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과 생사의 갈림길


우리나라, 우리 민족에게 이념이란 어떤 의의가 있는 것인가? 이념이 무엇이기에 한 인간의 생사와 한 가족의 생애가 그토록 영향을 받게 되는가? 소위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사형된 이들에 대한 재심선고를 들으면서 저절로 발생되는 의문이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모독

그 사건의 내용, 성격에 대하여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32년이 지난 후 재심에서야 비로소 무죄가 선고되었으므로, 우리의 법치주의 및 사법제도에 대한 반성과 아울러 인권적인 차원에서 국가의 불법행위에 의한 생명과 행복의 상실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유신헌법 당시의 사법부는 삼권분립체제하의 사법‘부(府)'가 아니라, 영도적 대통령의 막하에 있는 일개 부서로서의 사법‘부(部)’였다. 박정희 대통령 개인은 3부 위에 우뚝 솟았고, 국민 위에 군림하였다.

소위 ‘인혁당재건위사건’은 무엇이 그 실체인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당시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의 정권안보의식은, 적어도 반유신체제운동이라면 전국적으로 거대하게 조직되어야 하고, 그 조작의 배후에는 북한의 지령을 받는 간첩이 침투하고 있어야 했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실체와 상관없이 조직도표와 배후관계가 그려지고, 그중 일부분은 극형에 처하였던 것이다. 그와 같은 정권위주의 극악한 행동들은 몇 년도 못가서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지만, 그들이 얼마나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어갔는가에 대하여는 오랜 투쟁 끝에 그 실상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우리 제헌헌법이 ‘민주주의 제(諸)제도(制度)를 수립’할 것을 선언하였고, 역설적이게도 유신헌법부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공고히 또는 확고히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라고 할 수 있으려면, 사상과 이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여야 하는데, 유신헌법이 유신체제 자체를 비판하는 것을 엄금하면서 굳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명시하려고 하였던 것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모독이었다. 사회주의체제하에 있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최일선국가(最一線國家)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에 불과하였다. 인혁당으로 지칭되는 이들은 혁신계열에 속하고, 평화통일을 주창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추구하던 평화통일이 북한이 주도하는 적화통일을 의미하지 않았느냐는 지적도 있다. 설혹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행적을 가지고 그토록 무자비하게 사형을 집행할 일은 아니었다. 남한에서도 평화통일을 말하지만, 내심으로는 북진통일 또는 흡수통일 이외의 방식을 전혀 용납하지 않으면서 평화통일을 말하기도 한다. 평화통일을 하나의 이념으로 볼진대, 그 안에 ‘진심’이 담기지도 않고 ‘현실적인 방법론’이 미비한 경우에는 위장적이거나 공허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인권을 지나치게 유린한 나머지 그들의 이념과 행동에 대한 성찰은 부족하게 되었다.

사상과 이념 때문에 사형에 처하는 일 다시 없어야

오늘날 우리에게 이념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이념으로 인하여 생사화복(生死禍福)의 갈림길에 서야 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의 현실인 듯하다. 그렇다면 각자가 신봉하고 있는 이념의 내용을 되돌아보고, 더욱 철저하고 분명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이념은 무엇이며, 이 나라의 통합과 발전,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는지 밝히기 위하여, 인격적이고 역사적인 모든 관점에서,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접근을 게을리하여서는 안되겠다.

사상과 이념의 문제로, 독선적인 태도로써 서로 시의(猜疑)하거나 반목(反目)하고, 내부에서 먼저 분열하여 멸망하는 일이 없도록 모두가 크게 분발하여야 할 때이다. 사상 또는 이념은 기본적이거나 중점적인 사고일 뿐, 결코 모든 것을 설명하거나 포괄하지 못한다. 그 영역에서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다. 상호 존중하면서 시대에 따라 최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운용되어야 한다. 사상, 이념의 문제로 사형에 처하여지는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예방되어야 하고, 어떤 이념 또는 사상이 국민의 여론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다고 하여 그 자체를 처벌하려고 조급해 하여서도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국민의 생활과 의식의 기초는 다양하고 복합적이며 지속적이기 때문이다.


글쓴이 / 박연철
· 변호사
· 법무법인 정평 대표변호사
· 정법회 및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회원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위원
· 전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피레네 산맥을 넘던 순례자들이 휴식을 취하며 안개가 걷히는 산을 바라보고 있다.


당신. 사랑에 허기지고, 일에 지친 당신. 어느날 당신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인생이 정말 이것뿐일까.’ 당신은 소진되어 가고 있었고, 비에 젖은 창호지처럼 늘어져 보낸 날들의 끝이었다. 위험하다 위험하다 중얼거리며 당신을 지켜보던 나, 마침내 지도 한 장을 건넨다. 당신은 그 이름이 낯선지 망설이는 눈빛이다. 당신의 흔들림을 짐짓 모른 체하며 등을 떠민다. 낡은 배낭을 메고 출국장에 들어서는 당신의 뒷모습이 아직 불안하다. 괜찮아, 돌아오면 삶이 조금은 가벼워질 거야.



