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얼 챈들러의 온라인 기호학 입문서 <초보자를 위한 기호학(Semiotics for Beginners)>이 번역돼 나왔다. <미디어 기호학>(소명출판, 2006)이 그것이다. 책이 나온 건 좀 됐는데, 소개를 하려고 해도 마땅한 리뷰가 그간에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침 북데일리에서 이 책을 다루고 있어서 겸사겸사 옮겨놓는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웨일스대학 연극/영화/텔레비전학과 교수인 대니얼 챈들러가 1994년에 처음 인터넷에 공개해 많은 독자들의 호응을 받은 '기호학 입문(Semiotics for Beginners)'이 교정을 거듭한 후 책으로 발행되었다." 이미지의 책이 그것인데, 나는 한때 문화기호학 강의를 준비하느라 온라인에 떠 있던 텍스트를 다 프린트했었고, 책으로 묶여 나온 것도 (교보에선가) 눈에 띄길래 구입했었다. 말 그대로 '초보자용'이어서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교재로서는 유용하지 않나 싶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표'니 '기의'니 하는 말만 들어도 멀미를 하는 게 강의실의 현실이기 때문에.

국역본의 제목은 특이하게도 '미디어 기호학'이라고 붙여졌다. 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한다('미디어'가 그렇게 어필하는 것인지?). 소개를 더 읽어보면, "기호학의 일반 이론을 쉽게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졌으나 미디어 학자가 '미디어 교육' 수업으로 쓴 교재이기 때문에 영화. 텔레비전, 광고 등의 미디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여기에 미디어학자인 옮긴이가 원서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사진과 그림, 그리고 100여 개의 역자주를 추가해서 미디어기호학의 입체성을 충분히 살려 냈다." 즉, 저자와 역자가 모두 미디어학자인 탓에 <기호학 입문>이 <미디어 기호학>으로 탈바꿈한 것. '영화. 텔레비전, 광고'가 활용되는 것은 설명의 용이함 때문이기도 할 텐데, 그것이 '미디어 기호학'으로 특화될 만한 성질의 것인지는 의문이다. 여하튼 드물게 눈에 띈 리뷰도 참조해보시길. 아래 사진은 저자 다니엘 챈들러.  

북데일리(06.12. 29) '분홍’은 남자, ‘파랑’은 여자의 색? 기호의 허구!

분홍색과 파란색, 이렇게 두 가지 색 곰 인형이 있다고 하자. 이를 여자와 남자 어린이에게 준다고 할 때, 어떤 색을 줄지 고민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분홍’이 ‘여성’을, ‘파랑’이 ‘남성’을 상징하는 자연스러운 기호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상황은 반대였다고 한다. <미디어기호학>(소명출판. 2006)의 저자 대니얼 챈들러는, 책 서문에서 1918년에 발행된 미국 잡지에 실린 글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일반적 상식에 따르면 분홍은 남자아이를 위한 것이고, 파랑이 여자아이를 위한 것이다. 분홍은 파랑보다 더 과감하고 강렬한 색이기 때문에 남자에게 잘 어울린다. 반면에 파랑은 더 섬세하고 우아하기 때문에 여자아이들에게 잘 받는 색이다.”

현대인은 분홍색에서 자연스럽게 ‘여성스러움’을 연상하지만, 불과 80여 년 전에는 같은 색으로부터 강렬한 ‘남성성’을 발견했던 것. 저자는 “이처럼 자연스럽게 인식되는 기호의 허구성을 깨닫는 것은 인식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일깨운다”며 “바로 여기에 기호학의 목적이 있다”고 설명한다.

즉 <미디어기호학>은 기호학의 일반 이론을 다루고 있는 책. 영국 웨일스대학의 연극.영화.텔레비전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미디어학자답게 미디어에 초점을 맞춰 기호학을 풀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영화 속 샷의 크기(카메라 거리)에는 ‘발화’의 기호가 숨어있다고 한다. 클로즈업(close-up)은 친밀하거나 개인적인 양식이고, 미디엄샷(medium shot)은 사회적 양식이며, 롱샷(long shot)은 비개인적인 양식이라고. 책은 이에 대해 “시각미디어가 재현하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관객의 감정적 개입을 이끌어 낼 수도 있고, 이와 반대로 무관심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해설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미디엄샷’은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흔히 유지하는 ‘사회적 거리’를 모방한다. 관객에게 부담 없이 접근하는 방법이다. 반면에 대상을 멀리서 잡은 ‘롱샷’은 낯선 사람들과의 관계를 모방함으로써, 관객의 무관심을 유도한다.

<미디어기호학>은 이외에도 문학, 미학, 심리학, 예술이론, 신화학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최대한 쉬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책이 지닌 가장 큰 미덕. 움베르토 에코의 학생 가운데 한 명이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지도교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는 편지를 저자에게 보냈을 정도다.

역자 강인규(미국 위스콘신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 강사)가 추가한 사진과 그림, 100여 개의 역자주 역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06. 12. 31.

