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때문에 (연쇄)살인과 대량학살에 관한 책들을 들춰보게 됐다. '살인'에 국한하자면, 이 분야의 책들은 처음 찾아보게 됐는데,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책이 콜린 윌슨의 <잔혹>이나 <살인의 심리> 같은 책들이니까 좀 오래 묵긴 했다. 도서관에서 '살인'이란 검색어로 뜨는 책들 가운데 몇 권에 관심이 갔지만 모두 대출중이었다.

 

 

 

 

그 책들이란 게 브라이언 이니스의 <프로파일링>(휴먼&북스, 2005)이나 <살인의 현장>(휴먼&북스, 2006) 같은 것이었는데 <모든 살인은 증거를 남긴다>(휴먼&북스, 2005)와 함께 '범의학과 과학수사 시리즈'를 구성하고 있었다. 한데, 모두 대출중. <살인의 현장>은 원서('Body in question')마저 대출중이었다.

책값이 좀 비싸긴 하지만, 지난 7월에 나온 이 책의 알라딘 세일즈 포인트가 그다지 높지 않은 걸로 보아 대중적이지는 않은 이 책에는 일부 매니아 독자층이 있는 듯하고, 그들은 아마도 CSI 시리즈의 매니아층 일부와 겹치지 않을까, 라는 게 나의 추정이다. 하는 수없이 방향을 틀어서 로버트 레슬러의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바다출판사, 2004)를 대출할까 했더니 이마저도 이미 대출중. 나는 간신히 이 책의 구판인 (미래사, 1994)을 '꿩 대신 닭'으로 대출했다. 하지만, 구내서점에 가서 비교해보니까 분량에서 너무 차이가 나는지라(바다출판사판은 435쪽, 미래사판은 268쪽이다)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는 아예 구입을 했다(원저의 제목과는 무관한 국역본의 제목은 물론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본딴 것이리라).

알라딘의 소개에 따르면, "1994년 출간되었던 의 개정증보판이다"이라고 하는데, 똑같이 1992년에 나온 원저를 대본으로 하고 있으므로 '개정증보판'이란 표현은 국역본에만 해당한다. 그러니까 짐작엔 미래사판이 축약번역판인 모양이다. 한데, 이 '축약본'의 서두에도 들어가 있는 10페이지의 사진자료들이 '개정증보판'에는 왜 빠진 것인지? 더불어, '개정증보판'에는 "33년의 경찰 재직 기간 동안 시카고의 거리에서 여러 괴물들과 싸웠던 내 절친한 친구이자 처남에게 바칩니다"란 헌사도 빠져 있다(처남이 유감스러워하지 않을까?). 게다가 저자의 '감사의 말'까지.

물론 '축약본'도 문제점이 없지는 않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테니까..."라는 에피그라프가 빠져 있는 것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인용한 것이면서 책의 원제를 따온 대목이기도 한. 요컨대, 94년의 초판에서 2004년의 개정판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가 잃은 것은 '처남'이요, 얻은 것은 '괴물'이 되겠다.  

로버트 레슬러(1937- )의 이 저명한 책에 대해서 내가 숙지하지 못한 것은 개정판이 지난 2004년, 그러니까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된 사정과 무관하지 않겠다. 뒤늦게 알아보니 이 '전설적인' FBI 수사관이 ‘연쇄살인범(Serial Killer)'이나 ‘범죄자 프로파일링(Criminal Profiling)’ 같은 말을 처음 창안한 사람이다(그러니까 그는 '연쇄살인범'의 '아버지'이자 '프로파일링'의 '대부'이다). <양들의 침묵>, <한니발>의 작가 토머스 해리스 또한 그 소설들을 쓰기 전에 로버트 레슬러에게 경험담을 실제로 듣고 참고했다고 하니까 더 말할 것도 없다. 재작년의 한 리뷰기사를 읽어본다.

 

 

 

 

경향신문(04. 08. 21) 유영철은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구속기소된 시점에서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라는 책이 나왔다. 저자는 ‘연쇄살인범(Serial Killer)’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미국 연방수사국(FBI) 심리분석관 로버트 레슬러. 그는 범죄 현장 조사·감식을 통해 범인의 프로필을 추적하는 수사기법인 ‘범죄자 프로파일링(Criminal Profiling·범인상 추정)’을 처음 창안한 사람이기도 하다.

