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06. 12. 01) 서양철학의 새지평 개척 베르그손 철학 다시 읽기

근대 서양 철학과 과학의 대표 주자로, 정신과 물질 이원론자인 데카르트와 기계적 운동법칙을 발견한 뉴턴이 꼽힌다. 그리고 이같은 전통은 인간 중심적인 기독교적 인간관과 결합한, 서양 근 대 문명의 한계로도 이해된다. 인간의 이기적인 과학기술 만능주의와 경제 제일주의를 비판할 때 서양 근대의 기획이 도마에 오 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흔히 거론되는 것 은 불교나 노장, 혹은 유학의 양명학으로 대표되는 동양적 사유 다.

하지만 동양의 불교나 노장, 그리고 양명학이 이른바 정파(正派)라 할 유학의 주자학 입장에서 보면 사파(邪派)였듯이, 서양에서도 불교나 노장에 비견할 만한 지적 전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들이 근래 프랑스에서 일군의 걸출한 철학자들을 만나 자본주의를 축으로 하는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과 대안 제시에 탁월한 설명력을 발휘했으니, 바로 현대 프랑스 철학이다. 그리고 그 절정에는 들뢰즈가 서 있는 듯 보인다.

한국에서 베르그손이 각광받게 된 계기도 들뢰즈 철학의 곳곳에 서 배어나는 베르그손의 영향력 때문이리라. 들뢰즈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 니체와 함께 베르그손을 꼽는데 이견이 없기 때문이다. 그린비 출판사가 ‘연구공간 수유 + 너머’와 함께 기획한 ‘리라이팅(rewriting·다시 쓰는) 클래식’의 하나로출간된 ‘물질과 기억, 시간의 지층을 탐험하는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은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쓴 것이다.

‘물질과 기억’은 베르그손이 37세 되던 1896년 출간돼 당시 고교 교사였던 베르그손을 단번에 유명인사로 만든 책. 당시까지 이어져 온 철학 전통은 물론, 심리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탁월한 분석으로 출간되자마자 학계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으나, 비전문가가 이해하기에는 녹록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그의 철학적 방법론과 주요 개념의 대부분을 포괄하면서도, 심 리학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은 약 20년간 베르그손에 천착하며, 그의 주저인 ‘창조적 진화’를 번역하고 베르그손 연구서를 낸 저자가 ‘물질과 기억’ 에서 드러나는 베르그손의 철학을 쉽고도 입체적으로 조망한 책이다. 어렵거나 오해의 여지가 있는 개념에 대해서는 부록까지 만들어가며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고, 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에는 그림까지 삽입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물론 ‘리라이팅 클래식’의 첫 책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처럼 게으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문외한이더라도 조금만 집중해서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 면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이미지’와 ‘기억’이라는 독특한 개념들로 설명하면서, 서양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베르그손의 면모를 즐길 수 있다.(김종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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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27 02:14   좋아요 0 | URL
물질과 기억’은 베르그손이 37세 되던 1896년 출간돼 당시 '고교 교사'였던 베르그손을 ...<- 이 대목이 눈에 확 들어오는 군요. 프랑스 고등학생들이 굉장히 부러워집니다..

로쟈 2006-12-28 16:26   좋아요 0 | URL
프랑스에서도 드문 경우 아닐까요?^^
 

'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이란 제목의 책이라면 어떤 내용이 연상되는가? 아무래도 그리스 비극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쓴 인문교양서라는 사실을 떠올리기는 힘들 것이다. 한데, 놀랍게도 사실이 그러하며 원제 또한 그러하다. 이번에 번역본을 낸 출판사에서도 한번쯤 고민을 해봤겠지만 '비극'보다는 '러브'와 '섹스'의 선정성에 기대/내기를 건 듯하다. 표지까지 어두침침해진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목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 쉬운(?) 책인 듯싶어서 부랴부랴 낚시질을 해둔다.

 

경향신문(06. 12. 23) 고대 그리스인도 ‘몸짱’에 열광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그리스 문학과 문화를 가르치는 저자는 그리스 비극의 세계적인 권위자. 그의 저서 ‘그리스비극 읽기(Reading Greek Tragedy)는 이 분야의 대표적 참고문헌이다(*그렇다면 이 책이 먼저 소개되어도 좋지 않았을까? 조만간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은) 그런 그가 섹스 몸 결혼 종교 오락 정치 등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고대 그리스와 현대를 조목조목 비교해놓은 대중교양서다. 2004년작.



일례로 현대의 ‘몸짱’ 열풍과 비슷한 몸만들기 노력이 고대 그리스 시민(여성과 아이와 노예를 제외한 남성들) 사이에서도 유행했다. “자넨 올림픽 경기 선수 못지않게 몸을 관리해야 하네”. 이는 소크라테스가 몸이 빈약한 친구 에피게네스에게 한 말이다. 훌륭한 몸은 자아감을 높였던 만큼 체육관과 다이어트 및 운동안내서가 번창했다.

그리스인들의 부부관계가 가족유지를 위한 형식적인 것이었다는 대목도 있다. “아내와 연인처럼 같이 자는 것은 간통만큼이나 혐오스러운 짓”이라는 세네카의 말대로라면 아내에게 애정을 갖는 것은 비극적이거나 희극적인 일이었다.

동성애는 보편적일 뿐 아니라 명예롭게 받아들여졌다. 사춘기를 지나 턱수염이 나기 직전의 미소년은 성인 남성들에게 갈망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그 소년이 체육관에 들어섰을 때 벼락을 맞은 듯 눈을 홉뜨면서 혼란스러워 했다. 모든 이들이 그를 조각상처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때 나는 소년의 망토 안을 얼핏 보고서 활활 타올라 더 이상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타우레아스체육관에서 미소년 카르미데스를 본 뒤의 느낌을 이렇게 토로했다.

상류층 여성이 거친 남성에게 끌리는 일도 다반사였던 것 같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황제의 부인인 파우스티나는 한 검투사를 좋아하게 돼 그것을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황제는 즉시 그 검투사를 죽이게 해서 왕비와 잠자리를 갖기 전 그의 피로 목욕을 하도록 했다.

