훤 시조 신화


"설화에서 동물이나 식물이 모두 인격을 갖고 있어서 인간과 같이 대화를 하고 교제를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많은 이야기라 분포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에도 상당히 많다.
견훤의 탄생신화는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다. 뱀은 사신(邪神)이다. 뱀은 사기(邪氣)와 기력(妓力)으로 한때 인간의 숭상을 받았다. 지렁이도 같은 유에 속한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설하고 삼국통일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런 신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 신화는 역시 시조신화에 속한다. 견훤의 출생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견훤이 상주 가은현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견훤이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설화를 적고 있다. 견훤신화는 오랫동안 망국의 한을 되새기며 살아온 백제 유민들로 하여금 하나의 구심점이 될 만한 영웅의 출현을 기다렸을 것이고, 이런 민중의 마음을 헤아린 견훤으로서도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신이적인 출생담으로 영웅화를 시도했다.
이러한 출생담은 선화공주와의 로맨스를 가진 서동설화를 비롯하여 몇 가지가 더 전해지고 있다."

    옛날 광주 북촌땅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얼굴과 맵씨가 뛰어나게 아름다웠다. 그뿐 아니라 모든 행실이 바르고 단정했다.
    그는 어느덧 성숙한 나이에 이르렀는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매일 밤 낯 모르는 사내가 자주빛 옷을 입고 부잣집 딸이 잠자는 방에 살며시 들어와서 자고 이튿날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부잣집 딸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다시는 사내를 맞이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막상 자주빛 옷을 입은 사내를 보면 그의 빼어난 용모에 반하여 그를 맞이하곤 했다. 그런데 그 사내는 언제나 자기의 이름과 사는 곳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 부잣집 딸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일까? 이러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지.'
   부잣집 딸은 이렇게 생각하자 부끄럽기도 하고 두려운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렇다고 누구하고 상의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부잣집 딸은 혼자 가슴을 태우다가 그런 일이 자주 있게 되면서 부모에게 마저 숨기고 있을 수는 없었다. 사실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다. 더구나 사내의 정체를 알 수 없으니 더욱 엄청난 일이었다.
   
부잣집 딸은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마침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의 아버지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말했다.
   "아버님, 저의 경솔한 점을 꾸짖어 주옵소서. 아버님께 아뢸 말씀은 밤마다 자주빛 옷을 입은 한 사나이가 제 방에 들어와 저와 교혼하고는 새벽에 몰래 나갑니다."
   부잣집 딸은 어떠한 벌도 달게 받으리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딸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놀랐다.
   '도대체 어느 놈의 짓일까? 어쨌든 일은 크게 벌어졌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자주빛 옷을 입은 사내는 사람일까, 귀신일까.'
   이렇게 생각한 그는 우선 사내의 정체부터 알아보자고 생각하다가 묘안을 생각했다.
   "오늘밤에도 그 놈이 나타나거든 바늘에 실을 꿰어 두었다가 몰래 그 놈의 옷자락에 찔러 두어라."
   딸의 아버지는 딸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몇 번이나 단단히 일렀다.
   이윽고 밤이 되었다. 캄캄한 밤에 자주빛 옷을 입은 사내는 부잣집 딸이 있는 방으로 서슴지 않고 들어왔다. 부잣집 딸은 그의 아버지가 시킨대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실을 꿴 바늘을 사내의 옷자락에 몰래 꽂았다. 그러자 사내는 깜짝 놀라는 듯 하더니 문득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날이 밝자 부잣집 딸의 아버지는 딸의 방에서 풀려나간 실을 따라 나섰다. 그 실은 뜰을 지나 북쪽 담장 밑에 이르러 보이지 않았다. 부잣집 딸의 아버지는 담장 아래를 샅샅이 뒤지었다. 그랬더니 그 실은 바로 담장 밑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는 얼른 두 손으로 파보았더니 커다란 지렁이 한 마리가 나오는데 바늘은 바로 그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밤마다 부잣집 딸의 방에 찾아온 사내는 다름아닌 지렁이의 화신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 부잣집 딸은 잉태하여 마침내 사내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생김새나 행동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거기다가 신기로운 일도 많았다. 아이가 젖먹이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밭에서 일하는 아버지에게 밥을 가져 가는 동안 젖먹이 아이를 수풀 아래에 두고 가면 어디서 왔는지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와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이의 나이 열 다섯 살이 되자 그는 스스로 견훤이라고 불렀다.
   아이는 점점 자라면서 몸집이 남달리 크고 건강했다. 그리고 그가 품은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서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그는 군인이 되어 서울에 들어왔다가 서남해로 가서 해안 수비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창을 베고 누워 적군을 기다릴 만큼 그의 기개는 항상 다른 사졸들을 앞질렀다. 이때에 이룬 공로로 그는 한때 비장에까지 올랐다.
   신라 진성왕 재위 6년이었다. 몇몇 왕으로부터 총애받는 자들이 왕의 측근에서 국권을 농락하기 때문에 질서는 문란해졌다. 거기다가 마침 기근이 들어서 민심은 흩어지고 사방에서 도적이 일어났다.
   이를 본 견훤은 많은 무리를 이끌고 서울 서남쪽의 고을들을 공략하고 다녔다. 이때 견훤이 가는 곳에는 어디서나 백성들이 호응해 와 드디어 그는 후백제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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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의 원한

