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

2. 인맥이 있어야 뭘 하지

3. 이 나이에 뭘 하지

4. 왜 나에겐 걱정거리만 생기지

5. 이런 것도 못하다니, 난 실패자야

6. 사실 난 용기가 없어

7. 사람들은 날 화나게 해

8. 오랜 습관이라 버리기 어려워

9.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10. 맨 정신으론 살 수 없는 세상이야

11.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

12. 난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어

13. 상황이 협조를 안 해줘


- 스티브 챈들러의 "성공을 가로막는 13가지 거짓말" -

 

이 나쁜 넘들이 내 성공을 가로막고 있었구나. 정말, 이거 딱! 나다. 난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어. 근데 상황이 전혀 협조를 안 해요, 협조를... 도저히 맨정신으론 살 수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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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잊었는가. 모두 잊어버렸는가.... 하던 26년 전의 5월을 우리들은 잊지 않았다.

내가 대학 강의실에서 읽었던 얼룩얼룩한 인쇄물들과 여러 번의 복사를 통해서 흐릿해진 사진들 속의 피눈물들을...

강풀은 무등의 5월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5월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하고 있고, 권력자의 주변에서 아무 생각없이 <열심히> 살고 있는 생활인들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적 특성인 <망각>이라는 조각상을 망치 한 방으로 통쾌하게 깨버리고,
<용서>에는 반드시 <반성>이 선행되어야 함을 가르쳤다.

해결책은 그것뿐이 없음을 이 만화를 통하여 강풀은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광주와 삼청 교육대의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망월동을 바라보며 날마다 눈물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이 만화는 고마운 약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치유할 수 있는 치료제는 없다 하더라도, 위로가 되는 진통제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리고 26년을 망각하고 하루하루의 생활에 얽매인 한국인들에게,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을 욕하기 전에, 한국에서 과연 <죄송합니다. 다 제 책임입니다.>하고 반성한 놈 있었는지 강풀은 외치고 있는 것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한겨레 신문을 욕하고, 노조와 노동자들을 욕하고,
스크린쿼터 반대하는 영화인들을 욕하고,
FTA 반대하는 데모꾼들을 욕한다.
전교조를 욕하고, 자기 자식을 욕하고, 자기 친구를 욕하고, 바로 자신를 욕한다.

우리에게 서로 욕하고 서로를 헐뜯으며 이전투구를 벌이도록 꼭두각시 놀음줄을 흔들고 있는 이의 이름은 바로 <자본>이다.

한국 정치라고 하면, 대통령과 여당에게 모든 잘못이 있다고 여길 정도로 이 땅에선 대통령과 여당의 힘과 권력, 그 부패가 심했던 것이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적은 <여당>도 <야당>도 <미국>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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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그림읽기 7] 콜리어와 헌트, 두 화가의 그림 비교
텍스트만보기   고지혜(sophiako) 기자   
그림이나 사진에 작가가 담아두고자 하는 주제의 대부분은 아름다운 자연이나 인간의 삶과 내면을 표현하게 됩니다. 또 더러는 전설이나 신화를 바탕으로 작가 특유의 상상의 세계를 그려내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그림이나 사진을 감상하는 즐거움은 그 영상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느낌과 이야기를 시간와 공간의 제한없이 듣고, 보고 공감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욕심 많고 힘 있는 자들이 대접받는 어수선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오히려 맑고 아름다운 그림이나 순수한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더 그러워지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 영혼의 소리에 귀기울여 양심을 지켜 행동했으며, 지금도 전설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속의 한 여인을 만나보고 외모보다 더 아름다운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아래 두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그 당시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11세기 영국(England)를 무대로 한 유럽 귀족들의 사랑과 전쟁을 그린 역사소설이 그 배경이며, 이 그림 속의 인물이 고다이버(godiva)입니다. 당시 영국 코벤트리(Coventry) 지방에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던 한 영주 리어프릭(Leofric)의 열 일곱 살 난 어린 부인으로, 남편의 폭정에 마음 아파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마을 사람들을 대신하여 세금을 내려달라고 간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남편은 벗은 몸으로 마을을 한바퀴 돌면 그러겠노라 조롱하였고, 그런 남편의 말에 고다이버는 새벽을 이용하여 마을을 돌기로 결정하기에 이릅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듣게 된 마을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그녀의 모습을 내다보지 않기로 굳게 약속을 하였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아래 두 그림은 1000년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 전설 속의 여인을 900년 뒤이며,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도 훨씬 전에 두 화가가 각각 그린 작품입니다. 각 그림의 작가에 대한 약력을 먼저 간략하게만 살펴보고, 두 그림을 비교, 감상하면서 그 이야기를 풀어봅니다.

▲ 고다이버 부인 (lady godiva), 1898
ⓒ Collier
콜리어(Hon John Collier, 1850~1943)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신고전주의 화가로 그에 대해 알려진 게 많지 않습니다. 1850년에 콜리에는 후에 몽스웰(Monkswell)의 군주가 되었으며 당시에는 유명한 재판관이었던 아버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화가가 되고자 하는 그의 열망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나이가 어려 학생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당시 유명했던 화가 타데마(Alma-Tadema, 네덜란드, 신고전주의, 1836~1912)에게 소개시켜주기도 하였습니다.

▲ 콜리어(Hon John Collier)의 초상
ⓒ Don Kurtz
슬레이드(Slade) 학교를 거쳐 파리와 독일 뮌헨(Munich)에서 공부하였고, 전쟁 중에는 외국인 사무실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몇몇 학교에서는 그를 화가로 주목하지 않았으나, 그는 실제로 유화 입문서(A Manual of Oil Painting)의 저자였으며, 예술가로서의 최고의 표본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구성적인 느낌과 선의 표현에 있어서는 높이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이른 아침으로 보이는 미명에 마을의 중심가를 향해 말 한 필이 걸어갑니다. 그것도 자태 고운 한 여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알몸으로, 긴 생머리와 고개를 늘어트린 채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 다소 외설스럽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림의 상황으로 볼 때, 시끌벅적해야 할 마을의 광장은 이상할 만큼 고요하고 정적에 쌓여 있습니다.

사람 하나 볼 수 없으며, 심지어 건물의 문이나 창문조차 굳게 닫힌 채,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여 있습니다. 누구 하나 창 밖을 내다보는 사람이 없음은 물론이고,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의 마을 같아 보입니다. 햇빛도 수줍은 듯, 그녀의 몸을 비껴 부드럽게 흩어집니다.

다시 그 당시의 배경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1세기의 영국은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으로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6세기 이후 유럽대륙에서 건너온 앵글로색슨(Anglo Saxon)의 나라였고, 8세기와 10세기에는 북유럽바이킹 족인 데인인들의 침략을 받았으며, 11세기 초반은 이 데인족의 왕인 크누트 1세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데인인들의 영국 통치로 농민계층의 몰락을 야기시켰습니다. 이전에는 영주의 땅을 빌려 소작만 하던 농민들의 자유 신분이, 데인인들의 가혹한 세금징수에 의해 노예상태인 농노의 신분으로 하락했고, 급등하는 세금의 무게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으며, 영주에게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하고 속박되었습니다.

런던과 비교적 가까운 코벤트리도 마찬가지여서, 이 지방의 영주 레오프릭도 농민으로부터 징수하는 세금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신실한 종교인이었며, 신 앞에 겸허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살던 고다이버는 본 토착민인 앵글로색슨이며, 남편은 통치하던 데인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다이버는 나날이 몰락해가는 농민들의 입장에서 가슴 아파 하였고, 남편의 과중한 세금을 줄여 영주와 농민이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고다이버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 보내던 남편 리어프릭은 그녀의 간청이 그칠 줄 모르자, 도저히 불가능해보이는 제안을 그녀에게 하는데, 그녀의 농민에 대한 사랑이 진실이라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돈다면, 세금감면을 고려해보겠노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림으로 보아 그녀는 깊은 고민을 하였을 것이며, 많이 망설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코벤트리 마을의 농민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으며, 거사가 이루어질 날짜와 시간도 알려졌습니다. 이에 마을 농민들은 영주 부인의 마음과 결단에 감동을 받게 됩니다.

또한 그녀의 숭고한 의지를 존중하여, 다함께 큰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녀가 마을을 도는 동안, 누구 단 한 사람도 내다보지 않기로 약속을 한 것입니다. 마침내 고다이버 부인이 벌거벗은 채 마을로 내려온 날 아침, 코벤트리 전체는 무거운 정적이 흐렀으며 이 은혜로운 알몸행진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호기심을 참지 못했던 코벤트리의 양복재단사 톰이 마을사람들과의 약속을 잊어버렸고, 그만 커튼을 슬쩍 들추어 부인의 벗은 알몸을 보려는 순간, 그만 눈이 멀어버리고 말았습다. 아름답고 숭고한 고다이버의 뜻을 성적인 호기심으로 더럽힌 데 대한 신의 징벌이었다는 전설입니다. 또한 훔쳐보기의 대명사(관음증)로 피핑 톰(Peeping Tom)이라는 말로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학자와 역사가,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논쟁거리가 되었으며, 이 사건과 관련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관행이나 상식, 힘의 역학에 불응하며, 대담한 역의 논리로 뚫고 나아가는 정치'를 고다이버 부인의 대담한 행동에 빗대어, ‘고다이버이즘(godivaism)’ 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녀의 숭고한 정신과 지성을 기리고, 이런 정신을 존중하는 정치를 그리워함 일 것입니다.

▲ 고다이버(Godiva), 1856
ⓒ Hunt
헌트(William Holman Hunt, 영국 런던, 1827-1910)는 전라파엘파(협회)의 설립자이며, 런던에서 한 도매상점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일생을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헌신하는 삶을 살았으며, 진지한 성격으로 유머 감각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1844년 왕립예술학교에 입학하여 밀라이스와 로세티를 만났고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1854년에는 그가 그리고자 하는 종교 그림의 실제 배경을 관찰하기 위해 성지를 방문하기로 결심합니다.

▲ 헌트(Hunt)의 자화상
ⓒ Hunt
그의 첫 번째 결과가 속죄양(The Scapegoat)과 세계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며, 화가로서의 인정과 재정적인 안정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는 영국 남부의 서리(Surrey) 주에 있는 시원한 숲에서 타고난 재능은 없었지만, 순전한 노력과 헌신으로 밤에 작업하였습니다. 성공한 화가로 인정도 받았으며, 말년에는 빅토리아 로마 여황의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를 끄는 화려함과 매력적인 개성이 있습니다.