여성에 대한 비하는 서구문명의 전범인 고대 그리스의 치부였다. 미술이나 조각작품에서 여성의 몸을 볼 수 없는 것은 여성의 몸을 남성의 몸의 기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혈액과 체액이 흐르는 관이 서로 연결돼 있는 항아리로 간주됐는데 이것이 잘 뚫려있는지 보기위해 여성의 질 속에 밤새 마늘조각을 넣어두었다가 이튿날 아침 입을 통해 냄새가 올라오는지 확인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후대인들에게 숭모의 대상이었던 고대 그리스를 생생하게 살아숨쉬는 모습으로 복원해놓는다. 그 목적은 “네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면 너는 언제나 어린아이에 머물러있게 될 것이다”라는 키케로의 말처럼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기 위함이다.(한윤정 기자)

06. 12. 23.

 

 

 

 

P.S. 그리스 비극과 관련한 책 몇 권의 이미지를 띄워놓는다. 천병희 선생의 원전 번역과 함께 시중에서 구해볼 수 있는 작품집에는 현암사에서 출간된 '그리스비극' 시리즈가 있다. 천병희 교수의 <그리스 비극의 이해>(문예출판사, 2002)와 김상봉 교수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한길사, 2003)는 이 분야의 '업적'이다. 그리스 비극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다루고 있는 사이먼 골드힐의 책과 같이 읽으면 유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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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티우스 2006-12-24 19:58   좋아요 0 | URL
이 '우리'의 문제... 저자 혹은 기자에 따르면, 한국인인 우리도 '우리'가 누구인지 혹은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고대 그리스를 알아야 하는군요... 가히 그리스는 우리의 또 다른 '또 하나의 조국'입니다....

책 자체는 흥미로운 것으로 보이네요...^^

로쟈 2006-12-24 20:08   좋아요 0 | URL
철학이란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 되는 것이죠.^^
 

"여러 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한" '비정규직' 철학박사 강유원의 신간이 출간됐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이론과실천, 2006)이 그것이다. 흔히 '경철수고'라고 불리던 책인데, 지난 1987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김태경씨의 번역으로 출간됐던 책이다. 그때 분량은 151쪽이었는데, 이번에 나온 번역본은 229쪽이다. 목차로 봐서는 후주의 분량이 많아진 탓인지 책의 판형 때문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아직 책을 직접 보지 못했다).

이 '경철수고'와 관련하여 내가 갖고 있는 책은 국역본이 아니라 펭귄판 <초기 저작선(Early Writngs)>(1992)인데, 이 영역본의 분량으론 120쪽 가량이다. 책은 재작년에 모스크바대학의 구내 헌책방에서 50루블(당시 환율로 2,000원)에 구한 것이다. 국역본과 영역본의 표지를 나란히 놓고 보니까 마르크스의 사진이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 <공산당선언>이 발표되기도 전인 1844년에 나온 '경철수고' 자체가 청년 마르크스(1818-1883)의 저작인 만큼 영역본의 사진이 보다 어울려 보인다(그러니까 마르크스가 만 26세에 쓴 글이다).

 

 

 

 

짐작에 1841년에 쓴 박사학위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그린비, 2001)를 제외하면 가장 젊은 시절 마르크스의 단행본 저작이겠다. 참고로, 김태경 번역본은 절판되었고, 박종철출판사에서 나온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1997)에는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가 발췌돼 실려 있다.   

신간의 출간과 관련하여 '강유원'을 검색해보다가 발견한 글은 재작년 교수신문에 실렸던 한 칼럼이다('독서유감'이란 제하에 당시 대학강사이던 강유원의 연재칼럼이 게재된 바 있다). '소설읽기의 괴로움'이란 제목이 달려 있으니 눈에 띌 수밖에 없는데 이 깐깐한 서평가에게 '소설읽기의 괴로움'이란 '철학읽기의 즐거움'이 갖는 이면이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그의 '서평들'을 읽는 데 참고가 될 듯하여 옮겨놓도록 한다. 읽고나서 남는 게 없기 때문에 소설은 읽을 게 못된다, 그나마 보르헤스의 문학론 정도는 정보량이 많아서 읽을 만하다, 라는 게 대략적인 요지이다.  

교수신문(04. 04. 09) 소설읽기의 괴로움

솔직히 말해서 나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 그의 다른 대하소설들 ‘아리랑’이나 ‘한강’도 마찬가지다. 대하소설, 견뎌내기 힘들다. 아무리 얇아도 소설 읽긴 너무 힘들다.

소설 읽기가 힘든 이유는 첫째, 소설은 논리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종잡을 수가 없다. 대강이라도 앞을 예측하지 못하는 건 불안만 안겨줄 뿐이다. 영화를 보러 갈 때도 미리 스토리를 다 알아야 하며, 유념해서 봐야 할 장면들을 챙겨서 가는 나로서는 소설의 이러한 돌발성을 감당하는 게 상당히 힘든 일이다.

두 번째로 소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읽고나도 남는 게 없다는 것이다. 진한 감동을 남기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글쎄 그렇게 남은 감동이 도대체 내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별로라는 대답이 저절로 나온다. 오히려 내가 소설을 읽고나서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 소설에 아주 풍부한 정보가 담겨 있을 때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른바 판타지 문학은 전혀 아니올시다다. 이것만은 꼭 읽어야겠다 싶어서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붙잡고 낑낑대다가 결국 손에서 놓고 말았다. 뭔 책인들 제대로 읽었겠는가마는, 어쨌든 판타지 문학은 남는 거 없고 시간낭비에 작가의 상상력을 따라가지도 못하는 내 빈곤함 때문에 늘 실패로 돌아간다.

보르헤스는 톨킨과 마찬가지로 한참 '유행'할 당시, 한번 읽어보기나 해야겠다 싶어서 잡은 것이었다. 그런데 톨킨의 책을 내팽개쳤다면 보르헤스는 그러지 않았다. 보르헤스가 뭐 대단한 소설가여서가 아니라 그의 소설들은 짧았기 때문이다. 내가 보르헤스를 그 뒤로 계속 읽은 것은 그 소설들의 짧음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그의 소설들이 재미없다는 것을 느꼈고, ‘허구들’(녹진 刊), ‘불한당들의 세계사’(민음사 刊), ‘셰익스피어의 기억’(민음사 刊)만을 읽고 말았다. 역시 소설은 소설인 것이다.

