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고전'도 좀 밀렸다. 만회하기 위해서 주말 아침에 적자면, 19세기 고전 작가인 에밀 졸라와 찰스 디킨스부터다. 졸라의 <나나>(문학동네, 2014)와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창비, 2014) 새 번역본이 나왔다(<두 도시 이야기>는 다음주에 입고되는 듯).

 

 

졸라의 대표작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건 <목로주점>이지만 내겐 <나나>도 같이 꼽히는 책인데, 아마도 예전 삼중당문고의 기억 때문인 듯하다(<목로주점>과 함께 <나나>가 포함돼 있었다). 그간에 절판돼 아쉽던 차에 얼마전 예문판으로 다시 나왔고 이번에는 문학동네판으로도 출간됐다(원로 불문학자들의 번역이다). 덩달아 절판됐던 <작품>(일빛, 2014)도 이달에 다시 나왔다. 이전에 구해두지 못했던 책이라 바로 장바구니에 넣었다. <나나>는 어떤 작품인가.

<목로주점>, <제르미날>, <인간 짐승>과 더불어 총서에서 가장 큰 대중적 성공을 거둔 4대 역작 중 하나인 <나나>는 「르 볼테르」지에 연재된 소설이다. 이 소설은 파리의 신인 여배우 '나나'가 타고난 육체적 매력으로 파리 상류사회 남자들을 유혹해 차례로 파멸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한때 영화의 인기와 함께 꽤 많이 읽히던 <제르미날>도 절판된 지 오래 됐다. 출간본과 관련하여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나나>가 문학동네에서 나온 졸라의 세번째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이미 <목로주점>과 <인간 짐승>이 나왔기 때문이다. '작가당 두 작품 이내'만 전집 목록에 포함시킨다는 게 문학동네의 원칙이었는데, 졸라는 예외적인 작가가 됐다(아니면 원칙이 완화됐을 수도 있겠다).

 

 

영문학의 간판 작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도 창비판이 추가됨으로써 '정본 경합'에 불이 붙었다. 나는 펭귄클래식판으로 읽고 더클래식판도 갖고 있는데, 아무래도 좀더 기대가 되는 건 창비판이다(더 일찍 나왔다면 강의에서도 사용했을지 모른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궁금하다. 

 

 

 

덧붙이자면, 디킨스의 대표작 <위대한 유산>도 올해 열린책들판이 추가돼 민음사판과 경합하고 있다. 수십 종의 중복 번역 사태만 아니라면, 이런 경합이야 독자인 나로선 언제든 환영이다... 

 

14.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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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상주의의 대표 철학자로 주로 <정의론>의 저자 존 롤스의 호적수로 알려진 로버트 노직의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김영사, 2014)가 재출간됐다. 오래 전에 <인생의 끈>(소학사, 1993)이라고 나왔던 책이다. 오래 전, 그러니까 20년도 더 전에 저자의 명망에 기대 바로 구입했지만 인상적이진 않았다(좀 밋밋한 느낌이었다). 다시 읽으면 놓친 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주저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 외에는 별반 읽을 게 없었던 철학자의 책이라 반갑다. 부제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질문'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라는 소크라테스의 궁극적 물음을 통해 인생을 성찰하는 ‘소크라테스적 탐구’를 화려하게 부활시킨 현대 철학의 걸작! 30세에 하버드대학교 철학과 정교수가 되었으며 20세기 가장 뛰어나고 독창적인 사상가로 평가받는 로버트 노직. 그가 날카로우면서도 해박한 식견, 유려함이 빛나는 ‘소크라테스적 논변’으로 삶의 본질과 의미를 꿰뚫는다.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늙어야 하는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풍부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변증으로 26가지 인간 존재의 핵심 문제를 다각도로 조명하여 그 실체를 낱낱이 파헤쳤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질문'이라는 건 제목과 연관된다. '성찰하는 삶' 내지는 '성찰적 삶'. 알려진 대로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그게 서양철학의 전환점이자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래서 '성찰하는 삶'을 원제로 갖고 있는 책이 여럿 되는데, 제임스 밀러의 <성찰하는 삶>(현암사, 2012), 애스트라 테일러의 철학자 인터뷰 <불온한 산책자>(이후, 2012), 그리고 정신분석가 스티븐 그로스의 <때로는 나도 미치고 싶다>(나무의철학, 2013) 등이 그렇다.

 

 

말이 나온 김에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는 책 몇 권. 황광우의 <사랑하라>(생각정원, 2013)는 소크라테스의 삶과 사상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서이고, 폴 존슨의 <그 사람, 소크라테스>(이론과실천, 2013)은 가장 만만한 분량으로 읽을 수 있는 소크라테스의 입문서. 그리고 베터니 휴즈의 <아테네의 변명>(옥당, 2012)은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관한 자세한 배경 설명을 제공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등의 대화편을 읽을 때 요긴한 참고가 된다...

 

14. 07.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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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고전'으론 최근에 나온 랭보의 시집과 모파상의 단편집을 고른다. 각각 프랑스 시와 단편소설을 대표하는 시인과 작가인 만큼 작품집 출간이 반갑다.

