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학파의 명맥을 잇고 있는 철학자 악셀 호네트의 대표작 <인정투쟁>(사월의책, 2011)이 출간됐다. 예전에 <인정투쟁>(동녘, 1996)이라고 나왔던 책인데 15년만에 정식으로 판권계약을 맺고 다시 나온 것이다. 부제는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 특히 한국사회의 여러 갈등양상을 해명하는 데 유익한 시사점을 제공해주기에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물론 기억에 매우 딱딱한 책이었다). 발빠른 소개기사가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 호네트의 책은 더 소개되는 듯하다...     

서울신문(11. 08. 24) 권력 아닌 무시 때문에 사회적 갈등 표출

사회적 갈등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권력 투쟁’이다. 이는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지만 갈등 자체를 회의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정치 혐오증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시각은 ‘계급 투쟁’이다. 경제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반발에 초점을 맞추는 시각이다. 이는 분배적 정의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환원적 속성 때문에 다양한 갈등을 모두 돈 문제로 치환시킬 우려가 크다. 그래서 나온 게 ‘인정(recognition) 투쟁’이다.

예컨대 노사 갈등은 총파업으로 월급 인상을 얻어내는 것만큼이나, 노동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존중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갈등이란 인정을 유보한 채 무시하고 냉대하고 모욕을 주는 데서 출발한다. 무시는 분노를, 분노는 투쟁을 불러온다.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갈등을 하나의 키워드로 포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론적 매력이 크다는 평이 나온다. 



테오도어 아도르노·막스 호르크하이머, 위르겐 하버마스에 이어 3세대 비판이론가로 꼽히는 악셀 호네트(독일 프랑크푸르트대 교수)의 저서 ‘인정 투쟁-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사월의책 펴냄)이 담고 있는 내용이다. 독일 철학자 헤겔에게서 빌려온 인정 투쟁은 정치적 대표성(representation)이나 경제적 재분배(redistribution)가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이 문제의 핵심이요, 그 개인의 정체성은 타인의 인정에 의해서 성립한다는 것이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을 뒤흔들었던 ‘촛불 시위’도 그 예다. 아무리 광우병 발병 확률이 몇백만분의1 운운하며 과학적 근거를 들이대도 시위의 근본은 ‘정부가 국민을 무시했다.’고 느꼈다는 데 있다. 영국 폭동 등 유럽 상황도 비슷하다.

관심은 이 인정 이론이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호네트는 인정의 3가지 차원으로 ▲정서적인 측면에서의 ‘사랑’ ▲법적 제도적 차원에서의 ‘권리’ ▲사회 공동체 차원에서의 ‘연대’를 제시한다. 이는 호네트의 또 다른 책 ‘분배인가, 인정인가?’(국내 미출간)에 좀 더 자세히 소개돼 있다. 낸시 프레이저 미국 뉴스쿨 사회과학대학원 교수와의 논쟁을 담은 이 책에서 프레이저는 인정 이론이 불평등한 분배구조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는 비판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호네트는 불평등한 분배구조 밑에도 사회적 인정구조의 왜곡이 깔려 있다고 반박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적 불평등이 인간에 대한 어떤 무시에서 기인하는가를 밝혀낸다면, 분배정의를 또 하나의 도덕 원칙으로 확립시킬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국내에 번역 소개될 예정인 호네트의 신간 ‘자유의 권리-민주적 인륜성에 대한 소고’가 주목되는 이유다.

호네트의 제자이자 ‘인정 투쟁’ 번역자인 문성훈 서울여대 현대철학담당 교수는 “한국 사회는 단순하게 경제적 이익이나 정치적 권력을 둘러싼 갈등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독특한 갈등 구조를 갖고 있는데 그게 바로 사회적 무시”라면서 “그렇기에 호네트의 인정 투쟁 이론은 한국 사회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 가장 적합한 틀”이라고 지적했다.

돈 없다고, 못 배웠다고, 못생겼다고, 장애자라고, 동성애자라고, 외국인 노동자라고, 여자라고 무시당하는 상황이 정치경제적 투쟁만으로 해소될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결국 해결책은 이들의 인정 투쟁을 수용하는 것으로 결론날 수밖에 없다.