나에게는 보르헤스가 소설가로서가 아니라 문학과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으로서 매력이 있다. 그래서 그의 소설 보다는 문학론, 책 이야기에 관한 책은 반드시 사서 읽게 된다. 그의 이런 책들은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정보가 풍부한 책들인 셈이다.

‘칠일 밤’에 들어있는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다. 여기에서 그가 이야기하는 일곱 개의 주제들 중, '신곡', '천 하룻밤의 이야기', '카발라' 등은 오랫동안 날 매혹시켜온 주제들이다. 소설이 아니니 앞에서부터 읽지 않아도 그만이고, 그 주제들만을 골라서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는 가운데 만나게 되는 몇몇 구절들은 나를 더없이 흥분시킨다.

이를테면 이런 것, "우선 헤로도토스의 ‘역사’ 9권에서 머나먼 이집트의 존재에 대해 밝힌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머나먼'이라고 말한 것은 공간은 시간에 의해 측정되고, 여행은 그지없이 위험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이집트라는 세계는 가장 오래되고 위대한 세상이었고, 그들은 이집트를 미스터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공간은 시간에 의해 측정된다"는 말에서 나는 '현대의 시공간 압축'을 떠올리면서 그 말을 음미하며, 선진국 이집트를 동경했던 플라톤을 생각한다.

또 이런 것. "그러나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적어도 괴테의 나선형식 진보를 믿습니다." 여기서 나는 괴테와 헤겔이 동시대인이었으며, 헤겔의 변증법적 전개가 나선형이었음을 상기하면서, 또는 칼 뢰비트의 ‘헤겔에서 니체에로’의 내용들을 이어 붙이면서 텍스트를 즐긴다. 어디선가 보르헤스가 말했듯이 책들끼리의 대화가 내 머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과독한 탓인지 내게 이런 즐거움을 주는 한국 작가는 아주 드물다. 당대의 소설가라는 사람들이 신문에 덜 익은 정견이나 발표하고, 무슨 정당에 가서 공천 심사나 하는 건 본 적이 있다. 이제 그런 거 그만하고, 일단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에 들어있는 '소설가가 작품의 전면으로 나설 때'를 읽은 뒤, 방에 들어  앉아서 공부들이나 좀 했으면 싶다.(강유원 / 동국대 철학)

06. 12. 21.

 

 

 


P.S. "무슨 정당에 가서 공천 심사나 하는" 작가가 알다시피 작가들의 공부방을 마련해놓고 강유원 이상으로 '교양'을 강조해마지 않는 소설가 이모씨라는 건 아이러니컬하다. 여하튼 이 칼럼은 '서평가' 강유원에 대해서 많은 걸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기에 유용하다. 거기에 덧붙여 읽어볼 만한 것은 서평집 <주제>(뿌리와이파리, 2005)의 서문이다(이 책은 얼마전 한겨레 고명섭 기자의 <담론의 발견>(한길사, 2006)과 함께 한국출판평론상을 수상했다. '출판평론'이란 이 경우에 '서평집'을 말한다).  

"내가 보기에 세상에는 '책'이 몇 권 있다. 아니 다섯 권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 <오디세이아>와 <오이디푸스 왕>, <신곡>과 <정신현상학>. 이 책들 중에서 <정신현상학>을 제외하고는 원어로 읽어보지 못하였다. 죽기 전에 진심으로 기원하여, 다음 생에서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두 권 정도 더 읽어볼 수 있을 듯하다. 다시 또 죽은 뒤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나머지 두 권을 읽어보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보르헤스의 문학을 평하여 '진지한 농담'이라고도 하지만 이런 '소망'이야말로 진지한 농담의 전형 아닌가? 그의 분류를 그대로 적용하자면, '강유원 서평집'이란 부제를 달고 '니 주제를 알라!'란 표어를 내세운 이 서평집에서 그가 다루고 있는 책들은 <신곡>을 제외하면 모두 '책 아닌 것들'이겠다. 그러니 "여기에 묶인 글들은 주석이나 해설이나 베낀 것에 대한 하찮은 푸념일 뿐이요, 주석도 해설도 베낀 것도 아닌 것들에 대한 비웃음이다."란 자평은 액면 그대로 접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푸념과 비웃음에 또 '출판평론상'이란 게 주어졌으니 이 또한 고난도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고. 초급 아이러니스트인 내가 명함도 못내밀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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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21 15:48   좋아요 0 | URL
학창시절 어느 땐가 읽은,
소설 읽는 것은 "일종의 시간낭비"라는 쇼펜하우어의 언명에 세뇌되어
소설은 좀체 읽지않게 되더군요.
그래도 학생 때는 세계문학전집은 공부삼아 일견했었지요.
학창시절 읽었던 소설 중 가장 인상깊었던 소설이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이었답니다. 깊이있는 소설이지요.
당시에는 낑낑대며 어렵사리, 그렇지만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현재는 외국 소설은 두어 권 서가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
아니 에르노의 소설 두 권
강유원 선생의 소설에 관한 관점에 얼마간 공감합니다.


로쟈 2006-12-21 16:10   좋아요 0 | URL
소설을 읽는 게 시간낭비라는 데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쇼펜하우어적인 인생론을 본따서 인생이란 것 자체가 시간낭비일 터에... 그게 아니라면, 이유를 갖다붙일 게 아니라 그냥 "나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로 충분하지요(저는 만화를 좋아하지 않고 또 드라마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죠)...

