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린 코리건의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책세상, 2016)는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의 독자라면 필독할 만한 책이다. 단순히 전공자가 쓴 책이라기보다는 <위대한 개츠비>를 '가장 위대한 미국소설'이라고 생각하는 열독자가 쓴 찬가다. 저자가 영문학자에 문학비평가이기도 해서 이 찬가가 작품분석과 해석의 모양새를 띠고 있다는 게 여느 찬가와 다를 따름이다.

 

 

오랜만에 나도 문학 열강을 듣는 기분으로 책을 읽으며 저자에게 감염이 되었는지 피츠제럴드에 관한 책을 여러 권 구입했고, 심지어 이미 두어 권 갖고 있는 영어판 <위대한 개츠비>도 또 구입했다. 한데 좀 낭패다 싶은 대목과 만났다. 소설의 결말에 대한 해석 부분이다. 저자는 "이 소설이 물과 익사의 심상에 매달린다는 점"을 여러 근거를 통해 설득력 있게 주장하면서 그 피날레로 마지막 단락을 예로 든다.  

"개츠비는 녹색의 불빛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 앞에서 멀어지는, 절정의 순간과 같은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것이 우리한테서 달아났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 내일은 우리가 더 빨리 달리고, 더 길게 팔을 뻗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맑은 아침에---"(64쪽)

정확하게는 소설의 끝에서 두번째 단락이다(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우리는 계속 나아간다, 흐름을 거스르는 보트들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리면서도."인데, 피츠제럴드의 묘비에 새겨진 문장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눈에 띄는 것은, 눈에 띄어야 하는 것은 마지막의 긴 줄표이다. "어떤 평론가들은 마지막 문장의 불필요하게 긴 줄표에 충격을 받았다."고 할 정도다(인용문에서는 짧은 줄 세개를 붙여 놓았지만 하나로 이어진 것으로 봐달라). 이에 대해서 "몇몇 평론가는 이 터무니없이 긴 줄표가 개츠비가 소유한 선착장 끄트머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고 주장했다."

 

 

<위대한 개츠비>의 독자라면, 그리고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눈썰미 있게 본 관객이라면 기억하듯이, 1장 끝 무렵에 개츠비가 해협 너머의 데이지의 저택 선착장(녹색의 불빛)을 향해 팔을 뻗던 장소가 바로 개츠비의 선착장이다. 모린 코리건도 이러한 해석에 가세한다. 익사하지 않기 위해 계속 헤엄을 친다는 것은 비단 이 작품에서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는 피츠제럴드 자신의 인생관이었다. 물론 그러다 언젠가는 기운이 빠질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날'이 올 것이다. "개츠비가 수영장에서 죽은 바로 그날처럼 우리가 선착장에 끄트머리에 도달하고 떨어져 물에 빠져 죽는 그날이." 

"이런 독법에 따른다면, <개츠비>의 마지막 부분에 피츠제럴드가 선착장만큼이나 긴 줄표를 심어둔 것은 어쩌면 미국 문학사상 최초의 그래픽노블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64-65쪽)

 

전문가들의 과잉해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우리로선 그렇게 과잉해석할 여지도 없다는 점. 왜냐하면 이 긴 줄표가 번역본들에서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전수조사는 하지 못하고 책장에 있는 <개츠비>들을 눈에 띄는 대로 확인해본 결과 대부분 긴 줄표를 평범한 말줄임표로 대체하고 있었다(문학동네판만은 못 찾아서 바로 확인하지 못했다). 이 '선착장'이 사라진 것이다!

 

 

심지어 내가 갖고 있는 몇 권의 영문판에서도 긴 줄표 대신에 짧은 줄표가 쓰이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맑은 아침에---"가 "그러다 보면 어느 맑은 아침에-"로 바뀐 것. 애초에 그렇게 된 판본을 우리말로 옮겼으니 한국어판 역자나 편집자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 순전히 이 긴 줄표를 확인하기 위해서 다른 영어판을 구해야 할까 잠시 생각해봤지만(이건 줄표 하나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선착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막상 긴 줄표로 되어 있는지 여부를 알지 못한 채 책을 주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내가 염두에 둔 건 스크리브너판이다. 애초에 <위대한 개츠비>를 펴낸 출판사).   

 

여하튼 내가 비평을 가리켜서 '다시 읽게끔 하는 것'이라고 할 때 뜻한 바는 바로 이런 사태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 읽고 또 읽는다...

