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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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

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

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중)

 

남의 자서전을 쓴 경험이 묻어 있다.

철저히 남인데, 그 경험은 전이된다.

 

가슴 벅차고 설레는 주말이었다.

몇몇 치졸한 자들의 옹졸한 잡소리는 다들 비웃고 말 정도의 무게였다.

 

 

 

푸른 빛으로 ㅁ 을 그린 구절은 '서로 사맛디'이며

붉은 빛으로 ㄱ 을 그린 구절은 '맹가노니'였으니

남북의 음양의 태극을 상징하고 문재인과 김정은의 이니셜이기도 한 구절을 합해 읽으면

서로 통하게 만들자~는 의미가 되었으니, 이런 것이 창의적 메타포가 아닐까...

 

찬비로 흰 속옷을 적시던 시절을 지나

이제 당신들의 이름으로 며칠은 든든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행복한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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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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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에 대학을 들어간 내게, 세상은 도깨비판이었다.

세상은 그대로건만 84년까지의 눈과 85년부터의 눈은 정반대를 보게 되었다.

뉴스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들을 듣고 보며, 찾고 지향한다.

 

이 책은 박정희의 긴급조치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기록이다.

청춘의 빛나는 시간들은

감옥과 포승줄로 녹슬어갔다.

결국 식탐만 남은 영초언니를 읽으면서 세상의 팍팍함에 치를 떨게 된다.

 

독신으로 살아라

똑똑하고 잘 배운 여자는 좋은 직업을 가지게 되니 굳이 결혼할 필요가 없다.

남자에게 의지하지 말아라.(41)

 

이런 어머니에게서 자랐지만,

미욱한 결혼을 하고 이혼도 한다.

삶이란 의지보다 큰 어떤 기운으로 살아지는 것일 때도 많다.

 

2016년 겨울,

최순실이라는 그 여자가 민주주의를 중얼거린 시기,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라는 영화 제목을 떠올린 촛불의 바다를 건너왔다.

 

아직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지만, 변화의 물결은 세상을 휩쓸고 미래로 흐른다.

1주일 후면 남북 정상회담을 하게 되고,

휴전 협정을 평화 협정으로 바꿀지도 모른다.

일본과 해저 터널로 기찻길을 놓게될지도 모르고,

우리는 더이상 섬나라가 아닌 세상을 살 수도 있다.

 

영초언니들이 살았던

캄캄한 어둠은 조금씩 밝아오고 있다.

다행이다. 촛불로 밝힌 밤들이

환한 태양을 기다리는 새벽이 되어 다행이다.

아직 어둠 속에서 번득이는 세력은 강고하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던

이육사의 탄식이 오버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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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꿈 산지니시인선 4
조향미 지음 / 산지니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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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마음에 남는다.

사는 일,

한낱 꿈이런가...

 

그이가 아팠나보다.

하긴 나보다 나이 좀 더 많으니, 이제 노인의 몸이다.

 

마음이 쭈글쭈글해졌으면

나른하게 납작하게 시들어갔으면

꽃잎은 이우는데 낙엽도 지는데

시들지 않은 마음은 하염없이

뻗쳐오르고 시퍼레지고 벌게지며

이렇게 푸드덕거리며 기세등등할까

그만 고운 먼지에 싸여

하야니 핏기를 잃고

쭈글쭈글 주름이 잡혀서

더 이상 출렁대지 않고 들끓지 않고

조그맣고 동그랗게 여위어져서

소리도 없이 툭 떨어졌으면(이 가을, 전문)

 

가을은 나이듦의 유추고,

말라감은 자연스러움의 소치다.

인정해야하는데, 중력을 거스르는 화장품 광고는 너무 요란하다.

 

내 손가락은

우주의 나뭇가지다

모락모락 끊기지 않는 이 생각도

신이 피워올린 연기다(한 몸, 부분)

 

나의 오늘은

남은 날들 중 가장 젊은 날이다.

오늘 나의 신비로운 몸을 묵상한다.

 

너 정말 안 되겠구나

나도 이제 손들었다

쇠도 아닌 사람에게 노인도 아닌 아이에게

독화살로 쏘아보낸 말들

그 무명의 불경

사막에 와서 참담히 무릎 꿇는다

쉿,

외경을 배운다(쉿! 부분)

 

고비사막에서 낡은 차가 섰을 때

승객들은 물었다. 당연하게도.

갈 수 있냐고, 고물이라고...

그때, 서른다섯, 기사 아내 보드마르의 말,

차에도 귀 있어요...

 

혁신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둘러앉는 일

다함께 둘러앉을 시간과 공간을 만드는 것이

혁신과 행복의 첫걸음이었습니다

수업도 모둠 수업

회의도 원탁 회의

 

학교 텃밭에 둘러앉아 삽겹살을 구웠고

밥집 술집에 둘러앉아

웃고 떠들며 논쟁하고 고민했습니다.

