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밤에 올겨울 들어 눈다운 눈이 처음 내렸고, 덕분에 학회 뒷풀이를 마치고 늦은 귀가길을 재촉하는 마음도 그럴 듯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도 잠시 가벼운 폭설에 대한 감상을 몇 자 적으려고 컴퓨터를 켰건만 악성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은 탓인지 인터넷이 먹통이었다. 진종일 복구하느라 애를 썼지만(물론 애를 쓴 건 집사람이고 나는 욕만 먹었다) 성과는 없어서 결국 당분간은 노트북에 연결해서 쓰기로 했다(해서, 이 페이퍼는 노트북으로 작성하는 첫 페이퍼이다).

 

 

 

 

기분도 무거운 김에 첫주제를 '전체주의'로 잡았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탄생 100주년을 맞은 해의 끝물은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1,2>(한길사, 2006)가 장식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 테마와 관련해서는 이전에 쓰거나 옮겨온 '한나 아렌트 르네상스' '두 개의 전체주의'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테러리즘' 등의 페이퍼들을 참조할 수 있다. 이번에 '전체주의'를 검색하다가 박노자 교수가 몇 년전에 쓴 칼럼을 발견했는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함께 아렌트의 명성을 각인시켜준 이 노작을 읽기 전에 미리 읽어봄 직하다.

한겨레21(03. 11. 06) 누가 진짜 '전체주의'인가

독일인 의사로 북한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하다 북한 체제 비판으로 추방당한 뒤 최근 남한과 미국을 무대로 “북한 체제 전복” “북한 주민 해방”을 부르짖으며 이색적인 행동으로 자주 스캔들을 일으키는 폴러첸(Norbert Vollertsen)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 그는 북한 체제를 ‘나치 정권’과 비교하고 그 체제에 ‘전체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곤 한다. 북한에 대한 어떠한 포용책도 히틀러에 대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의 영국·프랑스 등의 일관성 없는 유화정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 동독의 멸망이 대량 피난으로 시작되었듯, 북한 체제 붕괴도 중국으로의 대량 피난으로 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폴러첸은 나치 정권·옛 동독·북한은 동질적인 ‘전체주의’이며, 자신은 ‘전체주의에 맞서는 자유의 투사’로 여기는 듯하다.

 

 

 

 

 

 

 

 

 

북한을 포함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을 송두리째 나치와 동일하게 보는 것이 폴러첸뿐인가 냉전의 발발(1946~47년)부터 오늘날까지 소련식의 체제를 ‘나치식 전체주의’로 규정하고 ‘미국식 자유주의 사회’와 대조하는 것이 구미 보수언론들의 기본 논조다. 사회과학을 독자적으로 학습한 적이 없는 폴러첸이나 ‘악의 축’ 망발로 누명을 쓴 부시 현 대통령도 이 논조를 충실히 따를 뿐이다.

보수 신문이나 방송만으로 ‘상식’을 배우고 독서할 줄 모르는 부시와 같은 ‘지도층’으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최근의 사회과학 저서를 한번이라도 본다면-소수의 극우·우파 편향적 학자들을 제외한- 대다수 전문 학자들이 현실 사회주의의 억압성과 경직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과 나치를 동일시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는 용어의 사용 자체를 자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세계의 어떤 독재의 잔혹성을 강조할 때-특히 나치 독일의 파트너이던 일제 말기 총동원 사회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 개발 독재(1980년대 말 이전 남한·대만 정권)를 이야기할 때- ‘파시스트적’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그리고 ‘매우 억압적인 사회’라는 의미에서 ‘전체주의적’이라는 수식어도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사회학적 범주로서 전체주의라는 용어는 요즘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보수언론들이 반세기 넘게 이용해온 ‘전체주의’ ‘나치와 소련 사회주의 동질론’등의 담론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학술적인 입장에서 어떤 결함을 내포하고 있는지가 밝혀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기 때문이다.

냉전 초기인 1940년대 말~50년대 초, 당시 미국 사회과학 학계에선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이 나타났다. 미국 학계에 새로운 역동성을 가져온 독일계의 자유주의적 망명 지식인들은 그들의 고향 독일이 왜 파시즘과 전쟁을 맞이하는가에 대해 뼈저리게 고민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소련과 중국이라는 생소한 ‘미지의 세계’들이 미국의 주적이 됐기에 관(官) 주도의 ‘지역 연구’가 붐을 이루었다. 안보기관과 각종 재벌기금의 전례 없는 지원과 미 중앙정보국(CIA)과 국무성의 끈질긴 ‘지도’ 아래 1946년 콜롬비아대학의 러시아연구소, 1947년 하버드 대학의 러시아연구센터 등이 각각 설립됐다.

학생 시절부터 안보기관의 연구비를 받고 소련이나 중국을 인류의 숙적으로 알고 있던 ‘지역 연구기관’ 출신의 관 학자들에게는 공산주의의 본질적 악질성을 증명하는 이론이 필요했는데, ‘최고의 자유 지성’으로 인정받던 독일 계통의 망명 학자들로 인해 그 이론을 제공할 수 있었다. 비극적인 것은 이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지성인들의 고뇌가 생각지 않은 방향으로 이용당한 것이다.

공산주의의 악마화에 ‘황금의 기회’를 준 것은 독일계 유대인 여성 철학도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75)가 발표한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이었다. 그 후 ‘전체주의’라는 용어는 이론적 권위를 얻을 수 있었다. 정통 자유주의자 아렌트는, 자신을 망명객으로 만든 독일 파시즘을 ‘전체주의’의 모범으로 파악했다. 소련을 ‘전체주의 국가’의 명단에 넣었던 그녀는 1968년 <전체주의의 기원>을 재판(再版)할 때 “소련은 더 이상 전체주의 국가로 불리면 안 된다”고 명시하는 등 애써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그는 전체주의 사회의 특징으로 핵화(核化)돼 무기력해져 천편일률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기 꺾인 개인’ 등을 삼았는데, 이는 1950년대 초 소련 사회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웃 공동체가 아직 해체되지 않고 향촌 사회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완벽하지 않았던 당시의 소련과, 전통 공동체의 관계가 그대로 잔존하는 오늘의 북한에 ‘개인의 완전한 고립’과 같은 테제를 적용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녀에게 이 책은 주로 독일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반성의 의미를 가졌음에도 미국의 수많은 관학자들은 이 <전체주의의 기원>을 발판 삼아 현실 사회주의에 악마의 얼굴을 씌우기 시작했다.

