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에서 가장 속 터지는 일은('고통스러운 일'이라고 적으려다가 '속 터지는 일'이라고 적는다. '짜증나는 일'이라고 하는 게 나을지도) 필요한 책을 제때 찾지 못하는 것이다. 불행하면서도 다행한 일은 이제 익숙한 일이라는 것. 매주 한두 권씩은 꼭 필요하지만 찾지 못하곤 한다. 강의에서 다룰 책까지도 그렇다. 갑작스레 찾으려고 하면 더더욱. 우치다 타츠루의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법>(북뱅, 2016)을 펴들었다가 그의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바다출판사, 2016)에까지 관심이 미쳐서 찾았지만 역시나 보이지 않는다. 방안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그렇게 갑자기 관심이 뻗친 것은 하루키의 <1Q84>에 대한 우치다 타츠루의 간단한 해명을 읽었기 때문. 제목이 ''아버지'를 벗어나는 방향'이다. 이때 '아버지'가 생물학적 아버지를 넘어서 '세계를 담보하는 자'를 뜻하기에 따옴표가 붙었다. 종교에서는 '신'이라고 부르고, 정신분석에서는 '대타자'라고도 부르는 것. 하루키는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무라마키 월드에는 한 가지 이야기의 원형이 숨어 있다. 그것은 '우주론적으로 사악한 것'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보초' 역할을 맡은 주인공들이 팀을 짜서 막아내는 신화적인 서사 형태다.(...) <1Q84>에는 '사악한 것'에 '리틀 피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것과 맞붙는 싸움은 현실의 1984와는 다른 '1Q84년'이라는 신화적인 투기장에서 벌어진다." 

명쾌하다. 하루키의 <1Q84>는 언젠가 읽다가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 덮은 적이 있는데, <1Q84>뿐 아니라 하루키 문학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틀을 저자는 잘 지적하고 있다(나도 주로 '아버지'와의 관계라는 틀로 하루키에 대한 강의를 하곤 한다). 그래서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를 읽어보려고 찾은 것. 더불어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법>은 대번에 '읽을 만한 책'으로 승격했다(느낌으론 그의 '가장 좋은 책' 후보다).  

 

 

 

하루키의 <1Q84>는 얼마전 문고본 판형으로 재출간되기도 했는데, 무거워서 들고다니기 어려웠던 걸 고려하면 문고본으로 읽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하루키에 대한 강의는 주로 <노르웨이의 숲>이나 <해변의 카프카><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여자 없는 남자들> 등을 중심을 해왔는데,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까지 나온 김에 대표작 강의도 계획해봐야겠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태엽 감는 새><1Q84>를 포함하는 게 목표다. 내년쯤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로맹 가리의 대표작 읽기와 함께 구상하고 있는 일정이다... 

 

16. 06. 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베르 카뮈의 대표 에세이 <시지프 신화>(민음사, 2016)의 새 판본이 나왔다. 김화영 교수의 책세상판이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판으로 다시 나온 것인데, 역자는 번역을 전반적으로 대폭 수정하였다고 한다(아직 비교해보지는 못했다). 사실 그런 기대 때문에 나로서도 다시 구입했다. 원저는 1942년작으로 <이방인>과 같은 해에 나왔다. 두 문제작을 발표할 당시 카뮈는 29세였다.

 

 

현재 <시지프 신화>는 댓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강의에서도 안심하고 쓸 수 있는 '정본'이 필요하다. 개정판이라고 하면 앞으로는 민음사판을 교재로 쓸 수 있겠다. 한데, 정말 수정이 된 것인지 좀 미심쩍기도 하다.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기도 해서 부록인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속에 나타난 희망과 부조리'를 펼쳐봤는데(나로서도 지난해에 카뮈의 카프카의 주요 작품을 강의한 이후에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던 텍스트다) 오류가 그대로 방치돼 있어서다.

 

 

일단 카프카의 <소송> 같은 작품 제목이 <심판>이라고 계속 표기되고 있는 것도 근간의 추세를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물론 몇몇 예전 번역본이나 영화 제목에서는 <심판>이 여전히 쓰이고 있지만.  