살다보면 그런 날이 온다. 다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고, 가던 길을 그냥 가기에는 왠지 억울한 순간.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나이’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은 그런 날. 꼭 그렇게 절박해서 떠나는 여행이 아니어도 괜찮다. 방향타도 없이 떠밀려 온 속도전에서 벗어나 느리게 숨쉬고 싶을 때, 짧지만 짜릿한 일탈을 꿈꿀 때, 길 위의 자유 그 불온한 냄새가 그리워질 때, 당신은 어디로 향하는가. 공간의 이동이 삶의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는 것을 아는 당신, 몰래 품어온 이름이 있는가.

그곳에 서면 왠지 삶이 달라질 것만 같다. 마음의 주름을 활짝 펴서 팽팽해진 얼굴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 두고 온 곳에 대한 망각, 지금 서 있는 곳에 대한 몰입, 돌아갈 곳에 대한 긍정이 마법처럼 생겨나는 곳. 길의 끝에서 만나는 건 결국 익숙하면서 낯선 자신, 자기 자신과 뜨겁게 소통할 수 있는 곳.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하고픈 당신을 위해 준비된 길. 흔들리는 당신의 등을 떠밀어 보내주고 싶은 그 길의 이름은 ‘카미노 데 산티아고’,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다.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땀 흘렸고, 파올로 코엘료의 삶을 바꾼 길. 그리고 당신과 나, 이름 없는 이들의 눈물과 땀을 지켜본 길이다.

길이 품은 풍경은 다양하다. 황금빛 밀밭이 지평선을 이루며 펼쳐지는 길의 끝에는 푸른 포도밭이 일렁인다. 세월의 더께로 반짝반짝 빛나는 돌길이 깔린 옛마을과 위풍당당한 교회를 지나면 양떼와 함께 걸어가는 푸른 초지와 구릉이 이어진다. 오랜만에 만나는 도시의 풍경이 낯설게 다가오고, 다시 작은 마을을 지나 나무와 숲이 우거진 산을 넘으면 마침내는 바다로 향하는 길이다. 북유럽 사람들이 그토록 질투하는 스페인의 태양이 지긋지긋해질 무렵이면 “햇볕을 위해 기도하되, 비옷 준비를 잊지 마라”는 땅이 이어져 가는 비가 흩뿌리기도 한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이상하다. 당신이 아플 때 약을 나눠주고, 목마를 때 물을 건네고, 배고플 때 밥을 해준다. 지친 다리를 사심 없이 주물러 주고, 냄새나는 발바닥의 물집을 따주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도울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자원봉사협회에서 파견이라도 나온 듯,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사람들이 여기 저기 가득하다. 잠시 어리둥절했던 당신도 곧 친절 바이러스에 감염돼 나누는 기쁨, 베푸는 행복을 체험한다.

길에는 역사의 향기가 배어있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조개껍데기를 매달고 지팡이를 짚으며 그 길을 걸어왔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야곱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왔던 길. 그래서 길의 끝은 야곱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의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한다. 전설보다 오래된 교회와 십자군 전쟁의 흔적, 성당기사단의 비밀과 마녀로 몰린 여자들의 화형대, 로마시대의 돌길까지 당신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길의 끝에 서면 증명서가 선물로 주어진다. 하지만 그 길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당신 자신이다. 800㎞를 걸어가 만나는 대성당에서 천년된 돌기둥에 기대어 눈물 흘리는 당신. 삶에 대한 희열과 감사로 압도되는 그 순간을 겪고 나면 세상은 달라 보인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당신은 이미 변해있다. 돌아오는 길, 비행기 안에서 당신은 알고 있다. 문명 전체가 나아가는 방향에 등 돌릴 힘이 당신 안에 있다는 을.

▲여행길잡이

◇경비와 기간=길의 길이는 약 800㎞. 다 걸을 계획이라면 한 달이 필요하다. 하루에 필요한 비용은 2만원을 잡으면 된다(숙박비 3유로, 아침 3유로, 점심 8유로, 저녁 3유로. 순례자 전용숙소인 알베르게에서 자고, 저녁을 직접 만들어 먹는 경우다). 항공료를 포함한 총 경비는 150만원 전후를 예상하면 된다.

◇배낭꾸리기=모든 여행의 제1원칙, 배낭은 깃털처럼 가벼워야 한다. 배낭의 무게가 곧 당신 삶의 무게다. 당신의 삶은 배낭 하나에 모든 것을 넣어 떠날 수 있을 만큼 간결한가. 배낭을 보면 당신을 알 수 있다. 당신이 포기하지 못하고 부여잡고 있는 것들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인다. 그러니 낯선 이에게 배낭을 열어 보이는 건 당신의 가슴을 여는 것과 같다. 배낭을 꾸리는 원칙은 간단하다. 뺄까말까 망설여지는 것을 모두 뺀 후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만으로 짐을 꾸린 후, 다시 그 짐의 절반을 덜어낸다. 체중감량이 아닌 삶의 무게의 감량 능력, 신나는 인생을 위한 당신의 무기이다. 갈아입을 옷 한 벌과 방수점퍼, 가벼운 침낭, 손전등과 세면도구, 필기도구면 충분하다. 한 가지 더, 좋은 배낭과 워킹화에 대한 투자를 잊지 말자.

◇출발=천년의 역사를 가진 길인 만큼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길은 다양하다. 가장 인기 있는 길 ‘카미노 프란세스’가 무난하다. 보통 프랑스-스페인 국경지역인 생장피드포르에서 시작해 피레네를 넘어 스페인으로 건너오는 800㎞의 구간이다. 순례자 전용 숙소인 알베르게가 몇 ㎞마다 있어 하루에 걸을 거리를 조절하기에 가장 편하다. 알베르게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순례자용 여권 크레덴시알을 만들어야 한다. 생장피드포르나 대도시의 산티아고 협회 혹은 성당에서 1~2유로를 내고 발급받는다.