비로그인 2006-12-21 17:27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소설 읽기의 즐거움' 의 반론을 기대해봅니다....
덧붙여 소펜하우어는 괴테의 소설에는 환장했던 사람이지요. ㅋㅋ

로쟈 2006-12-21 17:33   좋아요 0 | URL
반론이랄 게 없지요. 취향에 대한 자기고백에 불과한 거 아닌가요. <태백산맥>이 읽기 힘들다, 고로 <태백산맥>은 읽을 필요가 없는 소설이다, 이게 논리적인 결론은 아니니까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현상학>은 읽기/견뎌내기 힘든 책입니다. 문학이니 철학이니 시간낭비하지 말고 '유명학원' 혹은 부동산 '목'이나 알아보는 게 유익하고 실용적이겠죠...

sommer 2006-12-21 17:32   좋아요 0 | URL
취향을 곧장 위계로까지 비약시키는 것...진지함이 그 자신을 견디는 허약함이 아닌지 생각이 드네요. '상징계의 대진표'를 만들어 가면서...

닉네임을뭐라하지 2006-12-21 18:01   좋아요 0 | URL
간혹 강유원 홈페이지 가서도 느꼈던 거지만, 소설 독자로서 강유원은 확실히 별로예요. 물론, 서평가나 강연자로서 강유원은 좋구요.ㅎ
아, 새로나온 책 페이지 수가 늘어난 건, 글자 크기와 행간의 간격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예전 건 한 페이지에 31줄 이번 건 21줄. 살까말까 하다가 번역 상의 미묘한 차이에 흥미를 느껴 사긴 했는데, 에, 독일어도 좀 알았으면 좋을 텐데 말이죠.

토마스 2006-12-21 23:15   좋아요 0 | URL
강유원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들뢰즈는 왜 그토록 소설과 영화에 미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들뢰즈가 중시하는 생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소설의 예측 불허성이야말로 중요한 것이 되겠지요. 그 점에서 보자면, 강유원씨는 생성의 사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위의 글로만 알 수 없는 단견이기는 합니다만 비트겐슈타인도 영화를 즐겨보면서도 영화에 대한 코멘트는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니체와 들뢰즈처럼 다양한 문학(혹은 영화)을 흥미진진하게 읽어가는 철학자들의 매력이 상대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yoonta 2006-12-22 01:22   좋아요 0 | URL
강유원이라는 분의 그 솔직담백?한 성향을 처음에는 가식적이지 않고 위선적이지 않은 학자의 모습으로 봤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그것은 지나친 자기 방어본능에 의한 독선에 가깝더군요. 로쟈님 말씀대로 소설에 대한 자기 취향일 뿐인 이야기를 소설에 대한 일반론으로 확대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일종의 자기 합리화의 방식중 하나인 것으로 보이는군요. 한때 강유원홈피에 들락거리다가 사고쳐서 강제퇴출당한적이 있는데 그때의 경험을 돌이켜생각해보니 그분의 성향이랄까 스타일에 대해서 쪼금이나마 이해할수있게 되더군뇨..-_-;;

로쟈 2006-12-22 17:43   좋아요 0 | URL
연랑님/ 그렇군요. 역시나 비밀은 행간에 숨어 있나 봅니다...
모모님/ 저 또한 소설/예술과 근친적인 철학에 더 매력을 느낍니다...
yoonta님/ '쓰라린' 기억이 있으시군요.^^

린(隣) 2006-12-22 22:20   좋아요 0 | URL
문학을 사랑하는 철학도로서 뒤늦게 사족 한마디 붙여 봅니다.^^
제 전공도 프랑스쪽이고 원래 문학철학에 관심있어 성향대로 전공도 찾아가는 법인가 싶다가도 시대적인 영향, 이런 게 또 개인을 넘어서는 거 같거든요.
전 지방에 있어 강유원씨랑 무관하지만, 그 연배의 선생들의 일반적인 경향 아닐까 합니다. 더구나 독일철학 전공잔 더욱 그렇지요(물론 아도르노나 벤야민 공부하는 분들은 다르겠죠).평소에도 인간적으론 좋아도 정서적 결이 다르다 느끼죠. 문학은 물론 영화까지..
일화 하나,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과 거의 10년 전에 <시네마>1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책에 나온 영화들 외국에서 비됴 주문해 편집복사해서 보여주고 열성적으로 들뢰즈 영화철학에 입문하게 해 주셨죠. 근데 선생님, 영화 보는 시간 너무 아깝다고 맨날 FF로 보시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책 넘 지겹고 길다고 핵심 요약 정리 같은 거 없냐고 농담하시곤 했죠.^^
여러분껜 어떻게 들려도 문학과 영화, 이런 거 철학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생각하시는 선생님이셨죠. 근데 철학동네엔 이런 선생님이 그리 많진 않답니다. 논리성에 대한 일면적인 맹신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맹신을 요구했던 70, 80년대의 비합리적인 사회상도 한 몫 했겠죠. 선배 철학도들은 아마도 철학이 논리와 합리를 담보한단 자부심으로 그 어려운 책과 싸우며 어두운 시대를 비켜가거나 이겨갔을 겁니다. 그때 문학과 철학이 소통하긴 어려웠겠지요.
전 다른 세대라 예전엔 답답했지만 이젠 이해해봅니다. 그래서 소위 전통철학(플라톤, 칸트, 헤겔 등) 하는 분들이 이런 전통(?)의 자장에 있을 수밖에 없는 거겠구요. 강유원씨도 그런 분위기의 철학적 세례를 받은 세대가 아닐까 짐작합니다.
하지만, 최근 들뢰즈는 물론 여러 프랑스 철학자들이 소개되고, 유행이니 뭐니 하지만 철학동네가 위기 속에서도 풍성해진다고 봅니다. 블랑쇼 같은 이들도 조명되고 로쟈님 같은 분도 있고(^^;), 이제 문학철학이 한 자리를 만들어 가리라 예상해 보는 거죠.