 

16. 02. 10.

 

 

P.S. 지나는 김에 번역서에서 누락된 곳 하나. "위대한 미국 소설의 지원자들을 한번 모아보자. <모비딕> <보이지 않는 인간>, <주홍글씨>, <허클베리 핀>, <앵무새 죽이기>."(21쪽) 무엇이 빠졌나?(말이 나온 김에 지적하자면, '지원자들'은 '후보자들'로, <주홍글씨>는 <주홍글자>로 옮기는 게 낫겠다.) 물론 이 목록만 가지고는 알 수 없지만, 같은 목록이 한번 더 나오므로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계급을 다룬 미국의 소설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이다. 사실, 그 분야 고전들(<모비딕><허클베리 핀>, <앵무새 죽이기>, <보이지 않는 사람>, <빌러비드>) 가운데 인종 대신 계급을 중시한 작품으로는 유일하다."(26쪽) 

여기서도 '그 분야 고전들'은 '미국문학의 정전들'로 옮기고, <보이지 않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 통일시켜주는 게 낫겠다. 그렇다, 빠진 작품은 <빌러비드>다. 21쪽에서 <빌러비드>가 누락되었다. <보이지 않는 인간>이나 <빌러비드>나 모두 인종 문제를 다룬 대표적 작품이다. 반면 <개츠비>는 계급 문제를 다룬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는 게 저자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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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간단한 페이퍼를 하나 적는다. 미국 작가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시스터 캐리>(문학동네, 2016) 출간 소식. <미국의 비극>으로 잘 알려진 작가의 데뷔작(1900)이다(<미국의 비극>도 <아메리카의 비극>이란 제목으로 더 친숙한데, 언젠가 제목이 그렇게 바뀐 모양이다). 둘다 범우사판으로 기억되는 작품. <시스터 캐리>는 문학동네판으로 이제 바꿔 타도 되겠다.

 

"1900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19세기 말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카고와 뉴욕을 배경으로, 대도시로 상경한 시골 처녀가 배우로 성공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린다. 미국 자연주의 문학의 거장답게 도덕률과 무관하게 작동하는 인간의 욕망을 생생하고도 냉철하게 묘파해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가 고수되던 당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시대를 앞선 작품으로 인해 빚어진 출판사와의 대립과 출간 과정에서 발생한 논란은 문학사에서 유명한 일화로 손꼽힌다."

작가 드라이저에 대한 보충적인 소개는 이렇다. "1900년 첫 소설 <시스터 캐리>를 발표하지만 비도덕적이라는 여론의 비난에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며 자살을 결심하기까지 한다. 그 영향으로 10년 후에야 두번째 작품 <제니 게르하르트>를 발표하게 된다. 이후 드라이저는 <자본가><거인> <천재><미국의 비극><방파제> 등의 작품을 꾸준히 출간하며, 미국 문학사에서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를 넘어 윌리엄 포크너, F. 스콧 피츠제럴드, 솔 벨로, E. L. 닥터로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45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곧 <시스터 캐리>와 <미국의 비극> 말고도 주요 작품이 몇 편 더 되지만, 다 둘러볼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두 작품 정도만 독서목록에 포함시켜야겠다. <미국의 비극>은 "종교와 가난 때문에 심한 제약을 받고 불우하게 성장 한 주인공 크라이드가 자신이 동경해 온 상류사회에로의 진출을 위해 가난한 애인을 죽이고 그 자신도 살인범으로 처형된다는 이야기. 우리에게는 영화 <젊은이 의 양지>로 소개된 작품이다." 

 

드라이저에 대해서는 스콧 피츠제럴드가 "드라이저는 우리 시대 작가들 중 최고"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고 하는데, 통상적으로는 미국문학사에서 헨리 제임스 이후에 중요한 첫 걸음을 내딪은 작가로 피츠제럴드를 꼽는다. 제임스와 피츠제럴드 사이에 다리를 하나 더 놓자면 드라이저가 자리하게 되는 것. 이러한 평가가 타당한 것인지, 인색한 것인지는 작품을 읽어보고 판단해봐야겠다...

 

16. 0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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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에서 펴내는 월간 소식지 미르(313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올해가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이어서 여러 기념행사가 예정돼 있는데, 국립극장에서 2월말에 NT Live(공연 실황을 녹화하여 상영하는 작품)로 <햄릿>과 <코리올라누스> 두 작품을 공연한다(http://www.ntok.go.kr/ 참조). 이에 맞춰 셰익스피어 비극의 현재성에 초점을 두고 쓴 글이다.  

