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붙여놓으니까 무슨 이야기거리가 될 법도 하지만, '덧없는 행복'과 '섹스와 공포' 각각은 근간 예정인 책 제목들이다. 아침에 나오다가 우편함에 <문학과 사회>(2006 가을호)가 꽂혀 있길래 밥먹으러 갈 때마다 끼고 가서 여기저기 들춰보고 있는데(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에 대한 서평이다), 근간 소식을 전하는 문학과지성사측 광고란의 한 단락이 이렇다.

"'문지스펙트럼' 시리즈로 루소 사상의 현대성을 짚어보는 츠베탕 토도로프의 <덧없는 행복>(고봉만 옮김)이 역시 9월초에 나올 예정이다. 또한 파스칼 키냐르가 <은밀한 생>과 함께 2부작으로 집필한 에세이로, 기독교가 우리의 성(性)과 쾌락을 어떠한 방식으로 청교도적인 것으로 변모시켰는지를 고대 회화를 통해 이야기하는 <섹스와 공포>(송의경 옮김)가 오랜 번역 작업 끝에 10월경에 선보일 예정이다."

 

 

서지에 좀 밝은 독자라면 토도로프(1939- )의 <덧없는 행복>의 경우 이미 <환상문학서설>과 같이 묶여서 한국문화사에서 출간된 바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1996년에 초판이 나왔고 작년에 판을 다시 찍었기 때문에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다). 기억에는 영어(혹은 일어)에서 중역된 책이기 때문에 새로 깔끔한 번역이 나온다면 반가운 일이다. 영역본도 갖고 있는 김에 이번에는 읽어봐야겠다.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원작자라고 해서(그 탓인지 <세상의 모든 아침>은 가장 먼저 번역된 키냐르의 책이다) 눈길이 갔던 작가 파스칼 키냐르(1948- )의 책들은 '키냐르 전문번역가'로 나선 송의경씨의 수고 덕분에 우리말로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전공자에 따르면 키냐르는 '어려운' 작가군에 속한다). 그간에 <은밀한 생>(문학과지성사, 2001)만 사서 꽂아놓고 있었는데 이번에 <섹스와 공포>가 출간되면 나란히 읽어봄 직하겠다(*2007년 2월에 책이 나왔다!).

 

 

특별히 <섹스와 공포>를 거명하는 것은 주제에 대한 흥미 이전에 재작년에 나온 러시아어본을 내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러시어어본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미지로 띄운 건 좀 고급스러운 판본이고 내가 갖고 있는 건 클래식 문고본이다. 참고로 키냐르는 러시아에서도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다). 막심네 가게에서 샀던가? 그런 까닭에 잊고 지내던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10월이 오면 다시 만나게 될 친구...

 

참고로, 키냐르에 관한 약간의 전기적 사실을 옮겨오면, "1948년 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 태어났다. 두 차례의 자폐증을 앓았고, 20대에는 68혁명의 열기와 실존주의, 구조주의의 물결 속에서 엠마누엘 레비나스, 폴 리쾨르와 함께 철학을 공부했다." '함께'? '밑에서'가 아닐까? 3-40년의 나이차가 나는데 말이다.


"1969년에 <말 더듬는 존재 L'etre du balbutiement>를 출간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뱅센 대학과 사회과학 고등 연구원의 교수로 재직했으며,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과 함께 '베르사유 바로크 음악 페스티벌'을 창단하기도 했다. 1967년 갈리마르 출판사의 원고 심사 위원으로 발탁되고 1990년에는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집필 활동에만 전념하기 위해 94년 위원장직을 사임했다. 현재 파리에 살면서 작품을 쓰고 있다." 요컨대, 대표적인 '지성파' 작가에 속하겠다. 미셸 투르니에 같은...

 

06. 08. 24.

 

 

 

 

 

 

 

 

 

 

P.S. 주문받은 원고를 마감을 놓치고도 미적대다가 잘 안 풀린다는 이유로 잠시 머리를 식힌다. 키냐르 덕분에 떠올리게 된 건 오래전에 본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1991)인데(제라르 드파르디유 부자가 출연했었다), 마지막 대사가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였던가?(시인 유하는 이를 패러디한 <세상의 모든 저녁>을 시집으로 내기도 했다.) 오늘도 두 지인의 초상 소식을 접했는데, 오늘 세상을 뜨신 분들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아침'이 한갓 꿈이런가 하겠다. 덧없는 행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P.S.2. <섹스와 공포>(문학과지성사, 2007)의 국역본이 드디어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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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출간되 교양과학서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책은 데이비드 베인브리지의 (고즈윈, 2006)이었다. 남성(XY)과 여성(XX) 모두에 들어있는, 그러니까 실상은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성염색체가 바로 X인 것이니 남의 관심사로 미뤄둘 수 없는 거 아닌가? 아직 아무런 리뷰도 링크돼 있지 않은 듯하여, 두어 개의 리뷰 기사를 옮겨온다.

한국일보(06. 08. 19) 남과 여, 염색체 하나 다를 뿐인데… X염색체의 비밀

-1890년, 독일의 헤르만 헨킹은 현미경을 유심히 들여다보다 특이한 것을 발견한다. 별박이노린재라는 곤충의 정소에서 추출한 염색체였다. 정소는 다음 세대를 창조할 정자를 만들기 위해 세포분열이 일어나는 장소. 세포는 두 번의 연속 과정을 거친 분열을 통해 정자를 만드는데, 이때 정확한 지침대로 움직이고 과정 내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당시 헨킹은 그 과정에 참가하지 않은 채 한쪽에 조용히 비켜서 있는 염색체를 발견한다. 훗날 그가 X염색체라 이름 붙인 것이다.