레슬러는 엽기적 살인이 발생한 현장 분석에서부터 시작해 교도소에 수감된 살인마들과의 면담을 통해 살인자들의 공통점과 범죄 심리를 해부하고 있다. 그는 1,488차례 방화하고 하룻밤에 6명의 여성을 살인한 데이비드 버코위츠, 마음에 둔 여인이 사랑을 받아주지 않자 마구 흉기를 휘두른 뒤 토막낸 듀안 샘플즈, 살해한 뒤 시체를 욕보이는 시간(屍姦)을 저지른 연쇄살인마의 대명사 ‘데드 번디’ 등 수십명을 인터뷰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자신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본다.’ 레슬러는 인터뷰 과정에서 니체의 이 말을 유념하며 냉철한 이성을 통해 ‘괴물’들의 심연을 들여다봤다. 그 결과 연쇄살인마들은 통념처럼 가난한 결손 가정 출신이 아니며 오히려 중산층 이상 출신들이 많았고, 또 80~90%가 어린 시절 ‘냉담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신체적·정신적 학대를 당했으며 성적 도착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연쇄살인범들은 환상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들의 ‘충족되지 않은 경험’이 그 환상의 일부가 되어 다음 살인을 부추긴다. 저자는 연쇄살인범이라는 용어의 뒤에 숨어 있는 뜻은 진짜 이런 것이라고 말한다. ‘인육을 먹었다’는 등 유영철의 진술 하나하나가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있는 이 때에 나온 이 책은 유영철의 심리를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해 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제목은 자극적이지만 엽기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책은 아니다. 최근에야 범죄 프로파일링을 시도한 한국 경찰의 과학수사 관계자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김종목 기자)

06. 11. 21.

P.S. 레슬러의 책으론 <살인자들과의 인터뷰> 외에 <범죄분류입문>, <이성 살인: 패턴과 동기> 등의 공저가 있다. <인터뷰>에 대한 반응으로 보아 나머지 책들도 소개됨 직하다...

 

 

 

 

P.S.2. <살인자들과의 인터뷰>와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로 물만두님이 추천해주신 <마인드 헌터>(비채, 2006). 소설인 줄 알고 있었는데, 역시나 FBI의 베테랑 수사관이었던 존 더글러스의 회고록이라고 한다. <마음의 사냥꾼>은 그 구판이다. 내친 김에 떠올리게 된 책은 '경제학자' 에르네스트 만델의 <즐거운 살인>(시울, 2001). '범죄소설의 사회사'가 부제인데, 보관함에 넣어놓은 채 몇 년이 지난 듯하다.

그리고,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향수>(열린책들, 2006). 나는 아주 오래전 초판 번역으로 읽었는데(기억에 하룻밤에 읽은 책이다), 최근에 영화화되어 곧 개봉한다는 얘기가 들린다. 연쇄살인범을 다룬 영화들에 특별한 흥미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나는 <텍사스 살인마> 같은 영화를 취향상 보지 않는다) <향수>의 경우는 이야기도 되새겨볼 겸 한번 보고 싶다. 비록 나의 관심은 이런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에 더 가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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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1-21 20:08   좋아요 0 | URL
비교해서 볼 책으로 다시 출판된 마인드 헌터를 알려드립니다^^;;

로쟈 2006-11-21 20:10   좋아요 0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인 줄 알았는데, 회고록이군요.^^

짱꿀라 2006-11-22 00:56   좋아요 0 | URL
좋은 책 소개 감사해요. 살인자들과의 인터뷰 1년전에 본 것 같은데 너무 재미있게 봤거든요.

로쟈 2006-11-22 09:48   좋아요 0 | URL
이미 읽으셨다면, 이 '소개'는 잉여적인 것인데요.^^
 

일본 히토쓰바시대 교수로 있으면서 국내 언론에도 칼럼을 연재하곤 했던 이연숙 교수의 주저가 지난달에 출간됐었다(저자의 이름은 사카이 나오키의 <국민주의의 포에시스>(창비, 2003)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진작에 보관함에는 넣어놓았었지만 근대 일본에서의 '국어 이데올로기'를 파헤치고 있는 저작의 성격상 (관심이 가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언제 읽겠는가 싶어서 구입은 차일피일 미뤄두고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 본격적인 리뷰서평이 눈에 띄기에 옮겨놓고 길잡이 삼아 읽어보고자 한다.  