 

 

 

 

P.S. 기호학 입문서들에 대해서는 예전에 다룬 적이 있는 듯한데, 먼저 코블리의 만화책 <기호학>(김영사, 2002)과 존 피스크의 <커뮤니케이션학이란 무엇인가>(커뮤니케이션북스, 2001/2005)를 챈들러의 책과 함께 추천한다. 피스크의 책은 훌륭한 '커뮤니케이션학' 입문서이면서 동시에 '기호학 입문서'이기도 하다(기호학과 커뮤니케이션학의 차이는 전자가 '의미작용'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에 후자는 '의사소통'을 주된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데 있다). 거기에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다른 책들이 보태질 수 있지만, '교재'로 적합한 것은 이 세 권이다(코블리의 책도 물론 수업용은 아니다). 절판된 책들 가운데는 테렌스 혹스의 <구조주의와 기호학>(을유문화사, 1987)이 조감도로서 뛰어나며, 이께가미의 <시학과 문화기호론>(한국문화사, 1994)도 훌륭하다.

 

 

 

 

물론 국내 저작들도 다수 출간돼 있다. 김경용의 <기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1994), 김운찬의 <현대 기호학과 문화분석>(열린책들, 2005) 등이 '교재'로 활용될 만하다. 거기에 기호학연대의 책들은 기호학의 유용한 쓰임들을 보여준다. 한국기호학회에서 출간하는 논문집들은 보다 전문적인 수준이다. 입문서 몇 권을 읽어보고 흥미를 갖게 된다면 자신의 구미에 맞는 책들을 더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알아둘 만한 기호학자들의 이름은 소쉬르(스위스)와 퍼스(미국), 그리고 롤랑 바르트와 그레마스(프랑스), 움베르토 에코(이탈리아)와 유리 로트만(러시아), 토마스 시벅(미국)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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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시 한편을 떠올리게 됐다. 바스코 포파(1922-1991)의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문학동네, 2006)이 이번에 출간되었기 때문인데, 내게 포파는 무엇보다도 '작은 상자'의 시인으로 기억돼 있다. 그가 유고슬라비아(지금은 세르비아)의 시인이라는 건 이 참에 알게 됐다(동유럽쪽이란 기억만 갖고 있었다). 마치 오 헨리 단편에서처럼 한 20년만에 절친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바삐 시인과 그의 시에관한 자료들을 검색해보고 몇 가지를 옮겨놓는다. 일단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작은 상자'를 다시 읽어보는 게 순서일 것이다(아래는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 바스코 포파). 영역시도 연이어 붙여놓으면서.  

 

작은 상자

작은 상자는 이제 젖니가 나고
키가 작고
면적도 부피도 작다.
그게 작은 상자가 갖고 있는 전부다.

작은 상자는 점점 커져서
이제 작은 벽장도 갖게 되었는데,
옛날에는 작은 상자가 그 작은 벽장 속에 들어 있었다.

작은 상자는 날마다 조금씩 크고 쉬지 않고 커졌다.
이젠 그 속에 방과
집과 마을과 땅과
그리고 전에 작은 상자가 들어 있던 세계까지 갖게 되었다.

작은 상자가 제 어렸을 때를 떠올리며
너무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에
다시 작은 상자는 작은 상자로 되돌아갔다.

작은 상자 속에는
아주 작은 세계만 있다.
당신은 작은 상자를 호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고
그러다가 그걸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니 작은 상자를 조심해야 한다.

The Little Box by Vasko Popa

The little box gets her first teeth
And her little length
Little width little emptiness
And all the rest she has

The little box continues growing
The cupboard that she was inside
Is now inside her

And she grows bigger bigger bigger
Now the room is inside her
And the house and the city and the earth
And the world she was in before

The little box remembers her childhood
And by a great longing
She becomes a little box again

Now in the little box
You have the whole world in miniature
You can easily put in a pocket
Easily steal it lose it

Take care of the little box  

다시 읽어보니까 초현실주의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이 시집에 주목하고 있는 리뷰는 드문데, 서울신문의 소개기사를 참고로 옮겨놓는다.

서울신문(06. 12. 29) 은유·환상의 유고 詩세계

전쟁의 포성으로만 기억되는 유고슬라비아. 그들의 문학은 어떤 모습일까. 그동안 좀처럼 접하기 어려웠던 만큼 유고슬라비아 문학은 우리에게 낯설고 신기하기만 하다.

문학동네에서 펴낸 유고슬라비아 시인 바스코 포파의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오민석 옮김)은 호기심의 한 끝을 풀어주기에 충분하다. 포파는 현대 유고슬라비아 문학을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시인. ‘작은 상자’를 비롯, 그의 대표시 몇편이 국내에 소개된 적은 있지만 시집의 형태로 전모를 선보이기는 처음이다.

Self-portrait as a wolf, by Anthony Weir

“…암늑대가 살아 있는 한, 할머니는/ 리넨 천 같은 왈라키아 발음으로/ 나를 작은 늑대라고 부를 것이다// 늑대는 나에게 비밀스레/ 날고기를 먹였고 나는 성장하여/ 언젠가 무리를 이끌 것이었다// 나는 내 눈이/어둠 속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할 것을/믿었다…”

포파의 ‘늑대의 눈’이란 시의 한 대목이다. 포파는 세르비아 전통에서 문학의 전범을 찾는다. 이 시집에 실린 ‘늑대 시편’이 그 한 예다. 세르비아 부족신화에서 늑대는 숭배와 경의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세르비아인들은 늑대의 전사적 기질을 동경한다. 죽은 자의 영혼이 늑대로 부활한다고 믿는 그들은 코소보 평원을 자유롭게 누비는 늑대를 자신의 조상으로 여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늑대는 시적 화자의 먼 조상이며 한편으론 시인의 자아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이 늑대는 죽음이라는 절대 폭력과 싸우는 절름발이 늑대다. 시인은 이 실존적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세르비아의 애국성인 성(聖) 사바의 존재를 새삼 일깨운다. “별들이 그의 머리 주위를 돌며/ 그에게 살아 있는 후광을 만들어준다// 천둥과 번개가/ 보리수 꽃 흩뿌려진/ 그의 붉은 턱수염 안에서 숨바꼭질을 한다…”(‘성 사바’ 중에서)