◇순례자의 하루=당신이 올빼미형 인간이라면 이 길에서는 변해야 한다. 순례자의 하루는 새벽 5시 기상으로 시작된다. 여름의 경우 보통 5시에서 6시 사이에 눈을 떠 6시에서 7시 사이에 걷기 시작한다. 알베르게가 문을 여는 시간인 오후 1시를 전후해 걷기를 마친다. 일사병으로 길 위에서 장렬히 순교하지 않으려면 시간조절이 필수다. 순례자는 스페인의 마을이 잠들어 있을 때 길을 나서서 스페인의 마을이 낮의 더위와 침묵에서 깨어나는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여권에 도장을 받고, 침대를 배정받는다. 몸을 씻고, 빨래를 한다. 그리고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고, 엽서를 쓰며 휴식을 취한다. 저녁은 근처 슈퍼에서 장을 봐 만들어먹고, 9시면 잠자리에 든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산티아고의 길.’ 스페인의 수호성인인 야곱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이어지는 길을 말한다. 중세부터 내려온 길로 다양한 경로가 있으나 가장 인기 있는 길은 ‘카미노데프란세스’다. 카미노데프란세스는 프랑스-스페인 국경인 생장피드포르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까지 이어지는 800㎞의 길을 말한다. 원래는 가톨릭 성지순례길이었으나 현재는 전 세계에서 도보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김남희씨는

세계 곳곳을 시속 4㎞로 걸어서 여행하는 도보여행가다. 2003년 중국을 시작으로 라오스, 미얀마, 태국, 인도, 터키를 거쳐 유럽을 여행했고,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여행’ 3권을 펴냈다. 2005년 여름엔 50여일간 카미노 데 산티에고를 걸었다. 그 경험을 ‘세계의 컬트여행’ 시리즈에 4회에 걸쳐 연재한다.

〈글·사진 김남희 www.skywaywalker.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해콩 > 교육으로 행복해지는 사람과 땅

 

교육으로 행복해지는 사람과 땅

The person and the land which become happy through education




교육이 미래다


교육의 목적은 성적을 높이는데 있지 않다는 주장에 대해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교육은 마치 성적 높이기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처럼 학교도 가정도 성적에 연연하고 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이니 국가와 사회, 가정과 개인이 땀흘려 노력한 결과, 좋은 성적 거둘 수 있다면 참으로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가 좋은 성적을 거둘 수는 없다.


  무한경쟁상대이니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이 승자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교육에서 진정한 승자는 학교를 떠나 삶의 현장으로 나갔을 때, 그곳에서 자신의 몫을 톡톡히 해내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 교육의 목적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 것일까? 교육으로 행복해지는 세상이다.


  살아가는 힘을 길러주는 학교가 되어야 하며, 살아가는 힘을 통하여 그들에게 삶의 토대를 만들어 주는 것이 교육이 존재하는 이유인 것이다.


  이제 우리의 교육은 풍류를 회복해야 한다. 신바람, 흥, 멋, 움직임, 노래, 춤들이 살아나야 한다. 거리의 건전한 끼가 학교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거리도 좀 더 유용하고 건전한 문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


  학원에 가지 않아도 나의 가능성을 키우는 공부를 하는 나라! 학원을 가더라도 지필평가를 위해서가 아닌 나만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 가는 나라! 사교육비가 세계에서 제일 적게 들어 부모들의 지갑이 두둑해지는 나라! 이 땅의 아이들이 방과 후에 모여 농구도 하고 하이킹도 가고 청소년회관에 가서 수영을 하는 아이들이 마냥 행복한 나라! 그래서 맘 편하게 살 수 있는 나라! 이런 미래를 꿈꾸어 본다.

  이번에 발간하는 작은 책자 ‘교육으로 행복해지는 사람과 땅’이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모범답안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작은 책자를 통하여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우리나라 공교육과 사교육의 문제점들을 한번쯤 되돌아보고, 교육으로 행복해지는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한 작은 실마리라도 찾아낼 수 있다면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2005년 여름


전라북도교육감 최 규 호



한국어를 어설피 아는 외국인이 있었다. 한국인들이 개고기를 먹는 사실에 달갑지 않은 시선을 가진 그가 한국인들과 대화 중에 의아해 하는 내용이 하나 있었다.


‘애 먹었어’ 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개만 먹는 것이 아니라 애(아이)도 먹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한국인들이 애를 먹는다는 오해를 받고 있음을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애먹으며 살고 있는 셈이다.

사교육비 부담율 세계 1위!

그렇게 해서 대학에 보낸 자녀의 1년 간 대학 등록금이 1,000여만원 하숙비와 용돈으로 한달 100만원이 넘는 돈을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자녀에게 보내는 지방의 아버지 그는 1년 동안 2,000만원이 훨씬 넘는 교육비를 써야 한다.

