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니까!”

10년 전에 쓴 리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번주 주간경향(1384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빅토르 위고의 초기 대표작 <파리의 노트르담>에 대해 적었다. 영화와 뮤지컬 원작으로도 널리 알려진 소설의 의의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주간경향(20. 07. 06) 노트르담 대성당의 예술적 가치와 역사적 의의


빅토르 위고의 대표작은 <레미제라블>(1862)이지만 그만큼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파리의 노트르담>(1831)을 빼놓을 수 없다. 위고의 많은 작품이 영화나 뮤지컬로 만들어져 원작을 뛰어넘는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 쌍두마차에 해당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레미제라블>이 제2 제정에 맞서 망명 중이던 위고가 예순의 나이에 발표한 원숙한 작품이라면 <파리의 노트르담>은 낭만주의의 기수를 자처한 청년 위고의 패기를 담고 있다. 그렇지만 작가의 연보를 지우고 읽는 독자들에게 그 패기는 관록으로 읽힐 만큼 놀라운 식견과 입담을 자랑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흔히 집시 처녀 에스메랄다와 성당의 종지기 꼽추 카지모도의 사랑 이야기로 유명하지만 <파리의 노트르담>의 성취는 그런 이야기에 있지 않다. 문학사가 랑송의 평을 빌리자면 사랑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 인물들의 심리묘사는 불충분하고 보잘것없다. 심리소설의 정수를 보여주는 스탕달의 <적과 흑>보다 한 해 뒤에 나온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약점은 치명적일 수 있다. 비록 중세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의 노트르담>은 이러한 약점을 상쇄해주는 미덕을 갖추고 있는데, 그것은 건축예술과 역사에 관한 작가의 식견이다.


지난해 안타까운 화재로 세계의 주목을 받은 노트르담 대성당은 파리의 랜드마크로서 대표적인 건축물이지만 위고가 이 작품을 쓸 무렵에는 방치된 상태였다. 14세기에 완공된 건축물로서 세월의 침식은 불가피했고,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일부 훼손돼 아예 헐어버리자는 여론도 대두했다. 이러한 여론을 반전시킨 이가 바로 위고였고, 그것이 <파리의 노트르담>의 업적이다. 위고는 소설의 여러 장을 할애해 노트르담 대성당의 공간적·예술적 가치와 역사적 의의를 웅변한다. 이러한 관심의 환기 덕분에 10년 뒤 성당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1864년에 마무리된다. 건축가 외에도 이 건물에 산파가 있다면 의당 위고를 지목해야 하리라.

위고는 이런 건축물이 개인적인 작품이 아니라 사회적인 작품이라고 말한다. “천재적인 사람들이 내던져놓은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진통을 겪은 민중의 산아요, 한 국민이 남겨놓은 공탁물”이라는 것이다. 청년 위고는 정치적으로 왕당파에 가까웠지만, 역사를 보는 안목에서는 장래 공화주의자 위고를 미리 읽게 한다. 위고에 따르면 모든 문명이 신정에서 시작되어 민주주의로 끝난다. 그 각각을 상징하는 것이 건축술과 인쇄술이다.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에스메랄다를 탐하는 부주교 프롤로는 구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인데, 시대의 전환기를 맞아 책(인쇄술)이 건물(건축술)을 죽이리라고 예견한다.