-그는 이 염색체를 ‘여분의’(extra) 염색체라는 뜻에서 X염색체라 불렀는데 나중에 생명공학이 발달하면서 이것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바탕임이 밝혀졌다. ‘X염색체의 비밀’은 제목대로 여러 유전적 형질을 전달하는 X염색체의 비밀을 규명하는 책이다. 저자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임상해부학자이자 강사(*한 서평자 왈: "베인브리지는 스티븐 제이 굴드, 리처드 도킨스, 매트 리들리에 견주어 전혀 손색이 없다. 그는 놀라운 속도로 독자들을 X염색체의 영광으로 초대한다." A급이란 얘기이다).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우리는 부모로부터 X염색체와 Y염색체를 물려받아 XX여성 혹은 XY남성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다면 X염색체가 하나인 남성과 둘 인 여성은 어떤 차이를 보이게 될까. 무엇보다도 남성은 유전적 질병에 잘 걸린다. X염색체는 응고인자 8번 또는 9번 단백질을 만드는 정보를 갖고 있는데 남성은 만약 그것이 손상되면, 과다출혈로 죽음에 이르는 혈우병에 걸리게 된다. 힘없이 주저앉는 근이영양증이나 색맹도 마찬가지다. 반면 여성은 X염색체가 둘 이어서 하나만 정상이어도 끔찍한 유전적 질병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여성은 자가면역성 질환에 훨씬 잘 걸린다. 다발성 경화증은 남성의 두 배, 남창은 열 배나 되는 등 자가면역성 질환 환자의 80%가 여성이다. 그 배경에 두 개의 X염색체가 연관돼 있다. 저자는 이런 과학적 사실을 사회적 가치 부여에 이용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남성과 여성은 상반되지도, 대항적이지도 않다. 단지 여러 면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서로 다를 뿐이다.”(박광희 기자)

중앙일보(06. 08. 19) 볼셰비키 혁명 속에도 X염색체가 숨어 있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문명이란 관점에서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생물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다른 종과 별 차이가 없는 하나의 포유동물일 뿐이다. 특히 수정란 상태에서 남녀의 성(性)을 결정하는 아주 성(聖)스러운 과정에서 인간은 다른 포유류와 똑같이 X와 Y의 두 염색체를 이용한다. 즉, X염색체끼리 한 쌍을 이룬 XX의 수정란은 여성이 되고 X염색체와 Y염색체가 쌍을 이룬 XY는 남성이 된다.

-그런데 이질적인 조합인 XY 염색체를 가진 남성은 단 한 종류뿐인 X 염색체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 달리 이를 대체하거나 수리할 '부품'이 없어 유전병을 고스란히 앓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XX 염색체를 가진 여성은 또 다른 X염색체가 있어 그런 병을 비켜갈 수 있다. 혈액응고가 제대로 되지 않아 과다출혈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혈우병이나 색맹 등이 남성에게만 생기는 이유다. 이 때문에 인류사에는 갖은 굴곡이 나타났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자손들이 앓던 혈우병이 러시아.독일.스페인의 왕가로 퍼진 이야기가 좋은 예다. 빅토리아의 딸인 알렉산드리나는 할아버지의 손상된 X 유전자를 물려받아 아들인 러시아 황태자 알렉시스에게 혈우병을 안겨준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 비극은 로마노프 황가의 통치 태만과 무기력으로 이어지며 결국 볼셰비키 혁명을 부른다. 스페인 왕가도 혈우병으로 타격을 입어 국가가 내전으로 가는 상황에서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성캐서린 대학의 임상해부학자인 지은이는 X염색체를 주인공으로 과학과 역사, 그리고 남녀의 문제라는 거대한 드라마를 그려 나간다. 헤르만 헨킹이 1890년 X염색체를 발견한 뒤 이를 남아도는 염색체로 보고 여분(extra)을 뜻하는 X라는 이름을 붙였다든가, 태평양의 작은 섬 핀지랩의 주민 대부분이 색맹이 된 까닭, 할머니가 할아버지보다 류머티즘성 관절염에 잘 걸리는 이유, 일란성 쌍둥이는 왜 여자가 더 많은지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우리 삶의 비밀을 들여다 본 지은이의 결론은 간단하다. 남녀의 서로 다른 염색체 배열은 다른 생물학적 기능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아이를 보다 더 잘 낳고 자신들의 유전적 특질을 계속 물려주기 위해 진화, 발달해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Y염색체는 우리의 성별(性別)을 결정하고 성 정체성을 부여하지만 X염색체는 수천 가지의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조절한다고 한다.

-즉 생물학적으로 남녀의 유전자는 서로 다를 뿐 우열은 없으며, 남녀는 서로 상반되지도 대항적이지도 않은 동반자 관계라는 게 지은이의 강조점이다. 재미와 정보가 잘 버무려진, 그러면서 생각거리가 있는 교양서를 찾는 이들에게 권한다.(채인택 기자)

동아일보(06. 08. 19) 인간생존의 비결 X파일…‘X염색체의 비밀’

-남자들은 혈우병-근이양증-색맹과 같은 유전병이 많다는데 왜? 여성보다 생존능력이 떨어진다는데 왜? 그것은 X염색체를 하나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염색체는 희한한 구조의 한 쌍이다. Y염색체는 성별을 결정하는 한 가지 사명에 매달리지만 X염색체는 수천 가지 방식으로 우리 삶을 조절한다(*아래는 서간체 서평이다. 요즘은 서평도 좀 튀어야 하니까).

-나의 전남편 ‘Y’에게.

-안녕, 땅딸보. 저예요, ‘X’. 당신의 전 부인(ex-wife).