이제 소박해보이는 연필소묘의 위 그림을 보는 느낌이 어떤지 묻고 싶습니다. 첫째 그림에서 그 사연을 들었기에 자태가 고운 부인으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림만 놓고 보아서는 그냥 평범해 보이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하지도, 결심하지도 않았을 것 같은 여인 정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마을 농민들의 세금 인하를 위해 말을 타고 알몸 시위를 했던 전설을 듣고 보는 그녀의 모습은 결코 평범해보이지 않습니다. 이야기로만 듣던 그녀를 이 그림에서 만나는 처음 느낌은, 전설과는 다르게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 화려하고 무척 아름다우리라고만 상상했던, 그녀에 대한 기대를 무참히 뭉개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그녀의 모습과 그림의 배경을 살펴보면, 그런 실망이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며, 그렇게 생각했던 자신에게 또 한 번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녀는 앞 모습이 아닌 조금은 도도해 보이는 옆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연필로만 그린 흑백 그림이기에 그다지 화려해 보이지 않는 옷차림이지만, 흐트러지지 않은 자태와 곱게 빗어 뒤로 올린 우아한 머리와 당당한 손 매무새, 단정하게 여민 앞섶, 그리고 곱고 길게 느러진 옷자락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예사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배경으로 보이는 소품들 하나하나도 그녀의 자태를 돋보이게 합니다. 뒷 배경의 가운데를 채우고 있는 아치형의 문과 왼쪽 위에 걸려 있는 십자가 위의 인간 예수의 모습, 왼쪽으로 앞에서 중간 쯤의 학의 모습, 그 밑에 카멜레온 모양의 벽장식이 그녀의 삶과 영혼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오른쪽 뒷 배경에 보이는 보리 이삭 같기도 하고, 이름모를 들풀의 꽃 같기도 한 벽면 장식까지 그녀의 결단과 행동으로 인한 농민들의 결실과 풍요로워진 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지나칠 수 없는 점은 그토록 아름다운 마음과 지성(至誠)을 지닌 고다이버 부인의 초상화를 색깔도 넣지 않고, 소박한 연필 소묘로 그렸다는 것이며, 작가의 이런 의도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헌트는 그의 약력에서도 살펴보았던 것처럼, 실제보다도 더 화려하고 매력적인 그림을 많이 그려 당대에서도 인정을 받았던 화가입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아름다운 그녀를 화려한 색채를 버리고 굳이 단아한 연필소묘로 그린 의도는 그녀의 숭고한 영혼에 예의를 갖추고자 했던 배려였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눈으로 보이는 겉모습이 아닌 그녀의 마음과 인성을 담아내려는 화가의 의도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기에 그 어떤 채색그림보다도 더욱 놀랍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림에 대한 사연과 뒷 이야기를 듣고 나서 다시 보는 윗 그림의 앳된 고다이버는 숭고하고 성스러워 보이며, 전혀 외설스럽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제로도 아름다울 것 같은 그녀의 앞 모습도 보고 싶어집니다. 쉽지 않았을 결정을 내리기 위해 깊은 고민과, 그 실천을 위한 깊은 사색에 잠겼었을 그녀의 영혼이 그리워집니다.

당당한 자태와 담대한 용기, 그 마음에 품은 지성(至誠)이 더욱 고결해 보이며, 그림을 다시 보게 만듭니다. 그 뜻 깊은 행동을 다시 돌아보고 기억하게 합니다. 고다이버 부인의 파격적인 알몸 시위는 힘없는 농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아름다운 결심이었으며, 이웃을 돌아보는 고귀한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기 내면의 소리에 진솔하고 성실했으며, 현실을 성찰할 줄 알았던 자비로운 지성을 이 시대가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화가의 약력은 "영국 빅토리아왕 시대의 예술(Victorian Art in Britain)" 이란 책에서 발췌, 번역한 것이며, 그림과 설명은 Art Renewal Center(http://www.artrenewal.org)와 이스리(http://blog.naver.com/viriditas), 라르고(http://blog.naver.com/ks070)에서 도움을 받았고 참고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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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9-28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오늘은... 고다이버로 여는 아침이군요 ^^

글샘 2006-09-28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음'에서 쬐끄맣게 실린 저 그림을 클릭했다가 이런 이야기를 퍼오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피핑 톰인 듯...ㅠㅠ
 
 전출처 : 파란여우 > [퍼온글] 문정현 신부님 인터뷰

 

문정현 신부를 인터뷰하기 위해 대추리를 찾았다. 거리상으로 그다지 먼곳은 아닐 수도 있는데, 심리적 거리감은 상당히 컸었고, 부채감 역시 크게 가지고 있었다. 그런 마음은 마을을 들어가는 입구에서 검문을 받으면서 더욱 커지기도 했다. 혹시 못들어가지 않을까 마음을 조였는데, 다행히 가져간 ‘인물과 사상’을 보여주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지난 5월 4일의 행정 대집행때 대책위는 ‘제2의 광주사태’라는 표현을 썼다. 그 표현에 대해 보수 언론은 물론 광주의 일부 민주화 운동 단체들도 반발을 했었다. 정부와 언론에서 해대는 프로파간다의 파상 공세를 생각하면, 일정한 표현의 과잉도 옹호되어야 하며, 그들의 심정이나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닐 것이다.

군인, 경찰, 용역을 포함해서 16,000명이나 그곳에 들어갔다. 헬리콥터까지 동원해서 일사천리의 작전을 진행했다. 그곳 주민과 지킴이들은 천여명 밖에 안됐다는데 말이다. 그 곳 주민들의 절망감과 공포감은 어땠을까? 그런데도 언론은 죽창들고 가만히 있는 군경을 공격하는 폭도로 묘사했다. 누가 더 다쳤을까?

이른바 ‘여명의 황새울’ 작전은 윤광웅 국방장관이 “역사적 국책사업을 집행하는데, 더 이상의 기다림은 없을 것”이라고 경고한지 스무시간도 안되서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지 20시간이 안된 다음날 새벽에 전격 사형을 집행해버린 그 장면이 그대로 오버랩되었다.

우리는 군사정권 시절 김근태 의장이 고문을 당하면서 했던 회고를 들으면서 치를 떨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처절한 고문을 당하는 옆에서 고문을 하던 사람들은 태연히 집에 전화를 걸어 ‘우리 아이 오늘 소풍 갔다던데, 잘 다녀 왔어?’라는 일상적인 대화를 하더라는... 고문 당하는 그 사람에게도 소풍갈 국민학생 아이가 있다는 생각을 했으면 그렇게 행동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5월 4일 행정대집행 다음날은 어린이날이었다. 대추리에 있는 아이들도 최소한(!) 그 날만큼은 선물도 받고, 뛰어놀 권리가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 소박한 꿈마저 뭉개버린 그들도 집에 가서는 ‘우리 아들, 우리 딸 무슨 선물 받았어? 우리 손주 선물 많이 받았어?’라는 얘길 했을 것이다.

문정현 신부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일원으로 70년대 반독재투쟁, 80년대 노동운동, 농민운동, 90년대 통일운동을 거쳐 90년대 후반부터 소파개정 등 미군과의 불평등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활동해온 ‘투쟁하는 사제’이며, ‘길위의 신부’였다. '평택미군기지확장 저지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 상임대표로 1년 반을 넘게 대추리에 거주하며 함께 싸워온 최고령의 '황새울 지킴이'이기도 하다.

인터뷰는 대추리 마을 역사관인 ‘대추리 마을 사람’들 2층에서 9월 7일 오후 3시부터 약 1시간 반 가량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문정현 신부는 ‘사회의 처진 곳, 그들과 계속 머무는 곳에서 이 신분으로서 살다가고 싶다. 밑바닥에서 남아 살다가 죽을 마음 뿐입니다’라는 말을 전했다.


지승호(이하 지) - 얼마전에 단식 하셨는데, 건강은 어떠세요?

문정현(이하 문) - 지병(협심증)은 그대로 있고, 왼쪽 무릎이 시원치 않으니까 오른쪽 골반까지도 영향을 미쳐서 허리가 아파요. 이게 골반에서 오는거라고 진단이 그렇게 나왔고, 자꾸 어지러워요. 나이답지 않게 늙어버린 느낌이 들 정도로 자꾸 어지럽고, 헛디디고, 회복이 잘 안돼요.


지 - 75년 인혁당 사건에 항의하시다가 다리를 다치셨지 않습니까?

문 - 그렇죠. 그게 이제 시작이죠. 세번 수술을 했는데, 다음 단계는 인조 관절을 끼워야 된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인조 관절을 끼어본 사람 중에서 좋다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대체로 힘들다고 그래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지 - 지난 5월 4일 행정대집행때 군병력을 투입한 것에 대해서 '제2의 광주항쟁'이라고 표현한 부분에 대해서 광주의 일부 민주화 운동 단체와 일부 언론들은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기도 했는데요. 어떻게 사람이 많이 죽은 광주와 같이 비교할 수 있냐는 거였는데요.

