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의 작가 존 윌리엄스의 또 다른 작품(무려 1973년 전미도서상 수상작) <아우구스투스>(구픽, 2016)이 번역돼 나왔다. 오래 전 작품이라 원저도 절판된 듯 보이는데 번역본이 나온 건 순전히 <스토너>에 대한 열띤 반응 때문으로 보인다. 나부터도 <스토너>의 열혈 지지자다. 윌리엄스의 모든 작품을 읽어줄 용의가 있는 건 물론이다.

 

"1965년 미국에서 발표되어 출간 50여 년이 지난 2013년 뒤늦게 유럽 독자들의 열광적 성원을 받아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던 <스토너>. <아우구스투스>는 2014년 겨울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어 수많은 한국 독자들의 가슴에 커다란 반향을 남긴 <스토너>의 작가 존 윌리엄스의 마지막 작품이다. 스스로 폐기한 데뷔작을 제외하고 단 세 편의 장편소설만을 발표했던 작가의 생전 가장 주목받았던 작품은 로마의 가장 위대하고 격동적인 시기를 다루었던 세 번째 작품이자 1973년 전미도서 상 수상작이기도 한 <아우구스투스>였다. 일반적 역사소설이 방대한 서사와 스케일로 독자들에게 접근하는 반면,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에서 시작해 아우구스투스의 최후까지 짧지 않은 시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압축적인 서사를 통한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으로 묵직한 대서사에 한결 쉽게 접근했다."

한 평범한 영문학 교수의 삶을 그렸던 <스토너>와는 달리 역사적 실존 인물을 그린 작품이라 작가의 또다른 솜씨를 엿보게 될 듯싶다.

 

 

아우구스투스에 대해서는 평전과 함께 연구서들도 나와 있다. 윌리엄스의 <아우구스투스>를 좀더 실감나게 읽기 위해서 미리, 혹은 같이 참고해봐도 좋겠다. 좀더 일찍 출간됐다면 여름용 독서거리로 안성맞춤이었을 것 같은데, 이제는 따로 가능한 일정을 짜내야 할 형편이다. 추석 연휴?..

 

16. 0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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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내가 제목을 정한 게 아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강의에서 다루게 되면서 그제 읽은 책이 <한강, 채식주의자 깊게 읽기>(더스토리, 2016)였을 따름. 물론 고전이 아닌 특정 작품에 대한 논문집이 따로 나오는 건 전례가 드문 일이고, 이 경우에는 <채식주의자>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에 편승하려는 속 보이는 기획의 산물인 게 뻔하다. 그럼에도 나름 '성실한' 강사답게 수강자를 대신해서 읽는 셈치고 읽었다. <채식주의자>를 다룬 다섯 편의 평문/논문 모음인데, 네 편은 어설프거나 내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글이었고, 한 편 정도만 읽을 만했다.  

 

 

그런데 사실 더 큰 문제는 <채식주의자>란 작품 자체가 내게는 별로 인상적이지 않은 어설픈 작품이라는 점. 맨부커상 수상작이라는 후광을 달게 된 작품에 대해서 냉담하게 말하는 건 자칫 누워서 침뱉기가 될 수 있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시적인 이미지나 문체가 부분적으로 강한 인상을 줄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말이 되는 이야기를 쓰는 데에서 산문작가의 본분을 찾을 수 있다면, 이 작품에서 나는 그런 작가를 발견하기 어렵다. 리얼리티가 현저하게 부족하다고 여겨져서다. 억지스러운 구석이 많다는 얘기다. 김연수 작가의 품평을 흉내내자면 "개연성은 있으나 핍진성이 부족하다."

 

이 작품에 대한 불만은 한 시간 내내 떠들 수 있지만, 그냥 한 대목만 지적하자면, 주인공 영혜의 트라우마적 기억에 자리한 흰 개 이야기만 하더라도 그렇다. 집에서 키우던 멀쩡한 개가 어떻게 하다 주인집 어린 딸(영혜)을 물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자초지종이 얘기가 안 돼 있어서 모를 수밖에) 그렇다고 해서 그 개를 오토바이에 묶어 내달려서 입에 거품을 물고 죽게 만든 다음(달리다 죽은 개가 고기가 부드럽다는 게 이유다) 마을 사람들까지 불러서 온 가족이 개고기를 포식했다는 에피소드다('흰 개'도 보신탕으로 먹나? 드문 일이지 싶다).아홉 살짜리 주인집 딸을 물어뜯은 개라면 '미친 개'이고, 미친 개라면 보신탕으로 먹는다는 게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은가. 해서 어떻게 해서 다리를 물어뜯겼는지 설명이 좀 필요한데, 작가는, 그리고 영혜는 말줄임표로 대신한다.

