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새로나온 책들을 검색하다가 괴테(1749-1832)의 <서동시집>(문학과지성사, 2006) 완역본이 출간된 걸 알게 됐다. 지난 2002년에도 <서동시집>(시와진실)이라고 출간된 적이 있지만, 분량으로 보아 완역은 아니었던 듯싶다. 마땅한 리뷰가 올라오길 기다렸는데, 마침 서울신문의 리뷰 기사가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페이퍼의 제목을 '괴테와 하이젠베르크'라고 단 것은 <서동시집>이 연상시켜주는 이름이 단연 <부분과 전체>의 저자 하이젠베르크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학부시절에 읽은 이 책에서 유일하게, 그리고 가장 인상 깊게 기억에 남아있는 대목은 젊은 시절에 그가 독일의 휴양지에서 양자역학에 몰두하고 있었을 즈음에 대한 회상이었다. "잠은 조금도 자지 않았다. 하루의 삼분의 일은 양자역학 계산을 했고 삼분의 일은 바위에 기어올라갔으며, 삼분의 일은 괴테의 <서동시집>을 외웠다."

이 '전설적인'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믿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잠은 조금도 자지 않았다!), 여하튼 이 물리학자의 고백이 그러하며 <서동시집>에 대한 나의 인상은  이 대목에서 결정되었다. 해서 올해 출간된 새 <괴테 자서전>과 새 번역 <파우스트>들과 함께 <서동시집>의 출간은 '한국어 괴테'의 귀중한 성과이면서 개인적인 반가움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이젠베르크식으로 이 책을 읽는 건 곤란하겠지만(어느 바위산을 기어올라야 하나?).

소개에 따르면, <서동시집>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주창한 '세계 문학'의 이념이 고스란히 녹아들어간 시집"으로서 "헤겔이 '괴테의 저작 가운데 가장 완숙한 경지에 이른 작품'으로 꼽은 바 있다. 괴테의 '세계 문학' 이념은 각 민족이 지니고 있는 개별성을 존중함과 동시에 인류의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세계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데 의의를 둔다. <서동 시집>은 괴테가 아랍 세계와 서구에 큰 영향을 끼친 페르시아의 대시인 하피스에게 보내는 시적 응답이라 할 수 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의 극심한 분열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괴테는 당시 독일어로 번역, 출간된 하피스의 시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고, 거기에 창조적으로 대응하고 싶은 강한 창작 의욕을 느꼈던 것."

"괴테는 시의 주제와 형식면에서 하피스를 모방하면서도 새로운 형식 실험을 시도한다. 이러한 태도에는 새로운 것과 낯선 것을 받아들여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내적 조화를 만들어냄으로써 민족 간의 이해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창조적 정신이 살아 숨 쉰다. 모두 239편의 시를 12개의 시편(Buch)에 나누어 묶은 연작시 형식이다. 번역은 한국괴테학회 산하 단체인 괴테 독회 회원 17명이 공동으로 작업했다. 6년에 걸친 토론을 통해 번역상의 오류를 수정하고, 최종적으로 대표 번역자인 한국괴테학회 회장 안문영 교수가 통일된 문체로 조율하였다." 하여, 노작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아래는 리뷰 기사이다. 이번에 알게 된 건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의 존재인데, 사실 '서동시집'을 영어로 검색해보면 대부분의 이미지는 이 오케스트라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바렌보임과 사이드의 대담집 <평행과 역설>(생각의나무, 2003)에 관련내용이 나와있을지 모르겠다.

 

서울신문(06. 11. 10) 괴테, 순수한 동방을 노래했다

“북쪽, 서쪽, 남쪽이 산산조각 나고/왕좌들은 부서져 왕국마다 떨고 있으니/달아나라 그대여, 순수한 동방에서/옛 족장들의 숨결을 맛보아라/사랑과 술과 노래 더불어/키저의 샘물이 그대를 젊게 하리니.” 독일의 문호괴테가 쓴 ‘헤지르’라는 시의 한 대목이다. 헤지르는 마호메트가 기원 622년 고향 메카로부터 메디나로 이주해 이슬람의 기원을 세운 사건을 가리키는 아랍어 ‘헤지라’를 프랑스어로 옮긴 것. 괴테는 아랍 문화가 프랑스를 통해 유입됐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프랑스어 번역을 택했다.