yoonta 2006-12-23 01:14   좋아요 0 | URL
저두 갠적으로 문학보다는 철학에 더 끌리는 편입니다만 강유원씨같은 냉철한? 철학자분들보다는 때로는 좌충우돌?하면서 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풍길줄 아는 사람들 (그게 꼭 문학이나 예술과 관련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에게서 더 많은 매력이 느껴지더군요. 자신의 실수나 오류를 두려워하지 않고 또 그것을 인정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자신의 진지하고 냉철한 분석이 다른 사람에게는 "진지한 농담"으로 보일때 조차도 상대방에게 독설을 퍼붓는게 아니라 웃어넘길줄 아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 저는 그런 사람들이 좋더라구요..^^ 그런데 소위 책많이 본다는 식자층에서는 그런 인간적 매력을 느낄수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대부분 어떻게 하면 하나라도 더 남들보다 뛰어난 지식과 합리성으로 자신을 무장할까에만 혈안이 되어있다보니 자연스럽게 논리적인 자기방어에만 치중하게되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부족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철학자 강유원' 같은 분들보다는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사람들이 더 좋더라구요.. 비록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다가 가면 세상에 "남는게 별로 없는" 인생을 산다구 하더라두요..^^

로쟈 2006-12-23 11:50   좋아요 0 | URL
고해성사 무드네요.^^ 이전에 관련 페이퍼를 쓰기도 했지만,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의 길이 겹치면서 갈리는 거라 생각합니다. 자기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데까지 가보는 거라면 별문제겠죠. '그쪽은 아냐'라고 참견하는 대신에...

yoonta 2006-12-24 13:52   좋아요 0 | URL
오랫만에 로쟈님 서재에 놀러와서 끄적이다보니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가 다 나온것 같네요. 남이야기하기전에 자기 자신이나 돌아봐야되는데..ㅋㅋ

기인 2007-01-04 21:23   좋아요 0 | URL
음; 쫌 뒤늦게 퍼갑니다. 경철수고 읽어볼까 해서 ^^; 땡스투도 합니다.
경철수고 강유원 선생 번역본을 살까, 아니면 역시 빨간책에 있는 발췌본으로 만족할까 고민중입니다...
에잇; 그냥 사야겠습니다 ㅜㅠ

로쟈 2007-01-04 21:29   좋아요 0 | URL
월급도 고려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블루비니 2007-10-26 14:39   좋아요 0 | URL
로자/ 무대뽀식 알라딘 도배질뒤의 잔상은 공허한 느낌나열과 애처로운 자기PR(돈이 있는,책 좀읽은, 비정규직 강사라는..)일뿐, 이런 '자기고백'은 속으로만 하고, 논리로 비판하는 것이 훨씬 '공익'스럽지 않을까?

로쟈 2007-10-26 14:48   좋아요 0 | URL
'공익'근무하시나 보군요. 수고하시길...
 

아침신문을 도배하고 있는 문학관련 기사는 노르웨이 작가 순 뢰에스의 소설 <아침으로 꽃다발 먹기>(문학동네, 2006) 출간과 이에 맞춰 한국에 온 작가 순 뢰에스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만 소개하면 별 특이사항이 없는 듯 보이지만, 작가는 '지선'이란 한국이름을 가진 입양아출신이다. 노르웨이의 저명한 문학상 수상작가가 되어 '금의환향'한(그녀는 자신의 '모국'을 남편과 함께 방문했다) 또다른 '성공담'이 관련기사들의 주조이다.

작가는 <올드보이>나 <빈집> 같은 한국영화들도 재미있게 보았다고 하는데, 박찬욱 감독의 신작을 비틀어서 말하자면 '입양아지만 괜찮아'쯤 될까? 실제로 이번에 출간된 소설은 정신질환의 문턱을 넘나들면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17세 소녀의 불안한 내면과 독백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 작가 자신이 정신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한 경험에 바탕을 둔 작품이기도 하다고. 이래저래 흥미를 끄는 작품이다(정군님은 벌써 리뷰를 쓰셨군!).

경향신문(06. 12. 19) 입양아출신 노르웨이 소설가 고국품에 ‘책’을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쌍둥이 오빠와 함께 노르웨이로 입양됐던 아기가 30년 만에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신진작가가 돼 고국땅을 밟았다. 18일 오후 6시 서울 성북동의 주한 노르웨이대사관에서는 한국계 작가 쉰네 순 뢰에스(31·한국명 지선)를 위한 특별한 만찬이 열렸다. 2002년 노르웨이 최고 문학상인 브라게상을 받은 장편소설 ‘아침으로 꽃다발 먹기’ 한국판 출간(손화수 번역·문학동네 펴냄)에 맞춰 한국에 온 작가를 환영하고 격려하는 자리였다.

아직 앳된 얼굴의 작가 뢰에스는 “작가로서 한국을 방문하고 많은 환영을 받게 돼 기쁘다”면서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구사하는 언어는 강하고 색다른 뉘앙스를 갖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런 소재의 작품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4년간 정신병동 간호사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2002년 발표한 이 소설은 그해 노르웨이 도서상재단이 수여하는 브라게문학상 청소년 부문상을 수상했다. 1999년 발표한 ‘요코는 홀로’에 이어 두번째 작품이다.

뢰에스는 “책이 나왔던 해, 친부모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온 적이 있다”면서 “빨리 생각하고 빨리 말하고 빨리 걷는 편이어서 서울의 빠른 속도가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줬다”고 밝혔다. 또 “친부모를 만나는 게 긴장되고 즐거웠으나 그들은 죄의식 때문인지 나와 느낌이 많이 달라 당황스러웠다”면서 “이번에는 삼촌과 할머니도 만났다”고 말했다.

뢰에스는 쌍둥이 오빠 시그비엔과 함께 1976년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노르웨이 외스트폴의 의사부부 집에 입양됐다. 그들을 낳은 스무살의 산모는 몸져누웠고 시그비엔은 심장이 좋지 않아 인큐베이터에 있는 상태였다. 집 월세보증금마저 병원비로 나간 데다 아들의 병이 국내에서는 고치기 어렵다는 판정을 받자 친아버지는 아내에게 알리지 않고 두 아이를 입양시켰다. 양부모의 영향으로 오빠 시그비엔은 의사가 됐으며 뢰에스는 간호학을 전공했다.