15세까지는 건축이 ‘위대한 책’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 ‘돌의 책’은 차츰 ‘종이의 책’에 자리를 내놓게 될 것이다. 위고는 인쇄된 책에 의해 죽임을 당한 건축술을 애도한다. 그는 인쇄술의 위대함을 부인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대리석의 책장들에서 과거를 다시 읽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돌의 책과 종이의 책을 모두 사랑하며 존중한다고 할까. 15세기 말을 배경으로 한 <파리의 노트르담>에는 에스메랄다의 구애자가 여럿 등장하지만 누구도 그의 짝이 되지는 못한다. 부주교도, 시인도, 종지기도. 역사의 전환기는 누구도 주인이 아닌 시대여서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일 강의에서 작가들과 만나는지라 ‘작가들과 함께하는 여름‘이란 건 새삼스럽지 않다. 그렇지만 ‘~와 함께하는 여름˝ 시리즈의 책이 몇년 전에 나온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에 더하여 <호메로스와 함께하는 여름><보들레르와 함께하는 여름>이 이번에 추가되니 뭔가 그럴듯한 ‘여름‘이 된 듯한 느낌이다. <보들레르와 함께하는 여름>의 저자 앙투안 콩파뇽은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의 공저자이기도 하다.

˝이 책은 라디오 방송국 <프랑스 앵테르>에서 2014년 여름에 방송된 <보들레르와 함께하는 여름>을 바탕으로 저술되었다. 저자 앙투안 콩파뇽은 보들레르의 작품 세계를 “종횡무진” 마음 가는 대로 헤집고 다니며 우리로 하여금 <악의 꽃>과 <파리의 우울>을 다시 펼쳐 들게 만든다. 서른세 개의 짧은 장章을 통해, 어디에도 분류할 수 없고 어디로도 환원시킬 수 없는 인간 보들레르와의 만남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다시 펼쳐들게 만든다고 하니까 실제로 그런지 확인해봐야겠다. 보들레르를 거쳐서 호몌로스까지도 만나게 될지는 겪어보고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목만 보고는 입센의 희곡(마지막 작품)을 떠올렸다. 설마 같은 제목의 책을? 이라고 생각했지만, 원저는 에세이 선집이다. 미국의 시인이자 비평가 에이드리언 리치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바다출판사). 시인이자 비평가에 덧붙여 페미니스트 운동가로 알려져 있는데, 최근 몇 년간 문학계에서 꾸준히 주목받아온 시인이다. 

















"리치는 상상력의 세계로 뛰어들었던 사람. 현실의 속박에서 상상력을 발휘해 희망을 품는 삶이야말로 새로운 언어와 공간을 찾게 해준다는 사실을 평생 시와 산문을 쓰는 것으로 보여주었다. 이 책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는 그의 삶을 통해 '살아남은 보물'과 같은 산문집이다."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이번 학기에도 계속 읽고 있어서 자연스레 챙겨두게 된다. 시집은 강의에서 다루기가 어려운 점이 있었는데, 에세이 선집이라(분량은 좀 된다) 반갑다. 
















두 권의 시집(시선입)이 소개돼 있지만, 리치의 책으로 가장 먼저 나왔던 건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다. 2002년에 나오고 2018년에 재간되었다. 모성 신화를 비판한 책(모성애에 대한 재고가 알려진 대로 페미니즘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다). 리치의 책들을 챙기면서 구해놓았는데, 생각해보니 또 행방은 모르겠다(당장 이번주 강의할 책 가운데 토니 모리슨의 <술라>도 못 찾고 있다). 


전지적 강사 시점에 따라 나로선 언제 강의에서 다룰 수 있을지가 관심사인데, 아직은 일정은 잡을 수 없지만 언젠가는 만나게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달 트래블러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지난해 가을 버지니아 울프의 런던 산책을 따라가본 일을 복기해보았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트래블러(20년 6월호) 버지니아 울프의 런던 산책


파리가 에술의 도시라면 런던은 문학의 도시다. 지나친 단순화이지만 <문학의 도시, 런던> 같은 책도 나온 걸 보면 그럴 듯하게도 여겨진다. 그 문학의 도시에서 지분을 갖고 있는 작가가 당연하게도 한둘이 아니지만 나로선 19세기 대표 작가로 찰스 디킨스와 20세기 작가로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리게 된다. 1800년에 인구가 100만을 넘어서고 20세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600만에 달하게 되는 런던은 소위 근대적 대도시의 표준이었다. 자본주의 근대의 변화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도시가 바로 런던이었던 것이다.

