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보이는 것들의 비밀, 캘리그래피 좋아 보이는 것들의 비밀 7
왕은실 캘리그라피 지음 / 길벗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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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동양에는 붓이라는 특이한 필기도구를 사용한 전통의 결과로 '서예'나 '서도'가 확립되었다.

특히 한문은 뜻글자여서, 몇 글자만으로도 함축적인 의미를 담기때문에

어지간한 사무실에는 멋진 글씨 한 점씩 걸어 놓곤 했다.

 

그러던 것이 컴퓨터 시대가 되면서 규격화 되었고,

아이들도 예쁜 글씨 쓰기에는 관심이 없어졌지만,

다시 손글씨, 캘리그래피가 감성에 호소하는 글씨로 시대는 돌고 돈다.

 

이 책의 제목,

좋아 보이는 것들의 비밀...은 이 책의 내용을 함축하지 못한 듯 싶다.

오히려 영어 'The key to make everything look better'가 낫다.

더 나아보이는 것들의 비밀... 정도랄까~

 

글씨를 더 나아 보이게 만들려면,

결국 여러 번 써 보아야 한다.

그래서 제일 나아 보이는 것을 고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명필에는 왕도가 없는 법.

 

이 책에서는 붓을 이용한 방법, 전각을 이용한 방법, 그리고 컴퓨터를 활용한 방법까지

다양한 글씨체와 그림과 어울리는 조화까지 설명하려 노력했다.

 

이 책을 보면서 나도

마침 가지고 있는 폰이 '노트'라서

펜을 꺼내서 몇 자 휘갈겨 보았다.

글씨를 쓰지 않던 손이 녹이 슨 느낌이랄까...

 

손끝이 만드는 선과 면들이 조화를 이루는 글씨의 미,

캘리그래피...

직업이라면 고통스러운 작업일 수도 있고,

마음에 안 드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지만,

내가 고르기에도 제일 나아보이는 것들이 채택된 사례가 많다.

 

캘리그래피도 멋지지만,

여기저기에서 따온 아름다운 구절들이 인상적이었던 책.

 

역시 글씨가 우아한 것도 좋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도 글씨와 어우러져 감동을 자아내는 것임을 배우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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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동백 - 이제하 그림 산문집
이제하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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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하면 영랑이고,

동백, 하면 춘희 아닐까?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지둘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런 처절한 기다림의 마음을,

기다림의 마음은

'사랑'이라는 마음을 직접 표현하는 법이 없던 우리 말법에

에둘러 가는 '정을 둔' 사람에게 표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니...

 

가슴에 동백을 단 처녀, 동백아가씨(椿姬)의 라 트라비아타... 만큼이나

모란과 동백은 참으로 화려하면서도 처절한 꽃말들인데,

이 책은... 좀 산만한 산문집이다.

 

이제하가 문지사의 캐리커처를 그리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책에 실린 그림들을 그린 것을 보면, 예술에 대한 지향이 참 남다른 이다.

H 문예지에 '유신'과 관련된 사건으로 불쾌해하는 걸로 보면 자유로운 영혼이다.

 

화사한 느낌이 있지만 기묘한 허스키.

야행성 체질로 그녀가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은데,

사실이라면 그 때문에 그런 톤이 착상되었을지도...

그런 불가사의한 음색이 전하는 그녀의 제비꽃에는 모든 남성적인 것을 제외시켜 버리고

그야말로 여자가 여자를 향해서만 나직이 읊조리는 의초롭고 고독한 그 무엇이 서려있다.

고집스럽지도 격정적이지도 않고

풀잎처럼 연약하면서도 어딘가 단호한 그런 맛이다.

누가 보아주지 않더라도 홀로 피어 홀로 지는 한 송이 들꽃.

굳이 설명하자면 그쯤의 단호함이거나 당당함일 텐데.

아마도 이런 소슬한 고독감이 이 노래를 쉽사리 잊지 못하게 마들고 있을지도...(145)

 

장필순의 '제비꽃'을 평한 구절인데, 그 묘사가 제법 얻는 바가 있다.

 

 

갑갑한 도시에서

생명력을 추구하는 그는 말 그림을 즐겨 그린다.

나는 말띠이기도 하지만 말의 생동감은 그리고 싶은 대상일 법도 하다.

 

그중에 나는 '환마'라는 그림이 제일 맘에 든다.

