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퀸'에 대한 평전이 출간됐다. 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이고, 프랑스 루이 14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다른 한 사람이다. 평전류를 즐기는 독자라면 이 걸출한 여성들과 함께 부듯한 연말을 보낼 수 있겠다. 두 책과 관련한 기사와 관련자료들을 모아보기로 한다.

 

 

 

 

 

현재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탁월한 재능을 갖춘 전설적인 미인인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는 진정 불운한 군주였을까?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지은이 캐럴 쉐퍼가 여왕 메리의 출생에서 죽음까지의 과정을 추적하면서, 그녀를 둘러싼 흥미로운 사건들과 인물들을 생생하게 그렸다. 지은이는 여왕 메리의 추종자에 가까운 입장을 견지하며, 그녀를 낭만적이고 인간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그러면서도 세심한 자료 조사를 통해 객관성을 잃지 않으면서, 여왕 메리를 순교자로 되살리고 있다.

잉글랜드의 왕위를 놓고 엘리자베스 1세와 갈등을 빚던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일고 있다.

세번 결혼해 남편들을 모두 비운에 죽게 만든 요부, 신구교간의 갈등을 부추겨 결국 자신도 참수된 비극적인 여인, 불운했지만 훌륭한 군주의 자질을 갖췄던 절세 미인이었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저자는 여왕 메리의 출생에서 죽음까지의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내면서 여왕 메리를 순교자로 되살리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메리는 뛰어난 지도자이자 신앙심 깊은 여인, 시인으로 재탄생한다.

 

 

 

 

 

 

 

 

 

 

 

안토니아 프레이저

역사가이자 소설가이고, 고전기작가로 이다. 현재 극작가인 해롤드 핀터와 결혼하여 런던에서 살고 있다. 1969년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를 발효 한 후에 <크롬웰, 우리의 호민관> <찰스 2세> <나약한 성 : 17세기 영국 여성의 운명> 드의 책을 집필 했으며, 제미마 쇼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일련의 미스터리 소설을 써 왔으며, 이 탐정소설은 1983년 영국 텔레비전 시리즈로 방영되기도 했다.

 

문화일보(06. 11.24) 그녀는 사치의 화신이었나, 佛 격동의 ‘희생양’ 이었나

젊은 만화마니아뿐 아니라 1970년대 초반 학창시절을 보낸 중장 년층 중에도 마리 앙투아네트왕비, 넓게는 프랑스 혹은 프랑스혁명을 주목하게 된 계기로 일본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지 목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프랑스혁명 직전, 프랑스 루이 16세와 결혼한 오스트리아공주를 둘러싼 격동기의 프랑스를 다룬 이 작 품은 만화영화로도 소개되며 18세기 중후반의 유럽 왕녀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과 존재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렸다.

앙투아네트는 서른여덟해의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 무소불위의 권력과 비참한 감옥 등 양극을 경험한 인생 역정의 주인공. 1755년 ‘유럽의 열강’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여왕의 열다섯번째 아이로 태어난 그는 14세때 프랑스 루이16세와 결혼,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1793년 참수됐다. 이같은 연대기 이면에 변혁기 유럽사의 주요 순간을 증언하는 그녀에 대한 세평은 지금도 열성 적인 찬미와 맹렬한 비방이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대중문화를 통해 드라마나 영화 속 비운의 주인공처럼 소개됐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두툼한 전기를 통해 실존했던 역사인물로 생 생하게 되살아난다. 저자는 스코틀랜드 메리여왕, 영국의 헨리 8세와 크롬웰,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14세 전기 등을 집필한 작가.

보통 책의 2, 3배 분량의 이 책은 앙투아네트와 주변 인물의 초 상화부터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참수 직전의 모습까지 다양한 사진을 갖추며, 연대기순으로 826쪽에 걸쳐 왕녀의 인생 을 다룬다. 출생 무렵의 유럽 정세부터, 적대국인 오스트리아 출신 아내를 맞은 프랑스 황태자와 프랑스인의 마음가짐, 탐욕스러운 동성애라는 식의 각종 추문이나 참담한 감옥생활을 비롯, “그 오스트리아 여자의 머리를 내놓으라”는 광분한 군중 앞에서 참 수되기까지.

“세상물정 모르는 앙투아네트가 먹을 빵이 없다는 사람에게 케 이크를 먹으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지만, 과연 그녀는 사치하고 음란한 성욕의 화신이며 프랑스혁명의 결정적 계기였던 인 물인가.

유럽 각국의 왕실자료보관소 등에서 관련 자료를 모으고 왕녀가 나고 자란 곳을 직접 둘러본 작가는 앙투아네트이야기 중 ‘잔인한 신화와 음란한 왜곡’에 대한 반증을 제시한다. 프랑스속 오 스트리아 여자였던 그녀는 결혼뿐 아니라 죽음까지 국가적 전략 과 이해타산에 좌우된 희생자였다는 것. 당시 유럽왕실의 혼인동맹과 프랑스 왕의 외교적 수완에 따라 비정치적이고 여린 그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타락한 마녀, 기품없는 섹스파티의 상징 처럼 악평을 받아왔다는 저자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신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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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12-08 04:04   좋아요 0 | URL
앗, 무려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아내가 쓴 책이로군요. 프랑스혁명 시절의 유럽사는 큰 관심이 없었는데, 읽어보고 싶은 맘이 생깁니다. 아직 진행중이긴 하지만, 로쟈님의 '곁다리-텍스트'를 기대하면서 추천하고 갑니다.

ilbooks 2008-07-23 10:10   좋아요 0 | URL
요새 슈테판 츠바이크 책을 보고 있는데 여기서 <베르사이유의 장미>란 책이 있는 줄 첨 알았네요. 츠바이크 책을 읽고 있으니 이케다 리요코가 그의 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 알겠더군요. 만화 장면이랑 똑같아요! 수소문해서 이케다 책도 보려고 합니다~ 다 보고 나면 프레이저 책도 볼까나..
 