요즘도 그렇게 숨어서 은둔의 세월을 보내고 있나요. 당신은 내게 진저리를 치겠지만 우리가 3억 년 전 이미 이혼했다는 사실이 대중에게 공포되기에 이르렀음을 알려 주기 위해 펜을 들었어요. 1890년 독일의 생물학자인 헤르만 헨킹이 나를 최초로 발견했을 때 내 이름을 X로 지어준 것이 내가 당신의 전 부인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서가 아니라는 것은 당신도 잘 알겠죠. 헨킹은 별박이노린재라는 곤충의 정소에서 정자가 만들어지는 과정 중 다른 염색체들은 모두 둘로 분리되는 춤을 추는 동안, 묵묵히 한쪽에 서 있는 나를 보고 남아도는 ‘여분의(extra)’ 염색체라는 의미에서 X라고 이름을 지었잖아요. 무도회장에서 남자들에게 춤 신청도 못 받는 여성을 뜻하는 ‘벽의 꽃(wall-flower)’이라는 모욕적 별명까지 내게 붙은 것을 알고 당신이 폭소를 터뜨렸다지요.

-하지만 그건 내 책임이 아니에요. 아담의 갈비뼈에서 이브가 생겼다는 성경 말씀이나, 남근이 없는 여자 아이가 좌절감 때문에 남근을 선망하게 된다는 프로이트의 남성 우월적 주장과 맞아떨어져 생긴 오해니까요. 거기에는 당신의 책임도 있잖아요. 1905년 미국의 생물학자 네티 스티븐스가 쌀벌레의 정자에 숨어 있던 당신을 발견한 뒤 당신의 몸에 새겨진 ‘SRY’(태아의 생식샘을 고환으로 전환시키는 유전자)라는 문신이 남녀의 성별을 결정하는 유전자로 밝혀지면서 다소곳하고 수동적인 X염색체, 활발하고 능동적인 Y염색체의 신화가 생겨났으니까요.

-물론 아들을 낳지 못하는 책임은, 세포마다 X가 두 개씩 있는 여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X와 Y를 짝으로 지닌 남자에게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남아선호 문화를 지닌 국가에서 무고하게 희생당하던 여성들을 구제해 주기는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관계는 기존에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라는 점이 드러나고 있어요. 성과 관련된 일부 유전정보를 제외하면 당신은 손상된 유전자 조각으로 가득한 쓰레기장이고, 나야말로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 정보가 가득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으니까요.

-남성들이 혈우병, 근이양증, 색맹과 같은 유전병에 취약하고 여성보다 생존력이 떨어지는 이유가 내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란 것도 이미 알려졌지요. 인간의 유전자 중 가장 덩치가 큰 디스트로핀이라는 슈퍼 유전자를 운반하는 것도 저라는 것이 밝혀졌고요. 반면 당신은 다른 염색체들보다 작고 못생겼을 뿐 아니라 의사소통 능력도 떨어지는 ‘염색체계의 왕따’라는 점이 들통 났지요. 심지어 두더지 들쥐와 같은 동물들은 아예 당신을 자신의 세포에서 제거해 버렸다는 비참한 사실까지 밝혀졌어요. 그들에게 당신의 존재는 그만큼 부담스러웠던 거지요.

-사람들은 당신의 능력은 성별을 결정짓는 한 가지밖에 없지만 나의 능력은 생존을 결정짓는 수천 가지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문제는 우리의 이런 역할 분담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이 우리가 실은 오래전에 이혼한 사이라는 비밀까지 파고들고 있다는 점이에요. 다른 염색체들처럼 평범한 커플로 시작한 우리가 오래전 파경에 이르렀음이 밝혀진 거죠. 우리는 다른 염색체 커플과 달리 이미 오래전부터 의사소통도 어려운 남남이 됐잖아요.

 

 

 



-몇 년 전 맷 리들리라는 사람은 <게놈-23장에 담긴 인간의 자서전>이란 책을 통해 당신이 나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거나 속임수를 써 당신의 유전정보를 발현시키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고 폭로했지요. 이제 우리 관계가 그 말 많고 멍청한 할리우드까지 퍼졌나 봐요. 슈퍼 여성을 사귀다 배반한 평범한 남자의 처절한 봉변을 그린 <겁나는 여친의 완벽한 비밀(My Super Ex-Girlfriend)>이라는 영화까지 만들어졌다니까요.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 내 눈치를 보고 있을 당신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지만 그 알량한 자존심에 큰 상처 입지 말고 꿋꿋하게 살아가기를 옛정을 생각해 기원합니다.

-지금도 세속적 평가보다는 진실한 사랑을 믿는 당신의 전 부인 ‘X’로부터.(권재현 기자)

06. 08. 21.

P.S. 이 페이퍼를 포함하여 언론 리뷰를 옮겨온 '프리뷰' 카테고리의 페이퍼들은 일주일 후에 모두 비공개로 전환할 예정이다. 저자권 침해 예방에 동참해 달라는 알라딘측의 권고에 따른 것이며, 그간에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의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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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불문학자 정명환 선생의 신간이 출간됐다. <현대의 위기와 인간>(민음사, 2006)이 그것인데, 아직 실물은 보지 못하고 '새로나온 책'에서 책소개만을 읽었다. 다행히도 한국일보에 자세한 리뷰가 올라와 있어서 옮겨놓는다. 개인적으론 (박이문 선생과 함께) 정명환 선생에게서 나는 (대학시절의 영웅이었던) 사르트르의 문학론과 철학에 대해 배웠다. 그러니 내가 알고 이해하는 사르트르는 그 두 사람의 사르트르이기도 하다. 이 원로 학자의 노작은 그 듬직한 무게와 은은한 성찰의 향기로 이번에도 우리를 격려하고 매혹시켜줄 듯하다.