문 - 그날 군․경․용역 들어오기 전까지 여러 가지 얘기가 나오니까 ‘양치기 소년이다, 언제 들어온다’ 하면서 혼란스러웠죠. 긴장의 연속이었구요. 풀릴려다가도 또 온다는 얘기가 나오면 긴장했습니다. 그날 대단하데, 이 일대가 새카맸으니까요. 저게 부대거든요. 부대 후문, 저쪽 쪽문에서 계속 밀고 들어오고, 원정리쪽에서 들어오고, 군인들이 안성천에 부교를 놓아가지고, 그걸 통해 장비도 들어오고, 결정적인 것은 헬리콥터, 아주 저공비행으로 철조망을 달고, 자기네들이 배치한 장소 거기에다 떨어뜨려 놓는데, 이건 뭐 압도적이었죠. 여기에 1,000여명 있었는데, 삽시간에 운동장으로 몰리고, 운동장에서 교실 안으로 밀리고 했다가, 끌려나오는데 아비규환이었죠. 그때 나는 학교 지붕 위에 있었으니까 다 지켜볼 수 있었어요. 삽시간에 점령이 되고, 30~40년된 나무들이 많았는데, 그걸 뿌리채 뽑아버리고, 예술인들이 대추리 주민을 사진 한 장, 한 장을 찍어 페인팅했는데, 아이들도 있고 그런 것을 포크레인 삽으로 쓰러뜨리고, 처절했죠. 그렇게 가고 나서 그날 밤부터는 완전히 계엄령이었습니다. 토끼몰이식으로 집까지 뒤져서 주민이 아닌 사람은 모조리, 한 600여명 연행이 되었으니까요. 부상자가 200여명이 되고, 40여명을 구속영장 신청을 하고, 그렇게 공포의 밤을 세우고, 다음날인 5월 5일이 어린이날 아닙니까? 전국적으로 모인 1,500여명이 군이 쳐놓은 철조망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죠. 그런데 이라크에서 미군이 포로를 뒤로 묶고, 발과 손을 묶어 놓고 무릎으로 짓이기고 하는, 군인들이 곤봉 세례를 하고 이러는 광경을 보면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광주사태였죠. 광주사태 자체였습니다. 과연 그렇게까지 해야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거긴 폐허로 된채 그대로 있거든요. 주민들에게 공포감을 주려고 한거죠. 그래서 겁에 질려서 마을을 떠나게 하는 일종의 공갈과 협박입니다. 지금 11일, 12일, 13일 빈집 철거하러 들어온다고 국방부에서 대책위에 연락을 한 모양입니다. 이것도 철거할 이유가 없죠. 주민들이 쫓겨나든, 협의해서 나가든 다 나간 다음에 일괄적으로 건물을 없애도 되는 것인데, 어차피 주민이 남아 있으면 철거 작업은 어렵잖아요. 설령 남아 있는 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낸다손 치더라도 쫓아내고선 일괄적으로 집이라든가, 제거할 수 있는 것을 제거해야될텐데, 그 이전에 빈집이라는 명목으로 때려부순다고 하는 것은 5월 4일 행정대집행과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국책사업이라고 하는데, 이 자체가 국책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고, 국책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형태로 한다는 것은 잘못된 거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되는 헌법상의 책무는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토지를 국방부 명의로 바꿔버리는 이 절차, 그러니까 협의 매수다, 이의 신청이다, 감정평가다, 토지 수용이다, 하는 이 절차 중에서 땅을 빼앗기는 사람이 소명할 수 있는 기회가 바늘 구멍만큼도 없어요. 중앙토지수용위원회가 국방부에서 제출한 220여가지를 그냥 한꺼번에, 1시간여만에 통과시켜버렸는데요. 그게 근거가 되서 토지 수용위원회의 결정에 따라서 국방부는 법원에 공탁을 하고, 명의 변경을 해버리니까 땅을 빼앗기는 사람이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는거죠. 그게 군사독재정권의 잔재라고 보는건데, 그것이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 정부에까지 넘어온 것 같습니다. 주민들이 법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헌법소원, 행정소송 이런 건데, 이런 것은 백발백중 국책이라는 이름으로 무시되어버리고 하니까 주민으로서는 처절하게 될 수 밖에 없어요. 그리고 소위 지킴이라고 하는 사람들, 지금 뭐 연행되었던 사람들이 한 천여명이 될거고, 법 절차로 재판받고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병원에 실려가고, 완전히 폭력으로 견딜 수가 없죠. 그렇지만 정부가 주장하는 타당성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어디 사람이 물리적인 힘으로만 삽니까? 그게 타당하지 않기 때문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미군기지 확장 예정지로 선정된 이 자체를 주민들은 전혀 모른채 국방부의 통보로 알게 되고, 국방부에서는 설명회를 한다고 하고 정작 설명회에 참석해야될 주민들은 배제된채, 관변들, 자기네들이 다루기 쉬운 사람들을 앉혀 놓고 설명회를 한다고 하니까 여기 사람들은 ‘주민없는 설명회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해서 그것을 저지하다가 주민들이 연행되고, 주민들이 버스에 실려서 용인 같은데 하나씩 내버려지고, 그래서 촛불 집회가 시작된 것 아닙니까? 참 야비해요. 국민을 국민으로 보지 않아요.


지 - 천여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언론들에서 보도한 것만 봐도 군인, 경찰, 용역을 합쳐서 16,000명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하던데요. 물론 행동 자체도 문제지만, 참여 정부가 날짜를 택하는데 있어서도 참 무심하거나, 오만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여기도 어린이들이 있을텐데, 하필이면 어린이날 전날 병력을 투입한 것도 대단히 폭력적이라고 느껴졌는데요.

문 - 우리가 9월 24일을 제 4차 평화대행진으로 잡았거든요. 그 다음에 바로 추석이에요. 추석을 앞두고 철거를 하겠다는 것은 국민정서상 용납할 수 없잖아요. 안해도 되는건데, 기어코 그렇게 한다는 것은 주민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만드는거죠.


지 - 노무현 정부가 들어설때만 해도 상당히 기대감을 가졌지 않습니까? 그런 부분이 많이 무너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문 - 저는 사실 기대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열린우리당의 구성 자체가 오합지졸이고, 그동안 김영삼, 김대중 정권을 통해서 운동권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 특히 386세대들이 그야말로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가졌던 태도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행동했기 때문에 ‘저 사람들이 무엇을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진전은 진전이죠. 군사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지만 아직 훌륭한 지도자는 못만나고 있는 것이죠. 지금 미군기지확장 문제가 지금 알게 된 것은 전략적 유연성에 의하여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 차원인건데, 국방부는 국회에서조차도 이것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했거든요. 국회를 속인다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것 아닙니까? 이 기지를 확장한다는 것만 동의를 한거예요. 그 나머지 것은 청문회를 통해서 한다고 하는데, 지금 여당이고, 야당이고 청문회 자체를 주춤거리고 있잖아요. 안한다고는 못해요. 자기들이 그런 조건에서 통과했기 때문에 청문회를 해야 되는데, 청문회를 하게 되면 뻔해요. 첫째로 전략적 유연성의 정체, 그 다음에 그 비용에 관한 것,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무색해져 버리는거고, 이게 소위 신속기동군, 정밀 타격대라는 미국의 군사작전에 의해서 특히 이북은 한국 쪽에 맡겨버리고, 그 다음에 자기 작전대로 한반도를 벗어나는 전세계 어디든지 출동할 수 있는 기동군을 만든다는 속셈이 다 드러난거 아닌가요? 그렇게 거짓말을 한 것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거기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 것은 여당이고, 야당이고간에 미국에 종속된 것이 그대로 여실히 보여지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한둘 있어도 그냥 묻혀 버리고, 상임위조차도 열지 못하는 이런 관계인거죠. 비용 문제는 천문학적이니까, 이게 통과되고 나면 여기를 2.5m, 3m 복토를 한다는거 아닙니까? 이것도 몇천억이 들어가는거예요. 이전비용에 대해서도 우리가 다 대기로 한 것 아닙니까? 그 다음에 불거지는 것은 환경복구 문제 아닙니까? 그것도 우리가 더 떠안게 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땅 대주고, 돈 대주고, 주민들 땅 빼앗기고,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서 그냥 끌고 가는겁니다. 이걸 용납할 수 없다는거죠.


지 - 김지태 팽성대책위원장이 "황새울이 무너지면 한반도가 무너지고 만다. 황새울에 평택미군기지가 들어서는 것에 찬성한다면, 한반도가 남과 북 사이의 전쟁위기뿐만 아니라 전세계적 전쟁 위기에 휩쓸리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고 하신 적이 있는데요. 국민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언론에서 제대로 보도해주지 않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나라에서 정한 정책에 반대만 해서 어떻게 하냐?’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요.

문 - 이것이 지난한 과정이라고 보는데, 우리들의 무기는 정의와 진실입니다. 여기에 입각해야 돼요. 뭐든지 ‘이것이 정말 공평하고, 정말 참된 것이냐’,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싸우는데, 지금 안보논리, 거짓논리 아닙니까? 그리고 색깔론, 거짓 아닙니까? 그런데 거짓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완전히 해소되는데는 엄청나게 힘들다는 얘기예요. 그 일환으로 이 문제도 묶여 있는거죠. 큰 희생을 각오해서라도 정말 한미간의 공평한 관계를 만들어야 될겁니다.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 발표되도록 하는 노력을 하는데, 언론이 협력하는 것은 그만큼 더딜 것이고, 입에서 입으로, 예전에 유비통신이 정확한 거라고 했듯이 그렇게 전해져야 하는데, 이게 얼마나 힘든 얘기고 얼마나 처절한 얘기입니까? 예를 들면 예전에 ‘평양에 전철이 있다. 지금 서울에는 없는데...’라고 하는 것은 진실이거든, 그런데 그 진실을 말함으로써 막걸리 보안법에 의해 끌려가고, 그것이 고문찬양으로 국가보안법에 적용이 되어서 정말 개털이 되어 버리는 이러한 역경을 겪고, 겪으면서 앞으로 나가는거죠. 엊그저께 군 장성 출신들이 계급장을 달고 나왔는데, 그것은 힘의 과시거든요. 물리적인 힘의 논리인데, 이것을 뚫고 나가는데는 그야말로 희생을 강요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순교자적인 정신으로 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겁니다. 무슨 재주로 언로를 끌어 옵니까? 끌어온다고 끌어와지는 겁니까? 그러나 저는 경험이 있어요. 89년 임수경이 평양에 가서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을때 내 동생 문규현 신부가 동행을 해서 군사분계선을 넘었는데, 그때 ‘아, 통일 노력이라는게 이렇게 되는 것이구나’ 싶더라구요. 한겨레 신문과 다른 모든 매체들의 대결이 되서 매일 공방이 계속되는데, ‘이것이 통일 논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통일논의가 확산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걸 얘기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걸 광고로 따진다고 하면 얼마나 엄청난 겁니까? 신문 한 귀퉁이에 광고를 낼래도 돈이 없어서 못하는 판인데요. 저절로 그렇게 해서 오늘날 부끄럽지 않은 임수경, 문규현이 된 것 아닙니까? 그걸 통해서 통일에 대한 공포가 해빙이 되는 듯한, 그것을 시작으로해서 남북관계에 대한 인식이 엄청나게 달라지고, 달라진 것이 확산되고 해서 6.15 선언까지 왔는데, 그때까지의 역경을 한번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안보논리라든가, 미국에 대한 맹종 이 자체도 어느 계기에 엄청난 논의가 벌어질텐데, 그 밑에는 큰 희생이 있는 겁니다. 유혈이 낭자하는. 지금도 그러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이 진실인가, 무엇이 평등인가를 공유할 수 있는 그때까지는 싸워야 된다는 겁니다.