아침신문에서 고른 '오늘의 책'은 '일본사상사'들이다. <현대일본사상론>과 <근대 일본사상사>가 동시에 출간됐는데, 일본문학이나 사상을 챙겨둘 만한 여유는 없지만 마루야마 마사오에서 멈춰있는 '교양'을 업그레이드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게 된다. 최근에 한 학술발표회에 참석했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일본에는 일본인이 (즉 일본인의 시각에서)직접 쓴 <한국문학사>가 단 한권도 없었다(몇몇 한국인/재일동포가 쓴 오래 된 문학사들만이 남아있다). 우리의 경우는 사정이 어떠한지(우리 나름의 시각으로 쓴 일본문학사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지만 여하튼 '가까운 이웃'이란 말이 무색한 게 현실이다. 미래적인/전향적인 한일관계에 대해 말들은 많지만 일단은 서로의 전통과 생각에 대해 좀 알아야 되지 않을까 싶다(<한국문학사>의 표지에 욘사마를 쓰는 건 어떨까? <한국문학사>를 읽고 있는 욘사마!). 자꾸만 거꾸로 가는 듯싶은 사상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경향신문(06. 12. 07) ‘근대 일본사상사’ 등 번역출간…日 다시 전체주의로 갈까

일본에 또다시 내셔널리즘이나 전체주의가 부상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는 방법은 그들의 사상의 궤적을 보는 것이다. 그런 연유인지 일본 근·현대 사상사 서적이 최근 잇달아 번역돼 나왔다. ‘근대일본사상사’(소명출판)와 ‘현대일본사상론’(논형)이다.

두 책은 집필 방식이나 사상계를 보는 관점이 다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군국주의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일본 근·현대 사상계의 어제와 오늘을 더 총체적으로 드러내보인다. ‘근대일본사상사’는 지식인들의 사상에, ‘현대일본사상론’은 민중의 사상에 초점을 맞춘다. ‘근대일본사상사’가 막번체제 말기~전후(1950년대 후반)를, ‘현대일본사상론’은 전후~현재를 다루고 있어 시기적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근·현대 사상흐름 비판적 추적교과서 검정제도 위헌소송을 주도한 것으로 유명한 이에나가 사부로 전 도쿄교육대교수가 엮은 ‘근대일본사상사’는 일종의 개론서다. 마루야마 마사오, 다케우치 요시미 등 전후 일본 사상학계를 대표하는 당시로선 소장학자들이 집필에 참여했다. 1959~61년 지쿠마서방(筑摩書房)이 낸 ‘근대일본사상사 강좌’ 시리즈의 제1권 ‘역사적 개관’을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옮겼다.

이 기획은 패전에도 불구, 한국전쟁의 어부지리 등에 힘입어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사회가 “더 이상의 전후(戰後)는 없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전전(戰前)의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보인 것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됐다. 군국주의 패전의 역사를 ‘일부에 의한 실수’로 치부해 버리려는 태도 뒤에는 어떤 정신구조가 있는 것일까.

해답은 일본이 서양문명과 본격적으로 만난 메이지시대 ‘문명개화기’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문명개화론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나라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해 ‘문명개화’라는 수단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해소했다. 국내 민주주의를 강조한 자유민권론자들도 어느덧 하나 둘 정한론에 동조했고 청일전쟁이라는 경험 속에 일본 지식계 내 국내민주주의 주장은 국권의 우월함에 완전히 밀렸다.

저자들이 일본 사상사에서 주목하는 중요한 가치는 가족과 국가이다. 가족과 국가의 위계로 촘촘히 짜여진 도덕 교육은 천황제를 만들어낸 것이기도 했고, 천황제의 결과 더욱 강화된 것이기도 했다. 1910년대 이후 일본 지식계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했던 사회주의자들이 이른바 ‘쇼와 10년대(1930~40년대)’라고 부르는 시기에 대규모 전향해버린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뛰어난 공산주의자로서 단 하나뿐인 어머니에게 심려를 끼칠까봐 걱정했다”는 것이나 “내 안에 자리잡은 국제애의 본능은 내 안의 자기보존 본능과 도저히 맞설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지기 쉽고 빈약하다”는 당시 지식인들의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에 비해 ‘일본현대사상론’은 야스마루 요시오라는 필자가 자신의 사상사 연구를 정리한 것으로 제자인 박진우 숙명여대 교수가 번역한 것이다. 야스마루는 마루야마로 대표되는 근대주의자들과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동시에 비판했다. 그에게 민중은 마루야마 등이 말하는 계몽의 대상이나 몽매한 주체도 아니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강조하는 투쟁하는 인민도 아닌 생활세계에서 지혜를 발휘하는 생활자일 뿐이다.

국가중심주의가 만든 천황제그는 일본사회의 보수화가 현저해지는 70년대 중반 이후에 특히 주목한다. 쇼와 천황이 입원한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동조를 강요한 자숙과 조의의 표현으로 상징되는 권위적 질서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그리고 여기에 대응하는 민중들의 사상은 어떠했는지가 주요 관심사다.

저자는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던 에너지인 민중의 힘은 그들의 가장 일상적 생활규범이었던 근면·검약·정직·효행 등과 같은 ‘통속도덕’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통속도덕의 실천이라는 광범한 민중의 자기단련·자기해방의 노력 과정에서 분출된 비대한 사회적 에너지가 사회질서를 밑에서부터 재건한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속도덕의 진지한 실천에 의해 평온한 생활을 희구하는 민중의 평범한 이상이 현실세계의 난관에 부딪혀 난파하게 됐을 때 민중은 스스로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종교라는 매개를 찾게 됐다. 상징천황제가 파고들 수 있었던 사정이다.

근·현대 일본 지식계와 민중의 정신구조 형성 과정을 비판적으로 추적하는 이 책들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일본 내 다수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학계 내 목소리 역시 약하지 않다. 어쩌면 일본사회의 앞날을 그리 절망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손제민 기자)

06. 12. 07.