세르비아 국민이 그토록 추앙하는 성 사바가 보여준 공동체적 삶이야말로 포파가 초현실주의 언어를 통해 닿고자 했던 이상향이 아닐까. 이 시집은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미국 시인 찰스 시믹이 번역한 영역본 선집을 우리말로 옮긴 것. 그가 비록 포파 시의 가장 이상적인 번역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중 번역의 아쉬움은 남는다.(김종면 기자)

06. 12. 30.

P.S. 아쉬움을 덜어줄 만큼 더 소개되기를 기대해본다. 이제 우리가 갖게 된 유고(세르비아) 문학. 작년에 원전 번역으로 출간된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강의 다리>(문학과지성사, 2005)와 바스코 포파의 시집. 그리고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초현실주의적(!) 영화들. 그 쿠스투리차가 2006년에 찍은 영화는 특이하게도 다큐멘터리 <마라도나>이다. 하긴, 유고와 아르헨티나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공유하는 나라들이므로 이 둘의 조합이 어색하지만은 않겠다. 작은 '축구신동' 마라도나, 축구장에선 그를 조심해야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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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12-30 10:38   좋아요 0 | URL
오..저 시가 오늘 아침 마음에 들어오네요.바스락 바스락...

로쟈 2006-12-30 12:19   좋아요 0 | URL
우리는 각자의 작은 상자를 갖고 있는지도 모르죠...

Joule 2006-12-30 21:42   좋아요 0 | URL

작은 상자, 저 시를 꽤 오래 찾아다녔더랬어요. 한 번 첫눈에 반한 사람은 시간이 흘러 길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대도 또다시 눈길이 가는 것처럼 시도 그래요.


nada 2006-12-30 21:45   좋아요 0 | URL
쿠스트리차와 마라도나라니. 마라도나의 짧은 목에 걸린 은 목걸이마냥 생경하군요. 마이클 만의 알리 꼴 나는 거 아닐까요.

로쟈 2006-12-31 00:18   좋아요 0 | URL
joule님/ 맞습니다.^^
꽃양배추님/ 좀 의외이긴 하지만 생경하지는 않은데요.^^ 그리고 극영화가 아니라 그냥 다큐입니다...
 

'돈이냐 행복이냐'란 물음은 '돈이냐 사랑이냐'란 물음만큼이나 구닥다리이지만, 연말정산의 시즌이 돌아오면 직장인들은 한번쯤 생각해보는 주제일 법하다. 평소 연소득이라는 게 별로 의미가 없었던지라 '연말정산'을 해본 적이 없지만 올해엔 한 연구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까닭에 몇 가지 서류들을 떼고 정보/자료를 입력하고 하는 일들을 해야 하게 생겼다. 그게 오늘의 일과 중 하나이다. 때마침 지난주에 출간된 <행복경제학>(미래의창, 2007)에 대한 리뷰들이 눈에 띄기에 옮겨놓고 잠시 이 문제를 생각해본다(책의 출간일자는 2007년 1월 15일로 돼 있다. 이맘때면 '미래의 책'들을 앞당겨 보게 되는 일이 드문 일은 아니지만 여하튼 새롭다. 2007년의 책들!). '돈이냐 행복이냐'란 제목의 '게으른' 리뷰를 쓰면 왜 안되는지에 대해서. 책의 부제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얼마가 필요한가'이다.

이데일리(06. 12. 27) 돈이냐 행복이냐

돈이 없는 사람은 항상 돈을 생각한다. 돈이 있는 사람은 오로지 돈만 생각한다." 억만장자로 유명한 폴 게티의 말이다. 우디 앨런은 "돈은 가난보다 좋다. 오로지 재정적인 이유뿐이라고 해도.."라고 말했다. 돈의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있으면 좋은 게 바로 돈이다. 이미 돈은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좌우하고,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다.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해 애쓰고, 쓰는 데서 희열을 느끼며, 벌어놓은 돈을 더 불리는데 집중한다.

실제로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도, 노후를 위해 들어놓은 보험이나 연금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돈이 있다면 이런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일종의 안도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보다 두배를 번다고 반드시 두배 더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다. 이처럼 당연하지만 아주 진부한 명제를 저자는 다양한 연구통계와 사례, 맛깔스런 언어로 버무려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겨우 이 정도라면 책은 읽으나 마나한 것 아닌가?).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의 400대 갑부들 중 설문에 응한 억만자들의 느끼는 삶의 만족도는 소 몇 마리가 전부인 동아프리카의 마사이족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돈이 많을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한 백만장자 보도 셰퍼와 행복하기 위해 돈과 저축, 의료보험, 사회보장 혜택 마저 버린 하리데마리 슈베르머의 대조적인 삶이 던져주는 의미도 크다.