지 - 박정희 시대로 치면 권력이 무서워서 표현을 못했지만, ‘이게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것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정치권에 많이 들어가서 실망감을 많이 줬기 때문에 국민들은 민주화운동세력 전체에 대해 일정한 불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전보다 돌파하기 어려워진 부분이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문 - 저는 그렇지 않다고 보거든요. 역사의 후퇴는 없습니다. 역사는 발전합니다. 이 발전은 국민들의 목소리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미 관계도 97년경까지만 해도 압도적으로 미국을 건드릴 수 없는, 미국이 아니면 북에서 쳐들어온다는 생각을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평등한 SOFA 문제, 매향리 폭격장 문제, 맥팔렌드의 한강독극물 방류문제, 효순이․미선이 문제, 이런것들로 인하여 한미관계의 정체가 그대로 노출되어 버렸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미관계가 이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라고 온것이거든요. 그런데 역사는 후퇴는 하지 않고, 전진은 하되,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는 있는 겁니다. 왜 그러냐하면 지금 극우들 표출되는 것 보십시오. 저는 그게 그들의 위기의식이라고 보구요. 미국 자체도 이 상태를 그대로 놓고만 볼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전이라든가, 어떤 정보원들의 활동들이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아직도 미국은 힘이 있습니다. 그들의 조정, 그들의 영향력을 확실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인정한다고 보면, 그 분노하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 그러면 ‘거짓이 영원히 감춰질 수 있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거든요. 전략적 유연성이라든가, 미군기지 확장하는데 있어서의 재정적인 문제라든가 하는 것들이 노출이 된다면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정체가 드러나고, 그것을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오겠죠. 그래서 맹목적으로 안보논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본질이 변하는게 아니라 그냥 지하로 잠적해 들어가게 될겁니다. 상당히 잠적했다가 지금 나오는거 아닙니까? 그러한 과정을 겪는데, 결국은 정의와 진실이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 - 새만금이나 부안 핵폐기장 반대운동의 중심에도 서셨는데요. 부안 문제나 지율 스님의 천성산 터널 반대 단식 투쟁도 있었는데요. 결국 그것들을 관철시키지 못한 것 아닙니까?

문 -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군사독재정권에서부터 그야말로 인권 문제, 또 민주화문제, 통일문제, 그리고 자주, 이런 10년 거리의 내 활동이 있었는데요. 거기에서 오는 인권침해라든가 탄압 이런 것들이 꼭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더라구요. 또 여성들의 문제에 대해서만해도 상당히 여성들의 인식이 달라졌지 않습니까? 과거와는 다르죠. 삼강오륜에 의해서, 거기에 따라서 순종하는 것은 벗어난 것이죠.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관계, 이것도 인권문제로서 불평등의 문제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민주화 문제다, 통일 문제다, 자주 문제, 미군 문제 이런 것도 역시 불평등한 관계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것이 자연적으로 자연과 인간 사이도 똑같은 맥락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자연이라고 해서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인간도 자연의 한 일원으로서 공조할 수 밖에 없다, 상생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이라고 해서 자연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개발도 최소한의 개발이라야 하는거고, 그냥 마구 파헤치는 것은 정말로 유혹에 불타가지고 여자를 강간하는 것과 재물에 욕심이 있어서 자연을 포크레인으로 강간하듯 훑어버리는 이런 것들은 안해야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핵폐기장 문제도 역시 그런 것이고, 새만금 간척 사업도 정말로 긴 시간을 두고 볼때 재앙에 가까운 어두운 장래가 눈에 보이는 것이고, 역시 이렇게 불평등한 것을 놓고 본다면 그때 생기는 결과나 이 결과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 맥락과 뿌리도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분화가 되고, 넓어지면서 인간화랄까, 우주화랄까 이렇게 발전될 수 있는 거라고 봅니다. 그게 혼자 힘으로 가능하겠습니까만은 그걸 지향하고, 자기 자신을 투신하는, 오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걸 지향하면서 죽는 이런 자세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지 - 핵폐기장 같은 경우 우리한테 있어서 핵발전소를 통한 전력의 개발은 꼭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핵폐기장 역시 만들 수 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주민들 자체가 환영하는 경우도 있구요.

문 - 미군기지 확장도 그렇고, 새만금도 그렇고, 핵폐기장도 그렇고, 이런 국책이라고 이르는 모든 사업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국민을 무시하고, 공갈과 협박과 거짓과 회유 이런 걸로 성취하려고 하는데 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애초부터 까놓고서 ‘이게 필요하다’고 했을때, 핵폐기장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절대로 안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최대공약수를 내서 필요한 부분만 하면 되는 것인데, 지금 여기는 285만평이 공동화될 가능성이 아주 농후해요. 왜 그러냐하면 벌써 25,000명으로 감축되는 것은 확실한 것 아닙니까? 이것보다 더 감축되고, 1,000여명만 남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워싱턴 정가에서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 얘기는 순환배치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지상군으로서 그 많은 수가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허브가 되는거예요. 순환 병력을 맞이하고, 관리하기 위한 최소한의 인원만 필요하다는 거죠. 군사력도 해군력과 공군력을 주로 해서 신속하고 정밀하게 타격하고 빠지는 이런 전략으로 갈 겁니다. 그리고 상당히 미군의 위락시설이 많이 들어올겁니다. 호화 아파트에다가, 우리 군인과 미군이 사용하는 주택 면적을 한번 비교해보면 되는 겁니다. 미군들이 50평짜리에서 살고, 호화수영장에서 수중안마까지 한다고 하는데, 이렇게 보면 우리 국민을 너무 무시하는 것이거든요. 처음부터 제대로 논의해서 필요한 것만 결정하면 되는 것인데, 국민을 완전히 무시하고 주무관서인 국방부가 그림을 그린대로 해서 미국의 영향력 안에 있는 국회에서 그대로 통과시키고, 밀어붙이는 이러한 미군기지 확장사업, 이러한 새만금 사업, 이러한 핵폐기장 사업, 이런 형태로는 안된다는 겁니다. 핵폐기장, 새만금 찬성론자들은 지금 극우와 생각과 행동이 똑같아요. 다를바가 없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느냐 하면 정부예요. 그러니까 지금 여기도 주민과 주민을 갈라놔, 여기 주민과 국민을 갈라놔, 가족들도 갈라놔, 그렇게 해서 서로 못믿는 겁니다. 이러면 공동체를 파괴하는 정부라고 봐야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를 육성하는 정부는 절대로 아닌겁니다.


지 - 공권력도 마찬가지지만, 지금 그걸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언론들도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문 - 그런데 지금 질문하시는 분도 언론이야, 그런데 언론 문제를 나한테 자꾸 물어보면 어떻게 해?(웃음)


지 - 저희는 전문 언론인이 아니라서요. 그렇게 따지면 그렇지만, 다르게 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웃음) 어쨌든 언론에서 '일부 시민단체나 환경 운동에 발목이 잡혀서 수조원의 손해를 보고 있다'고도 하고, ‘죽창을 들고 방어하지 않는 군인이나 전경들을 폭행한다’는 식으로 여론을 호도하고 있는데요.

문 - 그러니까 백색 테러나 똑같은 얘기야, 무슨 얘기냐 하면 필요이상으로 미군기지를 확장하는데, 돈들어가는 것은 아깝지 않은거잖아. 1,000억이 문제가 아니라 몇조에 가까운 돈이 들어가는데요. 그리고 폭력문제, 이것은 그야말로 적반하장도 유분수야, 이종호라는 지휘관이 전경들 지휘하는 걸 보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여의도에서 농민 시위 진압을 지휘하는 걸 보았지 않습니까? 사람까지 죽었지 않습니까? 여기서 죽지 않은 것은 천만 다행인거예요. 정말 사람 죽이고도 남겠더라구, 그래서 그걸 항의했어도 묵묵부답이었거든요. 그리고선 똑같은 형태로 여의도에서 했거든, 그래놓고 이종호라는 사람이 물러났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강원도 가서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유신을 겪는 동안 얼마나 국가폭력에 시달렸습니까? 그러면서 화염병을 폭력이라고 하고. 여기에서 경찰의 폭력은 시작부터 폭력이야, 들어오면서부터 보십시오. 대추리 주민들은 자유롭게 찾아오는 사람을 맞이할 수도 없다는 이야기입니까? 대추리 주민이 밖으로 이동했을때 자기 집에 들어가면서 주민등록증을 보여줘야 하는데요. 자기 집에 들어갈 때 주민등록증 내고 들어가는데가 어디가 있습니까? 이 자체가 폭력이라구요. 이것에 항거하면 특수공무집행방해라고 하는 겁니다. 그걸로 벌금형을 받기도 하고, 재판중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나는 검찰이나 경찰이나 법원에 끌려간다고 하더라도 조사에 응할 마음이 없어요. 해봤자예요. 정부는 이렇게 시작부터 폭력을 휘두르면서 폭력을 말할 자격이 없다구요. 이것은 자기들의 폭력을 은폐하기 위한 궤변에 불과한겁니다. 미란다 원칙도 없이 무작정 수백명을 잡아가는건 폭력이 아니고 뭡니까? 거기에 저항하면 특수공무집행방해가 첨가되구요. 이 자체가 폭력인거예요. 그리고 책임 있는 자가 주민들한테 ‘그렇게 죽고 싶어. 이리와 땅에 묻어줄께’라고 말하는게 있을 수 있는 행동입니까?


지 - 일부에서는 보상금을 많이 받기 위한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하고 있는데, 이런 얘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 - 제가 여기에서 1년 6개월 넘게 상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 들어오기 이전에도 자이툰 부대 이라크 파병 반대, 평택 미군기지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서 2004년부터 유랑도 하고, 전국 60~70개 대중소 도시를 헤매고, 2005년 529 축제를 평택에서 해서 5,000명 정도가 모여서 여기까지 들어왔고, 2004년도 유랑을 마감하고, 2005년도에 무엇을 할 것이냐 하다가 대추리로 이사를 와서 보니까 동네 상황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단 한평도 줄 수 없다, 올해도 농사 짓고, 내년에도 농사짓자’라고 얘기하는데, 전 이게 다라고 봅니다. 실제로 그래요. 여기서 10억 보상받는 사람도 있어요. 그게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소작인이예요. 부재 지주들의 땅을 맡아서 농사를 지어서 먹고사는 소작인인데, 그렇다면 집하고 집터 밖에 없잖아요. 그게 4,000~5,000만원 정도 되나 봐요. 그게 대부분의 사람들입니다. 그거 가지고 밖에 나가서 살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세요. 전셋집이라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뭘 먹고 살라는 말입니까? 여기서는 텃밭 가꿔서 산다구요. 그리고 마을 공동체를 통해서 기계농도 의지하고 해서 추수한 다음에 줄 것 주고, 남은 것으로 1년 먹고 사는거예요. 여기를 떠난다는 것은 죽는거나 다름이 없는 겁니다. 그리고 이 분들은 역사가 있지 않습니까? 39년도에 일본군에 의해서 빼앗겼고, 52년도에 미군에 의해서 빼앗겼구요. 원 대추리를 빼앗기고 와서 여기가 신 대추리가 된거예요. 여기 사람들은 대추리라는 이름이라고 갖고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빼앗기면 대추리라는 이름을 땅에다 묻어 놓고 갈 것이냐, 산에다 버릴거냐, 바다에다 버릴거냐, 이러고 있다구요. 여기 사는게 제일이야, 실제로 나가면 죽는 길로 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상을 노리고 한다고 말하는 것은 주민들을 모독하는 거라구요. 언론도 여기 들어와서 아무라도 찍어서 인터뷰를 해보면 아는건데, 취재해보면 아는건데, 왜 그거하지도 않고, 국방부에서 얘기하는 ‘백만장자가 생존권을 요구한다는 것은...’이라는 말만 보도하냐구요. 그건 국방부 장관 이야기일뿐이에요.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모독하는 거예요. 나가서 누구라도 찍어서 얘기해보라는 겁니다. 반절 정도는 나갔는데, 회유와 공갈에 넘어가서 동네 사람들 배신하고 나간 사람들, 이 사람들은 한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하겠죠. 그런데 이 사람들을 두고 이야기가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얘기니까 모독이라는 겁니다.