 

 

 

P.S. 과문하지만 일본사상사에 관한 책 몇 권을 꼽아본다. 가노 마사나오의 <근대 일본사상 길잡이>(소화, 2004)는 일단 '길잡이'란 말이 눈에 들어온다. 저자는 생소하지만 역자가 일본사상사 전문가라는 점이 믿음을 준다(같은 저자의 <일본의 근대사상>(한울, 2003)과는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분량이 입문서로서는 적격이다). 그리고 물론 일본사상사의 '천황' 마루야마 마사오의 책들이 기본서들이겠다. 여러 권이 번역돼 있지만 가장 얄팍한 <일본의 사상>(한길사, 1998)을 '입문서'로 골라둔다. 그리고 예전에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다룬 바 있는, 히로마쓰 와타루의 <근대초극론>(민음사, 2003). '일본 근대 사상사에 대한 시각'이 부제이고, "이 책은 1942년 잡지 문학계'에서 개최된 '근대의 초극 좌담회'에 대한 해설임과 동시에 넓게는 1920년대부터 1945년 패전할 당시까지의 일본 지성사를 진단하고 있는 책이다." 당대의 키워드이기도 했던 '근대의 초극'론으로 일본의 현대사상을 재구성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해설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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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12-07 09:18   좋아요 0 | URL
마루야마 마사오는 '전후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소리까지 듣지만 요즘 들어 그의 사상에 대해 반기를 드는(!) 목소리가 학계에서 자주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의 저작들이 '기본서'이자 '개론서'라는 데는 이의가 없을 듯 합니다. 물론 균형잡힌 시각을 위해서는 다른 관점의 책들도 훑어봐야겠지만요.

로쟈 2006-12-07 09:43   좋아요 0 | URL
한국의 마루야마나 가라타니가 누구인지 간혹 궁금해집니다...

비로그인 2006-12-07 11:30   좋아요 0 | URL
로쟈님, 한국은 아직 마루야마나 가라타니 정도의 인물이 나올 시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엔 후쿠자와 유키치 급의 인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루야마 마사오 사상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각주(?)에 불과합니다.ㅋ

로쟈 2006-12-07 13:08   좋아요 0 | URL
지폐에 들어가 있는 걸로 하면 저희는 퇴계와 율곡이 있는데 말이죠...
 

비교적 잡다한 관심을 갖고 있는 편이지만 내가 (경제학서도 아닌) 경영서를 읽는 일은 거의 드물다. 피터 드러커의 책을 두어 권 읽어본 게 손가락에 꼽히는 정도이다. IMF 위기때 느낀 바가 있어서 (경영서가 아닌) 경제학서 몇 권을 구입했었지만 읽은 건 절반도 안되었다. 그러니 나의 경제적 형편이 언제나 바닥 장세에 머물고 있는 건 특별히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한데, 세상 혼자 사는 게 아니고 딸린 식구들이 있는 탓에 가계 '경영'에도 가끔은 눈길을 줄 수밖에 없다. <블루 오션 전략>(교보문고, 2005)을 읽어볼까란 생각을 한동안은 품고 다닌 것도 그 때문이다(책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구입은 무산됐지만). 

 

 

 

 

그런데, 어느덧 '80/20법칙'과 '블루오션전략'을 뛰어넘는 책이 나왔다고 한다. 이름도 요상하게 '긴꼬리 경제학'이다. '올해 최고의 경영서'라는 문구는 PR성으로 흘려보내려고 했지만, 지난주에 읽은 정재승 교수의 칼럼이 생각났다(사실 이 페이퍼는 그의 '나만의 ‘올해의 과학책’'들을 옮겨놓고 과학책들 얘기를 조금 늘어놓으려던 것이었다). 그는 무어라 적었는가? "지난 해 ‘괴짜경제학’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들이라면, 올해는 크리스 앤더슨의 ‘롱테일 경제학’(랜덤하우스)으로 이 겨울을 마무리하면 좋을 것이다. 2004년 <와이어드>에 실린 한 칼럼으로부터 출발한 이 책은 올해 전세계를 강타한 책인데, 좀더 일찍 나왔다면 ‘올해의 책’으로도 주저없이 추천했을 책이다. 이 책을 읽지 않으면 당신은 아직 20세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강조는 나의 것)    

마지막 멘트는 거의 협박성인데, 또 이런 발언을 접하게 되면 슬쩍 꼬리를 내리는 타입인지라 나는 조만간 <롱테일 경제학>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을 갖는다. 북데일리에 실린 리뷰기사를 미리 읽어보는 이유이다. 게다가 "블로거가 세상을 지배하다"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는 책이라니까 왠지 친근감도 느껴진다. 이런 블로그(서재)와 잘 맞는 책이란 뜻이 아닐까 싶어서...

북데일리(06. 12.06) '블로거가 세상 지배' 롱테일 이론 급부상

올해 최고의 경영서’라는 소문에 휩싸였던 크리스 앤더슨의 <롱테일 경제학>(랜덤하우스. 2006)이 드디어 출간됐다. 내용은 기대이상이다. 책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롱테일(Long Tail)’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롱테일’이란 간단히 말해 그동안 시장에서 무시되었던 틈새시장이 중요해지는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을 뜻한다. 저자 크리스 앤더슨은 디지털 시대에는 시장을 왜곡시켰던 장애물들이 제거되고 무한한 선택이 가능해짐에 따라 수요곡선의 꼬리부분이 머리 부분보다 길어진다는 사실에 착안해 ‘롱테일 이론’을 창안했다.

틈새상품 각각의 매출액은 적지만 그것들의 총합은 히트상품과 맞먹거나 오히려 능가하게 됨으로 틈새시장의 파급력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이론의 요지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소수의 히트상품(20%)이 매출액의 80%를 만들어 낸다는 ‘80/20법칙’으로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경제현상 ‘롱테일’의 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틈새상품은 항상 존재해왔지만 그것을 구매하기까지 소요되는 비용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고객들이 주도하는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인터넷이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침에 따라 히트상품 중심의 경제구도는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바야흐로 틈새상품들이 상업적인 세계와 비상업적인 세계가 교차하는 신규산업 분야에서 새롭게 창조되고 있다. 블로거들, 동영상 제작자들, 무명밴드들의 출연이 그것을 증명한다.