자녀가 둘이거나 셋이면 두 곱, 세 곱 더 들어가기 마련이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참 힘들다



1. 키 작은 거인

  한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적응 기간이 끝나고 난생처음 시험이란 것을 보았다. 고사리 같은 아이의 손에는 100점 맞은 시험지가 들려져 있었다. 아이는 뛸 듯이 기뻤다. 너무 좋아서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모른다. 책가방을 휘돌리며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엄마에게 큰소리로 자랑한다.

  “엄마, 나 100점 맞았어”

  이때 엄마의 반응은 가지각색이겠지만 상당수 엄마들은 이런 반응을 나타낸다.

  “네 짝은 몇 점이니?”

  아이는 자기 짝까지 걱정해주는 엄마가 고마워서 더욱 큰소리로 대답한다.

  “응, 내 짝도 100점이야!”

  엄마가 말한다.

  “시험문제가 쉬웠나 보구나!”


풀려있는 엄마의 눈빛이나 냉소적인 말투에서 상처를 받은 아이는 이와 같은 몇 번의 반복적인 일을 겪은 후 더 이상 책가방을 흔들지도 시험지를 들고서 집에 뛰어오지도 않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아이의 엄마는 100점을 맞은 아이에게 왜 이렇게 냉소적이어야 하는가? 아이의 엄마는 ‘공부를 잘한다’는 것이 ‘남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은 ‘공부를 잘하는 아이‘로 만드는 것이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다.


  우리 교육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가 남보다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에 쏠리게 된다. 학교에서는 아직도 여러 사람이 100점을 맞아오는 관계로 ‘학교 진도 앞지르기 교육’을 서둘러서 시킨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더 빨리!’와 ‘더 많이!’라는 비방책을 쓰기도 한다. 


  놀이 공원에 가서 작은 키의 제한에 걸려 놀이 기구를 타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여러 종류의 학원과 과외, 학습지 등으로 잘못된 몸집을 부풀리는 ‘키 작은 거인’이 되어가고 있다.  



2. 이대로의 모습으로


  언론에 보도된 중학교 여학생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고급 공무원인 아버지와 유명 의사인 어머니 사이에 인성 바르고 머리도 좋은 모범적인 딸이 있었다. 언제나 바쁜 부모들 못지 않게 딸도 학교생활에 충실하게 살고 있었다.

  이들 세 가족은 서로가 바빴기 때문에 얼굴 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처럼 만나게 되면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며 못내 아쉬움을 표해야만 했다.


  “아빠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니?”

  “네, 아빠!”

  “아빠는 널 위해 뭐든지 해줄 수 있단다. 딸아!”

  “고마워요. 아빠!”

  “사랑하는 딸아! 아빠는 너에게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어. 다만 한가지 네가 전교 1등을 한번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네.”


  이들 부녀간의 대화는 며칠 뒤 어머니와도 이어졌다.  


  “엄마는 너에게 무엇이든지 해줄 수 있단다. 엄마를 위해 전교 1등 한번 해줄 수 있니?”

  “네.”


  착한 딸은 부모님의 바램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오직 전교 1등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드디어 전교 1등을 했다. 아이의 인간성이 좋았던 연유로 시샘하거나 질투하는 친구도 없었다. 선생님들도 반 아이들도 모두 진심으로 1등을 축하해 주었다.

  그날 밤, 아이는 책상 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대로의 모습으로 절 기억해주세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더 말하는 것은 망자에게 누가 될까봐 이야기를 여기서 접을 따름이다.


  모든 부모는 ‘우리 아이가 공부를 잘 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공부를 잘해야 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강요한다. 그래서인지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학교에서 1등이나 그에 버금가는 성적을 유지하야 한다는 부담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내면에 깔려있는 정서이다.



3. 지름길 공부는 이제 그만


  공부에서 진정한 승자는 학교를 떠나 삶의 현장으로 나갔을 때, 그 곳에서 자신의 몫을 톡톡히 해내는 사람이다.


  세월이 흘러 학창 시절의 성적이 덧없는 추억으로 아련하게 기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학교 성적 높이기에 열심인 한국식 공부가 처음에는 두각을 내는 듯하나 결국 세계무대에서 먹히지 않는 이유가 있다. 10개의 수학문제를 내놓고 풀라고 하면 한국의 학생들은 후닥닥 문제를 푸는데 이 모습을 서구나 유럽의 학생들은 경이로운 묘기를 보듯 바라만 볼 따름이라고 한다.   

             

  한국의 학생들은 ‘지름길’ 중심의 공부를 한다. 그러나 서구의 아이들은 미련해 보일 정도의 과업 수행 공부를 한다.  여기에서 생기는 차이가 대학에 가면 나타나게 되는데 우리 나라 대학생들이 국가간 경쟁력에서 너무 뒤떨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미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인 SAT에서 간혹 한국의 유학생이나 교포들이 만점 또는 수석을 했다는 보도를 접했을 것이다. 그들이 다음 단계에 겪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미국에서도 입시 학원, 과외 등을 통해 지름길 공부를 했기 때문에 상당수가 대학에 가서 중도 탈락하거나 몇 년씩 졸업이 늦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한국식 공부가 미국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뒤에야 공부 방법을 바꾸고 졸업을 하게 된다.


  한국식 공부 방법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 방법이 유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의 생각을 요약하고 암기하는 방식으로 점수를 따기보다는 자신의 독창적인 사고와 발상을 통하여 진정한 실력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공부 방법이 학년이 올라갈수록, 사회에 나올수록 유용하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너무나 많은 양의 공부를 하며 시간과 함께 물질을 허비한다. 중3 또는 고3의 수험생을 한번이라도 겪어 본 부모라면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공부는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며 하나를 알아도 제대로 알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왜 그들이 학원으로 가는가?