 

 

먼저 '랭보 시집'이란 부제를 달고 나온 <나의 방랑>(문학과지성사, 2014). 랭보 전집에서 운문시와 자유운문시를 발췌해 옮긴 걸로 돼 있다. 추가적인 설명이 없어서 <지옥에서 보낸 한철>과의 중복 여부는 알 수 없다. 역자는 <시를 버린 시인 랭보>(한국학술정보, 2012)라는 연구서를 펴낸 한대균 교수로 랭보 전공자이고 고은과 조정권 시인 등의 작품을 불역하기도 했다.

 

내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그간에 랭보 번역에 대해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견해가 많았기 때문에 반시반의하면서도 새 번역본에 대해 기대를 가져본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보들레르 선집이 조만간 출간될 예정으로 아는데, 랭보 선집도 더 나오면 좋겠다.  

 

 

체호프와 함께 세계 단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기 드 모파상의 단편집도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의 하나로 출간됐다. <기 드 모파상>(현대문학, 2014). 800쪽이 넘는 분량이니까 현재까지 나온 모파상 단편집으로는 최대 규모일 듯하다. 나름대로 '정본'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 여타 번역본으로는 문예출판사판과 지만지판 정도가 선택지였었다. 안 그래도 지난 봄에 <여자의 일생>(민음사, 2014)이 새로 번역돼 나왔길래 단편집들도 같이 구했는데(영역본도 포함해서), 가을에는 단편작가들만 모아서 읽어볼까 싶다. 세계 단편문학사를 잘 개관하고 있는 책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14. 06. 21.

 

 

P.S. 랭보에 대해서는 정본 번역본이 없다고 해서 평전 독서도 미루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책이라도 구해볼까 싶다. 삐에르 쁘띠필의 <랭보, 지옥으로부터의 자유>(홍익출판사, 2001)는 소장도서이고, 클로드 장콜라의 <랭보>(책세상, 2007)가 관심도서다. '바람구두를 신은 천재 시인'이란 부제를 단 장콜라의 책은 가장 방대한 분량의 평전이기도 하다.

 

 

한편 랭보와 함께 같이 떠올리게 되는 이름이어서 로트레아몽도 찾아보니, 흠, 모두 절판되고 현재 구할 수 있는 책이 없다. <말도로르의 노래> 같은 책도 다시 나오길 기대한다. 학부시절에 읽은 몇 안 되는 만화 중의 하나인 허형만의 <카멜레온의 시>에 바탕이 된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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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와 함께 중국 정사(正史)를 양분한다는 책이 반고의 <한서>인데, 덧붙여 후한 200여년의 역사를 다룬 범엽의 <후한서>도 있다는 걸 이번에 새삼 알게 됐다(당연한 사실도 때론 발견의 대상이다). <후한서 본기>(새물결, 2014)가 번역돼 나온 덕분. 어떤 책인가.

 

전통적으로 중국의 4사로 꼽히며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부터 3사 또는 4사 중의 하나로 꾸준히 읽혀온 고전 중의 하나이다. 이민족의 침입, 이민족의 내부, 환관 정치의 발호 등 중국 문명의 원형질이 중화로 형성되는 현장과 함께 중국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를 형성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두 가지가 특징적인데, 최초의 완역본이라는 점과 역자가 비전공자라는 점. 기존의 <후한서>는 '본기'가 아닌 '인물열전'의 번역이다. 그리고 출판사에서는 만만찮은 이 고전이 "한 ‘비전공 연구자’에 의해 드디어 전공자 못지않은 솜씨로 번역된 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특히 번역이 만만치 않은 이 고전이 장회태자 이현의 주까지 포함해 엄밀한 고증에 더해 유려한 문장으로 번역된 것은 오늘날의 ‘인문학의 진흥’과 관련해서 조그마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한다. 놀랍게도 민음사 장은수 대표의 번역이다(역자 인터뷰는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40517020002 참조).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장 대표는 자사에서 책을 내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장 대표는 “솔직히 말해 이 책은 전적으로 아마추어적 작업의 결과물”이라며 “중국사 전문가에 의한 제대로 된 번역본이 나올 때까지 그저 갈증을 달래는 용도로 읽혔으면 하는 바램”이라고 말했다. 몸 담고 있는 민음사에서 내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일본만 해도 은퇴하지 않는 한 자기 책을 자기 출판사에서 내는 일은 없다”며 “출판이라는 게 최소한의 공공성과 객관성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근 논란을 불러일으킨 어느 출판사 대표와는 사뭇 다른 태도여서 눈길을 끈다. 아무튼 후한은 <삼국지 연의>의 시대적 배경이기도 하기에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정사와 픽션의 세계가 어떻게 다르고 얼마만큼 겹치는지 살펴보는 것도 유익한 재미겠다.

 

 

그런데 한편 <한서 본기>는 번역돼 있는 건가? 이 역시 <열전>만 번역돼 있는 거 아닌가? <사기>가 완역된 것도 얼마 되지 않으니 그것까지 바라는 건 좀 무리한 일일까? 그런 의문들이 꼬리를 무는군...