 

 

 

새 번역본들은 모두 <소송>이란 제목을 취하고 있으며 학계에서도 통용되는 작품명은 <소송>이다. 단순한 사례이지만, 번역이 '업데이트'가 안 되었다는 인상을 주는 것. 결정적인 건 각주의 한 대목이다(244쪽의 각주69).

카프카의 사상의 이 두 가지 측면에 관해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수용소에서> 가운데 "유죄(물론 인간의)는 조금도 의심할 바 없다"와 <성>의 한 구절(모무스의 말), 즉 "측량 기사 K...의 유죄는 단정하기 어렵다."라는 말을 비교해보라.  

이 각주는 책의 원주, 즉 카뮈가 붙인 각주다. '도스토예프스키'란 말도 나오기 때문에 나로선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아쉽게도 이건 착오다. 원문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나오지 않는다. 역자가 <수용소에서>라고 옮긴 책은 'Au bagne'인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가운데 <죽음의 집의 기록> 같은 것은 있지만 <수용소에서>라는 제목의 작품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서 카뮈가 비교해보라는 건 카프카의 두 작품이기 때문이다. <유형지에서>와 <성>.

 

 

<유형지에서>는 카프카의 주요 단편 가운데 하나이고 여러 단편집에 수록돼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중학생 주인공 다무라 카프카가 가장 인상 깊은 작품으로 꼽고 있기도 하다. 문제는 카프카의 이 단편이 어떻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수용소에서>로 '변신'하게 되었느냐는 것이다(역자의 상상력과 과도한 배려의 소산이 아닐까 싶다).

 

별일 아닐 수도 있지만(하지만 진지한 독자들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 수정되지 않고 계속 방치돼 있는 게 유감스러워서 적어놓는다...

 

16. 06. 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점심을 먹을 때라 더 눈길이 갔는지 모르겠다. 얀 볼커르스의 <터키 과자>(현대문학, 2016). 네덜란드 문학의 거장이라지만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이고, 작품 또한 그러하다. 게다가 1969년작. 언젯적 작품이냐란 느낌을 가질 수도 있겠다. 그래도 '발견'은 발견인지라 조금 늦어지는 점심을 기다리며 '이주의 발견'을 적는다. 연결고리가 없지는 않다.

 

"1969년 발행 당시 숨김없는 정사 장면과 직설 화법으로 네덜란드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파격적인 베스트셀러로, 빌럼 헤르만스, 하리 뮐리스, 헤라르트 레버와 함께 네덜란드 문단의 ‘위대한 네 문호’로 꼽히는 얀 볼커르스의 대표작이다. 네덜란드 사회의 개방적인 성 담론의 시발점이자, 네덜란드 현대문학의 근간이 되는 작품인 동시에 세계문학사에서 ‘네덜란드어로 쓰인 최고의 문학’, ‘20세기 성애 문학의 고전’이라 평가받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한편, <터키 과자>를 원작으로 하여 폴 버호벤 감독이 제작한 영화 <사랑을 위한 죽음>은 1973년 제46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보지는 못했지만 <사랑을 위한 죽음>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에도 들어 있다. 찾아서 볼 만하다는 것. 영화 소개에 원작이 얀 볼커르스의 <터키 과일>이라고 돼 있다. 'Turks Fruit'이란 원제를  옮겨서 그런 듯한데, 갑자기 이게 과자인지 과일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찾아보니 우리도 예전에 많이 먹던 과일 젤리다.

 

 

이걸 우리가 '터키 과자'라고 부르지는 않을 거 같은데, 정말로 그렇다면 원제는 <터키 젤리>여야 하지 않을까도 싶다. 과자와 과일 사이에 있는 어떤 것. 소설이나 영화에서 어떻게 묘사되는지 보면 알 수 있겠다.

 

얀 볼커르스는 네덜란드 4대 작가 중 한 명이라고 소개되지만, 우리에겐 도움이 안 되는 정보다. 나머지 3인의 작가, 즉 빌럼 헤르만스, 하리 뮐리스, 헤라르트 레버, 아무도 소개된 바 없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문학이 소개되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따로 떠오르는 이름이 없다. 그만큼 좀 생소하달까.