 

 

 

 

이 일에 가장 앞장선 자는, 미국중앙정보국과 국방분석연구부(IDA)의 지원으로 운영되던 대표적인 ‘지역연구’ 기관인 콜롬비아대학교 부속 공산권문제연구소 소장이던 브레진스키(Zbigniew Brezezinski, 1928년생,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 보좌관이 됨)였다. 그의 <전체주의적 독재와 전제(專制) 정치>(1965)에 따르면 소련 정권은 나치와 동질적이고, 무차별적 공포정치, 언론 완전 장악, 무력 수단, 국가의 철저한 경제 통제 등의 특징을 안고 있었다. 스탈린과 그 후계자들, 북한과 같은 ‘약소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의 실리주의적 대외정책, 스탈린 죽음(1953년) 이후 대사회적 억압은 지속돼도 ‘무차별적 공포정치’가 거의 종언을 고한 점 그리고 정부의 무기·경제·통신수단에의 관여 내지 부분적 통제가 대다수 근대국가들의 특징이라는 점 등은 철저히 무시됐다.

브레진스키류의 관 학자들에 의해 왜곡돼버린 아렌트의 ‘전체주의 이론’은 극우들에게 전가의 보도처럼 됐지만, 1960년대 말 좌파는 물론 실사구시적 접근법을 고수하려는 수많은 자유주의적 학자들은 노골적인 편향과 현실에 대한 무지로 점철한 ‘전체주의 담론’의 허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파시즘 연구자인 캘리포니아대학의 사우어(Wolfgang Sauer) 교수는, 자본주의의 선진화 과정에서 신분을 상실한 소시민적 낙오자를 중심으로 한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이라는 극우운동이 후진 지역의 선진화를 목적으로 하는 ‘좌파적 극단적 개발주의’인 볼셰비즘과 정반대 위치에 섰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입증했다.

 

학계에서 주류가 된 이 주장을 이론화한 학자는 폴란드 출신으로 현실 사회주의를 체험한 영국 리즈대학교의 바우먼(Zygmunt Bauman) 교수였다. 그에 따르면 선진 지역의 ‘천민 극우 근대주의자’인 파시스트들이 식민지에서 대량학살 경험을 유럽에 이식시켜 홀로코스트 등을 저질렀고, 후발 근대화 지역의 볼셰비키 등의 ‘좌파적 근대주의자’들은 대중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전통적 기제들(조국사랑, 지도자의 가부장적 이미지 조작, 간부층과 노동자층의 대가족적 관계 강조 등)을 이용해 상당히 공고한 ‘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독재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상당수 학자들의 북한 사회 이해 역시 ‘전통주의적 기제들과 일부의 일제 시대의 통제 메커니즘을 이용하고 근대 주권국가 건설·방위를 강조하는 개발주의’ 학설을 중심으로 한다. 물론 북한 사회가 일제 말기의 총동원 사회로부터 이어받은 일부분의 파시스트 연한 요소(육탄정신 찬양, 천황제를 이은 듯한 수령제의 종교화 등)를 내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소수 우파 학자를 제외한 대다수는 역사적 형성 과정과 정통성 부여 방식, 대외정책 방향이 이질적인 나치 독일과 북한을 전면적으로 단순비교하는 것을 학술로 보지 않는다. 문제는 구미 지역의 주요 보수언론들이 극우의 구시대적 견해를 십분 활용하면서 ‘전체주의’와 같은 수사적 어휘를 마치 학술용어인 듯 구사하는 데 있다. 결국 40~50년 전 미국중앙정보국 지원으로 만들어져 언론자본에 의해서 계속 재생산되는 전체주의의 담론이 지금 폴러첸의 모험주의적 대북 행동과 부시의 세계적 횡포를 받쳐주고 있는 것이다.

전체주의 담론에 대항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접근은 무엇인가 북한 사회의 구성요소들을 구체적으로 해석, 규명해 북한 사회의 성격에 대한 객관적 정론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북한 사회를 이끄는 ‘극단적인 좌파적 근대주의’의 기원이 규명되는 동시에, 북한식 ‘합의 독재’와 ‘위로부터의 근대화’의 어두운 면도 과감하게 밝혀져야만 한다. 전체주의 담론을 붙잡는 극우들이 북한 인권 문제를 비방의 도구로 이용하지만, 남북의 민중 모두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한 20세기 근대주의에 대한 남북의 경계를 초월하는 해부·해체 작업이야말로 ‘민중을 위한 21세기’를 열어갈 수 있게 할 것이다.(박노자 | 오슬로국립대 교수 ·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06. 12. 18.

P.S.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리뷰들이 뜨지 않고 있다. 알라딘의 '새로나온 책'에서 발견했을 뿐 나도 아직 실물로는 보지 못했다(대신에 나는 하코트에서 나온 원서를 갖고 있다). 한편, 박노자 교수의 글을 읽다가 새삼 생각난 건 폴란드 태생의 걸출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1925- )의 주저들이 국내에 소개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물론 두어 권의 책은 소개돼 있다). 가령, <모더니티와 홀로코스트> 같은 책. 더불어 포스트모더니티에 관한 그의 몇몇 책들. 나도 고작 몇 권을 갖고 있을 따름이지만, 내년에는 바우만의 책들이 적어도 아렌트만큼은 소개되었으면 한다. 해가 가고 오는 게 다른 의미를 갖는 게 아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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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18 00:41   좋아요 0 | URL
오~ 드디어 나왔군요. 한나 아렌트의 대표작! 당장 신청해야겠습니다.히히

로쟈 2006-12-18 01:18   좋아요 0 | URL
네, 연말에 반가운 책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한데, 입이 좀 나오게 되는 건 우리책들이 너무 비싸다는 것. 원서보다 비싼 책들이 언제부턴가 일반화되고 있는 듯합니다(물론 하드카바인 걸 고려하면 더 비싼 건 아니지만, 우리의 경우 소프트가 따로 나오는 건 아니니까 결과적으론 더 비싸죠). 난치병 환자들의 구호에 "약이 없어서 죽을지언정 약값이 없어서 죽지는 말자!"라는 게 있는데, '책값'을 떠올리는 일이 잦아져서야...