 


이와 비슷한 설화는 우리나라 각 지방에서 전해온다. '장화홍련전'과도 밀접하다. 중국에는 '해랑전설'이라 하여 이런 유의 전설이 많다.
   그런 것을 보면 '아랑의 원한'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추측된다. 이런 유형의 설화로 가장 유명한 것은 밀양 영남루에 얽힌 전설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또 강릉의 해랑사에 얽힌 이야기도 있는데, 이 설화를 원용하여 변형시킨 소설로는 정한숙의 '해랑사의 경사'라는 소설이 있다.
   강원도에 해랑당이라는 사당이 있는데, 시집 못가고 죽은 처녀를 제사하는 곳이다. 이 해랑과 다른 죽은 총각과 혼인을 시킨다. 아들의 혼백을 장가보낸 과부 어머니는 그날 밤 어떤 홀애비와 또 다른 인연을 맺는다는 줄거리이다.
   우리가 유념할 것은 동일 인물명을 사용한 박종화의 '아랑의 정조'라는 소설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이다.

   
아랑의 성은 윤(尹), 이름은 정옥(貞玉)이었으며, 그는 부친이 영남(嶺南) 밀양태수(密陽太守)로 부임하였을 때에 수행하여 밀양에 갔다. 그 고을 통인(通引- 관리명)과 그의 유모 음모에 빠져서 아랑은 어떤 날 밤 영남루의 밤 경치를 보러 갔다가 통인 주기에게 욕을 당하였다.그것은 아랑이 달 구경을 하고 영남루 위에 있을 때, 별안간 유모는 없어지고 기둥 뒤에 숨어있던 주기가 뛰어 나와서 아랑에게 연모의 정을 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랑은 그것을 거절하였다. 주기는 아랑을 죽여 강가 대숲 속에 던져 버렸다. 다음 날 태수는 여러 조사를 하여 보았으나 아랑을 찾지 못하고 마침내는 자기 딸이 야간 도주한 것이라 믿고 양반 가문에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 이상 근신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벼슬을 하직하고 한양 본가로 갔다. 

그 뒤로 신관 사또가 부임할 때마다 그 날 밤에 처녀귀신이 나타나서 신관은 비명횡사하고 만다. 이때문에 밀양태수를 원하는 사람이 없어 지원자를 구하게 되었는데 이 상사(上舍- 지난날, 생원이나 진사를 가리키던 말)라는 사람이 지원하여 그 날 밤에 촛불을 키고 독서를 하고 있을 때 별안간 머리를 풀어 헤치고 목에 칼을 꽂은 처녀가 나타났다. 
그 처녀는 다름이 아닌 아랑이었다.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 원한을 갚아 달라고 나타났으나 모두들 이야기도 듣지 않고 놀라 급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랑은 모든 이야기를 한 후 내일아침 나비가 되어 자기를 죽인 관노의 갓에 앉겠다는 말을 끝으로 하직인사를 한 후 사라졌다. 이튿날 부사는 관속들을 모두 모이도록 명했다. 흰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관노의 갓위에 앉는 것이었다. 부사는 형방을 불러 그 관노를 묶어 앞에 않히도록 한 후 주기를 다스렸다. 극구 부인하던 주기도 곤장에는 어쩔수 없는 모양인지 아랑을 죽이고 영남루앞 대숲에 던진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곳에는 아랑의 시체가 원한에 맺혀 썩지않고 그대로 있었다. 주기를 죽여 아랑의 원수를 갚아 주고 난 후부터는 아랑의 원혼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고을도 태평해졌다. 그 후 아랑의 시체가 있던 자리에 비를 세우고 그 옆에 사당을 지었는데 지금도 아랑의 높은 정절을 추모하기 위해 해마다 음력 4月 16日 제관을 뽑아 원혼을 달래며 제향을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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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4-07-13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저자가 아이에게 귀신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으로, 오늘 읽고 있는 중인데, 거기에도 아랑전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네요.. 원귀 이야기의 원형이라고...  장화홍련전도 비슷한 원귀 이야기라는 글도 있는데.. 비슷한 글을 보게 되서 댓글 답니다~