 

 

 

 

그 전에 책에 대한 소개를 잠시 옮겨오면, "폭력적인 근대 일본의 '국어'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지적하며 1996년 일본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저작. '국어' 개념의 성립과 전개를 축으로 하여, 근대 일본의 언어 인식의 근저를 새롭게 밝히고자 했다. 한국인 학자가 일본어로 쓴 책으로, 1996년 이와나미서점에서 출간되어 이듬해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했다. '일본'에 살고 있는 '일본인'은 동일한 '일본어를 말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이러한 담론은 일본이 근대 국민국가로서 구축되어 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담론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국어라는 사상'이다."

문제는 이 '국어라는 사상'이 일본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잖겠는가라는 점. 이 문제적인 대목에 대해 명쾌하게 해명해줄 수 있는 책이 또한 기다려진다. 아래의 서평은 정선태 교수의 것인데, 이미 코모리 요이치의 <일본어의 근대>(소명출판, 2003) 등을 번역하고 근대어와 근대문학에 관련된 다수의 논저들을 발표한 바 있기에 최적의 서평자라 할 수 있겠다.

경향신문(06. 11. 18) ‘국어’는 ‘제국주의’이념·수단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표준어를 사용하는(또는 표준어를 사용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왜 아니겠는가.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교양이 없는’ ‘조금 모자라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해서든 ‘표준 국어’를 사용하기 위해 애쓰는 ‘촌놈’들의 무의식 속에는 ‘교양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완강하게 자리잡는다.

그렇다면 표준어는 누가 왜 정하는가. 왜 표준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고상하게 보이고, 사투리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저열하게 보이는가. 우리가 아무런 이의 없이 사용하는 ‘국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흔히 한국의 ‘국어’에는 민족 정신이 깃들어 있으며 ‘국어’의 보존과 순화야말로 민족 정신을 지키는 보루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처음부터 그러했을까.



“‘국어’라는 표현은 그 자체는 ‘정치적 개념’이면서도 실은 그 정치성을 은폐하고 언어를 자명화하며 자연화하는 작용을 띠고 있다”는 도전적인 결론을 끌어내는 ‘국어라는 사상’은 일본에서 ‘국어’라는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포되는지를 방대한 실증적 자료를 동원하여 증명한다. 일본 근대 언어학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우에다 가즈토시(上田萬年)와 그의 충직한 제자 호시나 고이치(保科孝一)를 두 주인공으로 하여 일본의 ‘국어학’과 ‘국어 정책’의 이면을 파헤치고 있는 이 책은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는 ‘국어’라는 말이 사실은 ‘대일본제국’의 욕망을 현실로 옮기는 강력한 무기였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저자는 “언어는 이것을 쓰는 인민에게 있어서는 흡사 그 혈액이 육체상의 동포를 나타냄과 같이 정신상의 동포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것을 일본 국어에 비유해서 말하면 일본어는 일본인의 정신적 혈액이라 할 수 있다”는 우에다의 선언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이 일본인의 ‘정신적 혈액’이야말로 일본의 ‘국체(國體)’를 유지하는 근간이며 일본인을 가장 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에다 이전에는 ‘국어’라는 이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국어’라는 이념과 제도는 일본이 근대 국가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창안해 낸 하나의 작품이자 픽션이었다.

물론 일본만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을 포함하여 근대 국민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거의 모든 국가들이 자신의 ‘국어’에 국민 통합의 이념을 새겨넣었고, 이를 통해 국민의 ‘평준화’와 ‘동질화’ 프로젝트를 실천에 옮겼다. 우에다와 그의 제자 호시나가 하나의 모델로 삼았던 독일의 예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야콥 그림(Jacob Grimm)은 “독일이 진정한 통일체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에도, 경제에도, 종교에도 도움을 청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서 독일어라는 언어가 국민적 통합의 상징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말했다. 독일이란 무엇보다도 ‘언어 민족(Sprachnation)’으로서밖에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국민 의식의 형성을 위해 창안된 ‘국어’는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내부를 통일하고 급기야 외부(=식민지)로 향한다. ‘언어와 민족의 정신적 유기적 결합’을 강조함으로써 ‘국민’이라는 신화를 작성한 근대 국민국가 일본은 자신의 ‘국어’를 무기로 하여 제국 건설에 나선다. 근대 국민국가는 필연적으로 제국을 욕망한다. 그리하여 일본의 ‘국어’는 ‘제국의 국어’를 욕망한다. ‘대일본제국’이 식민지를 확장함에 따라 일본의 ‘국어’는 ‘대동아공영권어’를 지향한다. 자연스러운 이치다!