이들이 친부모와 연락이 닿은 것은 2001년. 일본에서 일했던 오빠 시그비엔이 귀국길에 한국에 들렀다가 홀트아동복지회에 연락하면서 친부모와 상봉했다. 다음해 뢰에스도 한국에 왔다. 친아버지는 뢰에스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계속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울었다고 한다. 그는 “성장하면서 남들과 다른 얼굴 때문에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컸지만 또래의 노르웨이 청소년보다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뢰에스의 출세작 ‘아침으로 꽃다발 먹기’는 정신질환의 문턱을 넘나들다 정상적인 삶을 되찾은 17세 소녀 미아가 경험한 세 계절 동안의 변화를 의식의 흐름에 따라 그린 작품이다. 쇠락의 길로 빠져드는 가을, 주인공의 절망적 상황을 생생히 묘사한 겨울에 이어 마지막 봄 부분에서는 서서히 생의 의지를 찾아가는 미아의 심리상태를 표현했다. ‘주인공이 지닌 세상과 가족, 친구를 향한 비뚤어진 시각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브라게상 심사위원들은 격찬했다.



이번 국내 출간은 한국에 사는 한살 아래 여동생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언니처럼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여동생은 브라게상 수상소식을 들은 뒤 출판사에 연락해 작품검토를 부탁했다. 오는 22일까지 한국에 머무는 뢰에스는 21일 오후 3시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서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해 강연할 예정이다.(한윤정 기자)

06. 12. 19.

P.S. 순 뢰에스 부부를 그제 한 문학상 시상식장에서 볼 수 있었다. 더불어, 사진에 비해서 굉장히 작은 얼굴과 체구의 작가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남편은 사진 그대로였지만...

06.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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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12-19 10:19   좋아요 0 | URL
저도 아침에 이 기사 봤어요.1면에 배치되어 있더군요.^^
도저히 기를 능력이 안돼서 아이를 머나먼 이국으로 입양시켜야 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땟을까 싶어요.

로쟈 2006-12-19 13:53   좋아요 0 | URL
기본적으론 국내 입양이 안되기 때문이겠죠. 입양아 수출 1위국이라니까...

sommer 2006-12-19 16:56   좋아요 0 | URL
번역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아미 탄생만으로는 모자라고 번역의 우회를 거쳐야만 고국에 기입된다는 것...아직도 귀환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이름 없는 것들'을 생각하게 되네요. 이 나라에선 실재의 귀환과 동시에 상징이 잠시 그 가능성을 엿본다는 생각까지 함께...

로쟈 2006-12-19 21:52   좋아요 0 | URL
"번역의 우회를 거쳐야만 고국에 기입된다는 것"을 일반화시키고픈 유혹은 느끼게 되네요. 그것은 인류학적이면서 동시에 철학적인 어떤 절차...
 

오늘 아침신문들을 들춰본 이라면 온갖 신문들이 최근 <로마인 이야기>(전15권)를 완간한 일본의 저술가 시오노 나나미 인터뷰로 도배돼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한국일보와 경향신문을 전철에서 읽었는데, 두 신문 모두 거의 전면이 그녀에게 할애돼 있다. 인터넷에서 다른 신문들을 검색해봐도 사정은 비슷한다. 과연, 어느 한국작가의 책이 이런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아주 드문 경우 아닌가?). <로마인 이야기>에 대한 평가는 일반 대중과 역사가들의 평이 사뭇 갈리지만 15년간 매년 한 권씩 출간하기로 한 약속을 지켜낸 저자의 의지와 노고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할 만하다. 비록 나로선 <로마인 이야기>를 집어들 엄두는 내지 못하고 고작 두어 권의 에세이를 읽는 데 그쳤지만 말이다. 내년/내달초에 마지막 15권이 번역돼 나올 거라고 하는데, 작가와 역자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고 잠시 '로마 제국'에 대해서 음미해본다.

경향신문(06. 12. 18) 시오노 나나미 “천년로마 비결은 공존의 지혜”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69)는 1992년 ‘로마인 이야기’의 제1권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를 출간하면서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이 책을 2006년까지 해마다 한 권씩 발표해 전 15권으로 완결짓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작가 스스로 퇴로를 차단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제2권 ‘한니발 전쟁’을, 94년엔 제3권 ‘승자의 혼미’를 발표하는 등 매년 어김없이 약속을 지켰다. 1년의 절반은 자료를 읽고, 나머지 절반은 집필에 매달려온 산고(産苦)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 그는 제15권 ‘로마세계의 종언’을 내놓으면서 ‘로마 천년사’를 담은 방대한 저작의 마침표를 찍었다.



“민족, 생각, 습관, 종교 등이 다른 사람들이 공생하는 게 가능했던 세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쓰고자 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의 존재를 위협하고 인정하지 않는 비관용의 세계입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다른 생각을 갖고도 함께 살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책을 읽어줬으면 합니다.”

23일 도쿄 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만난 시오노는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15년분을 한꺼번에 인터뷰하느라 책을 끝낸 감회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면서도 “확실한 사실은 1년에 한 권씩 책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여름 휴가를 갈 수 있다는 것”이라며 웃었다. 고희(古稀)를 눈 앞에 둔 노작가는 국가경영, 리더십, 한·일 관계 등 쏟아지는 질문에 대해 차분하면서도 진지하게 답변을 이어갔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지는 로마인들이 왜 그토록 번영할 수 있었을까.” ‘로마인 이야기’의 집필은 지금은 너무도 유명해진 이같은 물음을 그 스스로 풀어가는 과정이었다. 시오노는 로마가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를 묻자 “로마인이 모두 해먹으려고 하지 않고 다른 민족이 더 뛰어나면 그 사람에게 충분히 맡겼다는 점”이라고 간명하게 답했다. 그는 국가의 흥망성쇠와 관련, “가장 나쁜 건 힘과 정신력이 있는데도 눈 앞의 이익을 보고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경우”라고 지적했다. “작은 문제에 너무 집착하면 큰 걸 놓치게 된다”면서 “일본인에겐 내셔널리즘이 이런 경우”라고도 했다. 그는 또 “조직의 성원 모두를 위해 자기 배를 채우지 않는 것”을 리더의 첫째 요건으로 들었다.