 

 

 

 

 

주방에서 차 끓이는 딸을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가장 쓰라린 기억 중의 하나 (비애)

 

그의 생각이 글로 옮겨지는 것을 보면

간혹 신기하다. 이런 것들을 글로 옮기는구나 싶은 것이.

그런데 '기억'이라고 하면,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이지, 보지 못한 것을 기억이라고 하면... ㅋ 좀 그렇다.

본 기억이 없다는 것이 쓰라린 심정의 하나겠지.

 

예술이고 나발이고... ㅋㅋ

좀 있으면 꽃들도 온통 흐드러질 것 아닌가.

견디자, 제발 견디자, 마음아...

 

얼마나 쉽지 않으랴.

마음은 청춘인데 몸은 이제 팔순으로 달리는 삶이니

그러니, 견디자, 견디자 할 밖에.

 

의지 박약이고 뭐고

담배는 90프로가 손의 습관 때문이라고 한다.(68)

 

이 구절을 읽으면서

그럴 수도 있으리라 공감했다.

담배를 피우는 일은

손이 담배를 갑에서 꺼내서 입에 물고,

담배의 생연기가 눈을 찌르지 않게 고개를 갸웃한 상태로 라이타나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깨워 연기를 내뿜고,

손가락을 다시 가져가고

우아하게 재를 터는... 일련의 과정이다.

결국 담배를 피우지 못하면 손이 견디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 책에 별표를 높이 줄 수는 없지만,

그의 삶에, 그의 예술에 대한 관점에는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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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무덤, 스스로 추방된 자들을 위한 풍경
승효상 지음 / 눌와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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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아직도 '봉건'의 역사를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부자 전승의 모습을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서 볼 수 있고,

권력 쟁탈에서 패자에게 보내는 승자의 모욕이 그러하다.

 

광주의 학살은 아직도 '전라도 홍어'로 폄하되기 일쑤이며,

고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반대하는 이천 여 통의 편지들이 그러하고,

고 노무현 대통령의 묘역에 대한 오물 투척 같은 일을 보면... 그러하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돈을 가진 자들과 결탁하고,

그 아래 사람들을 계급화하여 조종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의 수천 억원(30년 전의 수천 억은 지금의 수십, 수백 조에 값어치일 듯)에는 눈감던 검찰은

왜 억대 시계라는 둥, 딸의 몇억짜리 아파트에 광분했던 것일까.

 

권력은 본능적으로 안다.

자기들을 파괴할 힘을 가진 자들과 자기들과 유사한 분자들의 성향을.

그래서 유시민이 라운드 티를 입었을 때는 개떼가 달려들듯 예의를 모른다며 고함치던 것들이,

민노당 의원들이 노동조합 점퍼를 입고 등원했을 때 찍소리도 안한 것일 게다.

결국 유시민은 자기들과 유사한 성향의 계급임을 본능적으로 파악한 듯.

 

그들이 노무현을 파괴하기로 마음먹었던 곳에도

비밀스런 세력의 음모가 두려움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노무현의 존재를 없애는 것은 권력없는 세력(민주 세력)의 성장을 10년 이상 후퇴시키는 업적이라 여겼을 것이다.

 

노무현은 죽어서 인정받았다.

그가 살아서 실패한 정치를 무덤 속에 들어가서,

세모진 땅 안에 갇힌 채로,

그 작은 봉하마을은 '피라미드'가 되어

못가진 자들의 구심점이 되어버렸다.

 

물길 흐르는 대로 두고,

박석을 둘러 묘역을 조성한 자그마한 대지는,

오히려 국립묘역이 아니어서 평화롭고

황금 들판 사이에서 빛난다.

 

권력을 놓고 난 이의 평화로움을 시샘하여 파괴한 세력은

이 무덤의 의미조차 짓밟아버리고 싶을 것이지만,

이 묘역은 국가관리 묘역이 되어버렸으므로 눈엣가시처럼 보일지 모른다.

 

노무현의 무덤에 침뱉고 싶은 자들,

국립묘지에 묻힌 전직 독재자들이야말로 '타기'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애써 모르쇠 하고 있겠지만,

시간은 세상을 천천히 돌린다.

 

그 한 지점에 노무현의 무덤은 저렇게 뾰족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쉬는 하루는,

그이 무덤가에 한번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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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5-05-15 0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아생전 다시 노 대통령님같은 대통령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정말 속상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은 내가 살았던 가장 따뜻한 계절입니다

세상은 아직도 깜깜합니다. 어둠이 너무나 당연해서 익숙해질까봐 걱정입니다....