우에다는 ‘국어’에 의한 ‘국민’의 동질화·획일화가 근대 국가의 존립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과제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어’의 대외 진출을 위해서는 표준어 제정과 표기법의 통일 등 ‘국어 개혁’이 불가피했다. ‘대일본제국’은 ‘새로운 영토’, 곧 조선과 대만을 비롯한 식민지에 ‘국어’를 전파하기 위해 부심한다. 국어 정책을 학문적으로 총괄한 사람이 바로 우에다 가즈토시의 충직한 제자 호시나 고이치였다.

반대가 없진 않았지만 호시나 고이치가 주도한 ‘국어 정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식민지 조선에서도 예외 없이 관통한다. 즉, 조선에서도 ‘대일본제국’의 ‘국어’는 유감없이 그 힘을 발휘하여 ‘내지인’은 ‘국어를 상용하는 자’, ‘조선인’은 ‘국어를 상용하지 않는 자’로 법적으로 규정되었고, 그 결과 조선의 독자적인 민족성은 완전히 부정되기에 이른다. 제국을 욕망하는 국가의 지원을 등에 업은 ‘국어’는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국어라는 사상’을 읽으면서 주시경을 비롯하여 한국의 ‘국어학자’들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한국의 ‘국어’가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강력한 무기 중 하나였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우리의 ‘국어’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한국이라는 국가의 ‘국어’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이념의 실체는 어떠한지, 우리는 진지하고도 성실하게 묻고 또 대답해야 한다. 이 책이 한국의 ‘국어’와 ‘국어학계’에 몰고 올 파고는 예사롭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은 필자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정선태|국민대 교수·국문학)

06. 11. 18.

P.S 서평의 마지막 문장, "이 책이 한국의 ‘국어’와 ‘국어학계’에 몰고 올 파고는 예사롭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은 필자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대해선 관행에 비추어 좀 회의적이다. 과연 '파고'가 일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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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18 14:47   좋아요 0 | URL
'개념'에 대한 담론은 주관적 요소가 강하지요..

 

만두라면을 끓여먹으며 윤시내의 '공부합시다'를 듣고 있다. 거의 20년도 더 전의 노래 같다. 지금은 '추억의 가수'이지만 이 열정적인 '여자 조용필'은 가끔 뜬금없는 노래들을 부르기도 했는데('공연히'란 데뷔곡이 그랬듯이), '공부합시다'도 그런 종류이긴 하다. "안돼안돼 그러면 안돼안돼 그러면/ 낼모레면 시험기간이야 그러면 안돼!"란 노래를 들으며 학창시절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20년도 더 후에 이 노래를 찾아서 들어볼 거라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을 법하다. 다른 사연이 있는 게 아니라 신간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 2006)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문득 그 노래가 떠올랐을 뿐이다. 게다가 (낼모레가 아니라) 바로 오늘이 수능시험일이 아닌가?(덕분에 나는 집에 남아서 밀린 원고들을 쓰기로 했다.)

 

 

 

 

'점심시간'이란 핑계를 대고 잠시 공부에 관한 책들을 검색해봤는데, (악명높은)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부터 (수준높은) <몸으로 하는 공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과 비결, 그리고 즐거움이 소개돼 있다(참고로, 나의 '공부론'은 '공부냐 학습이냐'란 페이퍼를 참조). 이 중에서 내가 가장 먼저 읽고 싶은 책, 혹은 '공부에 지친 이들에게' 가장 먼저 권하는 싶은 책이 일단은 <장정일의 공부>이다(나는 그의 <독서일기>의 애독자였다). 이열치열이라고 공부에 지친 심신을 다스리는 데에는 '공부'만한 것이 없다(그러니 '열심히 공부하세!'). 더구나 장정일은 중졸 학력이 전부이다. 장정일식 공부가 (예비)고졸 수험생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경향신문(06. 11. 16) 모범생 변신 장정일 “이념대립 우리사회 알고싶어 공부”