지 - ‘불의와 맞서 싸우는 사제’라는 이미지를 갖고 계신데요. '평택미군기지확장 저지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 상임대표이시고, 1년 6개월을 대추리에 거주하며 이곳 주민들과 먹을 것을 나누고 함께 싸워오셨는데요. 이 싸움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문 - 그렇죠. 97년도부터 미군문제, 한미간의 불평등한 관계들을 알게 됐어요. 내가 찾아서가 아니라 우연하게 96년도에 군산오룡동성당 본당 신부가 됐는데요. 군산에는 미 공군 기지가 있지 않습니까? 시민사회단체들이 저한테 와서 미군기지로부터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고 그랬죠. 제일 처음 문제가 된 것은 활주로 사용료 문제예요. 전라북도에는 민항기가 없습니다. 공항이 없어요. 그래서 미 공군기지 활주로를 이용해서 KAL기, 아시아나기가 이착륙을 하는데요. 요즘 그거 마저도 폐쇄를 하네, 마네 해서 취항 횟수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이래가지고 활주로 사용료, 활주로 유지보수비를 MOA(Memorandom of Agreement, 합의각서)라는 협상을 통해서 국방부의 군수과와 미 공군기지 부대장이 5년마다 한번씩 협상을 가지는데, 97년도에 다섯배를 올리라고 한겁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주둔비 대줘, 땅을 기한도 없이 공짜로 써, 활주로 좀 사용한다고 해서 사용료를 내고 유지 보수비를 내고...


지 - 우리 땅인데요.

문 -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어서 반대를 위한 조직을 만들었죠. 활주로 사용료 인상 반대를 위한 모임을 만들었는데, 절더러 상임대표를 하래요. 그래서 했죠. 국방부가 저한테 전화연락을 해요. 협상하러 내려가는데, 그런 얘기를 해달라는 거예요. 그러고나서 협상을 마무리 지었는데, 국방부 장관이 ‘군산 시민들이 고맙지 않냐, 너희 가서 설명회를 해라’고 해서, 국방부 군수과장이 군산 공항에 방을 빌려서 우리한테 공청회를 해주는데, 결론은 ‘여러분들이 나라에 돈을 많이 벌어줬다’는 겁니다. 미군 주장대로 인상은 하되, 5년동안 단계적으로 하기로 해서 그 차액은 벌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큰 돈이라는 거죠. 그래 놓고 보니까 그런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불평등한 일이 눈에 띄더란 겁니다. 예를 들면 오폐수 문제가 있는데, 하루에 3,000톤씩 서해바다로 흘려 보내는데... 내 돈 들여서 수질 검사를 해보니까 BOD(생물학적 산소 요구량)가 135PPM이예요. 20PPM이 넘으면 공장지대에서 공장을 폐쇄하니, 뭐니 난리가 나는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지금도 방류하고 있어요. 배짜라는 거죠. 우리가 국가기관 모든 곳에 진정을 해도 SOFA라는 겁니다. 소음 피해, 공여지 문제, 미군 범죄 문제, 이런 것을 통해서 SOFA라는걸 알게 됐어요. 이게 전국적인 사안이고, 군산만의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서울에 올라와서 SOFA개정 국민행동을 했는데요. 처음에 127개 단체에서 148개 단체로 늘어났죠. 그 와중에 매향리 폭격장 문제가 터지고, 전동록씨 감전 사고가 터지고, 효순이․미선이 일 터지고, 맥팔렌드 일 터지고 해서 소파 개정을 흉내내는 자리까지 만들어놨는데, 소용이 없었죠. 그 다음에 불거진 것이 이라크 파병 문제, 미군부대 이전 문제 아닙니까? 그래서 여기 올인을 하게 된 것이죠.


지 - 이 투쟁을 반미, 친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평택 주민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외부 세력들이 미군 철수 등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선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문 - 그게 범대위를 향해서 하는 얘긴데요. 범대위는 시작부터 미군기지 확장저지가 목표입니다. 미군기지 확장저지에 동의하는 사람은 범대위에 다 가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 부류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중에서 한총련, 민주노총을 두고 하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한총련, 민주노총 이걸 놓고 그 사람들이 과도하게 포장하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정치적인 문제로는 6.15 선언이 있지 않습니까? 6.15선언에 입각해서 남북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이 자체를 색깔론으로 매도한다고 보면 큰 잘못이죠.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살아있는데, 국가보안법에 대한 논의도 극에 달해있는 것 아닙니까? 폐지될 위기까지 왔지만 살아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을 적용할 수 있는 범위가 굉장히 줄어들었어요. 왜냐하면 사회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법의 잣대를 광범위하게 할 수 없어서 그러는거고, 그건 진전이라고 봐야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나가니까 아마 이 문제는 더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내와 투쟁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거죠.


지 - 일부 시민단체에서 주장하는 미군 사격장을 폐쇄하자는 주장에 대해서 조선일보가  “일본에 가서 훈련을 하다보니 수많은 추가 인력과 공중 급유기가 필요해 장기간 이 비용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고, 조종사들이 (훈련을 못해) 자격을 유지하지 못하면 한반도 밖에서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라고 사설을 통해 반박했더라구요.

문 - 그동안 아무 무리없이 잘 썼죠. 그런데 국민적인 의식변화에 의해서 매향리도 폐쇄하게 되었고, 직도 사격장을 미군 사격훈련장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그것도 국방부에서 도둑질한겁니다. 안보논리가 그대로 통할 때 국방부에서 갖다 때린겁니다. 군산시의 허가도 얻어내지 않고, 관행으로만 해서 법적 절차도 엉터리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이 쓰던 것을 미군이 또 쓴다고 하니까 반대하는거죠. 그만큼 달라진거예요. 한국군이 쓰던 것도 가만히 있었잖아요. 그만큼 피해를 보고도. 어장의 피해, 인명 피해까지 있었어도 안보라는 덫에 걸려서 아무 말도 못했었는데, 지금은 세상이 달라져서 그것을 거부한다는 겁니다.


지 - 정부는 예정한 평택시 대추리, 도두리 일대의 주민들을 10월 말까지 강제 이주 시키기 위해 명도소송을 냈다고 하던데요.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인가요?

문 - 하겠죠. 자기네들 절차대로 하겠죠. 그렇게 하면 주민들은 처절하겠죠. 들어낼거 아닙니까? 세간 살이를 들어내고, 때려부실 거 아닙니까? 그렇게 하겠죠. 그러나 아무리 언론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계속 숨길 수는 없을 겁니다. 있는 그대로 보여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미봉될지 몰라도 결코 미봉될 수 없는 겁니다. 시간 문제죠.


지 - 지금 몇 가구 정도 남아 있고, 주민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어떤 겁니까?

문 - 98가구가 남아 있어요. 사실 주민들은 겁에 질려 있죠. 어떻게 막아낼 수 있느냐, 그런데 지금까지 버티는 이유는 이 분들도 사실은 이판사판이예요. 어차피 죽는다, 마지막으로 철거를 할때까지 싸운다 하더라도 우리가 밑질 것은 없다는 거죠. 오히려 유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면도 있는 것 같은데, 우리 같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죠. ‘왜 그러냐 하면 이미 협의 매수에 응해서 나간 사람들과의 형평성 때문에 그렇다, 여러분들이 싸웠다고 해서 더 주면 그 사람들이 가만들이 가만히 있겠느냐, 그리고 그 손해를 정부가 감수하겠느냐’ 하는 얘기를 하는거죠.


지 - 지금 상태로 정부도 물러서기 어려운 입장인 것 같은데요.

문 - 시민사회단체 77개 단체가 3주전인가 기자회견도 했는데, 내용을 보니까 ‘정부도, 주민도, 범대위도 한발씩 물러서야 된다’는 표현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정부와 주민을 똑같은 입장으로 보는구나. 갑과 을 같이 사고 파는 관계로 보는구나. 그것이 아니다. 이 분들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한발짝 뒤로 물러나면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것인데, 어떻게 그런 표현을 하느냐”는 얘기를 전화를 통해 했어요. ‘미군기지 확장 저지, 확장 반대다, 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단 한평도 용납할 수 없다’고 대답을 했는데, 이게 주민을 대변하는 말은 아니고, 제 마음인거죠.


지 - 이른바 '여명의 황새울' 작전이 새벽 5시에 전개되지 않았습니까? 윤광웅 국방장관이 "역사적 국책사업을 집행하는데, 더 이상의 기다림은 없을 것"이라고 하는 긴급기자회견을 한지 스무 시간도 안된 시점이었는데요. 이것이 박정희 정권때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지 20시간이 안된 상황에서 사형을 집행한 결단(?)을 연상시키더라구요.

문 - 저는 그런 표현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들어보니 그러네요. 저는 인혁당 때문에 다리 병신까지 되고, 대법원 판결날 때 75년 4월 9일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의 변호사 한 분하고, BBC 방송의 PD 한 명하고, 제가 통역을 맡아서 기다림 끝에 어떻게 해서 법정에 들어갔는데요. 판결이 끝나고, 판사들은 들어가버리고 그 아수라장을 봤거든요. 항의하는 사람들을 질질 끌어다가 차에 싫어서 여기저기 내버리고 했는데, 그날 저녁에 잠을 자고 새벽 7시에 유족들이 전화를 해서 ‘사형을 집행했답니다’고 해서 기독교 방송에 확인해 봤더니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서대문 구치소에 갔는데요. 경찰이 새카맣게 있어서 그것을 뚫고 들어가서 봤는데, 가족들이 뒤엉켜서 오열을 하고 있었어요. 시체를 가족에게 인계를 하려다가 딱 막혀가지고 뒷문으로 빠져나가는데, 응암동 로타리에서 하나 잡았어요. 거기서 하루 종일 실갱이를 하다가 시신을 빼앗기고, 벽제 화장터에서 강제로 화장을 해버렸잖아요. 그러고서 막차를 타고 전주를 내려가려고 하는데, 세상은 아무렇지도 안더라구요. 그냥 그대로 돌아가데요. 전 그날 그냥 죽는줄 알았었거든요.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 먹다가 고속버스 휴게소에서 먹을 걸 보니까 뒤집어지더라구요. 그래서 햄버거 하나 하고 오렌지 쥬스를 사서 먹었는데, 어떻게 급하게 먹었는지 급체를 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내가 햄버거를 안 먹어, 오렌지 쥬스도 열 번 생각하고 ‘이걸 먹어, 말어’ 그래요. 30년이 넘었는데도 그러거든요. 그 시절에 사형까지의 흐름을 누가 막겠어요. 이것도 정부가 진행하는 것을 누가 막겠어요. 그렇지만 인혁당은 지금 계승중이예요. 국가인권위에서도 조작이라고 발표하고, 민사소송이 들어가 있다구요. 정체가 드러난거잖아요. 이것도 다 드러나게 돼 있어요. 30년이 걸려서 드러날지도 모르지만,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주민들의 정당성이나 범대위의 정당성은 그때서야 드러나게되겠죠. 진리가 사람을 살리는거지, 힘이 살리는게 아니잖아요.