작년에 다녀왔습니다....

글샘 2015-05-20 12:27   좋아요 0 | URL
벌써 6년이 되었군요.
원래 어두웠던 세상이지요. 잠시 밝은 빛이 비추었을 뿐.
요즘 야당 보면 어둠이 더 깊어질 모양입니다.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 이지누의 폐사지 답사기, 전남 편 이지누의 폐사지 답사기
이지누 지음 / 알마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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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짝하지 마라

무심이면 마음이 절로 편안하리

마음과 짝한다면

자칫 그에게 속으리(281, 혜심)

 

'마음'에 어떤 상을 지어 놓고는, 자기 마음이라고 강하게 믿지 말라는 말일까?

제 마음이 무언지도 모르면서,

제 마음이라고 우기는 것이 중생이다.

 

분별하거나 머뭇거리면 바로 깨달음과는 멀어지고 만다.

이러한 보리의 세계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높고 낮음을 스스로 이미 깨닫고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할까?

이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스스로에게 되비쳐봐야 하는 것이니,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세상에 혼자 해야할 일, 너무나 많다.(283)

 

속인들은 화려한 것, 멋지고 귀한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지누는 폐사지를 찾아 나선다.

그러면서 만나는 아침 동살(새벽에 동이 틀 때 비치는 햇살)을 만나고,

지저귀는 새소리나 흐드러지게 떨어진 붉은 꽃무덤을 만난다.

그 사소한 곳에서 속세의 가치와는 다른 '화엄'의 세계와 '진리'의 소리를 맞는 이야기다.

 

그렇게 아무것으로도 치장하지 않은 채

당당히 갈 수만 있다면 삶이라는 것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 것이며,

비록 산다화가 나무에서는 떨어졌지만

그래도 꽃인 것은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겨우내 푸른 잎을 잃지 않는 강인함과

찬바람 쌩쌩 불고 휜눈 펄펄 날리는 속에

붉디붉은 꽃을 피워내는 용기,

살아서 정열의 색을 뿜어내더니 떠날 때도 낱낱의 꽃잎으로 흩어지는 나약함을 보이지 않으며

통째 떠얹고 말지 않던가.

그 때문에 그가 잃어버리지 않은 것은 아름다움이다.

전체로 살고 전체로 죽기 때문이다.(278)

 

영암, 강진에서 만나는 폐사지들은 경상도나 충청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풍정을 보여준다.

운주사로 대표되는 불사들은

곳곳에서 돌장승으로 나투기도 하고,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석수의 솜씨인 듯 투박한 부처님들을 만나는 길로 이끈다.

그리고, 그 치장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진한 믿음과 신앙을 돋보이게 하는 것을 말로 보여준다.

 

절터에 석양이 비칠 무렵

홀로 남은 석탑이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탑 돌에 남아있는 아무리 얕은 주름이나 작은 구멍일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낱낱이 드러내지 않던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과연 일찍 다다른 절터에는

햇살이 가득하고 탑은 은은한 막바지 햇살을 듬뿍 받고 있었다.

돌들은 모든 강렬함을 잃어버린 듯 온화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니

그 아니 아름다웠겠는가. 그래도 기다렸다. 탑이 더욱 부드러워지기를.

20분, 30분, 탑은 거짓말처럼 온화함을 넘어 평화로움까지 보여주었다.

맑은 하늘과 저물어가는 투명한 햇살 때문이었다.

투명한 햇살은 탑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탑에 조금씩 묻어 있는 것만 같았다.(255)

 

사진 찍는 이들은 해가 중천에 뜬 대낮에는 출사하러 다니지 않는다 한다.

해가 뜨기 시작하는 동틀 무렵부터

해가 아주 낮게 비추어 그림자가 길게 끌리는 아침이나 저물녘이 사진의 빛에는 축복인 시간이라 한다.

그걸 사진으로 찍는 이는 쉬우나 이지누처럼 말로 옮기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다.

그의 글을 읽는 일 역시, 하나의 축복이다.