이 런던의 모습을 포착한 것이 근대소설의 성취였고 디킨스의 업적이었다. 그는 근대사회의 축도로서 19세기 중반 런던의 역동적인 사회상을 소설에 담았다. 작가로 불리지 않았다면 런던의 산책가로 기억됐을 법한 울프는 빅토리아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로 변화해가는 런던의 공기를 그려냈다. 지난해 가을 문학기행차 런던을 찾으면서 내가 염두에 둔 것이 그 두 가지였다. 디킨스가 <올리버 트위스트>를 집필한 집(디킨스문학관)을 방문하고 울프가 산책한 런던의 도심을 걸어보기. 
















런던 거리를 헤매는 기쁨
런던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울프는 런던을 사랑한, 특히 런던의 거리를 사랑한 대표적 작가다. 울프를 읽고 울프와 함께 런던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녀와 함께 런던을 걷는다는 뜻이다. 길잡이가 되는 교본이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댈러웨이 부인>(1925)이다. 울프식의 '의식의 흐름'을 최대치로 보여준 모더니즘 소설의 고전이지만, 댈러웨이 부인을 포함하여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동선이 그 자체로 런던 산책의 교본이 된다. 세인트제임스파크에서 만난 지인이 "어딜 그렇게 가십니까?"라고 묻자 댈러웨이는 이렇게 답한다. "난 런던 거리를 걷는 게 좋아요. 정말이지 시골길을 걷는 것보다 낫거든요."  

'런던 거리 헤매기'라는 산문에서 울프는 "런던 거리를 헤매는 기쁨"을 탐닉하는 데 가장 좋은 시간이 겨울의 저녁 무렵이라고 했지만 댈러웨이 부인이 저녁 파티에 필요한 꽃을 사러 집을 나서는 건 6월 중순의 어느 날 아침이다(연도로는 1923년으로 1차세계대전의 상흔이 아물어가던 시점이다). 아침  공기를 들이키자마자 댈러웨이는 열여덟 살 시절의 자신을 떠올린다. 소설 자체는 여름날의 단 하루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주인공은 회상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며 30여 년의 시간을 넘나든다. 상쾌한 아침 공기가 매개가 돼 댈러웨이가 떠올린 건 런던근교 코츠월드의 부어턴에서 맞았던 열여덟 살 때의 아침이다. 아침마다 창문을 활짝 열고 공기를 들이마시면 "마치 대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같았다!"


댈러웨이 부인, 자신의 본질을 찾다
<댈러웨이 부인>의 첫 장면에서 미리부터 울프를 포함한 모더니즘 소설의 서술전략과 문학적 세계관을 감지할 수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시간의 축소와 무력화로 압축된다. 모더니즘의 전사가 되는 19세기 리얼리즘 소설에서 핵심은 시간이었다. 어떤 서사이건 간에 시간을 축으로 해서 전개될 수밖에 없지만 리얼리즘 소설에서 시간은 단순한 형식이나 배경의 차원을 넘어선다. 유명한 정식화에 따르면, 근대소설에서는 이 세계의 본질이 시간과 함께 주어진다. 다르게 말하면, 세계의 본질이 시간적 성격을 지니며 시간 속에서 드러난다. 이때 시간은 순간이나 영원이 아니라 어느 정도 규모를 갖는 시간이다. 울프의 후기 소설 제목을 빌리자면 '세월'이 리얼리즘 소설의 시간을 구성한다. 즉 리얼리즘 소설은 세월 속의 변화 자체를 이 세계의 본질과 삶의 진실로 제시한다.