괴테는 일찍이 ‘세계문학’을 주창했다. 문학이란 모름지기 각 민족이 지닌 개별성을 존중하는 한편 인류의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세계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데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괴테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글을 썼다.‘서동(西東) 시집’(안문영 등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은 괴테의 그런 문학관이 그대로 녹아 있는 세계문학의 모델이 될 만한 작품이다.

괴테는 근대 유럽이 마지막으로 낳은 ‘보편적 천재’, 근대 최고의 교양인으로 불린다. 시·소설·희곡 등 문학 장르에서 뿐만 아니라 해부학·광학·식물학·광물학 등 자연과학 부문에서도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게르만적이고 현학적인 자만에서 벗어나 세계시민으로서의 시각을 얻기 위해 괴테는 이슬람 세계와 중국은 물론, 한국에 대해서도 적잖은 관심을 기울였다.

‘서동 시집’은 괴테가 중세 페르시아의 시인 하피스의 시들을 읽고 감흥받아 지은 연작시 형태의 시집이다. 239편의 시가 12개의 시편으로 나뉘어 묶였다.‘서동’은 유럽과 동양의 세계를 아우른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말. 괴테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국수적인 민족주의로 인해 유럽이 극심한 분열에 빠진 데 대해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 때 읽은 하피스의 순결한 시들은 괴테로 하여금 내면의 원기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할 만큼 충분히 감동적인 것이었다. 노시인의 눈에 비친 동방 세계는 신과 족장의 권위를 경건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자유분방한 시인의 노래를 사랑할 줄 아는 순수의 땅 그 자체였다.‘서동 시집’은 그처럼 젊고 순수한 동방에 대한 찬가다.

“존경하는 마음으로/그대의 질문에 답하노라/내가 복 받은 기억력 덕분에/‘코란’이 명한 유언을/고스란히 간직하고/경건한 자세를 지녀/평범한 일상의 해악이/나뿐만 아니라/선지자들의 말씀과 그 씨앗을/소중히 여기는 자들을 건드리지 못하므로/내게 그런 이름을 주었노라.”(‘하피스’중에서) 아랍어로 하피스는 ‘코란’을 완전히 외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새롭고 낯선 문화를 받아들여 내적인 조화를 이룩하고 민족간의 이해를 도모하려는 드넓은 포용의 정신이 전편에 넘쳐 흐른다.

괴테는 동방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마르코폴로를 비롯해 하피스의 시를 번역한 폰 하머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왜곡된’ 동방수용사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괴테의 이 같은 깨어 있는 의식은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1998년 유대 출신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석학 에드워드 사이드가 유대·아랍 민족간의 화합을 위해 만든 오케스트라의 이름을 ‘서동 시집 오케스트라’라고 지은 것도 그 한 예로 들 수 있다. 책에는 괴테가 ‘서동 시집’에 실린 시들의 내용과 문체가 당시 독자들에게 낯설게 비칠 것을 염려해 지은 ‘서동 시집의 더 나은 이해를 위한 메모와 논고’도 함께 실려 있어 관심을 모은다.(김종면 기자)

06.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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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OKE 2006-11-13 22:51   좋아요 0 | URL
이번에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책과 달리 요전에 나왔던 시와 진실판은 괴테가 직접 쓴 '[서동시집]의 더 나은 이해를 위한 메모와 논고'가 빠진 채 시만 번역되어있습니다. 번역은 의역과 직역의 차이인지, 개인번역과 공동번역의 차이인지, 잘 모르겠지만 시와 진실판이 부드럽고 훨씬 시다운 번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쟈 2006-11-13 23:37   좋아요 0 | URL
말씀대로라면, 좀 유감스러운 일인데요. 더 나중에 출간된 책에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말입니다. 한국괴테학회의 역량이 반영된 책이라고 해서 기대를 갖고 있었는데요...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제이북스, 2006)의 새 번역본이 출간됐다. 서양 고전철학 전공자들이 전력투구해서 낸 역저인데, 지난 월요일에 교보에 들렀다가 책이 나온 걸 보고서 바로 손에 들었다(물론 약간의 망설임은 있었다. 최명관 교수 번역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갖고 있기 때문에). 번역에 대해서 신뢰감을 갖게 되는 건 역자들 못지 않게 교열자들의 손도 많이 간 번역서이기 때문인데, 그건 지난 여름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이제이북스, 2006)을 펴낸 이 출판사 전응주 사장의 인터뷰 기사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어려운 개념이 많다보니 철학서 번역은 특히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다. 대여섯번 교열을 보는 건 기본. <헤겔>은 교열과 편집 작업에만 반 년 가까이 걸렸다. 전대표가 직접 교열을 보는 경우도 많다. 그는 '지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원전 번역물을 영어와 독일어 번역을 옆에 두고 비교하면서 보고 있다'면서 '그냥 대충 하면 손해보지 않고 갈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전대표는 희랍어·라틴어 원본을 번역할 수 있는 세대가 활동하고 있는 지금 관련 철학서를 번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만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낼 예정이고, 플라톤 전집도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바로 그 책이 출간된 것이다. 