 

봄의 해가 돈오라면 가을 해는 점수에 가깝다.(24)

 

이렇게 해가 확연히 떠오르는 순간을 '돈오'의 순간에 비기고,

차츰차츰 변화를 보이는 모습을 '점수'의 시간에 비기는 수사는 폐사지에서 묻어온 바람 내음이 그윽한 그가 아니고서는

잡아내기 힘든 말들이다.

 

사문이 운문선사에게 묻는다.

나무가 시들고 잎이 떨어지면 어찌 될 것이냐고...

선사는 답한다.

바위가 드러나고 바람이 빛날 것이라고...

수조엽락이면 체로금풍이다...(81)

 

인간은 언젠가 시든다.

시들어 떨어지고 나서 빛나는 골기와 향기를 닦을 노릇이다.

제 마음에 속아서 휘달리지 말고...

 

탑은 큰 골짜기에서 마치 귀양살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막한 산중에 홀로 위리안치 되었지만 가시나무가 아닌 갖가지 봄꽃으로 둘러싸였은

그런 귀양살이라면 나인들 마다할 까닭이 없을 것 같다.

버거울 만큼 아름다운 정경이어서 내 속의 둔탁한 미감이나 성긴 감성으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을 정도다.

더구나 봄 햇살마저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있으니,

아무리 정신을 곧추세우려 해도 허물어질 뿐 다잡기가 만만찮다.(194)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 하고 감탄하고 셔터를 누르기는 쉽다.

그것을 이렇게 말로 잡아내는 솜씨는 이지누의 재주다.

 

참선하는 자는 몸을 돌아보지 말고

유성이 흐르듯이, 불꽃이 튀는 듯이 수행해야 한다.(209)

 

무슨 일이든, 주변을 살피고 겁을 먹으면 한 발도 떼기 힘든 노릇이다.

유성이 주저하지 않고 흐르듯, 불꽃이 머뭇거리지 않고 튀듯, 그렇게 살라는 말로도 들린다.

영암의 신령스러우면서도 정겨운 바윗돌들을 보면서 산엘 오르고 싶어졌다.

 

산그림자가 두터워질 무렵,

탑을 등지고 마애불마저 등지고 앉으니

영산강이 붉은 노을빛을 한껏 머금은 채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못본 듯, 홀연히 짐을 챙겨 떠나고 말았다.

이내 찾아올 어둠보다 조금씩 짙어지는 노을이 두려웠던 탓이다.

나는 그 가혹한 장면을 견디지 못하다.

어느덧 십여 년.

월출산에서 마주한 노을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이...

십여 년이나 지났지만 사십 여년이 지났어도 잊히지 않는 소년의 첫사랑과도 같이,

그 장면은 끈질기게 내 속에 남아 있다.

그러니 서둘러 떠난 까닭은 두려울 만치 아름다운 그와 다시 맞닥뜨리면

넋이라도 그곳에 두고 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228)

 

이런 성정으로 세상을 편히 살 수 있을까?

세상의 폭력적인 직선과 편견에,

마음과 마음들에 얼마나 생채기를 많이 입고 살았을 것인지...

하긴, 그런 성정을 다스리려니 이렇게 사진기 둘러메고 산야를 누비는 건지도 모른다.

 

 

붉디 붉은 산다화 몇 송이가 홀연히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툭, 자유낙하의 쏜살같음.

그 뿐이다.

뒤이어 꽃들이 더러 떨어졌지만, 그들은 아주 떠나버린 것이 아니다.

제 몸을 던제 깨달음을 구하는 방신참법인가.

새벽의 적막을 깨트리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꽃들은 제 몸을 던져 또 다른 아름다움을 베풀었다.

그들을 두고 어찌 꽃이 피어쓸 때만 꽃이며 졌을 때느 꽃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그들은 이미 꽃이었으며 아직 꽃이다.

그러니 꽃 피는 것만 좋아할 일이 아니며 꽃 지는 것 또한 슬퍼할 일이 아니다.

 

공명이란 하나의 깨질 시루이고

사업이란 이루고 나면 덧없는 것

부귀도 그저 그렇고

빈궁 또한 그런 것.(268-9)

 

산문도

시도

사진도

모두 처연하게 아름답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현실 세계에서 엇나간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허나, 그것이 그의 글이 가진 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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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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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책 중 <느낌의 공동체>를 참 감명깊게 읽었다.