미국의 노숙자가 인도의 노숙자보다 열배나 부유하지만 덜 행복한 이유도 흥미롭다. 미국의 노숙자들의 경우 배우자나 자식이 없거나 만날 수 없는 경우가 많은 이유도 있지만 인도의 노숙자들이 더 가난한 환경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가난하게 느끼지 않고, 그만큼 행복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빌 게이츠의 재산이 매년 자동적으로 몇 억 달러씩 늘어난다고 해도 줄곧 행복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혹여 큰 실수로 증가하는 흐름이 역전된다면 빌게이츠 역시 신년 보너스가 취소된 직장인처럼 우울해질 수도 있다.



그럴듯한 말의 조합으로 여겨질 법한 `행복경제학`이란 이 책의 제목은 실제 학문이다. 행복경제학의 개척자인 리처드 이스털린은 1930년대 혁명적인 논문을 통해 돈과 행복의 관계를 제시했고, 최근 행복경제학자들에 의해 속속 입증되고 있다. 저자인 하랄드 빌렌브록(1967- )은 독일 함부르크에서 언론인으로 일하고 있다. 유력 잡지에 경재관련 현장 보고서를 게재해 여러차례 상을 수상한바 있으며 독일 최고의 경제 언론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양미영 기자)

문화일보(06. 12. 22) 무소유와 백만장자 사이 행복과 돈의 난해한 함수

행복과 돈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돈만 있으면 무조건 행복할까. 아니면 돈이 없더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을까. 현실론자들은 당연히 돈이 있어야, 그것도 충분히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 낭만적 또는 관념적인 이들은 돈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행복이 좌우된다고 주장한다. 과연 정답은 무엇일까.

책은, 돈과 행복 간의 관계를 정확하게 파고들고 있다. 결코 과도한 현실론이나 관념론에 빠지지 않고,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실제적인 사례들을 통해 돈과 행복이 어떤 함수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행복경제학’이란, 단순히 행복에 관한 그럴듯한 말들을 늘어놓기만 하는 분야가 아니다. 소득과 재산이 삶 속에서 실제로 느끼는 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는 경제학의 한 분야다. 물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지 1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이를 전공으로 하는 학자들이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점차 주목받고 있는 학문 분야다.

책은, 두 가지 극단적인 사례를 통해 행복과 돈의 상관 관계를 살핀다. 우선, 돈이 많을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한 ‘머니 코치’ 보도 섀퍼다. 그는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 가난은 잘못된 생각의 결과다. 사는 동안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은 자기 잘못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메시지로 섀퍼는 수백만명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스스로 백만장자가 됐다. 하지만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또 다른 예는, 행복하기 위해 돈 없는 삶을 선택한 하이데마리 슈베르머다. 그녀는 돈, 신용카드, 저축, 의료보험, 사회보장 혜택 등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선택한다. 단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방에게 필요한 일을 해준 대가로 충당할 뿐이다. 또는 상대방의 호의에 기대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 같은 삶을 택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책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선 돈이 필수불가결함을 보여준다. 행복경제학자들은 ‘행복한 사람들은 부자들 중에 있다’는 주장에 강하게 긍정한다. 하지만 ‘재정적인 자유를 얻는다면 누구나 행복해진다’는 명제엔 확실하게 부정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돈은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국민 1인당 연간 소득 1만달러에 이르기까지엔 소득이 올라갈 수록 행복지수도 비례하지만, 연간 소득 1만달러가 넘어서면 소득의 증가가 곧 행복감의 고취와 연결되지는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마디로 돈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돈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책은 증명하고 있다.(김영번 기자)

06. 12. 28.

 

 

 

 

P.S. 그러니까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돈이냐 행복이냐' 따위가 아니다. 정리하자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선 돈이 필수불가결하며, 다만 이때의 행복은 상대적이어서 1인당 연간 소득 1만달러에 이르기까지엔 소득이 올라갈 수록 행복지수도 비례하지만, 연간 소득 1만달러가 넘어서면 소득의 증가가 곧 행복감의 고취와 연결되지는 않는다(인도의 노숙자가 미국의 노숙자보다 행복하다!). '가난한 날의 행복'도 있는 것이지만 가난 때문에 더 행복할 리는 없는 것이다. 그게 일상적 삶의 감각이다.  

김소운의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은 과거에 국어교과서에도 실려 있었다. 하지만 그런 '교과서적' 내용과 무관하게 내가 기억하는 행복은 돈과 관련된 것이다. 상대적으로 지금보다 '덜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내가 초등학교때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께서 어느 해 연말인가 보너스를 포함해서 50만원의 월급을 받아오신 적이 있었다. 사상 '최고액'을 봉투에 두둑히 담아 들고 오신 아버지나 그걸 받아드신 어머니나 그날만큼은 더없이 행복해 하셨다. 아마도 그날 아버지는 북어 안주에 한잔 하셨을런지도 모른다. 물론 돈 자체가 행복을 대신해주는 건 아니다. 그 돈으로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걸 장만해줄 수 있다는 부듯함이 행복의 원천이었던 것. 적어도 '소득 1만달러'가 되기 전까지는(사실 이 '1만 달러'는 민주주의의 경제적/심정적 토대이기도 하다).

그 '1만 달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3인 가족을 기준으로 하면 연소득 3000만원 이상의 소득을 가리킬텐데, 얼마전에 신문을 보니까 그 정도 소득이면 60억 세계 인구 가운데 상위 6% 부근이라고 한다. 좀 넉넉하게 잡아서 10%라 하더라도 전체 인구의 90%는 아직도 소득이 올라갈수록 행복지수도 비례하는 계층에 속한다. 하므로 '돈이냐 행복이냐' 같은 '배부른' 소리는 자제하는 게 옳겠다. 