 

"......내 다리를 물어뜯은 개가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묶이고 있어."

 

소설에는 이탤릭체로 표기된 영혜의 진술에서 서두가 말줄임표로 시작하는 유일한 대목이다. 나는 이런 처리가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거두절미 스타일? 그것도 아니다. 핵심을 빼먹은 것이니까. 개한테 물렸기에 아이는 "그 개의 꼬리털을 태워 종아리의 상처에 붙이고, 그 위로 붕대를 친친 감고" 대문간에 나가 그 개가 학대받다 죽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꼿꼿하게 서서 지켜본다. "번쩍이는 녀석의 눈과 마주칠 때마다 난 더욱 눈을 부릅떠." 아무리 개에 물렸다고 하더라도 피를 토해 내면서 죽어가는 개의 모습을 보면 연민을 느낄 법도 하지만 아이(영혜)는 그렇지 않았다(이미 어릴 때부터 독한 성격이었다는 얘긴가?). 그 개를 재료로 만든 보신탕에 밥을 말아 한 그릇을 다 비웠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죽은 개의 두 눈을 기억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그런데 성인이 되고 결혼 5년차 주부까지 된 영혜가 갑자기 그때의 기억을 상기하면서 그 폭력성에 진저리치며 채식주의자가 된다? 납득이 가지 않는 연결이고 설명이다.

 

이 대목은 유려한 번역으로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번역자 데보라 스미스도 잘 이해를 못한 성싶다. 원작과 그의 번역을 비교한 한 기사에서도 지적한 것이지만,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대."라는 문장을 데보라는 "He says he heard somewhere that driving a dog to keep running until the point of death is considered a milder punishment."라고 옮겼다. '더 부드럽다'를 'a milder punishment'(더 가벼운 벌)로 오역한 것. 아마도 한국의 개고기 문화를 몰라서 고기가 더 연해진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하긴 이해해도 문제다. 얼마나 잔혹하면서 엽기적인 응징인가! 아니면, 영어권 독자들이 느낄 법한 혐오감을 고려하여 일부러 잘못 옮긴 것인지도.

 

여하튼 이런 대목과 영혜의 꿈, 그리고 그녀의 극히 돌발적인 육식 거부 행위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작가는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냥 강렬한 이미지를 몇 개 던져놓으면 자연스레 서사가 이어지는 것으로 간주하는 듯싶다. 하지만 그런 정도로는 매우 미진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는 법이며, 그런 독자는 심지어 작가가 (시가 아닌) '산문정신'을 제대로 견지하고 있는지 의심까지 하게 된다. 문득 작가가 쓴 산문집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

 

 

그래서 찾아봤다. 에세이로 분류되는 한강의 책은 세 권 검색되는데, <내 인생의 영화>(씨네21북스, 2015)는 필자들이 한 꼭지씩 쓴 글모음집이니까 제외하면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비채, 2007)와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열림원, 2009) 두 권이고 모두 절판된 상태다.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는 좋아하는 노래에 사연을 덧붙인 책이라고 하니까 제쳐놓으면, 첫 산문집의 개정판으로 나온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 그나마 정체가 궁금한 책이다. 하지만 이 또한 '여행산문'이어서 본격적인 산문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내가 염두에 둔 건 동갑내기 작가(같은 70년생이다) 김연수의 <지지 않는다는 말>(마음의숲, 2012)이나 <소설가의 일>(문학동네, 2014), 내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문학동네, 2016) 같은 책의 한강 버전이다. 그가 이런 류의 책을 쓸 수 있을까, 궁금해진 것. 내기를 건다면, 나는 어렵겠다는 쪽이다.