“젊었을 때는 아웃사이더로 떠돌면서 ‘싫다!’고 외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요. 그러나 나이가 들면 사회의 구조와 배면(背面)을 살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 장정일씨(44)가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란 인문서를 냈다. 1995년부터 10여년에 걸쳐 쓴 ‘장정일의 독서일기’(전6권)를 통해 독서이력을 자랑하고, 지난해 KBS의 ‘TV, 책을 말하다’ 진행을 맡으면서 지성적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그다. 이번 ‘장정일의 공부’는 그동안의 독서를 바탕으로 2002년 이후 우리 사회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고 탐구한 지점을 23가지 주제로 나눠 정리했다.

“정치나 사회 이슈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2002년 대선 이후부터 우리 사회가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걸 보면서 한국사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구에 살던 그는 10권으로 된 ‘장정일 삼국지’를 쓰기 위해 한 건물에 작업실을 얻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옆방에서 건물주인 노인과 그의 친구들이 모여 두런두런 정치이야기를 하는 게 들렸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한국 현실에 대한 각자의 인식이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됐고, 그것이 ‘공부’로 이어졌다.

이 책은 양심적 병역 거부, 대학의 교양교육 저하, 민족주의 논쟁, 이념이 없는 정당정치, 레드콤플렉스, 미국 극우파에 대한 생각 등 다양한 현실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민주주의가 아닌 과두정으로 가고 있다는 것과 우리 사회의 과거사 청산이 바둑에 비유하자면 흰돌과 검은돌이 아닌, 파란돌을 놓는 방식으로 전혀 다른 기준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중심적인 고민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번 책에서 공부의 내용뿐 아니라 공부의 필요성도 함께 역설하고 있다.

“작가는 단지 언어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최상급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턱 없는 존경을 받지요. 그러나 시인이라면 그저 시가 좋아 시를 쓰는 사람일 뿐으로, 열정적인 우표수집가나 난이 좋아 난을 치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구 성서중 졸업이 최종 학력인 그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작가라는 이름에 씌워진 과대평가를 피하기 위해, 무엇보다 양비론이 판치는 우리 사회에서 확실히 알고 확실히 편들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90년대 ‘아담이 눈뜰 때’ ‘너에게 나를 보낸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등 일련의 문제작으로 기성사회와 문학에 대해 도발적으로 질문을 던지던 소설가 장정일은 사라졌다.

이에 대해 그는 “‘장정일 삼국지’를 쓰면서 더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역사·이론서로 방향을 틀었다”면서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또 자신의 공부는 60세에 ‘장정일의 독서일기’ 20권을 완간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소설이 큰 비중을 차지하던 이 독서일기의 목록이 많이 달라지겠다).

그렇다고 창작을 접은 건 아니다. 올 3월부터 소설가 하일지씨의 추천으로 동덕여대 문예창작과에서 희곡론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60세 이후 쓰려던 희곡집필을 앞당겨볼 생각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으로 등단했고, 95년 ‘긴여행’이란 희곡집도 냈다. 또 ‘장정일의 공부’를 쓰면서 파악한 우리 사회의 구조와 배면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우익청년의 일대기를 쓴다는 야심찬 계획도 갖고 있다.(한윤정 기자)

06. 11. 16.


 

 

 

P.S.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범우사에서 새로운 장정으로 지난 2003년부터 재출간됐는데, 나는 그 이전에 나온 판본으로 4권인가 5권까지 읽은 듯하다(기억에는 이후에 책값이 너무 뛰었다). 나머지는 겨울방학 때 도서관에서 한번 대출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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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을뭐라하지 2006-11-16 15:31   좋아요 0 | URL
ㅎㅎ 전 얼마 전에 헌책방에 들렀다가
[옛사람 59인의 공부 산책]이란 책을 구입했서 보았죠.
물론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뭐랄까, 공부하는 것에 대한 마음가짐을 다잡아준다고나 할까.

로쟈 2006-11-16 15:38   좋아요 0 | URL

이 책이군요. 사실, 공부가 '속'은 제일 편합니다. 공부만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가 어려울 따름이지요...