교사들 둘러앉은 자리 기승전결은 언제나 아이들

엎드린 아이 홀로인 아이 외면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한명의 아이도 배움에서 소외시키지 않을까

 

시고 떫은 날들도 많았으나

어김없이 수요일은 돌아오고

둘러앉았으므로

서로의 눈빛 읽고 마음 열어 갑니다

홀로 꿈꾸고

오래 좌절해본 사람은 압니다

무엇도 혼자 이룰 수 없다는 것

낮과 밤처럼 달라 보이는 너와 나도

함께 이어져 있음을 서로에게 스며들 수 있음을

백짓장도 맞들면 낫고

한 사람의 백걸음보다 백사람의 한걸음이나

둘러앉아 행복을 배웁니다

둘러앉은 가장자리 밝고 따뜻합니다(둘러앉는 일, 부분)

 

학교에서 나이드는 일은

톱니바퀴가 되어

그저 모두 도는 리듬에 맞춰 도는 일...

 

일주일은 금세 가고,

그러노라면 한 달이 가서 중간고사, 또 기말고사, 그리고 방학

또 중간고사, 기말고사, 학예전과 방학, 진급과 졸업...

 

나도 이러기를 올해로 30년차다.

생각하지 않고 이야기나누지 않고

파편으로 사노라면

삶이 너무 팍팍하다.

 

그처럼 봄꿈을 꾸며 살아야 할 노릇인데...

이렇게라도 일깨워주는 시집이 있어 감사하다.

 

89. 생때... 생떼로 써야 맞다.  뿌리가 흙에 심긴채 있는 잔디를 떼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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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문학동네 시인선 101
문태준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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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이 앞에 있으니 좋다.
한파를 겪은 생명들에게 그러하듯이.
시가 누군가에게 가서 질문하고 또 구하는 일이 있다면
새벽의 신성과 벽 같은 고독과 높은 기다림과 꽃의 입맞춤과
자애의 넓음과 내일의 약속을 나누는 일이 아닐까 한다.
우리에게 올 봄도 함께 나누었으면 한다.
다시 첫 마음으로 돌아가서
세계가 연주하는 소리를 듣는다.
아니, 세계는 노동한다.(작가의 말)

 

비님이 오신다.

오랜만에 오시어

메말라 터진 대지를 위무해 주시니

좋다.

참 좋다.

 

대지는 '앓고 난 후에

말간 죽을 받은' 아이처럼

침없이 웃으며 비님을 받는다.

 

비님은

'흰 미죽(糜粥)을 떠먹일 때의 그 음성으로'

차갑게 굳은 아스팔트를 적신다.

누군가의 서럽던 눈물도

누군가의 욕망의 액즙도

또 누군가의 수고로운 땀방울에도

아... 그리고 높은 곳에서 속절없이 떨어져

비인간이 된 누군가의 핏자국도

 

어루만져 주시는

비님이 내리신다.

위로나 적선의 속내도 없이

비님은 오신다.

 

 

흘러오는 내처럼

긴 예문(괴석, 부분)

 

그의 시는 고요한 응시로 변화하고 있다.

침잠한 기도 속으로

하염없이 들어간다.

 

뜨겁기보다는 뭉근한 언어로 가득하다.

뜨겁게 좋지는 않지만

뭉근한 온기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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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 사전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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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자로 된 이름을 가진 사람은

왠지 좀 다부진 느낌이다.

외자로 된 우리말의 단어들의 다양한 용례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풍요다.

이런 책을 가만히 읽는 일은 심신에게 축복이다.

그의 전작, 마음 사전이 처음이어서 마음 두근대게 했다면,

이번 자매편은 또 다른 울림을 준다.

 

마음 사전이, 정말 오래오래

궁글리고 곱씹어 첩첩 쌓아간 작품이라면,

한 글자 사전은, 조금 허술해 보이긴 하는데,

그래도 그 내공을 엿보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덜- 가장 좋은 상태

 

무언가 '덜' 된 것의 설명이다. 더 말이 필요 없기도 하다. 절묘하다.

 

때 - 이것을 만나는 것을 행운이라고 하고 이것을 맞추는 걸 능력이라고 한다.

 

이렇게 용례에 따라 사람들의 심리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 재미있다.

행운은 외부적 요인이 크고 능력은 내부적 요인이 큰데,

조금은 다른 뉘앙스가 인간의 심사를 비춰주어 재미를 준다.

 

씨 -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쪼개어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심고 물을 주어 알아내는 것

 

이 문구가 책 앞부분에도 있는데 좋았다.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통행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 소통하는 심사숙고가 비춰졌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에서, 사람 만나는 직업에서 유념할 생각이다.

황금알을 낳으라고 배를 가르면 거위는 죽는다.

아이들 역시 씨앗이다.

 

삯 - 값과 비슷하지만 쓰임이 다르다.

버스삯은 버스를 타는 데 드는 비용이고,

버스값은 버스를 사는 데 드는 비용이다.