내 생각에 '근대소설'은 그 90%를 위한 문학 형식이었다(먹고살 만한 10%에게 필요한 건 엔터테인먼트이다). 우리가 1인당 연평균소득 3만불 시대로 진입한다면 '소설'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가난'이 빠진 문학은 김 빠진 사이다만큼이나 밋밋하다. 물론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을 고민할 수도 있고, 우아 떠는 소설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걸로 '문학정신'을 운운하는 일은 삼가하는 게 좋겠다.

어쩌다 이야기가 문학으로 번진 김에 나로선 미스테리하게 여겨지는 시 한편을 인용해본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인가에도 실렸(었)고 수능 문제로도 한번 출제된 바 있는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이다. 얼마전 북데일리에 실린 인터뷰를 읽어보니까 이 시는 시인이 "남을 위해 쓴 유일한 시"라고 한다.

"작품의 주인공은 시인이 자주 드나들던 동네 술집의 딸과 그의 애인. 남자가 도피중인 노동운동가라 결혼은 꿈도 못 꾸는 상황에서, 신경림이 직접 식을 준비해 주례를 섰다. 그 때 선물한 축시가 바로 ‘가난한 사랑 노래’다. 지금 부부는 인천에서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나도 젊을 때 그런 사랑을 한 경험이 있어요. 실패한 첫사랑이 다른 사람의 성공에 오버랩된 거지. 남을 위해 썼지만, 결국 담은 정서는 내 거였어.” 일화를 알고 나서 읊는 시는 더욱 애잔하다.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이 가슴까지 전해온다. 이것이 신경림이 말한 ‘제 맛’인가 보다. 깊은 울림을 독자와 나누기 위해, ‘가난한 사랑 노래’ 전문을 싣는다."(06. 12. 08)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 두 점을 치는 소리 /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란 마지막 구절만을 놓고 보아도 이게 어떻게 '결혼식 축시'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실패한 첫사랑의 시'가 말이다!). 언젠가 중학생들에게 이 시를 읽히고 시의 주제가 무엇인가를 물어보기도 했는데, 당신이라면 어떻게 답할 수 있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움, 사랑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라는 게 이 시의 메시지라면 말이다(이 시의 '깊은 울림'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 시를 읽히면서 '자발적 가난'을 운운할 수 있을까? 물론 모든 시가 희망을 노래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가난의 울분과 한을 노래한 시를 굳이 모든 학생들이 읽고 음미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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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6-12-28 16:00   좋아요 0 | URL
'평균치'의 삶도 꾸려가지 못하리라는 위협/죄의식(!)과 '행복'이라는 어떤 도달해야 하는 시대적 이상...초자아가 행복의 자리로 귀환하고 있다는 지젝의 지적이 떠오르네요.

마노아 2006-12-28 22:05   좋아요 0 | URL
오늘 이 페이퍼 유독 마음에 와 닿아요. 내가 중학교 때에 이미 이 시를 절감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조금 싸아하기도 합니다.

로쟈 2006-12-29 16:51   좋아요 0 | URL
suture님/ 요즘은 '행복' 또한 '자유'나 '평등'만큼이나 모호하고 무의미한 말이란 생각이 듭니다.
마노아님/ '어려운 시절'을 보내셨군요.^^
 

주말에 잠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후유증'으로 진종일 리포트와 씨름하게 됐다. 150여 명의 리포트와 시험지를 채점하는 일이 생각만큼 만만찮다. 예전엔 학기말에 350명까지 채점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나이탓(?)인지 100명만 넘어도 숨이 차다(100통이 넘으니 이메일 발송도 되지 않는다). 하루종일 의자에 앉아 있었더니 저녁을 먹고 나서 속이 다 울렁거린다. 이럴 때 딱 어디론가로 '넘어가고' 싶다. 비욘드(beyond)란 전치사가 머리속에 떠오른 이유이다. 그리고는 지난주에 나온 신간 <그레이트 비욘드>(지호, 2006)에 대해 몇 자 적고 싶어졌다.

 

 

 

 

책의 부제는 '고차원, 평행우주 그리고 만물의 이론을 찾아서'이다.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는 차원과 그것을 탐구한 물리학자들의 이야기. 지난 백 년 동안 이루어진 발전으로 중요한 물리적 개념이 된 고차원에 대해, 지은이 폴 핼펀은 고차원 이론의 시작과 발전, 그리고 앞으로의 발전 방향까지 모두 담았다."라는 게 책의 개요이고. 이 주제에 관해서라면 미치오 가쿠의 <평행우주>와 <초공간>이 최고의 책들이다(비록 나는 <초공간>만 읽었지만).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와 함께 이 분야의 필독서 내지는 필수 소장도서 되겠다. 젊은 물리학자 폴 핼펀이 차세대 '이야기꾼'이 될 수 있을까?

문화일보(06. 12. 22) 인식한계 넘어선 고차원이론 ‘미지’를 탐구해 온 과학자들

물, 불, 흙, 그리고 공기. 그리스 자연철학 이래로 세상을 구성하는 네가지 근원적 물질로 이해됐다.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은 끝이 없다. 다섯번째 물질에 대한 탐구가 계속됐으며 유력한 후보로 빛이 꼽혔다. 물리학에서 이 제5원소의 존재를 뛰어넘어 버린 사람은 아인슈타인이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본질을 넘어, 속도에 착안하면서 상대성이론이라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창을 열었다. 아인슈타인은 말년에 일반상대성이론, 특수상대성이론을 넘어 이를 통합하는 ‘통일장’이론에 몰두했지만 실패했다. 이 책은 최신 과학이론을 ‘더 그레이트 비욘드(The great beyond)’, 현재를 넘어서는 위대한 무엇에 접근해온 과학자들의 기록이다.

