 체험하기 위해 동광 큰넓궤로 들어서는 순례단원들.




▲ 겨우 사람 하나가 지나기도 힘든 비좁은 동굴 내부에서 순례단은 피난민들이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한 힘들었을 당시 상황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꼈다.


4.3의 현장은 이제 역사의 현장이 되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역사적인 재평가도 진행 중이며, 정부에 의한 명예회복도 진행 중이다. 제주4.3사건특별법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직 4.3문제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2008년에는 정부가 지원하고 제주도청이 주관하여 4.3평화공원이 조성된다. 600억 원 가량의 예산을 들여, 죽어간 양민의 영령을 위로하고 4.3학살의 역사적 의미를 인권의 차원에서 정립하자는 취지다.

▲ 4.3 사건 당시 억울하게 죽어간 동광리 마을 사람들의 서글픈 사연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세운 비


4.3에 대한 기록과 자료가 온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다. 인터넷 인프라가 세계최고인 나라답게 4.3에 관한 현장과 주민들의 아픔을 제대로 정리하는 것이 절실하다. 아울러 대한민국의 누구라도 인터넷으로 4.3사건의 전말과 학살의 현장, 관련 유적, 기념추모시설과 추모비, 관련자의 증언 등을 접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4.3평화공원이 중심이 되어서 추진해야 할 일들이다. 항쟁과 폭동이라는 시각도 존재하는 현실이만, 분명한 사실의 기록은 어떤 논리와 이유에서도 미룰 수 없다. 그것을 방해하거나, 저지하는 것은 죽어간 제주양민들에 대한 또 한번의 역사적 학살이자, 4.3의 진실을 가리려는 시도다. 이것은 민족에게 역사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 4.3 사건 당시 토벌대 주둔소로 쓰였던 돌성이 있는 녹하지 오름(알 오름)을 오르는 순례단.

▲ 녹하지 오름(알 오름)에 올라 순례단에게 4.3 사건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설명해주는 강태권(제주도민)씨


해방과 건국의 과정에서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었던 대결과 아픔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무수한 양민들이 사라져갔다. 그 대표적 사례가 제주도 4.3학살의 피해자들이다. 해방 이후 역사는 여전히 뜨거운 논란이다. 하지만 4.3사건처럼 공권력에 의해 무고한 양민 학살이 집단으로 자행된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정부는 그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은 물론이고 역사를 냉정히 기록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는 우리나라에서 이런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역사의 기록을 위해 청춘을 바친 제주사람 강태권씨  

20년 가까운 세월을 4.3의 아픔과 상처를 두 눈으로 응시한 제주사람이 있다. 작년까지 제주4.3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던 강태권씨다. 대학 졸업 이후 88년부터 지금까지 4.3의 학살과 피해 현장을 찾아서 답사하며 증언을 채록하고 현장을 기록하였다. 강씨는 중산간을 비롯하여 제주도 전역을 다니면서 피해자들이나 목격자들을 찾아서 이야기를 확인하고 학살의 현장을 발굴하는 연구활동을 전개하였다. 강전연구원은 4.3사건이 제주도 전역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웬만한 중산간 마을은 죄다 다녀본 셈이라한다. 88년에 제주도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제주4.3학살에 대한 역사적 진실 규명과 재평가에 대한 요구가 모아지면서, 제주 4.3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교사, 향토역사연구자 등이 중심되어 연구소가 운영되었다고 한다. 국민의정부 이전까지 어려운 재정 상황 속에도 제주의 한을 끌어안고 역사적 기록으로 후대에게 정확히 남기자는 의지와 소신들이 연구소의 동력으로 이어졌다. 제주 사람 누구에게나 피해갈 수 없는 4.3에 대한 현장의 발굴과 기록이라는 어려운 일들을 지난 20년 묵묵히 수행했고 그 대표적 일꾼 중 한 사람이 강태권 전연구원이다.  