드팀전 2006-12-18 09:13   좋아요 0 | URL
친절한 페이퍼네요.^^ 한나 아렌트의 <폭력의 세기>를 보다가 -제 혼자 생각인지-번역된 국문법이 영 낯설어서 중간에 접었던 기억이 납니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도 올해 보관함에 넣고 못 읽은 책중에 하나였는데 <전체주의의 기원>도 일단 보관함에 들어가야겠어요.지그문트 바우만의 <자유>는 몇 년전에 봤는데 얇지만 두툼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로쟈 2006-12-18 11:05   좋아요 0 | URL
<폭력의 세기>는 번역에 대한 지적들이 많은 책입니다(드팀전님의 혼자 생각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저도 사놓고 아직 들춰보지 못했는데, 또 두툼한 책이 나와 대략난감입니다. 거둬야 할 식솔들이 늘어날 때의 기분이 비슷할까 싶네요.--;
 

일본의 여성 동물행동학자 다케우치 구미코의 책이 또 번역돼 나왔다. <진화의 원동력 짝짓기>(디오네, 2006)이 그것이다. 이미 10년도 더 전에 <남과 여의 진화론>(일출, 1995)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 나는 흥미롭게 읽은 바 있는데(그래서 <호모 에로티쿠스>도 갖고 있다), 저자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다기보다는 남녀의 진화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재담가 스타일이다. '구미코의 진화론 이야기' 정도가 딱 알맞지 않나 싶다. 내용이나 분량에서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도 장점이다(하지만 나로선 좀 불만스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한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지금까지 나온 여섯 권의 책이 여섯 군데의 출판사에서 출간됐다는 것. 사이좋아 보이긴 하나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며, 저자로서도 불운한 것 아닐까?(저자는 무슨 생각으로 저작권을 배분하는 것인지?). 분량에 비해 비교적 자세한 서평기사 떴길래 옮겨놓는다. 제목이 아주 그럴 듯하다. '아담이 연애에 눈뜰 때..." 

 

 

 

 

한국일보(06. 12. 16) 아담이 연애에 눈뜰 때...

동물학자 데스몬드 모리스는 대표작 <털 없는 원숭이>에서 인간은 수렵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지능이 발달했다고 주장한다. 머리가 좋을수록 사냥 도구를 잘 만들고, 그 도구가 좋을수록 사냥을 잘했다는 것이다. 머리 좋은 그들은 많은 사냥감을 손에 넣고 많은 자손을 남겼다. 지능 발달의 또 다른 계기는 전쟁이다. 머리가 좋아야 무기를 잘 만들고 군대도 조직할 수 있다. 전쟁이 반복되면 머리 좋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몰아내 지능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일본의 동물행동학자 다케우치 구미코(竹內久美子)는 여기에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능력을 추가한다. 사냥이나 전쟁 이외의 이유로 언어가 발달했고, 언어 발달은 두뇌 발달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사냥, 전쟁 이외의 이유가 무엇일까. 남자는 사냥하고 여자는 집이나 그 주변에 머무는 생활 양식이다. 다케우치 구미코는 이를 ‘남편은 아내의 정절을 믿고 사냥하러 나가고 아내는 남편이 사냥에만 전념할 것을 믿고 전송하다’고 표현한다. 늑대, 사자, 고릴라, 침팬지 등 어떤 동물 사회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인간 만의 방식이란다.

그러나 집을 떠난 남편이 문제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사냥하다가 여유가 생기자 더 많은 자손을 남기기 위한 ‘과외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형질의 개체를 얻어 개체의 생존 확률을 높이려는 행위다. 새 여자를 유혹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능숙한 말솜씨다. 이렇게 해서 남자는 설득 능력을 발달시켰다.

아내는 남편의 바람을 막을 수단이 필요하다. 남편이 다른 여자에 열중하면 갖고 돌아오는 먹이가 줄고 최악의 경우 남편이 안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택한 대응책이 이웃 아줌마들과의 수다다. 가까이 사는 여자들끼리 정보 제공의 동맹을 맺는 것인데, 이 때도 언어가 필요하다. 남자는 여자를 설득하기 위해, 여자는 남자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언어 능력을 발달시킨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언어 발달은 남녀 관계, 즉 짝짓기가 그 원동력이다.

고릴라 침팬지는 인간과 같은 영장류임에도,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거기에도 역시 핵심은 짝짓기다. 가령 고릴라는 지능이 매우 높지만 인간처럼 언어가 발달하지는 않았다. 대신 암컷을 둘러싸고 수컷끼리 싸워서 승자가 돼야 짝짓기를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수컷은 몸무게가 200㎏이나 돼 암컷의 2배 가까이 커졌다. 반면 침팬지는 난혼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강력한 정자 생산이 필요하다. 그 결과 고환이 발달해 그 무게가 120g이나 된다. 체중이 자신의 다섯 배나 되는 고릴라의 고환 30g보다 4배나 무겁다.

잠자리는 수컷이 암컷의 목을 잡고 곡예비행 하듯 교미한다. 수컷이 교미 도중 암컷에 먹힐 수 있기 때문에 그 위험을 피하려는 뜻이다. 그런데 교미 후에도 암컷의 목을 잡고 있는 녀석이 있다. 암컷이 다른 수컷과 교미하지 못하도록 즉 불륜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꽉 붙잡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책은 다양한 짝짓기 전략을 소개하고 그 의미 분석을 시도한다. 물론 짝짓기 방식은 동물에 따라 다르고 그 배경에서도 차이가 난다. 하지만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책이 강조하는 것은 분명하다. 짝짓기는 동물 진화의 핵심이고, 모든 짝짓기에는 고도의 생존 전략이 있다는 것이다.(박광희 기자)

06. 12. 16.