문 교수는 “호네트의 인정 이론에서 중요한 점은 사회적 인정이란 단지 상징적 차원에서 인정을 뜻하는 게 아니라 권리나 제도, 사회적 연대 등을 통해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라면서 “오늘날 진보적 사회운동의 규범적 목표를 새롭게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 교수는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호네트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조태성기자) 

11. 08. 25.  

P.S. 호네트의 정치철학 내지 사회철학에 대한 해설은 <현대정치철학의 모험>(난장, 2010)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옹기장이, 2010)에 실린 글을 참조할 수 있다. <당신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한울, 2010)에도 그 질문에 대한 호네트의 대답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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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서점에 들렀을 때 헤밍웨이 책 두 권이 나란히 진열돼 있기에 어떤 책인가 궁금했다. 전쟁을 주제로 한 엔솔로지로 보였지만 더 자세히 살피진 않았다. 전후사정을 알려주는 기사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마침 현충일이니 전쟁의 의미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    

서울신문(11. 06. 04) 開戰 후에 휴머니즘은 승리뿐인가

올해도 현충일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전쟁을 기억해야 함은, 그 전쟁에서 비롯된 죽음을 위로해야 함은 살아남은 자의 의무다. 문제는 기억하는 방식이다.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을 기리는’으로 시작하는 여러 공식석상의 언사는 의미 있지만 틀에 박혀 있다.

전쟁은 현실이다. 죽음과 죽임이 일상으로 반복되는 공간이자 현실적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맞서는 공간이다. 생명의 가치를 포기할 수도, 치기 어린 낭만만으로 바라볼 수도 없다.

‘전장의 인간 1, 2’(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 엮음, 이윤기 옮김, 섬앤섬 펴냄)는 각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를 부제로 달고 있다. 1942년 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헤밍웨이가 낸 책이다. 1978년 처음 국내에 번역 소개됐지만 출판사가 없어지며 1년 만에 절판됐다가 다시 30여년 만에 두 권짜리 개정판으로 빛을 보게 됐다. 



헤밍웨이 자신의 글은 물론 빅토르 위고, 윌리엄 포크너와 같은 세계적인 작가들의 글을 비롯해 율리우스 카이사르, 윈스턴 처칠 등 인류사 속 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이, 그리고 영국군 무명 장교의 글까지 모두 42편의 글을 담았다. 소설, 에세이, 보고서 등 형식은 다양하지만 품고 있는 문제의식은 하나다. 전쟁의 진실, 그리고 전쟁 속의 인간들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상처와 고통, 죽음의 기억이다.

헤밍웨이는 42편의 글을 모두 8개 장으로 나눴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나오는 구절이 첫 머리마다 인용된다. 클라우제비츠의 가르침을 인용한다는 것 자체는 열아홉 나이부터 시작해 4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1, 2차 세계대전에 직접 뛰어든 헤밍웨이에게 전쟁은 어떻게든 피해야 하는 일이지만, 맞닥뜨렸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이겨야 하는 상황임을 역설적으로 웅변한다.

‘전쟁을 진심으로 증오한다.’고 말하면서도 전쟁의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철저한 현실주의자 헤밍웨이의 면모가 엿보인다. 특히 헤밍웨이가 직접 쓴, 43쪽에 이르는 서문은 그가 갖고 있는 전쟁에 대한 통찰과 문제의식, 전쟁을 통해 이뤄야만 하는 간절한 가치를 담아냈다는 평가다.

작가의 역할에 대해 언급한 부분도 의미심장하다.

“작가의 일이란 진실을 말하는 것…만일 전쟁 중에 국가의 안보 문제 때문에 작가의 진실을 출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출판할 수는 없더라도 쓰는 일은 계속해야 한다.… 만일 그 자신이 생각해 봐도 진실하지 않은 걸 쓰게 된다면, 그것이 애국적인 동기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로서는 끝장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 등 전쟁 문학의 일가를 이룬 헤밍웨이가 전쟁의 공간 안에 들어가 어떻게 관찰하고 참여했는지 그의 자세를 짐작하게 한다.

베트남 전쟁에 참가해 직접 목격한 참혹한 실상을 문학(‘하얀 헬리콥터’, ‘크레슨트 비치’, ‘가설극장’ 등)으로 발화했던 이윤기(1947~2010)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적도 우리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전쟁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인간애의 바탕이 될 것이며 전쟁에서 휴머니즘을 완성하는 지름길”이라면서도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갖는다고 해서 적에게 패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 박았다. 헤밍웨이와 마찬가지다. 이윤기는 2005년부터 번역을 시작해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지난해 초 원고를 탈고했다.

