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프레트 브렌델 피아노를 듣는 시간
알프레트 브렌델 지음, 홍은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5월
평점 :
피아노 음악을 듣는 일은
작은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공간에 가득한 명랑한 소리를 느끼는 일이다.
이 책은 피아노를 전공으로 치는 사람이 읽기에 좋은 책이다.
직접적인 연주 경험을 바탕으로
피아노와 연관된 용어들에 담긴 느낌들을 적은 책.
그런데 피아노 소리를 참 좋아하긴 하지만,
연주자는 전혀 못 되는 나로서는 많이 아쉬움이 남는다.
일반 독자들에게 피아노를 조금 배운 사람들에게 이런 서술은 좀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로는 <러셀 셔먼, 피아노 이야기>가 참 좋았다.
간혹 피아노 연주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나오지만,
알파벳 순서로 A~Z까지 나열한 방식이라든가,
좀 뻣뻣한 설명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크레셴도를 통해 정확히 통제된 호흡으로 점차 물결이 퍼져나가듯 연주할 수 있습니다.
혹은 갑작스럽게 티어나온 지점부터 시작해서 더 끓어오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굴곡은 크레셴도의 긴장감을 특히 높여줍니다.
하지만 높은 정상을 향해 뻗어나가는 크레셴도는 날카롭고 뾰족한 것이 아니라 넓고 풍성해야 합니다.(44)
난 이런 비유를 사랑한다.
점점 세게 연주하라는 크레셴도를 물결 퍼지듯, 끓어오르듯,
그러면서도 날카롭고 뾰족하지 않게, 넓고 풍성하게... 해야 한다는 느낌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고대의 개념으로 레토르(연설가, 수사가)는 가르치고 감동을 주고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해석자는 곧 레토르입니다.
때문에 청중에게 기준을 제시해야지 그들에게 질질 끌려가서는 안 되지요.
또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해야지 자신의 감정을 쭉 나열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연주자는 음악이 요구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냉정하면서 쾌활하고,
익살스러우면서 반어적일 수 있어야 합니다.(82)
피아노 연주자는 청중에게 대화를 나누듯, 쾌활하고 익살스럽게, 냉정하고 반어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는 말.
연주에는 '고요' 역시 포함된다.
고요는 음악의 기본입니다.
우리는 음악의 앞, 뒤, 안, 아래, 뒤에서 고요를 발견합니다.
많은 작품들은 고요로부터 음악적 형상을 빚어내고 고요 속으로 회귀하지요.
고요는 모든 음악회의 근간을 이루기도 합니다.
아니, 그래야만 하지요. 영어에는 listen = silent 라는 흥미로운 글자놀이가 있습니다.
청취와 고요는 동일하다는 의미지요.(162)
악보를 연주하는 것과 쉬는것(휴지)의 관계는 상보적이다.
연주 시간과 고요는 서로 아름답게 녹어들어야 한다.
고요로부터 나와서 고요 속으로 회귀하는 음악적 형상.
트릴은 우아하거나 불안할 수도 있고, 신비하거나 무시무시하고,
미소짓거나 위협할 수도 있고, 순수하거나 매혹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트릴에는 천사의 트릴과 악마의 트릴이 있습니다.
피아니스트는 트릴의 속성에 대해 파악을 한 다음에 분명히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대로 우연에 내맡겨서는 안 되지요.(175)
꾸밈음 같은 트릴의 속성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식물, 성장하여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화, 발전해 나가는 식물을 떠올려 보세요.
아니면 찰흙으로 빚은 한 인간의 맥박이 뛰고 숨을 쉬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그의 박동은 계속되고 숨은 이제 생명을 지탱하는 수준을 넘어 몸 전체를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로 이어줍니다.
이처럼 큰 호흡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연주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아름다운 과제랍니다.
우리는 첫 음부터 마지막 음에 이르기까지 작품 전체를 인도해가는
작곡가의 능력을 드러냄으로써 그의 위대함을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203)
연주는 창조다.
마치 생명체가 호흡을 시작하듯,
무기물인 음표와 쉼표들 사이에, 생동하는 유기적 생동감을 주는 일.
이것이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일이다.
음악을 연주하는 일,
그리고 듣는 일은,
모두 창조의 순간에 관여하는 일이어서 환희를 느끼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