기인 2006-11-16 18:29   좋아요 0 | URL
아, 제가 부러워하는 인물 장정일. 그는 역시 또 변신 중이었군요. ㅎ
하일지라는 반가운 이름도 보이네요. 요즘은 뭐 하시는지.. 장정일과 하일지. :)

파란여우 2006-11-16 21:22   좋아요 0 | URL
장정일 독서일기중 1권의 표지가 가장 재밌죠. 오리가 뒤뚱뒤뚱 꽥꽥!
그러고 보니 칸트와 오리 너구리가 생각납니다만.
장정일의 열혈팬으로써 공부 당연히 사야죠!

로쟈 2006-11-16 21:30   좋아요 0 | URL

이 책이죠. 휴학하고 지방에 내려가 있던 시절에 처음 나온 듯합니다. 절반 이상은 제가 안 읽을 책들을 대신 읽어줘서 고맙기도 했죠.^^

 

지난주에 소개된 신간 소설들 가운데 눈길을 끈 건 폴란드 출신의 유태계 미국작가 저지 코진스키(1933-1991)의 문제작(이라는) <페인트로 얼룩진 새>(문예출판사, 2006)이다. 이미 번역된 <편력>(웅진출판, 1995) 등과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읽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미국문학 개론서나 일부 소설들에서 이름을 본 기억이 있어서가 아닌가 싶다(가령, 구효서의 <카프카를 읽는 밤>).

 

 

 

 

소개에 따르면,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 작가 저지 코진스키의 자전적 소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어린 소년의 이야기, 고통스럽고 잔인한 이야기이다. 1965년 처음 출간되어,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2차 세계대전이 낳은 가장 뛰어난 문학 작품'으로 꼽혀왔다."고 한다. 보다 자세한 건 아래의 리뷰 기사를 참조할 수 있다. 참고로 번역자는 안정효 선생이다.   

한국일보(06. 11. 11) '페인트로 얼룩진 새' 동족에게 온정을 기대하지 마!

동유럽의 어느 시골에는 마을 사람들이 새를 잡아다 깃털에 색칠을 한 다음 같은 새의 무리로 되돌려보내는 풍습이 있다. 알록달록하게 색칠된 새는 인간의 마수에서 벗어나 동료들의 애정과 보호를 기대하며 무리로 돌아가지만, 무리는 그 새를 낯선 적으로 착각해 집단공격을 가한다. 동족을 마구 공격해 찢어죽이는 새들. 이 잔혹한 장면을 즐기는 인간들의 놀이가 폴란드 출신 유태인 작가 저지 코진스키의 1965년 소설 <페인트로 얼룩진 새(The Painted Bird)>의 모티프다.

제2차 세계대전의 광풍은 유태인 학살로 고아가 된 여섯 살 소년을 동물로 키운다. 소설은 이 소년이 나치가 점령한 동유럽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인간과 동물 사이를 오가며 겪은 고통스런 성장의 기록이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목숨을 이어가는 소년은 가학적인 농민들에게 온갖 괴로움을 당하며 쫓기고, 갖은 노동에 착취당하며, 성적으로도 학대받는다.

살아남기 위해 기지와 재치, 거짓말과 술수를 익힐 수밖에 없다. “당하고만 살던 때는 지났다. 선의 신봉과, 기도와, 제단과, 성직자들과, 하느님의 힘은 나에게서 언어를 박탈했다.…이제 나는 악령의 도움을 받는 자들과 어울리기로 했다.”(236쪽) 동족으로부터 아무런 온정도 기대할 수 없는 이 가련한 ‘페인트 새’는 그렇게 삶의 본질을 터득해간다. 고작 열두 살 나이에.

이 소설을 제대로 읽으려면 작가에 대해 미리 알아두는 것이 요긴하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여섯 살에 고아가 된 그는 아홉 살 때 가혹한 농민 패거리에게 심한 벌을 받다가 충격으로 말하는 능력을 잃었다가, 종전 후 폴란드 고아원에서 병든 부모와 재회한 후에야 목소리를 되찾았다. 1957년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망명해 콜럼비아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후 철강 재벌의 미망인과 결혼해 자가용 비행기와 승무원만 17명인 개인 배를 소유하게 되는 등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가 꿈꾸다 끝내 누리지 못한 삶을 현실에서 살았다.