 

 

 

 

아마도 주말의 서평란들에서 이 신간에 대한 리뷰들을 읽어볼 수 있을 텐데, 여기서는 그냥 이태수 교수(역자들의 스승이기도 하다)의 해제 정도를 읽어보는 걸로 오리엔테이션을 대신하도록 한다(이 페이퍼 또한 '최근에 나온 책들' '작업실'에 올라와 있었는데 따로 분가시킨다).

동아일보(05. 07. 27)[서울대권장도서 100권](98) 니코마코스 윤리학

인간이 영위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은 어떤 것일까? 행복을 누리는 삶이라고 한다면 일단은 수긍할 수 있겠다. 그러나 행복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해두지 않는 한 아직 알맹이 있는 답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선의 삶을 보장해주는 행복의 실질적인 내용에 대한 질문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가 제시한 답은 인간에게 주어진 역량을 최대한 계발하여 발휘할 수 있게끔 삶을 꾸민다면 그것이 곧 진정 행복한, 즉 최선의 삶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답 역시 인간에게 주어진 역량에 관한 설명이 따라주어야 만족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다. 바로 그에 관한 설명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핵심부분을 이루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관건이 되는 역량을 크게 지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 두 종류로 나누어 상론한다. 그는 삶의 방식으로서는 지적인 역량을 발휘하여 진리탐구에 몰두하는 관조적인 삶을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 때문에 그의 윤리관은 너무 주지(主知)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 비판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실천적 역량을 지적인 것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취급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실천적 역량이란 주어진 상황에 대하여 특정한 정서적 반응을 보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성향으로서 흔히 말하는 덕(德)과 같은 것이다. 가령 의로움, 너그러움, 우애, 용기, 절제 등이 그 예다. 이런 덕목이 결핍된 인간은 지적인 역량을 갖추더라도 심각하게 잘못된 인생을 살 가능성이 크다. 이 점을 잘알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실상 실천적인 덕에 관한 논의에 훨씬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아주 세심한 정성을 쏟는다.

각 덕목에 관한 그의 논의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논변의 정교함과 깊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철학적 분석의 뛰어난 모범으로 통용되고 있다. 각론뿐 아니라 덕 일반에 관한 총론적 논의에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 많다. 가령 정서적인 반응과 관련된 측면에서는 덕이 중용(中庸)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동양사상사에도 비슷한 이론이 있기에 비교연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대목이 특히 흥미로울 것이다.

또한 덕은 정서적 반응을 넘어 결국은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덕의 논의는 행위이론을 포함하게 되는데, 이 대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여는 기념비적인 것이다. 행위 일반의 구조와 그중에서도 윤리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행위의 특성에 관하여 그가 시도한 분석은 최초의 본격적인 행위이론이라 할 만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어떤 기발한 윤리교설을 창안해내서 열렬한 신봉자를 끌어 모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윤리문제에 관한 학문적인 논의의 기반이 되는 개념 틀을 차분하게 정리해서 마련해놓은 것이 그의 가장 큰 공로라고 할 수 있다. 그 개념 틀은 적어도 이 책이 쓰인 기원전 4세기부터 계속 서양 윤리학의 사상적 골격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서양 윤리사상사의 큰 흐름을 그 저류에까지 깊이 탐사하고자 하는 지적인 호기심을 가진 독자는 이 책을 재독, 삼독하면서 저자와 토론하기에 결코 싫증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번역으로는 최명관 역(서광사)을 추천한다.(이태수 서울대 교수 철학과)

이 해제의 마지막 멘트만을 교정하면 되겠다. 이제 번역으로는 '이제이북스판'을 추천한다.