-전화 통화에서 저자는, 불을 뿜는 베수비오 화산으로 교대근무를 떠나며 ‘이것이 나의 명예’라고 말했다는 한 로마 병사의 ‘의연한 체념’을 이야기했다. “그 정신이야말로 물화ㆍ속화해야만 살 수 있는 이 현실 속의 사회적 자아와, 인간적 가치 초월적 가치를 찾아가는 내면의 자아를 함께 지탱하는 힘의 바탕일 것”이라 말했다.

한국일보(06. 08. 12) 현대의 위기와 인간… '체념과 희망' 자아의 모순을 견뎌라

-원로 인문학자 정명환(77ㆍ전 서울대 불문과 교수) 선생의 책 <현대의 위기와 인간>(민음사, 2006)은, 그 자체로 한국 인문학이 도달한 아득한 성취라 해도 좋을 것이다. 책 속에 녹여낸 지식(철학과 문학)의 폭과 깊이 때문이 아니라 그 지식을 저민 문장의 격조가 그렇다는 것이고, 단아하고 지적인 문장을 통해 은근히 드러내는 높고 원숙한 정신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는 책에서 물질문명의 악력과 거기 묶여 신음하는 인간 정신에 대한 ‘의연한 체념’(현실주의자의 소극적 체념이 아닌)과, '가냘픈 희망'(관념주의자의 이상론이나 당위론이 아닌)의 방법론을 전한다. 그 논의의 출발점이자 토대라 할 현대 위기의 실체를 그는 노동의 현실에서 찾으며 생텍쥐페리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파일럿이었던 생텍쥐페리는 1920년대 항공기 조종은 “엄청난 장애물과 대치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위대성을 발견하고 자기 실현을 이루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의 대지>를 출간하던 39년의 그는 이미 실험실에 갇혀버렸다고 자탄한다. “이제 바늘의 움직임에 복종하는 것이지 천지의 변화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21세기의 기계화ㆍ획일화의 노동 현실에서 “창조, 인간의 존엄성, 연대의식, 죽음의 의미, 자연과 투쟁과 교감 따위의 가치”를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적었다.

-저자는, 이 로봇 테크놀러지의 시대가 여가마저 노동의 논리 속에 포섭해, “여가가 노동의 원활한 운영을 방해하지 않도록” 강제한다고 썼다. 현대인의 여가의 공통성은 “수동성에 의해서건(TV연속극을 보는 경우), 열광에 의해서건(가령 광란적 음악 속에 빠져드는 경우) 간에, 인간의 존재에 관한 귀찮은 반성이 들어앉을 내면적 공간을 소거하는 데 있다.”(22쪽)

-이 현실에서 예술이 존중 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왜냐하면 예술은 지배 계급의 존재를 위한 필수 조건인 인간소외에 항거하는 초월과 새로운 시각과 이의제기를 그 본질적 기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28쪽) 그는 이 아이러니의 참혹한 현실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핀다.

-경제적ㆍ기술적ㆍ문화적 세계화와 동질화(미국화), 기능적 언어의 위세 앞에 왜소해져 가는 예술적 언어의 고뇌, 진실을 둘러싼 철학과 문학의 알력 등…. 그러면서 그는 개인ㆍ국가의 생존전략, 곧 기계화한 노동 메커니즘의 수용이나 세계화 추세에의 편승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수긍한다. 요컨대 ‘의연한 체념’이다.

-하지만 그는 체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호소한다. 그 어쩔 수 없는 사회적 자아를 응시하면서, 반성하는 주체적 자아ㆍ내면의 자아를 지켜나가자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이중적 자아를 지니자고 고언한다. 그 모순의 상황을 견디고, 그 위에서 희망을 찾자고, 그 힘든 삶에 문학이 힘을 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매력은 저자의 전언 자체보다, 당대의 사상가와 작가들을 비평적으로 살피면서 그 전언을 끌어가는 과정에 있다. 이 우람한 노 학자는 절망의 현실 앞에서도 의연하고, 실낱 같은 희망 앞에서도 여유롭다. 문장의 힘이고 인문학과 인문학 정신의 힘이며, 문학의 힘이다.(최윤필 기자)

 

 

 

 

06. 08. 12.

P.S. 경향신문의 인터뷰 기사를 보태놓는다.

경향신문(06. 08. 19) “이미 주체성 상실 의연한 체념 필요”

-“현대인은 공적 자아(public self)와 사적 자아(private self)라는 모순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순을 지니고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원로 인문학자 정명환 전 가톨릭대 교수(77)는 최근 펴낸 <현대의 위기와 인간>(민음사)에서 현대 사회와 인간의 위기를 진단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가 보기에 “1980년 전후로부터 전개된 현실은 르네상스 이후로 처음 경험하게 된 대격변”이다. 그는 “이성의 힘과 인간의 주체성, 그리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이 송두리째 무너졌다”고 설명했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조직화·기계화되면서 주체성을 상실했다. 문제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다스리려면 사회에서 소외된다는 것. “길을 가다가 가만히 서서 왜 가는지 생각하다간 뒤에서 밀려오는 사람에게 짓밟힙니다. 자신에게 소외되지 않으려면 사회에서 소외되고,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면 자신에게 소외되는 모순이 생겨요.”

-그러나 그는 현대 사회가 문제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 생의 여건인 것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 상황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는 것. 여기서 그는 ‘의연한 체념’이라는 개념을 끌어낸다. “어찌할 수 없다고 체념해야 하지만 시지프스처럼 돌을 산꼭대기에 밀어올리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건지 모르지만 그 끝을 모르기 때문에 해야 합니다.”