헤밍웨이도, 이윤기도 모두 전쟁의 복판에 서 있었던 작가다. 서로 다른 시간, 공간이지만 죽음과 삶의 경계선상에서 비틀거리며 내디딘 걸음걸음은 고스란히 각자 문학 세계의 주된 흐름을 이루게 됐다. 전쟁은 추악했고, 인간은 비참했으며, 평화는 요원했다. 하지만 전쟁은 냉정한 현실이었다. 이렇듯 직접 전쟁을 겪은 이들의 현실 인식은 감성적, 관념적으로 접근하는 이들과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전쟁을 인문학적으로 살피고자 하는 이들에게, 혹은 철저히 현실의 영역에서 전쟁을 고민하는 정치인 또는 전투의 지휘관들에게, 용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병사들에게, 그리고 궁극적으로 문학의 영역에서 전쟁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 작가들에게 던지는 조언이자 계언이다. ‘종전’이 아닌 ‘정전’ 상태인 한반도에서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환기다.(박록삼기자) 

11. 06. 06.  

P.S. 한국 독자들에게 헤밍웨이만큼 널리 알려진 작가도 드물지만(헤밍웨이란 이름의 출판사도 있다), 번역본은 드물게 나오고 있다. 그의 전쟁문학도 범우사판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고 세계문학전집판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정본' 역할을 해줄 번역본이 출현하기를 바란다.   

한편, 한국전쟁과 한국사회란 주제를 한번 더 되짚어본 책으로 박명림 교수의 <역사와 지식과 사회>(나남, 2011)도 이번에 출간됐다. 주저였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1,2>(나남, 1996)에 뒤이은 것으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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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을유문화사, 2011)이다. 원제는 'How to read and why'. 책을 어떻게 읽는지, 그리고 왜 읽는지 시범적으로 보여주는 책. 원제를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주문을 했는데, 받고 보니 예전에 <교양인의 책읽기>(해바라기, 2004)라고 한번 번역됐던 책이다. 터무니 없어 보이는 책값 때문에, 그리고 불명료한 번역 때문에 직접 구입하진 않고 도서관에서 대출해 몇 장을 읽어본 기억이 난다(주로 러시아 작가들에 관한 장). 요컨대, '오래된 새책'인 셈이다. 그래서 이번에 올라온 리뷰기사와 함께 지난 2004년의 기사도 찾아서 같이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11. 04. 30) 고전을 더 잘, 더 깊이 만나는 길

고전 문학은 어떻게, 왜 읽는가. 숱한 평론가와 독서 애호가들이 이에 대한 답변을 내놨다. 미국의 인문학자이자 평론가 해럴드 블룸도 그중 한 사람이다. 문학 비평에 있어서 블룸의 위치는 ‘보수 중의 보수’라 할 만하다.

그는 <해럴드 블룸의 독서 기술>(원제 How to read and why)에서 고전을 읽는 몇 가지 방식을 제시한다. 그 첫번째가 “머릿속에서 은어를 제거하라”다. 그가 ‘은어’라고 말한 것은 “한 분파나 수상쩍은 비밀 집회에서 사용하는 특수한 용어”다. 즉 블룸은 역사주의, 페미니즘, 해체론, 마르크스주의 등 근대적 주체를 해체하고 저자를 죽이는 모든 사조에 저항한다. 블룸에 따르면 독서의 즐거움은 사회적이기보다 이기적이다. 책을 더 잘, 깊이 읽는다고 타인의 삶을 향상시킬 수는 없다. 독서를 통해 이웃이나 주위 사람을 개선하려고 시도해서도 안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신을 튼튼하게 하고 자신의 진정한 관심사를 깨닫기 위해 책을 읽는다.”  

독서의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한 후 블룸은 “내면의 빛에 비추어” 읽어볼 만한 장·단편 소설, 시, 희곡 60여편을 제시한다.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월트 휘트먼, 마르셀 프루스트를 거쳐 윌리엄 포크너, 코맥 매카시까지 이른다. 새 장르를 소개할 때마다 ‘들어가는 말’과 ‘나오는 말’로 이정표를 제시하는데, 그렇다 해도 블룸의 글은 읽기가 쉽지 않다. 집중력이 높고 섬세한 독자만이 이 이정표와 지형을 읽어낼 수 있겠다.