 

 

 

미르(16년 2월호) 현재진행형 셰익스피어 패러다임

 

세계문학의 대명사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비극에 대해서 무얼 더 말할 수 있을까.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얼 더 보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간추려 말하는 것 정도겠다. 특별히 올해가 그의 서거 400주년이라는 사실에 기대어 말이다.

 

알려진 대로 세계문학사에서 셰익스피어의 자리는 세 정점 가운데 하나를 이룬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 첫 번째 정점이었다면,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두 번째 정점에 해당한다. 그리고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도스토옙스키)의 러시아소설이 그 세 번째 정점이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가 세계문학사의 3대 걸작으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셰익스피어의 <햄릿>,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꼽았을 때 그린 구도가 바로 그에 상응한다.


비극 외에도 희극과 사극, 그리고 상당 분량의 소네트를 남겼지만 아무래도 셰익스피어 문학의 본령은 그의 비극이다. <햄릿>에서 시작해 <오셀로><리어왕><맥베스>에 이르는 4대 비극의 주인공들은 사실 셰익스피어란 창조자보다도 더 유명하다. 희극과 사극에서라면 그와 견줄 만한 작가가 세계문학사에 전혀 없지 않지만, 비극 작가로서 셰익스피어의 위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만의 새로운 비극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흔히 ‘운명비극’이라고 불리는 그리스 비극에 견주어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성격비극’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비극을 초래하는 원인이 이미 정해진 운명이 아닌 각 인물의 성격에 두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은 신탁(운명)에 맞서려는 인간의 오만한 시도가 결국은 파국에 이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신의 권능에 비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그가 아무리 우월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한갓 어리석고 무력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리스 비극은 우리에게 인간으로서의 분수와 겸손을 가르친다.

 


한편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주인공들은 성격적 결함이나 헛된 욕망의 희생자로 그려진다. 주어진 운명에 더해서 그들의 성격이 불행을 자초한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부터가 대표적이다. 세계연극사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품이 <햄릿>이라지만 햄릿은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작중에 등장하는 다른 모든 인물들과 견주어보아도 그렇다. <햄릿>에서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노르웨이의 왕자 포틴브라스와 비교한다. 이 두 왕자는 부왕과 같은 이름을 갖고 있고 부왕의 죽음에 복수를 하려고 한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하지만 이 복수에 아무런 주저함도 내보이지 않는 포틴브라스와 비교하면 햄릿의 우유부단함은 두드러진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그는 고뇌한다. 바로 그런 선택지가 곧 햄릿이 성격을 가진 존재라는 걸 입증한다. 이때 성격이란 내면이다. 미지수이자 수수께끼다. 이런 내면과 함께 햄릿은 예측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부왕의 유령이 나타나 복수를 명령함에도 그가 주저하는 것은 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존재여서다. 그는 한갓 운명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는 존재다.

 


<맥베스>에서도 맥베스는 마녀들의 예언을 듣고서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보고자 한다. 그는 덩컨왕을 살해하고 왕이 됨으로써 예언을 실현하지만, 왕이 된 이후에는 뱅코우(뱅쿼)의 자손이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에 맞서고자 한다.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그는 “인생이란 그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하지만(운명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겠다), 그는 끝까지 투항하지 않고 결연한 죽음을 맞는다. 단순히 권력 찬탈자의 최후를 인과응보의 교훈으로 삼기에는 그의 비장함이 마음에 와 닿는다. 분수를 넘어선 인간의 파국을 보여주지만 <맥베스>는 더 이상 겸손을 설교하지 않는다.

 


4대 비극 가운데서는 <맥베스>가 마지막 작품이지만, 셰익스피어의 비극 전체 중에서는 <코리올라누스>가 마지막 작품에 해당한다.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정치극에서 셰익스피어는 반민중적이면서 동시에 반귀족인 주인공 코리올라누스를 새롭게 창조한다. T.S. 엘리엇이 <햄릿>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한 이 작품은 2011년에 랠프 파인즈(레이프 파인스)에 의해 현대적으로 각색되기도 했다. 이 영화 버전에서는 코리올라누스가 광적인 반민주주의자가 아닌 급진 좌파로 재해석되었다. 셰익스피어의 현재성이란 그러한 재해석의 가능성을 무한히 양산해내는 데 근거한다. 