-이는 책에 제시되고 있는 인문학자의 네 가지 태도, 즉 ‘자진적 고립’ ‘환상 없는 도덕적 관심’ ‘역사적 내기’ ‘제한된 참여’에 가닿는다. 노(老)학자는 노동과 여가의 관계에서도 현대의 위기를 읽어낸다. 옛 사람들에게 ‘주경(晝耕)’과 ‘야독(夜讀)’은 연속성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노동과 여가를 통한 자아 회복은 모순된다. 여가는 “인간의 기계적 조작과 소외에 이바지하도록 소비”된다. 거기에는 “인간의 존재에 관한 귀찮은 반성이 들어앉을 내면적 공간”은 없다. “요즈음은 모두 즉각적이고 짜릿한 걸 원하고 생각하길 귀찮아 합니다. 파스칼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은 농담이 됐어요.”

-오늘날 대학 사회에 ‘변종’이 없다는 지적도 잇따랐다. “사회의 관례에 발맞추고 시류를 타려고”하고 “모두 규격화(Standardize)돼 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우리 사회는 너무 비이성적입니다. 이성으로 갈 때까지 가보지 않고 처음부터 비이성적으로 반응하는 건 문제가 있어요.” 그는 현 정부에 대해서도 “세계를 향해 닫으려고만 해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E.H. 카는 훌륭한 사회는 자전거와 같다고 했습니다. 한쪽으로 쏠리려면 반대쪽으로 움직여 균형을 잡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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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1926-1956)의 전집이 타계 50주년을 맞아 출간됐다.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예옥, 2006). 오늘자 한겨례의 관련기사들을 읽고 알게 된 것인데, 한국일보의 기사와 함께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6. 08. 12) 센티멘털한 '댄대 보이'는 어데로 갔나 "박인환의 재발견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1926~56)의 문학 전집이 발간됐다. 근현대사 자료 수집가인 문승욱 씨가 타계 50주년을 맞는 시인의 생일(8월 15일)에 맞춰 묶어낸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기존에 출판된 선집 등에는 한 번도 수록된 적 없는 ‘재발굴시’ 7편과 산문 41편이 더해진, 명실상부한 첫 전집이다.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으로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박인환(1926~1956)은 김수영과 함께 1950년대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 수려한 외모와 낭만적 시풍으로 ‘명동백작’, ‘댄디 보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과도한 감상과 허영의 포즈로 인해 김수영의 그늘에 가려진 채 문학사의 괄시를 받아 왔다. 대중의 사랑과 문단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제대로 된 전집 하나 갖지 못 한 시인의 불운은 문우 김수영마저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다”고 경멸했던, 그 과도한 센티멘털리즘에 기인한다.

-이번에 발간된 전집에는 시 80편, 산문 70편 등 총 150편의 작품이 수록됐다. 특히 새로 발간된 전집에는 ‘언덕’, ‘1950년의 만가’, ‘봄은 왔노라’, ‘봄 이야기’, ‘주말’, ‘3ㆍ1절의 노래’, ‘인제’ 등 시 7편과 신문과 잡지 등에 발표한 산문 44편 을 포함, 기존 선집 등에 수록된 적 없는 작품이 새로 발굴ㆍ수록됐다. 1986년 문학세계사에서 <박인환 전집>이 나온 적 있지만 그것은 시를 위주로 해 산문 몇 편을 덧붙인, 사실상 선집의 형태였다(*내가 읽었던 전집이 이 문학세계사판이었던 것으로 기덕된다. 문학평론가 이동하의 평전이 아주 유익했던).

-전집은 무엇보다도 ‘감상적 댄디’의 이미지로 점철된 박인환에 대해 균형 잡힌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반제국주의와 자본주의 비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는 그의 시 몇 편과 영화 비평 등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이야기”하는 철 없는 댄디에서 ‘다면적 문화 비평가이자 문명 비평가’로 그의 위상을 새로이 교정하게 한다(*철없는 댄디의 이면에 다면적 문명비평가의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댄디즘에 대한 지나치게 협소한 이해이다).

-방민호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새로 발견, 정리된 시와 산문들의 총목록에 비춰 보면 박인환에 대한 기존 평가는 너무 인색했다”며 “비평적 성격이 강한 일련의 글들과 칼럼 및 잡문 등에 이르는 그의 글쓰기의 다채로움은 김수영이라는 이름에 의해 쉽게 가리어질 수 없는 산문가 박인환의 넓이를 보여 준다”고 평가했다(*새로 발견/수록된 박인환의 산문들을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포즈와 겉멋으로서의 '문명비판' 혹은 '자본주의 비판'도 당시에는 유행이지 않았나?).

-흥미롭게도, 이번 전집을 묶는 과정에서 시 ‘센티멘탈 저니’(1954년 월간 ‘신태양’)에 붙어 있던 ‘수영(洙暎)에게’라는 헌사가 1년 뒤 출간된 박인환의 ‘선시집’에선 종적을 감춘 사실도 확인됐다. 자신에게 폭언을 퍼부었던 김수영과 끝내 문우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한 박인환의 속내가 읽히는 50년대 문단의 한 풍경이다(*박인환이냐, 김수영이냐?). 