06. 11. 08.

P.S.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판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악트출판사, 2004). 모스크바에서 6,000원을 주고 산 책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대윤리학>이 합본돼 있고 100쪽 정도의 주석이 붙어 있다. 한국어판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긴 하지만 최소한 가격에 있어서는 러시아어판과 비교할 수 없겠다. 러시아의 서점들의 문득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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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OKE 2006-11-08 22:26   좋아요 0 | URL
플라톤 전집도 곧 나오겠군요. 기대중입니다.

로쟈 2006-11-09 00:48   좋아요 0 | URL
분량상 '전집'은 아마도 시간이 좀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저도 기대를 갖습니다...

깜짝이야 2006-11-11 00:15   좋아요 0 | URL
5년으로 계획을 잡았으나 더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지치지 않는다면, 더디 가도 바로 갈 수 있겠지요.

로쟈 2006-11-11 00:23   좋아요 0 | URL
그래도 키케로보다는 양반이군요. 키케로 전집 발간은 50년을 잡고 있던데요...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철학자 드니 디드로(1713-1784)의 <달랑베르의 꿈>(한길사, 2006)이 출간됐다. 지난주의 일이고, 최근에 나온 책들 '작업실'에 올라와 있었지만 차일피일 미뤄지는 바람에 그냥 따로 자리를 만든다. 책의 '명성'만을 알고 있는 탓에 일단은 전문가 서평을 읽어보는 걸로 대신하면서.

 

 

 

 

아직 <달랑베르의 꿈>은 구입하지 못했지만, 생각해보면 번역/소개된 디드로의 책들은 <회화론>(영남대출판부, 2004)를 제외하면 다 갖고 있는 듯하다. 최근에 황현산 교수가 번역한 <라모의 조카>(고려대출판부, 2006)가 재출간됐는데, 물론 그것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래봐야 몇 권 되지 않는다. <운명론자 자크>(현대소설사, 1992)로 시작해서(밀란 쿤데라가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다) <수녀>(장원, 1993)와 <라모의 조카>(세계사, 1998)를 거쳐서 <배우에 관한 역설>(문학과지성사, 2001)을 지나 <부갱빌 여행기 보유>(도서출판 숲, 2003)에 이르는 여정이니까 보유(부록)를 포함한다고 해도 얼마 되지 않는다.

이 중 어떤 책은 불어본과 영역본도 갖고 있고, 재작년에 구입한 러시아어본 선집 한권도 소장도서이다. 그 선집은 짝이 맞지 않는 책이지만 디드로의 대표작들은 거의 다 들어가 있다. <달랑베르의 꿈>을 포함해서. 분량이 얼마 되지 않아 좀 의아했는데, 서평을 읽어보니까 원래는 3부작으로 구성된 책이고 국역본은 그걸 옮긴 것이다.

교수신문(06. 11. 05)  感性에 대한 철학...꿈같은 서술 매력

중세 신의 품안에서 아직 미지각의 상태로 잠들어 있는 인간들에게 이성의 빛을 던져주고, 구질서의 편견이나 미망에서 빠져나오게 하기 위해 계몽주의의 완결판인 ‘백과사전’의 편찬을 주도적으로 총괄했던 디드로. 기존의 사고체계를 혁신하고 새로운 질서를 기획했던 이 백과사전파 학자는 또 개인적으로 생물과 화학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특히 유물론자로서 현상의 총체적 이해, 현상들의 내적 연관성,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 새로운 우주관을 완성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면서 저작물을 생산했는데, 그 가장 중요한 결실이 바로 ‘달랑베르의 꿈’(1769)이다.