  우리나라가 세계 순위에서 1위를 달리는 것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 수주율. 청소년 흡연률, 교통사고 사망률, 사교육비 부담률 등이다. 여기서 말하려 하는 것은 사교육비 부담률이다. 학교 수업료가 두 세배 오른다해도 학원에만 가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중산층 아버지들의 푸념을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 사교육비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지출하면서도 토익 순위 세계 111위를 하는 교육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한다.


  학교가 끝나고 새벽 두시까지 학원에 가 앉아 있고 싶은 학생이 있겠는가? 1인당 국민소득 10,000$ 나라의 고급 교육을 받은 엄마들이 파출부를 하며 학원비, 과외비를 만들고 있는 불합리가 어디 있겠는가? 왜 그렇게 학원으로 가고 있는가?

  

  근본적인 이유는 ‘한 줄 세우기식 입시’에 문제가 있다. 줄서기를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줄의 맨 앞에 서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잘 알고 있다. 출세의 티켓을 확보하는 듯한 한 줄 세우기식 입시는 빨리 사라져야 한다. 지금의 입시제도는 시골에서 공부한 아이들에게조차 서울 강남의 학원에 가서 배워야 푸는 유형으로 시험을 치르게 한다. 문제를 읽어 나갈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학원에 가서 배우라는 식이다. 입시가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몰고 있는 식이다.


  서울 8학군 아이들에게 시골의 토종으로 진술된 문제를 풀게 하면 그들이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저항이 거셀 것이다.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 말은 다양한 입시 제도가 활용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농촌 아이들이 보는 시험 문제, 도시 서민층이 보는 시험 문제, 기득권층이 보는 시험문제, 노는 아이, 거리의 아이, 노래부르는 아이, 음식 잘 만드는 아이, 게임에 정신 팔려있는 아이 등이 입시에 관련한 각종 평가에서 존중되어져야 한다.


  그들의 강점이 부각되어 신바람 나서 풀 수 있는 시험 방식을 채택해야 할 일이다. 뭐든 전문가가 되면 돈이 되는 세상이 아닌가? 입시는 아직도 봉건 시대부터 줄곧 채택했던 지필 위주의 관료를 뽑는 평가를 취하고 있다.


  지금의 입시에는 찬란하게 휘날리는 기득권자들의 깃발만 보일 뿐이다. 지방의 초․중등학교와 대학들이 모두 쇠락하고 기득권자들의 자리 지킴만 있는 나라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속칭 ‘안전빵’이란 말을 영원히 쓸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여러 줄 세우기 평가’가 너무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평등한 방법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열린 사고를 가진 학생들이나 뜻이 있는 교육 선각자들에게 물어 보자. 그들은 실현가능성이 지극히 있다고 하고 평등한 방법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선발한 학생들이 전국 어느 대학에서 공부를 하더라도 각자의 가능성을 가지고 신명나는 학교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입시는 점수 서열로 학생을 뽑기 때문에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가도 고만 고만한 학생들이 모여 고만고만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우리 대학의 모습이다.


  그곳에는 초점 잃은 눈빛들이 방향성을 잃은 채 무한 가치가 있는 귀중한 본인만의 재능을 사장시키고 있다.


  대학은 이제 싸구려 인력 송출업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소위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그곳에 안주하며 자리 지키기에 연연해서도 안 된다.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한사람이 백만 명의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두뇌 혁명의 선발주자들을 길러내는 곳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시대를 이끌어 가는 진정한 인물을 원하고 있다.


  진정한 리더의 안내를 받으며 이 땅의 아이들이 방과 후에 모여 농구도 하고 하이킹도 가고 청소년회관에 가서 수영을 하는 아이들이 마냥 행복한 나라! 학원에 가지 않아도 나의 가능성을 키우는 공부를 하는 나라! 학원에 가더라도 지필평가를 위해서가 아닌 나만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 가는 나라! 사교육비가 세계에서 제일 적게 들어 부모들의 지갑이 두둑해 지는 나라! 그래서 맘 편하게 살 수 있는 나라!


  이런 세상을 꿈꾸어 본다.



5. 교육은 시스템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새치기’란 단어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오죽하면 공중전파를 타고 새치기를 하지 말자는 공익광고가 전국에 방영되었을까? 세월이 흘러 지금은 새치기라는 말이 추억속으로 사라져갔다. 그 시절의 광고방송을 다시 본다면 모두가 입에 빙그레 실웃음을 머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입시에는 이 ‘새치기’가 아직도 존재한다. 선행학습이 새치기이고, 과외, 학원수강이 새치기이다. 미리 배워 가지고 와서 정상적으로 공부하는 아이들의 앞줄에 가서 서는 격이다. 이것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런데 왜 학원으로 학생들을 내모는가? 그러면서도 불안해하는가?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안정된 시스템에서는 새치기가 영원한 이탈을 뜻하기 때문에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다.