P.S. 이미지는 <남과 여의 진화론>(1995)의 원서. 표지가 더없이 촌스럽군. 출판대국도 표지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건지, 아니면 좀 '야시꾸리'한 책의 내용을 살려주기 위한 고려인지 헷갈린다(알고보니, 중국어판이다. 그럼 이해가 된다. 그러고 보니 구미코는 동아시아권 대표주자인가?). 참고로, '생존기계'가 아닌 '구애기계'로서의 인간의 마음에 대한 생물학적 해명은 제프리 밀러의 두툼한 책 <메이팅 마인드>(소소, 2004) 등을 참조할 수 있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조만간 따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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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12-16 01:17   좋아요 0 | URL

저 표지 아무래도 중국판인 듯 합니다. '~의'를 '的'으로 표현한 것도 그렇고...
일본 웹사이트에서 찾아보니 원서 표지는 이렇군요. 이것도 과히 센스가 좋다고 하긴 힘들지만... -_-;
원서에는 부제가 달려 있군요. [남과 여의 진화론 - 모든 것은 착각에서 시작되었다]




2006-12-16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2-16 09:53   좋아요 0 | URL
페일레스님/ 그렇군요, 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님/ 별걸 다 챙기시네요(한데, 저는 여자분인 줄 알았어요).^^

비로그인 2006-12-18 00:35   좋아요 0 | URL
처음 글 남기네요... 알라딘에서 책을 구입하다보니 님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ㅋ 종종 들러서 좋은 글들 보고 갑니다.
정신분석, 진화심리학 모두에 관심을 갖고 계신 것 같네요.
아무래도 계속 공부를 해봐야겠지만, 지금으로서 전 그 둘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혹 이와 관련해서 참고할만한 글이나 책이 있을까요?
(초면에 대뜸 질문부터 드려 죄송합니다;;)

로쟈 2006-12-18 01:20   좋아요 0 | URL
제가 좀 나대는 편이죠. 하지만, 그래봐야 알라딘은 업종 4위인가에 턱걸이하고 있을 뿐인 걸요(^^;). 눈치를 채신 바대로, 정신분석과 진화심리학에 모두 관심을 갖고 있고 또 그 분야의 책들을 좋아합니다. 둘다 건드린 사람으론 딜런 에반스가 대표적이죠(정확히 말하면 정신분석에서 진화심리학으로 전향한 경우이지만). 지젝이 정식화해놓은 바에 따르면, 정신분석은 자연적 본성의 '오작동'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해서 저는 '작동'면은 진화심리학을 참조하고 '오작동'에 대해선 정신분석에 의존하고, 그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둘이 모순적이라거나 양립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보는 쪽입니다...

비로그인 2006-12-18 19:44   좋아요 0 | URL
나대신다니요ㅋ 적어도 제게는 도움이 많이 되고 있습니다. (부담스러우시죠? 하하) 사실 저도 지젝같은 사람은 뭐라 했을까 궁금했었는데, 딱 말씀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구체적인 내용들은 제가 직접 공부해봐야겠죠...

다만 당장 너무 궁금해서 한가지 더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진화심리학이 제시하는 윤리학(?)은 대략 어떤 거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자연적 본성을 잘 알아낸 다음 어떻게 살자는 건지 아직은 모르겠네요.
간단한 답변이 가능한 질문이 아니라면 읽어볼 만한 책이나 글이라도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로쟈 2006-12-18 20:35   좋아요 0 | URL
글쎄요, <도덕적 동물>에 뭐라 써있는지 모르겠지만(옛날에 원서를 몇 십쪽 읽은 게 전부라) 진화심리학에서 얘기하는 건 우리가 갖고 있는 도덕감정이나 관념의 생물학적/진화론적 기원(이익) 같은 거 아닌가요? 거기서 어떤 당위가 나오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돼먹었느냐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래서 어쩔거냐라는 건 별개의 문제일 테니까요...

비로그인 2006-12-19 00:0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진화심리학자들이 그런 부분까지 취급하지는 않나보네요...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 것까지만 하나 보죠?ㅋ 그 불편함이 매력이긴 하지만.

아무튼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들르게요, 빙판길 조심하시구요^^

evopsy 2006-12-19 05:22   좋아요 0 | URL
빠라바람님/ "도덕적 동물"도 괜찮은데 저자의 주관적인 견해가 많이 반영된 편이라서 차라리 핀커의 "빈 서판"에서 윤리학 부분을 찾아 읽으시면 적절할 듯 합니다. 원서도 괜찮으시면 올해 나온 Marc Hauser의 [Moral MInd]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비로그인 2006-12-19 22:2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evopsy님 :)
닉네임에서부터 포스가 느껴지네요..ㅋ

어부 2006-12-21 03:58   좋아요 0 | URL
음.. 적어도 진화심리학 진영에서만큼은 양립할 수 있다고 봐주진 않는듯 합니다.. 그쵸?? -_- '변절' 이후의 딜런의 정신분석에 대한 코멘트만 봐도 실망스럽기 그지 없구요... 제가 진화심리학에 대해선 굴드진영의 시선에 더 공감이 가는바라(그래서 진화심리학과 정신분석이 대칭구도로 대립한다고 느껴지지 않네요.) '적응'이란 말로 두드려 맞추려는 그런 말투에 거부감 가는것도 있구요..

로쟈 2006-12-21 08:44   좋아요 0 | URL
네, 진화심리학자 혹은 인지과학자들은 대개 강경하죠. '프로이트여, 안녕'이라는 게 기본적인 포지션이니까요. 지젝도 언급하고 있지만, 적응만 있는 게 아니라 적응에서의 일탈 내지는 부적응이라는 것도 있고, 그런 점에서 '오작동'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호모 사피엔스이면서 호모 데멘스인 게 인간이므로...
 

미국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의 한 명이라는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알마, 2006)가 지난주에 출간됐고, 나는 어제 책을 구했다. 사실 에릭 포너란 사람인 누구인지도 몰랐고, '역사란 무엇인가' 같은 좀 구닥다리 제목이 붙은 책을 손에 들기는 쉽지 않지만(왜 'Who owns history?'란 원제를 살리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일부 서평에서 읽은 바 그를 '소련 체제의 노골적인 옹호자이며 미국에 대해서는 앙심을 품은 역사학자'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다고 해서 관심을 갖게 됐다. 게다가 책은 '새로운 역사를 원하는 러시아 사람들'이란 장도 포함하고 있는데, 저자가 1990년 4개월간 모스크바대학에 교환교수로 체류한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한다. 내가 궁금증을 가질 만한 이유이다.