“인터뷰할 때마다 받는 질문”이라는 한·일 관계에 대해선 열띤 답변이 길게 이어졌다. 그는 “역사적인 사실은 공유할 수 있지만 그에 대한 인식은 공유하기 힘들다”면서 “한국에선 독도, 일본에선 다케시마라 부르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하나의 역사를 만들기보다 한국과 일본이 각각 책을 써서 상대방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적 열광과 내셔널리즘을 배제하고 냉정하게 타협점을 찾으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또 ‘팍스 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와 비교되는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에 의한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미국은 그럴 각오도, 의욕도 없다”는 것이다. 이어 ‘팍스 차이니즈’를 거론하면서 “팍스와 패권(헤게모니)은 다른데 중국이 패권을 잡고 나서 국제질서를 이루려는 의욕이 있을까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라고 덧붙였다.

시오노는 “역사는 위대한 교훈이자 탁월한 오락”이라고 말해왔다. ‘로마인 이야기’는 재미와 교훈을 동시에 충족시켜주면서 광범위한 독자층을 형성했다. 그는 “역사학자들은 역사가 재미있다고 말하면 자신의 권위가 떨어지니까 그같은 자세 자체를 거부한다”고 꼬집었다. “역사에 어둡다는 것은 인간에 어둡다는 뜻입니다. 역사란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일을 한 것이니까 잘 읽으면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굉장히 재미있어요.”

마지막권인 제15권은 로마 제국이 어떻게 멸망했는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지난 15일 일본 신초사(新潮社) 출판사에서 출간됐으며 국내에서는 한길사에서 내년 1~2월에 번역돼 나올 예정이다. 시오노는 “국가로서의 종말이 아니라 로마 문명의 종말을 쓰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로마 세계의 종말은 지중해의 수평선 위에 이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할 때, 다신교의 세계가 일신교의 세계가 되는 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서로마가 멸망한 476년이 아니라 7세기를 마지막으로 잡은 이유입니다.”

향후 집필 계획이 “아직 없다”고 밝힌 시오노는 “이제 나이가 들어서 얌전한 남자를 그리고 싶다”며 미소지었다.(도쿄|김진우기자) 

◇“철저한 고증…빈틈은 상상으로 메워”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는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고교 시절부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등 그리스·로마 문화에 심취했다. 가쿠슈인(學習院)대를 선택한 것도 그곳에 그리스·로마사를 가르치는 교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1963년 대학을 졸업한 뒤 이탈리아로 건너간 그는 독학으로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의 역사를 탐구해갔다. 처녀작 ‘르네상스의 여인들’부터 시작해 ‘체사레 보르자, 또는 우아한 냉혹’(마이니치 출판문화상) ‘신의 대리인’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여류문학상) ‘바다의 도시 이야기’(산토리 학예상) ‘콘스탄티노플 함락’ 등 전쟁 3부작과 ‘주홍색의 베네치아’ 등 살인 3부작 등을 뽑아내며 굵직한 문학상을 연거푸 수상했다.

‘로마인 이야기’는 그가 필생의 작업으로 집필한 책으로 준비에만 20년, 시리즈 완간에만 15년이 걸렸다. 200자 원고지 2만1천장에 달한다. 책은 기원전 753년 전설의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때부터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천년이 넘는 역사를, 제1~5권의 ‘융성기’, 6~10권 ‘안정기’, 11~15권 ‘쇠퇴와 멸망’ 세 단계로 나눠 담아냈다. 국내에선 1995년 제1권과 2권이 동시에 첫 선을 보이면서 출판계에 인문·교양서 열풍을 일으켰다. 각 권당 10만부 이상이 팔렸고, 지금까지 2백만부 넘게 팔렸다(*한길사의 '곳간'이라 할 만한 책이다. 비록 역사의 '고전'이자 '그레이트북스'로 남을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그레이트북스'를 먹여살린 책이다!).

시오노는 명쾌한 논리와 도전적인 역사 해석으로 독자들을 매혹시켜왔다. “철저한 고증과 사료에 바탕을 두었으되 역사적 기술로부터 벗어나 있고, 사료가 채워주지 못한 부분에서는 상상력을 발휘했으되 픽션에 빠지지도 않았다”는 평가다. 그러나 이처럼 사료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상상’에 의존하는 그의 역사서술을 비판하는 학자도 적지 않다. 또 힘(권력)과 제국주의를 깔고 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인터뷰에서 저자가 '팍스 아메리카나'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부정하는 점에서도 알 수 있지만, 로마(제국)과 미국(제국주의)를 구별하는 게 저자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한국일보(06. 12. 18) 김석희 "'로마인 이야기'같은 책, 왜 우리는 아직 없을까"

“번역이 힘들면 그건 재미없는 책이에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전권을 번역해 온 김석희(54ㆍ소설가)씨는 “그와 함께 한 세월은 언제나 신났고, 그래서 행복했다”고 말했다.

<로마인…>의 첫 독자였던 그에게, 저자와 책의 매력을 물었다. “그의 문체는 남성적인 활달함이 있어요. 로마의 도로처럼 거침없이 뻗어가는 힘과 표현의 묘(妙)가 독특한 흡입력을 발휘하지요. 알다시피 <로마사…>는 기본적으로 역사물이지만, ‘왜?’를 묻는 학문이 아니라 ‘어떻게?’를 묻고 답하는 책이잖아요. 상상력과 재해석이 필요하지요.”

‘사실(史實)+알파’의 그 ‘알파’ 속에 나나미적 글쓰기의 특징이 숨어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역사의 재해석이란 역사와 현실의 끊임없는 대화를 주선하는 과정이거든요. 로마인을 이야기하면서 시사적 관심을 유발하고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죠. 가령 이 책 1권 초판이 일본에서 출간된 1992년은 일본 경제 버블 10년이 구체화하던 시기였어요. 제대로 된 리더에 목마른 시민들 앞에 로마의 제왕들을 내세운 것이지요. <로마인…>의 흥망사 중심에는 리더십의 문제, 지도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잖아요.”