아주 간단히 말해보자. 햄릿과 맥베스와 코리올라누스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들과 동시대인이다. 더불어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이다. 그가 비평가 해롤드 블룸의 표현대로 ‘인간성’을 발명해냈다고 하면, 그리고 우리가 그 인간성으로부터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아직 ‘셰익스피어 패러다임’ 안에 있다. ‘서거 400주년’이란 말은 한갓 풍문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16. 01. 31.

 

NT Live <햄릿> 공연포스터

 

P.S. 이번 국립극장의 <햄릿>은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연을 맡은 <햄릿>이다(http://www.ntok.go.kr/user/jsp/ua/ua01_1db02v.jsp?menu_code=MA0130&page_nm=ua01_3db01l&page_alt=전체일정&pfmc_inf_idx=1880). 나로선 <이미테이션 게임>(2014)의 배우로 기억하는데, 영국에서는 국민배우로 각광받는 듯하다. 그가 연기하는 새로운 햄릿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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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나온 반가운 책은 오에 겐자부로의 단편집 <오에 겐자부로>(현대문학, 2016)이다. 두툼한 책으로 오에의 주요 단편들이 망라된 중요한 선집.

 

 

작년에 나온 산문집 <읽는 인간>(위즈덤하우스, 2015), 장편소설 <익사>(문학동네, 2015) 등과 함께 오에 문학 전반을 조감하는 자료로서도 의미가 깊다. 이번 단편선에는 작가의 후기와 함께 노벨문학상 수상연설도 수록되었고, 국내에 소개된 오에 작품 목록도 실렸다. 여러 모로 유익한 작품집이다.

 

 

적잖은 일본문학 작품이 매주 나오고 있지만 지난주에 나온 책으로는 니시 카나코의 <사라바>(은행나무, 2016)가 눈에 띈다. 제152회, 그러니까 작년 나오키상 수상작이자, 일본 서점대상 2위를 수상한 작품이라 한다(일본 서점대상이 어떤 상인지 모르겠지만).

"사람에 대한 애정과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돋보이는 소설을 꾸준히 발표해온 작가 니시 가나코의 장편소설. 니시 가나코는 2004년 데뷔한 이래 오다사쿠노스케상, 사쿠야코노하나상, 가와이아하야오 이야기상 등을 차례로 수상하며 일본 문단의 주목을 받는 여성 작가로 성장하였다. 데뷔 10주년 기념작 <사라바>로 "종래의 영역을 크게 뛰어넘은 지평의 작품"이라는 격찬을 받으며 2015년 제152회 나오키상, 일본 서점대상 2위를 수상하는 등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작년 한 해 일본 최장기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며 독자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아무려나 현재의 일본 대중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대표작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더불어 오에 겐자부로와 니시 가나코 사이를 일본문학의 '스펙트럼'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번역본은 우연찮게 같이 나온 셈이지만 뭔가 의미심장한 의도로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16. 0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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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서평을 옮겨놓는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신간 <세컨드 핸드 타임>(이야기가있는집, 2016)을 다루었다. 일차마감을 넘겨 겨우겨우 보낸 원고인데, 스마트폰으로 쓴 걸로도 기억에 남을 듯하다(임시저장해가며 메일에다 직접 적는 방식이다). 아마도 두번째이지 싶다.

 

 

경향신문(16. 01. 23)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대중의 힘든 삶은 여전

 

<세컨드 핸드 타임>은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최근작이다. 국내에는 데뷔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1985)와 <체르노빌의 목소리>(1997)가 먼저 번역되었고 2013년에 나온 <세컨드 핸드 타임>은 세 번째로 소개되는 책이다. ‘목소리 소설’로 불리기도 하지만 알렉시예비치의 책들은 소설(픽션)이라기보다는 논픽션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아니라 그가 인터뷰를 통해 만난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다만 편집한 것이기에 그러하다. 즉 그는 책을 저술한다기보다는 기획하고 인터뷰하고 편집한다. 놀라운 것은 그 결과물이 동시대의 어떤 문학작품도 보여주지 못한 압도적 진실과 감동을 전달해준다는 점이다. ‘문학을 넘어선 문학’이 있다면 바로 그의 목소리 소설들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 책이 전하는 진실과 감동은 무엇인가. 비록 번역본에만 붙어 있는 것이긴 하지만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란 부제에서 어림해볼 수 있다. ‘사회주의적 인간’ ‘소비에트적 인간’을 뜻하는 호모 소비에티쿠스는 1917년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이 만들어낸 ‘새로운 인간’을 뜻한다. 혁명은 경제적 토대와 정치체제를 바꾸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본성 자체도 개조되어야 했다. 아담 이래의 ‘오래된 사람’, 곧 낡은 인간을 대체하여 새로운 인간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역사의 주인으로 등장해야 했다. 혁명은 소비에트 문명과 함께 소비에트적 인간을 낳았고 낳아야 했다.