롱테일 효과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는 신문 즉 미디어와 일종의 ‘전쟁’을 선포한 블로거들의 영역확대라 할 수 있다. 2006년 현재 신문사의 매출은(미국기준) 1980년대 전성기 때와 비교했을 때 3분의1 이상이 떨어졌다. 노트북을 이용해 인터넷에 접속하는 사람들이 언론 권력을 쥐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은 ‘블로거’.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블로그를 만들면서 전문적인 저널리즘과 아마추어의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블로거들은 자신들의 관심사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만큼이나 정통해 있고 관련 기사를 매우 바르게 작성할 수 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저널리트들보다 정보를 더 잘 입수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법률학자 리처드 포스너는 ‘뉴욕타임스’ 북리뷰에 쓴 글에서 “블로거는 사실상 비용을 전혀 들이지 않고도 신문이나 TV 뉴스채널이 목표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세분화된 타깃 독자들을 목표로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블로그들은 네트워크TV와 같은 오래된 미디어 선구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곳에서 주류 미디어의 고객들을 한사람씩 틈새 미디어 쪽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블로거가 세상을 지배한다.

책은 저널리스트와 블로거의 영역변화를 보여주며 날카로운 예측을 내놓는다. “신문사는 낡은 타자기와도 같은 저널리스 1명을 고용하기보다는 특별한 지식을 가진 블로그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고용할 것이다”

이는 과장된 선전포고가 아니다. 책의 실례에 ‘오마이뉴스’의 성공사례가 포함 되어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초등학생부터 교수에 이르기까지 4만 명 이상의 아마추어 시민기자들이 하루에 송고하는 기사는 약 150개에서 200개. 이는 오마이뉴스 콘텐츠의 3분의2상을 차지하는 분량이다.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메인 화면 머리기사로 채택되면 그 기사를 쓴 시민기자는 2만원을 지급받는다.

보상이 이렇게 별 것 아닌데도 시민기자들이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용된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의 해답에서 롱테일 이론의 파급효과를 찾아 낼 수 있다. “시민기자들은 돈을 벌려는 게 아니라 세계를 바꾸기 위해 기사를 쓰고 있다”

영화제작자, 출판관계자, 블로거들에 이르기까지 상업적으로 성공하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는 꼬리부분의 생산자들은 역설적으로 성공의 기회를 잡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이제 창조적 생산에 필요한 도구들을 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생산 기술은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보급되었다. 책은 “롱테일은 창조적 생산의 도가니이자 아이디어들이 상업적인 장소”라는 정의와 함께 저널리스트와 블로거들의 영역 변화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미국 CBS 방송국의 유명 앵커인 댄 래더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결집된 블로거들의 지식을 당해낼 수는 없다”

개인 블로그에 올려진 내용들은 정확한 근거를 확보하지는 못하지만 블로그 세계에는 전통적인 미디어보다 더 뛰어난 오류 수정장치(수 많은 블로거들의 수정)가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책은 이런 사실이 저널리스트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엄청난 양의 정보를 모아 거르는 블로그의 놀라운 속도에 전통적인 미디어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수백만 개의 블로그들과 전문성을 지닌 수천만 명의 블로거들은 물론, 블로그에 댓글을 다는 독자들과 그 댓글의 정보들은 전기가 움직이듯 빠른 속도로 블로그 세계에 활기를 주고 있다.

시카고대학 연구원을 역임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블로그 세계의 경제시장은 정보가 분산되어 있고 주조정자가 없으며 블로그세계에 참가하는 각각의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지식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특징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정보를 효율적으로 담아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블로그 세계는 1천2백만 개나 되는 별개의 기업들이 아니라 1천2백만 명의 기자들이 움직이는, 그러면서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 하나의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작가와 편집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마치 미국의 AP통신이나 로이터가 상당수의 전문가들을 포함한 수백만 명의 기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다. 그들은 광고도 게재하지 않는 무료신문, 즉 자신들의 블로그를 위해 봉급도 받지 않고 일하고 있다”

블로그의 위력으로 탄생한 <롱테일 경제학>

블로그의 위력은 <롱테일 경제학>의 탄생경위에서도 확인된다. 저자 크리스 앤더슨은 ‘더롱테일닷컴(http://www.thelongtail.com)’이라는 블로그를 통해 ‘롱테일’ 개념을 공개했고 다양한 방문자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80/20법칙이 바뀌고 있다”는 주장이 담긴 글을 올리면 수십 명의 명석한 독자들이 덧글을 달아주거나 이메일을 보내주었고 자신들의 블로그를 통해 롱테일 법칙을 발전시킬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비공식적인 브레인스토밍에는 하루 5천명 이상의 방문자들이 참여하며 의견을 제시했다. 독자들과 함께 ‘롱테일’ 이론을 발전시켜 나간 셈이다. 저자 스스로도 “블로그를 통해 많은 독자들의 도움을 받아 내용을 확장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롱테일 경제학>은 ‘롱테일’의 본질과 실례 그리고 그 가능성을 심도 깊게 다룬 경제서다. 롱테일 현상이 기업경영에 미치는 영향, 인터넷시대가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변화 등은 일상에서 접하던 낯익은 것이지만 그것에서 ‘축출’한 개념들은 현시대를 읽는 핵심의 키워드다. “이 책은 세계화 시대를 대비하는 미디어 및 엔터테인먼트업계는 물론, 한국의 IT업계 전체가 읽어야 할 필독서다. 나아가 정치인, 경제인, 문화인 등 비즈니스와 경영전략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든 일독을 권한다.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책을 해독한다면 그 결실은 무궁무진하다” 중앙일보 멀티미디어랩 김택환 소장의 격찬에 이견 없이 동의한다.(김민영 기자)

06. 12. 07.