현재 인식 가능한 차원은 1차원 점, 2차원 면, 3차원 입체, 그리고 4차원 시간이다. 이런 4차원 속에 존재하는 우주의 힘은 전자기력, 중력, 약한 상호작용, 강한 상호작용 4가지 힘이다. 이 가운데 인간이 현재 가장 잘 알고 있는 힘은 전자기력이다. 19세기 맥스웰이 전자기현상을 네 개의 식으로 기술하는 데 성공한 이래 현재 가장 작은 세계에서의 전자기적 현상을 양자전기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됐다.

그 다음이 중력이다. 17세기 뉴턴이 발견해 20세기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해 새롭게 해석됐지만 전자기력과는 달리 아주 미세한 세계에서는 아직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약한 상호작용은 1896년 앙리 베크렐이 발견한 방사성 붕괴, 즉 약한 핵력이고, 마지막 강한 상호작용은 원자핵이 왜 분해되지 않는지를 설명한다.

우주의 발생과 함께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네 가지 힘은 고집 센 형제들처럼 저마다 독특한 방법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네 개가 한데 모이면 현재의 4차원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 ‘더 그레이트 비욘드’를 도입하면 거짓말처럼 설명이 된다. 이것이 20세기초 독일의 수학자 데오도르 칼루차와 스웨덴의 물리학자 오스카 클라인이 제시한 ‘칼루차-클라인의 기적’으로 불리는 이론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이론과 관련 3년 가까이 고민하다가 1919년 “이론의 형식적 일치에 놀라울 뿐”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실험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신비주의의 영역으로 흘러가면서 무관심해졌다가 최근 초끈이론, M이론 등 다차원 이론을 통해 새로운 힘을 받고 있다. 또 새로운 강입자가속기 등의 개발은 실험적 입증을 가능하게 해 줄지도 모른다. 과연 미지의 새로운 차원이 밝혀질 것인가. 그렇게 된다면 인간은 모든 것을 새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김승현 기자)

경향신문(06. 12. 23) 재미있고 쉬운 ‘최첨단 물리학’

이론물리학의 묘미는 사람의 생각만으로 자연의 숨은 비밀을 밝히는 데 있다. 즉, 비싼 실험장비 없이도 펜과 종이만으로도 우주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데 그 묘미가 있다. 순수이론물리학에서는 매우 기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 질문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 왜 공간에는 가로·세로·높이만 있는지, 왜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고 있고, 시간을 나타내는 데는 하나의 숫자만 있으면 되는지 등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란 매우 어렵다.

다행히 이론물리학에선 이러한 문제에 대한 직관적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가 간혹 있다. 이러한 것을 경험한 이론물리학자는 매우 운이 좋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운이 따른 물리학자들이 칼루차와 클라인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가로, 세로, 높이라는 세 개의 공간 차원을 뛰어넘는 여분의 차원을 도입함으로써 여러 가지 자연의 기본 상호작용을 통합하는 ‘통일장 이론’을 제안했다.

자연의 기본 힘을 설명하는 방법 중 가장 우아한 것은 중력을 4차원의 시공간이 굽어진 것으로 설명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이다. 중력 외에도 자연의 기본 힘에는 세 가지가 더 있다. 전자기력, 약한 핵력, 강한 핵력이다. 이 힘들을 설명하는 이론은 일반상대론과는 판이하게 달라 보인다.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다양한 기본 힘을 설명하고 있음은 무언가 현재까지의 물리학이 덜 발전해서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물리학자들은 더 큰 이론적 체계에서는 네 가지의 기본 힘들이 하나의 통일된 언어로 적힐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칼루차와 클라인은 4차원 이상의 여분의 차원이 있는 시공간에서의 중력이 4차원에 투영될 경우 중력 이외의 힘들로 나타남을 계산을 통해 보였다.

20세기 초에 발표된 이러한 칼루차와 클라인의 아이디어는 1970년대 들어와 11차원의 초중력이론(supergravity)으로 발전했으며 11차원이 모든 힘이 들어갈 수 있기에 적합하다는 주장이 나오기까지 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10차원의 초끈이론(물질의 근원이 점입자가 아닌 작은 진동하는 끈으로 되어있다는 이론)이 대두되어 지금까지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일된 이론의 강력한 후보로 논의되고 있다.