지 - 이 상황을 보면서 권력의 작동 방식이라는게 정도 차이만 있지, 본질은 같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거든요. 신부님은 두 사건을 다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신 분이잖아요.

문 - 전 그렇게는 생각안했거든요. 써먹어야겠네. 동의가 되니까.(웃음) 윤광웅 국방부 장관이 5월 4일 지나고 여기를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선포했다는 말이거든요. 가서 보세요. 철조망이 군사 시설입니까?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는데, 벼가 군사 시설이야? 이거 불법이예요. 행정 소송을 해서 재판중인데, 판사가 아주 극보수라고 하더라구요. 그렇다고 치고, 미군기지 확장예정부지라고 금을 그어놓는 것까지는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군사시설 보호구역이라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걸 근거로 검문검색을 하는거거든요. 그러니까 불법 투성이지.


지 -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비롯해서 종교계의 민주화 투쟁 역사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그런 활동이 예전보다 활발하지 않은 듯한 느낌도 드는데요. 그리고 지금은 보수적인 종교단체가 훨씬 더 활발하게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 같습니다. 그런 걸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문 - 정의구현 사제단은 그 전부터 활동을 하긴 했지만, 74년 9월에 성명서를 내야 되는데, 단체 이름이 있어야 되겠더라구요. 그래서 붙인 것인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예요. 그 명칭을 지금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30주년이 넘었죠. 각 교구 대표들이 있고, 회원 가입 방식이 아니예요. 대추리다, 여기에 모이면 ‘정의구현 사제단’이예요. 조금하다가 그만두는 사람도 많아요. 30년이면 한세대인데, 중간에 들어온 젊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데, 제가 여기서 이러고 있으니까 십여명이 와서 옥상에 같이 올라가서 버텨줬다는 겁니다. 사제단은 아무도 말하지 못할 때 말하는, 아무도 행동하지 못할 때 행동하는 그것으로 일관해 왔다고 봐야되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사제단은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되고, 동토를 푸는 전사들이고, 어려울때 물불을 안가리고 덤빌 수 있는게 사제단이거든요. 정의구현사제단은 민주화 과정에서의 기념비적인 단체인데, 이런 버금가는 사회의 어려움이 있을때 이해관계 없이, 어떤 정치적인 계산 없이, 그냥 부조리하면 부조리한데로, 거짓이면 거짓데로 정면돌파하는 그런 힘이 있다고 봅니다. 사실 시작부터 정의구현사제단에 적을 둬서 저보고 원로라고 하고, 창설 멤버라고 하는데, 아직도 그 정신으로 있고, 젊은 사람들이 그 점을 인정하는지 내가 하는 일에 협력해준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정의구현사제단이 조용하다고 하는 얘기는 할 얘기를 하는데가 더 많아졌기 때문일 겁니다. LA 타임즈 기자가 효순이․미선이때 ‘여기는 진보적인 집회고, 저기는 보수적인 집회다. 그거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달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여기와 보니까 늙은 사람이 많아요? 젊은 사람이 많아요? 저기는 평균 연령이 대충 몇 살이라고 봐요? 저기는 십년 후에 다 죽을 사람들이고, 여기는 십년 후에 실제로 일할 사람들이잖아요. 어디가 희망적이에요?’라고 했어요.(웃음) 그러면 ‘저쪽의 메시지는 뭐고, 이쪽의 메시지는 뭐냐?’고 물어서 ‘생각해봐라. 이쪽이 길게 남지 않겠느냐?’고 했죠. 지금도 다른게 있나요? 제 1년 후배 박홍이 있는데, 가까이 지냈던 친구죠. 걔도 이제 70줄이야, 그런데 나는 그 친구와 달리 젊은 사람들의 메시지를 같이 말하고 있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얼마나 살지 몰라도.


지 - 박홍 총장은 왜 그런 발언을 한다고 보십니까?

문 - 그런 이유가 있겠죠. 여러 가지 추측들이 있는데, 안기부 어쩌구 하는 얘기도 있고. 그런데 본인이 얘기안하니까. 제가 얘기하는건 그거죠. ‘너 교수지, 맞지. 니가 니 제자를 공산주의자라고 고발하면 되냐, 설령 니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니가 성직자로서 그럴 수 있냐? 장발장 모르냐? 교수는 사제지간이고, 부모 자식 관계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니가 감싸야 하는 것이고, 제발 TV에 나오지 마라.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것하고 니가 나오는 건 달라’라고 했는데, 그날 저녁에 또 TV에 나오더라구요.(웃음)


지 -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까는 기대안하셨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문 - 내 주변에서 ‘이회창이냐, 노무현이냐, 이회창은 독재정권의 연장이다, 노무현은 그래도 우리쪽이다’라는 분위기가 있었죠. 사실은 이회창이 될까봐 겁이 나면서도 노무현에 대해서는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조마조마한 끝에 당선이 되길래 안도를 하게 됐는데, 당선자 시절에 민주당 당사에서 만나자고 해서 가서 만났어요. 그랬더니 ‘촛불을 거두어달라’는 거예요. 그 이유는 ‘북핵 문제가 걸려 있다. 북핵 문제는 생존권 문제다. 소파 문제는 자주 문제다. 살기 위해서는 소파를 좀 늦춰야겠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제가 반기를 든 것이 ‘우리는 사람이요. 사람은 죽음을 택할 수도 있는 거요. 사람은 자주해야 살아 있는 것이지, 종속되어서는 살아 있는게 아니요. 불평등한 관계에서는 살아있는게 아니요’라고 이렇게 얘기했더니 당선자가 ‘신부님, 제가 소파 개정합니다’고 했는데, 하긴 뭘 했습니까? 이런 얘기를 통해 ‘한미관계에 있어서만큼은 기대할 수가 없구나. 벌써 미국의 비위 맞추기가 시작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니까 당선되기 전에 했던 ‘사진 찍으러 미국에 가지 않겠다. 미국에 가더라도 할 말은 하겠다’는 말이 생각났는데, 만나보고 나서 ‘할 말을 못하는 당선자로구나, 할 말을 못하는 대통령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크게 기대를 못했죠. 그래도 희망을 가졌던 것은 여소야대가 아니라 반대기 때문에 ‘그래도 뭔가를 해낼 수는 있겠구나’ 했더니 오히려 한나라당과 손을 잡으려고 하고, 뜨거운 감자인 국가보안법이 공론화될때 폐지하면 되는건데, 그것조차 못하고서 이제는 영영 글러먹게 된거잖아요. 탄핵때도 한나라당이 밉죠. 탄핵은 말이 안되는거죠. 저도 똑같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국민들이 바로 잡아놨으면 정신을 차려야 되는데, 자기를 지지해준 부류에 발판을 삼는게 아니라, 이것을 무시하는 듯 한나라당하고 끌어안기를 하고 장난을 하다가 여기도 놓치고, 저기도 놓치는 일이 벌어진겁니다. 앞으로 남은 임기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대통령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 - 9월 24일에 '사람을 먹여 살려온 들녘을 사람 죽이는 전쟁기지로 만들지 않기 위한' 4차 평화대행진이 서울에서 열리는데요. 어떤 준비를 하고 계시나요?

문 - 이건 분기점이라고 보거든요. 10만 지킴이를 모으는데, 지금 3만 6천이 됐다던가요? 서울 집회에 3만, 4만, 5만 정도는 모여야될 것 같습니다. 9월 8일부터 24일까지 평화 순례를 계획해서 순례를 하면서 시민사회단체나 국민들을 만나서 이 문제를 호소하고, 안에서 지킴이들은 지킴이들데로, 이번 빈집 철거를 투쟁하면서 얼마나 처절해요. 그것을 알리면서 24일을 부각시키는 이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지 - ‘죽봉시위대 진두지휘한 문정현 신부 파문해야 한다’는 일부 카톨릭 신도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 - 그런 주장은 74년도 이후 계속해서 듣고 있습니다.(웃음) 입 달렸으니까 입달린 사람 쫓아다니면서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구요. 나와 교회의 관계가 더 중요한거죠.


지 -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교지도자는 사회 문제에 대해서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기들은 훨씬 더 적극적이고, 세속적인 방식으로 참여하지 않습니까?

문 - 넓게 보면 성서의 정신, 공회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성서는 가난하고,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는, 소리를 내도 소리가 나지 않는 그게 성서의 시작부터 끝까지입니다. 공회라는 것은 이 사회의 고통은 바로 교회의 고통이요, 기쁨 또한 교회의 기쁨이다, 그러니까 사회속의 교회인 겁니다. 거기에서 약자의 편에 들고, 불의에 항거하고 하는 그것을 원형이 되도록 살아준 분이 예수님이세요. 예수님의 수난사를 자세히 보면 바로 순교의 길입니다. 죽음을 택하는길인거죠. 그래서 그 원형을 쫓아 사는 이것은 누가 판단을 못해요. 그래서 교회와 나의 관계는 뭐냐, 저는 주교님으로부터 하지 못하도록 경고를 받거나, 벌을 받거나 한 일이 없어요. 오히려 장려는 있었죠. 돌아가시기 직전에 전임 주교님이 제 손을 꽉잡고 ‘문 신부님. 잘 살고 있는거야.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줘', 이게 유언이예요. 그 체계내에서 그렇게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데로 옷을 벗길 수는 없는거죠.


지 - 요즘 종교인들 중에서 신부님처럼 어려운 곳에 임하는 사람은 적은 것 같은데요.