P.S. '꼬리'에 관한 우리의 전통적인 시각은 (부정적인 관점에서) '꼬리가 길면 잡힌다'란 말에 집약돼 있다. 한데 그 '긴 꼬리'가 21세기의 키워드가 될 수 있다니 세상은 참 길게 살고 볼일이다...

P.S.2. '밑에서 본 세상'이란 신기섭님의 진보넷 블로그에서 '롱테일 이론'에 대한 반론을 옮겨온다(永革님이 알려주셨다). 롱테일 이론은 바보 이론이라는 주장이다(롱테일 이론의 꼬리가 너무 길었던 것일까?). '계산'에 둔감한 나로선 어느 것이 잇속에 맞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정반대의 시각도 참조해둠이 옳겠다. 참고로, 필자는 <탈근대 군주론>(갈무리, 2005) 등을 우리말로 옮긴 바 있으며 그의 블로그에는 번역관련의 유용한 글들이 많이 게시돼 있다.   

 

 

 

 

바보가 주장하는 롱테일 이론(06. 07. 30)

이 글의 목적은 인터넷 현상에 대한 논평이 아니다. 뭔가 새로운 이론을 접할 때, 비판적 글읽기가 얼마나 절실한가를 말하려는 것이다. 제대로 읽어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고, 또 제대로 글을 쓸 수 있다.

롱테일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인터넷에선 인기 없는 물건들(긴 꼬리)의 판매량을 모두 합치면 최고 인기 제품(머리)의 판매량에 버금가는 상당한 규모를 형성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많이 팔리는 20%가 전체 매출의 80%를 차지한다는 식의 이론을 뒤집는 논리다. 롱테일 이론은 인터넷 시대에는 별 볼일 없는 다수가 힘을 발휘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너무 멋지지 않은가? “최첨단을 달리는 블로거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 앞장서서 이 이론을 주창하는 사람은 아메리카의 기술 관련 잡지 <와이어드>의 편집장 크리스 앤더슨이다. 그는 온라인 서점 '아마존', 온라인 음악 판매상 '아이튠스 뮤직스토어' 등의 사례를 자기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다. <롱테일>이라는 책도 냈다.

내가 보기에 이 현상은 새로울 게 없다. 규모가 큰 일반 상점에서도 나타나는 상식적인 현상이다. 많은 사람이 찾는 상점에서는 대중적 인기가 높은 물건만 팔리는 게 아니라 인기 없는 물건들도 꾸준히 팔린다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 다만 이 현상이 일반 상점에서 뚜렷하지 않은 건, 일반 상점은 비용 때문에 일정한 매출이 안되는 물건을 일정 시점이 지난 뒤 치워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라인 상점은 물건 전시 비용이 거의 0에 가깝기 때문에 잘 안팔리는 물건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롱테일 운운이 온라인에서만 가능한 건 다름 아니라 바로 ‘물건 전시 비용’ 덕분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현상을 쓸데 없이 과장할 일이 아니다.

아무튼 책이 나온 이후 롱테일 이론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온라인에서도 이 현상이 별로 두드러지지 않다는 실증적인 반박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의 리 곰스가 쓴 글이 대표적이다. 온라인에서도 히트 상품의 매출이 여전히 압도적이라는 것이다. 이 쯤 되면 롱테일 이론은 아예 용도 폐기되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곰스의 글에 대한 앤더슨의 반박을 읽어보니, 앤더슨은 '허풍쟁이 이론 장사꾼'이 아니라 바보다. 반박의 핵심은 판매 점유율 계산법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상위 10%의 매출이 얼마고 하위 80%의 매출이 얼마라는 식으로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물건이 1000가지인 상점의 상위 10% 곧 100가지가 전체 매출의 50%를 차지한다고 할 때, 물건 가짓수를 9000가지 늘려 전체를 10000가지로 만들면 100가지 곧 상위 1%가 전체 매출의 50%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되면 판매가 소수에 더 집중되는 것같은 착시현상이 나타나니, 계산을 %가 아니라 절대 수치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위 100가지의 매출 비중을 비교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계산하면 자신이 주장하는 롱테일 현상이 온라인에서 분명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앤더슨의 계산법은 확연한 롱테일 패러독스를 보면 자세히 나온다. 이 부분은 곰스에 대한 반박글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물론 둘 다 영어로 쓰인 글이다.)

그런데 이건 완전 바보나 할 수 있는 소리다. 물건 1000가지를 갖춘 상점에서 상위 100가지의 매출 비중이 50%였다고 치자. 그런데 이 상점이 새로 물건을 9000가지 들여 놓았다고 치자. 이렇게 늘렸는데도 상위 100가지의 매출 비중이 50%를 유지하려면 어때야할까? 다른 조건의 변화가 없다면 새로 들여놓은 9000가지 물건이 단 하나도 팔리지 않아야 한다. 이건 가능하지 않다. 하다못해 몇개라도 팔리고, 상위 100가지의 매출 비중은 줄게 된다. 하나도 팔리지 않을 것같으면 뭐하러 힘들여 9000가지를 새로 들여놓겠나? 하다못해 단 하나라도 판매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앤더슨은 '롱테일 현상'이 나타났다고 환호할 것이다. 이는 “나는 바보다”라고 외치는 격이다.

물론 앤더슨이 이런 말도 안되는 계산법을 제시하는 게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예컨대 아마존 서점에는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상당수는 더 이상 상품이 아니다.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에 목록에서 지워버리지 않은 것이지, 실제로는 전혀 판매되지 않고 재고도 없는 책들이다. 그러니 이런 것까지 모두 포함시켜서 %로 계산하면 상위 판매 품목의 비중이 과장되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사실 롱테일 이론은 이런 상품이 아닌 것들의 존재까지 '긴 꼬리'의 비중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이용해 먹는다. 그러면서도 판매 비중을 계산할 때는 이것들의 역효과를 차단하는 엉뚱한 계산법을 쓰자고 주장한다. 유리할 때 이용하고 불리할 때 빼는 이율배반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일반 상점에서도 어느 정도 나타난다. 교보서점이라고 이런 책이 없겠나? 다만 비중이 아마존에 비해서 낮고, 주기적으로 실시하는 총정리 때 서가에서 사라진다. 그러니 비교를 하려면 '아직 상품의 가치가 있는' 책들만 골라내서 비중을 계산해야지, 앤더슨처럼 '상위 100가지' 식으로 계산해선 안된다. 문제는 '아직 상품의 가치가 있는' 것들을 골라내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머리와 꼬리의 엄밀한 분석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불가능한 걸 하려고 바보 같은 계산법을 고안하는 이유야 뻔하다. 허황된 이론으로 장사하자니 '장난질'을 하는 것이다.