<1950년대의 만가>

불안한 언덕 위에로
나는 바람에 날려간다
헤아릴 수 없는 참혹한 기억 속으로
나는 죽어간다
아 행복에서 차단된
지폐처럼 더럽힌 여름의 호반
석양처럼 타올랐던 나의 욕망과
예절 있는 숙녀들은 어데로 갔나
불안한 언덕에서
나는 음영처럼 쓰러져간다
무거운 고뇌에서 단순으로
나는 죽어간다
지금은 망각의 시간
서로 위기의 인식과 우애를 나누었던
아름다운 연대年代를 회상하면서
나는 하나의 모멸의 개념처럼 죽어간다
(1950년 5월 16일, 경향신문)

한겨레(06. 08. 11) ‘시인은 가도 작품은 남는 것’ 박인환 전집 처음 나왔다

-<목마와 숙녀>와 <세월이 가면>의 시인 박인환의 시와 산문을 한데 모은 전집이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책 수집가 문승묵(50)씨가 엮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예옥)이 그것이다. 박인환은 1926년 8월 15일에 태어나 서른 살인 56년 3월 20일에 타계한 시인. 올해는 그의 탄생 80돌이자 서거 50주기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시의 대중적 인기와 그가 차지하는 문단사적 비중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은 제대로 된 박인환 전집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86년에 <박인환 전집>(문학세계사)이라는 이름의 책이 나왔지만 시를 위주로 하고 산문 몇 편을 덧붙인 ‘선집’ 성격의 책이었다. <목마와 숙녀>(근역서재, 1976) <세월이 가면>(근역서재, 1982) <한국대표시인 101인 선집 - 박인환>(문학사상사, 2005) 등 박인환의 작품집으로 간행된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시 80편과 산문 67편이 수습된 이번 전집에서는 기존의 책들에는 묶이지 않은 ‘발굴성’ 시 7편이 더해졌으며, 산문도 40여 편이 새 얼굴이다. 미확인 작품을 최소화한 명실상부한 ‘전집’이 출현하면서 박인환의 문학 세계에 대한 총체적이면서도 균형 잡힌 평가가 비로소 가능해지게 되었다.

-그동안 박인환은 포즈와 엄살로 무장한 ‘감상적 댄디’ 정도로 평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목마와 숙녀>와 <세월이 가면>이라는,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시 두 편이 그런 선입견 형성에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다행히 최근 들어서는 그의 현실 비판 및 반제국주의적 시편들을 근거로 그를 사실주의의 관점에서 재평가하는 논의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미군정기에 씌어진 <인천항>과 <남풍>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등에서 들리는 반제국주의적 목소리, 그리고 <자본가에게>와 같은 시에서 보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날선 비판은 박인환의 ‘낯선’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이전 시집들에도 실려 있던 시편들 아닌가?).

-“밤이 가까울수록/ 성조기가 퍼덕이는 숙사와/ 주둔소의 네온사인은 붉고/ 정크의 불빛은 푸르며/ 마치 유니언잭이 날리던/ 식민지 향항의 야경을 닮아간다// 조선의 해항 인천의 부두가/ 중일전쟁 때 일본이 지배했던/상해의 밤을 소리 없이 닮아간다”(<인천항> 부분)

“나는 너희들의 마니페스토의 결함을 지적한다/ 그리고 모든 자본이 붕괴한 다음/ 태풍처럼 너희들을 휩쓸어갈/ 위험성이/ 태풍처럼 가까워진다는 것도”(시 <자본가에게> 부분)

-새롭게 발굴되어 이번 전집에 처음으로 실린 시들 중에서는 <1950년의 만가>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전쟁이 터지기 불과 한 달여 전인 1950년 5월 16일치 <경향신문>에 발표된 이 작품은 “불안한 언덕 위에로/ 나는 바람에 날려간다/ 헤아릴 수 없는 참혹한 기억 속으로/ 나는 죽어간다/ (…)/ 지금은 망각의 시간/ 서로 위기의 인식과 우애를 나누었던/ 아름다운 연대를 회상하면서/ 나는 하나의 모멸의 개념처럼 죽어간다”고 하여 마치 미구에 닥쳐올 동란을 예견이라도 하는 듯하다(*하지만 그러한 '예견'이전에 수준이 좀 떨어지는 시 아닌가?).

-한편 평론가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씨는 전집 뒤에 붙인 해설에서 10여 편의 문학평론과 20편이 넘는 영화평론, 기타 연극 및 사진평론 분야 글의 분량과 수준에 주목하면서 평론가로서의 박인환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했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6. 08. 11.

P.S. 우리 시문학의 유산을 정리한다는 의미에서도 전집 출간은 의미있는 것이지만, '박인환의 재발견' 운운은 다소 호들갑스러워 보인다. '감상적 댄디'란 이미지를 각인시켜준 시편들이 사실 박인환의 가장 좋은 작품들이다. 시상의 전개가 빈약하지만 부분적으론 절창이며 또 가장 박인환다운 작품들이기에 그렇다. 프로파간다의 언어로 씌어진 '문명비판'(이 또한 댄디적 요소이다) 가지고 '재발견'을 논한다는 것은 오히려 고인을 욕되게 하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지금은 망각의 시간/ 서로 위기의 인식과 우애를 나누었던/ 아름다운 연대를 회상하면서/ 나는 하나의 모멸의 개념처럼 죽어간다” 같은 시구는 그냥 아마추어리즘에 속한다. 그러니 "그는 비록 감상적이고 댄디적인 시들도 썼지만-"이 아니다. 우리시사에 그만한 댄디가 없었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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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6-08-11 20:13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마지막 덧붙임에 공감...공감...

시에는 무뇌한^^이지만 "목마와 숙녀" "마로니에" 등은 사춘기 소녀시절 책받침이나 연습장 표지 등등에서 접하고 감동했던 기억이...

댄디즘이니 센티멘털리즘이니...뭐 그런건 잘 모르겠지만...목마와 숙녀는...뭔가 이국적이고 신비스럽고...거의 초현실적인 어떤 세계로 인도해줄것같은 설레임을 주는 시인듯...