문 - 내 별명이 잘 지어졌어요. MBC 스페셜에서 ‘길 위의 신부’라는 제목으로 한 시간짜리 프로가 나갔거든요. 그 사람들이 한달을 따라 다니면서 베타테이프 120개를 찍었어요. 그때 매향리 투쟁할땐데, 자고 일어나면 거길 갔다구요. 쫓아다니면서 그 사람들이 지쳤어, 그래서 그 사람들이 이름 지어준게 ‘길 위의 신부’인데, 그 사람들이 이름을 잘 붙여줌으로서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생각이 든건데, 내 개인적으로는 ‘남은 자가 되자’는 겁니다. 이게 성서적이예요. 영어로 렘란트, 남은자, 나는 관변으로 안가, 우리 신부들 중 관변으로 간 이들 많아요. 나는 안가, ‘그럼 어디에 남아 있을래?’ 하면 ‘대추리에 남아 있을거야. 고통받는 사람들과 같이 있을거야. 다른데로 안가. 남아서 길에서 살다가 죽는게 내 소원이야’라고 대답하고 싶어요. 그걸 누가 뭐라고 한들 상관이 없고, 옷을 벗겨도 할 수 없어요. 그것이 이유라면. 내가 잘못할 수도 있지만, 그 잘못은 개인적인 책임이고, 사회적으로 나쁜 영향을 줬다면 벌을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제가 신부된지 40년이거든, 40년동안 생각해서 얻은 결론인데, 이제 지난날보다 더 짧게 살아야되는데요. 내 인생의 지표는 렘란트가 되어서 길 위에서 살다가 가는거예요.


지 - 특별한 계획이나 마지막으로 해주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문 - 특별한 계획은 없어요. 그렇게 사는 것으로 끝이예요. 제가 무엇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뭔데. 그러나 이렇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내 이상, 종교적으로 가면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고 죽는거죠. 거기까지 이른다고 하는 것은 욕심일거고, 내 소관이 아니고, 그 길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행진하다가 어떤 한계에 부딪히면 가는 거죠. 욕심도 없어, 그냥 살다가 가는거예요.


지 - 귀한 시간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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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해콩 > 우리교육 펌] 가난과 교육 - 이계삼

가난과 교육
           - 이계삼
1.
김진경 박복선 선생님께

<우리교육> 2월호에 실린 두 분의 대담을 읽고 제법 오랫동안 머뭇거리다 이 글을 씁니다. 저는 경남 밀양의 한 사립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입니다. 두 분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대학 시절부터 저는 두 분의 성함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두 분을 처음 알게 된 건, 대학 1학년 무렵 두 분이 함께 엮어낸 <꽃이 사람보다 따뜻할 때>라는 산문집을 통해서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3년 내내 교과서 말고 다른 책을 접했던 기억이 거의 없던 제게는 ‘교과서에 실리지 않는 산문’이라는 부제가 너무나 신선했거든요. 그 책에 실린 글들도 참 좋았고, 그래서 그 책을 여러 권 사서 친구들에게 선물했던 기억이 납니다(그때 저는 박복선 선생님을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선생님일 거라 혼자 상상하기도 했지요). 또 이런 기억도 있네요.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늘 과 학생회실에서 빈둥거리던 저는 선배들이 기타로 민중가요를 부르는 것을 곁에서 따라부르곤 했는데, 김진경 선생님의 시에 곡을 붙인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라는 노래를 처음 듣고선 얼마나 감탄했는지 몰라요. ‘벗이여, 어서 오게나 움푹 패인 수갑 자욱 그대로’ 하는 부분의 그 아름다운 선율과 서늘한 서정이 얼마나 좋던지요. 군대 다녀와서부터는 비록 떨어지긴 했지만 임용고사를 준비하면서 <우리교육>은 도서관 잡지실에서 빠뜨리지 않고 읽었는데, 그 앞머리에 실린 편집장 박복선 선생님의 짧은 에세이를 참 좋아해서 우선 그것부터 먼저 펼쳐 읽기도 했어요.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것도, 그리고 이 글을 서신 형식으로 쓰려고 맘먹은 것도 그 대담 기사를 읽으면서 느꼈던 새삼스러운 반가움 때문입니다. 교직에 들어 조금씩 경력을 쌓아갈수록 커져만 가는 갈증을 느끼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무언가, 우리 교육이 처한 이 상황을 분명하게 진단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 주변에도 제가 마음으로 기대고 또 삶의 사표로 모시는 선생님들이 계시지만, 다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주어진 가능성에만 최선을 다하자”고 말씀하시더군요. 아마도 그분들 또한 이 상황에 대해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셨을 거라 짐작합니다.


그래서 저는 두 분의 대담 기사를 숨죽이며 읽었습니다. 그 신랄함과 날카로움에 약간의 쾌감을 느끼기도 했고, 그 기사를 두 번째 읽었을 때 저 또한 무언가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때 저는 이른바 ‘밀양 고교생 성폭행 사건’을 둘러싼 떠들썩한 소용돌이를 현장에서 겪은 뒤끝이었습니다. 언론에서 익히 보셨을 테지만, 근 한달 가까운 시간동안 이 사회는 밀양의 고등학교들과 지역 사회와 그 속의 ‘패악한 아이들’을 실컷 두들겨 팼습니다. ‘맞을 땐 맞더라도, 토론 좀 하자’는 내 속의 열망에 대해선 ‘잠자코 맞고 있어!’라고 윽박지르더니, 분이 좀 풀릴 무렵에는 총총히 다른 곳으로 떠나가더군요. 때린 자나 맞은 자나 아무것도 배운 것 없이 커다란 상흔만 남긴 실로 기묘한 한판 소동이었습니다.


그리고 3월, 학교는 언제나처럼 다시 문을 열었고, 저는 ‘비평준화지역 2등그룹에 속하는 인문계 고등학교 평반(우수반 아닌)’이라는 긴 꼬리표가 달린 학급의 담임으로, 도서관/학교신문 담당자로, 일주일 도합 스물여섯(보충수업, 야간 특별수업 포함) 시간의 수업을 하면서 학교와 집을 오락가락합니다.


2.
선생님, 오늘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저는 야간 자율 학습을 감독하면서 우리 반 아이들과 차례로 면담을 했습니다. 오늘 이야기 나눈 열명 중 세명이 편부/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늘 겪는 일이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중학교 내신 성적 50~60%대에 속하는, 그래도 성적향상에 대한 열망은 포기할 수 없어 노동하는 부모들의 ‘고래심줄’같은 돈으로 심야 학원까지 다니지만 모의고사를 치르면 절반을 채 맞추지 못하는, 그래서 결국 수시모집으로 부산 경남권의 사립대학에 근근이 입학할, 그래도 졸업하고 10년쯤 뒤에는 파출소 순경으로, 포크레인 기사로, 국밥집 젊은 사장으로 스승의 날 꽃다발을 들고 옛 담임을 찾아오기도 하는 아이들 말입니다. 그 아이들을 하나 둘 번호 순으로 복도로 불러내 공부 방법을 조언하고, 신상의 변화를 물으며 그들에게 말을 겁니다. 고등학교 1학년, 중학생 티를 채 벗지 못한 아이들은 수줍어 말이 없습니다. 혼자만의 이야기끝에 녀석들의 말간 얼굴을 쳐다보다가 어찌할 수 없는 애틋함에 손등에다 제 손을 포개어도 봅니다. 이 아이들 중 또 얼마는, 주로 결손 가정의 아이들일 테지만, 가난과 외로움에 몸을 떨다가는 결국 ‘즐기고 저지르는’ 어떤 삶의 길에 접어들지도 모르지요.


선생님, 제가 근무하는 이 조그만 시골 고등학교 안에도 남김없이 아로새겨진 이 세상의 모습을 느낄 때마다 저는 아득해집니다. 학교와 세상의 담장은 완전히 허물어져버려서 우리는 ‘학교’ 아닌 ‘세상’ 속에서 근무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대한민국의 학교 안에는 이른바 ‘교실 붕괴’라는 교육적 불가능이, 입시라는 꼭지점을 향한 가없는 질주가, 천박한 중산층 의식에 깊이 물든 교사 집단의 안일과 무기력이, 초고속 성장의 단물을 흠뻑 빨아들인 소비문화의 광풍이, 풍요와 빈곤, 이 둘로 딱 쪼개진 한국의 경제가, 양심과 도덕을 제멋대로 조롱하는 타락한 한국 사회가 모두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이미 오래전부터 학교 안에 자리잡고 있었을 테지요.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고개를 쳐들더니 이제는 이곳저곳에서 굉음을 내며 분출합니다. 가까이는 작년 연말의 대규모 수능 부정행위 사건과 우리 지역 아이들의 성폭행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 만성질환자가 되어 잠시 엉덩이를 들썩거리다가도 어느새 제 자리로 주저앉습니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어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학교가 거기 있고 성장기 아이들이 12년의 시간을 거기서 보내다가 스무살이 되어 빠져나오는 것만이 분명할 따름, 이제 우리 교육의 장에 ‘확실한 그 무엇’은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3.

선생님. 최시한 선생의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이라는 소설을 읽어보셨겠지요. 저도 그 소설의 주인공 선재처럼 전교조가 결성되던 1989년에 고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해직된 선생님이 나오진 않았지만, 한동안 온 학교를 팽팽하게 감돌던 그 긴장된 공기와, 몇몇 젊은 선생님들의 긴장된 결연한 얼굴만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사회의식이란 전혀 없는 촌무지랭이였지만, 저는 그때부터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더니 선배들이 저희들을 ‘전교조 세대’라고 불러주더군요. 눈물이 흔한 편이기도 하지만, 저는 학교 민주광장에서 전교조 결성 전후를 기록한 사진전을 둘러볼 때마다, 거리 집회 와중에 대오 한편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뛰어나오는 해직교사 선생님들을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가르치는 것이 싸우는 것이라면, 싸우는 것도 가르치는 것이리라’던 백무산 시인의 싯구절이 겹쳐 떠올랐습니다. 그때 선생님들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선하고 약한 자들의 번민과 그것을 뚫고 나온 용기는 늘 보기 애처로웠습니다만 그것으로 더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습니다. 전교조 교사! 나도 저런 존재가 되리라, 마음 속 깊이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도종환 선생님의 시가 있었습니다. ‘나뭇잎 냄새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 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창밖 햇살이 교실에도 가득한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것’. 돌이켜보면, 전교조 선생님들과 관련된 이 모든 것들은 20대 초반의 제 위태로운 자의식을 지탱해준 최선의 도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 또한 전교조 교사로 살아갑니다. 집회 현장에서 만나는 전교조 선생님들이 뿜어내는 기운은 여전히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우리 밀양지회에서 머리 맞대고 고민하는 선생님들은 건강하고 부지런하며, 또한 정의롭습니다. 올해 초 지율 스님의 100일 단식 내내 발을 동동구르며 함께 했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전교조 선생님들이었던 것에서 보듯, 전교조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가장 순수한 조직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늘 이런 질문에 시달립니다. 과연, ‘지난 16년간 전교조는 아이들의 영혼의 성장과 자유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혹은, ‘전교조는 지난 16년간 이 땅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의 크기를 얼마만큼 줄여주었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자명하지만, 상황은 더욱 나빠졌을 따름입니다. 전교조는 10만의 조합원에 전임 상근 활동가들의 인건비로만 연 50억원을 지출하는, 시민사회의 가장 크고 영향력있는 집단이 되었지만, 교실의 상황은 더욱 나빠져갑니다. 두 분 선생님이 대담에서 거듭 주장했던 것처럼, 우리 교육운동은 지난 십수년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다만 방황했을 따름입니다. 그 방황의 뚜렷한 증거는 작년 전교조 위원장 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선거에서 대립했던 주장은 평범하게 요약하자면 전교조를 ‘아래로부터 복원하자’는 입장과 ‘강력한 투쟁을 통해 복원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당혹스러웠던 것은 이 주장들이 모두 ‘교실 바깥’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을 뿐, 정작 ‘교실 안’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두 입장은 제겐 한 사물의 다른 두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 두 입장은 모두 ‘전교조 복원’을 이야기했고 방법론의 차이를 지나서 결국 같은 결론-교육공공성 수호-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전교조 조직 복원을 통해 교육공공성을 둘러싼 참호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을 때, 이것이 ‘교실 안 아이들’의 삶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때 어느 책에서 읽은 부처님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아마 선생님들도 아시겠지만,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비유를 통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이곳은 거친 땅이고, 반대편은 좋은 땅입니다. 결국 누군가가 뗏목을 엮어 강을 건넙니다. 그런데 그는 뗏목이 너무나 소중한지라 강을 건너 산길을 가면서도 뗏목을 이고 다닙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왜 뗏목을 이고 가지요?”라고.