이 책은 선적인 명확한 구성을 갖춘 3부작(1부 달랑베르와 디드로의 대담, 2부 달랑베르의 꿈, 3부 대담후기)으로 이뤄진, 생명의 기원과 우주 생성론을 다룬 철학 텍스트다. 디드로는 이 텍스트에서 물질의 보편적 속성을 감성으로 보고, 동양학의 氣論이 그런 것처럼, 그 감성의 聚散을 통해 우주만물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독자들은 텍스트를 읽으면 마치 최한기의 ‘神氣通’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처럼 육체와 영혼의 분리나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가치를 부여하길 거부함으로써 디드로는 관념론적 철학의 논제를 극복하고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배제하며, 우주에 대주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그런데 ‘달랑베르의 꿈’은 동일한 주제를 다룬 당대의 다른 철학 텍스트와 비교해보면, 아주 특이한 형식으로 서술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특이함은 대화, 꿈, 은유와 같은 문학적 형식에서 찾을 수 있다. 대화라는 문학적 형식은, 디드로가 생산한 작품들의 전매특허이듯이, 이 텍스트 속에서도 철저히 라이트모티프(leitmotif) 역할을 하고 있다. 텍스트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는 대화는, 모든 대화자들이 하나의 주장을 이뤄가는 과정에 참여하고, 그 과정에서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소크라테스적 대화다. 이처럼 대화는, 자칫 단조롭고 따분하며 현학적이 쉬운 철학적 담론에 일상 언어가 갖는 생동감과 현실감과 자연스러움을 불어넣어, 力說이 逆說이 되지 않도록 하는 문학적 형식이 된다. 그리고 텍스트 속에 꿈의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디드로는 일상적인 담론에서는 받아들이지 못할 사실들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꿈이라는 것 자체가 단순한 인식과 이성적 분석을 넘어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랑베르의 꿈’에서 은유는, 다소 역설적이긴 하나, 철학적 개념을 전달하는 가장 문학적인 형식이 된다. 한 단어나 이미지, 개념의 형태가 원래의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로 이동할 때마다 유사성에 근거한 은유가 등장한다. 무수히 많은 작은 개체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벌 송이나 인간의 사고 작용과 현의 공명 현상을 비유하는 클라브생, 감각과 의식의 문제를 다루는 거미의 이미지는 추상적인 것을 물질화하고,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며, 불투명한 것을 자명한 것으로 만드는 효과를 자아낸다. ‘달랑베르의 꿈’은 이처럼 철학적 내용과 문학적 형식이 어우러지는 행복한 만남의 공간이다.

'달랑베르의 꿈’은 이번에 처음 번역됐다. 이 책의 번역작업은 생명의 기원이나 감각작용, 사고작용 등에 대한 과학적 증명이 이뤄지지 않았던 18세기의 사고방식과 표현을 현대적으로 옮겨야 하는 까다로운 작업이다. 텍스트에서 장황하게 우회적으로 설명된 사실들을 21세기의 독자들은 이미 알고, 그래서 그들은 일종의 선입견을 갖고 소위 ‘옛날’의 표현들을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事象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을 문학적 우회를 통해 표현한 작품의 번역은 특히 용어의 정확성과 표현의 매끄러움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또한 생물학적 유물론을 대화의 틀 속에 담아낸 이 작품의 경우, 개별적인 대화의 분위기와 개념적 이해가 어우러진 특징을 살려내야 하고, 당시 학계와 문단을 풍미하던 이론들과 사교계의 에피소드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는 이중의 어려움이 있다. 더불어 디드로 특유의 문체, 즉 확장 지향적이고 즉흥적인, 수다스런 분위기를 살려내야 하는 부담이 가중된다. 이런 컨텍스트의 특징들을 옮긴이가 충분히 살려 내려 노력했지만 아주 만족스럽진 않다. 하지만 현재 출판계의 번역상황을 감안한다면 18세기 작품이 출판됐다는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 더욱이 소위 장르혼합이 이뤄진 ‘생경하고 어려운’ 작품의 경우에는 그 의미가 배가될 것이다.(문재은/  한국외대·불문학) 

06. 11.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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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bi 2006-11-08 15:59   좋아요 0 | URL
수년전에 New School 철학과에서 발행하고 Charles T. Wolfe가 편집한 저널 하나 구입한적이 있었습니다. <유물론의 부활>이란 거창한 제목이었지요?? 펼쳐보니 디드로를 중심으로 논문들이 구성되었더군요. 네그리의 <혁명의 시간>의 한부분도 마지막에 실려있었죠...네그리가 그의 <혁명의 시간> 서두에서 언급한 친구가 바로 디드로 전문가인 Charles T. Wolfe죠. 물론 저는 디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에 그냥 ^^ 사실 Charles T. Wolfe는 들뢰즈,가따리가 만든 저널 Chimeres에 90년대 초반부터 글을 쓴 유일한 영어권 학자일 겁니다. 그의 책 Monsters And Philosophy 도 흥미롭고요.. 며칠전 <달랑베르의 꿈>을 구입하고 그 저널을 다시 뒤적이다보니, 맨 앞 논문에 프랑수와 다고네(당신의 아내는 왜 자살할 수밖에 없을까?)의 글이 있더군요