 

 

이전에 읽은 기억이 없어서, 그리고 구매 기록도 없어서 첫 작품집 <여수의 사랑>과 <채식주의자> 바로 이후에 쓴 장편 <바람이 분다, 가라>를 어제 주문해서 받았다. <여수의 사랑>은 '문학과 지성 소설 명작선'에 포함돼 있는데, 이건 최인훈의 <광장/구운몽>, 그리고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과 어깨를 나란히한다는 뜻이다. 과연 그런가는 이 참에 읽어봐야 알겠지만 <바람이 분다, 가라>는 그냥 액면만으로 기대를 꺾게 만들었다. 소설이 아니라 단상집 같은 모양새여서다. 나는 지면을 빼곡히 채우는 게 일단 '산문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시처럼 듬성듬성 흩뿌려져 있는 게 아니라. 그래서 소설에서 별다른 이유 없는 행갈이의 남발을 혐오한다. <흰>이라는 책을 '한강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도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단상집' 정도 아닌가?

 

올해의 가장 핫한 작가에 대해 유감의 말을 적게 돼 나도 유감스럽지만, 어떤 사안에서건 소수의견은 있는 법이다. <채식주의자>가 어째서 좋은 작품인지 누군가 나를 설득해주면 좋겠다...

 

16. 08.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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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고전'으로 꼽을 만한 건 사뮈엘 베케트 선집으로 나온 첫 두 권이다. 소설로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와 <죽은-머리들/ 소멸자/ 다시 끝내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실패작들>(워크룸프레스, 2016)이 그것. 예고된 걸 보면 희곡을 뺀 소설, 시 평론 등이 근간 예정인데, 희곡이 빠진 것이 아쉽긴 하지만 단편작가 내지 소설가로서 베케트의 전모를 처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여 반갑다. 당장 이번에 나온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만 하더라도 최초로 번역되는 작품이다(소설 3부작 가운데 <몰로이>와 <말론 죽다>는 번역된 적이 있다.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건 <몰로이> 한편). 먼저 펴낸 나탈리 레제의 <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워크룸프레스, 2014)가 일종의 예고편이었던 것일까.

 

 

아무려나 상당히 난해한 작품들이라 독해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실험적인 산문의 한 극점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다. 이미 나와 있는 베케트의 산문 작품으로는 <몰로이> 외에 <첫사랑>에 수록된 단편들이 거의 전부였었다.

 

 

희곡이 빠진다고 하니까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데, 지난 93년에 예니란 곳에서 <사무엘 베케트 희곡전집 1,2>가 출간된 적은 있었다. 나도 구해놓긴 했는데, 절판된 지 오래 돼서 강의에서 이용할 수가 없다.

 

 

<고도를 기다리며>만 주로 강의에서 다루곤 하는데, <엔드게임>(<막판>)이나 <오, 행복한 날들> 등의 작품도 마땅한 번역본이 나오면 다루고 싶다. 마치 세계문학 강의의 '엔드게임'처럼...

 

16. 0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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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우연히 황동규 시인의 예전 인터뷰를 읽고서 검색해보다가 <시가 태어나는 자리>(문학동네, 2001)라는 산문집이 눈에 띄어 주문했다. 대부분의 책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매내역에 없어서였다. 오늘 같이 주문한 시선집과 받아보니 <나의 시의 빛과 그늘>(중앙일보, 1994)의 개정판이다. 한편의 글만 새로 추가돼 있으니 거의 읽은 셈인 책. 그래도 20년도 더 전에 읽었으니 다시 읽어볼 만하다. 책은 드문 종류의 '자작시 해설'이다.  

 

 

같이 주문한 시선집은 <삶을 살아낸다는 건>(휴먼앤북스, 2010)이다. 이미 두 권으로 묶인 시전집도 갖고 있지만(물론 손에 바로 쥘 수 없는 형편이다) 가볍게 손에 들 수 있는 걸로는 시선집이 요긴하다. 애초에 처음 읽은 황동규 시집도 <삼남에 내리는 눈>(민음사, 1975)이었다. 대학 1학년 때로 기억되니 거의 30년 전이다. 민음시인총서의 시집들이 내게 첫 한국시 읽기였다(교과서에서 나온 시들과 김소월, 윤동주 시집을 제외하고). 지금은 대부분 빛이 바랜 상태라 재작년에 몇 권은 바뀐 표지로 다시 구입했는데, 확인해보니 <삼남에 내리는 눈>은 빠진 모양이다. 조만간 구입해볼 참이다.