▲ 4.3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청춘을 바친 강태권씨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가장 어려웠을 때가 언제냐는 물음에 “처음에는 말문을 열지 않았다.가슴의 응어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언젠가 중산간 마을에서 한 촌로를 만난자리에서 ‘알랑, 뭣헐띠’라는 말을 들었다. 지금도 그 말이 기억에 남아 있다.” 면서 사연을 전해 주었다. 이 말은 제주방언으로 ‘당신이 알아서 뭐하겠느냐?’라는 의미로 달리 표현하면, ‘알고는 있지만 말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한다. 강연구원은 “그 말이 바로 4.3살을 직접 겪은 분들의 응어리이자 맺힌 한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강태권씨는 지금도 제주의 4.3현장을 방문하거나 답사하는 이들과 함께 4.3역사기행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43현장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책이나 자료를 넘어 직접 현장을 발굴하고 피해자들과 만나서 기록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기에 그와 4.3의 현장을 답사하는 것은 4.3의 실체를 단박에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강태권씨는 “4.3은 학살의 역사이자. 공권력의 무자비한 주민학살에 대한 항쟁의 역사였다. 역사적 재평가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4.3이 온전히 평가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4.3은 통일이 되어야 온전히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라며 4.3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우리 모두의 숙제라고 이야기 했다. 4.3학살은 한국전쟁 다음으로 우리 현대사에 새겨진 가장 큰 상처다. 강태권씨는 그 역사를 그 어떤 학자보다 정면으로 끌어안고 20대에서 40대까지 이어왔다. 역사에 대해 후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 아팠던 역사를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역사를 알리기 위해 제주도 전역을 걷고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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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5-06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은 평화를 이야기할 수 없는 나라가 아닐까...
아니, 그래서 더욱 평화를 진지하게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꼬마요정 2007-05-06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사회엔 청산 못한 가슴 아픈 학살들이 너무 많아요.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 정부가 저지른 4.3 제주양민학살사건은 확실히 재조명 되어야 해요.. 그래도 요즘 친일파재산 몰수 등 시도는 하고 있지만, 정권 바뀌면 또 어떻게 될런지... 에휴

꼬마요정 2007-05-06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퍼 갈게요~~^^

프레이야 2007-05-06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녹색순례 다녀오셨군요. 우리가 관광으로만 가는 남제주의 곳곳에 피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 잊기가 쉽지요. 전에 가족들이랑 여행갔을 때 밭에 그렇게
누워있던 무덤들을 보았는데 그게 헛묘였지 싶어요. 관치기랑 큰넓궤도 알게
되었네요. 끔찍한 과거입니다. 아니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글과 소중한 정보 보았습니다.

바람돌이 2007-05-07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역사기행갔을때 주제중의 하나가 4.3이었습니다. 우리가 그저 지나가는 제주도의 그 멋진 풍광속 하나 하나에 제주 사람들의 아픔이 스며있다는건 책으로 보는것과는 다른 체험이었습니다. 초기에 이 사건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충격을 주었던 때와는 다르게 어느정도 알려진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저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정도로 흘러가는게 아닌가 해서 많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경우가 많은데 제주도 4.3역시 아직 역사속에 묻어버리기엔 너무 이르지요.

해콩 2007-05-07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녀오신건가요? 저도 6월에 민주공원에서 주최하는 4.3항쟁 코스를 밟을 예정입니다. 겨우 1박 2일이지만.... [제주역사기행]을 이영권 선생님의 안내로. 그 전에 공부가 필요할 것 같아 퍼갑니다.
흠... 귀차니즘이 도져서 서재질이 뜸하지만 저는 잘 살고 있답니다.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

글샘 2007-05-11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이 엠 쏘뤼~
이건 제가 다녀와서 쓴 명문이 아니라, 다음에서 퍼온 건데요.
정신없이 올려서 펌글임을 안 밝혔네요. 죄숑함다~~-_-;;v
 

"저 원래 그런 건 못하거든요"

[머니투데이 류석우칼럼니스트][[류석우의 태클코칭]고질병을 부숴라]

☞태클편지 : 저 원래 그런 건 못하거든요…?

사람 성격이라는 게 참 바뀌기가 힘든 것 아닌가요?

대부분 성공에 대해 이야기하는 분들은 하나같이 밝고 활발한 사람들에게나 먹힐만한 이야기를 하던데, 정말 저처럼 원래부터 성격이 내성적인데다가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쩌라는 건가요….

이번에 저희 회사에 신제품이 출시되면서 영업팀이 새로 꾸려지게 되었거든요. 각 부서 당 2명씩 차출이 되었는데 그만 제가 뽑혀버린 겁니다.

제가 자신 없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제 원래 성격이 어떤지 판단도 안 해보시고 무작정 그런 일을 맡기다니…. 전 아직까지 살면서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한번 못하고 살았던 스타일입니다.

누가 앞에 나가서 장기자랑이라도 할라치면 제가 더 민망해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숫기도 없고요. 그런데 영업이라니, 이게 웬 날벼락 같은 소리란 말입니까. 붙임성도 없고 낯가림증도 심한 저보고 정말 회사를 말아먹으라는 얘긴지, 진짜 사표 써야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도 제 성격이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게 싫어서 좀 변화해 보려고 자기계발 카페에도 가입하고 나름대로 노력은 하고 있어요. 하지만 원래의 제 스타일이 있는지라 좀 힘드네요.