  은행의 번호표를 뽑는 것은 단선형 시스템이다. 은행에 가서 새치기를 꿈꾸는 사람은 없다. 자기의 차례를 인지하고 순응한다. 그 옛날 번호표 시스템이 없었을 때 은행에서 줄서기를 해본 사람은 안다. 자기 줄에 서서도 옆줄의 상황을 두리번거려야 했다. 혹시 유난히 짧은 옆줄로 자리를 바꾸었는데 그 줄이 대출을 상담하는 줄이어서 곤혹을 치러본 사람이면 지금의 은행 줄서기 시스템에서 무한히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선진국의 화장실 줄서기는 복선형 시스템이다. 우리나라의 화장실에 가면 우스꽝스러운 풍경이 하나 있다. 어쩌자고 사람들이 냄새나는 화장실 안에 모두 들어가 소변기 마다 줄을 서서 앞사람의 실례하는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있는지? 혼잡스럽고 즐겁지 않은 풍경임에 확실하다. 이런 화장실 시스템을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화장실밖에 사람들이 한 줄로 서있고 한 사람이 나올 때마다 다른 한사람이 들어간다. 소변기 앞에는 늘 한 사람 만이 서있다. 번거롭지 않으나 빠르고 개인의 프라이버시까지 존중되는 시스템이다.

  

  공항의 평면 에스컬레이터는 다선형 시스템이다. 통로가운데로 커다란 평면 에스컬레이터 하나만을 놓았는데 이것이 훌륭한 시스템이 되는 것이다. 걷고 싶은 사람은 에스컬레이터와 관계없이 걷고, 에스컬레이터로 편하게 가고 싶은 사람은 그위에 올라 서 있으면 된다. 그 나마 바쁜 사람들은 에스컬레이터의 위를 걷거나 뛴다. 충돌이나 새치기가 일어나지 않고 승객을 태운 수백 편의 비행기가 하루동안 뜨고 내린다.


  우리나라의 교육이 혼란스러운 것은 시스템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교육으로 행복해지기를 진정으로 꿈꾼다면 ‘신뢰’라는 장치를 한 시스템의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     



6. 차라리 바람에게


  시스템은 환경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시인 서정주는 자신을 키워준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고 고백했다. 시인의 시스템은 자연이었다. 무간섭이었고 악조건이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그가 살아온 삶의 모습을 뒤로하고서라도 이 시는 혀가 내둘러지는 천재적인 발상이며 진실한 고백이다.


  히말라야 산 밑에 가면 ‘부탄’이라고 하는 조그만 나라가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조그마한 벌레마저 죽이는 것을 꺼려하는 품성을 지녔다 한다. 범죄라는 것은 개념조차 없는 나라이다. 그런데 이곳에 언제부터인지 서방에 있는 온갖 범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이유였을까? 그것은 텔레비전의 보급이었다. 테레비전에 상영되는 온갖 종류의 상황들이 히말라야산의 하얀 눈처럼 깨끗한 ‘부탄’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교육환경은 학생들이 학습부담을 무겁게 느끼고 사교육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주대학교에서 2004년에 실시한 고3 학생의 학습 성향 설문에서 40.4%의 학생들이 핵심과목이나 과목 전체적으로 사교육이 더욱 필요해졌다고 응답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입시다.

  앞에서 언급한 시스템의 불안이다.       


  교육과정과 입시제도는 늘 바뀌는데 시스템의 핵심인 평가는 변하지 않으니까 옛날의 모든 상황에 새로운 교육과정까지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평가 방법은 그대로 두고 입시제도만 갈수록 복잡해지는 반면 학교는 대입 지도에 있어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보니 사교육에 대한 의존도가 계속 높아지는 것이다.


  학교가 입시 지도를 못한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것이 공교육 체제하의 입시인가? 학교가 못하면 어쩌란 것인가? 지금 당장 학원으로 아이들을 밀어내고 있는 입시 제도의 개선이 아닌 평가 방법의 개선책이 필요하다.


  진정으로 자신이 없으면 시인처럼 부는 바람에게 아이들을 키워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7. 새로운 관계의 회복


  진정한 관계(Relationship)는 어떻게 회복하는가? 한사람과 한사람이 진실하게 관계하는 행복한 학교 만들기를 시도해야 한다. 행복한 학교 만들기를 위한 4단계의 관계 회복 방법을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요구(ask)의 과정이다.

  요구는 1차원적인 관계 개선법이다. 젊은 부부가 아이를 임신하고 장차 태어날 2세를 위해 정석 수학과 종합 영어 공부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뱃속의 아이를 위해 수학 문제를 풀고 영어 단어를 외우는 부부는 이미 태어날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이 부부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살아가는 동안에 욕심 많은 엄마, 아빠와 수많은 요구 관계에 놓이게 될 것이다. 요구가 나쁜 것이 아니다. 서로의 관계 속에서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관계는 아무런 의미를 같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나 부모가 서로 누군가에게 무엇을 요구한다면 그들 사이에는 관계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그러진 요구는 상대에게 부담과 상처를 주지만 정당하고 적절한 요구는 서로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관계 요소이다.


  둘째, 대화(dialog)의 과정이다.

  대화는 2차원적인 관계 개선법이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대화가 되고 있다면 희망적이다. 조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황이 막히는 것을 대화가 안 된다고 한다. 대화가 되지 않을 때 그들간의 관계는 단절이다. 어려운 문제는 대화로 풀어야 한다.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만들어지는 법이다.


  셋째, 이해(understanding)의 과정이다.