꼬마요정 2004-07-14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책 재미있겠는데요~^^ 여름이라 공포스러운 이야기에 솔깃~하답니다.^^

아영엄마 2004-07-14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다지 공포스럽지는 않습니다.. 귀신 이야기에 깃든 사연을 학문적으로 풀이하는 부분들도 있거든요. 아동문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꼬마요정 2004-07-14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그래도 재미있겠어요..^^
 


방랑시인 김삿갓

홍경래난이 있고부터 15 년 흐른 뒤인 1827 년(순조 27 년) 어느 날,  강원도 영월(寧越) 동헌(東軒)에서 백일장이 열리고 있었다. 이날 걸린 시제는 홍경래난때 목숨을 바쳐 대항한 가산(嘉山)군수의 충절을 논하고 어이없이  항복한 김익순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한탄하라는 것이었다.

백일장의 장원은 삼옥리(三玉里)에 사는 약관 20 세의 젊은이에게로 돌아갔다.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명문장(名文章)의 주인공은 김병연(金炳淵),호는 난고(蘭皐). 뜬구름 같은 방랑길에 술 한잔,시 한수로 숱한 일화를 떨어뜨리고 다녔던 시선(詩仙)이자 주선(酒仙),바로 그가
김삿갓
(1807 년∼1863 년)이었다.

맨발로 뛰어나와 반겨 줄 아내와 어머니를 상상하며 삼옥리 집으로 향했을 김병연.천하를 얻은 듯 잠시 출세의 꿈에 부풀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한번 죽음은 가볍고 만번 죽음이 마땅하다'며
비방했던 김익순이 바로 그의 할아버지였다
는 사실을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삿갓쓴 내력 담긴 두메산골 삼옥리  영월읍에서 빠져나와  완택산(莞澤山) 등허리를 타고 동강(東江)을 거슬러 오르면 건너편 봉래산(蓬萊山) 아래턱을 희미하게 그은 실낱같은 외길이 애잔하게 이어진다.  예나 지금이나 두메마을 삼옥리를 세상과 연결하는길이다.이 길을 따라 청년 김병연은 장원소식을 안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걸어 들어왔으리라.

강줄기를 어루만지며 휘돌아가니 길이 끝나는 곳에 둔덕이 열린다. 삼옥리다.

널조각 같은 황토밭 사이로 드문드문 집채가 놓여 있고 그 아래로 싯푸른 강물이 산그늘을 드리우고 있다.소울음 너울대는 그저 평안해 뵈는 마을이지만 멸족(滅族)에서 폐족(廢族)으로 죄가가 가벼워지자 27세에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 함평 이씨(咸平李氏)가 어린 세아들을 이끌고 숨어든 곳이 아니던가.

장원의 기쁨도 잠시, 어머니 입을 통해 가문의 내력을 들은 그는 비통해진 심정을 회복할 길이 없었다. 가문을 일으키려는 일념으로 글을 배웠던 것이 결국 조상을 죽여 상을 타게 되었다니.

삼옥리는 `구만리 장천 높다 해도 머리 들기 어렵고 삼천리 땅 넓다 해도 발뻗기 힘들구나'(九萬長天擧頭難 三千地闊未足宣)하고 읊었던 김병연의  기구한 사연이 맺혀,
차마 하늘을 볼 수 없어 `삿갓'을 쓴
내력이 가슴아프게 전달되는 곳이다.

천형(天刑)으로도 씻지 못할 죄를 안고 아마도 김병연은 이 산골마을 삼옥리마저 등지고 와석리(臥石里)로 들어갔으리라.

향토사학자가 발견한 김삿갓 묘, 하동면 와석리는 김삿갓이 긴 방황을  끝내고 잠든 무덤과 그의 일가가 살았던 집터가 있는 곳이다.  영월읍으로 들어와 와석리행 버스를 타고 하동천을 따라 들어가는데, 이건 여지없이 [세상끝]으로 가는 길이다.

칼 같은 산이 불쑥불쑥 치솟아 오르고 마을이라고 해봐야 하천에 의지해 오롱조롱 모여 있을 뿐 물줄기는 `S'자를 그리며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사람을 희롱한다.  영월화력발전소와 고씨동굴을 지나 300 m 고지의 꼬불꼬불한 고개를 힘겹게 넘어서야 비로소 시야가 트이지만 높은 데서 내려다본 잠깐의 시원함일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일까.김삿갓은 술과 어우러진 `해학시인'으로 마냥 즐겁게 그려왔으나 불현듯 감정이 복받쳐 온다. 김삿갓과 홍경래(洪景來).  문학과 정치에서 다 같이 [혁명아]로 지칭되는 이 두사람의 운명은 어디서부터 얽힌 것일까.