그러나 허풍과 과장, 거짓말과 포즈로 점철된 그의 생은 자살로 끝나고 만다. 인간관계의 유효기간은 2년을 넘지 못했고, 자전소설로 알려진 <페인트로 칠한 새>가 가져다 준 세계적 명성은 1982년 “코진스키의 작품 대부분이 영어권 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폴란드 원전의 표절”이라는 문화예술 주간지 <빌리지 보이스>의 폭로로 무너져 내렸다. 작가는 “한 번도 자전적 소설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항변했지만, <알록달록 때 묻은 언어(The Painted Words)>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코진스키의 삶 전체를 거짓말로 만들며 그에게 문학적 금치산 선고를 내렸다.

이제 이 소설은 불우했던 작가의 일대기가 아닌, 동유럽 민속설화를 차용해 사악하고 가혹한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의 존재조건을 상징한 비유로 읽힌다. 궁지에 몰려서야 더 넓은 독해의 자장을 갖게 된 작가는 불행한 걸까, 행복한 걸까.

1980년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는 이 책은 내용이 잔인한 데다 레닌을 찬양한 대목이 있다는 이유로 전두환 정권에 의해 삭제 및 배포 금지됐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완역됐다.(박선영 기자)

06. 11. 15.

P.S. 아래는 러시아어본의 표지이다. '페인트로 얼룩진 새'를 의역하자면 '동정 없는 세상'쯤이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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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15 20:12   좋아요 0 | URL
맙소사 이거 초등학교때 읽어었는데 그때는 무지개 빛 까마귀라고 나왔었지요 ^^

로쟈 2006-11-16 10:43   좋아요 0 | URL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좀 '냉혹한' 이야기였을 거 같은데요.^^
 

휴일이 저물어가려니까 머리가 무거워진다. 다음 학기부터는 가급적 월요일 강의를 맡지 않든지 해야겠다(그게 뜻대로 될 리 없지만). 더구나 내주엔 입시 한파도 몰아친다고 하지 않는가? 새로운 한주의 시작이 갑자기 끔찍해진다. 게다가 해야 할일들을 생각하니 나도 벤야민처럼 잠에서 깨어나지 말았으면 싶다. 그런 생각으로 잠시 뉴스나 훑어보다가 <닐스의 신기한 여행> 완간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번역분량이 전3권이니까 어린시절에 내가 읽은 건 반쪽짜리 정도였겠다(지금 딸아이가 읽는 그림책은 줄거리 정도일 테고). 반가운 마음에(이런 날은 어딘가로 날아가버리고 싶기도 하므로!) 읽어본다.  

오마이뉴스(06. 11. 11) 노벨문학상 수상 여성작가가 쓴 동화

'스웨덴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혹은, '여성작가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알려져 있는 셀마 라게를뢰프(1858-1940)의 빼어난 동화 <닐스의 신기한 여행>(배인섭 역·오즈북스 전3권)이 출간 100년을 맞아 한국에서 완역됐다.

기자 역시 어린 시절 그림 가득한 축약본으로 번역된 같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장난꾸러기 한 소년(닐스 홀게르손)이 손가락만큼 작아져 거위의 등을 타고 온갖 곳을 떠돌다가 결국은 착한 소년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땐 소년이 모험을 겪으며 머물고 떠나는 도시가 어느 나라에 붙어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고, 또한 그 작품을 쓴 사람이 교육자와 작가로서 전국민적 존경을 받았던 여성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사실 본격문학을 즐겨 읽는 사람들은 '동화작가'라면 한수 아래로 치부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좋은 동화 속에선 소설이나 시 이상의 감동과 만날 수 있고, 세계와 인간에 대한 비밀을 풀어가는 열쇠가 숨겨져 있다. 바로 이 <닐스의 신기한 여행>이 그렇다.

1858년 스웨덴 모르바카에서 태어난 셀마 라게를뢰프는 사범학교를 졸업한 교사였다. 하지만, 그녀에겐 또다른 꿈이 있었다. 바로 작가가 되는 것. 그녀가 서른 세 살 되던 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짬짬이 써낸 첫 소설 <예스타 베를링의 이야기>는 드라마틱한 비장미와 서정적인 문체로 스웨덴은 물론, 북유럽 문단을 놀라게 했다. 이후 1885년부터는 교직을 떠나 창작에만 전념했는데,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 쓴 <반그리스도의 기적>이 평론가와 독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녀에게 '스웨덴이 자랑할만한 작가'라는 호칭을 안겨준 작품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 머물며 쓴 1902년작 <예루살렘>.

