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은 1,2부로 구성돼 있는데, 각 부는 성립 시기가 다르다. 1부는 1964년에 발표된 초판을 구성했으며, 1963년 논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통일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들뢰즈의 프루스트 읽기는 1940년대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고 한다). 70년대에, 즉 가타리와의 협업 이후에 추가된 2부는, 프루스트의 통일성을 비틀면서 <프루스트와 기호들>이란 책의 통일성도 무너뜨리고 기형적인 것으로 변형한다(이에 대한 판단과 해석은 별도의 문제다).
아래 인용문은 1부의 결론(‘사유의 이미지‘)에서 가져온 것으로 프루스트적 기호의 의미를 다시 한번 설명해준다. 한데, ˝명석한 관념들보다 분명한 의미들은 없다˝는 문장은 바로 이어지는 ˝기호들 속에는 내포된 의미들밖에 없다˝는 말과 호응하지 않는 오역이다(영어판으로 확인했는데 불어판이 다를 것 같지 않다). ˝명석한 관념(clear idea)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의미(explicit signification)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호 속에 내포된(implicated) 의미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로 기호이다. 기호는 우연한 마주침의 대상이다. 그러나 마주친 것, 즉 사유의 재료의 필연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분명히 기호와의 그 마주침의 우연성이다. 사유 활동은 단지 자연스러운 가능성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사유 활동은 단하나의 진정한 창조이다. 창조란, 사유 그 자체 속에서의 사유 활동의 발생이다. 그런데 이 발생은 사유에 폭력을 행사하는 어떤 것, 처음의 혼미한 상태, 즉 단지 추상적일 뿐인 가능성들로부터 사유를 벗어나게 하는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다. 사유함이란 언제나 해석함이다. 다시말해 한 기호를 설명하고 전개하고 해독하고 번역하는 것이다. 번역하고 해독하고 전개시키는 것이 순수한 창조의 형식이다. 명석한 관념들보다 분명한 의미들은 없다. 기호들 속에는 내포된 의미들밖에 없다. 그리고 만일 사유가 기호를 펼칠 힘, 기호를 하나의 관념 속에서 전개시킬 힘이 있다면 그것은 관념이 감싸여지고 둘둘 말린 상태로 이미 기호 안에 있었기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관념은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즉 기호]의 숨겨진 어두운 상태 속에 있기 때문이다. - P1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