 

황동규 시의 의의란 무엇인가? 초기 시에 한정하면, 시인 자신의 자평이기도 하고 시선집에 해설을 붙인 이숭원 교수의 복창이기도 한데, 그 의의는 '최초의 현대적 사랑시'라는 데 있다.

"초기의 사랑 시는 김소월, 한용운, 서정주 등의 연시와는 다른, 새로운 감성의 현대적 연애시를 창조했고, 사랑을 주제로 한 연작을 통해 황동규만의 독특한 '사랑노래' 양식으로 정착되었다."(이숭원)

'즐거운 편지'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기도' 같은 초기 시에서도 읽을 수 있는 이런 대목들.

내 당신은 미워한다 하여도 그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바람 부는 강변을 보여주면은 나는 거기에서 얼마든지 쓰러지는 갈대의 자세를 보여주겠습니다.

한국시에서 '모던 러브', 최초의 현대적 사랑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강변에서 쓰러지는 갈대의 자세가 보여주는 사랑이다.

 

 

요즘의 무더위와는 관계가 없는 자세이긴 하군...

 

16. 0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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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쓰메 소세키 소설전집(현암사)이 완간된 데 이어서 이와나미 신서 시리즈로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016)도 출간됐다. 일본의 국민작가로 볼리는 간판급 소설가인 만큼 국내외 연구자들의 책이 좀 나와 있는데, 그래도 진지하면서도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는 유력하다. 사실 <고민하는 힘>의 독자라면 그의 나쓰메 소세키론도 구면일 테지만. 오쿠이즈미 히카루의 가이드북 <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현암사, 2016) 다음으로 읽어봐도 좋겠다.

 

 

가이드북이라고 하지만 모든 작품을 다 다루는 건 아니다. <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도 단편(집)을 제외하면 8편의 장편이 독서 대상이다.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는 5편이다. 데뷔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전기 삼부작(<산시로><그 후><문>), 그리고 <마음>.

 

 

 

이번에 나온 소세키 소설전집 4차분이 바로 <마음>부터 <한눈팔기><명암>까지 마지막 세 작품이다. <명암>은 미완성 유작.

 

 

<한눈팔기>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에도 포함돼 있고 이전에 몇 번 나왔던 작품. 그렇게 세계문학전집판으로도 나와 있는 대표 작품으로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그 후>를 꼽을 수 있다. 어림에 한국인이 가장 많이 읽는 작품은 <도련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마음> 순이지 않을까 싶다(일본에서도 이 세 작품이 유력해 보인다).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예전에 <도련님>과 <마음>을 문예출판사판으로 강의에서 다룬 적이 있다. 사후 100주년 기념판으로 현암사판 전집도 완간된 김에 올 하반기에는 더 많은 작품을 강의에서 읽어보려고 한다. 현재 기획으로는 판교현대백화점에서 5강(5작품), 이진아도서관에서 8강(10작품)을 진행할 예정이다.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는 내게도 유익한 길잡이다...

 

16. 07. 17.

 

 

P.S. 강상중 교수의 신작으로 <구원의 미술관>(사계절, 2016)도 이번에 출간되었다. "<구원의 미술관>은 지은이가 일본 NHK 방송사에서 40년째 이어지고 있는 인기 프로그램 '일요미술관'을 진행하며 만난 예술 작품에서 출발하여, 오늘날 현기증이 날 정도로 혼란한 세상에서 현대인은 어디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살아갈 이유와 용기를 얻을 수 있는지를 잔잔하지만 단단하게 풀어 쓴 작품이다." 얼추 서경식의 미술 순례를 떠오르게 하는 책이다. 자연스레 비교가 될 듯싶다.

 

한편 강상중의 소세키론의 핵심에는 <마음>론이 있는데, 그 '마음'을 키워드로 한 책들이 <마음의 힘>(사계절, 2015)과 소설 <마음>(사계절, 2014)이다. 소세키의 <마음>을 다시 읽으면서 강상중의 <마음>론도 되짚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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