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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금렵구 20 - 완결
유키 카오리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신의 각본'이 여지없이 부서져 버렸다. 인류 숙청 프로그램은 실패로 돌아갔다. 자신만을 찬양하는 피조물들로 세상을 가득 채우고 싶었던, 사실은 가장 불쌍한 정신체인 창세신은 사라졌다. '자유의지'라는 예측불허의 변수 때문에.
천사들 간의 사랑을 금지한 것도, 쌍둥이 이외의 가족 관계를 금지한 것도 모두 창세신이 가진 열등감과 질투 때문은 아니었을까. 자기만 좋아해주고, 자기만 찬양해야 하는데, 사랑이나 가족이 생겨버리면 그 사랑과 찬미를 나누어야 했을테니. 절대적인 존재가 어느새 상대적인 존재로 전락해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렇다면 프로그램을 짤 때 잘 짰어야지.. 자유의지나, 지혜는 주지 말고, 로시엘이 그랬던 것처럼 상대의 자아를 먹어치워 동화했어야지.. 허나 그리되면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좋아하는 꼴이니, 만족스럽지 못하겠지..
세츠나는 신이 금지한 것을 모두 어겼다. 근친상간과 천사 간의 사랑. 하긴, 그렇기에 그는 구세사가 될 수 있었다. 작가는 일부러 세츠나의 위치를 금기를 어긴 소년으로 설정했다. 여천사였던 알렉시엘의 여성성과 인간 소년인 세츠나의 남성성이 결합하여 세츠나는 모체인 아담 카다몬의 뜻을 이뤄준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갖춘 아름다운 천사, 세라피타.. 아담 카다몬. 알렉시엘과 로시엘의 어머니이자 아버지.
작가는 세츠나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절반을 했다. 선악의 구분이나, 신에 대한 믿음, 구원의 방식..
결국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하라는 이야기다.
정말 기독교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나라에서 나올만한 이야기 전개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대하듯, 기독교 신화를 대한다. 소재를 끄집어 내서 각색하고, 신비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천사와 악마, 천국과 지옥이라는 흔하디 흔한 소재를 비틀어서 인간이 신을 '선택'해 버린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이 가장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창세신은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천사였던 루시펠을 대마왕으로 만들어 버린다. 루시펠의 생각이나 의지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다. 말이야 좋게 인간에게 시련을 주어야 성장한다는 둥 유혹을 해야 강인해 진다는 둥 헛소리를 하지만, 루시펠은 한마디로 일축한다. 니가 제일 세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것 뿐이잖아..라고.
금단의 열매.. 사실 원죄를 타고 난 건 천사들이었다. 아담 카다몬의 모체를 양분으로 한 나무열매를 먹어왔고, 그 양분이 만들어내는 양수 속에서 태어났으니까.
문득 단테의 '신곡'이 떠올랐다. 신곡 속에서 신은 빛으로 천계 가장 높은 중심에 있다. 이 이야기 속의 세상도 그 전개를 빌려왔는지, 신이 은거해 있다는 '에테메난키'는 봉인되어 맨 상층에 위치해 있다.
멋진 만화이긴 한데.. 난 우리나라 작가들의 만화가 더 재밌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건 오히려 황미나님의 '불새의 늪'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