이 운명에 대한 개인적 해석은 유보돼야 한다.그러나 안타까움과 다행스러움이 묘하게 뒤섞인다. 홍경래난이 없었다면 김병연은 [삿갓]을 쓰지 않았을테지만 아마도 시대를 마음껏 풍자하고 갔던 그의 걸출한 시 또한 남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버스는 와석리 [김삿갓묘 7 km]라고 씌어진 이정표 앞에다 나그네를 떨구어 놓고 무정하게 가버렸다.  할 수 없다. 영락없이 김삿갓묘가 있는 와석리 노루목까지 걸어가야 한다.  간혹 길닦는 차만이 오르내리는 한적한 꼬부랑길을 걸으니 `나는 지금 청산 가는데 푸른 물아, 너는 왜 흘러만 오는가?'(我向靑山去 綠水爾何來)하고 읊었던 김삿갓의 시정(詩情)을 반푼 정도 느낄 듯하다.

김삿갓묘가 발견된 것은 불과 18 여년 전인 지난 82 년 영월의 향토사학자였던 박영국(朴泳國)옹에 의해서였다.   그는 김삿갓묘가 `양백지간'(兩白之間),곧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74 년부터 영월땅을 샅샅이 답사, 드디어 그의 묘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김삿갓 일가가 살았던 집터도 찾아냈다.

영월에 와서 나는 그분이 제작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돌보는 이 없이 비바람에 패이고 깎여 결국 무명(無名)의 무덤이 되어  땅속으로 꺼질 뻔했던 김삿갓묘를 세상에 알린 장본인으로 생의 마지막까지 추진해 오던 3 권의 [김삿갓문집]을 눈앞에 두고 그만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김삿갓묘와 마주한 땅에 잠들고 싶었던 한 향토사학자의 김삿갓사랑은 하염없이 눈물겨운데 한국문화재단으로 넘어간 `김삿갓문집'원고는 아직 빛을 못보고 있다고 한다.

심산유곡에 떠도는 김삿갓 시혼,  쉬엄쉬엄 드디어 와석리 노루목에 이르러 김삿갓묘 앞에 덜렁 주저앉았다.  규범을 파괴했던 위인이었으니, 설마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지하에서 흉보지는 않겠지.  여러 기록에 김삿갓묘가 영월군 의풍면(儀豊面)에 있다고 했다.

이곳은 의풍과 바로 인접한 지점이다.  무엇보다 세상에 알려지기 전부터 이마을에선 김삿갓묘라는 사실이 구전돼 오고 있었다.  김삿갓묘는 크기가  과장돼 조금 거만해 보였다.   주위의 무덤들을 상대적으로 조그맣게 만들어  버린탓이다.  원래 묘 바로 앞에 집이 한채 있었지만 이것이 김삿갓묘로 알려지면서 집을 옮겨 터를 넓게 다지고 무덤을 크게  조성했다고 한다.  이 묏자리는  누구의 안목이었을까.  이 마을 신춘선(辛春善 63)할아버지는 남다른 `김삿갓론'을 갖고 있다.

"김삿갓이 글께나 배웠응께 시방 국회의원쯤은 됐어.벼슬은 내삐리고 저그 할아버지 욕했다고 빌어먹고 댕겼으니 큰 인물은 아이지.  그래도 이 묏자리 봐 놓은 거 보면 대인이야.   여기 노루목 넘어가는 고개가 버들고개라 하는데 `정감록'에 보면 태백산자락 끝에 버드나무가지에 꾀꼬리가 집을 지은  형상의 대지(大地)가 있다고 했거든.  그러니 천하 대지고 말고.   그 사람이 지리를 훤히 알고 여기 살 적에 잡아놓고 간 거야"

김삿갓이 과연 자신의 묏자리를 봐 두었을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두루 학문을 섭렵했던 그의 통찰력으로 짐작해 볼 때 충분히 수긍되는 면이 없지 않다.

여기서 김삿갓 일가가 살았던 집터에 가려면 충청도와 강원도를 가르는 작은 실개천을 건너 2 km 가량 더 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길을 따라 [아러대이  [우더대이]  그 위에 [문둥골] 이 있었으며,  김삿갓 일가가 살았던 곳은  `우더대이'  였다고 마을사람들은 증언하고 있다.

왜 김삿갓은 이 궁벽한 산속까지 들어와서 다시 세상을 향해 방랑길을 걸었던 것일까.  20 세에 벌써 인생이 허무한 것을 알았지만 촌부로 남기에 그의 젊은 가슴은 너무 벅찼는지 모른다.