우연이긴 하지만, 책이 출간된 것과 동시에 조지 부시에 대한 미국 역사가들의 평가가 보도되었다. 그를 '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라 평하는 역사학자들의 명단에 에릭 포너란 이름이 단연 선두에 올라 있다. 이 정도면 "지난 20년 사이 가장 많은 저술을 발표한, 독창적이면서도 영향력 있는 미국 역사가"(워싱턴포스트)란 평판이 근거없는 립서비스는 아니라는 게 분명하다. 번역서의 타이틀이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라고 뽑힌 이유이기도 하겠고(그러니까 '에릭 포너'란 이름을 한 열 번 정도 중얼거려서 얼른 '하워드 진'만큼 입에 익도록 해두는 게 좋겠다). 관련기사들을 옮겨놓고 몇 개의 이미지를 붙여둔다. 당연한 일이지만, 적어도 그의 러시아 이야기 정도는 조만간 읽어보고 몇 마디 적어둘 참이다.

뉴스21(06. 12. 05) "부시, 역대 최악 대통령"

미국 역사가들이 조지 W. 부시대통령을 ‘사상 최악의 지도자’로 꼽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중간선거 참패 이후 다시 한번 부시 대통령의 체면이 구겨졌다. 워싱턴 포스트지가 3일 보도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부시 대통령에 대해 냉혹하다. 대부분 ‘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꼽거나 ‘최악의 대통령 톱5’, ‘백악관 불명예 전당 헌액’ 등 재임 6년간의 치적에 혹평을 가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이 참여하는 이 평가는 지난 1948년 처음 시작된 뒤 미국민들의 큰 관심을 모아왔다.



컬럼비아 대학의 에릭 포너 교수는 역대 대통령 중 부시 대통령을 ‘최악’으로 꼽고 있다. 부정부패, 초법적 오만, 전쟁 등 대규모 재앙 초래 등 역대 대통령들이 재임 중 저지른 실수들을 교훈으로 삼기는커녕 ‘종합적’으로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포너 교수는 부시 대통령의 경우 전쟁 포로를 다루는 가운데 피의자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 기본적 인권을 무시하고 비밀교도소를 운영하는 등 법을 무시한 독선적 스타일로 오히려 미국의 명예를 훼손하고 국제적 고립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부시 대통령은 명분도 없는 이라크전을 감행해 결국 국가적 재앙을 초래했으며, 대통령의 독단으로 전쟁을 감행한 제임스 폴크 대통령과 비견되나 폴크 대통령은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해 오히려 ‘위대한’ 대통령 반열에 접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시 대통령은 또 베트남전으로 혹평받고 있는 린든 존슨 대통령보다 낮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존슨 대통령은 국내 정책면에서는 민권법과 의료보장 등 치적을 평가받고 있다. 이들 전문가들은 아직 임기가 2년 남은 부시 대통령에게 ‘오사마 빈 라덴 사살’ ‘김정일 핵포기’ 등 사태 반전 요소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지난 6년간의 실적만으로 이미 최악의 대통령 반열이 불가피하다고 덧붙였다.

중앙일보(06. 12. 09) '색안경' 벗고 미국사 틀린 그림 찾기

역사는 사실만으로 이뤄진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일본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중국은 우리의 고대사를 왜곡하고 있다. 그뿐인가. 우리 내부에서도 이념에 따라 같은 사실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비틀려 버린다. 어떤 이는 이를 '역사 전쟁'이라고도 한다. 여러 역사 해석들이 충돌하고 대립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역사가 돼버렸다. 그래서 누가 쓰느냐에 따라 제각각의 역사가 생겨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역사는 누가 쓰느냐', 또는 '역사는 누가 소유하느냐'로 바꿔놓으면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법하다. 이 책의 원제도 '누가 역사를 소유하는가(Who Owns History?)'다. 서로 다른 주제의 에세이들을 모아놓아 잡다해 보이긴 하지만 역사해석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전체를 일관성 있게 묶어 준다.

누가 쓰든 역사 서술에서 사실과 해석을 엄격히 분리하기는 어렵다. 일부 사실을 골라내 부각시키고, 다른 사실은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을 훼손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선별 작업 자체가 바로 해석 행위인 셈이다. 이 같은 해석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오류들을 저자는 조목조목 지적한다.

저자는 미국사를 중심으로 학계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쟁점들을 다룬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에선 왜 사회주의가 발흥하지 못했는가라는 주제다. 저자는 이를 규명하려는 갖가지 접근방식들을 소개한다. 미국에선 봉건주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잡다한 문화와 인종 탓에 노동자들이 단결하지 못했다, 민주주의가 일찍 도입돼 계급의식이 미처 자라나지 못했다….

개별적으론 그럴듯 해보이는 해석들이지만 저자는 각각의 허점을 가차없이 들춰낸다. 그러곤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토록 오랫동안 역사학자들이 해답을 찾지 못했다면 물음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라며. 즉 '미국에선 왜 사회주의가 없느냐'는 질문은 자본주의의 발전엔 반드시 사회주의가 수반된다는 선입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질문에 이미 해석이 섞였으니 답에도 해석이 들어갔던 셈이다. 저자는 또 미국인들이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자유'라는 구호도 인종적 배타주의 속에서 나왔다고 비판한다. 독립선언문에 나온 개인의 자연권은 백인들에게만 해당하지 흑인들은 제외돼 있었다는 것이다.

컬럼비아대 종신교수이자 남북전쟁 연구의 권위자인 저자는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에 열성적이다. 그 연장선에서 저자는 미국의 팽창주의와 군사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이때문에 저자는 미국의 보수파에겐 성가신 존재로 찍혀 있다. 한 보수 언론인은 그를 '미국을 망치고 있는 100인 가운데 75번째 인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문적 업적에 대해선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는 이례적으로 미국역사학자기구(OAH), 미국역사학회(AHA), 미국역사가협회(SAH) 등 3대 역사학 단체의 회장을 모두 지냈다.(남윤호 기자)

06. 12. 15.