사실 문제는 앤더슨이 아니다. 누군가 '섹시한' 주장을 펴면 무조건 흉내내는 게 첨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진짜 문제다. 아메리카에서 이런 짓이 벌어지건 말건 신경 쓸 생각없다. 다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라도 좀 제대로 따져보고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수용을 하든 말든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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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6-12-07 01:12   좋아요 0 | URL
* 아 마지막에 나온 고양이가 넘 귀여워요. ㅋ 퍼 갈께요.

lastmarx 2006-12-07 01:57   좋아요 0 | URL
{오마이뉴스 이연호 대표}라 언제 대표가 바뀌었나 보죠.^^

로쟈 2006-12-07 08:29   좋아요 0 | URL
기자들도 실수를 하죠.^^ 수정해놓았습니다...

비로그인 2006-12-07 10:14   좋아요 0 | URL
"그들은 광고도 게재하지 않는 무료신문, 즉 자신들의 블로그를 위해
봉급도 받지 않고 일하고 있다"
공감합니다. 로쟈님


virtuepeak 2006-12-07 10:56   좋아요 0 | URL
제 경우에는, 롱테일 이론에 대한 반박이 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오마이뉴스도 성장은 이미 멈췄다고 하구요. 관련된 글입니다.
http://blog.jinbo.net/marishin/?pid=211

로쟈 2006-12-07 11:16   좋아요 0 | URL
Hansa님/ 봉급도 받지 않고 일하는 블로거들이 세상을 지배할 리는 만무하지만 그런 이들을 부려먹을 수 있다면 '지배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혁님/ (아마도 영구혁명에서 따오신 듯)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알려주신 글을 덧붙여놨습니다. 경제/경영은 결과로 말하는 분야니까 구구한 설들은 곧 평정이 되겠지요...
 

교보에 잠깐 들렀다가 발견하고 다소 놀란 책은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배>(안티쿠스, 2006)이다. 흔히 '바보들의 배'라고 알려진 책인데, '1494년 출간된 세상 모든 바보들에 관한 원전'이란 부제가 말해주듯이 정말로 15세기말에 씌어진 책이다.  

나로선 확실한 기억은 아니지만 푸코의 책 어디선가에서 제일 처음 읽어본 듯도 한데, 찾아보니까 '바보들의 배'라는 건 어떤 특정한 책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는 아니다. 위키피디아의 설명은 이렇다: "The ship of fools is an old allegory, which has long been used in Western culture in literature and painting. With a sense of self-criticism, it describes the world and its human inhabitants as a vessel whose deranged passengers neither know nor care where they are going. Ships of Fools featured as wagons in medieval Carnival Parades."  그러니까 지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태운 배가 '바보배'인 모양.

'바보배'란 말이 알레고리인 만큼 여러 작품들이 같은 이름으로 씌어졌는데, 이번에 번역돼 나온 브란트의 책은 그 '원조'쯤 되는 듯하다. 이후에 20세기 작가들이 여러 명 가세하고 있는 걸 보아 '현재진행형'이기도 하고. 아무튼 뜻밖의 고전이 출간되어 반가웠다. 아직 아무런 리뷰도 씌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지난 주말에나 서점에 깔렸을 듯싶은데, 이번주말쯤에는 각 리뷰란의 한 꼭지를 확실히 카바하게 될 듯하다. 당장에 책을 구해볼 처지가 못되는지라 일단 리뷰들을 기다려본다. 역자는 미술사학자 노성두씨.

 

 

 

 

인용문에 보면 문학이나 회화에 자주 쓰이던 알레고리란 설명이 나오는데, 그 '회화'의 대표작은 히에로니무스 보쉬(보스)의 것이다(<보쉬의 비밀>이란 책도 지난 가을에 출간된 신간이다). 보쉬가 그린 <바보들의 배>(1490-1500)는 아래와 같다.  

그림에 대한 설명은 "In The Ship of Fools Bosch is imagining that the whole of mankind is voyaging through the seas of time on a ship, a small ship, that is representative of humanity. Sadly, every one of the representatives is a fool. This is how we live, says Bosch--we eat, dring, flirt, cheat, play silly games, pursue unattainable objectives. Meanwhile our ship drifts aimlessly and we never reach the harbour. The fools are not the irreligious, since promiment among them are a monk and a nun, but they are all those who live ``in stupidity''. Bosch laughs, and it is sad laugh. Which one of us does not sail in the wretched discomfort of the ship of human folly? Eccentric and secret genius that he was, Bosch not only moved the heart but scandalized it into full awareness. The sinister and monstrous things that he brought forth are the hidden creatures of our inward self-love: he externalizes the ugliness within, and so his misshapen demons have an effect beyond curiosity. We feel a hateful kinship with them. The Ship of Fools is not about other people, it is about us."

자료를 검색해보면,  영화화된 작품도 눈에 띄는데, 브란트의 책을 원작으로 한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의 <바보들의 배(Ship of Fools)>(1965)가 그것이다. 국내에 개봉된 적이 있는지는 미지수이지만, 내용은 이렇다고(비비안 리 출연작이다).