블룸은 현대의 단편 소설을 체호프파와 보르헤스파로 나눠볼 것을 제안한다. 체호프 스타일이 현실에 대한 우리의 갈증을 충족시켜 준다면, 보르헤스 스타일은 현실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갈구하는지 보여준다. 어네스트 헤밍웨이, 플래너리 오코너가 체호프파라면, 이탈로 칼비노는 보르헤스파다.

이후 문학계의 지도를 새로 그린 동시대인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를 찬양하는 데 많은 분량이 할애된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최초의 소설이자 가장 뛰어난 소설이지만 소설 이상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사건”이 일어나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산초와 돈키호테의 대화다. 둘은 서로의 말을 들음으로써 자아를 더 새롭고 풍부하게 발전시킨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는 <햄릿>이 소개된다. 블룸은 문학적 위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성경>에 유일하게 맞먹는다고 단언한다. “햄릿의 정신과 그 정신을 확장하는 데 있어 그가 사용한 언어는 신이 사용한 언어보다 아직까지는 더 넓고 더 민첩하다”고 말한다.

옮긴이가 쓴 대로 블룸이 원하는 건 결국 ‘강한 독자’다. 약한 독자가 작품을 통해 작가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파악할 때, 강한 독자는 작품을 자신의 시각에 비추어 창조적으로 오독한다. 오독의 과정을 통해 작품에 지지 않는 강한 자아를 형성하기. 이 책을 발판삼아 꿈꿔볼 만한 목표다.(백승찬기자)   

해럴드경제(04. 10. 09) 책! 책!…어떻게 왜 읽어야 할까

`나 눈가린채 뱃전 위 널빤지를 걷네/머리위로 별들이 느껴지고/발 아래 바다가 있네/다음 한 걸음이 내 마지막 걸음이 될지도 몰라/나 불안하게 걸음을 옮기네/누군가 경험이라 부른 그것을`(에밀리 디킨슨) 

경험의 총합이 진실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인간은 극단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존재. 순간은 필사의 선택으로 점철돼 있다.

왜 책을 읽는가? 살아있는 영미문학권 최고 비평가 중의 하나인 해럴드 블룸은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인간이 겪는 최종적인 변화는 죽음. 감정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기 쉽기에 인간은 책에서 위로를 구한다. 마르크시즘 비평에 맹공을 퍼부었던 논객 중의 논객 해럴드 블룸은 맞장구치는 재미로 책읽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한다. 자기가 옳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혹은 남을 비판할 근거를 취하기 위해 독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블룸이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는 본연의 자기가 될 것을 가르친 체호프. 저자는 체호프처럼 문학이 선(善)의 한 형태임을 보여주는 작가들 때문에 책을 놓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교양인의 책 읽기`(해바라기, 2만3000원)는 책을 어떻게 왜 읽는가 하는 주제를 다각도로 풀어낸 문학평론서다. 예일대 등에서 40년간 문학을 가르친 해럴드 블룸의 독서편력을 넘겨다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고금을 종횡하는 박학함으로 위대한 정신들의 내연(內緣)관계가 낱낱이 드러난다. 가령 30대에 매독으로 요절한 모파상이 쇼펜하워의 정신적 제자였음을 아는 사람 얼마나 될까.  

블룸은 단편소설의 장르적 특성을 언급하면서 체호프적인 것과 보르헤스적인 것으로 구분한 뒤 인상주의와 자의식을 각각 예술적 책략으로 취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세르반테스를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경쟁자라고 규정한 것도 마찬가지다. 블룸은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토머스만을 세르반테스 파로 분류하면서 돈키호테와 산초판자도 모른 채 인간에 대해 논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교양인…`은 거장들의 문학세계를 두루 엮어낸 책. 문학의 치유능력을 믿는 블룸은 위대한 작품은 매우 실용적이라고 단언한다. 인간의 초상화로서 소설은 3000년대에도 여전히 독자를 얻을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한다.  

`오, 천상의 존재들이여/그대들은 우리를 무엇으로 만드는가. 가진것 없으니/우리는 웃을수 밖에;가진것이라고는 우울함뿐이니/여전히 아이일수 밖에. 감사드리오/지금의 모습에. 그리고 그대들과 함께 싸움에서 떠나고자 하오/우리의 문제가 아니니까. 그만둡시다/그리고 시간처럼 우리를 참아봅시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셰익스피어가 49세에 극작을 그만둔 이유를 설명하며 위의 시구를 인용했다.(윤승아 기자)  

11. 04. 30.  