저는 이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이 바로 지금 전교조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전교조 운동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이 커다란 덩치의 조합 대중조직 ‘전교조’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상념에 사로잡힙니다. 이제 전교조는 아이들의 변화를 교육적 성과로 이어가는 일보다는 스스로의 존립과 유지에 더 큰 동력을 쏟아부어야하는 조직이 되고 말았습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자면 이런 이야기겠지요. 전교조는 아이들에 대한 교사의 사랑에 기초한 조직입니다. 그 사랑을 가로막는 힘과 싸우기 위해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조직(시스템)에 자신의 교육적 열정과 사랑을 의탁했습니다. 그러나 시스템은 내면이 없는 물질이므로, 물질은 자신의 운동법칙에 따라 굴러갑니다. 전교조가 구축한 교육운동 시스템은 그 속에 담긴 교사들의 교육적 양심, 사랑과 뒤섞여 존재하지만, 물질이 정신을 밀어내는 인간사회의 법칙 속에서 시스템은 결국 어느 순간 자기 존재를 위해 운동합니다.


제가 느끼기에 전교조는 지금 교육운동의 한 뗏목이 되어 있습니다. 교육운동의 위기는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요. 전교조는 교육운동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성장했고, 그래서 대개의 양심적인 교사들은 전교조에 기대는 것 이상의 교육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데, 정작 이 조직은 자기 존립에 더 큰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이 역설적인 상황 말입니다. 결국 전교조는 모든 성원들이 합의할 수 있는 최선의 틀로 ‘교육 공공성’을 설정했지만, 실제 이것은 중산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으로 결과한다는 김진경 선생님의 주장은 다소 과격하지만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아이들 빙자해서 교장하고 월급 타먹는 운동’으로.


4.
선생님. 교육운동의 경험이 일천한 제가 운동조직론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다만 ‘가난’과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 정신이 가장 온전하게 존립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가난’, ‘결핍’, 혹은 ‘힘없음’이라고 믿습니다.


이 땅의 아이들은 ‘가난’했던 시절에 가장 아이다웠고 아름다웠습니다. 아이들은 한국사회의 경제 성장 이후로부터 아이다움을 잃었습니다. 교육운동은 ‘힘’은 없었으되 열정과 사랑만으로 존재했던 시절 가장 강력했고, 그 ‘힘’을 갖춘 지금 가장 무기력합니다.


아이들은 왜 변했는가. 학교는 왜 붕괴되어 가는가. 왜 교육운동진영은 방황하고 있는가. 저는 결국 이 모든 현실을 ‘경제 성장’이라는 물질 환경의 변화의 산물로 여깁니다. 아이들의 변화는 김진경 선생님의 말씀처럼 (디지털 문화의 확산으로) ‘이성의 의지’가 약해지고 ‘몸의 의지’가 강해지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다만 경제적인 풍요가 낳은 정신의 타락을 흡수한 것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느끼기에도 요즘 아이들이 이전 세대보다 사유의 깊이가 떨어지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유를 가능케하는 ‘결핍’의 요소가 덜해졌기 때문에 그러할 뿐, 아이들은 지금도 스스로 결핍을 느끼는 요소-우정, 진정한 교육-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맹렬하게 사유하고 있는 것으로 저는 느낍니다)


전교조의 성장은 물론 그간 치열했던 운동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더 크게는 단체교섭 등을 통한 교사 집단의 물질적 환경 개선이 더 크게 작용했고, 이는 우리 사회의 경제 성장이 정치적 상부구조의 개선을 추동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경제 성장 자체가 한계 상황에 부딪쳐 있습니다. 그리고 ‘빈곤’이 우리 교육의 중심으로 서서히 떠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힘있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현실 즉 ‘빈곤’을 ‘가난’으로 풀어가야 하는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육이란 ‘가난’ ‘결핍’ 혹은 ‘힘없음’에 대해 성찰하고 연민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김진경 선생님이 지적한 바와 같이 ‘교육 이전에 삶이 붕괴되어가는’ 우리 사회의 뚜렷한 경향에 대해 집중하는 길이야말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교육>이나 매체를 통해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대안학교나, 혹은 매우 합리적인 질서가 정착된 공교육 속의 학교들을 보면서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심지어 어떤 대안 학교는 100억원이나 되는 자금과 비판적인 교양인 양성이라는 이념까지 이상적인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제가 처한 현실과 너무나 비교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비교를 단념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는 미학적 고려라고는 전혀 없는 낡은 건물에서부터, 속물적인 교육관, 비평준화 지역의 맹렬한 경쟁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감옥같은 곳에서 아이들이 청춘을 탕진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곳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제가 이 학교에 대해 회의를 느낄 근본적인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학교의 아이들이 학교에 오는 이유가 그저 ‘친구들 만나고 급식먹는 것’ 뿐이라 할지라도, 입시 교육에 짓눌려 기계적인 교수․학습을 반복할지라도, 그 속에 가난한 아이들끼리의 평등과 우정의 가치가 있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반면교사처럼 이 억압적인 삶에 대한 성찰을 몸으로 체득하게 된다면, 자신들의 ‘빈곤’이 배려되고 보듬어질 수만 있다면, 그것은 ‘성공적인’ 교육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육의 장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지적 성장’을 위시하여 개인 단위의 ‘성장’ 개념에 대해 갈수록 회의하게 됩니다. 교사는 다만 ‘우정’을 위해 존재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교육운동의 생산적인 담론은 무엇일까요? 우선 저는 전교조를 위시한 교육운동 진영이 ‘가난’과 ‘결핍’ 그리고 ‘힘없음’을 스스로 선택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라는 고추상적인 담론, ‘교육공공성’이라는 현재로서는 중산층의 가치에 기울어진 논리보다는 그저 우리 사회의 가장 가난한 현실을 부여안는 것이라 믿습니다. 가난에 대한 성찰, ‘빈곤’을 ‘가난’으로 보듬어안는 교육, 중산층의 자기 한계를 넘어 가난한 자들과 연대했을 때 우리 교육운동이 그 아름다움을 회복할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박복선 선생님이 대담 가운데서, 그리고 ‘하자작업장’ 소개 등을 통해 이야기하는 탈근대적 교육관에 대해 부담을 느낍니다. 이것은 결국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진 일부 중산층의 교육관을 실현하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을까요. 그런 교육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삶과 어떤 연계를 가질 수 있을까요. 제가 너무 편협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머리를 빨갛고 노랗게 물들인 아이들의 분방하고도 거침없는 자기 표현보다는 무엇에든 서툴기 짝이 없는 아이들의 이웃에 대한 고운 연민이 제겐 더욱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5.

선생님. 글을 써 놓고 보니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제 스스로 막연한 느낌으로만 가두어두었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펼쳐놓은 것 같아 민망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펼쳐놓을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선생님들의 대담에서 던진 이야기들이 실마리를 던져 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우리 교육이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즉 전교조 결성 초기의 선한 열기를 회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그 시절 제가 보낸 고교 3년을 회상하는 것은 참으로 심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때 제가 몇몇 젊은 선생님들에게서 받았던 인상은 일생 잊지 못할 기억입니다. 나중에 여쭈어보았더니 그 무렵이 교협에서 전교조로 넘어갈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생전 영어 수업 이외에 다른 이야기를 거의 않던 분께서 흑판에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는 시를 쓰고 고요히 우리들에게 이 시의 속뜻을 물으셨을 때, 아이들을 교단 앞으로 불러내서 수학 문제를 못 풀면 엄격하게 체벌하시던 선생님께서 어느날 수업시간에 1970년대와 전태일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우리 학교에서 평교사 협의회의 핵심으로 소문난 어느 선생님이 빈 수업 시간 교정 스탠드에서 골똘히 책을 읽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저는 그것이 그 3년의 모든 암울한 기억에 값할 만큼 소중한 가르침으로 남았습니다. 그 시절 그분들은 아무 힘도 없었고, 학교는 말할 수 없이 억압적이었으며, 우리들은 모두 가난했지만, 그 모든 것을 일거에 넘어서는 귀한 배움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가난’과 ‘결핍’, '힘없음'이 빚은 진실한 아름다움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힘’과 ‘시스템’이, 혹은 탈근대적인 담론으로 정연하게 완비된 어떤 틀도 결코 좋은 교육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교육은 그저 땀이자 숨결이고 사랑일 뿐, 그 정신의 가난함 외의 어떤 완숙한 물적 조건도 부차적이며, 오히려 해악일 뿐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까마득한 선배 선생님 앞에서 이런 이야기는 참으로 겸연쩍습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들의 생각의 핵심을 잘못 짚고 이야기한 것이라면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목말라했던 사람은 아마 저만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의 고민이 우리 교육의 장에서 한 의제로 자리잡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겁도 없이’ 이 무모한 글에 도전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분께서 제게 던진 소중한 성찰을 내내 간직하겠습니다. 언제나 몇 발 앞선 자리에서 우리 교육의 길을 열어젖히고자 애태우시는 선생님들의 열정을 저도 닮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두 분 선생님들께 반가움과 고마움의 인사를 전합니다. 내내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월간 우리교육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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