"전쟁과 가깝고도 먼 1930년대. 멕시코의 베라크루스에서 독일의 브레머하펜으로 가는 여객선, '그랜드 호텔'에 승선한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제일 처음 등장하는 사람은 난쟁이 마이클 던이다. 마이클 던은 시청자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던지는 내레이터로서 영화 내내 그리스의 코러스단으로 등장한다. 여객선에 탄 여러 부류의 사람들로는 여객선의 의사 오스카 워너, 스페인이 정치 활동가 시몬느 시뇨레, 나이 든 요염한 여자 비비안 리, 쾌락주의적인 야구 선수 리 마빈, 철학적인 유태인 하인즈 루만, 그리고 젊은 연인들인 조지 시갈과 엘리자베스 애쉴리 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 끊임없이 말을 해댄다. 비비안 리는 늙어 가는 중년 여성으로 잃어버린 청춘을 회복시키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그것은 결국 꿈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바보들의 배'가 애당초 알레고리의 의미를 갖는 만큼 오늘날의 상황에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겠다. 예나 지금이나 '바보들'이란 세상에 차고도 넘쳐나니 말이다...

06. 1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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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4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Joule 2006-12-05 00:08   좋아요 0 | URL
푸코의 <광기의 역사> 도입부에서였습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저 그림을 언급하면서요. 그냥 <바보들의 배>라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로쟈 2006-12-05 00:12   좋아요 0 | URL
제 생각도 그런데, <바보배>라고 좀 특이한 선택을 했네요...

산손 2006-12-05 01:54   좋아요 0 | URL
헉, 이런 책이 번역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노성두 씨라니 그럴 법 하네요 ^^ 찾아보니 삽화가 포함된 독어(중세독일어인듯 ;)판도 인터넷에 있네요(http://www.fh-augsburg.de/~harsch/germanica/Chronologie/15Jh/Brant/bra_n000.html). 노성두 씨는 라틴어에서 한 건지 독어에서 한 건지 얼렁 책을 구해봐야겠습니다. 언제나 발빠르고 예리한 정보 감사드립니다 :)

castrato 2006-12-06 16:45   좋아요 0 | URL
"독일 레클람Reclam 사의 1992년도 판과 마릭스Marix Verlag GmbH(Wiesbaden) 사의 2004년도 판을 비교하며 번역"했다고 밝혀져 있군요. 오늘 교보에서 샀습니다.

로쟈 2006-12-06 16:56   좋아요 0 | URL
반기시는 분들이 많군요. 저는 독후감이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와 레닌에 관한 페이퍼를 몇 시간 동안 붙잡고 있었더니 몸이 뻐근하다. 눈 내리는 겨울풍경이나 몇 장 옮겨놓으며 휴식을 취할까 했는데, 손은 어느새 토요일자 신문들의 북리뷰들을 클릭하고 있다(구제불능이다!). 최근에 나온 역사서들 가운데 두 권에 대한 리뷰기사를 경향신문에서 옮겨온다. 저명한 중국사학자 조너선 스펜스(1936- )의 <신의 아들: 홍수전과 태평천국>(이산, 2006)과 앙리 루소(1954- )의 <비시신드롬>(휴머니스트, 2006)이 그것인데, 전혀 다른 시대를 다루고 있지만 두 권 모두 일단 만만찮은 분량이 마음에 든다. 게다가 어찌보면 '태평천국'과 '비시정부'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신의 아들>은 진작에 보관함에 들어가 있는 책이고 <비시신드롬>은 주초에 교보에서 실물을 본 책이지만 생소한 저자인 탓에 어떨까 싶었는데 김기봉 교수의 서평이 유익한 길잡이가 되어 준다.   

경향신문(06. 12. 02) 中태평천국운동 주도했던 그

1836년 청조 말기. 중국 남부 광둥성 화현에 훙훠슈(洪火秀)라는 22세의 청년이 있다.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광저우에 갔던 그는 알 수 없는 외국인으로부터 한 권의 책을 받게 된다. 선교사 량아파가 성서를 번역해 만든 ‘권세양언’(勸世良言)이다. 과거에 낙방한 훙훠슈는 꿈을 꾼다. 그 꿈에서 세상의 유일한 구원자인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세상 요괴들의 사악한 길에서 백성들을 각성시키고 계몽하겠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완전함’을 뜻하는 취안(全)을 새 이름으로 지어준다.

평범했던 청년 훙훠슈가 하느님의 아들이자 예수의 동생, 완전한 존재인 훙슈취안(洪秀全)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는 종교 조직 ‘배상제회’(拜上帝會)를 조직한다. 당시 타락하고 불안정한 사회에 불만을 가진 민중들은 그의 사상에 매료되고, 세력은 급격하게 불어나 군대를 조직하고 근거지를 확산한다. 그리고 1851년 공식적으로 태평천국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2천만명이라는 인명피해를 초래한 전란인 ‘태평천국운동’의 시작이었다.



‘현대 중국을 찾아서’ ‘강희제’ 등의 저서를 통해 중국사의 대표학자로 자리잡은 저자가 태평천국운동과 홍슈취안에 대해 쓴 책이다. 그동안 태평천국운동은 중국이 근대화로 들어서는 과정, 혹은 민중들이 아래로부터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으로써 그 역사적 의의를 평가받아왔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서 보다 면밀하게 태평천국운동을 들여다본다. 훙슈취안은 자신의 세력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신도들에게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는 한편,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는 세력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숙청을 행했다.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 구원자를 자처했지만 그 역시 욕망과 권력에 눈먼 인간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훙슈취안의 삶을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서술하는 형식을 통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역사를 한편의 이야기로 풀어냈다. 그의 삶을 통해 태평천국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물론, 개신교가 중국에 유입되는 과정, 당시의 시대상황 등을 그려볼 수 있다.(이윤주기자)

경향신문(06. 12. 02) 佛현대사의 그늘 ‘비시정부’

프랑스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자부심이 강한 민족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숨기고 싶은 어두운 과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치 독일의 괴뢰정권으로 알려진 비시정부다. 1940년 6월13일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한 후 제3공화국 107번째 총리가 된 페탱(Petain) 장군은 22일 휴전조약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독일 점령지역과 자유지역으로 나뉘었다. 비시정부란 이 자유지역에 비시를 수도로 하고 페탱을 수반으로 해서 수립된 프랑스 정부를 지칭한다.