사실 이론물리학에서는 아이디어의 부침이 심하다. 그러나 칼루차와 클라인의 여분의 차원의 아이디어는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론물리학의 중요한 패러다임으로 사용되고 있다. 폴 핼펀은 20세기 물리학 중에서도 우주와 통일장 이론에 관해 일반인들에게 많은 책을 써오고 있는 저자이다. 이번에 출간된 ‘그레이트 비욘드’에서 핼펀은 최첨단 물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재미있는 글 솜씨를 잘 조합해 매우 읽기 쉬운 책을 만들어냈다. 보기 드문 책이다. 이러한 책을 접하는 사람은 제목만 들어도 어렵게만 다가오는 통일장 이론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숨결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최신 과학이론에 대한 과학사라고 볼 수 있다. 과학사라 해서 우리가 직접 만날 수 없는 과거의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만 등장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앞부분에는 물론 과거 물리학자들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모아놓았지만-어떻게 이렇게 좋은 자료를 많이 수집하였는지 감탄할 만하다- 뒷부분에는 아직도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는 물리학자들의 산 증언이 많이 기록돼 있다. 특히 반가운 것은 필자가 미국에 막 유학 갔을 당시 칼루차와 클라인 이론으로 예일대학이 유명했는데 책에 지도교수 초도스의 일화가 잘 담겨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책의 8할 정도를 할애해 칼루차와 클라인의 기하학을 통한 통일장 이론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과학사에 흥미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에서는 1980년대 이후의 이론들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제12장에서는 현재 물리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여분의 차원이 크다는 ‘브레인 월드이론’ 등을 제안하고 실험적으로 검증하려는 시도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이론에서는 우리의 우주와 아주 가까우면서도 보이지 않는 평행한 우주가 있을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다른 차원과 다른 우주를 발견하게 된다고 하면, 인간이 지구만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닌 이 우주에서의 중요한 위치를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분야에 대한 책을 몇 권 이미 섭렵한 독자에게는 물리학 자체에 대해서는 새로운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이렇게 쉽게 설명할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을 낳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즉, 물리를 공부했건 안했건 간에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또한 이론물리학자들 간의 대화와 상호 교류에 관한 증언은 이 책만의 독특한 점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몇몇 물리학자의 이름이 잘못 적혀 있어 옥에 티라고 할 수 있다. 또 아쉬운 점은 이와 같은 훌륭한 책이 한국사람에 의해서 직접 집필된 적이 아직 없다는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 그런 책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남순건|경희대교수·물리학)

06.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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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6-12-27 00:20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비로그인 2006-12-27 02:12   좋아요 0 | URL
미치오 가쿠의 평행우주는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브라이언 그린의 신작이 나온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몹시 기대됩니다..

로쟈 2006-12-28 16:2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도 책은 갖고 있는데, '명퇴'라도 해야 읽을 수 있을런지...
 

어제 아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들렀다가 구내의 서점에서 사들고 온 책은 노리나 허츠의 <소리 없는 정복>(푸른숲, 2003)이다. '글로벌 자본주의와 국가의 죽음'은 그 부제이다. 책은 3년전 여름에 출간됐는데, 언론의 주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소리없이 사라진 책 중의 하나가 돼 버렸다(물론 흔한 일이다). 세계화(글로벌 자본주의)의 현황과 그 비판을 내용으로 한 책들이 이후에 다수 출간됐기 때문에 그다지 '화끈하지' 않은 책이 묻혀버렸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잠깐 손에 든 책을 집에까지 들고 오는 수밖에 없었는데, 첫째는 1장의 'TV에 방영되지 않는 혁명'이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이고, 둘째는 러시아의 자본주의화/민영화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던 저자가 러시아 경제 전문가라는 사실 때문이다. 

 

저자인 노리나 허츠(1967- )은 저명한 패션 디자이너이자 여성운동가 리 허츠의 딸이기도 하다는데, 세계은행의 구성원으로 1990년대 초반 러시아로 건너가서 '자본주의 러시아'를 위한 증권시장의 설립과 민영화 프로그램 실행에 관여했다. 그러한 현장경험을 토대로 러시아의 시장경제화 과정에 신랄한 비판을 제기한 것이 1996년에 간행된 박사학위논문 <개혁기 러시아의 비즈니스 관계('Russian Business Relationships in the Wake of Reform)>이다. 이후에 그녀는 중동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현재는 케임브리지대학 저지 비즈니스스쿨의 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작으론 2002년에 출간된 <소리 없는 정복> 외에도 <채무위협(The Debt Threat : How Debt Is Destroying the Developing World)>(2005) 등이 있다.

3년전이면 이런 블로그도 없었던 시절 같은데 뒤늦게 관련리뷰 두 편을 옮겨놓는다.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읽어볼 심산으로.  

한겨레(03. 06. 20) 기업, 국가를 접수하다

“이제 정부는 시장의 복잡한 거미줄에 걸린 파리 신세에 지나지 않는다. 유권자들은 정부의 무능력을 감지하고 있다. 정치인의 손은 포박되어 있고, 그들이 내건 공약들이 점차 공허해지고 있음을 모두들 알고 있다. 우리는 기업의 장단에 맞추어 춤추는 정치인들을 이미 목격하고 있다.”

<소리 없는 정복>은 모든 게임의 규칙을 기업에서 결정하고, 국가는 단지 이런 규칙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집행관으로 전락하고 있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현실을 고발한다. 정부가 시민을 헐값에 팔아넘기면서 ‘시민’의 존재는 사라지고 소비자만 남게 된 현실을 폭로한다. 국가가 기업의 하수인·경비원이 되는 과정, 이것이 지은이가 말하는 ‘소리없는 정복’이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1980년대 신자유주의 물결 이후 국가는 자본(기업)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게 아니라, 사실상 자본의 ‘계급지배 도구’가 돼버렸다는 얘기이다.