 

그렇듯 야심찬 기획과 함께 출현했던 소비에트 러시아도 1991년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우리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혹은 해체라고 부르는 급변의 결과였다. 70여년의 사회주의 실험을 대체하여 자본주의 러시아가 재탄생했고 이는 권위적 정치체제와 짝을 이뤄 오늘의 러시아를 구성하고 있다. 흔히 포스트소비에트라고 부르는 시대다. 하지만 알렉시예비치는 이 시대를 세컨드 핸드, 곧 중고품 시대라고 부른다. 새로운 시대라기보다는 한번 겪었던 시대의 반복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서다. 지난 몇십년간 러시아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진 것인가.          

 

알렉시예비치는 1991년부터 2012년까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다수의 평범한 러시아인들을 만나서 그들의 과거와 현재의 삶에 대한 증언을 청취했다. 스탈린 시대에서부터 푸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으며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가. 작가 자신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전환기였던 1990년대를 행복하게 기억했다. 공산주의 대신에 스스로 새로운 미래를 선택했다고 생각해서다. 그만큼 사회주의에 대한 기억은 어두웠다.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이 강제 수용소보다도 더 견딜 수 없었다.

 

공동주택에서 두 여자가 친하게 지냈는데 한 여자에겐 다섯 살짜리 딸이 있었고 다른 여자는 혼자였다. 어느 날 보안경찰이 찾아와 딸아이가 있는 여자를 체포해갔다. 여자는 딸아이를 고아원에 보내지 말고 데리고 있어달라고 이웃여자에게 부탁했다. 여자는 17년 만에야 돌아왔고 딸을 돌봐준 이웃여자의 손과 발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르바초프 시대에 와서 기록보관소가 개방되자 여자는 자신의 사건기록을 열람해 보았다. 그녀를 밀고한 이가 바로 이웃여자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고는 그 길로 집으로 와 목을 매달았다.

 

분명 소비에트 삶은 인민에게 권력을 돌려주고 새로운 문명을 구축하려는 최초의 시도였지만 결과는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주의 이후, 자본주의 러시아의 삶은 과연 얼마나 더 나아졌는가. 아이로니컬하게도 러시아의 대중 사이에서 소련에 대한 동경까지 나타나고 있다. 소련 시대의 모든 것이 유행하면서 심지어는 강제수용소 체험이 관광상품으로까지 나왔다. 사회주의 러시아가 마치 ‘오래된 미래’처럼 향수의 대상이 되었다. 바야흐로 세컨드 핸드 시대의 도래다.

 

 

사회주의도 고통스러웠지만 자본주의 러시아도 소수의 신러시아인들을 제외하면 똑같이 힘든 삶을 강요하고 있다. 오히려 더 나빠진 건 지금은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주의가 와도 민주주의가 와도 우리가 사는 건 똑같아요. 우리에겐 ‘백군’이나 ‘적군’이나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라고 말하는 목소리다. 알렉시예비치는 그런 목소리들을 모아 ‘세컨드 핸드 시대의 백과사전’을 만들었다. 솔제니친이 ‘수용소의 백과사전’으로 <수용소 군도>를 집필한 것처럼. 문학이 언제 위대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감동적인 사례다.

 

16. 01. 22. 

 

P.S. 방대한 분량의 책을 단기간에 번역해낸 역자의 노고에는 의당 감사해야 하지만,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일례로 러시아어 '나로드'를 '인민''민중''민족' 등 여러 가지로 옮겼는데, 한 단락에서도 번역어를 고정시켜주지 않아서 혼선이 빚어지기도 한다. 80쪽의 '촌사람'은 '농촌문학 작가'의 오역이고, 88쪽의 '제3국'은 '제3세계'로 옮겨져야 한다. 그리고 89쪽의 '시멘스 텔레비전'은 '지멘스 텔레비전'으로 옮겨야 할 듯싶다. 독일의 가전회사 지멘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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