어쩜 그렇게 책에 대한 비평을 쫀득쫀득 맛깔나게 읊어대는지... 그의 재능에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어 첫 비평집, <몰락의 에티카>를 집어들었는데...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글이 많이 부드러워졌구나... 독자의 식성에 맞게 많이 발효를 시키고 소화를 돕도록 애를 썼구나...

이런 생각을 했더랬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이 책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란 좀 역설적인 제목에서와 같이,

영화에 대한 평론인데, 도대체 독자의 소화 기관을 생각해주는 요리사인가 싶을 정도로... 머리가 아프다.

 

일단, 책에 대한 리뷰든, 영화에 대한 그것이든, 모든 사람이 책이나 영화를 접하고 그 줄거리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글을 쓰면 안 된다. 더 많은 독자들이 그 리뷰에서 다루는 소재에 대하여 낯설 경우가 많을 것이고, 그러면 우선 부드럽게 전채요리로 위장을 준비운동을 시켜줘야 할 것이 아닌가. 줄거리나 등장인물의 특징에 대하여 개설적으로 설명을 해주는 것이 좋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코스 요리의 본 요리가 나온다면, 적어도... 아주 친절하고 고객에게 최선을 다하는 안내자라면, 이번 요리의 주된 음미 방법에 대해서 점잖게 안내해 주면 조히 않았을까? 이번 요리는 아주 귀하다는 000산 달팽이 요리로서, 어떤 방식으로 조리를 하고 감미를 하였사오니~ 이렇게 음미해 주시면 좋을 것이라는 말처럼, 이 작품을 분석하기 위하여 나는 이러이러한 철학적, 심리학적, 문학적 분석의 틀을 가져오려고 한다. 그런 분석틀의 기본 개념은 이러이러한 것이다~ 뭐, 이렇게 요점 정리도 해주었더라면, 좀더 친절한 요리사가 되지 않았을라나 싶은 것이다.

 

아무리 고급 식단의 코스 요리를 제공하더라 해도, 조선 사람 입맛에는 걸쭉한 숭늉으로 마무리를 하여야 제맛이고, 고기를 먹어 입안에 기름기가 텁텁할 때는 배를 씹음으로써 양치의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상큼함이 있으면 화룡점정이듯, 영화에 대하여 설명하는 글이라면, 적어도 영화의 화보나 주요 장면들을 좀 큼직하게 화보로 제공할 수도 있는 일 아니냐는 것이 입맛 까다롭거나 성깔 별로인 손님이 투덜댈 수 있는 불평일 수도 있다.

 

내러티브 비평이란 고작해야

"영화의 줄거리와 메시지에 붙이는 자의적 코멘트"라는 인식을,

신형철의 글은 차곡차곡 뒤엎었다.

청탁한 날부터 고대한 그 광경을, 나는 질투를 누르며 바라보았다.

신형철의 영화 서사론을 읽는 나의 즐거움은 희미한 유대감으로 배가됐다.

어떤 부류의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겐,

정확하고자 하는 노력이 사랑이다.(김혜리, 뒤표지)

 

물론 '고작' 내가 기대하는 수준의 글을 뛰어넘는 글을 읽고 이렇게 질투를 누르며 쾌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하고자 하는 노력>이 '사랑'일 수 있다는 말에 백번 공감하더라도,

'사랑'한다면, 좀더 상대방을 배려하는 문체를 구사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랑'은 정확하기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상에도 고개를 끄덕여 주는 공감이 더 가까울 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제목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도 공감하기 어렵다.

'사랑'과 '실험'은 근본적으로 출발점이 다른 것이다.

'사랑'은 어디서 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사랑'은 싹트지 않는가.

그러나 '실험'은 명백히 '어디서 왜 어떻게' 시작하는가를 조건지어두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험의 결과는 예상과 합치되기도 하고 불일치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실패라고 하지는 않는다.

사랑과 실험 어느 것도 '정확'과는 어울릴 수 없다.

<희미한 착각과 화려한 오해>의 감정이 난무하는 '사랑'과 <온갖 조건의 변수에 따른 결과의 변동>이라는 '실험'의 세계는,

혼돈 그 속에서 찾아보는 일말의 '질서' 같은 것을 공유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정확'이 뿌리내릴 자리는... 글쎄다.

 

<설국열차>의 마지막...