반면에 모더니즘 소설에서는 그 시간의 비중이 축소되거나 약화된다. 시간의 핵심 속성이 비가역성에 있다면(우리는 엎지른 물을 되담을 수 없다) 모더니즘의 주요 전략은 이 비가역성을 완화하거나 부정하고자 한다. 자연스레 모더니즘 소설에서는 세월보다는 순간순간의 경험과 느낌이 강조된다. 울프의 경우도 '존재의 순간들'을 음미하고 보존하며 최대화하고자 한다. 이미 50대에 접어들었고 게다가 최근에 독감을 앓고 난 댈러웨이는 기력이 예전 같지 않다. 그렇지만 소설의 말미에 이르게 되면 독자는 오랜만에 찾아온 옛애인 피터 월시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여전히 찬란한 존재감을 뽐낸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세월의 부식과 마모작용에도 불구하고 댈러웨이는 자신의 본질을 지켜낸다.

댈러웨이 부인의 본질은 무엇인가? 소설의 화자는 그녀가 삶을 최대한 즐겼고, 즐기는 것이 그녀의 천성이었다고 말한다. 즐긴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존재의 순간들을 최대한 느끼고 기억하며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천성 혹은 재능을 댈러웨이 부인의 산책길을 밟으며 우리는 배워볼 수 있을까. 그런 생각하며 가을날 아침에 우리도 웨스트민스터 사원 앞에서부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소설의 서두에 댈러웨이는 웨스트민스터에 20년도 넘게 살아온 것으로 나온다. 웨스트민스터는 버킹검 궁전과 세인트제임스파크 인근의 동네로 댈러웨이는 빅토리아 스트리트를 건너서 공원으로 향한다. 

울프에서 디킨스까지, 런던 문학 여행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런던의 도심 녹지는 30%에 이르고 크고작은 공원이 3000개나 있다고 한다. 널리 알려진 하이드파크 대신에 세인트제임스파크를 가로지른 것은 그것이 댈러웨이 부인의 동선이어서다. 세인트제임스파크와 버킹검 궁전 앞을 지나 리젠트파크까지 이어진 일행의 워킹투어는 3개의 호수를 거치고 런던 도심을 가로지르는 여정으로 3시간 넘게 걸렸다. 댈러웨이 부인의 동선을 참고했지만 적어도 이날만큼은 댈러웨이보다 더 많은 거리를 걸어다닌 게 아닌가 한다(울프 자신도 종종 하루에 몇시간씩 런던 거리를 산책했다).


댈러웨이의 목적지인 꽃집은 본드 스트리트에 있었는데 도중에 그녀가 잠심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본 것은 해처드 서점의 진열장이다. 해처드 서점 바로 옆에는 큰 규모의 찻집도 있어서 일행은 자유시간을 가졌다. 소설에서야 그냥 지나치는 장소에 불과해서 주목하지 않았는데 피카딜리에 위치한 해처드 서점은 1797년에 문을 연 매우 유서 깊은 문학서점이다. 왕실의 문장까지 걸어두고 있는, 말 그대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런던의 간판서점 같았고, 책진열과 배치도 품위가 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서 찾은 곳은 디킨스박물관으로 찰스 디킨스에게 바쳐진 런던 유일의 문학관이다. 내막을 알아보니 그가 살았던 다른 집들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1837-39년까지 3년 못 되게 살았는데 당시 신혼의 디킨스는 세 자녀와 처제 등과 함께 이 집에서 살았다. 그가 사랑했던 처제 메리 호가스가 숨을 거둔 것이 1837년이었고 화제작 <올리버 트위스트>를 발표한 것도 이 시기다.

1839년말에 디킨스 가족은 식구가 늘어난 데다가 수입도 늘어서 리젠트파크 쪽의 더 큰집으로 이사한다. 박물관은 4층으로 구성돼 있는데 각층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실제 살았던 집을 박물관으로 꾸몄기 때문일 텐데 디킨스의 명성에 비하면 소박하다는 인상까지 주었다. 1870년에 사망한 디킨스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된다. 박물관을 층마다 둘러보는 것으로 목적을 달성한 일행은 디킨스박물관 입구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웨스트민스터에서 시작한 런던 문학기행이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