P.S. 참고로, 미국의 한 언론인에 따르면 "에릭 포너의 <미국인이 생각하는 자유>는 미국의 모든 학교에서 읽어야 하는 필수적인 저작"이다. 아마도 이 책이 그의 대표작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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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6-12-15 20:45   좋아요 0 | URL
간만에 리플을 남기게 되네요. 미국이나 미국을 보는 우리의 시각 같은 주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히 퍼가겠습니다. ^^;;

마노아 2006-12-15 22:29   좋아요 0 | URL
원제를 살렸으면 더 매력적이었을 것 같은데 제목이 아쉽네요.

로쟈 2006-12-15 23:05   좋아요 0 | URL
외로운 발바닥님/ 저도 그냥 지나치려고 했던 책인데, 우연히 책을 구하게 되어 몇 자 적어놓았을 뿐입니다. 게다가 옮겨왔을 뿐인데요...

마노아님/ 편집자들의 판단이 때론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Ritournelle 2006-12-16 02:23   좋아요 0 | URL
* 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의식한 출판사의 의도가 아닐런지요? 올 한해 로쟈님의 서재로 인해 풍성함을 많이 얻어간 것 같습니다. 새해부터 시작될 푸꼬의 {지식의 고고학} 읽기가 좋은 성과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전 요즘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읽고 있는데, 서론만 읽고 난 후 느낀 점은 다시 '푸꼬'를 읽어야 겠다는 것입니다. 전 {임상의학의 탄생}부터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남은 한해 잘 마무리하시고 새해에도 평안하세요.

로쟈 2006-12-16 09:51   좋아요 0 | URL
네, 그런 '의식' 자체가 좀 의아하다는 것이죠. 어떻게 눈에 띄는 제목이 아니라 묻히는 제목을 다느냐는. 그리고, 자율평론 세미나팀이 옮긴 '호모 사케르'의 국역본도 어디 떠돌아다닐 겁니다. <임상의학의 탄생>은 전공자들이 '최악의 책'으로 꼽더군요. 참고하시길...
 

플라톤의 고전 <향연>(문학동네, 2006)이 새롭게 번역돼 나왔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만화가 조안 스파르의 그림과 낙서가 보태져 있다는 것. 그러니까 좀 특이한 '일러스트레이트' 버전의 <향연>이고 그런 만큼 가장 접근하기 쉬운 '플라톤'이 될 듯하다. 게다가 재기발랄한 우리말로 옮겨져 있다고도 하니까 '고전 멀미증'을 가진 독자들에게 희소식이 될 듯하다. 물론 고전으로의 여행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에 한에서. 참고로, 자세한 리뷰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문화일보(06. 12. 08) 그림-낙서와 만난 향연, 플라톤이 술∼술 읽히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향연’은 그의 대화편 중 가장 아름다운 문체와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향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숙독한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고전이란 것이 항용 그렇듯이 ‘누구나 다 좋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면 ‘향연’ 역시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 책은 전혀 다르다. 우리가 고전에 대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선입견들, 즉 딱딱하고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한순간에 날려버린다. 그럼, 기존의 ‘향연’과는 텍스트 자체가 다른가. 그렇지도 않다. 플라톤의 ‘향연’을 우리말로 옮긴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어떻게 손에 잡는 즉시 놓기 힘들 정도로 읽는 이를 빨아들이는 것일까.

그 답은, 조안 스파르가 거의 매 장마다 그려넣은 ‘그림과 낙서’ 때문이다. 유럽 만화계에서 뛰어난 아티스트로 주목 받는 조안 스파르는 프랑스의 니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에콜데보자르(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한 인물. 그의 기발한 독법(讀法)이 담긴 그림과 낙서가 2500여년 전의 ‘향연’을 고색창연한 고전에서 생기발랄한 ‘오늘의 책’으로 되살려놓았다.


‘향연’은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당시 그리스 사회의 유명인사들이 술잔을 기울이면서 각자 돌아가며 ‘사랑의 신 에로스’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전설 같은 이야기, 즉 원래 인간은 네 개의 손과 네 개의 발, 하나의 머리에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우스의 번갯불에 몸이 두 동강 나서 지금과 같은 신체를 갖게 됐다는 이야기도 ‘향연’에 나오는 것이다.

‘향연’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아리스토파네스는 “따라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게 됐는데 그 욕망이 바로 인간의 사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인가. 하지만 ‘향연’에선 너무나 진지하게 이에 대한 논증을 거듭 늘어놓는다. 그 중 하나는 ‘원래 남성과 남성이 한 몸이었다가 반으로 나뉜 남성은 남성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대목이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성인 남성과 소년의 관계가 단순한 사제지간 이상이었으며, 성적인 면모도 내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심지어 ‘향연’의 핵심인 소크라테스의 연설에서는 이같은 관계를 통해서만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아마도 ‘향연’처럼 동성애에 대해 편견 없이 다루는 고전도 없을 것이다.

‘향연’은 이어 기술의 원리로서의 사랑, 진리에 이르는 길로서의 사랑, 쾌락으로서의 사랑, 사랑 받는 이의 사랑, 사랑을 주는 이의 사랑에 대해 각 등장인물들이 장황하리만큼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예외없이 조안 스파르의 기발한 그림과 낙서가 따라붙는다. 조안 스파르는 플라톤 철학에 대한 어떠한 이론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시각으로서만 텍스트를 이해한다. 그는 등장인물들을 벌거벗은 채 엉켜 있는 동성애자로 그리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다. 또 소크라테스를 능수능란한 언변으로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의뭉스러운 늙은이’로 묘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같은 해석에 단순히 비아냥만 깔려 있는 게 아니다. 그의 기발하면서도 솔직한 발상은, ‘향연’의 등장인물들을 마치 우리가 바로 어젯밤 술자리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인물들인 것처럼 생생하게 되살려 놓고 있다. 또 하나, 이 책의 흡인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역자의 탁월한 번역이다. ‘향연’의 원 텍스트뿐 아니라 조안 스파르의 그림에 붙은 ‘낙서’까지 얼마나 재기발랄하게 우리말로 옮겨 놓았는지 절로 감탄하게 된다. 한마디로, 이 책에서 독자들은 딱딱하고 지루한 철학이 아닌, 부담없이 즐기고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철학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김영번 기자)

06. 12. 10.

