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팬데믹 패닉>은 11개의 장과 부록, 그리고 특별기고문으로 구성돼 있다. 200쪽이 안 되는 분량의 책 구성이 그렇기에 각 장은 더욱 짧아서 단숨에 읽을 수 있다. 10페이지 분량이라면 10분이면 충분히 읽게 된다. 가끔 곱씹어볼 만한 단락들과 만냔다 하더라도.

간간이 쉬는 시간마다 한두 장씩 읽고 있는데 어젯밤에 읽은 것 중 하나가 2장 ‘우리는 왜 늘 피로한가?‘다. ‘피로‘ 하면 떠올리게 되는 바로 그 저자와 책,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검토하고 있는 장이다. 나도 몇 차례 강의에서 다룬 바 있는데, 지젝의 두 가지 비판은 예상과 별로 다르지 않다. 성과라면 영국 작가 카밀라 샴지의 소설 <홈 파이어>를 소개받아 바로 주문한 것. <안티고네>를 다시 쓴 소설이라는데 다행하게도 번역돼 있다.

지젝은 한병철이 제시하는 새로운 주체성으로서 성과 주체에도 계급차별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는데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 회사를 소유하거나 경영하는 최고 관리자와 집에서 자신의 컴퓨터와 홀로 씨름하며 소일하는 불안정한 노동자 사이에 확연한 간극이 있다. 물론 그들은 분명 우리가 아는 의미에서 주인도 노예도 아니다.˝

마지막 문장은 교정이 필요하다. 한병철이 말하는 성과주체는 자기 착취적 주체로서 오늘날 주인과 노예의 계급 투쟁은 내부로 전이되었다는 게 핵심 주장이다. 우리는 각자가 자신의 주인이자 노예라는 것. 그렇지만 ‘최고 관리자‘와 ‘불안정한 노동자‘가 그렇게 동일한 주체성을 갖는가, 동일시될 수 있는가라고 지젝은 묻는다. 번역문은 이러한 맥락을 놓쳤다.

마지막 문장은 ˝they are definitely not both a master and a slave in rhe same sense.˝를 옮긴 것인데 ˝그들은 결코 같은 의미에서 ‘주인이면서 동시에 노예‘인 게 아니다˝ 정도로 옮겨져야 한다. 같은 ‘성과주체‘라 하더라도 엄격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이어트와 결식을 구별해야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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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8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28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29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시 기차 안에서 마스크를 쓰고서 지젝의 <팬데믹>을 읽는다. 지젝이 인용한 헤겔의 통찰을 읽는다. 그에 대한 냉소는 지젝도 예상한 바인데, 그보다 먼저 헤겔이 적시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울 게 없다는 사실이라고 헤겔은 썼다. 그러니 감염병 덕분에 우리가 더 현명해지리라는 주장은 의심스럽다.˝

흠, 읽으면서 그리고 옮겨적으면서 고개를 갸웃한 대목이다. 헤겔은 무엇에 대해서 냉소하는 것인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울 게 없다? 헤겔이 역사 무용론자인가? 내가 한글을 잘못 이해하는 게 아니라면 이 부분은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헤겔은 썼다˝라고 옮겨져야 한다. 그러니까 문제는 역사가 아니라 우리다(유명한 문구이므로 이 문장의 영어 번역을 온라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The only thing we learn from history is that we learn nothing from history.˝

역자가 너무 무심하게 번역한 게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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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의 <팬데믹 패닉>(북하우스)이 예상대로(어쩌면 예상보다 빨리) 번역돼 나왔다. ‘코로나 19는 세계를 어떻게 뒤흔들었는가‘가 부제. 이런 사안과 관련한 철학적 개입으로는 탁월한 순발력과 책임감을 보여준 철학자가 지젝이었기에 <팬데믹>의 출간이 놀랍지 않다. 그렇지만 놀랍지 않다고 해서 반가움이 주는 건 아니다.

팬데믹 혹은 코로나를 키워드로 하여 현 상황과 이후의 전망을 다룬 책들이 계속 나오고 있고(국내서로는 <코로나 사피엔스> 등이 있다) 이런 추세는 적어도 내년까지는 이어질 듯싶은데 그래도 내게는 지젝의 책이 기본서 역할을 해줄 것이다. 게다가 한국어판에는 한국어판 서문을 포함해 영어판 원저에 없는 글들도 추가돼 있다. 책에 대해서는 이번 여름에 강의 일정도 잡아보려 한다.

지젝의 서문은 ‘나를 만지지 마라!‘는 (부활한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했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란 문제로 시작한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고 자처하는 나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데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고 자처하는 나˝라는 말이 믿기지 않아서 원서를 찾아봤다. 지젝이 쓴 표현은 ˝an avowed Christian atheist˝이다. 역자가 무심코 잘못 번역했는데 ˝Christian atheist˝는 ˝Atheist˝와 구별되며 ‘기독교 무신론자‘라고 옮겨야 한다. 그게 어색하다면 ˝소위 기독교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나˝ 정도로 옮길 수 있겠다.

책을 읽는 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지젝에 대한 ‘오해‘ 같아서 읽다가 적어놓는다. 기차 안에서 마스크를 쓰고 지젝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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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y1717 2020-06-26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의일정 나오면 블로그에 꼭 알려주세요 :)

로쟈 2020-06-27 14:29   좋아요 0 | URL
네, 공지할게요. 8월중일 거 같아요.~

바람돌이 2020-06-26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오랫만에 인사드려요. 무수히 많은 로쟈님의 숨은 팬 중에 하나입니다. ㅎㅎ
저는 지젝 글 어렵건데 요 책은 좀 덜 어려울까요? ㅠㅠ

로쟈 2020-06-27 14:28   좋아요 0 | URL
네, 지젝의 책 가운데서는 가장 쉬운 편에 속합니다.^^
 
 전출처 : 로쟈 > 신체 없는 기관, 혹은 카메라의 눈

14년 전에 쓴 글이다. 그맘때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이 번역돼 나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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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들뢰즈에 대한 헤겔적 비역질

13년 전에 쓴 리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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