이처럼 탄탄한 문장과 빼어난 감수성으로 사랑받던 라겔를뢰프에게 스웨덴 교육계가 한 가지 제의를 건넨다. "우리 아이들에게 조국의 아름다움과 자연, 풍속을 쉽게 알려줄 수 있도록 동화를 써보는 게 어떻겠는가?" <닐스의 신기한 여행>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태어났다. 그 부탁에 기꺼이 응한 그녀는 1906년 집필을 시작해 이듬해 흥미진진하면서도 교훈 가득한 이야기를 완성시켰고, 그 공로로 1909년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앞서도 말했지만, 여성작가 최초의 수상이었다.

스웨덴의 남부 스코네에서 시작해 북쪽 끝자락 라플란드까지 날아갔다 돌아오는 닐스와 기러기들의 여행에 동행하며 스산하지만 아름다운 북유럽의 풍광과 만난다는 것, 호수와 숲 속에서 숨쉬고 있는 동·식물과 함께 호흡한다는 것, 또한 신비로운 신화와 전설을 만난다는 건 근사한 경험이다. 비단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에게도 그렇다. 거위 모르텐, 우두머리 기러기 아카, 여우 스미레, 거위치기 소녀 오사와 그녀의 아우 마츠, 까마귀 비타키, 독수리 고르고 등 유년시절 기억 속 아득한 이름들을 불러내는 이 동화와 만나는 겨울이라면 춥지만은 않을 듯하다.(홍성식 기자)

 

 

 

 

기사를 접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좀 엉뚱하게도 <삐삐 롱스타킹>이다. <말광량이 삐삐>(1969)란 영화로 우리에겐 더 잘 알려진 작품인데, 나도 작품을 읽은 게 아니라 어릴 때 TV시리즈로 본 게 전부이다. 이 <삐삐 롱스타킹>을 다시 기억하게 된 건 요하힘 숄이 쓴 '클라시커 50' 시리즈의 <현대소설>(해냄, 2002)에서 <삐삐 롱스타킹>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과 함께 나란히 '베스트 50'에 선정되었기 때문이었다(이런 리스트를 만들 때 누가 <삐삐>까지 고려할 수 있었을까?).

<삐삐 롱스타킹>의 작가가 또한 스웨덴의 여성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이다. "북유럽 현대작가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여성 작가"라고 하니까 여성작가로서 라게를뢰프의 적통을 이은 게 아닌가 싶다(알라딘의 소개는 한술 더 뜬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어린이 독자를 가진 작가"!). 흔히 안데르센의 동화를 이야기하지만, 20세기에 오면 이 '닐스'와 '삐삐'의 산파 두 사람이 다 해먹는 게 아닌가 싶다.

<삐삐 롱스타킹>에 대한 요아힘 숄의 평가는 이렇다: "<삐삐 롱스타킹>은 20세기 후반에 어린이 교육을 개혁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다 큰 아이들도 삐삐처럼 매력적이고 자유분방하며 강해지고 싶어한다." 매력적이고 자유분방하며 강해진다? 어른이라고 해서 거부할 수 있는 사항들은 아닌 듯하다!

 

 

 

 

린드그렌 여사의 책들은 <삐삐> 시리즈 외에도 다수가 번역/소개돼 있다. 한데, 그 중에서도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건 '라스무스' 시리즈이다. 원래는 <라스무스와 방랑자>, <라스무스와 폰투스> 두 권인 듯한데, 내가 읽었던 건 한 소년소녀세계명작전집에 들어있던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였다(<라스무스>의 저자가 린드그렌이라는 건 이번에 알게 됐다).

<라스무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이 자유로운 방랑자가 맨발로 진흙탕을 지날 때 발가락 사이에 느껴지는 쾌감을 묘사한 대목이었다. 그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진흙'이 이후로 내겐 자유의 한 가지 표상이다. 한데 이젠 닐스처럼 거위의 등을 타고 날아가지도 라스무스처럼 맨발로 세상을 방랑하지도 못하는 처지로구나. 동화의 바깥 세상은 쌀쌀하다. 곧 겨울이 되리라. 다시 <성냥팔이소녀>나 읽어야겠다...

06.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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