로쟈 2006-11-09 00:45   좋아요 0 | URL
흥미로운 정보 감사합니다. Monsters And Philosophy란 책은 관심을 끄네요.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1942- )과 관련한 최근 소식은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한때 '학대받는 남편'이란 소문이 떠돌기도 했었는데 결국은 그가 두번째 아내와도 이혼할 거라는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막이야 호사가들의 관심거리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이혼' 등의 어휘는 호킹이란 이름과는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역시나 '우주'이고 '시간의 역사'이지 않겠는가. 올초에 그가 쓴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까치글방, 2006)이 출간됐었는데, 한해가 가기 전에 그가 엮어서 해설을 쓴 책 한권이 더 출간됐다.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까치글방, 2006)이 그것이다.

 

 

 

 

지금은 새 판본들이 출간돼 있지만, 옛날 학부시절에 읽었던 <시간의 역사>(삼성이데아, 1989)가 기억에 떠오른다(그는 칼 세이건 이후의 '스타 과학자'였다). 그 시절에 나는 52킬로까지 체중이 떨어지기도 해서 지인들이 '스티븐 호킹'이라고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었다. 하긴 수학에만 자신이 있었더라면 '사람으로 붐비는' 인문학 대신에(그래서 언제나 멜랑콜리하다) '별들로 반짝이는' 천문학을 공부했을지도 몰랐지만(물론 천문학자의 지상에서의 삶이란 것도 '학대받는 남편' 언저리라니까 좀 서글프긴 하다). 

몇년 전에 <호두껍질 속의 우주>(까치글방, 2001)를 고가에 구입해서 부듯해한 적이 있는데, 둘러보니 또 박스에 들어가 있는 모양이다(박스에 들어가 있는 우주!). <거의 모든 것의 역사>도 같은 운명이고(박스에 들어가 있는 역사!). 돈푼깨나 없는 인문학자로선 천문학책을 넘겨보는 것도 사치인 모양이다. 그냥 소개기사나 읽어두도록 한다...  

한겨레(06. 11. 03) 스티븐 호킹이 재구성한 '거인들의 생애'

1684년 8월 아이작 뉴턴은 영국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혜성으로 유명한)의 느닷없는 방문을 받았다. 직전에 핼리와 동료과학자들은 ‘행성들이 타원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이유’를 알아내는 내기를 했다. 도움을 청하려 뉴턴을 찾은 핼리는 역제곱 법칙이 해법이라고 짐작하고서, 그에게 “만약 태양에 의한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면 행성의 궤도가 어떤 모양이 될 것 같으냐”고 물었다. 뉴턴은 즉시 “타원이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뉴턴은 그러나 감탄해 마지 않던 핼리에게 자신이 계산했던 문서를 찾아주지 못했다. 그는 대신 다시 계산을 해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뉴턴은 이후 2년 동안 칩거하면서 걸작 <프린키피아> 곧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저술했다.(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서)

지동설, 타원 궤도의 법칙, 만유인력의 법칙, E=mc2, 상대성 이론…. 과학교과서는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케플러, 뉴턴, 아인슈타인 등 근대 물리학의 대과학자들을 ‘기호’로 전달해준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내가 더 멀리 보아왔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등의 경구와 짧은 일화가 장식으로 곁들여지기도 하지만, 교과서에서 이들의 과학적 업적과 삶의 궤적을 동시에 그려내는 일은 너무도 뛰어난 상상력을 요구한다.



20세기 가장 뛰어난 물리학자로 꼽히는 스티븐 호킹이 편저자로 돼 있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 물리학과 천문학의 위대한 업적들>(까치 펴냄)은 이들 5명의 과학자의 생애와 대표적 저술을 담고 있다. 책을 옮긴 김동광 박사(과학사회학)는 “직접 원전을 접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당시 연구가 이뤄지던 맥락과 함께 거인들이 쓴 글을 직접 읽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괴테가 ‘인간 정신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평가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 <두 주요 세계 체계-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대화>로 종신형을 받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마지막 역작 <두 새로운 과학에 대한 대화>, 자신의 수태 기간을 분 단위까지 계산할 정도로 절대적 엄밀함을 추구하면서 헌신적 삶은 산 요하네스 케플러의 <우주의 조화>(제5권), 뉴턴의 <프린키피아>, 특수 상대성 이론이 담긴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 역학에 대하여> 등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논문 5편이 실려 있다.(이근영 기자)

06. 1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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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6-11-03 09:13   좋아요 0 | URL
이런, 기사 마지막줄이 감흥을 깨네요.