당시 독일군에게 패배한 프랑스인들에게는 2개의 정부, 페탱의 비시정부와 드골이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세운 임시정부가 있었다. 전자는 나치독일과 협력을 약속했다면, 후자는 프랑스인들에게 나치독일과의 항전을 계속할 것을 호소했다. 연합군에 의해 해방을 맞이한 프랑스인들에게 전자는 청산돼야 할 과거라면, 후자는 영광스럽게 기억해야 할 역사다.

하지만 비시정부는 1940년부터 1944년까지 4년 정도만 존립했지만, 그 기억은 ‘비시 신드롬’이라 불릴 만큼 프랑스인들에게는 치유하기 힘든 ‘정신적 상처(trauma)’로 남아 있다. 비시정부에 대한 복잡하고 모순적인 기억이 역사로 해소되지 않음으로써 ‘신드롬’을 낳았다. ‘신드롬’이란 원인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공통성을 가진 일련의 병적 증상, 곧 증후군을 의미한다. 비시정부는 독일군의 강압으로 세워진 괴뢰정부가 아니라 독일군 점령에 대항해서 싸웠던 전직 각료들로 구성된 정부다. 영화 ‘금지된 장난’의 첫 장면처럼 파리가 점령 당하자 거리는 피란민으로 아비규환을 이뤘다.

1차 세계대전의 악몽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시민들은 집단탈출을 감행했고, 대다수 프랑스인들은 극도의 공포로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1차 세계대전 베르뒹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웅 페탱은 한 포스터의 글귀처럼 “영광의 날에도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있었습니다. 어려운 때도 저는 여러분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휴전을 전제로 한 비시정부를 수립했다.

비시정부는 독일에 대한 협력체제였지만, 무너진 프랑스를 재건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수립됐다. 마르크 블로크가 ‘기이한 패배’라고 지칭했던 것처럼, 프랑스가 패배를 당한 근본 원인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 문제에서 비롯했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제3공화국의 부패와 무능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좌·우파의 끊임 없는 갈등과 대립은 공산주의와 파시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추구하는 ‘민족혁명’을 꿈꾸는 보수주의자들을 태동시켰다.

죽기 얼마 전 젊었을 때 비시정부에 참여했던 경력이 밝혀져 커다란 충격을 줬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자신의 행동을 “외적으로가 아니라 내적으로 프랑스를 일깨우고 싶었다”고 변명했다. 젊었을 때 열렬한 페탱주의자였다가 레지스탕스 진영으로 돌아선 미테랑이 ‘비시 신드롬’의 전형일 수 있다. 만약 미테랑이 대통령이 되기 전이나 재임 중 과거 행적이 드러났다면 그것으로 그의 정치생명은 끝났을 것이다. 레지스탕스 미테랑이 되기 위해서는 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그의 과거는 억압돼야 했다. 하지만 억압된 과거는 망각되지 않고 트라우마가 된다.



비시 과거를 억압하기 위해 해방된 프랑스는 레지스탕스라는 민족 신화를 만들었다. 그 주역이 드골 대통령이다. 해군사관학교에서 서양사를 가르치는 이학수 교수가 번역한 앙리 루소의 ‘비시 신드롬’은 이런 프랑스의 민족 신화가 허구임을 냉철하게 밝혀냈다. 저자는 비시 신드롬이 ‘왜’ 생겨났는가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작동했는가’를 물음으로써 프랑스 과거청산의 허상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드골은 비시 체제의 진실을 은폐하고 프랑스 사회에 미친 영향력을 체계적으로 축소하는 한편, ‘레지스탕스주의’라는 지배신화를 날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치권력을 강화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전 국민을 ‘레지스탕스’로 만드는 ‘기억의 장(場)’을 구축했다.

‘비시 신드롬’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정치적 목적을 갖고 행하는 과거 청산의 무의미함과 위험성을 깨칠 수 있다. 모든 역사는 정치적이다. 하지만 정치가 역사를 지배해서는 안된다. 과거사 정리는 ‘역사의 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의 역사화’를 위해 수행돼야 한다. 권력투쟁의 수단으로 관철되는 과거 청산은 다양한 기억들을 억압하고 단순화해서 신화적 역사를 만든다.



앙리 루소는 기억은 복수이기 때문에 서로 갈등하며 투쟁을 벌이며, 그와 같은 방식으로 기억은 후세대에게 전이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억이란 이미 죽어버린 과거라는 시체를 살아있는 역사로 부활시키는 생명의 숨이다. 나름대로 진지하게 한 시대를 살았던 모든 사람의 삶은 우리 삶과 마찬가지로 소중하다. 과거가 돼버린 그들 삶을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함으로써 우리 삶과 연결시켜서 우리는 누구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역사다.

우리는 어제의 이성이 오늘의 이성이 아닌 우상이 되기 때문에 오늘의 이성 또한 내일의 우상이 될 수 있음을 안다. 그렇다면 역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일제강점기의 친일파들뿐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공산치하에서 부역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말하게 함으로써 하나의 대문자 한국사가 아니라 소문자 한국사들을 쓰는 것이 과거사 정리의 최종 목표가 돼야 한다.(김기봉|경기대 교수·사학)

06 12. 02.

 

 

 

 

P.S. 조넌선 스펜스의 책들은 이전에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다룬 듯한데 <신의 아들>은 재작년에 나온 <반역의 책: 옹정제와 사상통제>(이산, 2004)에 이어서 그래도 오랜만에 나온 책이다. 러시아사에 관해서도 이만한 '이야기꾼'이 있었으면 좋겠다(내가 과문한가?). 그리고, 프랑스의 비시정부와 관련된 책은 몇 권 되지 않아 보인다. 마르크 블로크의 <이상한 패배>(까치, 2002)에 대해서는 얼마전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 2006)에서 독후감을 읽어볼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주제에 관해서는 박지현의 <누구를 위한 협력인가>(책세상, 2004)를 먼저 읽고 윤곽을 그려보는 것이 순서에 맞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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