 

 

찾아보니 영화로도 만들어진 <디너>(은행나무, 2012)의 작가 헤르만 코흐가 네덜란드의 국민 작가라고 한다.

 

 

장르문학 쪽의 작가들이 아무래도 국내에 소개되기 쉬운 성싶은데, '살인자 시리즈'의 로베르트 반 훌릭 같은 경우가 그렇다. 국내에도 그의 독자층이 있는 것일까?

 

 

아, 드디어 한 명 생각났다. 세스 노터봄.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된 <의식>과 <필립과 다른 사람들>을 포함해서 몇 작품이 번역돼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네덜란드 문학의 계보랄까 하는 것은 그려지지 않는다. 검색해보면 대략적인 정보는 알 수 있겠지만 당장은 그렇다는 말이다. <터키 과자>가 계기가 돼서 주요 작가들이 더 소개되면 그때 가서 네덜란드 문학만의 독자성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봐야겠다.

 

 

하반기에는 주로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현대문학을 강의할 계획인데, 따로 '문학속의 정념'을 다루는 강의에 <터기 과자>를 포함시켜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믿고 보는) 버호벤의 영화도 구해봐야겠다...

 

16. 06. 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주의 발견'으로 박일영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생>(문학과지성사, 2016)을 고른다. 제목만으로는 어떤 책인지 몰랐는데, 구보의 장남이 쓴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이다.

 

 "2016년은 한국 문단에 하나의 상징으로 남은 '소설가 구보씨' 박태원이 세상을 등진 지 30년이 되는 해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생>은 박태원 30주기를 맞이하여, 박태원의 맏아들 팔보 박일영이 월북 이후 물음표로 남은 아버지의 행적을 쫓으며 일생을 재구성한 회고록이다."

 

 

 

 

덕분에 다시금 확인하게 된 게 박태원 번역의 삼국지다. <박태원 삼국지>(전10권, 깊은샘, 2008). 여러 번역본들 가운데 걸출한 판본으로 평가받는데, 북한에서 나왔던 <삼국연의>도 절판된 상태여서 깊은샘판이 현재로선 유일하다. 삼국지를 다시 읽을 의향만 있다면 구해놓고 싶다(다행히 아직 절판되진 않았다). 세일즈포인트만 보면 '삼국지 마니아'도 요즘에는 찾아보기 어려워진 듯하다...

 

16. 06. 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을 잃을 수가 없다? 그렇다. '책을 읽을 수가 없다'가 아니라 '책을 잃을 수가 없다'. 찰스 부코스키의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민음사, 2016)의 표제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다.

 

치즈 발

커피포트 영혼

당구를 싫어하는 손

클립을 닮은 눈

나는 적포도주를 좋아한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지루해 한다

나는 지진이 일어날 때 유순해진다

나는 장례식에 가면 졸리다

나는 퍼레이드에서 토하고

체스 게임에

씹에 보살핌에 몸을 바친다

나는 교회에서 오줌 냄새를 맡는다

나는 더 이상 책을 잃을 수가 없다

나는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다

"나는 더 이상 책을 잃을 수가 없다"고 해서 뭔가 심오한 뜻인가 싶어 원문을 확인해보니 "I can no longer read"를 옮긴 것이다. 그냥 해프닝성 오타인 것. 표제시에서 이런 오타가 나온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여하튼 오타는 오타다.

 

덧붙이자면 부코스키는 시건, 에세이건 소설이건 그냥 부코스키다. 친숙한 부코스키, 새로울 건 없는 부코스키, 좀 식상한 부코스키. 그게 부코스키 탓은 아닐 테지만. 여하튼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라는 표현 이상의 문구는 시집에서 찾을 수 없었다. '후퇴' 같은 시가 좀 나은 정도.

이제 나는 끝났다

 

눈발에 얻어맞은

독일 군대, 닳아빠진 군화에

신문지를 쑤셔 넣고 구부정히

걸어갔던 공산주의자들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나의 고난은 그만큼 지독하다.

아니 더할지도.

 

(하략)

 

16. 06. 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