익명의 명유(名儒)를 꿈꾸지는 않았을까.  비록 속죄의 상징으로 삿갓을 눌러쓰고 고행의 길을 걸었지만 과거를 지향하며 정통 한시를 익혔던 그가 출세의 꿈을 완전히 떨쳐버렸으리라 여겨지지는 않는다.

영월읍에서 수족관을 하는 박영국옹의 제자 박효상(朴孝祥 37)씨와 얘기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관동지'(關東志)에 `金炳淵'이라는 이가 1855년에서 1856년까지 원주목사를 지냈다는 기록을 얻게 됐다.  물론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더 크겠지만 그의 생몰연대에 비추어 이 시기는 김삿갓의 말년에 해당된다.

비록 그가 무애(無碍)의 자유인으로 훈장이나 세도가들을 풍자하며 해학시를 뿌리고 다녔지만 이 기록은 얼굴을 가리려고 썼던 그 `삿갓'으로  오히려더 유명해진 김삿갓이 말년에 한번쯤 벼슬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에 단초를 제공해 주었다.  김삿갓이 살았던 집터는 후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의 유명세와는  대조적으로 황량하기 그지없다.  화전이나 하고 살았을 척박한 땅에는 이제 허물어진 폐가만 위태하게 서 있을 뿐이다.냇가의 퇴락한 집은 행랑채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집뒤 공터에 김삿갓 일가가 살았다는 `8 칸집'이 있었다지만 아득히 사라졌다. 잡목만이 우거져 있다.`김삿갓' 소주가 나오고 김삿갓 운운하며 술자리는 요란하지만 그의 고뇌가 묻힌 이곳은 얼마나 쓸쓸하게 버려져 있는가.  하긴 방랑객이었던 김삿갓에게 집이 무슨 소용이랴.   문전축객 없는 `삿갓주점'의 인심  이곳까지 왔다면 모름지기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노루목골 들머리에 있는 `삿갓주점'이다. 비닐집에 불과한 초라한 주점이지만 김삿갓묘 바로 아래에 잡고 있어 그 운치는 `영월의 명물'이라고 이를 만하다.쓸쓸한 회포를 한잔 술에 풀며 시를 읊었던 한 시선의 이야기로  객(客)들의 잔이 떠들썩할 때 삿갓쓴 걸객(乞客)이 "주모!"하고 들어올 것만 같은 착각에 슬며시 빠지게 된다.


`삿갓주점'은 마을사람들이 함께 일해서 그 이익은 공평하게 나누는 이상적인 주점이었다.

아주머니왈,  김삿갓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쉬어갈 곳이 없다 해서 허름하게 지었고,  먹을 것이 없다고 해서 칡국수를 만들어 팔았고,  술이 있으면 금상첨화라 해서 동동주까지 담게 됐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마을총각한테 "죽장에 삿갓쓰고 말야, 거 김삿갓 노래 한번 불러봐라"고 한다.  꽤 멋드러지게 불러제칠 듯한데 총각은 수줍은 듯 "술이 한잔 들어가야지"하며 뒤로 뺀다.

10 가구가 모여 사는 산골마을이다 보니 이곳은 마을사람들의 사랑방이 되다시피 했고 어쩌다 방문객이 들이닥치면  자연스럽게 한데 어우러진다.  

이렇게 정다운 인심이 문전축객(門前逐客)당하던 김삿갓의 서러움을 의식한 것은 아닐텐데도 주점아래 김삿갓시비(詩碑)에 새겨진 시는 은근히 웃음을 머금게 한다.

'二十樹下 三十客/四十門前 五十飯/人間豈有 七十事/不如歸家 三十食'
(이씨발 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망할 놈의 마을에 드니 쉰밥만 주는구나/
인간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오/집에 돌아가 설은 밥 먹느니만 못하구나)
 
김삿갓에게 [욕] 은 무엇이었던가. 욕은 파괴하는 자의 것, 창조하는 자의 것이다. 욕을 함으로써 그는 세상을 비웃고 싶었을 것이다.

그 역시 당대 여느선비와 마찬가지로 정통 한시를 배웠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시의 정해진 틀을 과감하게 깨부수고 새로운 형식을 시도해 붕괴돼 가는 조선말의 시대적 혼란을 읽어냈다.

그는 시를 통해 욕을 해댔고 그의 시들은 서민들의 사랑을 차지하며  애송돼 왔다.  아마도 그것은 그 투박한 `욕'때문이 아니라 느낀 대로 시원하게 실어버렸던 시의 `솔직함'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직 방랑 끝내지 않은 시혼  세상을 마음껏 조롱하고 간 김삿갓.