리더십은 우리 독자들이 느껴온 갈증이기도 할 것이다. 거기에 ‘세계화’라는 또 하나의 시대적 담론이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세계화’ 구호에 <로마인…>이 호응한 측면이 있어요. 세계 경영, 포용력, 현지화 등 로마의 제국화 과정이 세계화 담론의 주요 단서들과 맞물렸던 거지요. 실제로 이 책 1~3권 번역본이 나왔던 초창기에는 일반 독자들보다는 재계 사람들과 공무원들이 많이 봤어요.”

지금 그는 “진행 중이던 작업들을 모두 매듭짓고, 마지막 권이 올 때까지 손목을 풀고 있다”고 했다. “하루 평균 원고지 100매 남짓씩 해서 18일 정도면 번역 원고를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고 나면 정말 시원섭섭할 것 같다”고 했다. <로마인…>이 초대형 스테디셀러가 됐지만 그가 번 돈은 많지 않다. 인세 계약이 아니라 매절 계약(원고지 매수당 번역료를 받는 계약)을 했기 때문이다. 인세 계약을 하시지 그랬냐고 농담처럼 묻자 “그런 거 따지면 인생살이가 고달파진다”고, “그래도 출판사에서 섭섭치 않게 챙겨주더라”며 웃었다.

<로마인…>이 잘 나가자 일각에서는 전공 학자도, 학자도 아닌 아마추어가 쓴 책이라고 폄하하기도 했고, 일본 우익의 대동아공영권 부활 음모가 숨겨진 제국사라는 비난도 있었다. 그런 지적들에 대해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전문 학자의 역사 서술에 다른 차원이 있겠지만, 왜 우리에게는 <로마인…>과 같은 책이 없는지 반성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저자의 각광 뒤에 이 탁월하고 성실한 번역가가 있었다는 사실, 그의 문장이 있어 <로마인…>의 현지화ㆍ한국화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는 <로마인…>과 함께 한 세월이 행복했다고 말했지만, 저자 역시 그 같은 번역가를 만난 행운을 누렸다. 그리고 독자들도 이 두 비범한 저자와 역자를 만나 행복했다.(최윤필 기자)

06. 12. 18.

 

 

 

 

P.S.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 대중적인 '역사 이야기'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지만, 내가 읽은 건 주경철 교수의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문학과지성사, 1999) 정도이다. 전15권이 완간된 만큼 총체적인 재평가와 함께 "왜 우리에게는 <로마인 이야기>와 같은 책이 없는지"에 대한 답변도 함께 제시되었으면 좋겠다. 눈에 띄는 로마사 관련서들 가운데, 국내 저자의 책은 (아동용을 제외하면) 한두 권밖에 눈에 띄지 않는다. 일차적인 건 역사에 대한 '애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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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12-18 12:18   좋아요 0 | URL
시오노 나나미의 뚝심과 뛰어난 번역가 김석희의 재능이 만나 한국어판 [로마인 이야기]가 탄생한 것은 "행복"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겠지만, 역시 과대평가된 면이 많지 않나 싶습니다. '로마인 이야기' 현상은 저 정도 수준의 대중 교양서를 펴내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반작용이기도 하겠지만요. 일본 책들을 훑어보면서 놀라는 건, 아무리 대중지향적인 책을 쓰더라도 철저한 자료조사와 꼼꼼한 논리가 뒷받침된다는 겁니다(물론 그만큼 쓰레기 같은 책도 엄청나게 많지만). 그게 일본 사회에 있어 일종의 '진통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게 좀 마음에 걸리지만요.

Mephistopheles 2006-12-18 12:2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메피스토입니다.
전 한권도 읽은적이 없다보니 뭐라 평을 할수는 없지만..
작가의 노력만큼은 대단하다고 보고 싶습니다..^^

비로그인 2006-12-18 15:31   좋아요 0 | URL
저는 로마인 이야기를 '긍정'합니다. 한국의 모든 정치적 사회적 제도는 서구에서 비롯된 것이지요.(조선왕조로 부터 물려 받은 것이라고는 세글자의 성명표기와 제사 정도랄까요?ㅋ)하지만 한국사람들은 동양성에 대한 과잉집착이라고 할까요. 착각이라고 할까요.뭐 그런 것에 빠져있지요. 우리나라의 현 정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양 정체의 원형(prototype)으로서 로마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인에게 최고의 영예인 시민관은 동료시민을 '구한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였지요.
시민적 연대를 로마공화국이 얼마나 중시 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면에서 최근 FTA시위에 대한 동료시민들의 '짜증'은 이 사회의 시민적 연대가 얼마나 파괴되어(어쩌면 없는 것일수도) 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런 것은 '무지'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지요. 그런면에서 로마인이야기는 더 많이 읽힐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로쟈 2006-12-18 17:19   좋아요 0 | URL
제가 긍정하는 건 일종의 '유인효과'입니다.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로마사를 전공하고 싶어할 청소년들도 있거든요. 그런 건 다른 '진지한' 역사서들이 해주지 못한 일이지요...

딸기 2006-12-19 11:13   좋아요 0 | URL
대중적이면서 꼼꼼한 역사책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로마인이야기가 '틈새'(굉장히 컸던 틈새)를 제대로 파고들었다는 것은 분명해요. 참 재미있었거든요. 그런데 시오노 나나미의 초인 지향 세계관은 좀... '저자의 노고'를 치하해주는 것도 좋지만, '저자가 쓴 책의 내용과 역사관'에 대한 검증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비로그인 2006-12-19 12:14   좋아요 0 | URL
이분의 책, '남자 이야기'를 오래 전에 읽었습니다.
100m육상선수 칼 루이스에대한 예찬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분도 천상 '여인'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쓰신, 로마인 이야기는 다소 자의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더군요..


로쟈 2006-12-19 12:38   좋아요 0 | URL
초인지향적이고, 자의적이군요.^^ 일반론이긴 하나, 저는 그런 '고집'이나 '편견' 없이 어떻게 15년 동안 책을 쓸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저자가 내놓고 말하듯이, 그 또한 마키아벨리스트 아닐까요?).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야기였다면 그렇게 '재미'있었을까 의문이구요. 전문 역사학자들이 왜 이런 책을 쓸 수 없는지에 대한 해답을 나름대로 찾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정사(正史)'를 써야 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