이렇게 결론을 맺자. 이 영화에서 마르크스의 기차는 이상한 곳에 정확하게 도착했고,

프로이트의 기차는 정확한 곳에 은밀하게 도착했다고.(172)

 

이 영화의 원작 만화를 보면, 영화처럼 스토리가 중요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스토리를 강조하여 보면, 마르크스처럼 혁명에 중점을, 프로이트처럼 무의식에 중점을 두게 될는지 몰라도,

원작은 '도착'에 중점을 두고 만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도착'에 대한 중점에 동의하기 어렵다.

 

<조제...>와 <러스트 앤 본>의 마지막...

이제 여기서는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잃게 요약해 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26)

 

욕망과 사랑을 대비하는 문장치고는 제법이다.

그렇지만, 조금 더 유연하게 표현해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아쉽다.

 

<정확한 문장>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

그러나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다.

결국 문학은 언제나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

('근사하다'는 칭찬의 취지는 꽤 비슷한 상태)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완전히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27)

 

언어뿐만 아니라, 영화의 문법 역시,

정확하게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근접하기 힘들다.

그의 이 책이 그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지침이 돼줄 것인지는... 독자의 몫이다.

홍상수와 김기덕에 대한 그의 비교는 제법 재미있다.

 

욕망과 관련해서,

김기덕은 몸의 실패를 다루고,

홍상수는 말의 실패를 다루는데,

김기덕은 몸의 실패를 비관적으로 심화시키고,

홍상수는 말의 실패를 낙관적으로 다독인다.

 

김기덕에게 인간의 삶이 멀리서 본 비극이라면(그래서 뫼비우스는 대사 없는 영화)

홍상수에게 인간의 삶은 가까이에서 본 희극에 가깝다.

김기덕이 원형적 인간을 다룬다면,

홍상수는 전형적인 인간을 다룬다.

원형은 과장된 것처럼 보이고 전형은 쇄말적인 것처럼 보인다.

(쇄말 : 트리비얼리즘 :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은 탐구하지 아니하고 사소한 문제를 상세하게 서술하려는 태도를 부정적으로 이르는 말)

 

그러나 욕망의 진실은 원형에도 있고 전형에도 있을 것.

김기덕이 자신의 영화에 피에타나 뫼비우스 같은 상징적 제목을 붙인 것은 자신이 다루는 날것의 원형성을 형이상학적인 뉘앙스로 눅이는 효과를 낳고,

홍상수가 자신의 영화에 평범한 일상어나 의미없는 고유명사를 자주 제목으로 붙이는 것은 자신이 다루는 전형성이 쇄말성이라 비판당할 수 있는 여지를 미리 차단하는 효과를 낳는다.(98)

 

<그래비티> 분석을 제법 재미있다.

 

다른 영화들이 '어떻게 지구로 돌아갈 것인가'를 물을 때,

근본적으로/급진적으로 '왜 지구로 도아가야만 하는가'를 묻는 영화.

(카뮈는 왜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가...가 철학의 유일한 근본 문제라고 했다.)

 

여성성이 거의 고가된 한 여성(라이언 스톤, 이름조차도 남성적인)이

심리적 자아실조 상태에서,

이미 죽은 사람인 그가 우주공간에서 압도적으로 닥쳐온 실질적 죽음 앞에서

역설적이게도 자기가 살아있는 사람임을 자각한다.

 

삶에는 의미가 있는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질문의 층위를 삶이 아니라 생명으로 바꾸면 생명이 긍정되는 데에는 이유같은 것은 필요없다.

살아있으니까 계속 살아야 한다.

나는 여기도 만족하지 못한다.

나쁜 질문을 던지면 답을 찾아낸다 해도 그다지 멀리 가지 못하게 되지만,

좋은 질문을 던지면 끝내 답을 못 찾더라도 답을 찾는 와중에 이미 꽤 멀리까지 가 있게 된다.(214)

 

 

다른 사람의 영화 평은 역시 시시하다.

영화는 서사가 아니라 압도적 화면과 음향, 인물들이 자아내는 감성에 따른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서사를 읽어주는 분석의 틀이 일률적으로 영화의 인물들을 편가름하기 어렵다.

 

 

영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철학에 따라 다를 수도 있고, 취향에 딸 다를 수도 있다.

글쎄. 저급한 조폭 영화나 멜로물 정도가 판치는 한국 영화계의 얄팍함을 반성하도록 하기 위해

비평이 필요한 작업이기는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신형철의 '실험'이 독자의 구미에 쏙 당기지 않아 보여... 입맛에 안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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