전라도 화순땅 동복(同福)에서 김삿갓이 한많은 생의 괄호를 닫은 것은 57 세 되던 1865 년 3 월 29 일.  이로부터 3 년 뒤 아들 익균은 소문을 듣고 영월로 아버지의 묘를 이장했다.  살아서 붙잡지 못했던 아버지의 싸늘한 관을 메고 갔던 것이다.

그가 썼던 마지막 시 `난고평생시'(蘭皐平生詩)는 의미심장한 구절로 여운을 남기고 있다.

`돌아가기도 어렵고 또한 머물기도 어려워서 얼마나 길가에서 방황하였던고' 육신이야 양지바른 노루목에 편안히 정착하고 있지만 그의 시혼(詩魂)은 아직 방랑을 끝내지 못하고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 장성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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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7-13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나니 이문열의 <시인>이 떠오르네요.

꼬마요정 2004-07-13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시는 한번도 안 읽어봤어요 찾아서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잉크냄새 2004-07-13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아니고 이문열이 김삿갓에 대하여 쓴 소설입니다.^^ 다분히 인간적인 김삿갓을 잘 묘사한 글입니다.

꼬마요정 2004-07-13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핫. 이런 무식이 들통나다니...전 이문열이 쓴 소설은 <아가>밖에 안 읽어봤거든요..^^;;
 

 

 


 견우와 직녀
 

 



  天上(천상)의 牽牛織女(견우직녀) 銀河水(은하수) 막혀서도,
一年一度(일년일도) 失期(실기)치 아니거든,
우리 님 가신 후는 무슨
弱水 가렷관듸,
오거나 가거나 消息(소식) 조차 쳣는고."

허난설헌 <규원가> 결사 부분 (기다림, 한탄의 심정)


 

 


●약수(弱水) : 옛날 중국에 신선이 살던 고장에 있었다는 물 이름. 길이가 삼천 리가 되며 浮力(부력)이 약해서 기러기 털도 가라앉는다 함. 더구나 사람은 건너지 못한다는 물. 이별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가로 막고 있는 장애물로 많이 등장


옥황상제의 미움을 산 두 남녀, 견우와 직녀. 옥황상제는 "이제부터 직녀는 은하수 서쪽에서 베를 짜고 견우는 은하수 동쪽에서 살도록해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견우와 직녀는 용서를 빌었지만 옥황상제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대신 일년에 딱 한번 음력 칠월 칠일 한 번 만날수 있게 해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칠석날입니다.

그러나 견우와 직녀가 일 년을 기다려 만나기 위해 나왔을 때에는 은하수가 두 사람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슬프게 우는 모습을 본 까마귀와 까치들은 너무 불쌍해 곧 서로의 몸을 이어 다리를 만들어 두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었는데 이 다리가 바로 오작교입니다.

칠월 칠석날에는 주로 비가 오거나 흐린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견우와 직녀가 만나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 때문입니다. 칠월 칠석 무렵은 바쁜 농사 일이 어느 정도 끝나고 더위도 한풀 꺽이는 때라 여름 내내 입었던 옷을 빨아 햇볕에 말렸는데 칠석날 옷과 책을 말리면 일 년 내내 좀을 먹거나 상하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칠석날 부녀자들은 마당에 바느질 차비와 맛있는 음식을 차려 놓고, 문인들은 술잔을 교환하면서 두 별을 제목으로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또, 집집마다 우물을 퍼내어 청결히 한 다음 시루떡을 해서 우물에 두고 칠성제를 지냈답니다. 음식으로는 밀국수, 밀전병을 해먹고 잉어를 재료로 음식, 증편을 만들거나 복숭아, 수박으로 과일 화채를 만들어 먹었다고 합니다.



견우직녀 신화를 다시 보자

북한에 있는 덕흥리 고분에는 귀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견우와 직녀신화를 벽화로 그린 것이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견우는 염소 만한 크기의 소를 끌고 견우성을 향하여 떠나고, 직녀성이 자미원 밖에서 견우를 배웅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고구려시대의 견우와 직녀 천문도를 의인화하여 그린 천문도이다. 우리는 이 천문도를 봄으로써 고구려시대에 칠석날 칠석제를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칠석날은 인류의 조상인
나반(那盤)이 천하(天河-은하수)를 건너서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날이다.(한단고기 太白逸史 三神五帝本紀) 그에게는 하나님을 만나서 단판을 지어야 할 일이 있다.