저처럼 원래부터 소심한 인종들은 정말 남들보다 앞서기 힘든 건가요? 성격과 정말 안 맞는 이런 일을 맡았을 때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죠?


<태클넘기 : ‘원래병’을 부숴라>

틀림없이 그 병에 걸리신 게로군요. 저 역시 예전에 심하게 앓았던 병이기도 해서 낯설지가 않아요. 저도 그 병을 치료하는데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아주 각오하셔야겠어요.

너무 놀라지는 마세요. 이 병은 너무도 흔해서 당신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걸렸거나 그 병의 인자를 가지고 있거든요. 물론 자기가 이 병에 걸린 줄도 모른 채 말이죠. 궁금하시죠? 바로 ‘원래병’이라는 겁니다.

‘변화’와 상극관계

혹시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자신이 ‘원래’라는 말을 얼마나 쓰는지 알고 있나요? 제게 보낸 편지만 하더라도 그 짧은 글에 ‘원래’라는 표현이 네 번이나 있었답니다.

또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조금만 엿들어 봐도 쉽게 나오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나는 원래 그래, 나는 원래 이런 걸 싫어해, 나는 원래 저런 것을 좋아해, 나는 원래 그런 건 잘 안 해, 나는 원래 그런 성격이야, 원래, 원래, 원래….”

이처럼 ‘원래병’ 바이러스는 전국 방방곡곡에 널리 퍼져있어요. 그렇게 유명해서 그런지 ‘원래병’은 다른 별명도 많이 가지고 있죠. ‘고정관념’이 대표적이고, ‘고집’, ‘아집’으로도 가끔 불립니다. 또, ‘구태의연’이라는 형용사로도 표현이 되며, 이 병에 심하게 걸린 사람의 성격을 ‘폐쇄’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로 몰아세우기도 하죠.

그런데 이 ‘원래병’과 경계선을 이루며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는 녀석이 있어요. 바로 ‘변화’라고 하는 녀석인데, 이 ‘변화’와 ‘원래병’은 서로 상극관계라고 할 수 있죠. 둘 간의 싸움에서는 이 ‘원래병’이란 녀석이 단연 우세합니다.

‘변화’는 이 ‘원래병’에게 별로 힘을 쓰지 못하고 만날 당하기만 해요. 그래서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웬만큼 힘이 센 ‘변화’를 대동하지 않으면 절대로 ‘원래병’을 이기지 못한답니다. 그냥 그렇게 ‘원래’대로 살아가죠.

‘나’는 내 방식의 결정체이다

아무리 이 병이 흔하다 할지라도, 비전을 가지고 무언가를 이루려는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어요. 특별한 삶을 꿈꾸는 사람들은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죠. 즉, ‘원래병’과 상극인 ‘변화’라는 녀석을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세계적인 성공학자 위르겐 휠러는 이런 말을 했어요. “이제까지 해온 그대로를 한다면 이제까지 살아온 그대로로 살아갈 것이다.” 사람들은 변화를 꿈꿀 때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생각합니다. 곧 그것이 비전이자 목표이고, 꿈이며 희망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쉽게 가지는 착각 중의 하나가 이제껏 해왔던 대로 하면서 변화된 미래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거예요. 저는 그런 착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현재의 자신을 한번 냉철하게 분석해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지금의 나의 모습, 그러니까 내가 현재 처한 모든 상황은 이제껏 내가 세상에 태어나 현재까지 사고하고 행동하며, 말해 왔던 모든 것의 ‘결정체’에요. 그 누가 만들어 준 것도 아니요, 그 누가 대신 그려준 것도 아닌 철저하게 내가 그린 그림이란 뜻이죠. 그런데 이제까지의 그림과는 다른 그림을 원하면서 이제껏 그려왔던 방식을 계속 고수한다는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생각이라고밖에 할 수 없어요.

패턴 자체를 바꿔라

더 심각한 문제는 예전의 방식으로 그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새롭게 변화된 방식인양 착각을 한다는데 있답니다. 그러니까 그리는 방식자체를 바꾼 것이 아니라 물감의 농도만을 살짝 바꿨으면서, 완전히 새로운 그림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것이죠.

저도 처절하게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초보 강사시절, 스스로 제 강의를 녹음해서 분석한 결과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저는 그 문제점들로 인해 제 강의가 점점 청중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느꼈고, 비로소 변화를 시도하기로 마음먹었죠.

강의내용을 바꿔보려고도 노력했고, 재미있는 멘트를 삽입시켜 청중들을 웃겨보려고도 했어요. 또, 멋진 말들로 강의의 품격을 높이려고 강의록도 보강시켰구요. 그렇게 스스로는 변화했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강의를 했어요.