P.S. 블름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셰익스피어: 인간의 발명>과 <서양의 고전>은 원서를 구해놓은지 오래됐지만 아직 읽어보진 못했다. 만만찮은 분량이기 때문인데, 번역서가 출간돼 수고를 덜었으면 싶다. 이번에 관심을 갖게 된 책은 <영향의 해부>이다. <영향의 불안>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인데, 조만간 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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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력>(프로메테우스, 2010)의 저자 히로세 다카시는 반핵운동가로 유명한데,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계기로 '원전 안전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한 책 <원전을 멈춰라>(이음, 2011)가 재출간됐다(일본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위험한 이야기>(푸른미디어, 1989)란 제목으로 나왔다고 하니 22년만이다. 문제는 그의 암울한 예언이 지금의 현실이라는 점. 당장은 일본의 '현실'이지만, 원전 밀집도가 놓은 우리에겐 남의 일만이 아니다. 일독해봄직하다.     

경향신문(11. 04. 01) 日원전 사고 25년 전 예견한 ‘족집게’    

“후쿠시마 현에는 자그마치 10기가 있죠. 여기서 쓰나미가 일어나 해수가 멀리 빠져나가면 모두 멜트다운될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반전반핵·평화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히로세 다카시는 25년 전 지금의 일본 원전 사고를 암울하게 예견한다. 그는 1986년 구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원인과 영향을 분석하면서 ‘원전안전 신화’의 허구를 구체적 사실로 샅샅이 폭로한다.

책은 원전 사고가 국지적 비극이 아니라 전 지구적 참극으로 확장될 수 있는 시한폭탄이란 걸 강조한다. 히로세는 먼저 ‘죽음의 재’라 불리는 방사성물질의 가공할 파괴력을 문헌으로 자세히 분석한다. 방사능에 직접 노출된 이들이 1년새 수없이 죽어간 사실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체르노빌 남서쪽 450㎞ 떨어진 체르노프치라는 도시에서 아이들의 머리카락이 빠졌다. 1000㎞ 떨어진 스웨덴에도 14종의 핵물질이 검출됐다. 88년 초 소련은 임신 3개월까지 허용됐던 임신중절을 임신 7개월(28주)로 연장했다. 히로세는 분산된 팩트 하나하나를 모자이크처럼 맞춰가며 사고 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찾아간다.

히로세는 “무지막지한 인간들이, 제국주의 시대의 군벌과 직결되는 인간들이 우리를 지옥으로 초대하기 위해서 기만하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되고 사실을 알게 되면 놀랄 것”이라며 원전 산업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체르노빌 사고 2년 전 프랑스의 배가 우라늄을 싣고 소련의 리가로 향하다 사고가 났다. ‘적대국’인줄만 알았던 국가간의 우라늄 거래가 기만의 단적인 예다.

히로세는 유엔의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유럽 원자력 산업의 중심 인물과의 관계, 모건과 록펠러, 로스차일드 가문 등 영미의 거대 자본가들이 미국은 물론 소련의 정치마저 쥐락펴락하며 원전산업을 확대·재생산한 음모의 주체라고 말한다.

일본의 ‘무지막지한 인간들’도 ‘돈독’이 올랐다. 일본 당국은 70년대 ‘죽음의 재’ 피해 보고서를 만들었는데, 대사고가 났을 때 보험금 지불 능력을 알아보려는 게 목적이었다. 장례비는 사체 1구당 5만엔. 일본은 체르노빌 사고에도 ‘원전 5배 확대’를 주장했다. 도쿄전력 등은 자사 이익을 평화적 핵사용, 깨끗한 에너지 같은 말로 포장하면서 ‘사회화’했다. 언론도 공범이다. NHK의 외부 위원은 도쿄전력과 원자력위원회 소속 인물들이었다. 위원회에 참여한 아사히 신문 주간은 ‘원전 반대 기사를 쓰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원전 강국’을 지향하는 한국도 체르노빌 사고 이후를 재현한다. “일본보다 안전하다.” “소련보다 안전하다”고 강변한 일본의 모습과 닮았다. 정부와 친여 언론은 방사능 우려를 ‘괴담’으로 치부한다. 그렇다면 ‘안전량의 플루토늄을 드셔보시든가’라는 게 히로세의 응답이다.