장마를 그치게 하는 일이 그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이다. 그는 담판을 끝내고, 그 징표로 소 한 마리를 받아서 이끌고 은하수를 건넌다. 음력 칠월 초승에 장마가 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견우는 땅에서 인류의 조상이 된다. 그를 배웅하는 직녀는 땅에서 인류의 조상인
아만(阿曼)이다. 그는 후대에 와서 최초의 문명인인 마고(麻姑)로 다시 태어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나반이 칠월칠석날 은하수를 건너서 하나님을 찾아가야 하는가?

옛날에는 천기의 순환주기를 1 월 ∼ 6 월, 7 월 ∼ 12 월 둘로 보았다.
첫 주기는 1 월에서 6 월까지인데, 이때 천기가 왕성하다.
이 기간이 시작되는 섣달 아침에 달이 뜨고, 정월 초하루에 음과 양이 만난다. 왕(旺)한 천기는 6 월에 가서 극(極)에 달한다.
이때 하늘의 수문(水門)이 열리고 거대한 빗줄기가 땅을 향하여 퍼붓는다. 이것이 6 월 장마이다.

두 번째 주기는 7 월 ∼ 12 월인데, 천기가 왕성하지 못하다고 보고 이를 폐(廢)하다고 하였다.
폐한 천기는 7 월에 시작하고, 해가 중천에 있을 때 달이 뜨므로, 이때를 시작의 시기로 보았다.
이 날
나만이 천하를 건너서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지루한 6 월의 장마 기운이 사라진다.

칠월칠석은 이렇게
나만을 통하여 장마가 끝났음을 선언하는 날이다.         (글) 古潭 노중평


은하수 나라에는 아름답고 착한 직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천상에서 지상 사람들의 옷을 만드는 데 필요한 베짜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옷감은 누가 입게 될까? 아무쪼록 선한 이웃들이 입었으면 좋겠는데.........'

직녀는 베를 짜면서 생각했습니다.

직녀의 고운 마음씨는 그녀를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천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냇물을 길어 올리던 직녀는우연히 소를 몰고 가는 견우라는 목동을 보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하여 사랑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직녀여,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은 천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오."

"아니옵니다, 견우님. 견우님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시는 분이옵니다."

그 날부터 두 사람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났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만 갔고 그로 인해 자신들이 맡은 일들을 게을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를 몇 날 며칠, 지상의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원망을 해댔습니다.

"아니, 직녀는 베도 안 짜고 뭐하는 거야? 이러다가 얼어 죽겠어."

"어허, 참 옷도 없는데 식량까지 바닥났으니 완전 거지신세로구먼. 견우가 소와 양을 거두지 않아 고기도 못 먹으니....."

천상에서 사람들의 생활을 굽어보던 옥황상제님은 크게 노여워하며 두 사람을 불러들였습니다.

"어찌 그렇게 경거망동한 행동을 할 수 있느냐!  너희가 일을 하지 않으면 지상의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되는지 정녕 몰랐더냐!"

견우와 직녀는 감히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각기 다른 곳으로 귀향보내졌습니다. 직녀는 서쪽 별로 견우는 동쪽 별로 보내졌습니다. 매일 같이 만나던 두 사람에게 이 보다 더 큰 형벌은 없었습니다.

견우와 직녀는 하루하루가 슬프기만 했습니다.

"견우님, 제 말이 들리면 대답해 주세요."

직녀가 말했습니다.

"직녀여,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소?"

견우가 불렀습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어 두 사람은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옥황상제는 두 사람을 딱하게 여겨 일 년에 한 번만은 만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날개가 없는 견우와 직녀가 별과 별을 지나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직녀로부터 먹이를 받아 먹으며 가깝게 지내던 까마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우리가 다리를 만들어 드릴께요."

까마귀들은 서로의 깃털을 부리로 물어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드디어 까마귀 다리위에서 만난 두사람은 서로를 얼싸 안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일 년에 단 한 번 있는 이 날은 사람들은 칠월 칠석이라 부릅니다. 음력 7월 7일 밤에 만나기 때문이죠. 이 날은 두 사람의 눈물 때문에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옵니다. 또한 까마귀들이 모여 만든 다리를 오작교라 부르는데, 까마귀들의 머리가 벗겨진 것은 다리를 만들 때 깃털이 뽑혀졌기 때문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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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 있어서 밥을 같이 먹는 이유

미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가보면 한 진열장에 '일심단선(一心團煽)' 이라는 원형의 한국 부채가 하나 전시되어 있다.