그러나 청중들의 평가는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 때문에 한참을 슬럼프에 빠져야 했죠. 그러던 중 어느 책에선가 “변화를 시도하려면 뿌리부터 바꿔라.”라는 문구를 보게 됐어요. 순간, 제가 뿌리를 바꿀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잔기술’만을 변화시켜 새로운 결과를 얻으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래서 다시 강의패턴 자체를 바꾸려고 시도했어요.

처음엔 그 ‘원래병’이란 녀석 때문에 정말 힘들더라고요. 말투, 제스처, 표정 하나하나에 병균이 침투하여 저의 변화를 가로막았죠. 정말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어요. 하지만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더군요. 저는 결국 변화를 이루어냈고 그때부터 제 강연은 새로운 결과를 도출해내게 되었답니다. 이것이 바로 ‘원래병’이란 병마와 싸운 저의 첫 번째 ‘병상일기’에요.

당신도 원래병에 걸려있는 자신을 심각한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어요. 원래라는 것이 과연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도 있구요. 행동으로 노력하기도 전에 먼저 “원래 나는 그런 사람이야.”라는 생각부터 하고 있으니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거예요.

성공자들이 태어난 마을

유명한 성공자들이 여러 명 출생했다고 하여 유명해진 마을이 있어요. 한 기자가 도대체 그 비결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취재를 하러갔답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선 기자는 이 마을이 맞는지 물어보려고 걸어오는 어떤 노인을 붙잡고 물어보았어요.

“할아버지 이 마을이 유명한 성공자들이 많이 태어났다는 그 마을, 맞나요?”

할아버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어요. “아니오, 이 마을에서는 그저 갓난아기들만 태어날 뿐이라오.” 그래요. 원래부터 성공자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저 똑같은 갓난아이였을 뿐이죠.

또, 어떤 분야에서 특출한 성과를 거두는 사람들을 보세요. 과연 그들이 원래부터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을까요? 일본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몸이 허약했고, 배운 것이 없어 중졸학력밖에는 되지 않았으며,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던 것이 바로 자신의 성공비결이라고 했어요.

또, 현재 한국을 빛내고 있는 세계적인 축구선수 박지성을 보자구요. 축구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신체부위가 어디죠? 바로 발이에요. 그런데 그는 평발이라고 해요. 조금만 뛰더라도 피로를 느낀다는, 그래서 군대도 면제된다는 평발이라구요. 그에게 ‘원래’라는 단어를 적용한다면 과연 축구를 해야 옳았을까요?

그래요. 변화를 시도하기 전에 먼저 그 ‘원래’라는 생각부터 지워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한번 변화를 시도해보세요. 그랬는데도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당신의 ‘뿌리’를 한번쯤 의심해 보시구요. ‘잔기술’만을 변화시키려하지는 않았는지 말이에요.

관록이 쌓일수록 경계하라

이 ‘원래병’은 연륜이 쌓일수록 더욱 더 기승을 부린답니다. 연륜이 쌓이게 되면 ‘축척된 경험’이라는 녀석이 이 ‘원래병’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어 뒤에서 버텨주기 때문이죠. 그래서 웬만해서는 변화를 인정하려하지 않는 구태의연함을 보이게 됩니다.

이는 가정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일이에요. 특히 부모자식간 ‘세대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의 경우, 축적된 경험과 변화된 현실사이에서 서로의 가치관이 충돌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때 변화된 현실감각 없이 자식들의 행동만을 탓하며 ‘원래’를 강조하게 되면, 급변하는 시대에 환영받지 못할 폐품관념의 소유자로 낙인찍힐 수 있어요. 물론 너무 지나치다 싶은 부분은 자제시켜야 마땅하겠지만 말이죠.

세계적인 기업 GE의 잭 웰치는 “1등과 2등 분야를 남기고 모조리 팔아 없애라.”라고 했죠.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역시 “자식과 마누라만 빼고 다 바꿔라.”라고 했구요. 한 기업의 역사와 전통을 뒤흔들 수 있는 그 ‘변화의식’이야말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오늘날의 결과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어요.

이제 꼭 명심해야해요. 당신 몸속에는 지금 ‘원래병’이 시퍼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바짝 긴장하지 않으면 그 병은 어느 때고 몸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거예요. 그러니 새로운 변화를 원한다면 오늘부터 ‘원래’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지우고 변화를 시도해보세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원래병’의 심장부인 뿌리부터 공략해야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구요.

변화는 변화 없이 결코 변화되지 않아요. “변화하며 살자구요!”

류석우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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