클레어 2006-11-08 09:20   좋아요 0 | URL
예전 기사에 따르면 호킹박사는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대학자와 가정폭력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볼 수 있지만 장애인과 간병 간호사로 인연을 맺었던 호킹부부의 관계를 보면 대학자란 타이틀이 가정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렇네요.

로쟈 2006-11-08 11:46   좋아요 0 | URL
네, 그런 기사들이 떴었지요. 본문에 적은 대로 천체물리학자라 하더라도 지상의 '육체'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한 것이죠...
 

이번주 신간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 <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동아시아, 2006)이다. 지난번 <자유론>(아카넷, 2006)이 출간되었을 때 '이사야 벌린과 우파적 교양'이란 제목으로 관련 페이퍼를 적으면서 언론리뷰들을 옮겨놓은 적이 있었는데, 이사야 벌린의 1주기를 맞이하여 출간됐다는 이 책에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할 리뷰가 올라와 있지 않다.

 

 

 

 

한겨레의 최재봉 기자가 쓴 소개 정도가 예외적인데,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은 영국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자 이사야 벌린(1909~1997)의 1주기에 맞추어 열린 추모 학술회의의 발표문과 토론 내용을 엮은 책이다. ‘고슴도치와 여우’ ‘다원주의’ ‘민족주의와 이스라엘’ 세 가지 주제로 나뉘어 영국과 미국 등의 저명한 학자들이 참여해 심도 높은 논의를 벌였다."

 

 

 

 

그 세 가지 주제를 편집한 이들이 각각 마크 릴라, 로널드 드워킨, 로버트 실버스이다. 실버스는 생소하지만(<숨겨진 과학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는 실버스가 동일인인지 동명이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마크 릴라와 드워킨의 경우는 이미 다른 저서들이 소개돼 있다(특히나 로널드 드워킨은 존 롤스 이후의 가장 대표적인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로 이름이 높다). 이들 외에도 찰스 테일러, 마이클 왈쩌 같은 걸출한 철학자들이 저자로 참여하고 있다.

리뷰의 내용을 마저 옮기면, "고슴도치와 여우’란 벌린의 논문에서 따온 개념으로, 거칠게 구분하자면 고슴도치와 여우는 각각 일원론과 다원주의에 해당한다. 소극적 자유의 개념을 강조한 벌린은 물론 다원론적 여우의 손을 들었다. 벌린의 생전에도 그러했지만 학술회의에서도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다원주의를 지향한 벌린이 그 자신 유대인으로서 유대 민족주의인 시온주의와 이스라엘에 대해 애착을 보였다는 점이었다. 이와 관련해 그의 지인이기도 했던 아비샤이 마갈릿 예루살렘 헤브루대 교수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로 남아야 하고, 이스라엘 내 무슬림 성지들은 무슬림 당국의 치외법권 아래 두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유엔은 무력을 통해서라도 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벌린의 마지막 편지를 공개했다."

이사야 벌린의 최초의 저작이 <칼 마르크스>(1939, 1978 4판)이며,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대한 에세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고슴도치와 여우>(1953)는 그의 두번째 책이다(얇은 책이다). 고슴도치와 여우가 각각 일원론과 다원론을 상징한다고 돼 있는데, 벌린이 비유하고 있는 작가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이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도 그는 높이 평가하지만 그가 선호하는 작가는 톨스토이이며,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아마도 투르게네프일 것이다. 그리고 이 투르게네프와 마르크스는 생몰연대(1818-1883)가 동일하다. 그런 우연의 일치 때문만은 아니지만(사실 벌린이 <칼 마르크스>를 쓰게 된 계기도 아주 우연적이다), 나는 이사야 벌린을 이해하고자 할 때 핵심적인 키워드 두 가지는 '마르크스'와 '투르게네프'가 아닌가 싶다.