1871년 신미년 강화도 광성포대에서 있었던 한·미 전쟁때 노획해간 전리품 가운데 하나다. 부채살 줄기마다 가느다랗게 이름들이 적혀 있었는데 전투에 임하기 전 부대 단위로 이 일심단선에 각자의 이름을 적고 일심사생(一心死生)을 맹약하는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선 일심배(一心杯)라는 커다란 술잔에 술을 담아 순배(巡杯)로 돌려 마시고 또 일심반(一心飯)이라 하여 이날만은 밥그릇 없이 한솥밥을 나눠 먹음으로써 일심동체의 맹약을 다지고 확인했다.

이 일심선, 일심배, 일심반의 정신적 구속 때문인지 미 해군측 기록에 의하면 그 전투에서 구현된 공생공사의 우리 병사들 정신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한 사람의 패주 없이 전원이 포대에서 옥쇄(玉碎)하였고, 부상당하여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병사를 제외하고는 한 사람의 예외 없이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한 것이다.

부상당한 병사 가운데도 미군의 총부리를 끌어 가슴에 대고 쏘아 죽여 달라고 애원했다는 눈물겨운 종군 기록이 남아 있다. 이처럼 한국인의 집단을 일심동체로 구심(求心)시켰던 것은 한잔 술에 더불어 입을 대는 순배를 하고 한솥밥을 더불어 먹었던 의식에 있었다. 곧 나눠 마시는 한잔 술이 한국인에게 술 이상의 뜻이 있듯이 나눠 먹는 한솥밥도 밥 이상의 뜻이 있었다.

개화기 때 6 조에서의 점심은 으레 오시(五時)부터 신시(申時)까지 계속되었다. 지금 시간으로 정오부터 오후 4시까지 상을 물려 밥을 먹는 지극히 비효율적인 식사 유형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판서, 참관 등 당상관(堂上官)이 맨처음 먹고 나면 그 상을 물려 정랑(正郞), 좌랑(佐郞) 등 당하관(堂下官)이, 다시 그상이 물려져 아전이, 아전이 물려 종들이 먹고 보니 그만한 시간이 소요했던 것이다.

속칭 '네 물림 상'이라 불렀던 이같은 물림유형은 계급 사회의 비인간적 차별 행위로만 봐서는 안된다. 한솥밥을 물려가며 그 모두가 나눠 공식(共食)함으로써 상하의 일심동체를 다지는 한국인의 집단 영위의 슬기가 식사 형식에 투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윗 사람은 물림을 배려해서 오히려 종들만도 못먹게 마련이다. 이에 벼슬아치를 송덕(頌德)하는 상투적인 문구 가운데 양상수척(讓床瘦戚)이라 하여 "상물림으로 얼굴이 메말라 수척해지고…" 운운하는 대목이 생기기까지 했다.

따라서 한솥밥을 먹고 안먹고는 한국인에게 큰 뜻을 지녔었다. 이를테면 법도 있는 집에서는 첩(妾)을 들이면 첩에게 한솥밥을 먹이지 않고 시앗(妾)솥이라 하여 솥을 따로 두어 따로 밥을 지어 먹였던 것이다.

떠돌이 행상인들이 사랑에 묵으면 끼니 때 반찬은 차려도 밥만은 내질 않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역시 한솥밥이 갖는 정신적 플러스 알파 때문이다. 그래서 행상인들은 '단지밥' 이라 하여 손수 단지에 밥을 지어 먹고 다녔다.

가족을 우리나라에서 식구(食口) 혹은 식솔(食率)이라 부른 것도 바로 한솥밥이 갖는 정신적 유대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수작(酬酌) 이나 한솥밥이 산 사람 사이의 연을 확인하는 공식 문화라면 비빔밥은 살아 있지 않은 조령(祖靈)과의 연을 확인하는 공식문화라고 할 수 있다.

제사를 지내고 나서 조령에게 바쳤던 신주(神酒)를 나눠 마시는 음복(飮福) 절차 역시 젯상에 올렸던 갖가지 음식을 골고루 한데 섞어 비빔밥으로 나눠 먹는 절차이며, 또 그 제수를 이웃 친척과 나눠 먹는 이바지 절차로 신인공식(神人共食)을 한다.

<월인석보(月印釋譜)>에 보면 이바지는 곧 신령에게 바친 음식을 뜻하였는데 그것은 연이 닿는 사람끼리 나눠 먹는 음식이란 뜻으로 진화한 데서도 신인공식 문화의 흐름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비빔밥은 신인공식의 제사 절차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신령이 내려와 드셨던 그 모든 찬을 골고루 한데 비벼 먹는 것 이상으로 보다 철저한 공식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제삿날 자시(子時)를 기다리지 못해 곧장 잠들었던 어린 시절. 어머니는 제사 비빔밥을 남겨 두었다가 꼭 먹이곤 하였는데 그것은 신인공식에서 아들 놈을 소외시켜서는 안된다는 어머니의 전통적 의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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