히로세는 후쿠시마를 예견하며 이런 말도 했다. “지금까지 대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우연 중의 우연이죠. 어쩌면 프랑스가 먼저가 될지도 아니면 한국에 있는 9기 중 어떤 것이 터질 것인지….” ‘히로세의 저주’로 여길 일은 아니다. 히로세는 “체르노빌 사고는 일본인이 자신을 향해서 보내는 최후통첩”이라고 했는데, 후쿠시마 사고는 한국인에게 온 최후통첩일 수 있다.

1세대 환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인 김원식씨가 90년 번역한 <위험한 이야기>를 다시 냈다. 환경운동가들 사이에서 ‘고전’ 반열에 오른 책의 시의적절한 재출간은 반갑다.(김종목기자) 

11. 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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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4-13 07:52 
    일본의 반핵운동가이자논픽션작가인 히로세 다카시의 책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새로 나온 책은 1984년에 나온 초기작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 1992년에 나온 증보판을 옮겼다.전쟁의 원인을 다룬일본인 저자들의 책으로 다케나카 치하루의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갈라파고스, 2009), 와카쿠와 미도리의 <사람은 왜 전쟁을 하는가>(알마, 2007)과 같이 묶어볼 만하다. 히로세 다카시는 전쟁이 '클라우제
  2. 원전이 정답이 아닌 이유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4-26 22:41 
    오늘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터진 지 25주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 달에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 사고도 아직 '수습'과는 거리가 먼 상태에서 점점 더 원전 묵시록으로 빠져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다. 아직도가장 저렴하며 안전하다는 '원전 신화'에 우리가 들려 있는 한. '원전이 정답이 아닌 이유'를 짚어주고 있는 칼럼을 옮겨놓는다. 내일자 경향신문의 '김철웅 칼럼'이다.경향신문(11. 04. 27) [김철웅 칼럼]원전이 정답 아닌 100가지 이유2001년 발
 
 
blanca 2011-04-02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히로세 다카시의 <제1권력>만으로는 참 아쉬웠는데 시위적절하게 책이 나와주었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당장 장바구니로^^

로쟈 2011-04-03 08:45   좋아요 0 | URL
네 요즘 같아선 필독서로 지정해야겠어요...
 

자크 데리다의 출세작이자 대표작 <그라마톨로지>(민음사, 2010)의 개정 번역판이 출간됐다. 첫 번역판을 출간한 김성도 교수의 개역본이다. 원래 가볍지 않은 책이지만 상당한 분량의 역주가 추가되어 분량이 무려 967쪽에 이른다. 일단 '편하게' 들고 다니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닌 것(내가 갖고 있는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은 그래도 가방에 넣고 다닐 수는 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다시 나온 것인 만큼 한국어본으로서 제몫을 해주길 기대한다. 참고로, 푸코의 <말과 사물>,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 등도 재번역되고 있으니 내년쯤엔 출간되지 않을까 싶다. 바야흐로 프랑스의 '스타' 철학자들이 귀환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그라마톨로지'를 검색해보던 중 오래전 기사가 눈에 띄기에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3. 10. 11)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그라마톨로지」라는 낱말이 1960년대 처음 등장했을 때는 「문자학」을 가리켰다. 문자의 유형·계통·역사를 다루는 실증적 학문으로서 말이다.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69)는 이 단어를 문자의 철학적 목적론적 성찰이라는 뜻으로 달리 사용하고 있다. 

1967년 출판된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Gramatology)」는 데리다 사상의 좌표점을 설정하는 대작이다. 96년 국내 번역본이 나왔다. 고려대 언어학과 김성도 교수가 옮긴 이 책은 6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과 난해한 글쓰기가 마치 독자의 지성과 인내력을 시험하는 것 같다. 소쉬르·레비스트로스·루소·하이데거 등 기존 문학이나 철학에서는 한 줄로 꿰기 힘든 이질적인 텍스트들을 종횡무진으로 읽어내는 데리다의 솜씨를 따라잡기란 무척 벅찬 일이다.   