 

 

 

 

P.S. 그간에 가장 많이 읽히던 <향연>은 박희영 역의 <향연>(문학과지성사, 2003)이다. 문고본에다가 최신 번역이어서 손에 들기 가장 좋다. 한데, 부분적으로는 번역이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도 감안해야겠다(일반 독자에게는 크게 대수롭지 않겠지만). 더불어 만화책 <플라톤>(김영사, 2001)이나 <30분에 읽는 플라톤>(랜덤하우스코리아, 2004) 등도 부담없는 입문서. 부담을 원한다면, 남경희 교수의 <플라톤>(아카넷, 2006)을 손에 들어도 좋겠다.

새 <향연>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플라톤, 조안 스파르를 만나다'가 될 텐데, 만화를 잘 안 읽는 탓에 생소한 이름이지만 스파르의 책들은 국내에 다수 소개돼 있다.

 

 

 

 

그 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금붕어, 죽음을 택하다>(현실문화연구, 2002). 왠지 '철학적'이지 않은가? 품절된 걸로 나오는데, 다시 판을 찍으면 좋겠다. 22쪽 1000원짜리 책으로 '철학'을 떠올려볼 수 있는 물건은 흔하지 않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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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2-10 15:51   좋아요 0 | URL
이번에 <랍비의 고양이> 시리즈를 냈어요.
아랍과 유대, 종교와 현실, 철학과 공존이라는 주제입니다.
무거운 주제인데 술렁술렁 처리한 유머가 돋보이는 만홥니다.
플라톤도 왠지 그럴것 같은 분위기에요
<금붕어, 죽음을 택하다>는 제목이 정말 비장합니다.
아, 요거 어디가서 구할까나..궁리궁리

로쟈 2006-12-10 16:08   좋아요 0 | URL
예, 책이 많더군요. 아동용이면 아이한테도 사주겠는데...

자꾸때리다 2006-12-10 18:25   좋아요 0 | URL
박희영 교수의 향연 번역은 모 전공자의 말에 의하면 상당히 오역이 많다고 해서 안 읽고 있었는데 차라리 이걸 읽어볼까나여?

로쟈 2006-12-10 18:45   좋아요 0 | URL
'상당히'까지는 아닌 거 같고 아무튼 전공자들에겐 좀 불만스럽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번역은 불역본으로부터의 중역일 텐데, 박희영본보다 정확하다면 아니러니컬할 일이고, 다만 가독성은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란 짐작입니다...

클리오 2006-12-10 20:42   좋아요 0 | URL
향연,을 꼭 한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을까요??^^

로쟈 2006-12-10 20:50   좋아요 0 | URL
밑져야 본전 아닐까요? 그림만 봐도 되니까...

비로그인 2006-12-10 21:51   좋아요 0 | URL
이 책 보고 놀랐어요. 그림도 웃기지만, 그림에 담긴 대화들이 너무 깜찍해요..;;

로쟈 2006-12-10 22:10   좋아요 0 | URL
머, 말 그대로 먹고 즐기는 '잔치'니까요.

Poissondavril 2006-12-11 13:32   좋아요 0 | URL
평소 로쟈 님 리뷰와 페이퍼를 열독하는 알라디너이자... 이 책의 번역자입니다. 조안 스파르가 서문에서 밝히듯 "철학을 평생 직업을 삼고자 하는 이에게 권할 생각은 추호도 없음"이고요. 그래도 한 번 보실 만은 할 겁니다. 참고로, 조안 스파르와 낙서와 그림을 제외한 본문 번역대본은 Les Belles Lettres 사의 (프랑스에서는 가장 교과서적으로 통하는) 것을 사용했는데 그 텍스트 자체가 그리스어 원본판과 약간 (편집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향연>을 연구 텍스트로 쓰시는 분에게는 추천할 수 없지만 불어판 텍스트 자체는 굉장히 명료하고 잘 읽혀서 배움이 일천한 저로서는 참으로 다행(?)이었어요. 그리고 번역 과정에서 최명관본과 박희영본 두 가지 모두 참고했는데 약간 애매한 부분들이 있기도 했고(그런 부분은 전부 다 불역본에 기준을 두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번역 대본에 충실해야 할 책임이 있으니까요) 쉽게 해도 될 말을 어렵게 한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한 가지 고백하자면, 이 책을 번역하면서 제일 힘든 점은 조안 스파르의 손글씨를 알아보는 것이었어요! (번역을 하는 건지 금석학을 하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로쟈 2006-12-11 21:54   좋아요 0 | URL
이크, 역자께서 직접 찾아주시니 영광입니다(어디 험담한 건 없다 두리번^^:). 저도 오늘 교보에 갔다가 책을 훑어봤는데 손글씨 때문에 '고생'하셨다니까 고개를 끄덕이게 되네요. 제가 이미지들을 찾다 보니까 조안 스파르가 아예 이런 시리즈를 쓰려는 건지 두어 권만 맡아서 쓴 건지 궁금하더군요. <캉디드>도 썼길래요. 혹 아시나요?^^

Poissondavril 2006-12-12 10:36   좋아요 0 | URL
<향연>은 '조안 스파르의 철학 서가'라는 시리즈의 맨 첫 번째 책입니다. 몇 권이나 더 내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향연>과 <캉디드>밖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로쟈 2006-12-12 13:05   좋아요 0 | URL
역시나 그렇군요. 아직 젊은 만화가이던데, 야심만만입니다.^^
 

지난주 신간들 가운데 가장 묵직한 책은 며칠전 소개한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배>(안티쿠스)와 함께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1914-1984) 등이 편집한 <사생활의 역사>(새물결, 2006)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두 권이 마저 나와서 전체 5권이 완간된 이 책은 올해 완간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함께 '사건'이라 할 만한, 새물결출판사의 역작이다.

 

 

 

지난 2002년에 나온 1,3,4권 중에서 나는 한권을 갖고 있는데 당장은 눈길이 닿지 않는다(출판사 할인판매시 30% 할인 가격으로 구입했던 기억이 있다). <아동의 탄생>이나 <죽음 앞의 인간>이 아리에스의 대표작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제안으로 기획됐다는 <사생활의 역사>가 갖는 의의도 간과될 수는 없겠다. 책을 당장 곁에다 둘 형편은 아니어서 리뷰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사회학자 김종엽 교수의 글인데, 나름대로 의미가 없지 않은 건 (내 기억에) 필립 아리에스란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이 그의 <웃음의 해석학, 행복의 정치학>(한나래, 1994)에서였기 때문이다. 그게 어느덧 12년 전 이야기다. 결자해지 차원에서라도 아리에스에 관한 해설은 그의 몫으로 돌리는 게 낫겠다.  