  이해는 3차원적인 관계 개선법이다. 제대로 된 이해는 해석 능력과 분별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대화를 통한 정보의 공유와 인간애를 필요충분조건으로 한다. 이들에게는 문제가 발생할 수가 없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지며 대부분의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학교에서도 교사와 학생, 행정가와 교사, 기관과 기관 간에 더 성숙한 관계를 위해 서로를 이해(understanding)하는 가르침과 교육 행정이 펼쳐져야 할 것이다.


  ‘널 이해한다.’는 말을 그리 쉽게 써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넷째, 동행(going together)의 과정이다.

  동행은 4차원적인 관계 개선법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진정으로 단 한 명의 동행자만 있어도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행복 추구’에 있다. 말을 바꾸면 행복하기 위해서는 동행(going together)하는 사람을 만드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동행은 관계의 완성이다. 이들은 아낌없이 주고받는 사이일뿐더러 매력적인 인성과 리더쉽을 최대한 발휘하여 향기로운 삶을 살며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 학교 현장에 다음 같은 질문을 해본다.

․교사와 학생이 서로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는가?

․교사와 학생, 학부모와 자녀 사이에 따뜻한 대화가 있는가?

․학교와 가정, 교육 당국과 학교 기관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가?

․그들은 진정으로 동행하는 동반(Company)의 관계인가?



8. 교실 수업에 최선을 다하기


  정부에서 여러 가지 공교육 정상화 방안을 내놓고 있다. 그중 핵심적인 내용이 EBS교육 방송과 인터넷을 통한 사교육비 절감 방안이다. 이 방법은 단지 사교육비 절감 방안이란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공교육 정상화라는 논리에는 문제가 있다.


  사교육에 빼앗긴 아이들 공교육으로 다시 데려오기가 맞다. 그것도 일시적이다. 사교육의 유명 강사들이 그들의 방법으로 하는 강의를 빌려오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학교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교실에서 EBS교육 방송과 인터넷으로 학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공교육이 정상화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문제가 있다.


  교실의 수업에서 행복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교육청에서 매번 실시하는 장학 지도도 수업에서 방법을 찾고 수업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 수많은 계획들과 양적인 실적물들이 수업을 방해하고 일선학교의 교사들의 불만으로 작용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학과 평가, 보고서들이 양적이기보다는 질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야됨도 인지해야 한다.


  보고서와 사례집의 질을 높이고 교사, 학부모, 학생들이 편하게 느낌을 받으며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 보급해야한다. 지금의 책자들은 누구더러 읽으라는 건지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많다. 너무 어렵고 지극히 주관적이며 실적 중심이다. 거기에 산만하기까지 하다. 아마 전국적으로 발간되는 자료집의 발간 경비는 천문학적인 수치라고 본다.


  학교의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는지를 살피고 그 요인을 찾아 원인을 해소하고 지원해주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 교육당국의 임무이다.


  이런 말이 있다. 30%는 알고 있어서 자고 30%는 몰라서 자고 40%는 선생님이 어떻게 하는지 보느라고 눈을 뜨고 있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중․고등학교의 교실 모습을 풍자해서 한 말이다. 또, 어떤 학부모는 그럴 바에는 학원을 낮에 하고 학교를 밤에 하면 어떻겠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물론 비약된 말이다. 이 말에 강하게 반발하는 교사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말이 왜 회자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9. 좋은 수업은 선생님의 몫


  좋다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는 좋고 누구는 안 좋다면 그것은 진정 좋은 것인가? 좋은 것은 누가 보아도 좋아야 한다. 누가 봐도 좋은 수업은 어떤 수업인가? 이런 수업이 좋은 수업이라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수업은 재미(樂)가 있어야 한다. 어른들에게 재미없는 영화를 한시간 동안 보라고 하면 투덜대고 졸고 욕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물며 아이들에게 재미없는 수업이 한 시간 진행되고 있다면 그 아이들의 심정을 해아려볼 필요가 있다.


  마술 쇼 같은 수업! 하지만 그것들은 지극히 교육적이어야 하며 교육원리를 존중해야한다. 따라서, ‘개그 콘서트의 봉숭아학당’은 그리 좋은 수업이 되지 못한다.


  좋은 수업은 움직임(動)이 있어야 한다. 교육과정이 활동 중심이라서 가 아니다. 교훈적이라면 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제격이다. 목사님도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설교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움직이고 싶어한다. 이것을 역동성, 다이나믹, 생명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늘 흐름 속에 머무는 아이들을 “STOP"이란 정서 쪽으로 이끈다면 얼마나 이율배반인가?


  좋은 수업은 생각(思)이 깃들여 있어야 한다. 수업이 깃들여 있어야 한다. 수업이 끝나면 잔잔한 감동이 교실에 머물러야 한다. ‘수업이 왜 안 끝나지?’ , ‘선생님, 이제 그만 해요?’ 등의 생각이 아니다. ‘맞아,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해!’ , ‘그렇구나! 그렇게 푸는 거구나!’ ,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와 같은 생각이다.


 따라서, 행복한 학교 만들기의 결정적인 키워드를 교사들이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10. 신명나는 교육을 생각하며


  문명은 어둠에 대한 밝음이다. 밝음을 지속시키기 위한 인간의 공동체를 문명이라 부른다. 문명을 지속하게 하는 것은 문화이다. 화(化)란 변화요 새로운 생명력의 끊임없는 유입이다. 이것은 결국 새로운 복합체를 형성한다. 이를 전승하는 곳이 가정이고 사회이고 학교이다.