문학비평은 제게는 시보다도 더 낯선 세계인데...로쟈님 글을 보니...상당히 경직되어있는 세계인듯 합니다.

마지막 구절이 압권입니다.

"우리시사에 그만한 댄디가 없었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하다..."

로쟈 2006-08-11 23:40   좋아요 0 | URL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가장 옷 잘 입고 미남이었던 시인으로 기억되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것 아닐까요? 거기에 무슨 '의식있는' 시인이었다고 포장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기자들이 작가의 초상에 간혹 개칠하는 경우가 있는 듯하여 불평해 보았습니다...
 

<괴테 자서전>(우물이있는집, 2006)이 출간된다고 한다. 이관우 교수의 노작이다. 원제가 <시와 진실>인 이 자서전은 연초에 윤용호 교수에 완역본이 출간된 바 있어서 다소 뜻밖이긴 한데, 아마도 각각 독자적으로 번역을 진행한 듯하다. 분량이 각각 830쪽(윤용호판)과 1116쪽(이관우판)이다. 아직 두 권 다 갖고 있지 않아서(내가 갖고 있는 건 예전에 혜원출판사에서 나온 축약본이다) 어느 번역본이 더 나은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역자의 노고만큼은 대등할 듯싶다. <괴테 자서전>에 대한 서평은 아직 올라와 있지 않기에 알라딘의 소개를 잠시 옮겨오며, 윤용호 교수 역 <시와 진실>에 대해선 리뷰 기사 두 편을 옮겨놓는다. 분량상 읽을 시간을 내기가 만만찮지만 소장용 도서 정도로 일단 간주하면 되겠다.

-<괴테 자서전>(독일어판 제목 <내 생애에서: 시와 진실>)의 완역본이 고급 양장본으로 출간되었다. 문학에 대한 괴테의 열정과 노력뿐만 아니라, 그가 성장하면서 품었던 종교, 사상, 과학 등에 대한 방대한 관심과 회의, 철저한 고민이 드러나 있는 책이다. 한 천재 문학가의 전인적인 '교양'이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괴테 자서전>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루소의 <고백록>, 안데르센의 <내 생애의 이야기>, 크로포트킨의 <한 혁명가의 회상>과 더불어 세계 5대 자서전으로 꼽힌다.

 

 

 



-괴테를 안다는 것은 18세기의 유럽문화를 읽는 것과 같다. 괴테는 어린 시절 겪은 7년전쟁으로 인한 시야의 확대, 화려하기 그지없는 요제프 2세의 대관식, 경건파를 통한 열렬한 종교적 체험 등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당시의 풍속을 엿보게 해준다. 또한 수많은 추종자와 모방작을 탄생시킨 대표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작품이 발표될 당시의 시대의 움직임을 파악하게 한다.

-루소, 하만, 셰익스피어라는 쟁쟁한 작가들에게서 받은 영향, 그리고 하만의 제자인 헤르더와의 교류를 통해 괴테가 질풍노도운동을 이끌게 된 과정도 상세히 기술돼 있다. 질풍노도운동의 태동과 전개 과정은 당시 젊은이들이 어떤 것에 환멸을 느꼈고, 어떻게 합리주의 계몽 숭배를 뒤엎고 탈출하고자 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괴테 전집의 결정판으로 불리는 함부르크판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3년 여의 번역과 편집 작업을 거쳤으며, 그간 우리나라에서 중역되어 나오거나, 부실한 판본을 번역하면서 생긴 오류들을 바로잡았다. 표지는 가죽과 종이로 제작하였고, 커버 양쪽에는 자석을 붙였다. 

한국일보(06. 01. 18) 젊은 괴테는 슬펐을까?

-대 문호 괴테(1749~1832)의 자서전(혹은 자전적 소설) <시와 진실>이 고려대 윤용호 교수에 의해 완역됐다. 기왕의 판본이 없지는 않으나 일어판 중역본이거나 중략본이었고, 그나마도 절판 상태였다. 환갑의 괴테(1809년 집필)는 이 책에서 자신의 출생과 청년시절을 대화체 등을 써가며 소설적 기법으로 요약했다. 정확히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마인 강변에서 태어나서 바이마르공국으로 이주하기까지의 26년간(~1775년)이다.



 

 

 

-이 시점은 법조인으로 양육돼 고향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지만 단 한 건의 수임 실적도 올리지 못하던 청년 괴테가 <젋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일약 스타 작가로 부상하면서 유년의 꿈이던 문학으로 인생 항로를 되잡던 시기이며, 외가의 전통을 이어 정치가로서의 야심을 막 펼치려던 때였다(*<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올해만 6종의 번역본이 새로 더 나왔다. 카피본도 적지 않을 듯한데, 번역 비판이 시급하게 요청되는 책 중의 하나이다).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기까지의 ‘괴테 인생1기’의 기록이자, 지식인으로서 그가 이룩한 웅장한 이력의 뿌리를 드러낸 내면의 고백인 셈이다. 책의 분량은 무려 819쪽에 이른다.

-26살에 초고본 집필을 시작해 82세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다듬었던 역작 <파우스트>가 그의 유년시절 본 인형극이 모태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책에는 어린 괴테를 매료시켰던 그 인형극 이야기가 등장한다. “(할머니는) 낡은 집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면서 최상의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24쪽)

-귀족이었던 외할아버지와 평민 출신의 아버지가 ‘7년전쟁’을 두고 각각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편들며 불화하던 모습, 아버지의 공교육에 대한 불신과 종교관 등이 그에게 미친 영향, 연애시나 결혼축시 조시 등을 써주고 돈을 벌던 이야기며, 첫 사랑 소녀(그레첸)와의 이별과 상처, 대학 생활의 권태로움, 독일낭만주의(질풍노도) 문학의 선구자 ‘헤르더’와의 만남, ‘베르테르’에 얽힌 뒷얘기 등도 흥미진진하다.