사람은 그러므로 값으로 매길 수 없고 삯으로는 매길 수 있다.

 

일을 시키면 품삯을 준다. 사람의 값은 매길 수 없다. 귀한 말이다.

 

설 - 설늙은이가 왼갖 풍설로 잔소리를 늘어놓고

설마했던 지난 가족사를 섣불리 발설하며

설익은 며느리는 등을 돌려 설거지를 하는

설레며 찾아온 고향이 설어서

설움이 설핏하기도 하는 새해 첫 하루

 

곧 설이다. 서러운 역사가 담긴 시다.

 

시 - 1. 이미 아름다웠던 것은 더 이상 아름다움이 될 수 없고,

 아름다움이 될 수 없는 것이 기어이 아름다움이 되게 하는 일.

2. 성긴 말로 건져지지 않는 진실과 말로 하면 바스라져 버릴 비밀들을

 문장으로 건사하는 일.

3. 언어를 배반하는 언어가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

 

시를 정의할 수 없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배반하고 달아나는 말을 구태여 잡으려는 애씀의 흔적.

 

얼 - 얼이 모자라면 얼간이, 얼이 설렁설렁하면 얼치기, 얼이 물렁물렁하면 얼뜨기,

얼간이는 얼굴에 쓰여있고, 얼치기는 얼굴에 철판을 깔며, 얼뜨기는 겁에 질린 얼굴을 한다.

얼간이는 일을 얼버무리고, 얼치기는 일을 얼렁뚱땅 하며, 얼뜨기는 일에 얼쩡얼쩡 한다.

그리하여 얼간이는 일을 얼크러뜨리고, 얼치기는 결과에 얼토당토 않게 굴고, 얼뜨기는 상황 파악은 못하지만 잘못됐다는 결과만 알아채므로 얼얼해진다.

 

언어 유희도 이만 하면 멋있다.

 

왜 - 왜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라는 질문에는 왜 학교를 다니나요? 라는 반문이 가장 현명하고,

왜 결혼을 안 했어요? 라는 질문에는 왜 결혼을 했어요? 라는 반문이 가장 현명하며,

왜 아이를안 낳았어요? 라는 질문에는 왜 아이를 낳았어요? 라는 반문이 가장 현명하다.

 

사람들은 자기가 '별 생각 없이 얼떨결에, 어쩌다 보니 그렇게' 한 행동에 대해서 강한 이유를 가진 듯 행동한다.

그 이유를 물으면, 사실 할 말이 별로 없다. 그런 게 인생이고, 그런 게 사람이다.

 

운 - 편파적이어서 배가 아프곤 하지만

이것은 거품이지 거름이 아니다. 지속성이 없다.

 

운이 좋은 사람에겐 샘이 난다.

운은 지속성이 없으니 거품같은 거라 여기면 된단 생각이다.

 

짝 - 짝이 있는 물건은 짝이 사라지면 짝짝이가 되어버린다.

양말, 신발, 장갑, 그러나 짝이 있는 신체는 자세히 보면 모두 다 짝짝이다.

눈, 귀, 손...

 

그러게나. 있던 것이 사라지면 '짝'에서 '짝짝'으로 늘어나는 재미라니...

세상에 짝짝이 아닌 것은 없다.

 

티 - 가난함은 티가 나고 부유함은 티를 낸다.

 

세상 이치가 그렇다.

감출 수 없는 가난함과

뻐기고 싶은 부유함의 대조를 '티'에서 맞대니, 절묘하다.

 

폐 - 폐가 될까 걱정하는 것이 사람다움이다. 폐가 폐라는 걸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폐가 된다.

 

폐끼치지 않기는 참 어렵다.

머리도 좀 받쳐줘야 하고, 마음도 여유로워야 하고, 인정도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이 하나도 없는 인종이 '적폐'다.

 

혼 - 충격을 받으면 혼이 나가고

사랑에 빠지면 혼을 뺏긴다.

억울하게 죽으면 혼이 떠돌고,

뚜렷한 입장을 끝까지 관철하면 혼이 담긴다.

 

적어두고 싶은 구절은 참 많지만,

꽤 괜찮은 울림을 주는 구절들만 사진으로 남겨 두었다 기록한다.

 

마음산책에 맞춤한 책이다.

표지에 <한 글자도 가능하다!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생의 감촉>이란 소개글을 작게 붙였는데,

저렇게 느낌표 붙이지 않아도, 김소연이란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소개가 된다.

 

앞표지에 <2018년 앞겨울>이란 구절과 저자 사인이 들어있다.

앞겨울이란 말이 참 맘에 든다.

한 해에 겨울은 두번이니 말이다.

 

올해 앞겨울은 참 추웠다.

뒷겨울까지 또 한해를 벅차게 살아내야 하겠지만,

속상한 날도 있을 게다.

봄여름 가을겨울로만 살지 말고,

앞겨울 뒷겨울 나누면서 좀더 여유롭게 사는 재미도 가르쳐 주었다.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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