「그라마톨로지」는 한마디로 서구 형이상학 전통에 대한 비판이다. 데리다는 플라톤 이후 기존 형이상학이 지금 여기 있는 것을 1차적인 것으로 보는 이른바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한다. 현전(프레장스·presence)의 형이상학은 인종 중심주의· 소리 중심주의·로고스 중심주의이다. 이 전통에 따라 목소리는 영혼과 본질적·직접적 근접성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 반면 문자언어는 존재의 반영 또는 그림자로 멸시됐다는 것이다. 궁극적인 무엇이 따로 있다는 믿음, 그것에서 출발하는 현전의 형이상학은 결국 모든 가치의 서열 체계를 매기려는 욕망이며 따라서 억압의 구조라고 데리다는 폭로한다.  

여기서 데리다의 사상을 집약하는 「해체」의 개념이 등장한다. 해체의 궁극적 겨냥점은 「울타리 엿보기」이다. 형이상학은 닫혀진 원이 아니며 울타리너머에는 끊임없이 운동하는 복수의 진리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해체는 파괴가 아니라 기존 사유 체계의 한계를 교정하는 것이다.  

 

프랑스 저술가 장 뤼크 샬뤼모는 『데리다는 자기 자신의 문화를 재검토하고 있는 유럽인의 한 전형이고 전통적 제가치의 소멸을 분명하게 밝힌 증인』이라고 말한다. 데리다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로 꼽힌다. 해체는 유행어가 됐다.  

자크 데리다 1930년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파리의 고등사범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65년 이후 이 학교에서 철학사를 가르쳤으며 70년대 중반부터 예일·존스홉킨스 등 미국 주요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활동 중이다. 주요 저서로 「목소리와 현상」「에크리튀르와 차이」「철학의 여백」「회화에서의 진리」등이 있다.(오미환기자) 

10. 12. 26. 

 

P.S. <그라마톨로지>는 이번이 세번째 출간이다. 첫 번역본은 <그라마톨로지>(민음사, 1996)로 14년 전에 나왔고,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 2004)가 두 번째 번역판이었다(이번 전면 개정판 서문에는 "2002년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고 적혀 있는데, 착오로 보인다). 가야트리 스피박의 영역본은 '전설적인' 번역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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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12-26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개역본이 나왔군요. 전 김웅권의 번역본과 스피박의 영역본을 갖고 있습니다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TGIF(twitter, google, iphone, facebook)의 시대에 데리다의 의미는 작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개역본도 장만해서 함께 숙독해 봐야 할텐데 언제 시간이 날런지...

로쟈 2010-12-27 10:53   좋아요 0 | URL
소위 '서플먼트'가 풍부한 책이긴 합니다. 들고 다니기가 불편해서 탈인데, 방학때 저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헌내 2010-12-26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피박이 그라마톨로지 영역도 했군요....

로쟈 2010-12-27 10:53   좋아요 0 | URL
원래는 번역자로 더 유명했어요...

자꾸때리다 2010-12-27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성도 교수의 첫번째 번역은 곳곳에 오역이 산재해있다는 혹평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절치부심하셨는지 궁금하네요. 별로 믿음이 안 가서...

로쟈 2010-12-27 10:55   좋아요 0 | URL
서문에 보면 상당한 자부심이 피력돼 있습니다. 사실 소쉬르에 대해선 권위자인 만큼 동문서 번역보다 더 나을 수는 있습니다. 베테랑 편집자와 작업했다면 좋은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고요...

paul 2010-12-27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 해제와 역주로 인해서 볼륨이 늘어났네요...역시나 들고다니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두께네요^^ 그래도 올해 마지막 가장 반가운 뉴스였습니다. 명작들이 그러하듯 이 책도 많은 생각의 갈피들을 생산시켜주는 것 같습니다. 바늘에 실을 꿰듯이 읽어가고 있는데, 장인(데리다)의 숨결을 느끼기에는 역시 부족한 감이 없진 않지만, 데리다의 텍스트는 가능한한 데리다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죠...제가 보기엔 자부심이라기 보다는 번역을 놓고 절치부심한 흔적이 곳곳에 눈에 띄더군요.

로쟈 2010-12-27 23:38   좋아요 0 | URL
네, 절치부심도 맞는 말 같습니다. 노심초사한 노작이라고 할까요.^^

청루 2011-01-21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말과 사물은 어떤 분이 번역하시는지 아시는지요?

로쟈 2011-01-22 00:35   좋아요 0 | URL
얼핏 <광기의 역사> 역자가 하는 걸로 들었는데, 확실치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