-짐작컨대 그는 ‘26살 이후’의 자서전 계획이 없었던 듯하다. 이는 그가 책의 4부를 만년(1831년)에 쓴 데서도 엿보인다. 그의 문학이 철저한 체험에 근거한 것이라는 후세 학자들의 평가처럼, 이후의 삶은 작품 속에 충실히 녹여넣었기 때문일 수 있다. 그 체험이 곧 ‘시’(내면의 진실)와 체험적 ‘진실’일 것이다.(최윤필 기자)

파이낸셜뉴스(06. 02. 01) 괴테가 말하는 ‘괴테 이야기’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며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고 또한 나의 삶에서 후회로 남는 것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기 삶의 어느 일정한 시점이 되면 가던 길을 멈추고 한번쯤은 자기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게 되고 자기 내면과 조용히 대화를 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살아온 날의 회한과 반성은 찻잔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다 사라져 버리는 김과 마찬가지이지만 작업을 하는 자의 회고는 자기의 독특한 방법과 형식을 통해 세상에 남겨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것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자서전’이고 위대한 사람의 자기 회상은 누구나 한번 경험해 보고 싶어 한다.

-이번에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의 자서전적 소설인 <시와 진실>(윤용호 옮김)이 완역되어 출간되었다. 괴테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할 필요도 없이 <파우스트>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의 작품을 통해 이미 국내에도 잘 알려진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문호다. <시와 진실>은 작자의 나이 예순이 되던 해에 쓰기 시작하여 3/4은 몇 년 후에 출간되었지만 마지막 부분은 죽기 일 년 전에 써내려가 사후에 빛을 보게 되었다.

 

 

 

 

-<시와 진실>은 괴테의 자서전일 뿐만 아니라 소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자서전을 염두에 두고 읽다보면 소설로 읽히고, 소설로 읽다보면 자서전의 골격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이 작품을 ‘자서전적 소설’이라고 명명하는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이 작품이 200여 년 전에 한 독일작가에 의해 시작된 현대적 의미의 자서전이라는 점에 있다. 뿐만 아니라 괴테 문학 전반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욕구가 발동하는 독자에게는 저자와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작가 개인의 주변상황뿐만 아니라 작가가 ‘하려고 했고 해야만 했던’ 문학 전반에 관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괴테는 “작품들이 확고한 교양의 정도가 빛을 발하고 있으며, 도덕과 미학의 원리와 신념이 어느 정도 들어있기는 하지만 작품을 연대순으로 배열하고 작품의 소재가 되었던 생활환경과 감정상태, 그리고 영향을 끼쳤던 실례들을 일정한 연관 속에서 제시해 주었으면 한다”는 한 친구의 편지 한통이 <시와 진실>을 집필하게 된 동기라고 밝히고 있다. “만일에 위대한 작가가 이런 수고를 해준다면, 보다 넓은 범위의 사람들에게도 편리하고 유익한 그 무엇이 나오게 될 것이고 자신에게 애착을 느끼는 사람들과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친구는 부탁하고 있다.

-괴테는 원래 책의 제목을 <진실과 시>로 정했다가 어조상 마음에 들지 않아 <시와 진실>로 바꾸었다고 밝히고 있다. 머리말의 ‘나의 인생에서. 시와 진실’이라는 제목이 보여 주듯이 괴테는 자기가 살아온 개별적인 상황을 진실로 설정했고 평생의 문학적 작업과 결과를 시로 서술했다. 총 4부20책으로 구성되어 있는 ‘시와 진실’은 제1부는 ‘벌 없는 교육은 없다’, 제2부는 ‘젊은 시절에 소망했던 것은 노년에 풍족히 이루어진다’, 제3부는 ‘나무들은 하늘까지 자라지 않도록 되어있다’, 제4부는 ‘신을 제외하고는 신에 맞설 자 없다’를 제목으로 하고 있다. 이 번역본을 읽은 독자들은 이 번역서가 국내와 외국에서 정통 코스를 밟은 한 독문학 학문세대 및 번역세대에 의해 완역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서장원 고려대 연구교수)

06. 08. 11.

P.S. '괴테가 말하는 괴테'란 제목으로 놓칠 수 없는 책은 에커만과의 만년의 대화록 <괴테와의 대화>(푸른숲, 2000)이다. 이 책 또한 국내에 여러 판본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현재 남아있는 건 푸른숲본이 전부인 듯하다. 

 

 

 

 

 

한편, 내가 갖고 있는 박스도서 가운데 두툼한 괴테 자서전이 <시와 진실>인지 <대화>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국역본이 더 출간됐다). 그나마 기억하는 건 이 <대화>의 러시아어본을 재작년 모스크바에서 저렴하게 구입한 사실이다(아래는 러시아판 <대화>와 <시와 진실>). 언제나 손에 들게 될는지는 기약할 수 없지만...

Эккерман И.П. Разговоры с ГетеИоганн Вольфганг Гете Поэзия и правда. Из моей жизн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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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커만의 중에서
    from 하민혁의 민주통신 2009-03-03 01:3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1. 세상 사람들은 나를 특별한 행운아라고 말한다. 나 역시 거기에 이의를 달 생각은 없다. 지나온 행로를 불평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고난과 노력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다. 75년 동안의 내 삶을 통해 진정으로 즐거웠던 때는 단 한 달도 없었다. 이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 나를 지탱하게 했던 것은 바위를 끊임없이 굴려서 계속하여 밀어 올리려는 시도였다. 1. 우수한 사람이면서도 무슨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