 

14. 0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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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이런저런 원고에 매달려 있는데, 저녁을 먹기 전 막간에 '이주의 고전'을 골라놓도록 한다(그러고 보니 '이달의 읽을 만한 책'도 아직 고를 여유가 없다. 주말의 일거리로 넘겨야겠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친숙한 괴테의 작품이 한번 더 번역돼 나왔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시공사, 2014). 주인공의 이름을 '베르테르'가 아닌 (독어 발음에 더 가깝다는) '베르터'로 표기한 번역으로는 세번째이고, '슬픔'을 '고뇌'로 옮긴 걸로는 두번째다.

 

 

'베르테르'란 이름은 대중가요의 노랫말에도 들어가 있을 만큼 우리에겐 대중화돼 있기 때문에 새삼스레 '베르터'로 정정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지만, 이런 표기 문제는 '대세'의 문제이기도 해서 주요 번역본들이 바뀐 제목을 채택한다면, 그래서 <젊은 베르테르>의 독자보다 <젊은 베르터>의 독자가 더 많아진다면 우리의 인상도 자연스레 바뀌게 될 거라고 본다(한 가지 사례를 들자면 호손의 <주홍글씨>가 <주홍글자>로 바뀐 것이다). '슬픔'이냐 고통'이냐는 문제도 마찬가지. 을유문화사판과 창비판에서도 제목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한 바 있었는데, 시공사판도 이런 설명을 곁들였다.

이 작품의 독일어 제목은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로, 우리나라에 가장 널리 알려진 제목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그러나 이 우리말 제목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문제제기가 있어왔는데, 우선 ‘베르테르’는 ‘Werther’의 일본식 표기로 독일어 원음에 가까운 표현은 ‘베르터’이다. 연세대학교 독문과 김용민 교수의 새로운 번역으로 선보이는 시공사 판본에서는 잘못된 관행으로 굳은 일본식 표현을 바로잡고자 익숙한 표현인 ‘베르테르’를 버리고 ‘베르터’를 선택했다. 또한 ‘슬픔’으로 번역된 독일어 ‘Leiden’은 ‘슬픔, 고통, 고뇌, 괴로움, 번민’을 뜻하는 ‘das Leid’의 복수형으로, 이는 베르터가 느끼는 사랑의 슬픔과 괴로움, 사회와의 갈등에서 오는 고통, 자아실현이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번민, 죽음을 결심하기까지의 고뇌, 죽을 만큼 괴로운 상황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다. 여러 상황이 함축된 이 단어를 한정적인 의미의 ‘슬픔’으로 옮기기에는 작품 전반을 관통해 드러나는 베르터의 날카로운 비판 정신과 반항, 좌절을 제대로 표현해낼 수 없기에 역시 익숙한 제목인 ‘슬픔’ 대신 보다 포괄적인 의미의 ‘고뇌’를 택함으로써 작품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전달하고자 했다.

 

동일한 사정을 고려해서인지, 영어본도 두 종류가 있다. 곧 슬픔(sorrows)파와 고통(sufferings)파로 나뉜다(펭귄판과 옥스포드판은 슬픔파로, 노튼판은 고통파로 분류된다).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데, 내가 받은 인상으론 로테와의 실연이 베르터의 주된 고통으로 보는 경우 '슬픔'이라고 옮기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걸로 보는 경우 '고뇌/고통'이라 옮기는 듯싶다. 그러니까 이 번역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다.

 

 

다른 주요 세계문학전집판의 제목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인데, 역자들이 다 독문학 전공자들이고 원전 번역이다. '베르테르'가 일본식 관행이라고만 치부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데, '베르테르'라고 음역한다고 해서 독어를 모르고 옮기거나 일어를 중역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곧 시초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이건 '일본식 관행'이 아니라 '독문학계의 관행'이었다. 그렇게 굳어진 일본식 관행을 문제삼자면 나는 토마스 만의 <마의 산>도 <마법의 산>으로 개명하는 게 낫고, (영문학쪽으로 보자면) 밀턴의 <실낙원>도 <잃어버린 낙원>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렇게 주장해온 분들도 적지 않다).

 

독문학 쪽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보다 많이 번역된 작품으론 헤세의 <데미안> 정도이지 않을까 싶을 만큼 다수의 번역본이 나와 있는 상황인지라 새로 또 다른 번역본을 얹는 게 멋쩍을 수 있다. 제목을 달리 다는 건 그런 사정도 반영돼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어느 경우이든 더 중요한 건 번역 자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만 하더라도 영역본까지 포함해 10종 가까운 번역본을 갖고 있는지라 이들이 어떤 점에서 차별화될 수 있는지 검토해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일반 독자가 보기엔 '난립'에 가까운 형세인지라 어떤 차이점들이 있고, 어떤 번역본을 추천할 만한지 전공자가 일러주면 더 좋겠고. 모두가 학계에서 난다긴다 하는 역자들인지라 허황된 번역본은 없을 듯싶지만, 그래도 각자의 개성은 다를 수 있을 터이기에. 주말엔 나 혼자라도 뒤적거려봐야겠다...

 

14.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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