사실 러시아 태생(리가 출신이다)의 유태인이기도 하지만 벌린은 러시아 문학과 사상에 정통한 철학자이다. 그리고 그걸 확인시켜주는 저작이 <러시아 사상가들>(1978)이다(책 표지에 실린 이들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게르첸과  벨린스키, 그리고 투르게네프이다). 벌린의 지적 유산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 나는 이들 작가/사상가들에 대한 그의 평가와 그가 받은 영향들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더불어 바라는 바는 이 책 또한 번역/소개되는 것이다.  

얼마전 책장을 정리하다가 브라이언 매기가 편집한 <현대철학의 쟁점들은 무엇인가: 거장들과의 대화>(심설당, 1985/1989)를 들춰볼 기회가 있었는데, 전체 15장(15명의 철학자들과의 대화)으로 구성된 이 책의 제1장 '철학이란 무엇인가'가 바로 이사야 벌린 경과의 대화이다('아이사야 벌린 경'이라고 표기돼 있다). 철학이 무엇을 하는 것이냐란 질문에 대해 "합리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신념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가정들에 대해 비판적인 검색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철학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벌린은 몇 가지 사례를 예로 든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바로 일상적인 견해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진지한 노력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모든 위대한 철학자들은 모두 이와 같은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사례를 위대한 소설이나 희곡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입센의 희곡의 주인공과 투르게네프의 <크리스마스 이브에> 혹은 포스터의 <가장 긴 여행>들에 나오는 주인공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어서 보다 '철학적인' 대담이 오고가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벌린이 입센, 투르게네프, 포스터 등의 작품들을 거명하는 태도이다. 명망있는 철학자이지만 그는 위대한 문학에 대한 존경 또한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하니, 벌린을 읽기 위해서는 적어도 투르게네프 정도는 읽어주는 게 좋겠다. 포스터의 책은 <기나긴 여행>으로 올해 번역돼 나왔지만, 투르게네프의 소설들은 진작에 번역/소개돼 있잖은가. 그러한 기본적 태도가 빠지게 될 경우 <전야> 혹은 <전날밤>이라 소개돼 있는 작품 'On the Eve'를 <크리스마스 이브에>라고 엉뚱하게 옮기게 된다(영역본 제목의 'Eve'는 크리스마스와 전혀 무관하다. 투르게네프의 소설 <전야>(1860)는 결과적으론 러시아 농노해방(1861)의 '전야'를 보여주게 된 작품이다). 문학에 대한 무지는 철학도의 자랑이 아니라 근심이어야 한다.    

 

벌린의 관한 자료와 이미지들을 뒤적거리다 보니까 존 그레이의 <이사야 벌린>(1996) 같은 책도 눈에 띈다. 200쪽이 안되는 분량이기에 입문서로서 유용할 듯싶은데, 영어권에서도 고작 세번째로 출간된 관련 단행본이라고 한다. 이왕 '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을 챙기기 시작한 바에야 이 정도는 금방이라도 소개해줄 필요가 있겠다...

06. 10. 26.

P.S. 벌린의 <고슴도치와 여우>(비전비엔피, 2007)이 최근에 출간됐다. 반가운 일이다. 소개를 옮겨보면, "20세기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사상가이자,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 <낭만주의의 뿌리>등으로 국내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이사야 벌린의 문학평론서. 인간을 '여우형'과 '고슴도치형'으로 구분한 다음에 그것을 바탕으로 톨스토이의 역사관을 분석하고 있다.(...) 벌린의 다른 책들이 그러하듯이, 이 책은 기본적으로 문학평론서지만, 비단 문학적 지식만이 아닌 철학, 역사 등의 다양한 인문학의 지식과 통찰을 얻게해주는, 올바른 의미의 교양서적이다." 그러니, '교양인'이라면 챙겨두어야 할 책이다...

07. 04. 05.

P.S.2. <러시아 사상가>(생각의나무, 2008)도 드디어 출간됐다. '러시아 문학과 사상'에 관한 강의를 맡을 때마다 아쉬웠는데, 이젠 강의 교재로 집어넣어야겠다!.. 

08. 07.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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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사스 2006-10-27 02:00   좋아요 0 | URL
오늘 우연히도 회사에서 <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름은 들어봤다만…'하며 도로 내려놨었는데 이런 '사연'이 있는 철학자였군요. ^^: 재밌게 읽고 사본 한 부를 제 서재에 비치했습니다.

로쟈 2006-10-27 08:43   좋아요 0 | URL
회사가 출판사이신가요? 벌린이 비치돼 있는 걸 보면.^^