  새로운 생명력은 풍류라 말할 수 있다. 바람이고 움직임이다. 풍류는 신바람이고 흥이고 멋이다. 노래이고 춤이며 신명이다. 예부터 우리 민족에게 도도히 흐르던 문명 전승의 매개였다. 풍류와 대응되는 개념이 도덕이고 규범이며 절제라면 건강함은 이것들의 적절한 조화에서 나온다. 건강은 중용을 전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어는 것이든 과(過)한건 건강하지 않음이다.


  이야기를 교육과 연계시킬 수 있다. 행복하고 신명나는 학교는 우리의 꿈이다.


  우리 민족의 근대 학교 교육은 너무 점잖게 시작되었다. 앉아서 천자문을 암기하고회초리를 두려야해야 했다. 많은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학교도 그리 신나지 않다.


  회초리는 사라졌지만 잘못된 기 살리기와 시스템이 잘못된 입시가 학교를 누르고 있다. 얼마 전 TV에서 네모난 수박을 방영하고 있었다. 그 수박은 스트레스의 덩어리다. 곤(困), 피곤하다는 글자이다. 나무를 가두어 놓았으니 얼마나 답답하랴! 크는 아이들을 가두고 있는 담장같은 누름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학교의 곤(困)한 날들은 계속될 것이다.


  이제 우리 교육은 풍류를 회복해야한다. 신바람, 흥, 멋, 움직임, 노래, 춤들이 살아나야 한다. 거리의 건전한 끼가 학교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거리도 좀더 유용하고 건전한 문화를 만들어 내야한다.


  유명한 건축가 자이메 레르네르(Jaime Lerner)는 고백하지 않았던가? 거리는 나의 환상과 현실의 학교(my school of fantasy and reality)였다고! 거리로부터 배운 그는 다시 거리를 변화시켰다. 그는 고향 꾸리찌바시의 시장을 세 번이나 했고 주지사를 두 번이나 했다.


  그는 브라질에서 가장 존경받는 행정가로 고향을 세계에서 가장 지속적인 생태 도시로 변화시켰다. 결국 생활과 교육은 가능한 일치되어야 생명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교육과정에 다소 풍류적인 요소를 가미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일곱 번에 걸친 교육과정의 개편에서 점차적인 풍류의 회복을 시도한다. 멋을 부리고 흥에 겨워해도 되는 제도적 장치도 만들어 보려 시도하고 있다. 이점이 부담스러움으로 다가오기까지 할 정도이다.


  하지만 아직도 도덕적이고 규범적이고 절제를 강요하는 면이 너무 강하다. 어느 것이든 지나친 것은 건강함을 잃게 한다고 했다. 우리의 학교는 더 풍류 적이어도 좋다. 아니 마음껏 풍류 적이어야 우리 교육의 건강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만의 심오한 사색과 지혜, 단순(Simple)과 깊은

뜻(意味) 등이 학교 안에 녹아 있어야 한다.


  교육으로 행복해지는 세상은

  우리의 참 소망이다.


  살아가는 힘을 길러주는 학교가 되어야하며

  살아가는 힘을 통하여 그들에게 삶의 토대를 만들어주는 것이 교육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캠릿브지 대학의 연결구과에 따르면, 한 단어 안에서 글자가 어떤 순서로 배되열어
있는가 하것는은 중하요지 않고, 첫째번와 마지막 글자가 올바른 위치에 있것는이
중하요다고 한다. 나머지 글들자은 완전히 엉진망창의 순서로 되어 있지을라도
당신은 아무 문없제이 이것을 읽을 수 있다. 왜하냐면 인간의 두뇌는 모든 글자를
하나 하나 읽것는이 아니라 단어 하나를 전체로 인하식기 때이문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7-01-30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07-01-30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어메이징 허~가 절묘하죠. ㅋㅋ 인간의 맘이란 게 그렇단 말이죠. 제가 보려고 하는 거나 보고, 보기 싫은 건 절대 안 보는... 그런 걸 잘 이용하는 게 권력이란 말이지요. 음...

깍두기 2007-01-30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글샘님이 쓰신 글을 아무 문제 없이 읽고 있는 나......
다 읽고 영어 예문을 읽어보고, 다시 읽고 나서야 글자배열이 틀렸단 걸 알았으니.

글샘 2007-01-30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 예문도 술술 읽히죠? 신기해요...^^
 

망해가는 회사 8개를 인수해 살려낸 경험이 있다.
처음 그 회사를 보았을 때 공통점은 사원들이 편하다는 것이었다.
사람이나 회사나 너무 편하면 곧 망한다.

- 이종화 레이크우드CC 사장

이건 아주 쉬운 진리다.
그런데, 실천이 정말 어렵다.
혁신, 혁신 하는데, 혁신하기 아주 쉬운 방법,
편한 사람들을 잘라내는 것이다.
아마도, 윗사람들 많이 잘릴 것이다.
내 눈엔 편하게 지내는 사람들 참 많이 보이는데... 왜 혁신하는 사람들 눈엔 안 보이나 모르겠다.ㅠㅠ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RINY 2007-01-30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의무적으로 하라는 혁신연수 원격으로 듣고 있는데, 리더가 변해야한다는 말이 참 수시로 나오더라구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