이 책의 3, 4, 5장은 이 정복의 실상을 보여준다. 한 국가 안은 물론 국가간 빈부 격차 확대, 너도나도 이웃나라를 빈곤하게 만드는 조세정책을 펴게 만드는 바닥을 향한 경쟁의 논리, 기업이 제공하는 천문학적인 선거자금을 둘러싼 ‘더러운 거래’와 부패 등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제3의 길’을 주장한 빌 클린턴이나 토니 블레어 등 정치인들이 상당부분 실패했음을 주장한다. 프랑스와 독일 등에서도 이런 정복 과정이 진행되고는 있지만, “유럽 사회모델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일말의 기대를 나타낸다.

기업이 국가를 조용히 접수하는 과정은 남의 얘기가 아니다. 국가의 견제와 감시를 벗어난 재벌체제의 무분별한 확장에 주요한 원인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경우 1997년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사태는 이 소리없는 정복의 비극적 귀결이라 할 만하다. 한두 대기업의 이해를 위해 경유자동차 관련 세금이 인하되고 경제정책의 뼈대가 결정되는 현실도 그런 생생한 예이다.

크레디스위스, 브리티시피트롤리엄 등 대기업의 컨설턴트로 일하며 옛 소련 몰락 이후 러시아 증권거래소에서 “10년 동안 자본주의를 팔러 다니던” 지은이는 “이 소리없는 정복에 맞서지 않는다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는 말로 자신이 이 책을 쓴 배경을 설명한다. 지구 도처의 시민단체들의 시위는 기업으로부터 ‘국가를 되찾기 위한’ 희망의 싹이다. 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환경회의, 94년 멕시코 사파티스타 봉기와 사이버 전쟁, 99년과 2000년 시애틀, 프라하의 반세계화 시위, 2000년 시작된 부채탕감운동인 ‘주빌리 2000’,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시위가 그런 시도들이다.

동시에, 정치인들 스스로의 각성에도 기대를 건다. “소리없는 정복의 마지막 단계는 정치 그 자체의 종말”임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물론, 지은이는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만일 정부가 기업에 쏟았던 관심을 우리 국민에게 보이지 않는다면, 투표 대신에 구매와 시위를 선택”하겠다는, “국가가 우리를 되찾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국가를 되찾지 않을 것”이라는 배수진이 필요함을 잘 알고 있다.(조준상 기자)

동아일보(03. 06. 20) '소리 없는 정복:글로벌 자본주의와 국가의 죽음'

후세의 역사가들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어떻게 기록하게 될까. 홉스봄이 지난 19세기를 ‘자본의 시대’라 명명한 바 있듯이, 1970년대 이후 세계 사회는 아마도 ‘세계화의 시대’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서유럽은 물론 정통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노동자당 대통령 룰라의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변화와 충격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세계화다.

지난 몇 년간 이 세계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다룬 책들이 숱하게 쏟아져 나왔다. 한편에서 세계화를 새로운 시대적 흐름으로 옹호하는 견해도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화의 덫’ 또는 ‘빈곤의 세계화’를 경고하는 저작들도 있었다. 찬사를 보내든 비난을 하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이미 세계화라는 질주하는 호랑이의 등을 타고 있으며, 이 질주가 어디로 향하는지가 매우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노리나 허츠의 ‘소리 없는 정복’은 바로 이 세계화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는 책이다. 여기서 흥미롭다는 것은 복잡다단한 세계화의 구조와 동학(動學)을 다양한 사례와 자료들을 중심으로 속도감 있게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국내에서도 성공을 거둔 바 있는 ‘세계화의 덫’이나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계보 속에 놓여 있다.

다른 책들과 비교해 이 책이 갖는 강점은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응하는 국가의 무력함을 예리하게 분석한다는 점에 있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국가는 시민을 헐값에 팔아넘기고 자본주의라는 브랜드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국가는 자신의 역할을 축소하고 그 권력을 거대 기업에 넘김으로써 이른바 정당성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저자의 대안은 국가의 복원과 시민사회의 강화다. 저자는 오늘날 그 역할이 축소되고 있다하더라도 기업의 권력남용을 제재하고 개인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마지막 거점은 역시 국가라고 본다. 더불어 비정부조직(NGO)은 최근 반세계화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외형은 자유롭지만 이면은 더없이 냉혹한 시장의 원리에 맞서는 또 하나의 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소리 없는 정복’이란 제목이 암시하듯 이 책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흥미로우면서도 설득력 있는 보고서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아쉬움은 흥미를 넘어선 독창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 책의 내용은 많은 부분 이미 다른 책들에서 다뤄진 바 있으며, 대안으로 제시하는 일종의 개혁 세계화론도 그리 새로운 전략이라고 보기 어렵다.

문제의 핵심은 현실이 강제하는 힘을 규범적인 처방으로 과연 어느 정도까지 제어할 수 있느냐에 있다. 대다수 사람들이 인간적인 세계화를 갈망하고 있음에도 그 길로 나아가는데 여전히 자본의 강제력이 압도적이라는 게 세계화 시대의 본질이다. 비인간적인 세계화를 넘어설 수 있는 실현가능하고 지속가능한 대안을 모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남긴 숙제다.(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06. 12. 25.

P.S. 여담을 덧붙이자면, 저자 노리나 허츠의 이미지를 검색해보면 패션 모델처럼 찍은 사진들이 여럿 눈에 띈다(겨울숲을 배경으로 롱코트에 부츠를 신고 커다란 등받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모습을 찍은, 국역본 책갈피의 사진도 그런 종류이다). '이건 또 무슨 컨셉인가' 싶었는데, 어머니가 패션 디자이너였다니까 이해가 된다. 그녀의 표현을 빌면, '판타스틱한 어머니'였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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