경향신문(06. 12. 09) 公과 私 영역, 분리와 융합의 역사

‘사생활의 역사’는 어린이와 죽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역사학을 혁신한 필립 아리에스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으며, 아날학파의 노장 및 신진 모두의 역량이 투입돼 프랑스에서 1985년에 출간되었다. 모두 다섯 권으로 된 1권(로마제국~11세기)과 3권(르네상스~계몽주의), 4권(프랑스 혁명~1차 세계대전)이 2002년에 먼저 우리말로 번역되었는데, 이때 각종 매체의 서평들은 부부의 침실과 귀족의 일기장과 집안 하녀들의 생활 같은 영역에 대한 핍진한 연구에 경이감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고 의의는 무엇인지를 알리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번에 2권(중세~르네상스)과 5권(1차 세계대전~현대)이 나옴으로써 마침내 완역됐는데, 더 이상 사생활 속으로 역사적 시선을 투과시키는 것의 중요성과 의미를 해설할 필요는 없어진 듯하다. 먼저 번역된 ‘사생활의 역사’가 제법 널리 읽힌 데다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도 이 책과 같은 시도가 이미 꽤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생활의 역사’ 전체에 대한 논평보다는 이번에 새로 번역된 것들을 중심으로 논의하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필자가 보기에 두 책 중 2권보다 5권이 더 적합해 보인다. 2권을 읽으려는 독자는 이미 이전 번역을 읽고 그 결락 부분을 채우려는 독자일 것이고, 그런 독자에게 책의 의의를 논하는 것은 불필요해 보인다. 이에 비해 5권은 이미 ‘사생활의 역사’를 읽어본 독자에게도 새로울 뿐 아니라 읽어본 적이 없는 독자가 ‘사생활의 역사’에 접근해 보려 할 때도 제일 먼저 읽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다. 독서의 쉽고도 좋은 길은 역시 자기가 속한 시대와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5권은 흔히 사생활이라 불릴 만한 것인 섹스와 자신의 육체에 대한 태도나 가족생활뿐 아니라 노동과정의 변화와 제1,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대도시의 형성사가 다뤄진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사생활의 역사가 친밀한 인간관계의 영역, 그리고 개인의 자기관계를 다루는 것 못지않게, 아니 그런 역사를 다루기 위해서도 사생활의 영역을 규정하는 공·사의 분리선과 변동을 그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제1차 세계대전은 규모나 전개 양상 모든 면에서 인류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런 전쟁은 개인의 사생활을 바꿀 뿐 아니라 군인의 참호 생활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사생활을 만들어냈다. 그렇기 때문에 사생활의 역사를 추구하는 한 전쟁에 대한 분석을 피할 수 없다. 같은 논리의 연장선에서 20세기에 대두한 집단수용소는 수용소 안에서의 삶이라는 새로운 사생활을 야기했기에 분석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이렇게 공적 구조의 변화가 사생활의 변화와 적응 그리고 새로운 창출을 야기할 뿐 아니라 사생활의 변화가 공적 구조의 변화와 개입을 유발하기도 한다. 20세기는 이혼과 동거가 폭증하고 임신과 섹스가 역사상 어느 때보다 인간의 의지에 의해 조절된 시대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병원과 법률이라는 공적 장치가 끊임없이 개입해 들어온다. 결국 가족생활의 주도권이 국가와 개인에 의해서 분점되고 개인은 그 여분의 주도권마저 의사와 교사 그리고 양육 전문가와 심리치료사 같은 각종 전문가 집단에 양도해야 한다. 그리하여 가족은 오로지 감정생활이라는 단 하나의 줄에 매달려 나부끼게 된다.

그리하여 제5권은 사적 영역의 역사이자 그 자리에서 바라본 공적 영역의 역사가 되는데, 책장을 계속 넘겨보면 이 책의 저자들이 좀더 야심적임을 알게 된다. 문화적 다양성을 다룬 제3부는 종교와 내면생활의 변화(‘가톨릭 신자들: 상상과 죄’), 정치적 정체성(‘공산주의자 되기?-하나의 존재방식’), 인종적 정체성(‘유대인으로 살아가기’와 ‘이민자로 살아가기’)을 다룸으로써 20세기가 만들어낸 특유한 자아 정체성의 궤적을 범례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제4부는 미국·스웨덴·이탈리아·독일의 사생활을 분석함으로써 사생활의 비교사회학의 토대를 놓고 있다. 이렇게 해서 ‘사생활의 역사’는 한 권의 훌륭한 20세기 서양사에까지 근접해 간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이 책의 의의는 서구인의 삶 그리고 사생활이라는 소재에 대한 관음증적 호기심을 격조 있게 충족시켜주는 것에 그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이유 가운데 두 가지 정도를 꼽고 싶다. 우선 이 책을 읽으면서(특히 제4부) 우리의 사생활이 의외로 서구인의 삶과 가까우면서 또한 다르다는 것을 시종일관 깨닫게 된다. 우리 사생활의 어떤 측면은 미국·프랑스·이탈리아·독일과 닮았고 심지어 스웨덴과도 유사한 데가 있지만 동시에 이 모든 사례와 다르다. 공시성과 역사적·문화적 차이를 매개로 한 공시성의 다양한 조합, 변화에 대한 민감함과 어떤 끈덕진 지속을 모두 실감하게 되는데, 이런 독서 경험을 통해 자기 성찰의 길이 열린다는 점이 소중하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이 책의 독서가 주는 각별한 기쁨의 원천은 사생활이라는 소재에서 오는 재미이기보다는 사유를 촉구하는 힘을 가진 역사학적 통찰을 담은 문장들에서 오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고 싶지만 지면이 허락지 않아 아쉽다. 하지만 우선 읽기 바란다. 읽게 되면 밑줄을 긋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라 장담할 수 있다.(김종엽|한신대교수·사회학)
 
06. 1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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